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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29 호
단기 4340. 7. 27 (음력 6. 1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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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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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나의 농촌문화체험기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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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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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바탕에는 평범한 사람에게 비범한 가능성이 있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 해리 에머슨 포스딕(미 성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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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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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보석보다 귀한 두 글자
너희들에게 물려 줄 밭뙈기도 장만하지 못했으나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를 마음에 지녀 잘 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하거라. 이제 너희들에게 그것을 물려주겠으니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는 말라. 한 글자는 '근'이고 또 한 글자는 '검'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닳지 않을 것이다. '부지런함'이란 무얼 뜻하는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일을 저녁 때로 미루지 말며, 맑은 날 해야 할 일을 비오는 날까지 끌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늙은이는 앉아서 감독을 실천에 옮기고 젊은이는 힘드는 일을 도맡으며, 병이 든 사람은 집을 지키고 부인들은 길쌈하기 위해 한밤중이 넘도록 잠을 자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집안의 상하 남녀간에 단 한 사람도 놀고먹는 사람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또 일 도중 노는 시간이 잦아서도 안된다. 이런 걸 부지런함이라 한다.
'검'이란 무엇인가? 의복은 몸을 가리기만 하면 그것으로 일단 족하다. 고운 비단으로 지은 옷은 조금 해지기만 하면 세상에서 볼품없는 걸레로 변해 버리지만 질기고 값싼 옷감으로 된 옷은 약간 해진다 해도 볼품이 없어지진 않는다. 한 벌의 옷을 만들 때마다 앞으로 계속 오래 입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생각해서 만들어야지, 곱고 아름답게 만들어 빨리 해지게 해서는 안된다. 생각이 이 정도에 미치면 옷을 만들 때 꼭 곱고 아름다운 옷을 만들지 않고, 질박하고 질긴 것을 고르지 않을 사람이 없으리라.
음식이란 목숨만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고기나 생선이라도 입안으로만 들어가면 이미 더러운 오물로 변해 버린다. 삼키기 전에 이미 사람들이 싫어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귀하다는 것은 정성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혀 속임이 있어서는 안된다. 하늘을 속이는 게 제일 나쁜 일이고, 임금이나 어버이를 속이거나 농부가 같은 농부를 속이고 상인이 동업자를 속이면 모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단 한 가지 속일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자신의 입과 입술이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맛있게 생각하고 입과 입술을 속여 잠깐 동안만 지내고 보면 배고픔이 가셔 굶주림을 면할 수 있을 것인즉 이렇게 해야만 현명하게 가난을 이기는 방법이 된다. 지난여름 내가 다산에서 지내며 상추로 밥을 싸서 먹고 있을 때 옆사람이 구경하고는 "상추로 싸 먹는 것과 김치 담아 먹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겁니까?"라고 묻더라. "그건 사람이 자기 입을 속여먹는 법입니다"말하며 적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방법에 대하여 알려준 적이 있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러한 생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맛있고 기름진 음식만을 먹으려 애써서는 결국 변소에 가서 대변보는 일에 정력을소비할 뿐이다. 이러한 생각은 당장의 어려운 생활 처지를 극복하는 방편만이 아니라, 귀하고 부유한 사람과 복이 많은 사람, 선비들의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유지해 가는 데 있어서도 지혜로운 방법이 된다. '근'과 '검' 이 두 글자는 손을 댈 속이 없는 것이니 너희들은 절대로 명심하도록 하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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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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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근대의 사상
2. 후기/3.1운동기--해방 이전
2. 서양 철학
초창기의 서양 철학 연구와 좌절
