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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30 호
단기 4340. 7. 28 (음력 6. 1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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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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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i 신용불량 극복 수기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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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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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아직 어두운 새벽에 노래하는 새와 같은것. / 라빈드라나드 타고르(인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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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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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
옛날의 어진 임금들은 사람을 쓰는 데 있어 제 때, 제 곳에 쓰는 지혜가 있었다. 눈이 먼 소경은 음악을 연구하게 하였고, 절름발이는 대궐문을 지키게 하였고, 고자는 후궁의 처소를 출입케 하였고, 곱사나 불구자, 허약하여 쓸모 없는 사람이라도 적당한 곳에 적절하게 용무를 맡길 수 있었으니, 이 점에 대하여 항상 연구하도록 하여라. 집에 머슴이 있을 때 너희는 곧잘 말하길 '힘이 약해서 힘드는 일을 시키지 못한다' 하였는데 이는 너희들이 '난장이에게 산을 뽑아 내라'는 식의 가당치 않은 일을 맡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 힘 약한 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집안 일을 처리해 나가는 방법으로는 위로는 주인 어른 내외로부터 남자, 여자, 어른, 아이, 형제, 동서의 차례에서 아래로는 남녀의 종,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무릇 5세 이상은 각자 할 일을 나누어 한 시각이라도 놀지 않게 되면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집에 늙은 할아버지가 계시면 칡으로라도 노끈을 꼬고, 늙은 할머니는 실꾸리의 실 뽑는 일을 놓지 않은 채 이웃에 마실 가더라도 그 일을 계속하는 그런 집안은 반드시 먹을 충분하게 마련하고 가난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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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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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근대의 사상
2. 후기/3.1운동기--해방 이전
2. 서양 철학
마르크스 철학의 수용과 전개
1920년대의 민족 운동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사상적 분화를 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사상사적으로 1920년대는 사회주의, 그 중에서도 마르크스주의의 급속한 수용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3.1 운동의 실패 이후 민족주의 운동이 계급적으로 분화되면서 민족 해방을 위한 이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수용되었다. 여기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단순히 철학뿐만 아니라 경제 이론과 정치 이론도 포괄하는 통일적 체계를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러시아의 볼셰비즘을 가리킨다. 마르크스주의는 불과 몇 년 만에 민족 해방 운동의 주된 이념 가운데 하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렇게 급속히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대두하게 된 것은 러시아 혁명의 영향이나 일제의 문화 정책에 따른 언론 매체의 활성화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3.1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노동자, 농민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함으로써 민족 해방의 주체 세력으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물산 장려 운동을 둘러싼 민족주의와의 논쟁, 조선공산당 창당, 신간회 결성 등을 통해 알 수 있듯이 1920년대 마르크스주의 수용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많은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것은 민족 해방에 대한 관심과 열정 때문이었다. 식민지 현실에 비판적, 실천적 자세를 견지하려고 할 때, 민족 해방의 사상적 무기로서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매력은 당시의 지식인들에게는 대단한 것이었다. 민족 해방을 위해서 과거 애국 계몽 운동 이래의 '개량주의적 개혁 방법'으로는 더 이상 파탄한 민족 현실을 구제할 수 없다는 반성이 일어났고, 당시 세계적 사조로 등장한 마르크스주의 이념이 매력적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는 서구의 상황과는 달리 출발부터 민족 해방의 새로운 이념적 지주로서 수용되었으며, 이 점은 식민지 시대 마르크스주의의 내용을 본질적으로 규정한 요인이 되었다. 1920년대의 마르크스주의는 주로 혁명 이론과 투쟁 방법으로 수용되었으며,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계몽적 소개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가 한국에 수용되는 경로는 소련과 일본의 두 길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도 특히 일본 유학생의 역할이 중요했다. 일본에서는 1905년을 전후로 마르크스주의가 번역 소개되기 시작했고, 1927년 경에는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이 번역되기 시작해서 1935년에 완결되었다. 식민지 지식인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학습은 정규 교과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로 일본에서 번역된 마르크스주의 관계 서적의 탐독을 통해서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철학, 정치학, 경제학을 총괄하는 통일적 체계인데다가, 사회 운동의 실천과 뗄 수 없는 연관을 지니기 때문에, 마르크스 철학의 연구만을 독립적으로 다루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1920년대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실천 운동의 세계관으로 수용되기는 했으나 그 자체로서 본격적으로 탐구되지는 못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 연구가 전문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부터였다. 1930년대는 철학뿐만 아니라 서양 근대 학문 전반이 비로소 연구되는 시기였다. 철학이나 문학 등 여러 지적 분야에서 지식인의 숫자가 급속히 증가했고, 1920년대와는 달리 지식이 전문화되고 세련화되던 시기였다. 이처럼 근대 학문의 출범을 알리는 1930년대는 또한 세계적으로 파시즘의 바람이 몰아쳤으며 그 선두 주자인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한반도가 그러한 파시즘의 가장 가혹한 희생자가 된 시기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식인의 수가 증가하고 그들 사이에 숱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1920년대에 볼 수 있었던 팽팽한 시대 의식이나 이념적 긴장은 사라지고, 사회적, 역사적 책임 의식과 무관한 지적 작업이 대다수 논의의 주류를 이루었다.
