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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46 호
단기 4340. 8. 18 (음력 7. 0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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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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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전국문화가족 창작시공모를 실시합니다. 시를 사랑하는 문화가족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추진일정* - 공모분야 : 시(한시, 시조 등 포함) - 공모편수 : 제한없음 - 접수기간 : 2007. 9. 10~ 9. 21(12일간) - 발 표 : 2007. 10. 25(목) (개인통보 및 한국문화원연합회 홈페이지 : www.kccf.or.kr)
*응모자격* - 자격 : 시에 관심 있는 일반국민(단, 문단 등단시인 및 활동 중인 기성시인 제외)
*접수처 및 접수방법* - 접 수 처 : 해당지역 문화원 (또는 인근문화원) - 접수방법 : 인터넷 접수 (제출시 인적사항 /주소, 성명, 주민등록번호, 연락처 등) 기입 - 문 의 : 한국문화원연합회, 시도지회, 지역 문화원
*참고사항* - 수상작의 저작권은 5년간 한국문화원연합회에 귀속 - 수상작 발표후 자격 결격사유가 확인될 경우 수상작 취소
*시상내역* - 대 상 1편 / 국회의장상 (50만원) - 금 상 2편 / 문화관광부장관상, 국회문화관광위원장상 (각40만원) - 은 상 2편 / 한국문화원연합회장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장상 (각30만원) - 동 상 10편/ 한국문화원연합회 시도지회장상 (각20만원) - 장려상 20편/ 해당지역 문화원장상 (각10만원) - 특별상 2편/ 국제펜클럽한국본부이사장상, 한국문인협회장상 (각30만원)
*향후계획* - 상위 우수작 시낭송(2007. 11. 8(목) 국회도서관)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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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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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이 분노. 노여워할줄 모르는 사람은 졸작 중의 졸작인간,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 /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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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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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2. 율곡 이이
나눔이 공식
사람을 상대하는 데는 마땅히 인정과 존경심에 힘쓸 일이다. 나이가 나보다 배가되면 아버지처럼 섬기며, 십년 위이면 형으로 섬기라. 그가 누구든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먼저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조금 배웠다고 해서 그 지식을 믿고 스스로 높은 체하거나 기개를 뽐내어 남을 능멸치 말아야 한다.
벗을 택하되 반드시 학문을 숭상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며, 바르고 엄숙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을 선택하라. 그와 함께 거처하면서 그 벗의 법도를 진심으로 받아들여 나의 부족함을 다스릴 것이요, 만일 태만하여 장난을 좋아하거나 유약하고 아첨하며 정직하지 못한 자는 사귀지 말아야 한다.
고향의 착한 사람과는 반드시 친근하여 정분을 통할 것이로되 착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나쁜 말로 그의 비루한 행위를 널리 퍼뜨리지 말라. 그저 태연히 대접하되서로 왕래하진 말아야 한다. 만날 때 서로의 안부나 묻고, 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으면 자연히 멀어지게 된다. 원망하거나 성낼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소리가 같으면 서로 화답하고 기질이 같으면 서로 찾게 되는 것이니, 만일 내가 학문에 뜻을 두면 내가 또다시 학문하는 친구를 구할 것이요, 학문하는 친구는 또한 나를 구할 것이다. 명색이 '학문한다'하면서 마당에 잡객이 찾아 들어 시끄러이 나날을 보내는 자는 반드시 그 즐거워하는 바가 학문에 있지 않은 까닭이다.
인사 차리는 예법은 꼭 정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 아버지의 친구분이거나 동네에서도 나이가 열 다섯 이상 연장인 분, 선생님, 집안 어른들에게는 깍듯이 절하는 것이 법도이다. 장소와 때에 따라 들어맞게 할 것이요,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한 크게 구속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항상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의사를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것이 옳다. "시경"에 '온화하고 공손한 사람이여, 오직 덕의 기초로다'하였다.
남이 나를 훼방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돌이켜 스스로를 반성하라. 만일 내가 정말 훼방 받을 만한 행동이 있었으면 스스로 꾸짖어 고쳐야 할 것이다. 만일 나의 과실이 아주 작은데도 그가 보태어 말했다면 그의 말이 비록 지나치기는 하지만, 내가 실로 훼방 받을 근거가 있었으니 역시 지난날의 잘못을 통절히 파헤쳐 털끝만큼이라도 남겨 두지 말아야 한다. 만일 내게는 보래 허물이 없는데 헛소리를 날조하였다면 그는 망령된 사람일뿐이니, 망령된 사람과 어찌 잘잘못을 따질 것인가. 그러므로 헛된 훼방은 바람이 귀를 스쳐 가고 구름이 허공에 떠 있는 것과 같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되겠는가. 따라서 훼방이 될 만한 일이 있었으면 고치고, 없었으면 더욱 착한 일에 힘 쓸 것이다. 그러면 나에게 유익하지 않을 것이 없다. 만일 그것을 듣고 시끄러이 스스로를 변명하면서 자기를 허물없는 입장에 놓으려고 한다면, 그 허물은 더욱 깊어져서 남으로부터의 훼방은 더욱 무거워진다. 옛날에 훼방을 없게 하는 방법을 물었더니, 문중자(중국 수나라의 왕통:그가 지었다는 "문장자중설"을 말하기도 함)가 답하기를 '스스로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것이 제일이다'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한 말씀을 더 청하였더니 '변명하지 말라'하였다. 이 말은 곧 배우는 자의 법이 될 만하다. 무릇 선생이나 웃어른을 모실 때는 마땅히 의리의 알기 어려운 곳을 질문하여 그 배움을 밝혀야 한다.
