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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28 호
단기 4340. 7. 25 (음력 6. 1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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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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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정부혁신 에세이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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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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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지도자들이 어려운 일을 기차게 해낸다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시민들이 예사일을 기차게 잘해낸다는 것으로서 판가름이 난다. / 존 가드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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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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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내일을 준비하는 삶
병법에 이르기를, '무기가 예리하지 못하면 병졸을 저거에게 넘겨주는 것이고, 병졸을 쓸 수 없으면 장수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이다'하였다. 대개 병졸은 손에 병기를 쥐고 방어하는 사람들인즉 병졸이 비록 몇천 몇만 명이더라도 맨손으로 싸우게 하면 병졸이 없는 것과 같고, 둔하고 부서진 병기를 잡게 한다면 병졸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라가 가난하고 또 법도가 없으면 병졸을 양성할 수 없다. 병졸을 양성하지 못하면 연습시킬 수 없고, 연습하지 않으면 기계를 창고에 넣어 두게 되거니와 기계를 창고에 넣어 두면 둔해지고 부서질 뿐이다. 지금 각 고을에 갈무리한 무기들 중 활을 들면 좀똥이 우수수 떨어지고, 화살을 들면 깃이 사르르 쏟아지며, 칼을 빼면 칼날이 칼집에 붙어서 칼자루만 빠지게 되고, 총을 보면 녹이 구멍을 메우고 있으니, 어느 날 문득 환란이라도 생기면 온 나라 군사는 모두 맨손일 뿐이다.
비록 남북에 일이 없고, 국경에도 근심이 없더라도 군사제도는 있어야 하는데, 그냥 맨손으로는 양성할 수 없으니, 군사를 양성하지 않을 때에는 모든 무기도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내 집안과 나라를 지키는 준비마저 소홀해서야 어찌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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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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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근대의 사상
2. 후기/3.1운동기--해방 이전
2. 서양 철학
유학생의 증가와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1631년 정두원이 북경에서 "천학초함"을 가져 오면서 우리 나라에 서양 철학이 처음 들어왔다. 그러나 이 문집에는 서양 철학이 서양 학문의 한 분야로 간단히 소개되었을 뿐이다. 서양 철학이 더욱 체계적으로 소개된 것은 1912년 이인재의 "철학고변"이 저술되면서부터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소개 비판하면서 'philosphy'를 '철학'이라고 번역한 일본의 니시 아마네가 만든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개화 후 최초의 서구 유학생이었던 유길준은 서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강의를 통해 서양 철학을 직접 접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한데, 그는 "서유견문"에서 서양의 많은 학문들 가운데 하나로 철학을 소개하였다. 우리 나라가 서구의 전통적 의미에서 철학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이인재와 유길준의 예에서 보듯이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의 확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서양 철학은 구한 말 개화파에 의해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수용된 서양 사상의 한 분야였다. 이들의 개화관이 서양 문물을 좇아야 할 이성적 모범으로 간주하고 전통 사상을 지나치게 경시하는 경향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애국 계몽 운동 기간을 거치면서 차츰 그에 대한 반성도 일어나게 되었다. 즉 전통 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기반 위에서 서양 문화를 비판적으로 섭취해 주체적으로 신문화를 이룩하려는 기운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에 이한 식민 통치를 겪으면서, 이러한 주체적 노력 대신에 서양 사상의 몰주체적인 수용이 우세하게 되었다. 교육 주권을 장악한 일제는 식민지 우민화 교육을 통해 전통 사상의 파당성을 강조하고 패배 의식을 조장하는 한편, 관비 유학생을 보내는 등 일본화된 서양 지식을 주입시켜 나갔다.