1920년대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혹은 사회주의 진영 내부에 이념적 지향을 뚜렷이 내건 많은 논쟁들이 있었으나, 1930년대의 논의는 앞서와 같은 이념적 긴장을 상실한 채 사상의 진공 상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파시즘의 바람 앞에 이러한 조짐을 최초로 드러낸 것은 프로 문학을 비롯한 좌파 논의의 퇴조였다. 물론 이러한 퇴조가 곧바로 사회 운동의 퇴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비합법 운동인 적색 노조, 농조 운동이 활발하였고 노동 쟁의나 소작 쟁의의 수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철학, 문학, 종교 등 모든 사상 영역에서 정치적, 사회적, 이념적 지향성을 추방하고자 했던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앞에 적극적 이념 추구는 사라지고, 그 대신 이데올로기의 내재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연구는 파시즘의 고조와 좌파 논의의 퇴조라는 시대적 배경 아래서 시작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 연구자의 수는 철학 전공자 중 소수에 불과했고, 그나마 지속적인 연구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마르크스주의가 일제에 의한 사상 통제의 주요 목표였던 당시의 상황에서 공개적이고 지속적인 연구가 다른 어떤 철학 분야보다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시대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대표적 철학자는 신남철이다. 그의 다양한 논문은 식민지 시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수용에서 핵심 위치를 차지하는데, 관심 영역은 단순히 철학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 비평, 사회 과학 등에 걸쳐 광범위하였다. 신남철과 마찬가지로 경성제대 철학과를 졸업한 박치우의 경우, 전문적 철학 논문은 한 편뿐이고 대부분 시사적인 논평에 치우쳐 있다. 이렇게 볼 때 식민지 시대에 이루어진 마르크스주의 철학 연구는 전체적으로 미미하며, 특히 일제 말기에 이르면 연구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철학 연구를 위한 학문적 상황은 급격한 전기를 맞이하였다. 식민지 시대의 철학 교육은 주로 일본인 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해방이 되고부터는 우리의 대학이 세워지고 철학 교육의 기초 작업의 일환으로 논리학, 윤리학, 철학 일반에 대한 입문적 개론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교양 철학만 가르치던 한국인 교수들은 이제 전공 과목을 맡아서 깊이 있게 토론하고 원전 강독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철학 연구도 활성화되어 각종 단행본이나 번역서들이 나오게 되었다. 식민지 시대에서 저류로 흐르던 온갖 사조들이 표면화되었고 철학자들의 사회 참여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 회의를 계기로 민족적 분열이 심화되어 가던 해방 정국은, 6, 25 전쟁을 통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견고한 분단 체제로 귀결되고 분단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의 급격한 변화는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나마 식민지 시대에서 이루어진 연구를 토대로 논리학, 윤리학, 철학사, 원전 강독 등 조금씩 정지 작업을 진행시켜 나가던 철학계를 뿌리 째 흔들어 버리고 새로운 학풍이 싹트기도 전에 커다란 혼란에 빠뜨려 버렸다. 해방과 더불어 표면화된 마르크스주의 철학도 남한 철학계에서 자취를 감추어 역사적 단절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이제 전쟁이 빚은 참혹한 현실 앞에서 철학자들은 내면적 자아로 침강해 버리고, 이러한 경향은 냉전의 흑백 논리에 더욱 견고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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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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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본뜻 : 숙제는 본래 옛날 서당이나 학당에서 시회를 열기 며칠 전에 미리 내주어서 돌리는시나 글의 제목이었다. 근대에 들어와 서당의 자리를 학교가 대신하면서 학교에서 내주는 과제물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바뀐 뜻 : 학교 공부를 복습하거나 예습할 것을 목적으로 학생들에게 내주는 과제물을 가리킨다. 일상 생활에서는 앞으로 두고두고 생각해 볼 문제거리나 해결을 요하는 문제를 가리키는 말로 쓴다.
"보기글" -요즘은 국민학생들까지 숙제에 치여서 도통 다른 것을 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시어머님과 화해하는 일이 숙제 중에 숙제인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슬하
본뜻 : 슬하는 부모님의 무릎 아래란 뜻으로 본래 자식이 부모를 부를 때 쓰던 말이다. '폐하' '전하' 같은 말들이 부르는 사람의 입장을 한껏 낮춘 호칭이듯이, '슬하' 역시 부모님의 무릎 아래 있는 자식의 입장을 가리켜 부모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바뀐 뜻 :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의 따뜻한 보살핌 아래라는 뜻으로 널리 쓴다. 또는 부모님 곁이라는 뜻으로도 쓴다.
