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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47 호
단기 4340. 8. 20 (음력 7. 0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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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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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회 한국산악문학상 작품 공모
산악전문지 월간 「사람과 산」에서 제 13회 한국산악문학상 작품을 공모합니다.
응모 부문 1. 시 (3편 이상) - 당선작 상금 80만원 및 상패 2. 단편 소설(원고지 100매 이내) - 당선작 상금 150만원 및 상패 3. 중편 소설(원고지 200매 이내) - 당선작 상금 300만원 및 상패 -당선작이 없을 경우 가작을 낼 수 있으며 가작 상금은 당선 상금의 절반으로 함.
대상: 제한 없음 주제: 산이나 산행 혹은 등반을 소재로 함. 기존 지면이나 인터넷 사이버상에 발표된 적 없는 순수 창작물이어야 함.
마감: 2007년 8월 31일(마감일 소인 유효)
발표: 월간 「사람과 산」2007년 11월호
보낼곳 우편: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 505-14 코오롱디지털타워 애스턴 301호 한국산악문학상 담당자 이메일: mmnews@chol.com
응모요령 - 우편과 이메일 접수를 동시에 받습니다. 우편으로는 a4지에 출력한 작품을, 이메일로는 작품의 한글 혹은 워드 파일을 첨부하여 접수해야 합니다. - 작품 표지에 '한국산악문학상 응모작'이라 표기해야 합니다. -원고에 성명, 주소, 연락처를 기재해야 합니다. -응모한 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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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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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소득은 외상, 언젠가는 청구서가 날아오기 마련. / F.P.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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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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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먼저 '인간'이 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과거 시험 때문에 학문을 할 수 없다' 하나, 이것은 핑계일 뿐 성심에서 나온 말은 아니다. 옛사람은 부모를 봉양할 때 밭을 갈기도 하고 품팔이도 하고 쌀을 지고 다니던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고생이 심한 상황에서 어느 겨를에 글을 읽었을까마는, 부모를 위하여 일하고 자식된 직분을 닦으며 여력으로 글을 배웠어도 역시 덕을 쌓을 수 있었다. 지금의 학자들은 옛사람같이 부모를 위하여 일하지 않고, 다만 시험 공부 한 가지가 부모의 욕심이므로 그에 열심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시험 공부는 학문을 연구하는 것과는 다르나 역시 앉아서 글을 읽고 짓는 것이니, 밭갈고 품팔이하며 쌀을 지는 것보다는 백배나 편하지 않겠는가. 요즘 사람들은 고시 공부를 한다면서 실제로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성리학을 공부한다면서 실제로는 시간만 죽인다. 만일 고시 공부를 나무라면 '나는 철학에 뜻을 두어 거기에 전념할 수 없다'하고, 만일 철학이 모자란다고 나무라면 '나는 고시 공부 관계로 그것을 할 수 없다'한다. 이처럼 형편대로 둘러대고 유유히 날만 보내다가 마침내 시험과 성리학을 모두 성취하지 못하게 되니 늙어서 뉘우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아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벼슬하기 전에는 벼슬에만 급급하다가 벼슬한 뒤에는 또 그 벼슬을 잃을까 걱정한다. 이렇게 골몰하다 본심을 잃는 사람도 많다. 이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벼슬이 높은 이는 도(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도덕)를 행하기를 주장하되 도를 행할 수가 없으면 물러날 것이요, 만약 집이 가난하여 녹(관원에게 주는 봉급)을 위한 벼슬을 면하지 못하겠으면 모름지기 바쁜 자리를 사양하고 한직을 구하라. 높은 지위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를 구하여 굶주림만 면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비록 먹고살기 위한 벼슬을 하더라도 반드시 청렴결백하게 그 직무를 다할 것이요, 직무에 태만한 채 나랏돈을 먹기만 해서는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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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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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2. 유불 논쟁
2. 유불 논쟁의 주요 논점들
불교의 멸인륜성에 관한 논쟁--입세간주의와 출세간주의의 대립
불교의 이단성에 관한 논쟁에서 유학이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한 유학 중심주의라는 잣대의 실질적 내용을 이루는 것은 유학적 인륜관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인륜 문제는 유불 논쟁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를 이룬다. 유학자들이 불교를 비판하는 가장 주된 논거 중의 하나는 불교가 출가에 의해 현세간의 일상적 윤리, 구체적으로 효와 충의 도리를 저버려 "인륜을 부정하고 나라에 해를 끼치는" 가르침이라는 점이었다. 유학적인 세계는 가족과 국가를 두 개의 중심축으로 한다. 그 중 가정 윤리의 핵심은 효이며, 사회 윤리의 핵심은 충이다. 그런데 이러한 효와 충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 원칙의 타당성을 본체론과 리기론을 근거로 한 심성론의 확립을 통해 강화한 것이 주자학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유학자들의 불교 비판이 윤리적 측면에 중점을 두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말 이래 주자학자들이 한결같이 불교가 일상적인 윤리를 부정한다고 비판한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정도전도 자신이 불교를 이단으로 배척하는 근본적인 동기가 "위로 여섯 성인과 한 분의 현인을 계승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이단의 설에 미혹되어서 함께 빠져들고 인간의 도리가 사라질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 하여 유학적인 인륜 체계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도전은 정호의 "도 밖에 사물이 없고, 사물 밖에 도가 없다"는 말을 인용하여 도라는 것이 인간의 일상적인 생활과 유리된 어떤 초월적 원리나 원칙이 아니며 천지 사이에서 부딪치는 모든 일들이 바로 도라고 하였다. 예를 들면 아비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아이, 친구와 친구 관계와 같은 일상 생활 속에서 지켜야 할 인륜이 모두 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라면 한 순간도 거기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유학의 도 개념, 즉 '일상 생활 속의 도'를 강조한 것이다. 정도전은 이러한 도 개념을 근거로 세간 속에서 일상적인 윤리 체계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불교는 세간을 떠나서 초월적인 도를 추구하는 이른바 '임금도 모르고 아비도 모르는' 가르침이라고 비판하였다. 이것은 주로 불교에서 출가에 의해 일상적인 인륜의 실천을 외면하고 산림에 은둔하여 도를 추구하는 경향을 비판한 것이다. 기화는 이러한 비판에 맞서 먼저 인륜의 중요성을 긍정하면서도 불교의 출가 수행의 당위성을 옹호하였다. 그는 인간이 도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경과 권의 두 가지를 제시하고, 경을 지키는 것이 유학적인 실천 방법이라면 권을 따르는 것은 불교적인 실천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유학처럼 경을 통하여 인륜의 도리를 지키는 방법, 즉 세간의 일상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직접 부모를 봉양하고 임금을 섬기며 죽어서 제사를 지냄에 마음을 지극히 하고 엄숙히 하는 것과 같은 것은 살아서 애욕을 끊지 못하며 죽어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다고 한다. 따라서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출가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문제 의식은 바로 애와 욕에 기인한 현세간의 고통에 둘러싸인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통찰에서 출발하여 고통이 없고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 경지를 성취하는 것을 귀착점으로 한다. 따라서 그러한 경지의 성취를 위해서 현실적 인간 관계에서 기인하며 윤회의 원천이 되는 애욕을 끊는 출가 수행이 요청되었다. 기화는 바로 그러한 불교의 출가가 결코 인륜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더 높은 차원에서의 인륜의 실천으로 나타나므로, "권으로써 변에 응하되 마침내는 상으로 돌아와 도에 합치되는" 인륜 실천의 또 다른 방식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구체적 예증을 석가의 행적을 들어 제시하였다. 즉 석가는 자신의 직분을 버리고 출가를 하였지만, 깨달음을 얻은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를 뵙고 진리의 말씀을 제도하였다는 것이다. 또 덕을 후대에 펴서 후세 사람들이 그의 부모를 위대한 성인의 부모라고 칭찬하도록 하고, 그의 성으로 모든 이의 성이 되게 하여 출가한 사람을 모두 석가의 아들이라 부르게 되었으니 오히려 더 큰 효를 실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기화는 그러한 석가의 효는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 후세에 이름을 떨침으로써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궁극적인 완성"이라고 한 공자의 말에도 부합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불교가 인륜 중 가장 중요한 효의 도리를 외면한다는 유학자들의 비판은 부당하며, 다만 그 실천 방법이 다를 뿐이라고 항변하였다. 또 불교는 임금으로 하여금 계품을 받아 몸과 뜻을 정결하게 한 후에 정사에 임하게 하고 출가자들로 하여금 임금과 나라를 축수하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충의 실천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불교는 응보설에 의해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화를 받음을 보여서 백성들을 교화하므로 임금과 나라에 도움이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불교가 충의 도리를 저버린다는 비판 역시 부당하다고 한다.
