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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25 호
단기 4340. 7. 19 (음력 6.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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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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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7181806561 &code=960205
김홍신 “정치보다 문학이 100배 가치”…대하소설 ‘대발해’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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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은 그 내용을 놓고 역사학자와도, 다른 국가와도 서로 논쟁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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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국회의원 낙선 이후 본업으로 돌아간 작가 김홍신씨(60)가 3년 만에 10권짜리 대하소설 ‘대발해’(아리샘)를 연재 없이 전작(全作)으로 발표했다. 18일 기자간담회를 가진 김씨는 “요즘 나오는 역사소설들과 어떻게 다르냐”는 질문에 “작가는 하느님과 같은 전지적 시각에서 역사의 물증을 가져와야 한다”고 답변했다.
668년 고구려 멸망에서부터 고구려 유장 대조영이 698년 세운 발해가 926년 멸망하기까지 260여년의 역사를 다룬 이 작품은 15명의 황제를 비롯, 400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규모 역사소설이다. 한·중 양국 역사에서 왜곡·폄훼된 발해사의 거대한 퍼즐 맞추기를 위해 중국 사료인 ‘책부원구’ ‘신당서’ ‘구당서’ 등과 ‘단기고사’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국내외 사료 136책 400여권을 참조했다고 한다. 또 러시아 연해주, 중국 요하, 몽골 일대를 현지 취재했다.
“발해사를 쓰기로 작정한 이유는 우리 역사에서 아예 제외돼 있기 때문입니다. 일부 남아 있는 사료도 적국이었던 중국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고요. 그러나 많은 사료를 뒤지고 대조하면서 발해가 고구려를 잇는 북방강국이란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 역사서 ‘책부원구’에는 ‘서기 732년 발해 2대 황제 무황이 베이징 근처까지 진군해 당시 세계 최강대국 당나라를 위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5권에서 당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장면으로 살아났다. 그는 또 발해의 문화적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발해문자와 화폐, 조세제도 등도 사료에 근거해 구성했다.
현재 남아있는 발해 유적은 3대 문황 대흠무의 둘째 공주 정혜, 넷째 공주 정효의 무덤에서 발굴된 비문이 유일하다. 당이 발해를 패망시킨 뒤 철저히 유린했기 때문이다. 시조 대조영이 고구려에 귀화한 말갈족이라는 중국의 주장은 당시 당이 외국인을 상대로 실시한 과거인 빈공과에 발해 선비들이 급제한 기록 등으로 미뤄 날조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김씨가 ‘대발해’에 착수한 건 2년 전이지만 그에 대한 구상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국회의원 자격으로 중국에 갔을 때 한 조선족 역사학자로부터 인근 국가의 민족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구성하는 동북공정이 추진된다는 사실을 들었고, 그때부터 절박한 마음으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고구려 패망 이후 한국사는 신라·백제 중심의 남국, 발해 중심의 북국 시대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루 12시간씩 글을 쓰면서 결석, 팔과 어깨 마비, 불면증, 햇빛알레르기 등을 얻은 김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행복했다”면서 “정치보다 문학이 100배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글 한윤정·사진 박재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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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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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사랑처럼 외면과 무관심을 제외한 어떠한 공격에도 살아 남을 수 있다. /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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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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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돌이 날아들면 옥으로
효도와 우애는 인을 행하는 근본이 된다. 그러나 부모를 사랑하고 그 형제끼리 우애하는 것쯤이야 세상에 많이 있어 그렇게 치켜세울 만한 행실이 될 수는 없다. 큰아버지나 작은아버지가 형제의 아들을 자기 아들처럼 여기고, 형제의 아들들이 큰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를 자기 아버지처럼 여기고, 사촌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기를 친형제처럼 여겨서 집에 손님으로 온 사람이 열흘이 넘도록 묵으면서도 끝내 누가 누구의 아버지가 되고 누가 누구의 아들이 되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여야만 바야흐로 그 집안의 기상을 떨칠 수가 있다.