"보기글" -부모님 슬하에서 20여 년이나 있었습니다 -두 분 다 자식이 없어 슬하가 쓸쓸하시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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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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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또 하나의 사랑 - 동성애
동성애적 성행위에 대한 편견
영화의 드라마적 재미는 대체로 선한 주인공과 악한의 대결이 펼쳐져야 성립된다. 이런 골격의 영화에는 여러 종류의 악인이 등장하는데, 몇몇 영화는 동성애자를 악한으로 선택한다. 그런데 그 동성애자들은 영화 속의 선량한 주인공을 궁지에 몰아넣을 뿐 아니라 종종 관객의 동성애 이해까지 오리무중에 빠뜨리기도 한다. 팀 로빈스가 출현한 <쇼생크 탈출>(1994년)은 많은 사람들이 감동적 드라마로 기억할 영화임에 틀림없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던 주인공이 결국 자유를 찾는다는 흔한 줄거리의 영화임에도 이 영화가 감동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앤디가 숱한 난관을 드라마틱하게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관객들은 앤디가 처치한 여러 가지 장애물 중에서, 특히 보그스 일행을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앤디에게 접근한다. 앤디는 저항하지만 그럴수록 보그스 일당은 잔인한 폭력으로 응수한다. 보그스의 뭇매에 앤디는 곤죽이 되기 일쑤였고 또 성폭행 앞에서는 굴욕감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보그스가 반신불수 및 금치산자가 되면서 앤디의 시련은 끝을 맺는다. 쇼생크 교도소에 있던 악한 중 하나인 간수장이 보그스를 대신 응징한 것이다. 우리는 유사한 상황 설정을 다른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명도는 낮지만 우수작으로 알려진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앨런 파커 감독, 1972년)도 <쇼생크 탈출>과 기본 구도가 상당히 비슷하다. 실화를 재현한 이 영화는 1970년 터키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미국인 빌리 헤이스는 터키에서 마약을 밀반출하려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비록 마약 사범의 처지이지만 헤이스도 앤디처럼 자유을 갈망하고 그래서 탈옥의 은어인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가 그의 캐치프레이즈이다. 그런데 공교롭게 이 영화에서도 동성의 몸을 욕망하며 폭력에도 능숙한 악한이 등장하여 주인공을 유린한다. 거구의 간수장이 내리치는 매질은 차라리 견딜 만했다. 간수장의 성폭행은 헤이스를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트린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헤이스는 색마 간수장을 살해하고 감옥을 빠져나가며 쾌재를 부른다. <쇼생크 탈출>이나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 같은 영화를 보고 나면 관객은 지독한 동성애자를 목격한 느낌일 것이다. 그들은 동성을 성욕 해소의 수단 정도로 여기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제와 폭력으로 목적을 취하는 인간 말종이다. 그러니 사악한 동성애자의 몰락에 환호하는 게 일반적이다. 보그스를 매질한 쇼생크 교도소의 무시무시한 간수장은 정의의 용사 같아 보이고,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에서는 쇠창살에 꽂혀 죽는 간수장의 모습이 악귀의 최후처럼 보이는 것이다. 만일 이 영화들이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면 동성애자들은 유달리 강간 충동이 강하기 때문에 경계해야 할 존재들이다. 과민한 반응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남성들도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어두운 뒷골목은 피해야 한다. 욕구 불만 상태의 동성애자가 튀어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감상들은 전혀 근거가 없다. 그 점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앞의 영화에 등장하는 악한들은 동성애자인가. 관객들이 그들을 동성애자로 믿게 되는 이유는 동성을 열망했고 강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성을 강간하는 사람이 동성애자라고 확정짓는 생각은 절대 온당치 않다.
주로 미국에서 이루어진 많은 연구들이 동성 강간, 특히 남성에 의한 남성 강간에 주목했다. 공통적인 결론은 일반인의 상상과 크게 어긋난다. 절대 다수의 사례에서 남성 강간의 원인은 상대방에 대한 지배욕이나 복수심이라는 것이다. 갱단 등에서 규율을 어긴 자에 대한 집단 강간이 그 예이다. 또 증오하는 대상에서 치욕을 주려고 자행되는 경우도 있다. 남성 강간은 성적인 동기와 큰 상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남성 동성애자가 남성을 강간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이성애자가 성폭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처럼 동성애자의 성폭행도 극히 일부의 사례로 보아야 한다. 교도소 내 동성 강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앞의 영화들이 묘사하는 바처럼 교도소에서는 동성 강간 사건이 빈발하는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건의 가해자들은 동성애자가 아니라 이성애자라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해서 교도소에서는 이성과의 성관계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몇몇 이성애자들이 동성을 공격하는 것뿐이다. 교도소내 성범죄의 피해자는 이성의 대리물이며 가해자는 여전히 이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쇼생크 탈출>이나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를 무심하게 감상할 수는 없다. 선량한 주인공들을 고난에 빠뜨리는 등장 인물들이 마치 동성애자인 듯한 인상을 심어 주기 때문인데, 이는 동성애자 입장에서는 억울한 모함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영화들을 관람한 뒤 동성애자에 대한 부정적 편견에 감염된 관객들이 있다면 그것 또한 잘못이다. 동성애자가 강간 충동이 유별난 것도 아니며 동성 강간의 범인 중 대다수는 이성애자이기 때문이다. 동성애의 성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거론될 수 있는 또 다른 영역의 영화들이 있다. 문자 그대로 `언더그라운드`에 해당하는 포르노 그라피이다. 사진 이미지와 더불어 포르노 영화는 동성애적 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데 주저함이 없다. `지독한` 포르노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남성간의 에이널 섹스(anal sex)와 여성 동성애자들의 딜도 섹스(dildo sex)이다. 그러니까 포르노 영화들에 따르면, 남성 동성애자는 항문을 이용하고 여성 동성애자의 성행위에는 인조 남근인 딜도가 사용된다. 이 포르노 영화들의 동성애 묘사 방식은 이성애자들의 상상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성행위를 기준으로 삼아 동성애의 모양새를 재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다수 포르노 영화의 배우들이 이성애자인 것처럼, 영화 속의 동성애 묘사 장면도 실제의 것이라기보다는 이성애자만의 공상인 경우가 많다. 동성애자의 성행위 양태에 대한 연구 분야에서는 마스터스와 존스가 유력하다. 그들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포르노 영화의 동성애 묘사는 사실과 큰 괴리를 보인다. 남성 동성애자들의 경우 분명 에이널 섹스의 빈도가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남녀의 성행위에서처럼 남근의 삽입과 마찰이 반드시 수반되지는 않는다. 남성 동성애자들은 에이널 섹스에 집착하지 않으며 상호 마스터베이션이나 오럴 섹스도 충분한 교감 방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레즈비언들도 이성애적 성행위 형식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은 키스나 애무 혹은 외부 성기의 자극만으로도 사랑을 확인하고 큰 쾌감을 얻는다. 에이널 섹스나 딜도를 이용한 성행위는 현실보다는 이성애자의 상상 속에서 더욱 빈발한다. 어찌 보면 동성애의 성적 형태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논의가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포르노 영화의 연출 방식이나 이성애자들의 몽상은 실제와는 적지 않은 거리가 있는데, 그것은 이성애자들의 자기 중심적 사고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된다. 이런 사고 방식이 바로 동성애에 대한 편견의 진원지이다. 다시 말해 이성애자들이 자신의 침실 경험을 근거로 동성애자들의 성행위 양태를 재단하는데, 그것과 동일한 사고 방식 속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이성애자의 자기 중심적 시각을 확인하는 과정이 동성애에 접근하는 데 의미있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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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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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5.진실한 사랑
결혼에는 변화가 따른다는 것을 기억한다.