한국의 근대적 지식인은 식민지 시대에 비로소 출현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이 배운 '신지식'은 서양의 근대적 지식을 일본의 사회 체제에 맞게 변형시킨 '일본화된 신지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로 일본 유학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지식인층은 식민지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서든 저항하기 위해서든 '일본화된 신지식'을 흡수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새로운 지식인층에게서 서양 문화를 수용할 때 전통 문화와의 사이에 빚어지는 창조적 긴장을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전통 문화를 왜곡시켰던 일제의 정책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주적 근대화의 좌절감을 뼈저리게 체험한 한국 지식인층의 태도 때문이었다. 배일적이든 일본 동조적이든 20세기 초의 한국 지식인들은 비록 문화적으로는 서양보다 아래에 있지만, 일찍이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열강의 대열에 오른 강국으로 일본을 이해했다. 신흥 일본이 지닌 힘의 뿌리를 서양 문화에서 찾은 한국의 지식인들은 전통 사상에 곱지 않은 눈길을 보냈으며, 이러한 탈전통의 지향은 식민지 시대의 지적 조류의 한 특징이 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유학생들이 서양 사상과 직접 접촉하기 위해 유학의 길을 떠났다. 한국 지식인이 서양 사상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통로는 일본이었다. 왕래가 쉽다는 지리적 이점 이외도, 유학 비용이 저렴하고 한국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일본의 입김 때문에 '신지식'을 위한 향학열은 주로 일본 지향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실업 교육 위주의 교육 정책으로 고등 교육 기관인 대학이 당시에 하나도 없었다는 점도 일본 유학을 부추기는 한 요인이 되었다. 특히 1920년대에 오면서 유학생의 수가 부쩍 늘면서 철학 전공자들도 다수 생기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서양 철학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였다. 유학생이 급증하는 한편,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으로 떠난 유학생도 상당수에 달하였다. 3.1운동 이후 서양 학문에 대한 열기가 높아 가자 민족 진영은 점진적 실력 양성론의 일환으로 민립 대학 운동을 활발하게 벌이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민립 대학 운동의 의지를 무산시키고 한국인들의 교육 열기를 체제 내적인 것으로 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였다. 경성제대의 설립부터가 민족 의식을 억누르고 식민지 경영을 원활히 하려는 필요성에서 시작된 것인 만큼, 경성제대가 식민지 관학의 학풍을 띠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일제는 경성제대를 통해 식민지 권력 기구에 순종하는 중간 엘리트를 양성하고자 했으며, 그나마 경성제대에 입학 여부도 성적 본위로 가름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우선 입학시키고 난 뒤 사상 성향에 따라 허락을 했던 것이다. 한편 경성제대의 설립은 이 땅에 서양의 근대 학문 연구를 위한 밑받침이 되었다. 비록 식민지 관학이었지만 대학이 설립되었다는 것은 지식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게 되었음을 뜻했다. 경성제대의 설립은 한국의 서양 근대 학문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경성제대가 설립된 후 3년 만인 1926년 철학과가 설치되었고, 서양 철학도 비로소 교양 철학의 수준을 벗어나서 체계적으로 강의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서양 철학은 단순한 소개의 차원을 벗어나서 대학이라는 제도적 장치 속에서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경성제대가 설립되지 않았더라면 소수의 외국 유학생들에 의한 불연속적인 철학 연구는 있었을지라도, 연속적인 철학 연구나 철학 전문지의 발간 같은 일은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경성제대가 갖는 식민지적 특성과 근대적 특성은 초창기 근대 학문 1세대에게 주어진 학문적 환경으로 줄곧 작용했다. 식민지 지식인이 갖는 민족 의식과 학문의 객관성 추구는 둘 다 포기될 수 없는 이념적 지향이었다. 그러나 이 두 지향은 조화롭게 결합되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경성제대가 갖는 식민지 관학으로서의 성격 때문에 민족 의식의 싹은 철저히 배제되고, 학문의 객관성은 실증적 연구의 차원에 메어 있기 일쑤였다. 어떻든 1929년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면서 서양의 근대 학문 연구가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 철학의 경우에 국한시켜 볼 때, 이들 경성제대 출신의 철학 전공자들이야말로 외국 유학에서 돌아온 유학생과 더불어 서양 철학 연구의 초석을 놓은 철학 1세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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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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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본뜻 : 적의 침입이 빈번했던 옛날에는 성을 쌓아서 고을의 영역을 지켰다. 그 때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은 두 겹으로 성을 쌓았는데 안쪽에 쌓은 것을 성이라 하고 바깥쪽에 쌓은 것을 곽이라 했다. 그러므로 성곽이라 하면 내성과 외성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그냥 단순하게 성을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인다
"보기글" -유명한 성곽 도시로는 중국의 북경이 유명하다 -일본의 성곽은 그 구조나 모양이 너무나 단순하고 날카로워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느껴지질 않는다
소정
본뜻 : 글자 그대로 '정한 바' '정해진 바'란 뜻이다.
