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226 호
단기 4340. 7. 20 (음력 6. 7)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
문학소식
|
제36회 숙명 대학문학상 공모
응모부문 시, 소설, (문학)평론 응모자격 전문대 이상의 학부생(휴학생 및 군복무 중인 학생 가능) 분 량 시와 평론은 제한 없음, 소설은 원고지 80매 내외 제출서류 재학증명서, 참가신청서(news.sookmyung.ac.kr에서 다운로드) 제출방법 등기우편 또는 방문접수 마 감 2007년 10월 5일(금) 우체국 소인까지 발 표 2007년 10월 22일(월) 오후 5시 숙대신보사 홈페이지 시상내용 시, 소설, 평론 각 1편씩 상장과 상금 50만원 접 수 처 서울 용산구 효창원길 52 숙명여자대학교 학생회관 307호 숙대신보사
* 원고지 또는 A4용지(글자크기 11, 줄 간격 160%)에 작성해주십시오. * 작품에는 제목만 기재하고 인적사항은 기재하지 않습니다. * 반드시 본인의 창작품이어야 하며 응모작품은 돌려주지 않습니다.
문의사항 Tel: (02)710-9150 Email: smnews@sookmyung.ac.kr * 원고지 또는 A4용지(글자크기 11, 줄 간격 160%)에 작성해주십시오. * 작품에는 제목만 기재하고 인적사항은 기재하지 않습니다. * 반드시 본인의 창작품이어야 하며 응모작품은 돌려주지 않습니다.
|
|
글터 → 명언 / 격언
|
민주주의는 감정이 아니라 선견지명이 낳은 제도.긴 안목으로 설계하지 않은 체제는 얼마 못 가 무너질 것이다. / C.Y.
|
|
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기쁘게 해드리는 게 효도
너희들은 사고무친(의지할 만한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의 처지에서 커 왔지만 어린시절은 유복하게 살았었기 때문에 아들이나 동생이 되어 아버지나 형님을 섬기는 법, 집안 어른들을 섬기는 법에 대해 아직 견문이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궁핍한 경우를 살아가는 방법도 아직 익숙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내 몸과 마음을 다해 남을 대할 줄도 모르고, 남이 먼저 자기에게 도움 주기만을 바란다. 가정에서의 처신도 잘 익히지 못했으면서 이웃들의 칭찬이나 바라고 있으니 될 법이나 한 소리겠느냐.
전에 동지(조선시대의 종2품 관리)벼슬을 지낸 고조할아버지 뻘의 어른이 계셨다. 칠십이 넘은 데다 중풍을 앓으셔서 거동이 몹시 불편하였지만 아침을 잡수신 후에는 매일 지팡이 짚고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 종손을 하루라도 안 볼 수가 있겠는가" 말씀하시곤 했었다. 하물며 너희가 일흔 되신 노인께서 종증손에게 하신 만큼도 큰아버님을 섬기지 않는대서야 말이 되겠느냐! 이제부터는 매일 이른 아침에 일어나 먼저 안방에 들러 어머니의 안부를 살피고,다음에는 동쪽 집에 사시는 큰아버님께 문안을 드리고 돌아와서 독서를 시작하도록 하여라. 여러 숙모님들은 점심때나 저녁 무렵 틈나는 대로 둘러보아도 무방하다. 큰아버지가 팔이 아플 때 바로 찾아가 뵙고 뽕나무 벌레똥을 주워 다가 식초에 담근 쑥과 섞어 약을 달이며, 약달일 화로에 불을 피우고 약단지를 씻는 등 시중으로 아침저녁 떠나지 않고 모시고 자면서 연연해하며 차마 물러나지 못하는 그런 극진한 마음으로 그분을 봉양해 본 적이 있느냐? 모름지기 스스로 할 일을 다하며 살아도 부형들의 가슴에 원망이나 불평이 쌓일 수 있다. 평상시에는 이런 감정들을 내색 않다가도 어느 날 간섭해야 될 일이 있을 때 가끔 자기도 모르게 그것들이 폭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너희들은 이 일만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일이 왜 내가 잘못한 일인가, 왜 저같이 처리하시는가' 서운해하겠지만 실은 오래 전의 잘못 때문이지 단순히 어떤 잘못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착실하게 행실을 닦아 어른들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최선이다. 큰아버님 섬기는 데에는 특별하게 따로 정해진 예절이 없고 오직 자기 아버지 섬기는 것과 한 가지로 하면 된다. 너희들이 느낀 바 있어 진실한 마음으로 행한다면 큰아버님의 마음은 눈 녹듯 풀릴 것이다. |
|
|
글터 → 철학 / 사상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근대의 사상
1. 전기/개항기-3.1 운동기
3. 민중 사상과 종교
2. 갑오농민전쟁 이후의 민중 운동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
한용운과 "조선불교유신론"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1910년에 탈고하고 1913년에 출판하였다. 이 글에는 불교의 개혁에 관심을 가졌던 한용운의 초기 견해가 종합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이 글은 개혁의 기운이 생겨나기 시작하던 조선 불교에 개혁의 이론을 체계화하여 제시하였다는 데에 우선 그 가치가 있다. 그 내용은 아직도 가치 있는 것이 많이 있다. 승려의 교육에 대한 것이 그러하고, 해외로의 발전, 불교의 대중화, 참선의 규범을 세우는 것 등 많은 부분이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이고 지금까지도 의미있는 주장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 글은 ""조선불교유신론"은 한용운이 불교 사상에 기반을 두고 근대 서구 사상을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그것을 특정 분야에 구체적으로 응용하였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는 주장이나, "그의 불교는 불교와 근대 사상의 가장 넓은 접촉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한국 사상사의 가장 흥미있는 한 국면을 체현하고 있다"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근대 사상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조선불교유신론"의 기본 특징은 그것이 근대적 사상이라는 데 있다. 