사람들은 가정을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답답한 생활에서 해방되어 평화롭게 서로 사랑을 나누며 살 수 있는 안식처로 생각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실제로 가정은 폭력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 가정이 폭력의 온상이 되어 버리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불평등이며 또 하나는 체벌을 옳다고 생각하는 빗나간 남자다움이다. 어떤 조사 결과에 의하면 한 사람이 권력을 잡고 모든 일을 결정하는 가정에서 폭력이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모든 가족 구성원이 평등하게 결정권을 갖고 있는 민주적인 가정에서는 폭력사태가 발생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따라서 두 남녀가 대등한 인간으로서 결혼하는 경우 가정내에서 폭력이 일어날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아내가 남편의 아이라도 되는 듯한 상태에서 결혼한 남녀의 경우, 남편이 아직 아음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아내가 자립을 하려고 하면 폭력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남자들은 다음과 같은 자신의 생각을 아내에게 전하려고 폭력을 쓴다. 나는 지금의 부부관계를 지키기 위해 굉장한 희생을 치르고 있는 거라고, 다른 남자든 일이든 어떤 경우에도, 어떤 것에도 당신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성인끼리의 결혼이라면 가정 내 결정권을 확실히l 하기 위해 다투는 일도, 문제를 해결을 위해 폭력이 필요해지는 일도 없다. 성인끼리의 두 사람이라면, 결국 부부간에 어느 정도는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결혼 전에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자신의 실체와 자신이 남편에게 바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한 후에 결혼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자신을 알고 경제적으로 자립해 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서로에게 필요 없는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되며, 자유로이 뭔가 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메인 코스라고 자각할 때까지 결혼을 기다릴 수 있다면 성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인이 될 수 있다. 언제라도 결혼할 수 있을 정도로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두뇌라면 좀처럼 믿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데서 그저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보다 도덕적이라고 처음부터 믿어 버리는 여자가 꽤 많이 있다. 여자이기 때문에 보다 고상하고 보다 청결하며, 순결하고 신성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신성한 것이라는 말을 오랫동안 입에 담은 일이 없으므로 큰소리로 떠들 수는 없다. 그것은 내 속에 반발심과 흉폭성을 불러일으켜 아음의 고요함을 침해당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소의 그 신성한 우월성으로 만족해 있는 여자들은 시시한 일이나 공허와 무관심 속에 파묻혀 있는데, 세계는 참으로 뛰어난 정신과 가치 있는 도덕을 슬플 만큼 구하며, 그 비참한 광경을 잠자코 보고 있기에는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여성이 남성보다도 정신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뛰어나다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벙어리가 되어 앉아 있을 수 있을까. 그녀들은 끝없는 수다를 떨고 파티와 화투놀이를 하러 가고 뜨개질을 하고 낮에도 밤에도 극장을 채우고 요리법을 바꿔 보고 가구를 옮기고 머리 손질을 하고 손톱에 빨간칠을 하고 패션쇼에 나가는등의 생활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런 사이에 세계는 용기 있는 선량함이나 도덕적 청렴함이나 타인을 생각하는 깊은 마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암흑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여성의 도덕적 우위성 따위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혁명은 인간의 머리를 굴러 떨어뜨리고, 전쟁은 대도시를 덮쳐 세계가 이대로 나간다면 뒤에 남는 것은 파괴뿐이라고 한다. 따라서 여성이 이기적인 퇴각에서 빠져나와서 남자의 곁에 서서 그들과 함께 이 세계의 존속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민주적인 조직을 세우는 일에 참가하지 않는 한, 남성에 대한 여성의 도덕적 우수성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여자가 임무를 다하지 않는 한 세계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 혼란과 불행은 새로운 전쟁이 새로운 무기를 생산하는 데 따라 더욱더 증대할 것이다.