바뀐 뜻 : 뜻이 바뀐 것은 아니나 많은 사람들이 널리 오해하고 있는 말 중에 하나이기에 여기 실었다. 보통 '소정의 원고료' 등에 쓰이는 이 말을 '작은 정성의 원고료' 또는 '작게 책정된 원고료' 등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뜻은 본뜻 그대로이다.
"보기글" -'귀하의 원고가 채택되었사오니 소정의 원고료를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하면 왠지 저자에게 아주 불리하게, 보잘것 없는 원고료가 지급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야 -여기 참석하신 분께는 소정의 상품을 나눠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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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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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또 하나의 사랑 - 동성애
The Gay 10
폴 러셀이 지은 (The Gay 100)의 우리말 번역사(사회평론)의 홍보용 인용구 중 하나는, 위대한 동성애자들의 이름이 밝혀진다면 세상은 경악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 책에는 우리를 놀라게 할 정도의 리스트가 공개되어 있고, 그래서 동성애가 소수 비정상인들의 `변태적` 기질이 아님을 확인케 한다. 그 중에서 유력한 인물 10명 정도를 추려 간략히 소개한다.
1. 소크라테스 그는 동성애가 용인되던 시대의 최고의 철학자이자 가장 유명한 동성애자이다. 소년에 대한 열정을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여겼다는 그는 동성애에 철학적,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2. 다윗 돌팔매질로 거인 골리앗을 간단히 물리친 지략으로 유명하며,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기도 했던 다윗도 동성애자 리스트에 올라 있다. 구약 성서에서는 요나단과 다윗의 정열적 우정을 긍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는데, 이 기록은 그들의 동성애적 성행위 묘사로 읽힐 수 있다는 설명이다.
3. 성 아우구스티누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위대한 대부로서, 이브의 성적 욕망이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을 초래했다고 주장하며 모든 성행위를 죄악시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 경건한 성직자도 한때 동성애을 경험했다고 러셀은 설명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우정이라는 샘물을 욕망으로 더럽혔으며`, 한 젊은 벗과 1년여 동안 `가장 감미로운 경험`을 했노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4. 레오나르도 다 빈치 폴 러셀은 프로이트의 분석에 기대어 다 빈치의 동성애 성향을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다 빈치의 유년 시절 회상기록에서 펠라티오의 이미지를 끄집어 낸다. 그리고 남성 동성애자의 욕망은 처음에 여성을 향하다가 급작스럽게 남성으로 그 흥분이 전이되게 마련인데, 그와 같은 다 빈치의 동성애적 기질을 미묘하고 중성적인 모나리자의 미소가 드러낸다는 것이다.
5. 알렉산더 대왕 단 한 번의 패전도 경험하지 않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도 동성애자였다. 그는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린 `행운아`였지만 그의 진정한 사랑은 2명의 남성이었다. 그 중 하나는 헤파이스티온인데 알렉산더는 그를 또 하나의 알렉산더라 부를 만큼 둘은 `일심동체`였던 모양이고, 헤파이스티온을 살리지 못한 의사를 처형한 알렉산더의 무분별함도 그 남성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소년을 시종으로 두어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6.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가 동성애자라는 증거는 그의 작품, 특히 시의 일종인 소네트 154편에서 명백히 드러난다고 설명되어 있다. 셰익스피어는 `나를 낳아 준 미스터 W.H.`에게 그 시들을 헌정한다고 적었는데, 물론 논란거리지만 미스터 W.H.가 분명 셰익스피어와 뜨거운 사이였던 남성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고 한다. 특히 그 소네트들에는 한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셰익스피어는 그가 다른 여인한테서 매독을 옮겨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드러내고 있다.