집안이나 마을의 어른을 모실 때에는 마땅히 조심하고 공손하며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묻는 것이 있으면 공경히 진실로써 대답해야 한다. 친구와 같이 있을 때에는 마땅히 도의로써 연구 연마하여 오로지 문자와 의리만 말할 뿐이요, 세속의 비루한 말이나 이해 득실과 윗사람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점, 타인의 허물이나 좋지 아니한 점을 일체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동네 친구와 더불어 있을 때에는 비록 묻는 데 따라 응답하더라도 끝내 비루하고 잡스런 말을 뱉지 말라. 오직 착한 말로 달래고 이끌어서 학문에 나아가도록 해주며, 나보다 나이 적은 자에게는 순순히 효도와 우애, 충성, 믿음을 말하여 착한 마음이 생겨나도록 하여 줄 것이다. 이렇게 하기를 즐기면 풍속을 점점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항상 온순하고 공손하고 자애로우며 남을 이롭게 하라. 남에게 재물을 주는 것을 즐길 것이요, 남을 괴롭히거나 해끼치는 일은 털끝만큼도 마음에 두지 말라.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려면 반드시 남을 침해하게 되는 까닭에 배우는 자는 먼저 이기심을 끊은 후에야 학문에 정진할 수 있다. 선비는 부득이한 일이 아니면 관가에 출입하지 말라. 고을의 수령이 비록 친한 사이라도 자주 찾지 말일인데 하물며 친구가 아님에랴. 의롭지 못한 청탁 같은 것은 일체 말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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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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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논쟁별로 본 한국 철학
2. 유불 논쟁
2. 유불 논쟁의 주요 논점들
불교의 이단성에 관한 논쟁-중국 중심주의와 보편주의의 대립
정도전은 유학의 도통 관념에 근거하여 불교가 옛 성인의 도와는 다른 이간의 가르침이라는 점을 배불론의 한 근거로 삼고 있다. 유학에서 도통 관념이 확고하게 정립된 것은 주자학에 와서이지만, 그 원류는 멀리 맹자에게까지 소급된다. 맹자는 전국 시대 양주와 묵적의 세력 팽창에 유학의 존립 기반의 위기감을 느끼고 유학의 도를 지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유학사상 최초로 요, 순에서 공자로 이어지는 유학의 도통을 제시하였다. 맹자 이후 이러한 도통론은 당대의 한유를 거쳐 최종적으로 송대의 주희에 의해 공자 이후 다시 안자, 증자, 맹자에서 이정 형제로 이어지는 도통의 계보가 완성되어 주자학의 일반적인 도통관으로 정착되게 되었다. 정도전은 이러한 도통관에 의거하여 요순이 사흉을 주벌한 예를 역사상의 벽이단의 원류로 보았으며, 또 탕왕과 무왕이 걸, 주를 친 것을 상제의 명과 하늘의 명을 따른 것이라 하여 이단 배척의 당위성을 천명과 연결 지어 절대시하였다. 그는 특히 맹자가 양주와 묵적을 배척한 것은 묵적의 겸애설과 양주의 위아설이 사람들을 미혹시켜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는 지경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불교는 이론이 심오한데다 겉보기에 유학과 비슷하게 성명과 도덕을 언급하고 있기에 그 폐단이 이들보다 더 심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임무로 삼은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단의 설에 현혹되어 빠져들고 인간의 도리가 사라질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불교 비판의 동기를 제시하였다. 기화는 이 같은 유학의 도통론에 근거한 불교 배척에 대해 상대적이고 협애한 지역 개념에 의한 것으로 부당하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어떤 사상을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느 지역에서 나왔는가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 하는 점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동이니 서이니 하는 이름은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스스로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고 불교의 발상지인 천축국을 일러 서쪽 오랑캐라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천축국에서도 중국을 동쪽 오랑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오직 그 도가 따를 만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보아야지 그것이 나온 바의 자취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상이 불교의 이단성과 관련한 정도전의 비판과 기화의 대응이었다. 그런데 정도전이 불교를 이단으로 지목한 것은 단순히 지역적인 기준에 의거해 불교가 중국이 아닌 서역에서 생긴 것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문제삼은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유학의 가르침과는 상이하다는 점이었다. 기화의 반론을 인용한다면 과연 "그 도가 따를 만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에서 불교의 도는 따를 만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단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정도전이 문제삼은 것은 불교가 가진 내용의 이단성이었으며, 그 주된 대상은 유학과 대비되는 불교의 인륜 경시 혹은 부정의 측면이었다. 그런 점에서 기화의 반론은 정도전의 비판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점을 확대해서 보면 기화의 대응은 오히려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유학이 단순히 지역적 기준에서가 아니라 가르침의 내용으로 이단과 정통을 가르고 있다 하더라도, 유학자들이 가진 이단성의 판별 기준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정통으로 선점한 이른바 "성인들이 서로 주고받은" 유학의 도였다. 실제로 정도전이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 또한 유학의 가르침이 옳다는 전제하에서 불교의 가르침은 유학의 가르침과 상이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유학의 도는 중국에서 생기고 발전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유학자들의 도통론에서는 유학과 중국이 등치 가능한 개념이다. 따라서 이단성의 잣대가 외래 사상인 불교에 적용될 경우 그것은 지역적 편가름의 성격을 띠게 마련이다. 기화의 반론은 바로 지역적 개념의 상대성을 들어 유학의 이단론이 근거로 하는 유학 중심주의 혹은 중국 중심주의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진리의 보편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불교와 유학의 이단성 논쟁은 중국 중심주의와 보편주의의 대립이라고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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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공화국
본뜻 : 공화국은 본래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정치를 하는 나라를 말한다. 그 앞에 붙는공화국을 가리키는 숫자는 공화국의 헌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숫자를 붙여 나간다. 우리 나라는 광복 후 이승만 정권이 제1공화국, 그 다음 장면 정권은 과도 정부, 윤보선 정권이 제2공화국, 박정희 정권이 제4공화국, 전두환 군사 정권이 제5공화국, 직선제로 노태우 정권이 제6공화국, 지금 김영삼 정권도 제6공화국의 헌법을 그대로 쓰고 있으므로 제6공화국임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노태우 정권 시절을 가리킬 때 제6공화국 말기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김영삼정권도 제6공화국인데 단지 그 단어를 쓰지 않고 있을 뿐이다.
바뀐 뜻 : 공화제를 채택한 나라의 헌법이 바뀔 때마다 그 전의 헌법과 다른 헌법으로 나라가 운영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표시다.
"보기글" -김영삼 정부는 제6공화국이냐, 제7공화국이냐? -헌법이 바뀌지 않았으니 제6공화국인 것만은 확실한데, 제6공화국을 거쳐온 노태우 정권과 혼동되는 것을 염려해서 되도록이면 제6공화국이란 말을 쓰지 않는 것이다
조장
본뜻 : 옛날 송나라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어떤 농부가 곡식의 싹이 더디 자라자 어떻게 하면 빨리 자랄까 궁리를 하다가 급기야는 싹의 목을 뽑아 주었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싹이 자라는 걸 도와주고 왔소이다" 이 말을 들은 아내가 아무래도 미심쩍어 나가 보니 싹이 모두 위로 뽑혀 있어 물을 제대로 빨아들이지 못해 시들시들하게 말라 있었다.