남자들은 상습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 최고의 영웅주의를 떨치는 기회로 생각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따라서 오랫동안 자극과 자유와 영광을 쟁취하는 가장 좋은 기회였던 전쟁을 냉정히 본다는 것은 남자들에게 무리한 일인지도 모른다. 전쟁은 남자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정화작용이라고 독재자는 믿고 있는데, 그것은 일리가 있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자기 희생속에 내 몸을 어떠한 형태로 내던지는 것은 인간의 필연적인 욕구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서만 사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는 꼬리표가 붙을 때 더욱 행복한 것이다. 이 자기 몰각은 남자들보다도 여자들에게 더 많이 나타난다. 개인으로서 그 여자가 아무리 이기적이고 이상심리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아이가 생기면 하나의 단순한 원시적인 상태로 끌려들어 간다. 그리고 그것은 자아를 다른 것에 나누어 주는 생명의 모든 것을 가장 단순한 원시적 형태로 나타낸다. 다음 단계의 육아교육에는 매우 부적당한 여자라도 이 경험에 의하여 잘 되지 않는 여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출산에 따르는 생과 사의요소로 되돌아가는 것은 여자의 혼을 정화시티는 것으로, 이 경험을 가지지 않는 여자는 무엇인가 모자람을 느끼고 있다. 거기에는 순화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 경험을 하지 못한 여자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그것을 찾아 구하고 있다. 그런데 남성은 변화해 가는 현재의 세계에서는 이와 같은 원시적 요소로 되돌아갈 기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옛날에는 사냥을 나가서 생명을 걸고 짐승을 쫓을 때에 그런 기회가 있었다. 왜냐하면 자아 몰각은 언제나 생명을 거는 위험을 함께 하는 것으로 죽음은 인류에게 있어서 고오에 찬 무참한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몸 안의 어떤 어두운 장소에 죽음의 예감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 예감은 모기가 촛불에 다가가는 것처럼 몇 번이나 자신을 장아 당기며 가까이 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출산 때 목숨을 거는 것은 여자를 높여준다. 죽음의 입구까지 떨여져 내려가서 그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에 도취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은 이것에 필적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이 존재는 이것을 열망하여 전쟁 중에서 그것을 찾아낸다. 세기에서 세기에 걸쳐 사나이는 이리 저리로 이 경험을 생각해 내고는 그것이 다가오면 기피하면서 겁을 먹지만, 막상 왔다고 하면 환영하여 그것을 통해 자신을 높이고 강하게 한다. 사나이에게 있어서 전쟁은 여자에게 있어서의 출산처럼 모든 가정, 모든 행동을 단순화해 버린다. 인생의 진지한 문제는 한쪽으로 밀어 놓고 한 가지 일만 하면 되며, 그것을 수행하는 데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너무나 잘 아는 일정한 과정에 자기를 바치면 되는 것이다. 전쟁이 오나 하고 걱정하다가 정작 전쟁이 시작되면 오히려 숨을 돌린다.
증오는 누구에게도 제지를 받지 않고 표현되며, 감정은 흐르는 대로 자유로이 밀어내면 되고, 마음대로 영웅이나 된 것 처럼 극적인 행동을 하여도 아무도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비웃지 않는다. 냉정한 평화시대에는 영웅인 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어떤 행동도 허용된다. 칭찬받고, 박수를 받으며, 대우를 받는데, 그것은 마치 여자가 임신을 하면 얼른 눈에 뛰고 관대한 처우를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여성이 참가하지 않는,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전장이나 동란이 가끔 되풀이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여성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일에 백퍼센트 참가했을 때 비로소 균형이 맞는 세계가 되며, 전쟁과 같은 요란을 없앨 수 있다. 피를 흘리는 전쟁을 대신하는 것으로 남성에게 무엇을 주면 좋을 까. 남자들은 영예를 어디에서 구하면 좋을까. 이 물음에는 남자 자신이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늘은 별과 태양과 함께 남자를 향해 열려 있으며 대지는 남자들의 발견된 일이 없는 자원으로 가득차 있다. 움직이고 있는 남자들 주변의 공기마저도 그 비밀을 움켜쥘 것을 기다리고 있다. 유혈은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출산이라는 자연현상의 경험은 문명국의 몇백만의 여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일부다처가 되지 않으면 모든 여성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 문명 개화의 남성에게 전쟁이 없게 해주시오 하고 부탁하는 것은 그다지 무리한 요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자체 외에 갖가지 감미로운 것을 사나이에게 가져다 준다. 전쟁은 자동적으로 남성을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한다. 따라서 여성의 퇴진을 원하는 남성은 모두 전쟁을 좋아한다. 전쟁 때마다 여성은 한 시태만큼 뒷걸음질친다. 산업방면에는 진출하지만 그 획득은 너무나도 부분적인 작은 것으로 사나이들이 돌아오면 그 대부분을 다시 되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은 망덕한 인간이라고 불릴 뿐만 아니라, 법률을 바꾸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강제 당한다. 여자가 되돌려주어 버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심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전쟁은 여자의 지위를 남성의 머릿속에서 되돌아가게 하며, 여자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남성은 전쟁에서 제멋대로 되어 돌아오고, 자기 연민과 교만으로 약해져 있는 것이 대다수이다. 제멋대로 영웅이 된 듯이 행동하며, 일상생활은 전쟁 뒤에는 무미건조하여 재미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아내는 돌아온 남편의 제멋 대로인 태도를 극구 찬양해주지 않으면 안 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웅이 된 사나이는 따돌림을 받은 듯 느끼는 것이다. 그는 놀랄 만큼 임산부를 닮고 있다. 임산부는 또한 건강한 갓난아이를 낳은 후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전쟁을 하는 것과 아이를 낳는 일에 대하여 어떻게든 대화로 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서 반박하고 있을 뿐이다. 여자는 아기를 낳는 것으로, 사나이는 그 아이들을 죽이는 것으로 만족감을 채우고 있다. 천진난만한 것을 이처럼 희생시키는 것보다 인류에게 더 큰 이익이 될 만한 즐거운 희생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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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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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외손 30여 명이 규장각의 관원이 된 양성지
양성지(1415-1482)의 본관은 남원이고, 자는 순부, 호는 눌재이다. 여섯 살 때에 처음으로 글을 읽었고, 아홉 살 때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세종 23년(1441)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세조가 일찍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조용히 주연을 마련하고 각기 마음에 품고 있는 바를 전달하게 하였더니 양성지가 나아가 말했다.