사람의 집에서 부귀가 한창 피어날 때는 골육간에 서로 의지하고 믿게 되어 원망할 일이 있어도 마음으로 삭여 드러내지 않으므로 화기를 잃지 않을 수 있으나, 만약 매우 빈곤하면 곡식 몇 되 포목 몇 자 가지고도 다툼이 일어난다. 나쁜 말이 서로 오가며 서로 모욕하고 무시하다가 마침내는 더욱 격렬하게 다투어 원수지간이 되어 버린다. 이런 때 만약 감동시킬 만한 도량 넓은 남자가 없다면, 점잖고 지혜로운 부인처럼 산이나 늪 같은 넓은 도량을 활짝 열어 구름을 헤치고 나온 햇빛이듯 순순히 받아들여라. 어린아이처럼, 속없는 바보처럼, 뼈 없는 벌레처럼, 갈천씨(중국 상고시대의 제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천하를 잘 다스리는 분)처럼, 참선하는 중처럼 하여 상대방이 칼이나 창으로 덤벼들면 맛있는 술로 대접해 주어라.
너희들은 이러한 뜻을 잘 알아 날마다 "소학" 외편에 있는 가언(본받을 만한 말)이나 선행을 착실히 따르고 부지런히 잘 지켜 잠시라도 잊지 말아야 한다. 끈기 있게 그리 행동하게 되면 기뻐하는 마음이 저절로 이루어져 화목하게 될 것이다. 불행히도 화목하게 되지는 않더라도 친척이나 고을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히 공정한 논평이 있게 마련이다. 잘잘못을 함께 싸잡아 되놈이나 오랑캐 같은 야만 족속이라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은 채 가문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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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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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근대의 사상
1. 전기/개항기-3.1 운동기
3. 민중 사상과 종교
2. 갑오농민전쟁 이후의 민중 운동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
신흥 종교
4. 불교
불교계의 상황
개항 이후 그 동안 배불 정책으로 억눌려 있던 불교계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게 된다. 특히 이제까지 배불 정책으로 일관하던 정부의 불교 정책이 달라지는 1895년 이후 불교계는 더욱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895년은 승려의 성내 출입이 허용된 해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일본 승려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다. 조선 승려들은 태종의 억불 정책 이후 성내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일본 승려들은 1876년 개항 이후 자유롭게 성내 출입을 하며 서울 안에 포교소를 꾸미고 살았다. 우리 나라에 와 있던 일본 승려 사노는 이러한 것을 보고 조선 승려들에 대해서도 입성을 허락해 줄 것을 건의하여 성내 출입이 허용되었던 것이다. 이 후 정부에서는 불교 배척 정책을 버리고 불교 사찰의 통일을 기하고 불교에 대한 국가적인 관리를 꾀하게 되었다. 1899년에는 동대문 밖에 원흥사를 세워 한국 불교의 총종무소로 삼고, 13도에 하나씩 으뜸 사찰을 두어 전국 사찰의 사무를 통할하였다. 그리고 전국 승려의 총대표에 해당하는 도섭리 등의 승직을 두었다. 1902년에는 불교를 국가에서 관리하기 위해 궁내부 소속으로 관리서를 설치하였다. 관리서에서는 '사사관리세칙' 36조를 발포하고 전국 사찰 및 승려에 대한 일체 사무를 맡아 보았다. 이러한 정부의 움직임과 아울러 불교계에서도 통합과 개혁을 위한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불교의 개혁을 주장하고 그것을 직접 실천했던 대표적인 사람들로는 백용성 등을 들 수 있다. 백용성은 대각교 운동을 전개하였고, 백학명은 반농반선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박한영은 포교 현대화 운동을 하였고, 송경허는 격외선 생활화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표하면서 불교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 시대의 불교계의 상황을 정확히 알려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불교를 이용하려고 다방면으로 기울인 노력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병자수호조약이 맺어진 직후인 1877년에 진종본원사 부산 별원이 설립되었고, 1881년에는 일련종, 1895년에는 본파 본원사, 1897년에는 정토종, 1906년에는 조동종과 진언종 등이 차례로 조선으로 들어왔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는 데에 불교를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독교를 앞세우고 식민지를 건설하던 구미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다를 바 없는 수법이었다. 그들은 불교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앞서 언급한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조치를 풀어 줄 것을 건의한 것도 그 한 예였다. 