바뀐 뜻 : 도와서 힘을 북돋아 주는 것을 이르는 말이었는데 요즘 와서는 옳지 못한 것을 도와준다는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보기글"
-본고사 부활 이후로 선생님들이 수업의 효율성이니 능력의 극대화니 하면서 은근히 우열반 편성을 조장하는 거 같아요 -일부 대중 스타들의 일본풍 패션이 청소년들 사이에 일본 문화가 퍼지는 것을 조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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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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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제국주의 영국의 마지막 부채 - IRA와 아일랜드
마이클 콜린스와 IRA
마이클 콜린스는 우리에게 미지의 인물이었다. 1996년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와 남우 주연상을 수상한 닐 조던 감독의 영화 <마이클 콜린스>(1995년) 덕에 세계적 지명도를 얻은 그는, 1919년에서 1921년까지의 아일랜드 독립 투쟁을 진두 지휘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영웅의 모습은 콜린스 자신도 꿈꾸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그는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런던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을 만큼 평범했다. 그러다가 1916년 부활절 봉기에 참여하고 이후 두 차례에 걸쳐 투옥되는 등 고난을 통해 단련되면서 독립 영웅으로서의 면모를 얻게 된다. 마이클 콜린스는 1919년 에몬 드 발레라의 탈옥을 지휘한 후 신 페인이 선포한 공화국의 내무 장관과 재정 장관 등 주요 직위를 거친다. 그 밖에도 그는 정보 수집 할동과 무기 밀공급을 지휘했다. 그리고 암살조를 조직하여 지휘하는 일도 마이클 콜린스의 몫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응징한 것은 영국 정부의 앞잡이들이다. 조국을 배신하고 정복자 편에 선 아일랜드인들은 길거리, 시장 그리고 교회 앞에서 낯선 청년의 손에 차례차례 살해당하고 그럴수록 마이클 콜린스의 명성은 높아 갔다. 여러 지위를 거친 마이클 콜린스이지만 그는 무엇보다 IRA의 지휘자로서 기억되고 있다. IRA, 즉 아일랜드 공화군은 `아일랜드 자원군(Irish Volunteers)`의 후신으로 1919년 조직되었다. 자율성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지만 IRA는 신 페인의 국방 장관의 지휘를 따르는 군대로서, 다일의 독립 선포 직후 본격화된 독립 투쟁의 선봉에 선다. 다일이 구성된 직후 영국은 가공할 탄압을 시작했다. 아일랜드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아일랜드 지역의 시장 3명이 IRA 요원이라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IRA 등 독립 투쟁 세력의 거점이 될 듯한 집과 상가와 공장은 모조리 불길로 타올랐다. 아직도 정확한 수가 알려져 있지 않은 무수한 시민과 독립 투쟁가들이 체포되어 고문당하다가 법적 절차 없이 살해되어 매장되는 일도 빈번했다. 마이클 콜린스가 이끄는 IRA는 게릴라 전술로 영국군에 맞섰다. 20명 내외의 소규모 부대별로 암약하고 사보타주를 선동하여 영국의 지배를 교란하였다. 물론 요인 암살과 영국군에 대한 철저한 보복도 기본 원칙이었다. 영국은 마이클 콜린스와 IRA를 섬멸하기 위해 특수부대 `블랙 앤드 탠(Black and Tan)`을 투입하고, 마이클 콜린스의 현상금으로 1만 파운드(현재 환율로도 1,000만 원이 훨씬 넘는 돈이다)를 걸었지만 마이클 콜린스는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IRA가 분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 일반 시민들의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영국군으로서는 시민과 IRA를 구분하는 일이 쉽지 않았고 또한 모든 시민이 잠재적인 저격수였으니 싸움이 여간 벅찬 것이 아니었다. 마이클 콜린스와 IRA의 테러 전략은 전혀 흔들림 없이 지속되었고 1921년 영국군 합참 의장 헨리 윌리엄을 암살했을 때 IRA의 전과는 절정에 다다른다. 영국 정부는 불순분자들을 격퇴하고 아일랜드를 속국으로 묶어 두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 테이블을 마련하고 아일랜드 독립을 인정한 것인데, 이 독립 협상에서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와 마주했던 아일랜드의 대표 중 하나가 마이클 콜린스이다(영화 <마이클 콜린스>에는 윈스턴 처칠의 이름이 자주 나온다. 가령 마이클 콜린스는 협상 대표로 선출된 직후 `처칠이 영국 대표로 나올지 모른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처칠은 당시 영국 수상이 아니었다. 처칠은 알다시피 1940년 이후에 수상을 두 차례 역임했다. 그런데 왜 처칠의 이름이 여러 번 나올까. 아마도 그가 당시 대내외 주요 군사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처칠은 1917년에서 1922년까지 식민지 유지와 군사 작전 등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아일랜드의 독립 전쟁 기간 동안 진압군의 책임자이자 마이클 콜린스의 직접적 라이벌이었던 셈이다. 마이클 콜린스는 처칠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한 것이다).
그런데 독립 협상에 나섰던 마이클 콜린스가 영국 왕권에 대한 충성 서약을 조건으로 수용했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아일랜드인들은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정복자를 상징적 군주로 떠받드는 치욕을 감수해야 했고, 아일랜드는 영연방의 일원으로 묶이게 된 것이다. 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마이클 콜린스가 서명한 협정문은 아일랜드의 분단을 독립의 전제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카톨릭계가 95%를 차지하던 남부 아일랜드의 26개 주는 1922년 1월 독립하였지만, 프로테스탄트가 근소한 차이로 다수이던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의 영토로 남겨지게 된 것이다. 마이클 콜린스는 어쩌면 현실적인 거래를 했는지 모른다. 영화속에서 그는 분단 독립이 완벽한 승리는 아니지만 테러와 전쟁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분단 독립을, 완전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여기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마이클 콜린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의 선택은 아일랜드 정치사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 게 사실이다. 아일랜드의 독립 투쟁은 최종적 성공에 이르기 직전에 멈춘셈이고 아일랜드인들은 동족상잔의 내전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 영국과의 독립 협상을 치욕으로 여긴 정치 세력들은 마이클 콜린스에게 극렬히 반대하고 나섰다. IRA만 해도 두 개의 분파로 분열된다. 다수는 분단 독립에 반대하면서 `비정규군(Irregulars)`을 조직하고 마이클 콜린스 진영과 내전을 벌인다. 결국 비정규군과 독립 협상 반대파가 패배하는데, 내전 과정에서 수천 명이 사망한다. 마이클 콜린스도 내전 희생자 중 하나였다. 1922년 8월 20일 콜린스는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반대파에게 평화 협상을 제의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위스트 코크에 주둔한 군병영을 방문한다. 길을 나서기 전 그는 `그들은 내 고향에서 나를 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의 이 말은 불행의 전조가 되고 말았다. 22일 군병영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콜린스는 잠시 가족들과 만났다. 그리고 가족들과 헤어진지 2시간 뒤 그는 자신의 호위병에게 암살당한다. 그 암살자가 협상 반대파의 비정규군이었는지, 아니면 콜린스 지지파 내부의 불만 세력이었는지는 아직도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그 내막이야 어떻든 영국군과의 지루한 전쟁에서도 살아남았던 마이클 콜린스가 결국 동족에게 살해된 것이다. 마이클 콜린스의 사망 이후 남아일랜드는 곧 명실상부한 독립을 이룬다. 1937년 헌법이 국민 투표를 통과하면서, 기존의 아일랜드 자유국은 폐기되고 에이레가 세워졌다. 그리고 영연방과의 관계가 효력을 상실한 직후인 1949년 4월 18일, 부활절 봉기 기념일에 에이레는 아일랜드 공화국(the Republic of Ireland)으로 면모를 일신한다. 아일랜드 공화국은 영국에 대한 종속 관계를 청산한 명실상부한 독립 국가이며, 1955년 유엔의 구성원이 된다. 하지만 평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다. IRA의 테러는 지속되고 영국의 영토로 남은 북아일랜드에서도 유혈 독립 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분단 독립이 희생과 폭력을 멈추게 할 것이라고 믿었던 마이클 콜린스가 틀린 것이다. 1921년의 분단 독립과 아일랜드 공화국의 탄생도 평화를 담보하지는 못했다. 여전히 아일랜드의 반이 외세 치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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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산문/서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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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7.내일을 위한 건배
가족을 최고의 후원자로 만들어라