인륜 문제는 유불의 논쟁에서 가장 날카롭게 대립하는 주제였다. 그것은 그 근저에 문제 의식의 출발점과 귀착점, 그리고 현실 세계에 대한 관점 등에 관한 유학과 불교간의 근본적인 간극이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먼저 현실 세계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보자. 유학은 현실 세계를 실재하는 존재로 긍정하였다. 유학에서 제시하는 세계의 모습은 하늘이 덮고 땅이 실은 공간 속에서 모든 존재가 시간의 축을 따라 살아가는 실재하는 세계였다. 따라서 유학에서 세계는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는 유의미한 장으로 간주되었다. 그 반면에 불교에서는 현실 세계란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고정 불변의 본질을 지니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현상의 모든 존재들을 환영과 같은 것으로 여기며 그 실유성을 부정하였다. 정도전은 이러한 현상계의 실유성을 부정하는 불교에 대해 "심, 성을 참된 것으로 여기고, 천지만물을 헛것으로 본다... 천지만물이 있기 전에 반드시 태극이 있었으며 천지만물의 이치가 반드시 혼연히 그 가운데에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태극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는다'고 하였다. 천만 가지 변화가 모두 그것에서 나온다... 또한 천지만물이 헛것이라면 일시적으로 잠시 있을 뿐 천만 사람을 속일 수 없을 것이며, 환영이라면 한 사람만을 속일 수 있을 뿐 천만 사람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항상되고 영원한 천지와 변함없이 태어나는 만물을 헛것이라거나 환영이라고 하니 어찌된 말인가?"라고 하면서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세계에 대한 상이한 이해에 따라 문제 의식의 출발점과 귀착점도 자연히 다르게 설정되었다. 유학은 세계의 실유성을 근거로 현실 세계를 긍정한 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도덕적 주체로 파악하여 인간의 도덕적 본성의 온전한 실현과 그를 통한 조화롭고 질서로운 현실을 구축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를 설정하였다. 이른바 '내성외왕' 혹은 '수기안인'의 전통적인 명제와, 주자학 시기에 강조되는 정심, 성의, 수신이라는 내면적인 도덕 수양의 기초 위에서 제가, 치국, 평천하를 도모하는 "대학"의 사상은 이러한 유학적 이상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학의 가치관은 현실과 현세의 문제에 치중하는 입세간적인 특징을 지니며, 그러한 가치의 실현에 있어 인륜의 실천은 본질적 요소로 간주되었다. 한편 현실 세계를 부정하는 불교는 현실적인 인간의 실존 상황에 대한 고찰을 통해 현실을 넘어서기를 요구하였다. 불교에서 보는 인간의 실존 상황은 인연에 의해 일어나고 생겨나며, 따라서 독립적인 본질을 지니지 못한 가상을 고정 불변의 실체로 간주하여 집착함으로써 고통과 번뇌 속에 처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몸을 포함한 모든 존재가 일종의 인연에 의해 생겨난 가상임을 통찰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일체의 고뇌에서 벗어나 해탈 혹은 열반의 경지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가치관은 현실 부정의 출세간적인 특징을 지니며, 일상적 인륜의 실천 문제는 부차적인 요소로 간주될 뿐이었다. 양자의 이러한 차이 때문에 유학자들은 항상 불교의 출세간적인 가치 지향과 그에 따른 출가 수행을 주된 대상으로 삼아 유, 불의 차별성과 유학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불교도들은 애써 불교가 결코 인륜의 실천을 포기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유학과 마찬가지로 인륜의 실천을 중시하며, 다만 그 실천 방법이 유학과 다를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불교의 멸인륜성을 둘러싼 유불 논쟁은 양자의 상이한 지향, 즉 입세간적 가지 지향과 출세간적 가치 지향의 대립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대립의 근저에는 세계와 인생에 대한 양자의 상이한 이해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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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본뜻 : 프랑스 대혁명 이후인 1792년,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급진 개혁파인 자코뱅당이 의장석에서 봐서 의장의 왼쪽에 자리잡고, 보수파인 지롱드당이 의장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던 데서 좌익과 우익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로부터 자코뱅당의 정치 성향이 급진적 체제 개혁을 내세우는 정치 세력을 좌익이라 하고, 체제 수호를 내세우는 지롱드당 같은 보수 세력을 우익이라고 한다.
바뀐 뜻 : 급진적 체제 개혁을 부르짖는 단체나 정치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인다.
"보기글"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부터 한국전쟁까지가 좌익들의 활약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다 -좌익, 좌익 하는데 도대체 당신이 말하는 좌익의 정확한 정체가 뭡니까?
지양
본뜻 : '파벌 의식이나 지방색을 지양하시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을 어떤 말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을 '파벌 의식이나 지방색을 없애라 되도록 하지 말아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지양'이란 말은 그처럼 '완전 부정'이나 '부정 그 자체'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지양은 'aufheben'이란 철학 용어로서 '위로 올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다. 지양은 이처럼 대립과 모순을 다시 한층 높은 명제로 조화, 통일해 나가는 것을 이르는 말인데, 일상생활에서는 '지향'과 혼동되어 쓰이거나 '아예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의 뜻으로 잘못 쓰이는 경우가 많다.
바뀐 뜻 : 변증법에서 쓰이는 중요한 개념인 '지양'은 어떤 것을 그 자체로서는 부정하면서도리어 한층 더 높은 단계에서 그것을 긍정하면서 살려 나가는 일을 말한다.