진보주의, 자유주의, 경쟁에 대한 진화라는 사고 방식이 한용운의 바탕에 깔려 있는 사고 방식이다. 부처의 가르침이야말로 훌륭하고 우리는 그 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는 주장을 여러 곳에서 하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불교적 입장이 근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구의 근대 사상이 더 근본에 놓여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일단 서구의 사상을 훌륭하고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서구 사상에 근거하여 불교가 훌륭한 이유를 찾고 있으며, 서구화된 일본 사회를 바람직한 문명국으로 생각하여 불교가 나아갈 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선진 문명의 모델을 따라가면 불교의 세력이 강화되어 불교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근대적인 사상의 입장에서 어떻게 불교의 세력을 강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의 그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서구의 충격으로 급변하는 정세에서 불교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한용운은 소위 문명국의 뒤를 따름으로써 불교 세력을 강화하고 강력한 힘을 가지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교 자체의 진리에 대한 올바른 해명과 신념은 그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남의 사상에 근거하여 유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하여 불교의 이상을 어떻게 잘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 그리하여 현실의 불교에 잘못된 점이 있다면 고쳐야 한다. 그렇다면 불교가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근본 원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선행되어야 할 텐데, "조선불교유신론"의 약점은 바로 그러한 내용이 부족하다는 점일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과 현실 상황에 대한 한용운의 인식이 피상적이었다는 데 한 원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현실 상황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사실의 한 예로 그가 승려의 결혼을 허가해 줄 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일본 통감에게 청원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또 승려들이 어떻게 하면 힘있고 강력한 집단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교 세력의 강화에 집착한 것도 그것에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불교 세력의 강화라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민족의 현실과 일반 백성들의 삶의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관심이 부족했다는 것이 이 "조선불교유신론"의 가장 큰 약점이라 할 것이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삼우제
본뜻 : 장사를 지낸 뒤 죽은 이의 혼백을 평안하게 하기 위하여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장사 당일날 지내는 제사는 초우, 다음날 지내는 제사는 재우, 그 다음날 지내는 제사를 삼우라 한다.
바뀐 뜻 : 사람이 죽어서 장사 지낸 뒤에 세 번째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오늘날에 와서는 흔히 장사 지낸 후 삼일 째 되는 날 삼우제만 지내고 있다. 흔히들 '삼오제'라고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보기글" -작은 아버지 삼우제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참석하도록 하거라 -어머니 삼우제 때 아버지가 어찌나 슬피 울던지...
상극
본뜻 : 오행설에서 쓰는 상생상극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서, 상극이란 쇠가 나무를, 나무는 흙을, 흙은 물을, 물은 불을, 불은 쇠를 이김을 이르는 말이다. 즉 서로가 갖고 있는 성질이 대립되어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해롭게 함으로써 함께 있을 수 없는 상황이나 사물을 가리킨다. 흔히 서로를 키우고 이롭게 하는 상생이라는 말과 합해서 상생상극이라는 말로 쓰기도 한다.
바뀐 뜻 : 두 사람 사이에 마음이 어긋나서 서로 맞지 않거나, 대립되는 성질 때문에 같이 있으면 해가 되는 사물이나 식물 등을 가리킨다.