나는 전근대적인 가정에서 성장하였다. 배운 것이라곤 여성은 다른 여성들이 옛날부터 살아 온 방식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교육을 거부했다. 내가 처음 텔레비전에 출연했을 딸은 16살, 아들은 12살이었고, 우리 부부가 결혼한지 17년이 되던 해이다. 내가 출연한 쇼프로가 방영되었을 때 나는 디트로이트의 방송실에 있었고 어머니는 뉴욕의 자택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쇼가 끝나자마자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땠어요. 재미 있었나요 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응, 무척 재미있었다 고 말해 나를 즐겁게 했지만 그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 넌 도대체 언제 애들을 보살필거냐. 쓸데없이 주위에서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일을 택하든지 아니면 가족을 택하라는 양자 택일을 강요받고 있는 여성이 특별히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전부터 결심한 것이 있었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내 인생을 가치 있게 살아가자, 내가 마음 먹은대로 살며 스스로 나의 인생행로를 정하고 내 나름의 목표를 추구하자고. 물론 나의 가족의 행동에 대해서도 항상 마음을 써왔다. 나에게는 지금 가족이라는 강력한 후원자가 있지만, 처음부터 특별히 이해심 많은 가족이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오랜기간동안 그들에게 이해받기 위해 노력했으며, 후원자로 만드는 데에 심혈를 기울였다. 아이들은 집에서 항상 자기들을 돌봐주는 어머니를 갖지 못했고, 남편은 늘 혼자서 식사를 해야만 했다. 그런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으로서의 결속은 무너지 않았다. 언제나 서로의 목표를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벌써 22세가 된 아들이 최근에 이런 말을 했다. 결혼상대자로는 자아가 확고히 정립되어 있고, 취미가 풍부하며, 뭔가 평생 동안 할 수 있는 일을 갖고 있는 여성이 좋아요. 아내의 인생까지 책임지는 것은 딱 질색이니까요. 그 말을 듣고 어머니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행한 나의 교육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막 결혼했을 무렵, 나는 살림을 유지하기 위해 밖에 나가 일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외출하는 것은 괴로웠지만, 생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성품이 어떤지도 모른 채 부모들을 고용했었는데, 그녀들은 우리 가족을 위해 매우 잘 해 주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어렸을 때 그다지 함께 해주지 못한 일은 아직까지도 후회가 된다.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가족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심하게 굴곤 했다. 결코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다. 그 무렵은 불안과 좌절감으로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은 최악의 날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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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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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2. 사화의 소용돌이
신선로를 만든 은둔자 정희량
정희량(1469-?)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순부, 호는 허암이다. 문장을 익히고 시에 능하였으며, 음양학에 통달하여 스스로 자기 운명을 점쳐 보고는 은둔하려는 뜻을 품었다. 성종 23년(1492)에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연산군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의 검열. 봉교를 지내고 호당에 들어갔다. 무오사화 때에 의주로 귀양갔다가 내지인 김해로 옮긴 후 3년 뒤에야 풀려났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정성스럽게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는 늘 "갑자년의 화가 무오사화보다 심하여 우리들도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세상을 도피하려고 중이 내왕할 때면 서로 함께 모의를 하고 때때로 혼자 부모 묘소에 가서 배회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집 식구들은 어머니를 사모하는 것으로 여겼다. 어느 날 그는 집을 나갔다가 오래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식구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종적을 찾아 물가에 이르렀는데, 짚신 두 벌과 상관이 물가에 있었다. 강물에 빠져 죽은 것으로 여기고 두루 찾았으나 끝내 그 시체를 찾지 못하였다. 친척인 해평군 정미수가 계를 올려, 그의 생김새와 복색을 알려 찾기를 청하였으나, 연산군은 "미친놈이 도망하여 죽었는데 무엇하러 찾느냐"고 하였다. 연산군 10년 갑자사화가 일어났으니, 그 말이 과연 징험된 셈이다.
퇴계 이황이 산중에서 '주역'을 읽는데, 한 늙은중이 곁에 있다가 이따금 구두의 잘못을 고쳐 주었다. 퇴계는 마음속으로 그가 허암일 것이라 여기고 물었다.
"지금은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때인데 정허암은 어찌하여 다시 속세에 나오지 않소?" "정희량은 어버이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다가 삼년상의 예를 마치지 못하였으니 불효요, 임금을 버리고 세상을 등졌으니 불충한 것이오. 불효하고 불충하였으니 죄가 막대한데, 무슨 면목으로 다시 인간 세상에 나가겠소"
그는 조금 뒤에 작별 인사를 하고 어디론가 홀연히 떠났다. 정희량이 장가를 든 뒤 아내를 멀리하여 얼굴을 대면하지 않았다. 정희량의 아내가 늙은 뒤에 단옷날을 잡아 남편의 기일로 삼고, 남겨놓은 의복을 묻어 무덤을 만들었다. 용재 이행이 시를 지어 조문하였다.
비방과 칭찬 분분하게 만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도 허암공의 마음과 뜻 가늠하지 못하겠네 고양 남강 어디메에 남긴 자취 찾으랴 붉은 통 오색 끈을 부쳐 주기 원하노라
정희량은 화를 피해 중이 되어 스스로를 이천년이라 하고, 산수에 노닐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가천원의 벽에 시를 지어 붙였다.
비바람 치는 전일 놀라 달아났고 문명한 이때에도 저버렸네 외로운 지팡이로 우주간에 노닐으니 시끄러움 싫어져 시마저 짓지 않으련다
그는 주역 수화기제괘(일이 이미 일정하게 되어 있는 모양)의 이치로 화로를 만들어 채소를 익혀 먹었는데, 아침, 저녁 식사할 때에도 오직 이 화로 하나뿐이었다. 그가 신선이 되어 가 버리자 세상 사람들이 이를 '신선로'라 하였다. 오늘 우리가 즐겨 먹는 신선로의 근원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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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저지른 죄는 그의 자손에게로 물려졌다. 즉 '아담'은 인류의 우두머리이며 그 자격으로 범한 죄이기 때문에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그 죄과를 짊어지고 나오는 것이다. 이 죄를 기독교에서는 원죄라 하고 있다.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에서 베푼 혜택을 상실하고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존재로 태어나는 것은 원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속죄를 한 결과 사람은 신앙, 수세에 의하여 원죄를 그 본질에 있어 용서받기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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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4장 완전한 기쁨을 주는 인생 수업
어린 스승과 나이 많은 제자
이토 사치오는 마사오키 시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가인으로, 이른바 경쟁 관계에 있었다. 실제로 아무리 사소한 차이를 놓고도 논쟁을 벌이곤 했는데, 그러는 사이에 사치오는 시키가 자신보다 한층 더 뛰어나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시키를 찾아갔다. 그리고 직접 시키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접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린 시키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치오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허심탄회하게 노래를 사랑하고 시키를 스승으로 존경했다. 그리고 만나기만 하면 언제나 토론을 즐겨 밤이 으슥해지는 것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먼동이 틀 대야 사치오가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시키가 죽자 사치오는 한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스승으로 섬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 사치오는 새로 스승으로 섬길 수 있는 것은 '만엽집'뿐임을 깨닫고 마침내 단가의 왕좌에 오를 수 있었다. 본래 그래서는 안 되지만,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은 경쟁 의식을 느끼고 서로를 견제한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좀처럼 머리를 숙여 스승으로 모시려고 하지 않는다. 하물며 상대의 나이가 자신보다 어리면 그저 연상이라는 것만을 내세워 거세게 벋댄다. 같은 길을 걷는 사이라는 것에 쓸데없이 구애되어 상대의 발밑에 무릎꿇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굴욕으로 여긴다. 