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7.내일을 위한 건배
여성과 자유
데모크라시를 자유와 혼동해서는 안 되며, 데모크라시를 사랑하는 것과 자유를 사랑하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자유롭기를 바라지 않는 인간, 자유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이 있으랴? 그러나 데모크라시는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미국의 조상들은 자유를 사랑하며 나라를 세웠다. 그때 데모크라시를 잘 이해하고 있었는지 어떤지는 의문이다. 만약 이해하고 있었다고 해도 아마 개인의 자유라는 의미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데모크라시는 개인의 자유가 아니며, 거의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진실된 데모크라시는 개인의 자유를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집단의 인간은 다수의 결정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참고 견디는 것은 바뀔 때가 온다는 희망과 그것을 위한 조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망과 준비가 민주적인 정부의 큰 지주가 되고 있다. 그것은 인류의 혁명적인 본능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고, 마치 언론의 자유가 개인의 자유에 필요한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을 어떻게 해서라도 말하고 싶을 때 그 사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면, 일하러 다닐 열정이 더욱 커지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데모크라시를 바라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큰 변혁을 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니그로 미국인은 백인종 미국인과 완전히 평등한 위치를 부여받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무지하고 둔감한 마음으로부터 인종적인 차별을 완전히 씻어 버릴 수 있는 평등을 니그로에게 주는 것은 불가능하나, 적어도 정부는 미국인으로서 모든 사람이 상호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우리가 데모크라시를 완전히 지키는 존재라고 한다면, 흑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해야만 할 것이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발견될 경우 그것을 금지하지 안으면 안 된다. 데모크라시에 반하는 것이므로 법률을 위반했다고 선언하지않으면 안 된다. 호텔과 레스토랑과 극장과 교회 등 공중 장소는 피부색이 어떠하든 만인에게 평등하게 자리를 허락해야 한다. 임금도 피부색에 따라 달라지는 일 없이 능력과 기술에 따라 정해져야만 하며, 주택지에 제한을 가하는 규제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피부색이 진한 사람에 대한 이런 편견은 미국 생활가운데 비민주적인 일면을 가장 뚜렷이 드러내고 있는 한 가지 양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가 테모크라시를 유지해 가기 위해 언제라도 싸울 용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아직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우지하기 위해 싸울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 즉 우리 미국의 생활을 보전하기 위해 싸울 용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미국의 생활은 혼란과 모순과 서로 으르렁거림이 뒤섞인 것이다. 때문에 확실한 정의를 내리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생활은 우리의 것이며, 그것을 바꾸어 갈 가능성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우리 국내에서 아직도 이루어야만 할 일이 있고, 우리는 그 일을 알고 있다. 최후에 당도해야 할 모습은 아직 확실하지 않다. 백인 기독교 남성이 우리 나라를 데모크라시의 나라라고 믿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의 주변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가 단순한 독재가로밖에는 인식되지 않는다. 자유로운 영국인은 데모크라시의 빛나는 밝음을 국가의 표정에서 보고 있으나, 빈곤과 압박 가운데 무지와 동족 분열로 밀폐당한 인도인들은 영구에서 그러한 표정을 읽어 내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의 흑인에게는 백인 미국인이 독재자이며, 인도인에게는 영국인이 독재자였으리라. 이 두 국가의 국민으로서, 다른 나라의 일이라면 배격했을 더러운 것을 우리 자신은 갖고 있지 않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가장이 아닐까 그것보다도 더 더러운 것은 위선이다. 그래도 우리는 위기가 닥쳐올 경우 흑인과 인도인도 우리편이 되어 함께 싸워주기를 바라며, 적어도 적이 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희망을 안고 있다. 세상은 변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것이야말로 바로 우리들 속에 있는 데모크라시의 작은 싹일 것이다. 이 어린 싹이 성장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들이 남자나 여자로서 진정한 인간인가, 그렇지 않으면 위선자인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들은 진정한 데모크라시의 씨앗을 성장시키지 않고 그냥 매장해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종자는 성장해 가기도 하고 죽어 버리기도 한다. 또 종자가 없는 땅은 그 잠재능력이 활용되지 않으므로 황폐한 대지가 되어 버린다. 데모크라시가 자라나는 대지는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이요, 거기에서만 데모크라시는 성장해 간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사랑하는 그 개인적인 마음가짐에서 점차로 데모크라시의 신성한 개념을 형성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옳은 일이기도 하다.