"보기글" -요 아래 김가하고 이가는 왜 그렇게 상극이야? 어제는 반상회에 와서까지 으르렁대더라구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은 인삼이 상극이라면서요?
|
|
|
글터 → 세계사
|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또 하나의 사랑 - 동성애
성전환 수술
1953년 군인이었던 한 남자가 덴마크에서 시술하면서 성전환 수술 자체와 이성 전환자 모두가 사회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직후 수천 명의 남녀들이 덴마크 등지로 몰려가 성전환 수술을 했다고 한다. 성전환 수술은 성기를 이성의 것으로 바꾸는 수술이지만, 내부 생식 기관의 이식은 불가능하고 외성기의 전환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성전환 수술로 성행위는 가능하지만 임신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해부학적 성별을 거부하고 이성의 몸을 동경하는 이성 전환자들은 일반의 통념보다 많다. 1993년 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 약 2만 5,000명의 이성 전환자들이 있으며, 그 중 약 1만 명 정도가 의술 덕분에 정신에 걸맞은 육체를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
|
|
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5.진실한 사랑
동양 여자들의 결혼
주위에서 퍼져가는 무기력에서 자기 혼자만 도망치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시대에나 로맨틱하고 행복하게 시작되는 결혼은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혼의 대부분이 행복하게 계속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두사람 당사자에게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에 살고 있는 남녀관계 전체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대부분 느끼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두 사람이 서로 만족하고 있을 때만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만이 개인적으로는 서로 만족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도 자꾸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죽을 때까지 남성은 남성이고 여성은 여성이므로 두 사람이 평생 동안 교류하는 일이 없는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남녀가 서로 각각일 때 그것은 비극이다. 남성과 여성이 접촉할 때만큼 큰 환희는 인생에 없다. 그러나 결혼은 남성과 여성이 만나는 사실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결혼은 다른 두 종류의 인간이 만나는 하나의 길에 불과하다. 인생의 어떤 면에서나 남성과 여성이 서로 완전하게 교류하는 환희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남성에게 있어서 살 보람있는 생활이란 여자가 남자라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 가치를 이해해 주는 일에 있다. 여성에게 있어서 살 보람이 있는 생활은 남자가 여자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 자체를 인정해 주는 데 있다. 생을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한두 번의 연애를 통해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만약 연애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남성과 여성의 전체적인 관계를 단 한가지 표현으로 한정해 버리는 것이 된다. 물론 남성과 여성은 남자애, 여자애로서 갓난아기 때부터 노인으로 죽을 때까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상대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아무리 서로 사랑하고 있어도 또 아무리 싫어하고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싫어하는 것 또한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움직일 수 없는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한 무관심이라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관심하다고 선언하는 것 자체가 무관심하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은 어디에서나 서로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이므로 그렇지 않다는 몸짓을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현명한 사람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고 그 합리적인 방법을 생각해 낸다.
고대 중국에서는 여성을 집이라는 벽 속에 넣어 두기 위해 가능한 모든 짓을 했고, 생활의 전통적인 틀을 의식적으로 골라 그것을 고도로 발달시켰다. 그들은 여성을 접촉하여 그녀들이 집에서 멀리 나가 활동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들의 두뇌에는 무지의 족쇄를 채우고, 여자에게는 남자와 동일한 지식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법규로서 여자에겐 읽고 쓸 수 있는 기회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중국인은 이에 관해서는 영리하고 인간적이었다. 여성들이 활동하는 장소는 집안이라고 분명하게 정해 놓았다. 더불어 여자의 두뇌도 육체와 마찬가지로 감금할 준비를 갖추어 두었다. 그래서 여성들은 몇 세기 동안이나 자신들이 포로의 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만약 그녀들을 전족만 하고 두뇌는 해방했더라면 얼마나 교묘한 무서운 학대가 되었을 것인가? 벽 속에 앉아서 여러 가지 활동과 즐거움과 새로운 사건으로 생동하는 세계를 생각만 할 수 있을 뿐, 그 세계에 나가보는 것은 금지당해 있다면 그 고뇌가 어떠하랴! 그러나 중국인은 여성들에게 인정이 많아 그러한 괴로움을 당하게 하지 않았다. 여성은 집안에서 조용하고 행복하게 무지 속에서 살면서, 걸을 수 없는 발을 위해 작고 아름다운 구두에 자수를 놓아 밤이 되어도 병신이 된 그 발을 남자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절대로 벗지 않았다. 그녀들은 그 발을 황금의 백합으로 꾸며내고, 남자들은 애정의 표시로써 그 발을 사랑했다. 중국 부인의 작은 발은 몇 세기 동안이나 개성적인 심벌이 되어있었다. 남자들은 여자의 자수를 놓은 길이 7~8센티미터, 폭은 손가락 둘을 합친 정도의 끝이 뾰족한 공단 구두를 힐끗 보기만 해도 격정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가 왔을 때에도 그 작은 발을 단념하고 싶어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여성들이었다. 그녀들은 오랫동안 그 작은 발을 통해 남성들에게 위력을 발휘해 왔던 것이다. 여성은 크게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그녀들은 좁은 장소에 밀어 넣어진 그 생활 범이 가운데에서 깊이 뿌리를 뻗고 높이 기어올랐던 것이다. 그녀들은 남자의 마음을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붙들고 말았다.