그러나 스승이란 말할 것도 없이 그 길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다. 상대에게 존경심을 느낄 수 있다면 그를 스승으로 우러러보고 그 가르침을 얻는 것이야말로 그 길을 보다 잘 걸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정진하겠다는 의지가 굳으면 굳을수록 이것은 중요하다. 따라서 사치오가 단호하게 결심하여 일체의 잡음과 구애를 떨쳐버리고 시키의 제자로 입문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길에 대한 순수한 의욕에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사치오가 어린 시키의 문하생이 되겠다는 용기를 발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훗날 그 길의 왕좌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밝힌 것이다. 베이컨은 말했다 "현명한 사람일수록 더욱 허리를 낮추고 남에게 배우려고 한다." 우리는 걷는 길에서 뿐 아니라 별 것도 아닌 시시한 것에 구애되어 쓸데없이 어깨에 힘을 주는 일이 많다. 그런 태도야말로 더없이 어리석다는 것을 깊이 깨닫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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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1 - 후안 마누엘
열여덟번째 이야기 조롱받은 선한 일
루까노르 백작이 그의 방에서 빠뜨로니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빠뜨로니오, 그대가 알고 있듯이 나는 뛰어난 사냥꾼이라 다른 사람들이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방법으로 사냥을 하곤 했소. 이를테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올가미나 그물 같은 것을 사용했단 말이오. 그런데 지금은 나에 대해서 험담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그것을 두고 나를 조롱하고 있소.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시드나 페르난 곤잘레스 백작, 성인들 혹은 페르난도 왕을 칭찬할 때에 나에 대해서도 칭찬하는 것을 들을 수 있지만 그물이나 올가미 등을 사용하는 나의 사냥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되면 어느새 조롱하는 투가 된다오. 그들이 하는 칭찬은 존경이라기보다 모욕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조롱을 멈추게 할 수 있겠는지 조언을 해주시오." 그러자 빠뜨로니오는 꼬르도바의 아랍 왕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꼬르도바에 알하켄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가 통치하면서 나라가 평화로워지자 그는 이에 만족할 뿐 다른 왕들이 흔히 강조하는 명예나 명성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왕들에게는 나라의 평안을 유지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업적을 쌓아서 통치를 강화시키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알하켄 왕은 자신의 통치 이외의 업적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단지 먹고 마시며 한가로이 휴식을 취할 뿐이었습니다. 어느날 뜰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악기는 모로인들이 즐겨 부는 피리였는데 왕은 그 피리소리가 원래의 소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 악기를 가져다가 악기 아랫부분에 구멍을 내었고, 그러자 피리소리는 전보다 한결 좋아졌습니다. 왕은 유익한 일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왕으로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왕을 존경하는 척하며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칭찬하는 말로서, ‘알하켄 왕의 추가물이구나’라는 유행어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말이 온 나라에 퍼져 왕의 귀에까지 이르자 왕은 신하들에게 사람들이 그 말을 왜 그리 즐겨 사용하는지 물었습니다. 신하들은 애써 숨기려 했지만 왕이 자꾸 묻는 바람에 대답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듣고 난 왕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자꾸 사용하는 사람들을 벌하기보다 왕으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윽고 왕은 짓고 있던 꼬르도바의 회교 사원을 완공 시켰습니다. 이 사원은 현재까지 모로인들이 스페인에서 지은 사원 중 가장 크고 훌륭한 사원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산타 마리아 교회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답니다. 그 전까지는 조롱하며 거짓으로 왕을 찬양하던 사람들이 왕이 회교 사원을 지은 이후로는 진심으로 그를 받들고 찬양했습니다."
"그러므로 백작님, 사람들이 사냥을 위해 발명한 그물과 올가미에 대해 이야기하며 조롱한다면, 이번에는 위대하고 품위있는 업적을 쌓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당신의 업적에 대해 감탄하며 찬양할 것입니다."
* 선하되 위대하지는 못한 일을 했다면, 더 정진하여 위대한 일을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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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특파원 리포트 - 한국기자협회,무등일보,시민연대모임
제1부 신군부의 만행을 전세계로 타전하다
3.광주사건은 폭동이 아니라 봉기였다
나는 1974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의 뉴욕타임스 (New York Times) 서울 주재기자를 지냈다. 그 기간은 18년에 걸친 박정희 군사정권 중 가장 혹독한 독재기간으로 알려진 '긴급조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힘겨운 싹을 틔워가고 있었다. 그 중요한 시기에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는 뉴욕타임스와 조선일보에서 일했던 것은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그 무렵 한국 언론은 197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운동이 좌절된 이후 군사정권의 탄압이 노골화되면서 극심한 보도통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내가 뉴욕타임스에 쓴 기사는 야당과 인권운동 세력뿐 아니라 군사정권에게도 큰 관심사였다. 민주화세력은 고립된 자신들의 투쟁이 국제사회에 비교적 정확히 알려지게 되는 창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우호적으로 생각했지만, 박 정권에게는 눈엣 가시였다. 당연히 중앙정보부의 심한 감시가 뒤따랐다. 하지만 뉴욕타임스가 갖는 영향력 때문에 군사정권이 섣불리 나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이렇듯 특별한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당시 한국 정부가 가장 민감하게 여겼던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성역이 없이 보도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내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한국의 민주주의였다. 나의 중점 취재분야도 민주화운동과 경제개발, 박동선 사건과 한미 외교문제, 한반도의 안보문제 등 대단히 민감한 정치적 주제를 포괄하고 있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인권운동, 3.1명동사건, 김영삼,김대중씨의 민주화운동 등 한국현대사가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는 과정을 나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낱낱이 지켜봤고 그 과정을 다른 매체에 비해 비교적 과감하게 사실대로 보도할 수 있었다. 한국민주화의 분수령이었던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야당 총재의 국회의원직 박탈파동도 나와 동료 헨리(Henry)가 김영삼씨와 인터뷰한 내용이 뉴욕타임스에 실린 게 도화선이 됐었다. 그 기사로 인해 내가 검찰조사를 받는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됐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18년간의 권좌에서 사라지자 한국은 권력의 진공상태를 맞았다. 뒤이은 12.12사건은 신군부의 등장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로 나에게 받아들여졌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소요가 발생하기 전까지 나는 빠른 속도로 실권을 장악하며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하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세력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데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 무렵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당시 주한 미군 사령관 위컴의 '들쥐론' 발언파문도 바로 우리가 쓴 기사 때문이었다. 1980년 4월 초쯤 미국의 AP통신과 LA타임스 특파원들이 위컴 사령관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 인터뷰의 핵심은 '미국이 전두환 군부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 인터뷰 직후 우리는 위컴의 오프더레코드(Off the Record) 회견기의 내용을 입수했다.