유학생의 귀국과 경성제대 졸업생의 지속적 배출 등 철학 연구의 인적 자원이 두터워진 것을 배경으로 하여 1930년대에 이르면 본격적인 서양 철학 연구가 이루어진다. 현대 한국의 철학은 1930년에 서양 철학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는 비록 소수이지만 귀국 유학생과 경성제대 출신의 철학 전공자들이 주축이 되어 철학적 토론이 이루어지고, 학술지나 단행본 등을 통해 그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물론 철학뿐만 아니라 국문학, 사학, 경제학 등 다른 서양 근대 학문도 이 시기부터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사학계의 "진단학보"와 마찬가지로 1933년 최초의 철학 전문지인 "철학"이 발행되었다는 점이다. 철학 전문 학술지를 발행한 주체는 유학생과 경성제대 졸업생으로 구성된 '철학연구회'였다. 철학연구회는 몇 차례에 걸쳐 철학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철학"지에 나타난 철학 연구의 특징은 전통 사상 관련 논문이 한 편도 실리지 않았다는 점, 특정 철학자의 철학을 해설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논문이 문제 지향적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1930년대는 전세계적으로 파시즘이 득세하고 있었고, 국내적으로도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시기였다. 젊은 철학도들은 이러한 비극적 현실에 뿌리 박은 분명한 문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비록 서양 철학 일색의 연구였다고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방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창기 철학자들의 문제 의식은 그들이 다루는 철학 내용과 방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철학"지에는 생철학과 실존 철학 관련 논문의 상대적 우세가 두드러지는데, 이들 논문에서는 당대의 정세(situation)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인간학적 자각과 그에 기초한 실천이 강조되고 있었다. 위기의 시대, 전환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철학적 자의식이 분명히 드러나 있고, 구체적 현실과 주체의 각성이 철학의 중심 주제를 이루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 관련 논문에서도 파시즘에 대한 경계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주장되었다. 요컨대 파시즘의 바람이 점차 드세어지는 식민지 현실 앞에서 초창기 철학자들은 실천적 문제 의식을 가지고 철학적 탐구를 펼쳐 나갔던 것이다. 그들은 시대 현실에 주목하여 실천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모두가 형식 논리를 배격하고 변증법을 선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 실존 철학, 독일 관념론 철학은 물론이며, 생철학의 경우에도 가장 강도 높게 형식 논리의 무용성을 강조하고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통일을 주장하였다. 초창기 철학자들이 관념론적이든 유물론적이든 변증법을 신뢰하는 이유는 독일 철학의 전반적 특징과 일본 철학계의 영향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변증법이 전환기의 시대적 현실을 이해하고 올바른 실천으로 이끄는 현실의 논리라고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들에게 변증법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현실을 이해하는 열쇠를 줄 뿐만 아니라 민족 해방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중반, 특히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파시즘의 바람은 점점 거세어져 드디어는 폭풍으로 식민지 현실을 덮쳐 왔다.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한 견고한 후방 기지를 마련하려는 정치, 경제, 군사적 노력이 병참 기지화 정책이라면, 사상, 문화적 노력은 황민화 정책으로 나타났다. 중일 전쟁 이후 병참 기지의 중요성이 확대된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사상, 문화적 뒷받침이 필요했고, 이는 황민화 정책의 정점인 '내선 일체'라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내선 일체는 내선 융화를 뛰어넘어 "모양도, 마음도, 피도, 육체도 모두가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조선 민족 말살론을 의미하였다. 이제 한반도는 한민족이 이 지구상에 존속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인간 개조의 장소가 되어 버렸다. 이런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철학 연구에서 고통스런 자기 성찰과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첨예한 문제 의식을 찾는 것은 애초 무리일 것이다. 1930년대 전반기에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철학연구회는 1936년 활동이 중단되고, "철학"지도 3호를 끝으로 폐간되기에 이르렀다. 황민화 정책을 배경을 한 일제의 사상 통제로 1937년 "신흥"지도 9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철학"지가 폐간되고 철학연구회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실질적으로 그 기능을 인계받은 것은 이미 1933년 결성된 경서제대 철학연구실의 '철학담화회'였다. 원래 경성제대 철학과 철학을 전공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고, 교수진들은 정책적으로 일본인 학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외국에서 유학한 한국인들은 대개 사립 대학에서 가르쳤는데, 사립대에서는 철학이 교양 교육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다음 세대의 철학자들을 교육시킬 기회를 갖지 못했다. 따라서 철학연구회의 활동이 중단된 시점에서, 경성제대 철학연구실은 서양 철학 연구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식민지 시대 후반기의 철학 연구는 일본인 교수의 지도를 받는 철학담화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철학담화회의 연구 내용은 주로 독일 관념론과 실존 철학이었다. 해방 후 남한 철학계의 중진을 이루는 철학담화회의 구성원들의 철학 경향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철학적 관심이 다양화될 때까지 철학의 외연과 동일시될 정도로 이 땅의 철학계에 카다란 영향을 미쳤다. 