"보기글" -우리 회사에서는 학연, 지연 등을 따라 모임을 갖는 것을 지양하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 정당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인 말싸움이나 감정 싸움은 지양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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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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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제국주의 영국의 마지막 부채 - IRA와 아일랜드
70년대 북아일랜드의 정치 상황
앞에서 말했듯이 남부 아일랜드는 1922년 영국에서 독립했지만 북아일랜드는 영국 영토로 남게 되었다. 영국은 북아일랜드를 독자적 의회와 헌법을 갖춘 독립적 주로 설정하고 자기 영토로 둠으로써, 현재의 대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북아일랜드에서 신교도는 60%로서 카톨릭 교도에 근소한 우위를 점할 뿐이니, 사회 갈등의 가능성은 항상 잠재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갈등의 현장에는 영국 정부뿐 아니라 IRA도 가담하고 있었다. 1969년 IRA는 또다시 두 계파로 분리된다. 독립 직후의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두 계파는 북아일랜드를 되찾는게 목적이었으나 방법론에서는 견해를 달리했다. 공식적인 분파와 비공식적인 과격파 IRA는 테러를 투쟁 수단으로 활용할지 여부를 놓고 극렬히 대립했던 것이다. 데이비드 오코넬이 이끄는 과격파는, 아일랜드의 분단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테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북아일랜드에서 요인을 암살하고 차량을 폭파했으며 공공장소에 모여 있던 불특정 신교도들을 폭탄으로 날려 버렸다. 1970년부터는 대담하게도 영국 본토를 테러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다. 과격파 IRA의 노선은 아일랜드 공화국의 공식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고, 북아일랜드인들에게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하지만 70년대 북아일랜드 카톨릭 교도들이 겪었던 불이익이 과격파 IRA에게 호조건이 된다. 당시 북아일랜드에서는 선거권, 취업, 주택 등에서 카톨릭계는 공공연히 차별 대우를 받았다. 게다가 카톨릭 교도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 조직도 있었다. 아일랜드계 카톨릭 교도들을 무작위로 살해한, 신교도 테러 조직 `얼스터 자원군(Ulster Volunteer Force)`이 그 대표적 예이다. 그 집단은 1966년 북아일랜드 정부에게도 범죄 집단시되었고, 1970년 후반에는 조직원 11명이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아일랜드계 카톨릭 교도들과 과격파 IRA의 저항이 격화되고 북아일랜드는 극도로 불안정한 정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1972년 중대 결단을 내린다. 영국 수상 에드워드 히스가 북아일랜드의 헌법 및 주의회 기능을 정지시키고 영국 의회에 의한 직접 지배를 천명한 것이다. 영국의 직접 지배 결정은 북아일랜드의 부분적 자치권을 약화시킬 뿐 아니라 아일랜드계의 입지를 크게 위축시켰기 때문에, IRA와 카톨릭 세력의 극렬한 반발이 뒤따른 것은 당연하다. 영국 정부도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호전적으로 대응했다.
이 시기의 상황을 상세히 묘사한 영화가 <아버지의 이름으로>(짐 셰리던 감독, 다니엘 데이 루이스 주연, 1993년)이다. 1974년 10월 5일 영국 길포드의 한 식당에서 폭발물이 터져 5명이 사망하고 75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참극은 영국의 직접 지배 결정에 반발하는 IRA의 테러에 의한 것이었다. 영국 경찰은 곧 제리 콘론이라는 아일랜드계 청년을 살인 혐의로 기소하지만 그는 테러에 연루될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제리 콘론은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에서 좀도둑질과 방탕한 생활로 청춘을 보내던 하층 청년에 불과했다. 제리 콘론의 공범이라고 기소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더욱 어처구니없다. 콘론의 늙은 아버지가 살인을 모의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콘론의 숙모는 폭발물 제조 혐의로, 그리고 숙모의 10대 초반의 아이들까지 폭발물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다. 조금이나마 이성적이라면 이런 수사는 절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보면 재판 과정 또한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재판 과정은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편견과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제리 콘론의 변호사는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일화를 전했다. 제리 콘론과 악수를 나눈 변호사에게 주위 사람들이 왜 손을 씻지 않는지 물었다고 한다. 더러운 아일랜드인과 악수했으니 손을 씻어야 하다고 주장했을 만큼 런던 시민들은 비이성적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진행된 재판이 온전할 리 없다. 영국의 사법 당국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들을 IRA 암살자라고 보고 유죄 판결을 내렸다. 15년이 지난 후에야 제리 콘론은 무죄가 입증되어 석방된다. 하지만 그는 청춘을 덧없이 소모했으며 아버지도 이미 옥사한 이후였다. 제리 콘론의 사례는 북아일랜드의 카톨릭계와 IRA가 벌인 저항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잘 보여 준다. 가공할 물리력으로 무장한 정복자 영국 사회에서 합리적 판단 능력마저 앗아갈 정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영국에 맞선 저항은 적지 않은 희생을 낳았다.
일방적인 주장일 수 있지만 북아일랜드 신 페인의 기록에 따르면 1970년 초반에 6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정치 사범으로 체포되었다. 고문으로 자백만 얻어 내면 충분했기 때문에 물증 따위는 필요없었다. 신 페인은 또한 1971년에서 1975년 사이 약 2,000명의 사람들이 재판이나 기소 절차 없이 살해되어 암매장되었다는 충격적인 주장도 한다. 그러니 북아일랜드인들과 신 페인으로서는 마이클 콜런스가 원망스럽지 않을 수 없다. 분단을 전제로 한 독립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고 북아일랜드도 곧 통일될 것이라는 게 마이클 콜린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평화도 통일도 요원하기만 하다. 그래서 아일랜드계 사람들은 마이클 콜린스를 비열한 협잡꾼이거나 무능한 정치 모리배로 여기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아일랜드의 교과서나 신 페인의 공식 문서에 절대 등장할 수 없는 금기 인물인 것이다. 한편, 영국으로서는 마이클 콜린스가 인면수심의 잔인한 테러리스트이고 그래서 영화 <마이클 콜린스>가 영국에서는 인간 백정을 변호하는 더러운 영화라고 배척당했다. 분단 독립 이후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 때문에, 마이클 콜린스는 동족에게도 버림받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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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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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7.내일을 위한 건배
당신 안의 모험심을 자유롭게
때로는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여겨지는 불행한 나날들이 있다. 그런 때에는 견딜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와 머리는 혼란하고, 모든 걸 그만 팽개치고 싶은 기분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도저히 안 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고 포기하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일단 현실을 극복하고 나아가려고 생각하면 나아갈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불행은 불행으로 받아들인다. 피해서 자나갈 수는 없다. 만일 75세까지 살수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인생을 날짜로 계산해 보면 2만 7,375일이나 되는 굉장한 것이다. 이 숫자를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을까. 실연, 경제적인 핍박, 남편이나 아이들과의 불화, 터무니없는 중상등 사람은 매일 끝없는 실망의 불씨와 마주친다. 불행한 날이 계속될 때는 며칠간이 아니라 그런 상태가 영구히 지속될 것처럼 여겨진다. 아이들은 도대체 조용해질 날이 있을 것인가. 요리를 할 때마다 어째서 이렇게 새까맣게 타기만 할까 여자의 일이 따분하지 않게 될 때가 있을 것인가 도대체 언제면 모든 일이 생각대로 될 것인가. 하지만 비록 지금 행복에 넘쳐 있는 사람이라도 언제였든 의혹과 불안으로 고통받아서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나날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늘 무엇 하나 불만이 없고 완전하게 행복한 상태에서 살수 있는 사람이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불행한 나날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어떻게든 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 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남에게나 자기에게나 지나치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일, 자기의 결심이 흔들리는 일, 자기만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고 믿어 버리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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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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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이극돈의 죄를 사실대로 쓴 김일손
김일손(1464-1498)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계운, 호는 탁영이다. 그의 형 준손, 기손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같이 배웠다. 성종 17년(1486)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2등을 하였으며 예문관 검열에 보직을 받아 사관으로 있으면서 이극돈의 죄를 사실대로 바로 썼다. 연산군 4년(1498) 7월에 왕이 전지하였다.