남자들이 지닌 모든 약점을, 알고 그러한 약점을 그녀들의 목적 달성에 좋게도 나쁘게도 이용했으며, 달리 이렇다 할 교육은 없었으므로 교활하고 약삭빠르게 굴며 남자들을 꾀어내는 솜씨와 둘러대는 방법과 자신들의 매력을 이용하여 남자를 완전히 자기 영향권 안에 두었다. 그리고 소박한 남자라면 그녀들의 지혜로, 상식 있는 남자라면 그녀들의 아이들처럼 이리저리 조정하였다. 남자는 여자에게 물과 음식물과 입을 것과 살 곳을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자의 보수는 여자에게 돌아갔으며, 그것은 남자니까 하는 우월감을 갖는 것을 허락하는 상태였다. 표면적으로는 관대해 보이는 이 특권을 주고, 여자들은 자수를 놓은 아름다운 소매 그늘에 웃음을 감추고 있었다. 고대 중국의 이러한 생활 설계가 초래한 최대의 약은 남자에게 불공평했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집안에서 지나치게 세력을 지니게 됨에 따라 남자는 약자가 되고 비호 받으며, 그리고 무기력해졌다. 왜냐하면 여자는 오랫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집이야말로 그녀에게 주어진 세력권 내라고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깥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에서 폭군이 되었던 것이다. 만약 그들이 바보였다고 해도 그녀는 요리 솜씨를 발휘하여 자기가 만든 음식을 전부 남자에게 무리하게 먹임으로써 남자의 소화기를 파괴해 버리거나, 남자를 어슬렁거리고 다니는 태평스러운 신세로 만들어 노력하는 생활을 잊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기꺼이 양보한 것이 자신의 일생을 헛되이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서 집안에 있는 바보 같은 여자는 지적인 여자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지적인 여자는 끊임없이 한결 같은 정력으로 남자가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남자를 무리하게 몰아대, 남자가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상의 일을 시킴으로써 그의 소망이 아닌 그녀의 욕망을 충족시켰다. 따라서 여자가 두뇌를 지니고 태어나는 경우는 오히려 불행을 초래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여성을 집안에만 있도록 제한할 경우, 여성에겐 필요하지도 않은, 남성과 동등한 두뇌를 가지지 않도록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모든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열등한 두뇌를 타고나고 남성은 우월한 두뇌를 타고난다면 여성을 집안에 두는 생활은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문제는 일어나게 마련이다. 4천 년에 걸친 중국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합리적인 것으로 유명한 중국인은 전통의 틀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여자를 무지하게 만들어 집안에 두고 가사와 출산을 전담시켰다. 아이 낳는 것을 여자의 주된 역할로 한정하였고 최대의 영예로 삼게 했다. 아이를 가진 어머니에게는 한없는 영예가 주어졌다. 게다가 미국과 영국 등의 서구에서는 불가능했던 것이 실제로 중국에서는 가능했다. 즉 중국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공평한 처사였다. 만약 사회가 여성들이 가야 할 집을 마련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안 일은 강제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는 것 또한 중국인은 알고 있었다. 남자에게만 맡겨 두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남자들은 그들에게만 맡겨 둘 경우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중국인은 이런 사실을 우리보다 훨씬 전에 발견했다. 결혼이 남자에게 있어서 매우 중대한 일임을 그들은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결혼한다는 것은 아기 아버지가 될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아버지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한 여자를 선택하게 되면 이미 도망칠 길은 없어진다. 그는 자기 아이와 그 여자를 부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훨씬 옛날부터 중국인들이 깨달았듯이 정말로 소수의 남성만이 아버지의 자질을 타고났다. 대부분의 너무나도 많은 남성들은 아버지 역할을 다만 떠맡고 있을 뿐이다. 중국의 옛 남성들이 여성과 함께 자는 것과 수개월 후에 태어날 아기 사이에는 움직일 수 없는 관련이 있음을 알았을 때 그것은 정말로 불유쾌한 지가이었다. 여성은 남성이 이것을 알아차린 것보다 훨씬 전에 그러한 인과관계를 어렴풋이 느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확실한 사실로 믿게 되었다. 남자 쪽은 싫으면서도 마지못해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이라는 것을 정식으로 확인하게 되자, 중국인은 예의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 사실을 토대로 생활을 꾸려왔다. 아이는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남녀는 아이를 위해 함께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남자는 이 약속을 다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자유를 구속당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와 아이를 부양하며 주거를 제공하면 여자와 아이는 그 안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남자는 자기 좋을 대로 나다녔다. 이것이 여자에게 있어서는 집의 시작이었다.