주로 헤겔(Hegel)과 하이데거(Heidegger) 중심으로 철학 연구가 진행된 것은 일본 철학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결과이며, 한편으로는 '대동아 공영 체제'가 허용하는 몇 안 되는 서양 철학의 조류였기 때문이었다. 초기 서양 철학 연구자들은 비록 독일 철학에 편중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서양 철학 사조를 비교적 균형 있게 연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철학 연구는 "철학"지에 나타난 내용과 비교해 볼 때 일본 철학의 영향을 거의 직접적으로 받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땅의 철학계의 수십 년 동안 독일 계통의 관념론 철학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30년대의 비극적 현실에서 '철학함'의 출발점을 발견하였던 초창기 철학자들의 문제 의식은 아카데미즘에 의해 가려졌고, 시류에 따라 일본 철학계의 조류에 순응하고 말았다. 1930년대 전반기에 보여 준 철학 1세대들의 실천 지향적, 현실 지향적 문제 의식은 순수 아카데미즘적 관념 일변도의 일본 추수적 방향으로 급격히 변모되고 말았다. 특히 초창기 철학자들은 변증법에 대한 관심은 점차 헤겔에서 유래한 일본판 절대 관념론으로 흡수, 통합되어 갔다. 일본 철학에 경도된 이러한 경향은 철학 1세대들로 하여금 철학적 노력을 통해 민족적 관심과 부합하는 창조적 철학이 나올 수 있는 기반을 빼앗아 버리는 결과를 가져 왔고, 분단 이후 남한 철학계의 흐름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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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청
본뜻 : 옛날 관가 제도 중의 하나로써 높은 벼슬아치 밑에 있으면서 그가 시키는 대로 뒷바라지를 하는 일을 가리켰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수청이라는 말의 본뜻을 아는 이는 거의 없거니와, 알고 있다고 해도,오로지 기생이 지방 수령에게 몸을 바치는 것을 뜻하는 말로만 알고 있다. 특히 "춘향전"에서 춘향이가 변사또의 수청 요구를 거부하는 대목이 널리 알려지면서 이 같은 뜻의 전이가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보기글" -춘향이 네 이년! 일개 기생의 몸으로서 감히 사또 나으리 수청 드는 것을 물리치다니 이런 괘씸한 것을 봤나! -제가 비록 기생의 딸이기는 하오나 저 자신이 기생은 아니옵고, 또한 이미 백년 언약을 맺은 몸이오니, 사또 나으리의 수청을 들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숙맥
본뜻 : 사서오경 중에 하나인 "춘추"의 주석서인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말로 원말은 숙맥불변이다. 주자에게 형이 있었는데 그가 똑똑치 못하여 콩과 보리도 구분하지 못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바뀐 뜻 : 원래는 모양이 뚜렷이 차이가 나는 콩, 보리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으나, 요즘에 와서는 남들이 다 아는 사실도 모를 정도로 순진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인다. 흔히들 '쑥맥'으로 잘못 쓰는데 '숙맥'이 맞는 말이다.
"보기글" -아이구, 이런 숙맥 같으니라구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그걸 모르냐? 그런 걸 꼭 가르쳐 줘야 아냐? -그 사람은 나이만 먹었지, 그 방면에는 완전히 숙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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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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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또 하나의 사랑 - 동성애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는 무엇이 다른가
두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가상 답안을 제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동성애자는 어떤 사람인가. 동성과 성행위를 갖는 사람이라고 답하기 쉽다. 그렇다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는 쉽게 구별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서로 뚜렷이 구분되는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존재하며, 동성애자라면 반드시 동성과 성행위를 갖는다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하지만 동성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해위와 성 정체성을 별개로 여겨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행위만을 기준삼아 동성애자인지 여부를 판별하려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과의 성관계 없이도 동성애는 가능하다. 이 사실은 남성과 여성의 사랑을 상정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행위 없이도 사랑을 나눌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애틋한 마음이나 간절한 그리움 같은 낭만적 몰입만으로도 남녀간의 사랑은 성립하며, 사랑에서 성관계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있다. 동성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가슴 떨리는 낭만이 이성애자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동성의 대상을 향한 뜨거운 가슴만으로도 동성애는 성립하며 그래서 성관계는 동성애에서도 부수적인 사건일 수 있다. `숫총각`으로 늙어 가는 이성애자가 있듯이 동성애자도 동성과의 성관계를 영원히 경험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이성애자도 동성애적 성행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거미여인의 키스>(헥터 바벤코 감독, `1985년)의 배경은 남미 한 국가의 교도소이다. 몰리나(윌리엄 하트)는 어린이 성학대 혐의로 수감 중인 동성애자이다. 