"김종직은 시골의 천한 선비로서 세조 때에 과거에 오르고 성종 때에 경연에 발탁되어 오랫동안 시종의 지위에 있으면서 형조 판서에 이르렀으니 은총이 더할 수 없이 지극하였다. 그가 병으로 물러간 뒤에도 소재지의 수령을 시켜 특별히 쌀을 주어 그 여생을 마치게 하였다.그런데, 지금 그의 제자 김일손이 편수한 사초 안에 부도한 말로 선왕 세조 때의 일을 거짓으로 꾸며 말하고, 그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수록하기까지 하였다. 그 글에 '정축(세조 3년) 10월에 내가 밀양으로부터 서울로 오다가 답계역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꿈에 어떤 선인이 훤칠한 키에 일곱 무늬가 있는 칠장복을 입고 점잖게 말하기를 -나는 초희왕의 손자 심인데 서초패왕 항우에게 시해되어 빈강에 빠졌다-하고는 언뜻 보이지 않았다. 내가 꿈을 깨고 나서 깜짝 놀라 말하기를, -초희왕은 남쪽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방 조선 사람이다. 지역이 서로 만여리 이상 떨어져 있고 세대 또한 천여 년이나 선후가 있는데, 꿈자리에 와서 느꼈으니 이 무슨 상서로운 기미인가. 또 역사서를 고찰해 보면 서초패왕이 초희왕을 강물에 던져 넣었다는 말이 없으니, 어쩌면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그를 쳐서 그 시체를 강물에 던져 넣음인가.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하고 마침내 글을 지어 조문하다'(이 유명한 '조의제문'은 '점필재집'과 '탁영집'에 실려 있다) 세조의 사초에 김일손이 그 '조의제문'을 찬양하여 '충분이다' 하였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참담하고 두렵다. 그 형명을 의논하여 아뢰어라" 이윽고 7월에 그를 난역으로 처형하고 종묘에 고하였다. 김일손의 벼슬은 이조 정랑에 이르렀다. 중종반정 후 그에게 도승지를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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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회의
국제적인 대회에서는 곧잘 원탁회의란 말이 쓰여진다. 글자 그대로 원형의 큰 테이블을 둘러싸고 토론하는 것인데 회의 운영의 공평과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하여 환영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그 어원은 중세 영국의 '아더'왕의 전설에 비롯되고 있다. '아더'왕은 기사도의 전성 시대인 6세기 경에 영국을 다스렸다고 하며 스칸디나비아와의 프랑스를 정복하고 로마군을 격퇴했다는 전설까지 남겼다. '아더'왕 주위에는 이름난 기사들이 벌처럼 모여들었는데 왕은 그들에게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회의 때에도 대리석의 원형 테이블을 만들어 그 주위에 앉게 했다. 원탁에 앉는다는 것은 최고의 명예였으며 그 석상에서 갖가지 문제가 토의되었다. '아더왕의 죽음' (1485)은 후세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한편 근대에 와서는 1887년 1월 당시의 영국 수상이던 '글래스톤'이 반대당인 '챔벌린'과 당시의 최대 문제이던 아일랜드의 자치에 대해 논의한 것이 원탁회의 효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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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4장 완전한 기쁨을 주는 인생 수업
이건 내 소설이군
대작가 찰스 디킨스는 19세기 후반의 영국 독서계를 석권하여 국민적 영웅으로서 존경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두 도시 이야기'는 오늘날가지 전세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그가 '두 도시 이야기'를 쓰던 무렵의 일이다. 어느 날 깊은 생각에 잠겨 산책하다가 그만 한 소녀가 끌고 가는 장난감 수레를 발로 차, 수레에 태워진 소녀의 인형을 부수고 말았다. 소녀가 울기 시작하자 당황한 디킨스는 몇 번이나 사과하면서 달래고는 집으로 데려가 선반 위에 장식품으로 놓아두었던 멋진 인형을 주었다. 소녀는 그 인형이 마음에 들었는지 크게 기뻐하며 돌아갔기 때문에 디킨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그 소녀가 찾아와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어제 너무 고마워서 지금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는 아주 재미있는 책을 사왔어요."
포장지를 풀어보니 그것은 그가 쓴 소설 '데이빗 코퍼필드'였다. 디킨스는 저도 모르게 웃으면서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고마워, 고마 아가씨. 이렇게 기쁜 일도 없을 거야."
그 소녀가 멋진 인형을 얻은 답례로 왜 '데이빗 코퍼필드'를 택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 책이 어린이용 도서가 아님은 분명하다. 따라서 소녀 자신이 읽고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 책이 대한 높은 평판을 듣고 그것을 선물하면 그 아저씨가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혹은 서점 주인에게 물어 그가 추천하는 대로 골랐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소녀는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을 것이니 그것을 고른 것은 정말 우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디킨스는 그것을 잘 알았겠지만, 공교롭게도 자신의 작품계열 중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이빗 코퍼필드'를 어여쁜 소녀가 고운 손으로 골라 자신에게 전했다는 것이 너무도 기뻐 '이렇게 기쁜 일도 없을 거야'라고 밝게 웃었던 것이다. 이 일화는 지극히 단순할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단순하다. 그러나 당시에 인기의 절정을 누리던 디킨스가 소녀의 선물을 받고 '이렇게 기쁜 일도 없을 거야'라고 최고의 기쁨을 표했다는 사실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하다는 것은 실로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곧게 뻗치는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숲처럼 상쾌한 느낌을 준다. 남의 호의마저도 일부러 왜곡시키거나 저의를 살피면서 받아들이는 것을 현대적 감각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요즈음, 이 일화를 곰곰이 되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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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2 - 후안 마누엘
첫번째 이야기 서로 다른 두 부부의 이야기
어느날 루까노르 백작이 빠뜨로니오에게 이야기했다. "빠뜨로니오, 내겐 이미 결혼한 두 형제들이 있소. 그 중 하나는 부인을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지 절대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고, 반대로 또 다른 하나는 부인을 너무나 싫어하는 나머지 아예 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오. 이 두 동생들이 항상 내겐 큰 걱정이오. 그러니 현명한 당신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내게 조언을 해주길 바라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빠뜨로니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백작님, 이야기를 들어보니 백작님의 형제들은 두 분 다 잘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인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도, 그렇게 싫어하는 것도 내색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형제분뿐 아니라 부인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을 겁니다. 글쎄, 이런 경우 백작님께 화드리께 황제와 그의 황후 그리고 알바화네스 미나야와 그의 부인의 이야기를 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화드리께 황제는 한 귀족처녀와 결혼을 했지만 그들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결혼하기 전부터 있던 부인의 나쁜 습관을 황제가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그녀는 점점 다루기 어려운 여자가 되어갔습니다. 황제가 잠을 자고 싶어할 때 그녀는 깨어 있으려 했고, 황제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표시하면 그녀는 즉시 그 사람을 증오하는 식이었죠. 황제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그녀는 싫어하며 황제가 하는 모든 일에 반대로 행동하곤 했습니다. 처음엔 참으려 했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부인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자, 황제는 자신의 그런 고통스런 삶은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자신의 나라와 백성들에게도 해롭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행동하려면 어떤 합리적인 생각도 불가능했기 때문이었죠. 결국 황제는 교황에게 가서 그간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이혼을 허락해 줄 것을 탄원하였습니다. 교황 역시 황후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결혼생활이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에 공감하긴 했지만 천주교리상 이혼은 금지된다는 사실을 납득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황제는 자기 나라로 되돌아와 아부와 충고, 협박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시 한 번 시도해보았지만 황후의 나쁜 습성은 더욱 심각해질 뿐이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황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슴사냥을 하러 나가는데 사슴을 죽이기 위해 화살촉에 묻힐 독성분이 있는 풀을 조금 가져갈 것이오. 남은 풀은 다음번 사냥을 위해 남겨두고 가는데 독성이 강하기 때문에 절대로 피가 나는 상처부위나 종양 근처에 닿게 해서는 안 되오. 만약 그렇게 되면 어떤 생명체든 목숨을 잃게 되는 일이 생길 테니 조심하시오."