"성상께서 대신을 두터운 예로 대우하시어 매번 술잔을 기울이며 담론하게 하시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술 마시는 일을 절제하시고 옥체를 보살피시기 바랍니다" "오직 그대가 나를 아끼는구나" 세조가 크게 감탄하며 칭찬하고, 홍문관 제학으로 승진시켜 임명하였다. 또 좌우에게 이르기를,
"양성지는 나의 제갈량이다" 하며, 발탁하여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성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좌리공신(성종 즉위를 보좌하는 공신에게 내린 훈명)으로 기록되고, 남원군에 봉해져 대제학을 겸직하기도 하였다. 양성지는 글읽기를 좋아하여 널리 보고 잘 기억하였으며 손에세 책을 놓지 않아 상하 천년 사이의 치란흥망과 인물의 고하현부를 어제 있었던 일처럼 또렷이 알고 있었다. 장년 시절에는 군사에 관한 논의를 즐겨 하여 관련된 소를 10여 차례나 올렸는데,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군적에게 누락되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한 집안에서 장정이 한 사람뿐인 경우에는 군역에 세우지 않아야 하며, 한 사람의 장정이라도 재능을 시험하지 않고는 병사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평생 뜻이었다.
처음 벼슬하면서부터 집현전에 들어간 것이 16년이고, 서적의 교감을 맡은 것이 20년이며, 사관을 겸임한 것이 34년이고, 홍문관에 근무한 것이 26년이며, 문과의 고시관을 열 여섯 번이나 맡았다. 만년에는 벼슬을 사임하고 한가로이 날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시사를 토론하고 간혹 동자 한 명과 말 한 필로 통진별장에서 놀았는데, 조용하기가 시골의 평범한 늙은이 같았다. 일찍이 내각(규장각)의 관제 및 조례를 편집하였는데, 매우 분명하고 조리가 있었으므로 성종이 가상히 여겨 권장하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성종이 승하하였으므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가 정조 때에 이르러 내각을 설치하고 초계문신(당하 문관 중에서 문학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서 다달이 강독 제술 시험을 보일 때의 시험관)을 선발할 적에 이 조례를 적용하였다. 내각에 명하여 문집 3권을 출간하게 하였는데, 그때 각신 30여 명이 모두 양성지의 외손들이었다. 가집 6권이 있다. 68세에 죽었는데 시호는 문양이라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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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의 눈물
다같이 물 속에서 활동하는 동물이라도 하마는 그 둔한 생김새가 일종의 애교를 느끼게 하지만 악어는 잔인하고 징그러운 인상을 준다. 그래서인지 서양에서는 악어를 위선의 상징처럼 여기고 마음에도 없이 흘리는 위선적인 눈물을 '악어의 눈물'이라고 한다. '세익스피어'도 '헨리 6세', '오델로',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 등의 작품에서 곧잘 그 말을 쓰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문헌에 "악어가 물가에서 사람을 발견하면 이를 죽인 다음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려가며 먹을 것이다"라고 한데서 따온 것이라 한다.
또 '악어의 논법'이란 말도 있다. 이집트의 전설에서 비롯된 것인데 나일 강가에서 악어에게 아이를 빼앗긴 여인이 악어를 보고 돌려 달라고 사정을 했더니 악어 왈 "내가 아이를 돌려 주겠는가 안돌려 주겠는가 맞혀 보아라. 맞으면 돌려주마"하고 말하더라는 것. 어떻게 대답하든 잡아 먹기는 매일반이라 '악어논법'은 이래도 저래도 해석되는 궤변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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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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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3장 삶의 여백을 비추는 지혜
귀족이 되었거나 말거나
괴테와 더불어 질풍노도 시대의 대표적 시인인 쉴러는 "빌헬름텔"을 비롯한 명작으로 독일 문화에 공헌했다고 하여 귀족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세속적인 영예에 대해서는 아무런 흥미가 없어서 이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귀족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어느 날 쉴러를 도와 서재에서 그가 최근에 쓴 원고를 찾던 친구가 어지럽게 쌓여 있는 초고더미속에서 웬 서류를 하나 발견했다. 친구가 펼쳐서 읽어보니 그것은 "귀하를 귀족으로 봉한다"는 내용의 사령장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이렇게 중요한 것을 자칫하면 휴지로 만들 뻔했잖아. 잘 간수해두었어야지." 사령장을 받아든 쉴러는 흘끗 그것을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가?" 쉴러는 별로 소중히 보관하려고도 하지 않고 다시 열심히 원고를 찾기 시작했다.
세속적인 영예 따위는 원래 문제 삼을 가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삶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애처롭게도 명리에 눈이 멀어 진정한 삶의 모습을 찾아내는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 채 헛된 것만을 추구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 정토진종의 개조 신란은 "부끄러워해야 하고 괴로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진실을 직시하고, 그 비탄 속에서 절대적인 삶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삶이 부끄러우며 괴로운 것이라고 인정하는 마음속에 오히려 바르고 참된 심성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영예에 집착하지 않는 쉴러의 욕심 없고 깨끗한 마음이야말로 참된 심성의 정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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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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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1 - 후안 마누엘
두번째 이야기 신하의 부인과 살라디노 사이에 일어난 일
어느날 루까노르 백작이 뺘뜨로니오에게 조언을 청하고 있었다.
