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근대의 사상
1. 전기/개항기-3.1 운동기
3. 민중 사상과 종교
민중 운동에 나타난 사상적 경향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기의 국제 관계는 발달한 과학 기술의 힘을 등에 업은 제국주의 국자들이 약소국을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무력을 앞세워 약소국들과 강제로 통상 조약을 맺고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정치적 침략을 자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약소국의 민중들은 한편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채 가족들과 헤어져 유랑 생활에 나서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목숨을 걸고 피를 흘리면서 이들 제국주의 침략에 항거하기도 했다. 이 시기 조선의 민중들 역시 안으로는 봉건 체제의 말폐적 현상들로 말미암아 심한 수탈을 당하는 한편, 밖으로는 외세의 침입으로 인해 하나 둘씩 삶의 근거지를 빼앗겨 가고 있었다. 국가와 민중의 삶을 책임 진 왕 이하 정부의 관리들은 이러한 내외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여 해결하려는 의지와 능력부터가 부족했다. 이에 민중은 막연히 앉아서 정부의 대책만 기다릴 수 없어 스스로의 살길을 찾아나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은 조선 왕조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주자학적 사유를 거부하고, 전통적으로 전래되어 오던 미륵 사상, 정감록, 무교와 신흥 종교인 동학, 그리고 증산교와 대종교 및 원불교 등에 귀의하여 그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조직적인 무장 투쟁의 대열에 합류하는 민중도 있었다. 무장 투쟁에 참여한 민중들한테서도 마찬가지로 전통 사상과 신흥 종교의 영향이 나타나며, 나아가 민주주의 사상의 요소가 드러나기도 하였다. 당시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투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갑오농민전쟁과 활빈당 투쟁 그리고 의병 전쟁 등이다. 여기에 참여했던 민중들의 사상적 경향이 다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공통점은 민중 중심적이고 반침략적이라는 점이다.
1. 갑오농민전쟁에 나타난 사상적 특징
많은 민중이 참여한 갑오농민전쟁은 우리 나라의 근대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민중이 스스로 조식을 정비하여 광범위한 지역에서 부패한 봉건 정부와 외세와 맞서 현실의 모순을 제거하고자 무장 투쟁을 전개한 점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전쟁에는 동학도를 비롯한 많은 민중들이 참여했다. 이 전쟁의 전기간 동안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농민군의 지도자들은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봉건 통치자들과 외래 침략자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동학 사상 :
갑오농민전쟁의 사상적 배경이 된 동학의 등장은 전통 유학의 윤리 도덕이 타락하고 관리들의 학정과 수탈이 심해지는 한편, 천주교가 침투하고 서양 열강의 침입이 거세어지는 등 내외적으로 위기 의식이 높아졌던 19세기 후반기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동학은 1860년에 최제우에 의해 창시되고, 2대 교조 최시형과 3대 교조 손병희(1905년 12월에 동학은 천도교로 개칭됨)를 비롯 수많은 동학도들에 의해 발전한 민중적, 민족적 성격을 띤 신흥 종교라 할 수 있다. 이 신흥 종교인 동학은 한국 근대 종교사에서 대표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경전으로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조선 밀기 개화파나 척사위정파들이 주로 지식인이거나 양반층이었던 것과는 달리 동학도들은 대부분 민중이었다. 동학은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는 물론 우리의 전통적인 민간 신앙 요소까지 결합하여 만든 사상으로서, '지기'를 정점으로 하는 일원론적 우주관과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동학에서 주장하는 하늘님 사상의 요체는 이른바 21자 주문에 거의 다 담겨 있다. 이 주문에는, 형용하기도 어렵고 보기도 어렵지만 어느 곳에서나 맑게 존재하는 혼원한 일기인 '지기', 즉 하늘님의 조화를 깨달아 평생토록 잊지 않고 마음에 보존하면, 그 도를 알고 그 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종교적인 염원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하늘님 사상의 종교적 체득은 피조물과 조물주가 둘이 아니라 바로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과 조물주인 지기는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다. 사람은 바로 지기가 분화되어 나온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몸 속에는 하늘님인 지기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요 "천심은 곧 인심"이라는 말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이른바 인내천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를 바르게 하는" 성, 경, 신과 같은 수양의 방법이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은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며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즉 인내천 사상은 한편에서는 관념적이라는 면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라든지 관존민비, 적서의 차별, 남존여비 등의 봉건적 신분 차별을 부정하는 평등 사상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동학은 천주교나 불교와는 달리 내세를 부정하는 현세 중심의 사상이며, 사람이 가장 신령스럽다는 주장에서 보이듯 인간 중심의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동학은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널리 민중을 구제하고', '온 세상에 덕을 베푼다'는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이를 더욱 확장시켜 이른바 '후천 개벽'의 원리를 확립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동학도들은 현실 사회에 팽배한 모순을 해결하는 데 후세나 내세로 미루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초역사적인 종파도 아니요, 개개인의 안락만을 좇는 이기적인 종교 집단도 아니었다. 