그의 룸메이트 발렌틴(라울 줄리아)은 동성애를 혐오한다. 성 정체성뿐 아니라, 그들의 희망도 정반대의 방향이다. 발렌틴은 자기 희생을 통해서라도 새로운 사회 질서를 세우길 소망하는 인물이다. 반면 몰리나는 지극히 사적인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정보 기관은 몰리나를 이용해 발렌틴에게서 반정부 조직의 정보를 캐내려 하고, 가석방을 대가로 제시한다. 그래서 그 둘은 한곳에 수감된 것이다. 성 정체성이나 삶의 지향이 적대적인 이 두 인물은 서로를 경계하거나 때로는 심드렁할 뿐이었다. 그러다 둘은 서로 교감하게 된다. 여러 계기가 있었지만 가장 인상적인 상황은 발렌틴의 급작스런 복통에서 비롯된다. 발렌틴은 어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변기로 향하지만 목표 지점에 이르기 전에 일을 보고 만다. 누구나 코를 틀어막고 뒷걸음질칠 끔찍한 재난이지만, 몰리나는 대단히 침착하고 다감했다. 발렌틴의 바지를 벗기고 몸을 씻기고 그를 밤새 보살핀다. 결국 이들은 친밀해진다. 뜨거운 키스를 나누기도 하고, 몰리나의 가석방 전날 밤에는 촛불을 끄고 누워 초야를 치른다. 이들의 통정 또는 교감은 영화의 결말에서 몰리나의 죽음을 불러온다. 몰리나는 발렌틴의 부탁대로 반정부 조직과 접선하다가 총상을 입는다. 정보국 요원들은 접선 상대의 전화 번호를 알려 주면 병원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제안하지만 몰리나는 침묵하고 죽음을 맞는다. 몰리나의 입장에서 발렌틴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랑이었고, 그와의 섹스는 헌신적 사랑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성과 섹스를 나눈 이성애자 발렌틴은 어떤가. 발렌틴은 갑자기 동성애자가 된 것이고, 또 그가 만일 출옥했다면 동성과의 은밀한 데이트를 꿈꾸며 밤거리를 배회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발렌틴은 동성애적 성행위를 경험했지만 그가 바란 것은 몰리나와의 교감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발렌틴이 여전히 이성 애인에 대한 사랑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아이다호>(구스 반 산트 감독, 1991년)도 <거미여인의 키스>와 유사한 사례이다. 영화에는 미국 슬럼가의 동성 매춘 무리들이 등장한다. 그 떨거지 집단의 일원인 스코트(키아누 리브스)와 마이크(리버 피닉스)는 함께 여행을 떠난다. 어두운 밤 모닥불을 피워 놓고 마주 앉은 그들은 대화를 나누는데 스코트가 뜻밖의 주장을 한다. 자신이 남성과 성관계를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돈벌이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성을 사랑하는 자들은 지저분한 변태라는 주장도 덧붙인다. 앞의 두 영화는 꾸며 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일축할 수도 있다. 물론 영화가 현실을 한참 벗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이 두 영화 속의 설정은 현실을 비교적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이성애자들이 동성과의 성관계를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을 증명하는 여러 자료 중 하나는 한 유력 잡지의 설문 조사이다. 미국 성인 잡지 <플레이보이>는 90년대 초반 정기 구독자 7,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적이 있다. 설문 대상자는 동성애를 경험한 사람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 3분의 2 가량이 자신을 이성애자로 여기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자신을 이성애자라고 믿으면서도 동성과 자발적으로 성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한 동성애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성애자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성애자도 동성애적 성행위를 할 수 있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동성애자라고 해도 동성과 성행위를 맺지 않을 수도 있다면 이제 문제는 상당히 복잡해진다. 우리는 성행위 파트너의 성별만으로는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를 구별할 수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를 딱 부러지게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하지만 킨제이 같은 심리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는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지난 수십 년간 인정되어 온 킨제이 척도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성 정체성을 0에서 6까지의 단계로 나누고 완벽한 이성애자를 0의 위치에, 전적으로 동성애자인 사람을 6의 위치에 설정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극단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있다. 그렇다면 누구나 이성애적이며 동시에 동성애적인 존재들인 것이다. 예컨대 많은 이성애자들도 자주 동성애에 대한 환상을 품기도 하며 동성애자들도 이성애적 욕구를 느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도 동성애의 원인은 비교적 분명할 것이라는 게 일반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기대도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 19세기 이후 많은 심리학자들은 동성애를 정신 질환으로 분류하고, 동성애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제시했다. 19세기 심리학자 크라프트 에빙은 유전을 원인으로 꼽았다. 또 프로이트는 이성 부모에 대한 강한 동일시가 동성애를 초래한다고 설명하면서 후천적인 영향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하지만 아직도 공식적으로 인정된 동성애의 원인은 밝혀진 게 없다. 가장 활발히 연구가 진행된 유전학 분야에서도 뚜렷한 성과는 없다. 생리학에서는 성 호르몬의 분비 이상을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꼽아 왔지만 아직까지 확증을 얻지는 못했다. 또한 후천적인 영향도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없다. 