"빠뜨로니오, 난 이 세상 누구도 나의 질문에 당신처럼 그렇게 사려깊은 대답을 하는 이가 없다는 것을 잘 아오. 그래서 묻는데,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은 무엇이요? 이걸 묻는 까닭은 비록 내게 이롭지는 않더라도 올바르고 좀더 나은 행동을 하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요. 그래서 행동하는 데 유의할 점 중 꼭 잊지 말아야 하며 항상 보탬이 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싶소." "백작님, 백작님께서 그렇게 절 칭찬해 주시고 제가 많은 지혜를 갖고 있다고 말씀하시니 실수할까 두려워집니다. 이 세상에서 상대방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지 그 사람이 본래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일만큼 실수하기 쉬운 일은 없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선 그가 삶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야 합니다. 많은 선행으로 덕을 쌓은 사람이라도 일시적인 쾌락을 추구하다보면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되는 겁니다. 누가 현명한 지혜를 갖고 있는지 알기 위해선 모든 것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옳은 말을 하고 아주 이성적이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거느린 영지는 잘 다스리면서 올바른 말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옳은 말도 아주 잘하고 영지도 잘 다스리지만 옳지 못한 마음씨를 가지고 자신만을 위해 행동하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인지, 올바른 사고의 소유자인지, 올바른 말을 하는 사람인지,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인지 확실히 알아보시려면 미리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평소 행동을 보고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영지가 번창하는지, 쇠퇴하는지에 따라서도 앞서 말한 모든 것을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아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이 무엇인지 물으셨는데 살라디노와 그의 부하 기사의 아주 현명한 아내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아시면 도움이 되실겁니다."
살라디노는 바빌로니아의 술탄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많은 사람들을 대동해 다녔는데, 어느날인가는 너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한집에서 모두 묵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살라디노는 어느 부하 기사의 집에서 머물렀습니다. 그 충직한 부하는 최선을 다해 살라디노를 대접했고 즐겁게 해주려고 애썼습니다. 그의 부인도, 자식들도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인간의 일에 훼방을 놓는 악마는 살라디노로 하여금 사랑해선 안될 그 부인을 사랑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 부인에 대한 사랑이 애절했던 살라디노는 별로 신통치 않은 조언자에게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충고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백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모든 지도자들이 옳지 못한 길을 가지 않도록 충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선 옳지 못한 일을 하라고 부추기는 사람도 항상 있기 마련이지요. 살라디노는 어떻게 하면 자기가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을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러나 못된 조언자는 살라디노에게, 그녀의 남편을 불러 선심을 베풀고 많은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적당한 임무를 주어 먼곳으로 보내서 남편이 그것에 있는 동안 뜻을 이루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살라디노는 이 충고를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했습니다. 그 부하는 살라디노가 베풀어준 우정과 친절을 생각하며 먼 곳으로 떠났고, 살라디노는 그 부하의 집으로 갔습니다. 살라디노가 집에 오는 것은 안 그 부인은 그가 남편에게 보인 호의를 아는 터라 그를 잘 대접했고 그 집의 모든 사람들도 많은 애를 썼습니다. 식사를 끝내자 살라디노는 넓은 방으로 들어간 뒤 그녀를 찾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여 그 부인은 얼른 달려갔습니다. 그러자 살라디노는 그 부인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부인은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어 이렇게 돌려 말했습니다.
“저는 전하께서 언제나 멋진 인생을 사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다스리시는 전하께서 저희 부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항상 전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살라디노는 자신이 베푼 호의에 상관없이 그 부인을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훌륭한 성품에 넓은 이해심을 지니고 있던 그 부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하, 비록 제가 미천한 여자이오나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저에게 가지고 계시는 사랑이 진실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또한 남자들 특히 높은 분들께서는 어떤 여자가 마음에 들면 그 여자가 원하는 일은 뭐든지 하겠다고 하시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여자들을 농락하고 난 뒤에는 없신여기고 결국 저버리곤 하십니다. 저 자신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지요." 그러자 살라디노는 그녀가 행복할 수 있도록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자신이 요구한 답을 얻어오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살라디노는 그녀가 요구하는 답을 얻지 못하게 되면 더 이상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하자 그녀는 그가 할 수 없는 일은 요구하지 않을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곤 무릎을 꿇고 그의 손과 발에 입맞춤을 하고 이 세상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은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살라디노는 이 착한 부인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인도 살라디노가 답을 구하면 언제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살라디노는 대동한 이들과 모든 현인들에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물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인간이 가질수 있는 최고 덕목은 선한 영혼을 갖는 것이라고 하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은 천국에서나 필요한 진실이지 이 세상에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몇몇이 충직한 사람이 되는 것이 최고 덕목이라고 하자 또다른 사람들은 비록 충직한 것이 좋긴 하나 인간이란 충직하다고 해도 동시에 비겁하고, 약하고, 어리석고, 무지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충직함보다는 다른 어떤 것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어느 누구도 살라디노에게 확실한 답을주진 못했습니다.