'전두환 사령관이 이끄는 신군부가 노골적으로 홍포(紅布)를 몸에 걸치고(wearing the purple robe) 전면에 나서는데 미국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란 내용이었다. '홍포'란 옛 왕들이 걸치던 붉은 가운으로 권력을 상징하는 말이다. 또한 위컴은 이런 말도 했다는 것이다. '한국민들은 들쥐 같아 누가 됐든 강한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면 그 뒤를 죽 따라가는 것 아닌가(Korean people, lemming-like, lining up behind the strong man)'. 문제는 '들쥐 같다(lemming-like)'는 대목이다. 한국에서는 들쥐라는 게 매우 비하시키는 표현이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위컴이 들쥐라는 표현을 쓴 것은 들쥐 떼가 이동할 때 리더의 움직임에 따라 전체가 일정한 방향으루 움직인다는 뉘앙스였다. 동아일보가 AP통신의 기사를 받아 1면에 머릿기사로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발언자는 익명이었다. 우리는 즉각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만나 인터뷰를 시도했다. '외신에 따르면 전 사령관을 미국이 지지한다는데...'라고 묻자 전두환 사령관은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그 기사를 보았습니다. 나는 위컴 주한 미군 사령관이 우리는 지지해준다는 점에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우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전두환의 입에서 익명의 미군 고위 인사가 주한 미군 사령관인 위컴으로 공식 확인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익명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 고위 인사가 위컴이라는 사실을 밝혀 보도했다. 그러자 위컴은 한국민을 '들쥐'라고 비하시켰다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됐다. 그후 어느 파티석상에서 위컴 사령관을 만났을 때 그는 우리를 향해 '당신들은 꺼져버려, 보기도 싫어'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광주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부터다. 경남 고성 출신이었던 나는 그 이전까지 광주땅을 밟아본 적도 없었다. 2월부터 시작된 '서울의 봄'은 국정을 마비시킬 정도의 학생 데모로 확산되면서 파고를 높여가고 있었고, 결국 비상계엄 전국확대라는 고도의 긴장 상태를 맞게 됐다. 나의 촉각은 즉각 광주로 쏠렸다. 계엄당국은 5.17계엄확대와 더불어 곧장 김대중씨를 구속시켰는데 광주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민주주의의 후퇴'로 받아들일 것은 당연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마치 눈에는 보이지만 잡기 힘든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그해 5월 나의 하루 일과는 광주 상황을 체크하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5.17 직후부터는 훨씬 더 광주의 반응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5월 18일 나는 여느 때처럼 전남일보9현 광주일보) 편집국에 전화를 걸어 현장취재 기자에게 광주 상황을 자세히 물었다. 아침 상황은 아직 큰 변화가 없었다. 다시 오후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선을 타고 흘러드는 취재기자의 긴장된 목소리에서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광주에서 소요가 시작됐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큰 변화를 예상할 단계는 아니었다. 부마사태처럼 곧 진압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5월 19일 아침 일찍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또 광주로 다이얼을 돌렸다. 기자의 목소리는 더욱 흥분돼 있었다. 군인들의 잔혹한 진압이 시민들을 자극하고 있으며 데모대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당시 서울의 보도매체들은 광주에 대해 아무것도 보도하지 않고 있었다. 오후에 다시 전화하자 '필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특히 수백 대의 차량시위가 시작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직감이 나를 바짝 긴장시켰다. 도쿄에 있는 지국과 뉴욕의 본사에다 개략적인 광주 상황을 전했다. 20일 오후 광주와의 전화가 아예 끊겨버렸다. 그때까지도 외신 기자들은 조선호텔 커피숍을 무대로 서로 비상계엄하의 한국정치 상황이 어떻게 변할 것 같냐는 등의 의견을 교환하는 한가한 분위기였다. 12.12 직후부터 외신기자들이 한국에 꽤 들어와 있었고 5.17이후 도쿄로부터 더 많은 기자들이 서울로 날아왔다. 특히 20일 도쿄에서 날아온 독일은 TV촬영팀은 곧장 광주 현지로 향했다. 그들은 우릴 보자마자 '서울은 조용한가' '광주에서 소요가 발생했다는데 어떤가' 하는 질문을 쏟아냈지만 대부분 광주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광주 상황을 면밀히 체크하고 있었던 나는 남다른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전화가 끊기면서 나는 현지로 내려가야 한다는 결심을 했다. 21일 새벽 5시 나와 프랑스 르몽드 기자 필립 퐁스는 새벽 어둠을 가르면서 조용히 광주로 향했다. 경비를 반씩 나누어 지불하기로 하고 조선호텔 렌터카를 빌렸다. 4시간 후인 9시 무렵 우리 일행은 서광주 톨게이트에 들어섰다. 무등산을 배경으로 한 광주시내 쪽에선 하늘 높이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치솟아 우리를 바짝 긴장시켰다. 운암동을 경유하여 시내로 진입하자 군데군데 불탄 트럭이 시야에 들어왔다. 광주시내 풍경은 1966년부터 67년까지 내가 경향신문 특파원으로 월남전을 취재하던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광주는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톨게이트를 지나 15분쯤 갔을까. 도끼,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일단의 복면을 한 시민군들이 우리 차를 멈추게 하더니 순식간에 에워쌌다. 그들은 우리 차를 뒤집어버리겠다는 듯이 힘을 합쳐 차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신분증을 내보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러다 이 자리에서 죽는 모양이다 싶었다. 한참 후 어떤 사람이 오더니 시민군의 행동을 제지시키며 자신이 공보담당이라며 따라오라고 했다. 그의 차가 앞장서고 우리는 뒤를 따랐다. 그의 손에는 핸드마이크가 들려 있었다. 그는 핸드마이크로 길 옆의 광주시민들에게 이렇게 외쳐댔다. "광주시민 여러분, 여기 미국의 뉴욕타임스지와 프랑스 르몽드지 기자가 광주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드디어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자 수십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도로변의 군중이 우레와 같은 박수로 우리를 환영했다. 우리는 마치 개선장군 같은 환영을 받았다. 그들에게 우리가 구세주인 것처럼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광주는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하는 곳이 아니었다. 시민들은 여자, 노약자, 어린이 가리지 않고 김밥과 각종 과일 등 음식물을 차에다 올려주거나 양동이로 물을 길러 시민군에게 제공했다. 광주시민들에게서 느낀 첫인상은 폭동(Violence)이 아니라 봉기(Insurrection)였다. 나의 판단은 광주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보면서 더욱 확신으로 굳어졌다. 그들이 왜 우리를 구세주처럼 환영하는지 이유도 알게 됐다. 그들의 봉기는 철저히 외부 세계와 단절돼 있었다. 서울 등 외부 세계는 그들이 벌이고 있는 투쟁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했다. 우리의 등장이야말로 외부 세계에 광주의 실상을 알릴 수 있는 통로였다. 우리에 대한 그들의 협조는 놀라울 정도였다. 우리는 자동차의 외부를 하얀 종이로 빈틈없이 두른 다음 외신 취재 차량임을 표시했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광주시민들은 당시 국내언론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반면 외신기자라면 무조건 통과시켰다. 우리는 곧장 전남대 부속병원으로 향했는데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마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야전병원 장면을 연상시켰다. 병원은 온통 비명과 신음 소리, 비릿한 피냄새로 아수라장이었다. 수술실로 향하는 복도 바닥에는 환자가 즐비했고 핏물이 흥건히 고여 발바닥이 쩍쩍 달라붙었다. 우리 옷은 모두 피투성이가 됐다. 영안실로 향했다. 한 시간쯤 병원에 머무는 동안 20~30여 구의 시신이 밀려들어왔다.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본격적인 발포가 시작되자 총상으로 인한 사망자와 환자가 급증했다. 내가 취재했던 월남전 야전병원보다 훨씬 잔혹한 상황들이었다.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민간인들을 바라보며 나도 광주에서 죽을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실제로 취재기간 동안 몇 차례 위기를 넘겼다. 한번은 전남대 부근을 지나가는데 계엄군의 총탄이 우리의 머리위를 휙휙 지나가 질겁을 했던 기억도 있다.