한 예로 동성애 성향을 지닌 부모의 자녀가 동성애자로 자랄 확률이 특별히 높은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다수가 왜 이성애자로 자라는지 알 수 없듯이 동성애의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재로서는 유보적인 결론만이 가능하다. 이성애든 동성애든 우리가 알 수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어떤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아이다호>의 주인공 마이크는 모닥불 건너편에 앉은 스코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도 거래가 없이 키스하고 섹스하는 동성들은 더러운 존재라고 느꼈지만 지금은 다르다. 스코느와 뜨거운 가슴으로 키스하고 성행위를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마이크는 갑자기 동성애자로서의 자기 모습을 확인하고 고백한 것이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또한 동성애의 원인이 밝혀져 있지 않다면, 마이크와 같은 변화가 억지스러운 일이 아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들었듯이 동성과의 사랑도 그렇게 불현듯 찾아 올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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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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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5.진실한 사랑
30세까지는 자기 연마가 우선
이처럼 겉보기는 어른이라도 마음속엔 어린애의 속성을 지닌 채 겨혼 생활을 하는 여성이 많다. 하지만 사회 자체가 여러 가지 변화를 보이고 있는 오늘날 여성으로 자신들의 고민을 공공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개의 딸 아무개의 아내 아무개의 어머니 이외에는 그 무엇도 될 수 없을까. 내가 차지할 만한 자리는 대체 어디에 있을 까. 그럼 지금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자리를 갖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다. 여성은 대개 결혼해서 부모가 되고 아이들을 사회로 내보낸 뒤에 통신 교육이나 여러 교양 강좌 혹은 일을 통해서 자기라는 실체를 발견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극히 당연한 순서를 밟지 않고 다르게 살아 보는 것은 어떨까 예를 들면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마음의 양식이 될 만한 체험을 하고 나서 결혼하는 것이다.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부모가 됨으로써 더욱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삶에 대한 또다른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그런 삶의 방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지 않을까.
20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라 일찍이 친구의 아버지는 자기 딸에게 이렇게 말하고 적어도 30세까지는 결혼하지 말라고 충고 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22살에 한 살 연상인 여성 즉 나의 어머니와 결혼한 아버지는 매우 진보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내가 자란 50년대만 해도 여성들이 경멸을 받았던 때지요. 그래도 나는 아버지의 충고에 따랐어요. 결혼하고 싶으면 언제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그런 마음이 되면 상대는 얼마든지 있어요. 결국 38세가 되어서야 결혼 했는데, 결혼 그 자체는 멋진 것이었지만 내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었어요. 충격이었지요. 나는 나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남성에 대한 기대도 나름대로는 잘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결혼해 보니 자기 생활을 상대에게 맞춰야 하는 것은 남편이 아니라 아내인 내쪽이었어요. 자신의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여성이라면 그녀가 선택하는 남성 또한 마찬가지로 자기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다. 또30세를 넘으면 성체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남성도 알고 있으며, 동시에 자신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은 그녀가 진심으로 그렇게 하고 싶어서라는 것을 남성은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비로서 섹스는 결혼의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 남녀가 영위하는 공동생활의 일부로써 바르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두 사림이 이상에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서로의 이상을 존중할 수는 있다. 젊었을 때 결혼해서 남편에게 자신을 맞추고 있는 여성의 경우에는 자기 안에 이것이 나의 실체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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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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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용상을 가리키며 이 자리가 아깝다고 예언한 손순효
손순효(1427-1497)의 본관은 평해이고, 자는 경보, 호는 물재 또는 칠휴거사라고 하였다. 문종 원년(1451)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단종 원년에 문과에, 세조 3년에는 중시에 급제하였으며 성종조에는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성종이 주연을 마련하여 중신들과 술을 마시는데 술이 거나하게 되자 손순효가 입을 열었다.