7. 나이팅게일 원조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도 동성애자 리스트에 올라 있다. 그녀의 동성애적 성행위를 입증할 수는 없지만, 사촌 누이인 마리안 니콜슨이 유일한 사랑이었다고 회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가 나이팅게일을 떠났을 때, 나이팅게일은 깊은 상처를 입고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8. 차이코프스키 아내의 집요한 성관계 요구에 자살을 기도했다는 이 음악가는, 14세의 소년 보브에 대한 애절하고 절망적인 사랑을 토로하고 기록들을 남겼다. 그의 죽음도 동성애적 기질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즉 왕가의 어린 소년과 나누었던 성관계가 불러일으킨 스캔들 때문에 음독 자살했다는 것이다.
9. 사포 기원전 6세기경 에게 해의 레스보스에서 태어난 이 시인은 최초의 레즈비언으로 기록되어 있고, 레즈비언이라는 용어도 그녀의 출생지에서 기원한다. 2,500년 동안 지속된 레즈비언 역사의 선두에 서 있다는 점에서 사포는 최고 지명도의 여성 동성애자이다.
10. 마돈나 마돈나는 자신의 동성애적 정체성을 공표할 만큼 대담하고 또 가장 널리 알려진 현존 동성애자이다. 그녀는 동성애를 인기 유지의 도구로 활용한다는 비판도 받지만, 동성애 이미지를 전세계 대중들에게 적극적으로 호소한다는 점에서 동성애 `운동권`의 유력 인사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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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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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5.진실한 사랑
40세 무렵에 찾아오는 아내들의 사춘기
결혼은 어른이 되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다. 결혼을 통해 지혜와 강한 정신력을 기르고 새로운 가정을 창조한다. 결혼에 의해 우리들은 적어도 물리적으로 부모의 고삐에서 벗어나 가능한 한 새로운 살의 방식을 시도하려고 노력한다. 그러고 나서 눈 깜짝할 사이에 20년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려보면 불만과 혼란의 40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 20년이라는 세월은 마치 커다란 괄호로 묶여져 있는 것 같아서, 그 괄호 앞에는 아이 시대가 있고 뒤에는 노년 시대가 기다리고 있다. 괄호 안의 20년이란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기를 모르고 지내온 세월이다. 고교시절에 그 사람과 만났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고 미국서부에 살고 있는 어떤 여성은 술회한다. 빨리 집을 떠나고 싶었고 남편을 손에 넣고 싶었습니다. 결혼한 것은 내가19살, 그가 21살 때였습니다. 안정되고 위험없는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 우리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승진할 때까지 나도 일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1년간 섹스는 나에게 고통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교양이 있고 무엇이든지 솔직히 말해 주었으며, 목소리를 거칠게 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와 있을 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다른 여성의 경우와 비슷하다. 그녀는 무엇이든 남편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친구 집에 갔다 와도 돼요? 드라이브하러 가도 돼요? 옷 사도 돼요. 남편의 목표는 그대로 그녀의 목표였다. 그녀 입장에서 보면 남편은 아버지이자 보호자였다. 그녀는 결혼하고 20년, 39세가 될 때까지 자기 인생에 대해 불만이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에 있어서도 꽤 성공을 했고, 매우 다정하며, 좋은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나 자신도 그에 걸맞는 여성이 되려고 한층 더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생각이 미치지 못하거나 너무 뭘 모르거나 해서, 나는 뭔가를 해서 그를 안심시켜 주는 존재가 되고 싶었고, 그를 붙잡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일념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겠다고 생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15년 정도 지났을 때 문득 견딜 수 없는 고독감을 느꼈습니다. 남편 때문이 아닙니다. 결혼을 서두른 것은 나였으니까 나 자신이 무엇을 지독히 참고 있는 것도 아니데 왠지 하루하루가 괴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지 못한 어린애처럼 공연히 화가 나서 매일 울며 지냈습니다. 부모로부터 벗어나려고 결혼했는데 결국 또 하나의 감옥에 뛰어들었을 뿐입니다. 남편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살아간다는 현실에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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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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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끝내 삼림 밑에서 죽은 윤필상
윤필상(1427-1504)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양경이다. 세종 29년(144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종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조 3년에 중시에 급제하였다. 세조 9년(1463) 11월에 그는 형방승지로서 대궐에 들어가 숙직을 하였다. 그날 밤 날씨가 매우 추웠으므로 윤필상은 '날씨가 이렇게 추우니 아마도 주상께서 옥에 갇힌 죄수들을 걱정하실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서울과 지방에 있는 죄수들의 범죄 내용을 낱낱이 작은 책자에다 기록하여 두었다. 밤 오경이 되자 내시가 와서 형방승지를 급히 부른다는 왕명을 전하였다. 유필상은 허둥지둥 의관을 갖추고 죄수들의 범죄 내용을 기록한 작은 책자를 소매 속에 넣고 침전 앞에 대령하였다. 임금이 창문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일렀다.