이리하여 몇세기 동안 여성은 집안에만 머물면서 요리와 재봉과 육아에 관한 일로 매우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남성은 계속 헤매고 돌아 다녔다. 즉 남성은 집 바깥에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장사나 정치, 예술 등의 활동에 알맞게 교육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혼은 의무로서 행해지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그렇게 하도록 말을 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중국인은 예민한 국민이다. 법률은 만들지 않고 법률이 있으면 국민이 자동적으로 따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특별히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은 강제를 한다고 해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 하고 싶도록 사물을 작용하면 가장 영속적인 방법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혼을 의무화하기 위해 중국인은 조상숭배를 장려했다. 개개의 인간은 무엇보다도 죽음에 의한 소멸을 무서워하므로, 만일 남자에게 아들이 있을 경우 죽는 일은 없다는 믿음을 갖도록 했다. 아들의 존재로 인하여 자신의 육체는 죽어도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도록 했다. 따라서 남자들은 아들을 가져야만 했다. 또한 아이들이 어려서 죽는 일이 많았으므로 그 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권장했다. 이처럼 아들을 갖기 위해서도, 또 아들은 자신의 씨앗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도 남자는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남성의 영원성을 얻기 위한 대상으로써 결혼에 의지하게 되고 그렇게 되고 보니 남자는 필요물로서 결혼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부친이 아들의 결혼을 결정하고 여자들에게는 제1의 직무로 아이 낳는 일이 주어졌다. 자식이 생기지 않을 경우 정말로 훌륭한 여자라면 남편이 집안에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도 불평을 하지 않아야 했다. 오히려 그렇게 하기를 남편에게 권하며, 자기 자신의 본심은 정의가 달성되게 하기 위해 부정해야만 했다. 그것은 그렇게 정의라고 불렸다. 바보 같은 보통의 인간의 마음은 뭔가 정의를 위해 존귀한 자기 희생을 요구당할 때 강한 용기와 힘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현명한 중국인은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몇 세기 동안에 걸쳐 무지한 중국의 여성은 가련한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그녀의 소중한 사람이 자기를 대신할 여자를 갖기를 탄원하여, 자기가 줄 수 없었던 아들을 남편에게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그것에 관한 슬픈 애기를 종종 듣곤 했는데, 한밤중에 그녀들은 입안에 이불 끝을 밀어 넣었다고 한다. 그것이 비단 이불이든 누더기 이불이든, 울음소리가 남자의 귀에 들리지 ㅇ게 했다.그녀들은 자신의 남자들이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다고 언제나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풍습에는 또 하나의 현명함이 내포되어 있었다. 뭔가 대자연의 이상한 의지에 따라, 여성은 어디서나 남성보다도 육체적으로 강하고 남자가 죽지 않으면 안 될 때라도 여자는 살 수가 있다는 그래서 언제나 거의 예외 없이 여자 쪽이 너무 많다는 생각, 이것은 중국에서는 매우 위험한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여성이 자연에 대해 갖는 이 저항력은 여자의 생존이 곤한했기 때문에 한충 더 강하게 자져졌기 때문이다. 소중한 남자아이를 기를 때에는 바람에도 내놓지 않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응석받이로 길러 사람을 못쓰게 만들고 연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모든 과정에서 여자는 제외되어있었기 때문에 남자아이들이 죽을 때에도 불행하게 목슴을 연명했던 것이다. 여자를 가정 안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서는 일부다처만이 유일한 방책이었다. 여자가 있어야 할 장소를 집안으로만 한정하는 나라는 일부다처일 수밖에 달리 대책이 없다. 특히 전쟁이 일어났을때는 한층 더 그러했다.