"직접 아뢸 일이 있습니다"
성종이 앉아 있는 어탑(임금이 앉는 상탑)으로 올라오도록 명하였다. 손순효가 머지않아 연산군이 임금의 자리를 잘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용상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 "나도 알고 있소" 손순효가 또 아뢰었다. "부녀자가 임금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려 국정을 어지럽히는 일이 너무 심하고, 바른 말을 마음대로 하는 언로가 막히겠습니다" 성종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일들을 바로잡을 수 있겠소?" "임금이 만약 그런 상황을 아신다면 저절로 그런 실수는 없게 될 것입니다" 이를 보고 연회에 참석한 재상들이 모두 놀라며 손순효가 아뢴 내용을 듣고 싶어하였으나 임금은 "내가 간하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할 뿐이었다.
손순효가 술을 너무 좋아하므로 성종이 만날 때마다 그를 경계하였다. "앞으로 세 잔 이상 마시지 마시오" 어느 날 승문원에서 올린 외교문서의 내용이 세련되지 못하여, 성종이 편전에 나아가 손순효를 불러오게 하였다. 손순효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오기는 하였는데 머리카락이 망건 밖으로 나와 헝클어져 있고 취한 기운이 온 얼굴에 가득 차 있었다. 성종이 노기를 띠고 말했다. "표문의 글이 정교하지 못하여 경으로 하여금 고쳐 짓게 하려고 하였더니 경이 이렇게 취했구려. 그리고 또 내가 일찍이 경의 면전에서 세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고 경계하였거늘 어찌하여 그 말대로 실천하지 않는가?" 손순효가 답하였다. "신에게 시집간 딸이 있사온대 못 본 지가 오래이기에 오늘 마침 지나다가 들렀더니 술상을 들여오길래 거절을 못하였는데, 다만 세 그릇을 비웠을 뿐입니다" "경이 마셨다는 술잔이 무슨 그릇인가?" "주발로 세 번 마셨습니다" "경은 이미 술이 취했으니 아마도 표문을 지을 수 없을 듯하오. 그러니 제학을 불러서 같이 짓도록 하오" "다른 사람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고 신이 고쳐 짓겠습니다" 성종이 쓰던 벼루를 가져다주게 하였더니 손순효가 곧바로 표문을 지어 바쳤다. 성종이 크게 기뻐하고 사용원에 명하여 연회를 베풀어 마침내 한껏 마시며 크게 취한 뒤에야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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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와 월계관
'아폴로' 우주선으로 널리 알려진 '아폴로'는 희랍신화에서 태양과 동일시되는 광명의 신으로 여러 남자의 신 중에서도 으뜸가는 존재다. 그밖에 그는 문학과 예술을 다스리며 의료 시설도 그의 관할 안에 들어간다. 의사의 신 '아수크레피오스'는 '아폴로'의 아들이고 서양의학의 시조인 의성 '히포크라테스'는 그의 자손이라고 한다. '아폴로'에 관한 설화는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은 월계수로 변한 소녀 '다프네' (희랍어로 월계수의 뜻)의 이야기이다.
'다프네'는 '테싸리아'의 강의 신 '베네이오스'의 딸인데 몹시 사랑스런 소녀였다. 우연히 그녀의 모습을 본 '아폴로'는 한 눈에 반해서 뒤쫓았으나 '다프네'는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어느덧 그녀의 아버지가 있는 강가에 이르자 그녀는 아버지를 불러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베네이오스'는 '다프네'를 한 그루의 월계수로 만들어 버렸다. 그후로 '아폴로'는 '다프네'를 불쌍히 여겨 항상 월계수의 가지로 관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고 한다.