"오늘밤은 매우 추워 따뜻한 방에서 털옷을 껴입고 있어도 견디기 어려운데 옥중의 죄수들이 이 혹독한 추위에 얼어 죽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먼 지방은 힘이 미치지 못하겠지만 현재 도성의 감옥에 있는 죄수가 얼마인지 속히 아뢰어라" "신의 직책이 형방승지입니다. 형옥에 관한 일은 신의 직무입니다"
윤필상이 즉시 작은 책자를 가지고 숫자를 보면서 죄목별로 죄수의 수를 소상하게 아뢰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깜짝 놀라며 그를 기특하게 여겨 창문을 열고 침전 안으로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윤필상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갔는데 땀이 흘러 등을 적시었다. 임금은 술을 내려 주도록 명하고, 내전(왕비)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사람이야말로 나의 보배로운 신하요"
그제야 윤필상은 정희왕후가 가까이 있음을 알고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이 뒤로부터 차례를 뛰어넘어 기용되었으며, 얼마 안 가서 높은 벼슬에 승진되었다. 성종 9년(1478)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연산군 10년에 그는 진도로 귀양갔다. 성종 비 윤씨를 폐비하는 조정 의논에 참여하였다는 죄목으로 그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중종 때에 신원 되었다. 윤필상이 젊었을 적에 중국에 갔을 때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가 자신의 운명을 점쳐 본 일이 있다. 점쟁이는 그에게 말했다.
"수명과 벼슬은 모두 높겠지만 끝내 삼림 밑에서 죽을 운입니다"
윤필상은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정승이라는 찬란한 벼슬 생활을 누렸지만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끝내는 진도에 유배되었다. 어느 날 저녁, 이웃에 사는 사람이 김매는 품꾼들에게 말하였다.
"내일 아침에 상림의 밭으로 모이십시오" 윤필상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어느 곳을 상림이라 하오?" 밭주인이 대답했다. "여기서 5리 쯤 되는 곳에 상림, 중림, 하림이란 지명이 있습니다" 윤필상은 그제야 삼림 밑에서 죽을 것이라는 점쟁이의 점괘가떠올랐다. 그는 낙담하여 허공만 쳐다보았다. 얼마 안 되어 연산군이 보낸 사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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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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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스 힘줄
복사뼈 뒷 쪽 발뒤꿈치 바로 위에서 장딴지로 이어지는 힘살이 '아킬레스 힘줄'로 보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갑자기 뛰거나 하면 끊어지는 수가 있다. 이 아킬레스 힘줄은 희랍신화의 영웅 '아킬레스'에 유래되어 있다. '아킬레스'는 보통 사람과 달라서 그의 아버지 '페레우스'는 인간이지만 어머니 '테티스'는 바다의 신 '네레우스'의 딸이었다. '테티스'는 '아킬레스'가 태어나자 저승과의 경계를 흐르는 '스튀쿠스'강에 담그어 창칼이나 화살을 맞아도 몸에 상처를 입지 않게 했다. 이때 발뒤꿈치의 부분을 손가락으로 잡고 물 속에 담갔기 때문에 그 부분만은 물이 묻지 않아서 보통 사람과 다름없는 살로 남게 되었다. 즉 그 부분이 '아킬레스'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트로야 전쟁에 참가한 '아킬레스'는 희랍군에서 첫 손 꼽히는 장수로 용맹을 떨쳤으나 그의 약점을 알고 있는 트로야의 왕자 '파리스'가 독묻은 화살로 '아킬레스 힘줄'을 쏘았기 때문에 마침내 죽고 만다. 여기에서 비롯하여 나라나 개인이 지닌 약점을 곧잘 '아킬레스 힘줄'이라고 한다. 미국의 흑인폭동, 소련의 농업부진 따위는 제각기 그 나라의 '아킬레스 힘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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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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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3장 삶의 여백을 비추는 지혜
돈에 환장한 거지 스님
에도 시대의 승려 겟셍은 승려로서보다 그림의 명인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돈에 욕심을 부리고 집착하는 탓에 지각 있는 사람들은 "거지 겟셍"이라고 비웃었다. 어느 날 그는 한 창녀의 부탁을 받고 그림을 그려서 가지고 갔다. 그런데 그 창녀는 전부터 겟셍의 치사한 근성을 싫어하며 어떻게든 성실한 화가로 다시 돌아가게 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그림을 보자 쏘아붙였다.