그 과정은 간단한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는 자유를 사랑하며 그것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자유를 획득하면 우리들도 역시 마찬가지가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두사람은 서로 얼굴을 응시하며 두 사람 다 자유로워질 수 있을 까? 하고 의심스러워하고 있다. 한 쪽의 자유는 다른 한쪽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건 아닐까? 약자와 강자가 이와 같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다. 독재자의 방법은 약자를 옆으로 밀어붙이고 자기 자신의 자유는 조금도 구속받지 않으면서 마음껏 누리는 격이다. 데모크라시의 방법과 자유를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음을 강자가 인식하고 그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 다른 한 쪽의 자유가 침범당했을 때에는 쌍방에게 최대의 자유를 가져다주며 쌍방의 희생을 최소한도로 줄일 수 있는 포인트를 발견하여, 그것을 정해 둔다. 이 포인트를 데모크라시라고 불러도 좋다. 개개의 사람들은 이러한 포인트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 전체로서는 아직 거기에 도달해 있지 못한. 세계를 보면, 어느 나라에서나 강자가 보다 많은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나라에 따라 그 주장에 정도의 차가 있으며, 어떤 나라는 그것을 바꿀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에서는 바꾸는 것이 허락되어 있으므로 자유의 정도도 변해가지만, 데모크라시의 포인트에는 아직 도달해 있지 않다. 거기에 도달할 의지가 우리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강자도 약자도 거기에 당도하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바꾸어 말하자면 강자는 데모크라시를 확립하는데 필요한 포인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자유를 하향 조정하고 단념해야 하는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지 못하며, 약자는 자유를 혼용할 수 있는 데까지 넓혀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지 못하다.
미국에서의 강자라고 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백인계의 기독교 신자로, 남성과 그 주위의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들이다. 약자라고 할 때에는 여성, 흑인, 유대의 무리이며, 거기에 더하여 경제적으로 압박받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어느 나라에서나 강자와 약자는 각각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어느 나라에서나 강자는 소수의 그룹이요, 약자는 다수이다. 강자는 어디에서나 유리한 점을 하나 더 갖고 있는데, 그것은 약자가 갖고 있지 않은 단결이다. 지배자로서의 민족도 남성도 금력을 휘두르는 자도 강자는 단결한다. 미국처럼 여자가 부의 태반을 소유하고 있는 곳에서 조차도 여자는 그 활용법을 몰라서 남자에게 자신을 기대고 있다. 반면에 약자는 단결을 잘 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약점을 지니고 있는 대부분의 민족은 오합지졸과 같아. 공통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취약성과 무력에 빠져 있을 뿐이다. 이것은 동족 분열에 의해 점차 나타난다. 서로 도우려고는 하지 않고, 홀로 강자에게 대항하거나 아첨하여 자기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고 꾀한다. 그러나 약자야말로 하나로 결합해야만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현재 강자는 그 강함 때문에 데모크라시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고, 약자는 그 약함 때문에 데모크라시의 혜택을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하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미국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지금껏 데모크라시를 누릴 자격에 도달하고 있지 못하다. 남자는 그 강함 때문에, 여자는 그 약함 때문에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남녀 모두 스스로 나아가 중대한 데모크라시의 포인트를 찾아낼 의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쌍방의 자유는 어디에서 합하고, 그 균형은 어디에 있을까를 발견해 냄으로써 진정한 자유가 존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 포인트에 도달하기 위해서 남성은 가장 소중히 여기는 한 가지 것을 단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단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우월한 듯한 얼굴을 하는 것이다. 과학은 성별에 의해 우열을 가릴 만한 근거가 아무 데도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이야 어떻든 인간의 신앙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3살 난 나의 아기가 어느 날 기관차를 꼼짝도 하지 않고 응시하다가 모래상자를 가리켜며 저기서 연기가 난다고 말했다. 