남자애의 사망률은 지금껏 여자의 그것보다도 높았다. 그래서 옛 중국에서는 일부다처를 법률적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분명하게 정해졌던 남자와 여자의 생활 양식은 만일 여성이 불행히도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영구히 노예로 둘 수가 있었더라면 정말로 휼륭하게 오늘날에도 운용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로 가도 어느 가정에서나 영리하고 현명한 여자가 너무 많았다. 무지한 채 벽 속에 밀폐당해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을 때, 이 안절부절 못하는 생물들은 그 장소에 만족하여 얌전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얌전히 있는 대신에 뭐든해서 욕망을 채울 길을 열고, 어떤 수단으로든 세력을 뻗치기 위해 전념했다. 바로 얼마전의 일이다. 프랑스의 한 여자는 남자들은 하룻밤의 평화를 손에 넣기 위해 어떤 짓까지 하는지 당신으로선 상상도 못할 거예요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와 같이 중국에서도 많은 남자가 밤에 귀가하여 의지 강하고 고집 세고 영리한 여자와 마주 대하여 그 여자의 재기 넘치는 마음이 자기 위에 경도 되고 있는 것에 한숨을 쉬었다. 만일 그 여자가 아름답다면 대개는 추한 것보다 아름다운 경우가 많은 것은 아름다움에 대해 남자가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만 남자는여자의 방문을 열기 전에 이미 흥분하고 만다. 게다가 남자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중국에서 여성은 완전한 평등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휠씬 이전부터 중국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우세했다. 사실 나는 중국에 변화가 왔을 때, 남성 쪽이 겨우 여성과 동등해지게 된 것을 기뻐하며 그것을 주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남성에게 있어 그것은 일보 전진인 반면, 여성은 그것에 의해 그만큼 잃게 된 것이었다. 여자는 방자한 인간으로 사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때까지는 여자의 무지를 교묘히 이용하여 아이들 같음과 무책임과 연약성과 매력으로써 자기 생각하는 대로의 것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들은 헌신적이고 실행적인 수완을 지녔으며, 교활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헌법 속에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며 성장한 한 개인으로서 동등한 책임을지지 않으면 안된다고 서둘러 써 넣은 것은 남성이었다. 남성은 기꺼이 여성을 위해 학교를 해방하고 직업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오늘날 여성이 충을 메고 남성과 나란히 전선에서 진군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는 만족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어느 나라에서건 여성을 집안으로도로 끌어들이려고 생각한다면, 우선 먼저 중국 남녀의 역사를 잘 연구해 보라고 나는 권장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득을 본 것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그 무지를 사용하여 남성의 지혜를 혼란시켰다. 무지한 자로서 그녀들은 맞는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었다. 화를 잘 내는 성질에다 고집불통이요, 변덕쟁이요, 호기심 많고 하여튼 여자들에게는 그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까 하고 남자들은 말한다. 남성들은 밤에 피로에 지쳐 집에 돌아왔을 때, 평온을 희구하는 나머지 무엇이건 여자에게 꺾이고 말았다. 또 무지 했던 여성은 비록 세력을 떨치고있었다고 해도 남성에게 좋은 어머니조차도 되지 못했다. 너무나 많은 남자 애들이 죽어 버리므로 육아의 초보를 가르쳤으나 거의 쓸데 없는 짓이었다. 무교육의 두뇌는 무엇을 배우기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 머리는 자기의 무지한 그 나름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자신이 옳다고 굳게 믿었다. 무지한 중국의 어머니들은 언제나 새로운 사상은 좋을 것이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저능했기 때문에 무엇을 가르치기도 불가능했고 사랑을 받는 아들의 입장에서는 어머니의 과잉 애정 때문에 괴로워해야 했다.