그리고 나서는 부인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몸에 있는 종기 치료에 좋다는 고약을 발랐습니다. 부인뿐 아니라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약효가 얼마나 금방 나타나는지 알게 되었죠. 그리고 황제는 부인에게 상처를 치료하려면 고약을 사용하지 절대 풀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재차 당부한 후 사냥을 떠났습니다. 황제가 떠나자마자 황후는 이렇게 큰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황제가 내게 뭐라고 얘기했는지 아세요? 그는 내가 앓고 있는 옴이 나기가 앓고 있는 종기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게 자신이 사용하는 고약을 사용하라고 했답니다. 그 약으로는 내 병이 치료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입니다. 그리고는 내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풀은 절대 사용하지 말라고 했답니다. 나는 그가 돌아왔을 때 내가 다 나은 모습을 보고 당황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라도 그 풀을 바르겠어요. 이렇게 하는 것이 아마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걸 테니까 말이에요."
그러자 곁에 있던 신하들과 궁녀들은 그 풀을 바르면 목숨을 잃게 될 테니 제발 그만두시라며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황후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상처부위에 풀을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죽음이 엄습했고 그녀는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할 틈도 없이 그 고집 때문에 죽음을 맞게 되었지요.
화드리께 황제 이야기가 끝나자 빠뜨로니오는 알바화네스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스까르 지방에는 선하고 정직한 알바화네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꾸례야르 지방엔 세 딸을 둔 뻬드로 안수레스 백작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알바화네스는 예고도 없이 뻬드로 백작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백작은 갑작스런 그의 방문에 매우 놀라긴 했지만 함께 식사를 하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지요. 이윽고 갑작스럽게 방문한 이유를 묻자 알바화네스는 백작의 세 딸 중 한 사람에게 청혼을 하려 했는데, 그 중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짝을 고를 수 있도록 세 딸과 따로따로 이야기할 시간을 갖게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알바화네스가 훌륭한 청년이라는 사실을 알고 백작은 흔쾌히 요구를 받아들였지요. 백작의 첫째딸과 은밀히 만난 자리에서 알바화네스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는 당신과 결혼하길 원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먼저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 저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젊진 않답니다. 전쟁에서 부상을 많이 당했기 때문에 몸이 아주 약하기도 하구요. 또 술을 조금만 마셔도 이성을 잃고 난폭해지기 일쑤며 정신이 들면 내가 무슨 얘길 했는지 무슨 행동을 했는지 기억조차 못한답니다. 이런 버릇 때문에 보통 여자들은 나와 결혼하길 꺼려하죠."
이야기를 모두 들은 첫째딸은 결혼이라는 건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라 부모님의 문제이기도 하니 부모님과 상의해 보겠다고 대답한 후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부모에게 그런 사람과 결혼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백작은 알바화네스에게 큰딸은 아직 결혼할 뜻이 없는 것 같다고 둘러댔습니다. 다음으로 둘째딸과 이야기를 하게 된 알바화네스는 그녀에게 역시 똑같은 이야기를 했고 둘째딸의 반응 역시 큰언니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똑같은 이야기를 들은 막내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같은 분이 제게 청혼을 하다니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려야겠네요. 그리고 당신이 말씀하신 그 술버릇은 제게 맡기세요. 제가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할테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나이 또한 결혼생활을 하는데 장애가 되진 않을 거예요. 그런 결혼생활로부터 얻는 좋은 것들도 많을 테니까 말이죠. 그 외에 다른 일들은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을 화나게 하지도 않을 것이며, 설사 당신이 화를 낸다 하더라도 한마디 불평없이 참을 수 있으니까요."
결국 알바화네스의 말에 막내딸만 현명한 대답을 했으며 그는 매우 만족해서 이해심 많은 여자를 만나게 해준 신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곧 뻬드로 백작에게 막내딸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고 백작 역시 기쁜 마음으로 즉시 결혼식을 치러주었습니다. 그의 부인이 된 막내딸 도냐 바스꾸냐나는 신중하고 사려 깊은 여인이었기 때문에 알바화네스는 매우 행복해 했으며 그녀가 원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항상 배려했습니다. 그녀도 남편을 매우 사랑했으며 남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모든 언행은 항상 옳다고 믿었습니다. 남편의 모든 행동과 말들이 그녀를 항상 기쁘게 했으며 남편이 좋아하는 어떤 일에도 반대의 뜻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단지 남편을 기쁘게 하거나 남편에게 아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이 원하거나,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이 옳으며 누구도 그보다 더 옳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진정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주 현명하고 신중해서 언제나 이치에 합당한 일을 했기 때문에 알바화네스도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녀가 하려는 모든 일을 언제나 따르고 존중했지요. 그러던 어느날 알바화네스 집에 조카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그 조카는 궁정에서 왕의 시중을 들던 자였는데 얼마간을 숙부 집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 조카가 알바화네스에게 숙부는 모든 것이 다 좋지만 한 가지 흠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숙부가 숙모에게 재산을 관리하는 데 너무 많은 권한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알바화네스는 며칠 후면 그 까닭을 알게 될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알바화네스는 부인에게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조카를 데리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사람을 보내 부인이 자신의 뒤를 따라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앞에선 숙부와 조카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고, 멀리 뒤에선 부인이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가다 그들은 소떼를 발견하게 되었지요. 그러자 알바화네스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얘야, 너 보았니? 얼마나 멋진 말들이냐!"