연기는 저 기관차 굴뚝에서 나오고 있는 거야 하고 내가 말하자 아가는 크고 맑은 눈을 내 쪽으로 향하고 나는 저 모래상자에서 연기가 나고있는 거라고 생가하고 싶은 걸요 하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아가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했다. 아가는 우리 중에 남성이다. 그러나 데모크라시의 세계에서는 연기는 모래상자에서 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굴뚝에서 나고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믿고자 하는 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성장한 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제 본론으로 되돌아가자. 그러면 그 포인트를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거기에 도달하는 데에는 두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자신 속에 있는 지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이 있으면 진실을 알고 싶다는 소망에 도달할 수가 있다. 또 한가지 방법은 외부로부터 그서을 알게 하는 일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외부로부터 그것을 알게 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여성이 눈을 떠서 데모크라시의 포인트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진실을 알고 싶다는 인간의 지성은 흔한 r서이 아니므로 여성이 진실을 알게 만들려는 노력을 계속해 가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 그것은 데모크라시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여성이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를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현재 갖고 있는 갖가지 특권이다.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지 속에 몰입해 있는 특권, 두뇌를 게으르게 만들고 있는 특권, 최후의 결정권은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 무슨 일에 대해서건 빈틈없이 철저히 생각지 않고 있는 특권, 제 마음대로 하고 변덕스러우며 무책임한 특권, 게으름뱅이의 특권, 모양을 내고 오락을 즐기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는 특권, 일상생활과 분리할 수 없는 세계 문제에서 도피하여 가정 속에 퇴각해서 거기에만 여자로서의 모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특권등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 여자는 자유에 대하 책임을 질 수 있는 어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자유를 바라는 일인데, 미국 여성은 오늘날 그것을 열망하고 있지 않다. 나는 언젠가 중국의 근대여성과 미국의 근대 여성이 주요차이점은 무엇인가요 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 차이는 중국의 근대여성은 자유에 대한 열정에 불타오르고 있지만, 미국의 근대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중국 여성은 집이라는 벽속에서 나갈 자유를 꿈꾸면서 살고 있으며, 무지속에 아사한 듯 살아왔기 때문에 교육에 굶주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자유를 얻었을 때, 그녀들은 이미 그 자유를 넘어 앞서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겨우 얻었을 따름인 자유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중국 여자는 자유는 이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말할까? 아니면 집이라는 벽과 무지 속에 밀어 넣어져 있었던 과거의 생활이 감미로움과 안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처럼 보일 때가 올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절대 그런 때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국 여성에게는 여러 가지 끔찍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변화가 없는 매일의 되풀이, 하찮은 일들이 산더미 처럼 쌓여 있어도 마음의 공허는 결코 채워지지 않았었음을 회상한다. 불평등 아래 눌려 있었으므로 애정 속에서조차도 남자와 평등을 나누지 못했음을 상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회상하게 되는 것은, 인생의 반려인 남자와 함께 동료로서 일에 종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생활속에서 여자가 인간으로서 느끼는 고독한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몇 세기나 자유를 얻기 위해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고, 그녀들은 그것을 회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여성은 다르다. 