"겟셍 스님, 당신은 가사를 걸친 스님이시죠? 그런 분이 창녀에게까지 머리를 숙이고 돈을 탐한다는 건 너무 한심하지 않아요? 당신의 그림 따 윈 이렇게 써야 어울리겠죠?"
창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림을 허리띠로 두르고 말았다. 아무리 돈에 환장한 겟셍이라도 이런 모욕에는 화를 내지 않고 배길 수 없을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했지만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오오, 그거 정말 잘 어울립니다 그려."
그는 사례금을 받아들고 싱글싱글 웃으며 돌아갔다. 그 말을 들은 이케노 다이가가 화를 참지 못하고 겟셍을 찾아가서 충고했다.
"욕심 없이 봉사해야 할 승려의 몸으로 거지라는 말을 들으면서 까지 돈에 집착하다니 우리 화단을 위해서도 통탄할 일입니다. 더구나 창녀에게 까지 조롱을 당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이젠 제발 마음을 고쳐 먹으시오." 그 말을 들은 겟셍이 조용히 대답했다. "지금까지 거지라고 욕하는 것을 참고 오로지 돈에 집착한 것은 내게 세 가지 소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이세 부근에 요즘 천재지변이 계속되어 빈민의 참상을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라 그들을 구하려고 결심했는데, 바로 조금 전에 애마다 장관에게 오백냥을 의연금으로 주었습니다. 둘째는 이세의 조상을 모신 묘 부근의 도로가 형편없이 허물어져, 이것을 수리해서 참배객들의 어려움을 덜어 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역시 그 동안 모은 돈으로 수리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는 선사의 유지를 이어서 폐허가 되다시피 한 승방을 개축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삼년정도는 거지라는 말을 들어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소원을 이룰 생각입니다. 그때가면 화필을 꺾고 단연코 그림을 그리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부처님의 길을 따르고 싶습니다." 다이가는 그 말을 듣고 쓸데없이 충고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머리 숙여 사과했다.
돈이면 인생의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배금주의 적인 사고는 확실히 인생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며, 인간을 저속하게 파악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인생의 외관만 보고 판단하거나 저속한 파악방법에 의존하여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아무리 고매한 이상을 내세우고 순수한 계획을 수립하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돈의 힘을 빌지 않고는 그 실현이 불가능하다. 고매한 이상도 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한 것 신기루에 불과하다. 따라서 높은 이상과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돈을 모으려고 하는 것은 돈을 하나의 수단이나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창녀에게 그려 준 그림이 사람들의 면전에서 허리띠로 쓰이는 조롱을 당하면서도 싱글싱글 웃고 사례금을 받아 갔다는 겟셍의 행동은 지나치게 비굴해 보인다. 그래서 그것이 "세 가지 서원"을 모르는 이케노 다이가를 격분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돈에 눈이 먼 비굴한 행동이 아니었다. 겉으로 태연을 가장했지만 아마도 견디기 힘든 인욕의 수행이었을 것이다. "세 가지 소원"이라는 겟셍의 개인의 사리사욕을 떠난 순수한 소망이 있었기에 그의 수행은 용솟음치는 고귀한 신념으로서 빛을 발한다. 마치 돈에 눈이 먼 듯이 보인 것은 오로지 서원을 실현하기 위한 열렬한 소망의 현상에 불과했고, 따라서 사실은 돈의 가치에 피상적이고 저속하게 의존하는 마음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일화는 신념에 뒷받침된 겟셍의 용기 있는 행위와 불굴의 정신을 이야기해 주는 동시에, 우리를 비열하게 만들기 쉬운 돈의 마력을 경계하라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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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풍경 - 물,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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