이 말을 들은 조카는 놀라긴 했지만 숙부가 농담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며 말했습니다.
"숙부, 저건 말이 아니라 소예요."
그러자 숙부는 여전히 소떼를 보고 말떼라고 우겼습니다. 조카 역시 숙부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하며 입씨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멀리서 바스꾸냐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조카는 숙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숙모님, 숙부와 저는 지금 말다툼을 하고 있었어요. 숙부가 저 소들을 보고 계속 말이라고 우기시길래, 제가 저건 말이 아니라 소라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숙부는 제 정신이 나갔다고 하시네요. 그러니 숙모님이 숙부님께 누가 옳은지 말씀을 해주세요."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도 저 무리가 소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 알았을 거예요. 왜냐하면 숙부가 저것이 말들이라고 확신하신다면 확실히 저건 소가 아니라 말일 테니까요."
그리고는 조카와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 동물의 색깔이나 특징을 가리키며 남편의 주장이 맞다고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확신에 차 이야기를 하자 그 곳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서서히 자신들이 착각을 했으며, 그들이 본 것은 알바화네스의 이야기대로 소떼가 아니라 말떼였을 거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다시 길을 가던 중 그들은 이번에는 말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알바화네스는 조카에게 말떼를 보고 소떼라고 얘기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카는 역시 소떼가 아니라 말떼라고 말하며 숙부가 정신이 나갔다고 했습니다. 알바화네스 역시 다시 말떼를 보고 소떼라고 우겼고 또 다시 그들의 입씨름이 시작되었지요. 그러던 중 바스꾸냐나가 또 다시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다다랐고, 소떼를 만났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바스꾸냐나의 설득으로 함께 있던 사람들은 말떼를 소떼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다시 길을 가던 중 그들은 물레방아가 있는 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말들에게 목을 축이게 하면서 알바화네스는 이 강은 위로 흐르고 있으며 그래서 물레방아는 위에서 아래로 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아래서 위로 받고 있다고 조카에게 우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조카는 자신이 말을 소로, 소를 말로 생각했을 때처럼 또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말해 또다시 입씨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후 바스꾸냐나가 도착하자 그녀는 남편의 뜻에 동조하며 여러 이유를 들어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또다시 조카가 착각했다고 믿었지요. 그러자 이젠 조카 자신도 바스꾸냐나의 말에 설득되어 스스로가 판단력을 잃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조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알바화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언젠가 네가 나에게 얘기했던 그 한 가지 흠에 대해 이젠 답이 된 것 같구나. 사실 나 역시 너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단다. 처음에 본 것은 네 말대로 소였고, 나중에 본 것 역시 네 말대로 말이었지. 물론 네 숙모 역시 네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네 숙모는 항상 나의 판단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내가 착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렇게 많은 이유와 논리를 대면서 내가 옳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믿게끔 한 것이란다. 네 숙모는 우리가 결혼한 첫날부터 내가 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았고, 언제나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가장 옳고 합당한 일이라고 믿어왔단다. 어떠한 순간에도 내 이름과 명예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모든 이에게 내 뜻에 복종해야함을 일깨워주었단다. 그것은 결코 자기의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명예를 위해서였지.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사람이 나를 위해 이렇게 했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할 텐데,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내가 나를 위해 이렇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니 네 숙모를 위해 무엇인들 못하겠니."
조카는 알바화네스의 이야기를 듣고, 숙부가 숙모를 그렇게 사랑하고 숙모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까노르 백작님. 황제의 부인과 알바화네스의 부인은 상당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당신의 동생들이 한 분은 부인을 끔찍히 사랑하고 또 다른 한 분은 끔찍히 싫어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면, 아마 그 동생분들의 부인은 제가 말씀드린 황후나 바스꾸냐나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부인들이 그러하다면 동생분을 비난해서는 안 되겠죠.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두 경우처럼 부인들이 그렇게 선하지도 그렇게 제 맘대로인 것도 아니라면 그땐 남편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불신감이 생기면 결국은 앞에서 말한 화드리께 황제와 황후의 경우처럼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서로 깨달아 남편이 부인을 신뢰하고 부인도 남편을 신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입니다."
* 부부 사이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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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제1부 신군부의 만행을 전세계로 타전하다
4. 목가적 전원도시에서 펼쳐진 악몽
아래 내용은 내가 1980년 5월 27일 독일 뮌헨에 있는 소속 신문사 본사에 전화 송고한 광주에서의 목격담을 실은 기사이다. 이 기사는 5월 28일 '슈트 도이체 차이퉁'지에 실렸다. 나는 5월 26일 월요일 아침 광주에 들어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항쟁을 진압하기 직전에 그곳을 떠났다.
광주 5월 26일 오전 계엄군에 포위된 광주에서 12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한 화순은 광주로 향한 차량통행이 봉쇄되어 있었다. 나는 빌려온 자전거를 타고서 화순에서 광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과 자전고, 오토바이 행렬 속에 뒤섞여 광주를 향해 출발했다. 거리에는 청년들, 아기를 업은 아낙들, 통치마에 무거운 짐을 인 할머니들 그리고 밀짚모자를 쓴, 얼굴이 구릿빛으로 탄 노인들도 가끔씩 눈에 띄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에서 본 한국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다. 화순 너릿재 터널을 지나자 목가적 전원 풍경은 갑작스럽게 끊어졌다. 불에 타 뒤엎어진 트럭 한 대가 길을 막고 있고 터널 한켠에는 광주 상공회의소에서 걸어놓은 '조국의 미래, 청년의 손에 달려 있다'라고 씌어진 현수막이 비에 젖은 채 늘어져 있었다. 몇 미터 너머로는 뒤집혀진 지프차 한 대가 길옆 고랑에 처박혀 있었다. 광주시내가 점점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아스팔트가 깔끔하게 포장된 15번 국도를 벗어나 시골마을의 울퉁불퉁한 골목길과 쓰레기더미, 양계농장 길, 그리고 바닥이 드러난 하천 바닥 등을 통해 한걸음씩 광주를 향해 접근했다. (신문사 편집진은 여기서부터 내가 어떻게 군인들의 통제를 뚫고 다시 15번 국도로 들어섰는지를 묘사한 부분을 삭제해버렸다. 당시 나는 논둑길을 걷다가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검문을 당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들은 여권을 조사해보고 나의 독일 국적을 확인한 다음 통과시켜 주었다. 당시 여권에는 나의 기자 신분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었다.) 