자유는 특히 불행한 방법으로 주어졌듯이, 크리스마스 트리와 관련하여 하루 동안에 너무 많은 것과 함께 주어지는 격이었다. 리본으로 묶은 많은 선물 중에서 빨간 리본으로 묶은 자유를 건네 받았으며, 많은 선물 가운데에는 은근함과 정중함과 함께 기사도의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고치기 어려운 습관을 붙여주고 말았다. 또 리본은 머리에 달면 천사처럼 보이는 광륜이 부여되었는데, 그것이 너무나 잘 어울려서 한시도 벗어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또 가장 좋은 어머니라는 소릴 들으며 푸른 리본도 받고, 제일 가는 요리사라는 칭찬을 받고, 최고의 우수 여성이라고 해서 어딘가로 여행을 할 수도 있었다. 아름다운 가죽 표지의 책으로 교육을 받을 권리도 부여되고,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차표를 받았으며, 자기 좋을 대로 마음대로 나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여러 가지 특권을 너무나도 많이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속에는 연마되지 않는 돌로서의 다이아몬드, 즉 장식품으로는 꼭 맞지 않는 다만 딱딱하고 고독하고 순수한 다이아몬드가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그녀를 나무라서는 안 되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 그 다이아몬드는 다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도 귀중한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남자와 함께 결혼과 일을 완성할 수 잇는 본질적인 것이었다. 여성들은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그것이 없음을 알아채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없으면 다른 것은 아무 소용이 없고, 자유조차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자가 남성들이나 정부로부터 사랑과 지지를 받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여성의 능력을 완전하게 발달시킨다고는 볼수 없을 것이다. 교육을 받아도 그 목적을 다하기는 불가능하다. 반쯤은 흥미 있는 장난감으로 치부해 두지 않으면 안되는 그 교육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콘테스트에서 가장 좋은 어머니로 뽑힌다 해도,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가장 뛰어난 여자가 될 수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 까 자유의 달콤한 과자를 건네 받은 탓에 그것을 너무 먹어 빵과 버터의 맛에 필적하는 평범한 일에 책임의 맛을 모르게 되었다. 만약 중국 여성이 했던 것처럼 자유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더라면 빵과 버터로 만족하며 충분히 배를 속여넘길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달콤한 과자가 더욱 맛있었을 것이다.
미국 여성은 오늘날에 와서는 옛날로 되돌아가고 싶어하게 되었다. 진정한 자유에서 생기는 책임을 지는 것을 두려워하며 가정이야말로 바로 여자가 있어야 할 장소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요즈음의 가정에 여자가 해야 할 일이 충분히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근대산업은 남자를 집에서 빼앗아 가 하루의 대부분과 일생의 대부분을 떠나 살게 만들었다. 또 근대교육은 아이를 가정에서 빼앗아 갔다. 그럼에도 우리 나라에서는 많은 수의 여성이 가정을 일생의 거소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음식물과 옷과 여가를 탐식하고 있다. 그녀들은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얼마나 바쁜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점심 모임이나 미용실을 가고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는 경우가 그녀들의 바쁜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미국여성은 일반적으로 말하면 자유를 갖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는데, 이는 놀랄 만한 사실이지만 사실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녀들은 가정으로 달아나 있는 것인가? 왜 남성 곁에서 세상 가운데로 달려가고, 일을 하기 위해 전진해 가지 않는 것인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왜 치욕으로 여기며, 이상한 얼굴을 하는 것인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조직은 결혼을 강제하고 있지 않으며, 그 누구도 여자는 결혼해야 한다고 한정하고 있지 않는데도 말이다. 왜 극히 소수의 여성만이 직업인으로 활동하며, 전문적으로 계속 성장해 가려 하지 않고 결혼과 가정을 얻으면 서둘러 직장을 그만두는 것일까? 결혼은 직장에서 물러날 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일에 대한 자극이 되어야 한다. 