그 누구도 확실한 답을 주지 못하자, 살라디노는 두명의 뜨내기 음유시인들을 데리고 신분을 숨긴 채 세상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교황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있는 모두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떠나 프랑스 왕궁과 다른 왕궁들을 돌아다녔지만 그 어디서도 대답을 얻지못했습니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흐르자 살라디노는 이 일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그는 사랑하는 그 부인을 위해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한 일을 포기할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한번 시작한 일을 포기하는 것은 그로서는 큰 치욕이었기 때문이죠. 만약 힘들어서 혹은 두려워서 그 일을 포기한다면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실추될 명예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살라디노는 그 답을 얻지 않고서는 자신의 날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살라디노는 함께 다니던 뜨내기 음유시인들과 길을 가다가 한 젊은이를 만났는데, 그는 사슴 한 마리를 잡아 산에서 내려오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늙은 그의 아버지는 그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기사였지만 이미 수년 전에 앞을 볼 수가 없게 되어서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혜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 젊은이가 살라디노 일행에게 어디서 오는 누구인지 묻자, 그들은 그저 뜨내기 음유시인들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오늘 사냥이 아주 잘 되었는데, 마침 음유시인들이시라니 저희집에서 즐겁게 밤을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뜻밖의 청을 받은 살라디노 일행은 얼른 서둘러 대답하기를 어떤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자기 나라를 떠난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 아무도 그 질문에 만족하게 대답해준 이가 없었다고 하면서 이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가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는 그 질문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며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나서는 자기 아버지에게 물어보면 아마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살라디노는 매우 기뻐하며 젊은이의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다다랐을때, 젊은이는 아버지에게 사냥 이야기와 자신과 함께 온 음유시인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질문을 아버지에게 말하고 답을 청했습니다. 젊은이는 아버지가 아니면 이 세상에서 답을 줄 사람은 없다고 장담했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 늙은 기사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뜨내기 음유시인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아들에게 말하기를 저녁을 든 후에 그 담을 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 젊은이는 음유시인이라고 믿고 있는 살라디노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하고 저녁식사가 끝날 때까지 좀 오래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식탁을 치우고 뜨내기 음유시인들도 노래를 마치자 그 늙은 아버지는 어느 누구도 주지 못했던 그 답을 알려주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살라디노는 즉시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좋은 성품의 정수, 즉 인간의 최고 덕목은 무엇입니까?”
그 늙은 기사는 이 질문을 듣고 그 뜻을 완벽하게 이해했으며 그 질문을 하는 이가 살라디노라는 것도 알아차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살라디노의 성에서 오랜 기간 동안 머물면서 많은 혜택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이보시오, 우선 한번도 이렇게 훌륭한 음유시인들이 내집을 방문한 적이 없었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당신이 저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당신의 일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한 질문의 답은 바로 부끄러움입니다. 바로 이것으로 인해 어떤 이는 죽음에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나쁜 일을 하고 싶은 많은 충동을 느끼지만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은 모든 나쁜 행동의 출발점이 됩니다.”
살라디노는 이 말을 듣자, 그 늙은 기사의 말이 진실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찾던 대답을 얻자 크게 기뻐하며 그 늙은 기사와 아들에게 작별을 고했습니다. 그가 집을 나서기 전에 그 늙은 기사는 아들에게 그가 살라디노이며 자신은 그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노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와 아들은 살라디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해 대접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있은 후, 살라디노는 서둘러 자기 나라로 향했습니다. 그가 도착하자 모든 부하들이 기뻐하며 그의 귀향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축제가 끝나자 살라디노는 그 부인을 찾아갔고, 그가 올 것을 알고 있던 부인은 그를 맞이하여 극진한 대접을 했습니다. 살라디노는 식사를 마친 후 큰 방으로 들어가 부인을 찾았습니다. 부인이 들어오자 살라디노는 자신이 답을 찾기 위해 고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이제 그답을 찾았고 완벽하게 대담을 할 수 있으니 약속한 바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질문에 대한 답부터 들어보고 만약 그 답이 만족할 만한 것이면 약속을 지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살라디노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성품 중 으뜸은 부끄러움이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 부인은 이 대답에 매우 만족해하며 살라디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하, 이제 전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답을 얻어내셨습니다. 왕은 모름지기 진실만을 말하셔야 함을 아실 겁니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이 세상에서 전하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으면 제게 말씀해 주시렵니까?”
살라디노는 자기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러웠지만 그 자신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도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부인은 그 말을 듣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처량하게 울면서 말했습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좀전에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전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시라는 것 둘째, 부끄러움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이라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 사실들을 잘 아신다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이신 전하께 청하오니 이 최고의 덕목인 부끄러움을 가지시고 저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인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살라디노는 자신이 하마터면 저지를 뻔했던 잘못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준 그녀의 지혜로움과 성품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이 세상 무엇보다도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 대신에 백성들을 충실하고 정직하게 사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국 그 부인의 덕성으로 인해 그녀의 남편은 다시 고향집에 되돌아올 수 있게 되었고 살라디노로부터 많은 혜택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부는 이웃들로부터 많은 존경도 받았습니다. 이 보든 일이, 부끄러움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성품 중 으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 부인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루까노르 백작님, 저에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이 무엇인지 물으셨으니 이제 그 답을 알게 되셨을 겁니다. 바로 부끄러움이죠. 부끄러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노력하게 하며, 성실과 좋은 습관으로 선행을 하도록 만든답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백작님도 아셨을 겁니다. 따라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은 아주 나쁜 일이고 추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숨어서 한다고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어떤 이가 숨어서 잘못을 저지르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그 일이 밝혀졌을 때 얼마나 부끄러울지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나쁜 일을 행하고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껴야하고 자신이 얼마나 못된 인간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자 백작님, 이제 그 질문에 답을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시간 동안 숙고를 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도움 되는 이야기에 관심도 없고 배우려 하지도 않는 백작님의 친구분들이 들으시면 화를 내실 만 할 것 같군요. 그들은 마치 금자루를 지고 가며 무겁다고 말하면서 그 값어치는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들은 들은 것에 대해 화를 내실 뿐 교훈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흔히 일어나는 이러한 일 때문에 그리고 제가 드린 대답들로 인해 그분들과의 관계에서 마찰이 생길까봐 더 이상의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 부끄러움은 모든 나쁜일에서 멀어지게 하고, 좋은 일들을 많이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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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풍경 - 물,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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