조금 더 접근해 보니 갑자기 군인들의 모습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고 파괴된 버스를 두 줄로 세워 만든 바리케이드가 도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버스 옆면에는 붉은 페인트로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라고 휘갈겨져 있었다. 당시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하고 있던 전두환 소장은 1979년 12월 활극을 방불케 하는 작전을 통해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여 박 대통령 시해사건 연루 혐의로 재판에 회부한, 군부 내의 실력자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 광주에서는 전두환이 지난주 계엄확대 반대 시위 중인 학생과 시민 들을 공수부대를 파견하여 무참히 사살한 유혈참극의 총수로 거론되고 있었다. 광주 도심까지는 4킬로미터가 남아 있었다. 제일 먼저 불타 버린 파출소가 보였다. 상가의 모든 철제 셔터들은 내려져 있었고 몇몇 시민들이 인도 위에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차도는 가끔씩 자전거를 탄 사람이 지나갈 뿐 텅텅 비어 있었다. 경찰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극심한 혼란상태에 빠진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직도 노점상들은 과일과 채소 따위를 팔고 있었다. 당시 두 개의 지방지 중의 하나였던 전남매일신문사의 철문은 닫힌 채 유리창 몇 장이 박살나 있었다. KBS(국영)와 MBC(민영)의 지방방송국 건물은 불에 타 있었다. "그들은 여기서 일어난 일들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분노한 것입니다." 한 노인이 말했다. 벽면이 눈부시게 흰 페인트로 칠해진 전남도청 건물은 훼손되지 않고 있었다. 도청 앞 광장 한쪽에는 청년들이 계엄군과 경찰로부터 빼앗은 장비들을 지키고 있었다. 몇 발자국 옆에는 유리창에 총탄 구멍이 난 검은색 범인 호송용 경찰 지프차가 보였다. 가죽으로 된 목 보호대가 달린, 마치 중세의 투구를 연상시키는 경찰의 폭동 진압용 헬멧을 뒤집어쓰고 카빈총을 멘 채 지프차 위에 올라탄 시위대들의 모습은 으시시했다. 도청 출입은 시민군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서너 줄로 나뉘어 길게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실종된 가족들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총격 또는 곤봉에 맞아 사살된 13구의 청년의 시체가 나무관에 반쯤 열린 채 안치되어 있는 복도로 안내되었다. 그들은 관 속을 하나씩 확인하면서 통곡하고 있었다. 한편 도청 앞에 있는 작은 체육관인 상무관에서는 광주 유혈참사의 희생자로 신원이 밝혀진 사망자들을 위한 위령제가 올려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60개의 관들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흰색 천으로 둘러싸인 다음 굵은 노끈으로 묶여져 있었고 태극기가 덮여 있었다. 몇몇 관 위에는 사망자의 영정이 모셔졌고 급조해놓은 제단에는 향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마분지로 만든 부의함들도 보였다. 한 젊은이가 미친 듯이 주먹으로 관을 내리치며 뼈에 사무친 목소리로 외쳤다. "내 동생이 이 안에 죽어 있소. 도대체 어떻게 대한민국 군인들이 국민들을 향해 총을 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숨을 죽인 듯 조용한 가운데 수많은 인파가 상무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56번부터 58번 관은 아무도 지켜주는 이가 없었다. 겨우 일곱 살 배기 초등학교 1학년생 아들과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한 가족 모두가 사살되었던 것이다. 어린아이의 관 위에는 누가 갖다 놓았는지 흰 국화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다음 줄에는 여학생들이 모여 있었는데 춘태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왜 자신들의 급우 한 명이 죽어 자신들 앞에 누워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여학생들은 쏟아지는 눈물에 목이 메인 채 이별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 중 한 여학생이 몸을 돌려 제단을 향해 애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친구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아주세요!"
그녀는 열 일곱 살 먹은 박금희라는 여학생이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상무관을 가득 메운 모든 시민들은 애국가를 합창하고 만세를 불렀다.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위령제에 참석한 유가족과 시민들은 숨막힐 듯한 군사독재와 계엄군의 만행에 대한 항거를 공산주의자의 책동이라고 매도하며 광주의 명예를 더럽힌 정부당국의 발표에 대한 저항과 애국심의 표현으로써 애국가를 불렀다. 항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당시의 사태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느냐 하는 것은 조선대학교의 '민주투쟁위원회'가 뿌린 유인물에 묘사되어 있다.
5월 17일 밤 전두환 일당은 계엄령을 확대하고 그들을 반대하는 모든 정치인과 민주인사들을 체포, 투옥했다. 이로써 이 나라 모든 민중들이 갈망하던 민주주의에 대한 작은 희망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전두환은 이에 격분한 민주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3만명이 넘는 전투경찰을 동원, 시위 군중들의 전후를 봉쇄하고 압박하여 단 한 사람도 도망칠 수 없게 몰아붙인 후 최루탄을 난사했다. 뿐만 아니라 전두환은 3,000여 명의 공수부대원을 급파하여 마치 미친 도살자들처럼 대검으로 눈에 띄는 모든 사람들을 찔러댔다. 피가 강물처럼 흘렀고 그들은 시체를 트럭에 짐짝처럼 던져 실었다. 그리고도 모자라 계엄군들은 집집마다 대문을 부수고 쳐들어가 숨어 있던 학생들을 질질 끌고 나와 대검으로 찔러댔다. 그들은 이 모든 만행들을 바로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자행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격분하여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맨주먹으로 들고 일어선 시민들도 계엄군의 대검에 찔렸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던 한 여학생을 본 70세 가량의 할머니도 계엄군을 붙잡고 항의하다가 결국 대검에 찔려 사망했다. 학생들의 주장은 계속되었다. 전두환의 특명에 의해 자행된 학살에 희생된 사망자 숫자는 200명 이상에 이르고 부상자는 모두 1,000명을 넘어섰다. 그러나 이러한 엄청난 비극을 보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언론에는 지난 5월 17일부터 계속된 악몽 같은 사건들에 대한 보도는 단 한 줄도 보이지 않았다.
5월 26일 저녁 조선대학교 출신의 한 의사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이것은 분명히 내란입니다. 너무나 잔인합니다."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는 300여 명의 부상자가 치료를 받았다. 아무리 설득해도 의사와 간호사 들은 외국인인 나에게 희생자들의 처참한 모습을 좀체로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이번 사태는 대한민국의 치욕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대답했다. 한참을 있다가 의사 한 명이 넓은 병동을 가득 메운 중환자들의 병상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총탄이 머리 또는 눈을 관통하여 두 개골이 파열된 사람들, 가슴과 복부를 관통당한 사람들, 방광이 갈기갈기 파열된 사람들. 저 희생자들 중 과연 몇 사람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제 매일 밤 조금씩 외곽의 포위망을 좁혀오는 계엄군에 둘러 싸인 광주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서울의 지배자들은 일주일 이상 계속된 '무정부 상태'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으며 광주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자치정부'(수습대책위원회의 지칭-편집자)에 대한 인내에 한계가 있음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면 광주의 자치정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어떻게 예측하고 있을까? 마지막 남은 24명의 시민투쟁위원회의 구성원 중의 한 명은 말하고 있다.
"전두환이 물러날 때까지 계속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희생에 비춰볼 때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이미 확인된 161명의 사망자 숫자를 내밀었다. 식량사정은 앞으로 한 달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치위원회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그렇게 오랫동안 견뎌낼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미국 대사를 만나 이곳의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5월 27일 KBS의 보도이다.