결혼에 의해 안정된 감정을 가지게 되고, 두뇌는 비로소 일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왜 미국 여성은 중세기적인 이상한 유물을 계승하여 집 바깥에서 일하는 것을 하느님에 대해 바른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며, 나는 가정을 위해 온몸을 바치고 있습니다 라고 만족하기보다 죄의식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답은 광륜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여자들은 그 광륜이 없으면 절대로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지 않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그것이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몸에 달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옛날 남성이 여자에게 광륜을 주고, 이것을 달면 신 같아 보인다고 얘기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들은 여자들이 있어야 할 장소에서 벗어나 있으면 새로운 공격을 받아서 가정 속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 전시의 직장이라든지 극히 종속적인 일 외에는 산업계에서도, 공공의 일이나 정치에서도 여성을 추방하라는 외침이 일기도 한다. 또 우리들 여성은 남자에게 유해할 때가 많아 나라까지 약체화되고 있다고 질책을 받기도 한다. 남자들은 매우 겁쟁이이기도 하다. 여성은 사회생활에 해독을 끼치고 있지 않다고 해도 개선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여성이 참여해도 정치가 잘 되는 것은 아니므로 주제넘게 나서서 날뛸 필요는 없다. 여자는 사무실을 좁게 만드는 방해물이므로 쫓아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등의 소리를 듣게 된다. 이 요란한 목소리는 미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뷔시 정부도 여성을 차별하였다. 패배한 프랑스는 산업계에 고용할 여자의 수에 제한을 두었고, 관청에는 한 사람의 여자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프랑스 여자는 무가치한가? 반대로 그녀들은 각별히 여성의 우위성의 극치에 도달해 있었고, 프랑스 여성이라고 중얼거리기만 해도 부드럽고 매력적인 영상을 모든 사람들이 떠올리게 되었다. 다른 점은 그 영상이 남성에게는 흥분을 하게 만들고, 여성에게서는 약간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뿐이다. 프랑스 여성은 남자에게 일부다처를 허락했다. 그러나 그것은 부인이 남편의 이름과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허락이었다. 프랑스인은 중국인이 중국식으로 한 일을 프랑스식으로 했다. 그러나 중국의 방식이 보다 더 위엄 있는 것이었으며, 여자와 아이에 대해서는 보다 더 정당했고, 남자에게 있어서는 보다 인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여자가 지금껏 치른 일체의 희생도, 매력도, 우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프랑스에서 부인과 애인은 독일의 주부와 마찬가지로 열등한 대우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남성의 연약성과 타락에 대한 책임이 지워졌고, 프랑스의 패배도 여자 탓으로 간주당했다. 그러나 미국 여성은 해외 여성의 곤궁에 분개하기에 앞서 자신들에게 일어난 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텔리 여성은 뭔지 모르게 급격한 변화는 아니지만 몸 주위에 퍼져가는 색다른 분위기를 알아채고 있었다. 피시즘이 외국에서 나타나기까지는 아무도 큰소리로 입에 올리지 않았고, 공공 장소와 권위 있는 인쇄물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여성관의 표현이 오늘날에는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상당히 많은 여성들이 이런 경향이 강해져 위험해지기 전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성적인 방도를 찾아내려 하고 있다. 그러나 여자에 관한 여러 가지 많은 말들 중에는 꽤 많은 진실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성화하면 나라의 기골은 약해진다는 공격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여성화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누구나 연약해진다. 여성화라는 표현은 여자라는 말을 쓰고 있을 뿐이지, 그것이 여성인가 아닌가 하는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남성도 최근에는 여성화되고 있는데, 특히 프랑스에서 전해져 오는 우울한 이야기를 듣자면 남자의 여성화에 놀라게 되는 경우가 많다. 여성화 속에는 무서운 악마의 힘이 있으므로 남성은 여성화를 두려워하며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여성화라는 것은 남성 자신의 연약성이 여자의 육체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전쟁에서는 승리하는 영웅이면서도 한 여성화된 생물에 대해서는 지고 마는 수많은 남성의 비극으로 가득차 있다. 왜냐하면 그 여자에게 이기는 것은 남자의 속 깊은 곳에 둥우리를 짓고 서식하고있는 큰 적인 자신의 연약성에 이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난날 나치의 비밀은 여자에 대한 난공불락의 강함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