이 엄청난 상황을 외부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가슴이 탁 막혔다. 광주는 대한민국이라는 바다에서 외로이 떠 있는 고도(孤島)였다. 단 한순간이라도 빨리 전세계에 광주의 상황을 알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시민군 공보담당자에게 기사를 송고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장소를 묻자 순천을 추천했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화순을 거쳐 순천으로 향했다. 몇 해가 지난 후 우리는 그 고마운 분이 광주에 사는 유인배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현재 한겨레신문사 철산지국을 운영하고 있다. 광주에서 불과 20여 분 거리인 화순에 당도하자 그곳은 전혀 딴 세상이었다. 화창한 봄날씨는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며 농부들은 평화롭게 논에서 농사일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화순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 폭약을 차량에 가득 싣고 나오는 시민군과 마주치기도 했다. 복면을 쓴 채 무장한 시민군들이 도망치는 경찰을 붙잡아 차에 태우고 질주하는 모습도 보였다. 순천에 당도하여 호텔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우리 모습을 보더니 질겁을 했다. 필립 퐁스와 나의 옷에 피가 가득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순천과 광주는 불과 한 시간 거리였으나, 광주의 심각한 상황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세상이 희한하게 단절돼 있다는 걸 그때처럼 뼈저리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관광호텔 프런트에서 서울로 전화를 돌렸다. 서울지국으로 첫 원고를 보내는 나의 목소리는 떨렸다. 나의 기사는 곧바로 뉴욕의 뉴욕타임스 본사로 긴박하게 흘러들어갔다. 내 곁에 서 있던 필립 퐁스 역시 프랑스 파리의 르몽드 본사에 흥분된 목소리로 일신을 띄워보냈다. 순천에서 보낸 우리의 광주발 기사는 다음날 뉴욕타임스와 르몽드의 1면 톱을 장식했다. 광주사태가 최초로 전세계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유럽과 마주 대륙에서 최대의 영향력을 자랑하는 두 매체에 보도된 광주 소식은 전세계 언론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우리는 기사가 나가기 전까지 대한민국 광주의 요소는 외신에서 1단 정도로 처리될 만큼 특별한 주목을 끌지 못했었다. 그날 이후 전세계 TV, 방송, 신문, 잡지 등 외신특파원들이 광주로 물밀 듯 밀어닥쳤다. 개인적으로는 광주사태 보도에 관한 특종을 한 셈이었다. 나는 광주보도의 명성에 힘입어 1994년 캐나다 CBC-TV에서 기획특집으로 만든 '세계보도연감'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아시아 민주화운동을 보도한 기자로 선정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1일 오후 순천에서 송고를 마친 나와 필립은 다시 광주로 돌아오려 했지만 이미 광주 방면 도로는 계엄군에 의해 차단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르완다나 최근 알바니아 사태에서처럼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광주를 빠져나오는 긴 피난민 행렬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었다. 순천 쪽에서 바라보는 광주는 그날 밤 내내 콩볶듯 총소리만 요란했고, 간간이 야광탄이 어둠을 가르곤 했다. 5월 22일 아침 섬진강변을 따라 부산으로 향했다. 광주 쪽의 모든 고속도로가 차단됐기 때문에 서울로 가려면 부산에서 비행기를 타는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도착하니 모두들 광주가 도대체 어떻더냐고 우리 주위에 몰려들었다. 피묻은 옷부터 갈아입고 우리는 사태를 관망하면서 다음 일정을 계획했다. 5월 24일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헨리 스코트 스톡스(Hennry Scott Stokes)가 함께 가기로 했다. 그는 뉴욕타임스 도쿄지 국장으로 한국을 포함해 극동지역을 커버하고 있었다. 우리는 전주의 비사발호텔에다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이때부터 27일 광주가 계엄군에 다시 점령될 때까지 우리는 새벽 일찍 광주로 들어가 취재를 한 다음 날씨가 어두워지기 전에 전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였다. 호남고속도로를 따라 전주에서 광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장성터널(호남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터널 앞에는 중무장한 계엄군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엄격히 보도통제를 하던 때라 국내기자는 물론 외신기자도 통과하지 못하고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임의로 '통행증'이란 걸 미리 만들어 두었다. '위 사람은 뉴욕타임스 외신기자로 계엄지역의 통행을 허가함' 이런 내용을 종이에다 쓰고 근처 계엄군 당국에서 큼지막한 도장을 하나 얻었다. 내가 만든 통행증은 종이 조각에 불과했지만 장성터널을 통과할 때는 그 어떤 것보다 강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여러 기자들의 부러움 속에 우리는 터널을 통과해 광주로 들어갈 수 있었다.
21일에 비해 3일 후의 광주는 매우 질서정연했다. 시장과 가게가 대부분 문을 열고 정상적인 상거래가 이뤄지고 있었다. 시민군의 방어태세도 훈련된 군부대를 방불케 했다. 통신을 비롯해 기동타격대, 외곽방위부대 등 제법 격식이 갖춰져 한결 안정감이 느껴졌다. 도청 앞 한켠에서는 구호본부가 차려져 시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긴급물자의 조달을 강구하고 있었다. 도청 앞 분수대 주위 광장에선 매일 오전과 오후 2차례씩 수만명의 광주시민들이 모여 군중집회를 가졌다. 군중집회에서 시민군 지도부는 중요한 상황을 시민들에게 보고하고 그들의 의견을 구해 방침을 결정해나갔다. 계엄군과 시민군의 현재상황을 보고하면 시민들은 향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활발한 토론을 벌였고 집행부는 그 결론을 따라 행동했다. 이렇듯 어려운 가운데서 광주시민들이 보여주는 수준 높은 질서의식과 도시의 기능유지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5월 26일 광주시가지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시민들은 불안한 운명 앞에서도 의연했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공포감과 피곤함이 역력했다. 나는 광주의 구석구석을 취재하기위해 골목을 샅샅이 돌아다녔다. 도청 앞 상무관에는 적어도 90여 구 이상의 희생자 시신이 놓여있고 분향을 위한 긴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은 희생 규모였다. 사망자 숫자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확인되는 대로 취재수첩에 적었다. 계엄군의 광주진압 이후 우리가 뉴욕타임스에 보도한 희생자 숫자는 사망 250여 명(시민군, 군, 경 포함), 부상자 1천여 명이었다. 당시 계엄군 공식 발표는 사망자가 겨우 몇십 명에 불과했다. 나와 헨리는 도청 상황실에서 복면을 한 시민군 대변인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그의 눈빛은 매우 강렬했다. 대변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주문을 했다. 첫째는 국제적십자사에 구호를 요청한다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 대사와 협상하겠다는 것이었다. 전두환과는 협상하지 않겠다고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우리에게 그 사실을 서울에 있는 글라이스틴 미대사에게 전해달라고 요구했다. 시민군의 메신저 노릇을 해달라는 주문에 우리는 난감했다. 만약 내가 기자 신분이 아니라면 글라이스틴을 직접 만나 호소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메신저 노릇을 한다는 것은 분쟁의 어느 한쪽에 소속됨을 뜻했다. 헨리와 나는 시민군 대변인과의 기자회견을 마친 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가지고 토론했다. 우리의 결론은 '기자는 기사로 말해야 한다'였다. 우리는 그의 요구를 글라이스틴에게 직접 전달하는 대신 인터뷰 내용을 충실하게 기사로 써서 보도했다. 그게 우리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약간의 곤란한 해프닝이 발생했다. 우리와의 기자회견 직후 도청 앞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대자보가 나붙었다. "광주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시민군 지도부는 뉴욕타임스기자와 회견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미국이 광주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곧 개입할 것이라는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민군 지도부측에서 그런 식으로라도 불안해하는 광주시민을 안심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사실과 다른 내용이었다. 대자보에는 우리들의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군중들 속에는 잠입한 계엄군의 정보요원들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들은 즉각 이 사실을 서울의 계엄사령부에 보고했고, 계엄당국에선 내가 나서서 마치 시민군과 미국 정부 사이의 거중조정을 자처한 걸로 오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게 불씨가 돼 계엄군의 광주진압 이후 나는 군 수사기관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광주 사정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26일 오후 시민수습 대표들과 계엄군 대표의 최후 협상이 화정동 대치선에서 벌어졌다. 운명의 순간이었지만 양측의 주장은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먼저 무장을 해제하라"는 계엄군측과 "우리의 조건을 먼저 들어달라"는 시민 대표들의 요구 사이에서 최종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의 심정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머지않아 수많은 생명이 희생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회담의 결렬을 취재한 후 나는 송고하기 위해 전주로 향했다. 