"어제(5월 27일) 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계엄군과 경찰은 광주를 탈환했다. 200명 이상의 학생들이 계엄군측에 항복했으며 두 명은 끝까지 저항하다 사살되었다." 몇 명의 노인들이 초조한 모습으로 숨을 죽인 채 방송을 듣고 있다가 울분을 참지 못한 채 비통한 목소리로 내뱉는다. "나쁜 놈들, 두 명밖에 안 죽다니 새빨간 거짓말이다. 분명히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그 기사에는 세 장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한 장은 공포에 떨며 땅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한 여인을 내려치기 위해 곤봉을 치켜들고 있는 계엄군의 모습을, 나머지 한 장은 굴비처럼 몸이 서로 묶인 채 고개를 숙인 '폭도'들을 연행하고 있는 계엄군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나는 도쿄 지국으로부터 1980년 5월 17일 이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극적인 사태 전개에 대해 본사에 보고해오고 있던 중이었다. 최초의 보도는 5월 18일 슈트 도이체 차이퉁 지에 실렸다. 몇 편의 사설도 썼다. 하지만 일본 정부 역시 위기상황이었기 때문에 곧장 한국으로 갈 수가 없었다. 5월 25일 일요일 비행기를 타고 도쿄에서 서울을 거쳐 여수에 도착하여 화순까지는 택시를 이용했다. 화순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광주로 들어갔다. 서울에서 광주로 직접 갈 수 있는 길이 봉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쿄지국으로 돌아온 다음 나는 5월 30일자 같은 신문에 사설을 썼는데 편집자가 붙인 제목은 '광주의 불길한 예감'이었다. 나는 그후로도 여러 차례 광주를 방문해 광주의 비극을 다루어왔다. 뿐만 아니라 1988년에 출판한 한국관련 서적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38장의 파노라마') 429~433, 440, 443쪽 참고 1988, 독일 뮌헨 Piper 출판사 간행)에서도 광주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나는 또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피고인들의 재판을 취재하기 위하여 서울을 방문했다. 일련의 재판과정 중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은 광주와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재판부의 너무나 불충분한 조사와 심문으로 인해 결국은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에서 그들이 광주에서 행한 범죄행위들이 극히 미미하게 반영되고만 사실이라고 느꼈다. 나는 재판부가 최규하 전 대통령에게 광주항쟁 및 그 이후와 일련의 사태로 이어진 의사결정 과정의 목격자로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끝내 침묵을 허용한 사실에 대해서도 분개했다. 그는 최소한 법정 모독죄로라도 단호히 처벌되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전반적으로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을 비롯한 광주 유혈참극의 공범들을 재판에 회부한 사실은 괄목할 만한 성과라고 느끼고 있다. 당시 희생자들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만족스러울 것이지만 최소한도의 정의는 실현되었다. 한국의 법률 및 정치 제도의 진전이 가져다 준 승리라고 생각하며, 이번 승리의 가장 중요한 측면 중의 하나는 군부가 과거의 동료들에 대한 재판과 판결에 대해 무력이든 간섭이든 개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1960년부터 전두환 정권의 종말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군부의 정치개입과 비교해볼 때 이 점은 정말 의미 있는 진전이다.
1980년 5월 30일자 '슈트 도이체 차이퉁'지에 실린 필자의 사설 - 광주의 불길한 징조
한국 국민들은 최근의 격동의 역사를 통해 수차례에 걸쳐 외국 및 국내의 압제자들에 대항하여 강한 독립심과 민족자결정신을 과시해 왔다. 오늘날까지 3.1절은 1919년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여 일어난 민중봉기의 기념일로 기려지고 있다. 1960년 4월 학생들의 의거는 과거의 독립투사에서 부패한 독재자로 전락해버린 이승만 정권을 타도했다. 계엄군에 의해 진압된 최근의 광주항쟁 역시 국내의 압제자, 즉 박정희 대통령 시해 이후 전두환 소장이 이끌고 있는 군부세력에 대한 저항이었다. 학생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가 나중에 대다수의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합류했던 최근의 항쟁을 북한으로부터 남파된 간첩 또는 소위 용공분자들의 소행으로 돌리려고 하는 군부의 시도는 사실의 왜곡일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정치를 단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법과 질서만 유지하면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협한 사고방식과 모종의 저의가 숨겨져 있다. 만약 광주항쟁이 어떤 측면에서든지 북한을 이롭게 했다고 강변한다면 그것은 바로 광주시민들이 체험한, 발생 초기에는 매우 평화적이었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공수부대가 자행한 무자비하고도 극심한 야만성이야말로 북한을 이롭게 한 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전쟁 중의 쓰라린 체험을 통해서 한국 국민들은그러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 집단은 오직 공산당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장하지 않은 젊은 시위대(그 중에는 다수의 고등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희생자 중에는 여학생들도 많았다)를 대낮에 겁에 질린 시민들이 빤히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대검으로 찌르고 총을 난사한 행위가 단순히 계엄령 확대를 반대하여 일어난 시위를 무장시민항쟁으로 바꾸어 자연발생적인 분노를 폭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전두환은 박정희보다 더 나쁜 놈이다. 전두환은 반드시 물러나야 한다."
비록 광주항쟁이 막강한 군부의 무력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위와 같은 광주시민들의 구호는 잊혀지지 않고 기억될 것이다. 광주의 원혼들은 군부세력에게 불길한 징조로 남을 것이다. 현재 전두환은 유력한 실력자로 부상해 있다. 그러나 광주항쟁 진압 이후에는 그가 이끄는 일부 장성들이 갈망하는 국내의 안정이 쉽사리 회복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만약 전두환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른 군부실력자에 의해서 강제로 밀려날 가능성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처럼 반드시 무력에 의한 퇴장일 필요는 없다. 박 대통령은 1979년 가을 부마항쟁 직후 자신의 심복인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시민들의 저항을 오로지 더욱 강경한 억압수단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데 있었다. 이러한 추론은 현재의 우두머리인 전두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전두환은 이제 한국의 안보뿐만 아니라 세계의 안보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등장하고 말았다. 한국의 가장 중요한 우방인 미국과 일본은 광주항쟁의 발발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다. 양국 모두 서울의 지배자들에게 계엄령 확대, 국회 폐쇄, 정치지도자들의 구금, 최규하 대통령의 권한 박탈 등 일련의 사건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중단된 민주화 조치들을 가능한 신속하게 재개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해왔다. 동시에 워싱턴과 도쿄 당국은 최근의 상황을 군사적 모험의 기회로 이용하지 않도록 북한을 설득하는 데 힘을 기울여왔다. 미국은 평양에 대한 직접적인 경고를 통하여, 일본은 오히라 외상과 중국의 화국봉 간의 대화를 통한 간접적인 방법을 활용해왔다. 북한은 남한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화국봉의 서명은 물론 확실한 담보는 아닐지라도, 만약 북한의 김일성이 무력도발을 감행할 경우 이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약속으로 간주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련만이 북한의 방패막이로 남게 될 것이다. 유럽 국가 중 한국의 최대 무역상대국인 서독 정부도 어떠한 조치를 취할 것인가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현재 본국에서 휴가 중인 한국 주재 독일 대사의 현지귀환이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군부에 의해 내세워진 민간인인 박충훈총리서리에 대한 헌법이 규정한 국회의 인준절차가 완료되기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군부세력이 광주항쟁 이후에도 종전처럼 쉽게 정치에 다시 개입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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