즉 일련종의 사노는 1895년에 도성 출입 금지의 해제를 건의하여 승니의 입성 금지를 완화하라는 명령을 받아 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본 불교의 조선 진출은 이후에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들은 조선에서의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교육을 시킨다든가, 일본 불교를 시찰하도록 한다든가 하는 여러 방법을 사용했다. 조선의 여러 종교 중에서 특히 불교를 선택하여 이용하려고 한 것은 두 가지 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첫째는, 불교 출신 인사들 중에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에 나선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조선의 불교계 인사들은 일본 불교에 대해서 호의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일본 불교가 불우한 위치에 있던 조선의 불교에 대해 어느 정도 힘을 보태 준 것처럼 보인 것이 큰 원인일 것이다. 둘째는, 불교가 조선 왕조 500년 동안 탄압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 영향력에서는 어느 종교 못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20세기 초엽까지 불교를 일본에 복속시키려는 여러 가지 기도가 있게 되었다. 중요한 사건 하나는 1910년에 해인사 주지 이회광이 조선의 불교를 일본의 조동종과 합종하려 했던 일이다. 여기에 대하여 한용운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임제종을 만들어 이회광 일파에 대항, 결국 그 기도를 분쇄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을 완전히 합병한 다음 해인 1911년에 불교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이용하기 위해 사찰령 7조를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찰령 아래서 우리 나라의 불교는 완전히 일제의 관리하에 들게 되었다. 주지의 임명권, 사찰 재산의 처분권이 모두 일제의 관리로 넘어간 것이다. 이에 힘있는 승려들 가운데서는 일제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하고 거기에 아부하여 출세하려는 자들이 늘어났다. 상황이 이러하자 교단 내에서는 점차 비판의 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1920년대부터 정교 분리, 즉 사찰령 폐지 운동과 교단 자체의 체질 개혁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조선불교청년회, 조선불교유신회, 조선불교청년동맹 등이 조직되었다. 이 운동은 일제 말기까지 거의 중단됨 없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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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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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
본뜻 : 사주란 사람이 태어난 해 달 날 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람의 생을 하나의 집으로 비유해 볼 때, 위의 네 가지가 각각 네 기둥을 이룬다 해서 사주로 표기했다. 사주를 각각의 천간과 지지로 표기하면 여덟 글자가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 팔자라 한다. 천간은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의 10가지다. 지지는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의 12가지다. 이 간과 지가 조합을 이루어 60갑자를 만들어 낸다.
바뀐 뜻 : 사주란 본래 위의 설명처럼 사람이 난 연월일시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그것이 곧 한 사람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여 타고난 운명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주를 본다'는 말은 곧 한 개인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일이라는 뜻으로 굳어졌다.
"보기글" -결혼하기 전에 상대방의 사주를 보는 것은 옛날에나 하던 풍습이었는데, 그걸 굳이 오늘날까지 끌고 와 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흔히들 사주팔자를 붙여서 얘기하는데, 사주와 팔자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산전수전
본뜻 : 산전과 수전은 백병전, 공중전 등과 같이 여러 가지 전투 종류 중의 하나다. 산악전이라도 일컫는 산전은 산의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하는 전투고, 육지전의 반대인 수전은 물에서 하는 전투를 가리키는 말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적벽대전이 바로 수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바뀐 뜻 : 흔히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표현으로 널리 쓰이는 이 말은 세상의 온갖 고생과 어려움을 다 겪어 경험이 많음을 이르는 말이다.