이들은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고자 했으며, 그와 같이 해서 나온 사상을 사회적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따라서 동학 사상은 부분적으로 관념적이고 신비적이라는 한계가 있음에도, 역사를 정학하게 인식했던 생동감 넘치는 많은 민중 동학도들에 의해서 그 한계가 극복되고 있었기에 근대 한국의 민중 운동, 특히 갑오농민전쟁에 사상적으로 크게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민중 중심의 반침략 사상 :
갑오 농민 전쟁은 동학 사상으로부터는 물론, 자유나 평등과 같은 민주주의적인 사상으로부터도 영향을 받고 있다. 외세 침략에 맞서 무장 투쟁에 나섰던 농민군 지도자들과 민중들은 사상적으로 반드시 동학에만 근거한 것은 아니었으며, 시대와 사회의 상황 속에 뛰어들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직접 찾고 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사회적 실천 속에서 역사를 인식해 나갔던 것이다.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군 지도자들은 전쟁 초기의 투쟁 명분을 밝히면서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 말만으로 보자면 그들에게 여전히 봉건적 요소가 남아 있다고 해야겠지만, 내용면에서는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임금의 선정'만을 기대해서는 안 되며 민중 스스로 주체가 되어 나서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이는 전봉준이 "양반이나 부호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과, 방백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받는 하급 벼슬아치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들이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고 말한 데서 잘 드러난다. 전봉준은 당시 사회의 계급 모순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러한 모순을 극복해 낼 주체로서 민중의 봉기를 역설한 것이다. 전봉준은 부패하고 타락한 관리는 민중에게 해독이 되는 자들로서 몰아내고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여 무장 투쟁의 길로 나아갔다. 당시 사회의 계급 모순을 해결하는 데 관념적인 대안은 현실성이 없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봉준 등이 봉건 왕조 체제를 완전히 전복하여 새로운 체제를 세우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봉건 왕조의 여러 모순들에 맞서 민중의 입장에서 강력하게 시정하려 했을 뿐이며, 봉건 왕조 체제를 근본부터 전복하려는 '완전한 반봉건'의 입장에 서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사실 때문에 그들의 사상에 반봉건적인 요소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이 비록 봉건 왕조 체제를 부정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을망정 그들의 사상에는 이미 반봉건적이고 민중 중심적인 요소가 강하게 깔려 있었다. 그러면 그들의 주장 가운데 반봉건적인 내용에 어떤 것이 있는지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로, "노비 문서를 태우고 천민들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며 백정들의 머리에 씌운 고깔을 벗기라"고 하여 피압박 민중의 신분 해방을 요구하였다. 둘째로, "민중에게서 세금을 거둬들일 때는 고르게 분담시키고 함부로 거두지 말며, 토지는 골고루 나누어 부치게 하라"고 한 점에서 균등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셋째로,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민중을 정치에 참여시킬 것, 문벌을 타파하고 인재 본위로 관리를 등용할 것, 청춘 과부의 개가를 허용할 것 등을 주장한 데서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적인 사상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바로 갑오농민전쟁이 봉건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데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전봉준을 위시한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들은 제국주의 침략으로 빚어진 민족 모순에 대해서도 첨예하게 인식하고 강력한 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특히 일본 제국주의가 "군대를 이끌고 서울에 들어왔다"고 하면서 반제국주의적인 입장을 분명히 하고 그것에 강한 대항 의지를 불태웠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갑오농민전쟁의 배경에는 반봉건 사상과 함께 근대 민주주의적인 인식이 나타나며, 제국주의의 팽창에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대항하려는 반외세 사상이 탄탄히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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