희랍중부에 있는 '아폴로'의 '델포이'신전에서는 그 곳에서 거행되는 시가와 문예대회 및 운동경기 대회의 우승자에게 상품으로 월계수의 가지를 엮어만든 관을 주었다. 그것이 곧 월계관의 시초이다. 이 제전은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4년마다 거행되었으며 희랍전역에 걸친 대 제전이었으나 고대말기에 가서 쇠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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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3장 삶의 여백을 비추는 지혜
가난하더라도 자유롭게
도쿠가와 중기의 대정치가로서 우수한 치적을 남긴 아라이 하쿠세키는 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일류 대학자이기도 했다. 집이 가난하여 소년 시절부터 고학을 해 가면서 피나는 노력으로 면학에 정진했기 때문에, 성장하여 기노시타 중안의 문하생으로 있을 때는 그 학식이 누구보다 뛰어났다. 동문 중에 대부호 가와무라 즈이켕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하쿠세키의 재능을 높이 사고 있었으므로, 어떻게든 생활에 도움을 주어서 마음 편히 공부하게 해 주고 싶어서 아버지와 상의했다. 가와무라 즈이켕은 즉석에서 승낙했다.
"좋다. 네가 그렇게 전도 양양한 사람이라고 보았다면 일 년에 삼천 냥의 학자금을 도와주지."
청년은 하쿠세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면 틀림없이 춤을 추듯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부랴부랴 그를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런데 하쿠세키는 아주 미안하다는 듯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자네의 호의는 정말 뼈에 사무치도록 고맙네, 그러나 그 얘기는 없었던 것으로 하세." "아니, 어째서?" "옛날 이야기 하나가 생각나는군. 료잔이라는 곳에 조그만 뱀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 뱀의 몸에 작은 상처를 입혔다네, 그런데 수십 년 후에 그 뱀이 구렁이가 되어 죽었는데, 어렸을 때 다쳤던 상처 자국이 한 자 크기의 큰 상처가 돼 있었다는 거야. 내가 지금 가난해서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기서 삼천 냥의 학자금을 받으면 평생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야하네, 만약 내가 훌륭한 학자가 된다면 그 은혜는 더욱 크고 무거워서 자네의 아버지에게 머리를 들 수 없게 되네, 그러느니 이대로 가난한 채 자유롭게 학문을 계속해 나가고 싶은 거야. 나를 위해 애쓴 자네의 노력을 헛되게 해서 미안하지만 방자한 나를 용서해 주게, 자네 아버지라면 틀림없이 내 마음을 이해하시리라 믿네."
나중에 가와무라 즈이켕은 아들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혀를 내둘렀다. "대단한 친구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약삭빠르게 주판알을 퉁기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지조마저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돌아다보지 않는 무서운 세상에 대하 이일화는 엄중한 질책을 가한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도움을 거절하는 하쿠세키의 기개도 대단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장래를 확실하게 내다보고 동요하지 않는 그의 마음가짐에 우리는 더욱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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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을 다루는 35가지 방법 1 - 후안 마누엘
첫번째 이야기 악마와의 계약
어느날 루까노르 백작이 빠뜨로니오에게 물었다.
"빠뜨로니오, 점술과 예언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데, 그를 잘 이용하면 미래도 알 수 있고 재산도 늘릴 수 있지 않겠소? 하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고 하니, 그 사람이라고 실수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소. 당신은 현명하니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조언을 좀 해주시오." "백작님, 어떤 가난뱅이에게 있었던 일화를 들려드리지요."
옛날에 한 가난뱅이가 살고 있었는데, 너무 가난해서 입에 풀칠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답니다. 하지만 그도 예전에는 떵떵거리는 부자로 살았었지요. 백작님도 아시다시피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다가 가난뱅이가 되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과거에 부자였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힘들게 했지요. 어느날 그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신세타령을 하면서 산길을 걷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악마 하나가 앞에 나타나지 않았겠습니까? 악마는 그 가난뱅이가 괴로워하는 이유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마는 모르는 척 가난뱅이에게 왜 괴로워하냐고 물어보았지요. 그러자 가난뱅이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으면서 왜 묻냐고 대뜸 화를 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난 악마는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했지요. 그리고는 자신의 능력을 믿게끔 하기 위해 가난뱅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아맞추었답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자기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예전보다 더 큰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답니다. 물론 사람이 아닌 악마였기 때문에 그 일을 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었지요. 가난뱅이는 상대가 악마라는 사실이 조금은 마음에 걸렸지만 자기 처지를 생각해 보고는, 부자로만 만들어 준다면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말했답니다. 하지만 백작님, 원래 악마라는 놈은 속이기에 가장 적합한 때를 기다렸다가 자신의 희생물에게 접근하는 법이지요. 다시말해 악마는 희생물로 삼은 사람이 가장 궁핍하거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다가가 그를 이용하지요. 마찬가지로 이 가난뱅이에게 악마가 찾아간 것도 그가 가장 힘들었을 때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 사이에는 계약이 이루어졌고, 그후 가난뱅이는 악마의 종으로 전락했습니다. 악마는 계약이 맺어지기가 무섭게 가난뱅이에게 도둑질을 시켰지요. 그러면서 말하기를 아무리 굳게 닫혀 있는 문이라도 열리지 않는 문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되거든 자기를 부르라고 했습니다. '도와주세요, 마르띤.’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즉시 나타나 위험에서 구해주겠다고 했지요.