"보기글" -다섯 남매를 키우면서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옥천댁이 이제서야 한시름을 놓게 되었네 -김 박사 그 사람, 어려운 시절에 외국에 나가서 산전수전 다 겪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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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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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또 하나의 사랑 - 동성애
동성애, 동성애 영화, 양성애
동성애자(homosexual)와 이성애자(heterosexual)라는 말은 19세기 말 벤커트(K.M.Benkert)라는 사람에 의해 최초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homo는 호모투덴스나 호모사피엔스에서처럼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어 homos, 즉 동일하다는 의미에 해당한다. 동성애자들은 homosexual이라는 표현이 부정적 의미지를 담고 있다고 여겨, 사랑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philia를 이용하여 스스로를 호모파일(homophile)이라 부르기도 한다. 더욱 일반적인 표현인 게이(gay)는 남성과 여성 동성애자를 모두 지칭하는 표현이다. 그리고 여성 동성애자를 특별히 지칭하는 말이 게이 우먼(gay woman)또는 레즈비언(lesbian)이다. 호모도 동성애자 전체를 지칭하는 데 빈번히 사용되는 말이지만 상당히 부정적이며 차별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다. 동성애자들이 등장하는 영화는 다양하게 분류된다. 동성애를 왜곡할 뿐 아니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영화도 숱하게 있으며, 동성애 운동 차원에서 거론되는 게이 필름과 퀴어 시네마 등도 있다. 게이 필름과 퀴어 시네마는 모두 동성애 운동의 성격을 띠는데, 후자가 전자의 발전 진화 형태라는 사실 정도만 확인하면 될 것이다. 1970년대 이후 인문학적 발전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개념인 퀴어 시네마의 속내를 논의하고 게이 필름과의 변별성을 살펴보는 과정은 생략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특별히 구분이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게이나 레즈비언 등을 동성애자로 번역하고, 동성애를 묘사하는 모든 영화를 중립적인 의미에서 동성애 영화라고 부른다는 점을 밝혀 둔다. 동성애자와는 구별되는 성 정체성의 한 범주로, 남성과 여성 모두와 성적으로 로맨틱한 관계를 유지하는 존재인 양성애자가 있다. 이들에 대한 연구는 동성애에 대한 연구만큼 많이 진행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분명한 사실은 양성애가 독자적인 성 정체성이지 동성애의 하위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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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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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5.진실한 사랑
결혼은 자립한 남녀의 평등계약
평균 수명이 47세 정도였던 금세기 초만 해도, 17세에 결혼하여 곧바로 아이를 갖고 죽을 때까지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평균 수명이 77세를 넘어서고 있는 오늘날에는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혼인서약을 애정이 소멸되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로 바꾸어 쓸 법도 하다. 미국의 가정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라는 책에는 이런 글이 있다. 만일 결혼의 서약이 이혼을 위한 서약이 이혼을 위한 자료로써 기록되어 남는다고 하면, 적어도 결혼하는 부부의 3분의 1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 놓을 때까지를 두 사람이 다른 배우자를 선택할 때까지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지내는 것을 좋아 하는 것 같다. 또한 영구히 가족으로서 지내고 싶어하고, 그것을 합법적으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사회가 관용을 베풀고 다양한 삶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인간은 의무와 속박 투성이의 전통적인 가족 관계 쪽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들이 생각해 보고자 하는 문제는 전통적인 가족제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성인이 되지 못한 사람이 생활에 뛰어드는 문제인 것이다. 부모들은 딸을 세상일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인 채로 두고 싶어한다. 여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과보호된 아이로서 결혼을 통해 마찬가지 환경에서 자란 다른 남셩의 손에 넘겨진다. 성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젊은 두 남녀는 뜨거운 행위에 뭔가 심원하 의미라도 있는 것인가 더듬어보는 사이 1, 2년이 흐르고 아이가 아이를 갖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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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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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오랑캐들을 벌벌 떨게 한 이징옥
이징옥(?-1453)의 본관은 양산이다. 형 이징석은 18세, 징옥은 14세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두 아들에게 산돼지가 보고 싶다고 하였다. 두 아들은 집을 떠났다. 형 징석은 산돼지를 잡아서 돌아왔고, 징옥은 이틀 뒤에 맨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의아해 하며 이징옥에게 물었다.
"사람들의 말이 형의 용맹이 너보다 못하다고들 하는데 어찌하여 너의 형은 돼지 한 마리를 잡아왔는데 너는 이틀 후에 오면서 빈 몸으로 왔느냐?" "어머니 문 밖을 보십시오"
어머니가 문 밖으로 나가 보니 마당에 큰 산돼지 한 마리가 누워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징옥은 어머니가 산 산돼지를 보고 싶어할 것이라 생각하고 밤낮으로 추격하여 그 돼지가 기진맥진했을 때를 기다려 사로잡아 온 것이다.
언젠가 이징옥은 길을 가다가 슬피 우는 젊은 부인을 만났다. 징옥이 그 까닭을 물었다. "저의 남편이 호랑이에게 물려 갔습니다. 그 호랑이가 지금 대밭 속에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징옥은 팔을 걷어붙이고 즉시 대밭으로 들어갔다. 칼로 호랑이 배를 갈라 보니 고기가 아직 소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징옥은 그 고기를 보자기에 싸서 부인에게 주었다. 부인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였다. 이징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이징옥의 아내가 집안의 가난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기를 원했으므로 이징옥은 억지로 붙들지 않고 가게 내버려 두었다. 뒤에 이징옥이 영남 절도사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지 오랜 뒤였다. 이징옥은 사냥해서 얻은 수백 마리의 짐승을 시집간 아내 집으로 보내 주었다.