이처럼 여성의 무지로 인해 남자 쪽이 여자보다 훨씬 더괴로움을 당했다. 그것은 여성이 남성보다도 강하고 저항력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성은 유아기 때나 청춘기에도, 병들었을 때나 정신적인 번뇌와 격정에 흔들리는 위기에도, 또 노후에도 지성과 영지에 넘치는 위로를 매우 필요로 한다. 생애의 어느 시기에 무지한 여성으로부터 당하는 심한 타격에 의외로 쉽게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중국인은 이런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위험을 줄이기 위해 남자애는 7세가 외면 재빨리 남자의 주거 쪽에 편입시켜 살게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집에서 떠나 있을 때가 많았고 어머니는 언제나 집에 있었다. 그래서 남자애는 어머니의 주거 쪽으로 달려가 마음껏 응석을 부리고 달콤한 과자를 얻어 먹는 식이었다. 이런 것은 모두 애정에서 나온 행동들이었다. 그러나 세기에서 세기로 이어지는 이런 애정 속에서 중국의 남성은 여성의 주중에서 모조리 약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
|
|
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미인계를 써서 반란을 일으킨 이시애
이시애(?-1467)의 본관은 길주이고, 벼슬은 회령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동생 이시합과 함께 반역을 도모했다.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이 길주에 도착하자 이시합은 길주의 관기로 있는자신의 첩 소생 딸을 절도사의 침실에 들여보내어 수청을 들도록 하고 잠긴 문을 안에서 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 문으로 들어온 반란군들에 의하여 절도사 강효문은 피살되었고, 이시애는 길주를 발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세조는 귀성군 이준을 도총사로 삼고 조석문을 부총사로 삼았다. 귀성군 이준은 겨우 18세였지만 무술과 전략이 있다는 이유였다. 또 허종을 함길도 절도사로 삼고 강순과 어유소를 각각 대장으로 삼아 이시애 난의 토벌에 나섰다.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여러 고을에서 수령을 살해하고 반란군에게 호응하는 일이 일어났다. 함흥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관청을 포위하고 관찰사 신면을 공격하였는데, 신면은 누각에 올라가 방어하다가 힘이 달려 끝내 피살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관서지방 출신으로 벼슬이 2품에 오른 단천 사람 최윤손을 불러 효유사로 임명하고 함길도로 내려보냈다. 효유사의 임무는 반란군을 회유하고 그곳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막중한 임무를 띠고 내려간 최윤손이 반란군의 편이 되어 조정의 비밀을 그들에게 넘겨주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강순과 허종이 거느리는 관군은 홍원에서 그들과 격전을 벌이고 또 북청과 만령에서도 크게 싸웠다. 반란군은 높은 지역으로 달아나 진을 치고 화살을 비오듯 쏘아 대었으므로 관군이 접근할 수 없었다. 토벌 좌장군 어유소는 작전을 바꾸었다. 정예병을 뽑아 작은 배에 나눠 태우고 풀색, 나무색으로 물들인 옷을 입혀서 보냈다. 그들은 해안을 통해 상륙하여 나뭇가지를 잡고 그들이 있는 곳보다 훨씬 높은 곳을 택하여 그들의 등뒤에서 징을 치고 북을 두드려 소란을 피우도록 작전을 짰다. 등뒤 높은 곳에서 갑자기 북소리와 징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적들은 깜짝 놀라 대오가 흐트러지고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이때 뒤따라 도착한 관군의 대부대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머리에 방패를 이고 개미떼처럼 언덕을 기어오르니, 반란군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진용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시애는 급하게 길주로 도망하였다. 그는 가족과 살림을 꾸려 오랑캐 땅으로 도망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길주 사람 허유례가 적장의 부하 이주 등을 꾀어 이시애와 이시합을 생포하도록 하였다. 그들의 머리는 진중에서 끊어져 서울로 보내졌다.
|
|
|
글터 → 이글저글
|
아론의 지팡이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려했으나 '이집트'의 왕은 그들의 '이집트' 탈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세'가 고민 끝에 하나님에게 탈출의 방법을 물으니 하나님은 '이집트'의 왕 '바로'를 혼내 주어서 출국을 허락하게 만들 양으로 '아론'의 지팡이를 사용하게 했다. '아론'은 '모세'의 형으로 그때 나이 83세였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아론'이 지팡이로 강을 치니 물이 온통 피로 변하여 물고기가 죽고 사람들은 먹을 물이 없어졌다. 그러나 '바로'는 항복하지 않았다. 다시 그 지팡이의 힘을 빌어 모든 가축이 병들게 하고 우박이 쏟아져 나라 안을 쑥밭으로 만들었으며 메뚜기 떼가 새까맣게 몰려와 곡식을 갉아먹었다. 그래도 '바로'는 '이스라엘' 사람의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하나님은 마지막 수단으로서 3일 동안 '이집트' 전역을 암흑 세계로 만들어 버렸다. 그제사 고집 센 '바로'도 두 손을 들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는 수 없으니 '이집트'를 떠나도 좋다고 '모세'에게 허락해 주었다. 이리하여 총사령관 '모세' 부사령관 '아론'에 이끌려 60만 명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 이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출애급기)
|
|
|
글터 → 명상/지혜/처세
|