그날 밤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될 것이라는 풍문이 파다하게 떠돌았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헨리가 광주 현장에 남기로 했다. 나는 그를 도청에서 200여 미터쯤 떨어진 어느 여관에 안내한 뒤 전주로 떠났다. 27일 새벽 전주 비사발호텔 방에서 피곤에 지쳐 쓰러진 내 귓전에 예사롭지 않은 라디오 경고음이 흘러들었다. 나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라디오를 켜놓고 잤었다. "Attention Foreigners!" '외국인들은 주의해서 들으라'는 경고음이 분명히 영어로 방송되고 있었다. 광주시내의 모든 외국인은 즉각 철수하라는 말이 여러차례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직감적으로 진압작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광주에 홀로 남겨두고 온 헨리 때문에 더 걱정이 됐다. 먼동이 터오자 곧장 광주로 향했다. 그러나 장성터널 입구에서 계엄군의 검문이 전날보다 훨씬 강화돼 통과하는 데 애를 먹었다.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헨리가 투숙했던 금남로 주변 여관으로 찾아갔다. 헨리는 두려운 표정이 역력했다. 헨리는 그후에도 오랫동안 광주에서의 마지막 밤의 악몽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지금도 계엄군의 광주시내 진입 직전 최후의 항전을 외치며 어두운 시내를 가르던 애띤 여자의 절박한 절규를 이야기하곤 한다. 함락된 광주는 그야말로 폐허 그 자체였다.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의 삼엄한 감시 아래 도시는 쥐죽은 듯 적막했다. 전날 인터뷰했던 시민군 대변인의 안전이 궁금해 도청으로 달려가 보았으나 온통 핏자국만 흥건한 채 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시민군 패전병에 대한 소탕전이 시작됐다. 계엄군들은 집집마다 대문을 박차고 들어가 무자비하게 젊은이들을 끌어내 개머리판으로 두들겨팼다. 내게 광주사태는 월남전에 대한 기억과 중첩돼 기억되곤 한다. 월남전은 남의 나라 일이었기 때문에 취재기사로서 그 현장을 떠나면 끝이었다. 광주문제는 그렇지 않았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때 광주와 맺은 인연은 질기게도 따라다녔다. 나는 그후 몇 차례 광주를 방문했다. 사태 진압 직후 당시 박충훈 국무총리의 광주방문이 있었다. 그를 따라 다시 광주에 내려갔다. 총리 일행은 주로 병원을 돌아다녔다. 박 총리 역시 피해자들의 모습을 직접 보면서 충격이 컸던지 시종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87년 김대중씨가 1980년 이후 처음으로 광주를 방문했을 때도 취재가 동승했다. 1980년 5월 그날과 마찬가지로 수십만의 인파가 금남로를 가득 채운 채 열렬하게 그를 환영하는 모습을 나는 감동적으로 지켜봤다.
1980년 7월 초쯤으로 기억된다. 새벽 6시쯤 우리 집 초인종이 울렸다. 3~4명의 장정들이 다짜고짜 나를 밀치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합동수사본부에서 나온 기관원들이라고 했다. 아내를 붙잡으러 온 걸로 생각했다. 아내(장명수 현 한국일보 이사)는 당시 한국일보 기자로 '계엄철폐를 위한 지식인 선언'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 집 서재를 마구 뒤지다 북한, 중국, 소련, 베트남에 관련된 책자 37권을 찾아내 자루에 담은 뒤 우리 부부의 눈을 가린 채 어디론가 끌고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유명한 동빙고의 합동수사본부 조사실이었다. 작은 방에 들어섰을 때 나에 대한 보고서가 이미 엄청나게 준비돼 있음을 알아차렸다. 조사관의 첫마디는 내가 '외신기자 중 김대중을 두 번째로 자주 만나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 정호상 기자라고 했다. 조사의 초점 역시 내가 김대중씨의 사주를 받아 5.18을 과장보도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나의 기사 중 신군부를 지칭하는 대목마다 나오는 '쿠데타'라는 표현이 매우 거슬렸던 모양이다. 나를 김대중씨와 함께 빨갱이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하루종일 자술서를 몇 차례고 반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날 저녁 무렵 갑자기 나를 귀가시켰다. 그들은 내게 조사받은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회사에 행적을 보고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뉴욕타임스 본사는 내가 갑자기 실종되자 글라이스틴 주한 미대사에게 연락했고 글라이스틴은 신군부측에게 나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풀려날 수 있었다. 나뿐 아니라 광주 현지취재에 나섰던 한국인 외신기자 대부분이 이 무렵 연행됐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 수 있었다. 내가 광주를 생각할 때면 항상 더불어 생각나는 문구가 하나 있다. 남북전쟁 당시 흑인노예 철폐를 주장했던 미국 저널리스트 프레드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 1857)가 남긴 말이다. "The limits of tyrants are prescribed by the endurance of those whom they oppress." '폭군의 한계는 오직 피억압자의 인내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나는 광주에서 체험했다. 광주 취재경험은 그 이후 나의 인생에 또다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홍콩에서 발간되는 FEER(Far Eastern Economic Review)의 인도네시아 지국장으로 근무하던 당시(1986~87)에도 나는 인도네시아 민주화운동을 보도하다 수하르토 정권으로부터 추방당했다. 이듬해 FEER 대만지국장에 부임해서도 대만판 광주학살로 알려진 '2.28학살사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취재했다. 2.28사건은 1947년 2월 28일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에 밀려 대만으로 넘어올 때 원주민 수만 명을 대량 살육했으나 아직껏 그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광주는 나로 하여금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5.18광주항쟁이 아시아의 타지역에서 발생한 여느 봉기(Uprising)와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1992년 5월 18일 태국 방콕에서 군사정부에 대항해 일어난 거대한 민중봉기는 광주보다 많은 희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되지만 희생자들의 시신이 대부분 실종된 채 아직도 진상은 규명되지 않고 있다. 1984년 9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발생한 민중봉기 탄중프리옥 사건도 정부군에 의해 대부분의 시신이 불태워져 버려 희생자의 규모마저 파악할 수 없다. 숱한 희생을 치르고도 이런 투쟁의 대부분은 일과성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광주는 달랐다. 탄압을 뚫고 진상규명을 이뤄냈으며 그 불길이 아직도 타고 있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현대사에서 민중이 자발적으로 무장하여 독재정권에 항거한 사건은 광주 한 군데뿐이다. 내가 아는 한 어느 나라에서도 광주와 같은 경우는 없었다. 나는 광주시민들이 다른 지역민들과 달리 유난히 투쟁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집요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4.19에 이어 우리 국민의 민주화열망은 5.18과 6.10항쟁으로 절정을 이뤘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 시절 만약 광주 항쟁이 없었다면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다. 실제로 나는 많은 외신기자나 외국의 고위직 인사들을 만날 때면 대한민국 현대사에는 '광주항쟁'이 있었노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곤 한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갖는 세계 여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광주를 주목하고 있다. 광주는 세계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는 광주 사람들이 이 점을 충분히 인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자신을 너무 자학적(Self Pity)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기 역사에 대한 자긍심으로 역사적 의미를 승화시키는 데 진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5.18광주민중항쟁을 완성시키는 일은 광주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이 함께 지고 나가야 할 몫이다. 호남의 한(恨)일 뿐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의 한이다. 이제 광주는 결코 격리된 고도(孤島)가 아니다. 광주를 밀착해서 취재했던, 그럼으로써 광주로부터 많은 걸 느끼고 배웠던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이제 광주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광주는 아직도 역사의 우울한 경험에 발목이 붙잡혀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지 않나 염려된다. 지금 내게는 광주시민들이 갖는 심리적 고립감이 큰 장애물로 보인다. 광주시민들이 스스로 이런 심리적 한계를 뛰어넘을 때 비로소 자유스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은 국제화 시대다. 광주정신은 우리 민족의 미래를 밝혀줄 등불이어야 한다. 광주정신을 올바로 계승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호흡을 길게 하면서 미래지향적이어야 하고 특히 국제사회를 향해 열린 자세로 당당하게 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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