이징옥의 무용은 따를 사람이 없었으므로 중국인이나 오랑캐들이 모두 겁을 내었다. 그는 육진을 설치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김종서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김종서가 죽음을 당하고 세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이징옥은 함길도 절제사로 있었다. 이징옥을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세조는 이징옥에게 서울에서 내려간 박호문에게 절제사의 자리를 넘겨 주고 서울로 돌아오라는 명을 보냈다. 박호문에게 절제사의 자리를 넘겨준 이튿날 이징옥은 생각했다. '절제사는 무거운 책임이 있는 자리인데 박호문이 소문도 없이 갑자기 와서 그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는 즉시 절제사가 있는 경성으로 달려갔다. 그는 박호문에게, 상의할 일이 있으니 만나자고 불러낸 뒤에 그가 나오자마자 쳐서 죽이고 자기의 부하들을 모아 남쪽으로 향하였다.
"이제 강을 건너가 내가 대금황제가 되면 만족하겠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그 이튿날 행군을 하기로 하였다. 이때 판관 정종이 이징옥을 죽이려고 사람을 지붕 위에 매복시켜 두었다. 밤이 되어 이징옥이 의자에 앉아 잠깐 졸고 있는데 의자 밑에 있던 이징옥의 아들이 갑자기 말하였다.
"꿈에 아버지가 머리에서 피를 흘려 그 피가 다리에까지 흘러 내려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징옥은 그것은 좋은 징조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종이 군사들을 데리고 돌진해 들어왔다. 이징옥이 그들과 싸워 수십 명을 죽이고 그 자신도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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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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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밭갈이 하고 이브가 길쌈할 때
14세기 중엽, 유럽에서는 페스트의 유행으로 인구가 격감했다. 그 결과 일손이 줄어들자 영주는 한층 더 농민에 대한 부역을 강화했으며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영국에서는 '에섹스'의 벽돌 직공이던 '와트 타일러'가 두목이 되어 1381년 '켄트'주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그는 런던에 침입하여 '리처드' 2세에게 농노제의 폐지 등을 요구, 이를 수락시켰으나 런던시장 '윌워스'의 칼에 맞아 죽었다. 이 폭동에서 정신적 지도자였던 '죤 폴'은 "아담이 밭 갈고 이브가 길쌈하던 때는 대체 누가 영주였단 말인가"하며 농민을 격려하고 영주의 착취를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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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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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3장 삶의 여백을 비추는 지혜
까마귀는 꽁지로 울지 않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열 번째 아들로키수의 항슈가 된 도쿠가와 요리노부가 젊었을 때 중병에 걸렸다. 그러자 까마귀 떼가 집 근처가지 날아와 시끄럽게 우짖어 댔기 때문에 가신들은 매우 꺼림칙하게 생각했다. 혹시 영주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기도 했다. 요리노부의 가신이자 다나베의 성주인 안도 나오츠구가 그런 측근들의 모습을 보고 느닷없어 물었다.
"까마귀는 입으로 우는가, 꽁지로 우는가?" 기이한 물음에 가신들이 우물쭈물했다. "그야 말할 것도 없이 입으로 웁니다만......" 그러나 나오츠구는 깔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되지 않았는가, 만약 꽁지로 운다면 재수가 없을지 모르지만 단지 입으로 울고 있는데 왜 재수가 없단 말인가. 시시한 일에 쓸데없이 신경쓸 것 없어."
과학 만능의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근대 과학의 세계를 받은 과학자들까지도 길흉의 조짐을 들먹이면서 시시한 미신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예가 의외로 많다. 그런 점에서 말하면 버스든 승용차든 차라고 이름 붙은 것들이 예외 없이 부적인가 하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매달고 달리는 현실도 한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부적이 교통사고를 막아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이 차를 운전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안정시켜 준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부적을 매달아야 안정감을 얻는 원시적 정신의 소유자를 점점 심해지는 교통 지옥 속에서 운전하도록 놓아두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있을까. 물론 부적뿐만이 아니다. 황당무계한 미신이나 길흉조짐을 들먹이는 일이 횡행하고, 심지어는 종교까지도 이러한 행태에 한몫 끼여서 그것으로 부를 쌓아 간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까마귀는 입으로 우는데 뭐가 이상하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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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풍경 - 물,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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