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3장 삶의 여백을 비추는 지혜
산비둘기를 쏘아 죽인 장군
무예와 지략을 겸비했던 전국 시대의 영웅호걸 다케다 신겡에게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대 결전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출전을 격려하기 위한 주연이 벌어져 전군이 한창 흥청거리는 중이었다. 어디서 왔는지 산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왔다. 그리고 마치 신겡의 출전을 축하하는 듯 연회장 위를 두어 번 돌더니 조용히 뜰 앞의 소나무 가지에 앉았다. 진용을 완전히 갖추고 막 출전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본 일동은 기뻐하며 투지를 불태웠다. "이것이야말로 필승의 길조다!" 그런데 그때 도 산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서 똑같이 연회장 위를 맴돌고 소나무 가지에 앉았다. 일동은 더욱 기뻐서 모두 일어나 함성을 질렀다. "정말 좋은 조짐이야." "이것이야말로 전승의 징조다. 한 마리도 길조인데 두 마리씩이나 왔으니 이번 싸움은 대승을 거둘 게 틀림없어." 그러나 그것을 보고 있던 신겡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땅치 않은 얼굴로 잠시 산비둘기를 쏘아보더니 옆에 있던 활을 집어 화살 하나로 산비둘기 두 마리를 쏘아 떨어뜨렸다. 기뻐하던 일동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물었다. "왜 상서로운 비둘기를 쏘셨습니까?" 그러자 신겡은 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새 중에서도 비둘기는 가장 머리가 나쁘다고 한다. 그런 비둘기가 싸움에 앞서 승패를 알 턱이 없다. 뿐만 아니라 다음 번에 이렇게 출전할 때 비둘기가 날아오지 않는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오늘 것이 길조라면 오지 않는 것은 흉조라고 하겠지. 이렇게 된다면 이런 시시한 것이 군사들의 사기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마음에 미혹이 끼는 것이야말로 싸움에 임하는 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다." 부하들은 과연 옳은 말이라고 감탄하면서 자신들의 경솔한 행동을 부끄러워했다.
과학이 눈부시게 진보한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는 의외로 "재수가 좋다"라든지 "재수가 나쁘다"는 말이 활개치고 있다. 이 일화처럼 재수가 좋으면 이것을 길조라 하고 재수가 나쁘면 이것을 흉조라고 하는 사고 방식이 의외로 뿌리 깊이 박혀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때 사용하난 "재수"라는 말의 의미를 "모든 일을 해 나아감에 있어서 길흉의 징조",또는 "전조"라는 식으로밖에 파악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징조나 전조를 길조나 흉조와 결부시키는 결정적 관건이 되는 "재수가 좋다"라든지 "재수가 나쁘다"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 비과학적이고 하찮은 현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일화에서 출전을 앞두고 비둘기가 날아왔다고 하는 것 역시 하찮은 미신이다. 만약 비둘기가 승리를 의미한다는 전승이 전해져 온다면, 아마도 그것은 일찍이 어디에선가 출전을 앞두고 비둘기가 날아오는 사건이 있었고, 그것이 승리로 연결되었다는 아주 우발적인 관련이 마치 비둘기를 길조인 양 만들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신겡이 그것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비둘기를 쏘아 떨어뜨림으로써 부하들을 꾸짖었듯이, 싸움을 앞두고 비둘기 따위가 승패를 예견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런 하찮은 것, 그런 어리석은 것에 질질 끌려 다니며 재수가 좋다느니 재수가 나쁘다느니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것을 생활에서 없애지 못하는 것일까. 게다가 이상하게도 과학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그런 맹신자가 의외로 많다. 우리는 이것을 "현대 지성의 놀라운 원시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기"라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모든 것의 결과는, 반드시 그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있기 때문이며, 그 원인이 결과를 낳게 하는 직접적인 이유인데, 그렇다고 원인만으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반드시 인연이라고 하는 간접적인 이유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쉬운 예를 들면 벼라고 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하는 것은 볍씨라는 원인인데, 그 원인을 책상 위에 놓아둔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벼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그 원인에 밖에서의 힘, 즉 흙이라든가 물 또는 빛이라는 인연이 가해질 때 비로소 벼라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즉 인연에 의해서 모든 것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인데, 그 본래적인 의미에 대해 이해를 하게 되면 징조라든가 전조 하는 것으로 왜곡된 대수롭지 않은 의미와 그 비과학성을 단숨에 떨쳐 버릴 수 있다.
위의 조그만 일화에서 재수 따위를 하찮게 여기는 신겡의 태도에서 무용과 지략을 겸비한 무장의 놀라운 의연성을 엿볼 수 있고, 동시에 "현대 지성의 원시성"에 새삼스럽게 놀라게 되는 것이다.
|
|
|
그림과 사진 → 풍경 - 물, 하늘
|
[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