모든것이 악마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가난뱅이는 칠흙 같은 어둠을 틈타 어떤 부유한 상인의 집을 털기로 했답니다. 원래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은 빛을 싫어하는 법이지요. 상인의 집에 도착하자 출입문과 보물이 담긴 궤짝의 문이 악마의 힘에 의해 열렸습니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훔칠 수 있었지요. 그날 이후로 그는 끊임없이 도둑질을 하였고, 그래서 가난했던 지난날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돈을 모으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어느날 도둑질을 하다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악마에게서 들은 구절은 읊조렸지요. 그러자 악마는 어디서 왔는지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나 그를 구해주었답니다. 악마가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알게된 그는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이제는 미친 듯이 도둑질을 해댔습니다. 하지만 또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았답니다. 그는 또 악마에게 구원을 요청했지요. 하지만 악마는 예전처럼 그렇게 빨리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악마는 경찰이 조사를 얼마간 진행하고 있을 때야 나타났던 것입니다. 악마가 나타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 마르띤. 내가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아십니까? 이번에는 왜 그리 오래 걸렸지요?”
이 말을 들은 악마는 그간 너무 바빴다는 말만 하고는 위험에서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악마가 보호해주고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난 그는 그후로도 도둑질을 멈추지 않았고 그러다 또 다시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악마는 그가 감옥에 갇히고 나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다시 악마의 도움으로 왕에게 상소를 올려 풀려날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 후로도 그의 도둑질은 끊이지 않았고 결국에는 붙잡혀 교수형을 선고받았답니다. 악마는 그가 교수대에 올려졌을 때에야 보습을 드러내었지요. 악마가 나타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마르띤, 왜 이리 늦었어요. 난 정말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구요.”
그 말을 듣자 악마는 도둑에게 보따리 하나를 주면서 그 속에는 오백 마라베니의 돈이 들어 있으니, 재판관에게 몰래 건네주면 곧바로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지요. 그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드디어 재판관이 형을 집행하라고 지시했지요. 하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갑자기 목을 옭아맬 줄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줄은 찾기 시작하였고, 도둑은 그 틈을 이용해 재판관에게 보따리를 건네주었습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보따리를 슬쩍 건네받고서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당신들 중에서 교수형을 집행하는 데 줄이 없어지는 것을 지금껏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은 틀림없이 신의 뜻일 겁니다. 신이 저 사람의 죽음을 원치 않아 우리로 하여금 줄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무죄일 것이니 집행을 내일로 연기하고 그동안 사건을 좀더 엄밀히 조사해 봅시다. 그리고 나서 형을 집행해도 늦지는 않을 겁니다.”
재판관은 그를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따리 속에 오백 마라베니의 돈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보따리를 여는 순간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속에는 돈이 아닌 교수용 줄이 놓여 있지 않겠습니까? 화가난 재판관은 즉시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했답니다. 교수대에 올라 목에 줄을 걸고 있을 때, 악마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가난뱅이는 또 다시 악마에게 도움을 요청했지요. 하지만 악마는 이전에는 같이 일할 친구들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주 많다는 말만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가난뱅이는 악마 때문에 몸과 영혼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백작님. 악마가 하는 일은 모두 나쁜 결말을 초래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예언자니 점쟁이니 요술쟁이니 하는 자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나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제 말을 믿기 힘드시면, 이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미신을 좋아했던 알바르 누녜스나 가르실라소(역주: 16세기 스페인 최고의 시인)의 종말이 어떠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백작님, 재산을 늘리고 싶으시거든 점술이나 예언 같은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땀과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 미신과 우연에 자신을 의탁하는 사람은 비참한 삶과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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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풍경 - 물,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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