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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16 호
단기 4340. 7. 8 (음력 5.2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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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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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 (주)다음커뮤니케이션과 업무 협정 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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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원장 이상규)은 신어, 순화어를 비롯한 국립국어원에서 만든 각종 국어정보를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 중 하나인 다음(http://www.daum.net)에 제공하여 인터넷을 통한 검색 환경을 확충하고 국어 발전을 위한 바람직한 언어문화 조성에 더욱 힘쓰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2007년 7월 4일 서울시 서초동에 위치한 (주)다음커뮤니케이션 사옥에서 양측의 관계자가 만나 이에 대한 업무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번 협정에 따르면 국어원은 국어자료를 (주)다음커뮤니케이션에 제공하고 (주)다음커뮤니케이션은 누리꾼이 국어자료를 이용한 통계를 제공하는 등 양측이 서로 관련 자료를 공 하며, 양측이 협력하여 (주)다음커뮤니케이션의 인터넷 사이트 등에서 국어문화 발전을 위한 각종 행사를 벌일 수 있다.
국립국어원은 그동안 국가 어문 정책의 중심 기관으로서 엔에이치엔(주)(네이버), (주)엠파스, (주)에스케이커뮤니케이션즈(네이트),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등과 업무 협정을 맺어 왔는데, 이번 협정으로 국어 연구 자료와 국어 정책 자료를 인터넷을 통하여 더욱 광범위하게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국립국어원은 국민들의 포털 사이트 사용 현황에 대한 자료를 제공받음으로써 많은 국민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더욱 신속하게 국어 정책에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협정에 포함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립국어원에서 구축하여 보급하고 있는 국어 관련 자료(신어, 순화 자료, 우리말 질의응답, 우리말 퀴즈, 주요 어휘 용례, 남북한 어휘 자료 등)를 검색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주)다음커뮤니케이션에 제공
둘째, (주)다음커뮤니케이션은 국립국어원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가공하여 각종 검색 기능에 포함시켜 서비스함
셋째, (주)다음커뮤니케이션은 서비스를 통한 이용 통계 및 분석 정보와 인터넷을 통하여 수집한 언어 사용 자료 등 국어정책 수립에 필요한 자료를 국립국어원에 제공함
넷째, 양측은 국민의 국어의식 제고와 바람직한 국어문화 활성화를 위한 공동 행사를 필요에 따라 진행함
국립국어원에서는 앞으로도 국어 자료를 서비스하고자 하는 업체나 단체가 요청하면 누구에게나 이와 사한 업무협정을 통하여 공익성 있는 각종 국어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더 나은 국어사용 환경 확보에 매진할 예정이다. 크리티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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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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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직면한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직면하지 않고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제임스 볼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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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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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책 속에 진리의 길이
이 세상의 사물 중에는 자연 상태로 존재하여 좋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을 기이하다고 떠들 썩 말할 필요는 없다. 파손된 것이나 찢어진 것을 어루만지고 다듬어 완전하게 만들어야만 그 공덕을 찬탄할 수 있듯이, 죽을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해서 살려내야 훌륭한 의원이라 부르고, 위태로운 성을 구해 내야 이름난 장수라 일컫는다. 여러 대에 걸친 명문 집안의 고관 자제들처럼 좋은 옷과 멋진 모자를 쓰고 다니며 집안 이름을 떨치는 것은 못난 집 아이라도 다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더욱 잘 처신하여 본래보다 훌륭하게 행세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기특하고 좋은 일이지 않겠느냐? 가난한 학생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왜냐하면 독서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일 뿐만 아니라 호사스런 집안 아이들에게만 그 맛을 알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촌마을 수재들이 그 심오함을 넘겨다 볼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벼슬 집안의 아이로서 어려서부터 듣고 본 바가 있는 데다가 도중에 재난을 만난 너희 같은 젊은이들만이 진정 독서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이다. 그네들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도 모르면서 그냥 읽는다면 책을 읽는다고 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의사가 3대를 계속해 오지 않았으면 그가 주는 약을 먹지 않는 것같이, 반드시 여러 대를 내려가면서 글공부를 한 집안이라야 문장을 할 수 있다. 돌이켜보건대 내 재주가 너희보다 조금은 더 나을지 모르지만, 어려서는 방향을 알지 못하였다. 나이 열 다섯에야 비로소 서울 유학을 해보았으나 이것저것 건드려 보기만 했지 얻은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후 스무 살 무렵 처음으로 과거 공부에 전력을 기울였더니 합격하여 태학(조선시대에 성균관을 달리 일컫던 말)에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또다시 대과에 골몰하다가 규장각으로 옮겨가서는 그 직무에 충실하느라 한갓 글귀만을 다듬는 공부에 거의 10년이나 몰두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지은 시나 문장은 아무리 많은 맑은 물로 씻어 낸들 결코 과거 시험 답안 같은 틀을 벗어날 수 없고 조금 괜찮은 것일지라도 관각체(중국의 고문을 따르는 일종의 정통문학 문체임)의 기운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머리털과 수염이 희끗희끗하고 정기도 이미 시들고 말았다. 이것도 다 운명이구나.
독서를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으며, 학문에 뜻을 둔다고 했을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근본을 확립해야 할 것인즉 근본이란 무엇을 일컬음인가? 오직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그것이다. 먼저 반드시 효제에 힘써 실천함으로써 근본을 확립해야 하고, 그 근본이 확립되고 나면 학문은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들어 넉넉해진다. 학문이 이미 몸에 배어들고 넉넉해지면 특별한 순서에 따른 독서의 단계를 강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천지간에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서 있는 자가 마음 붙여 살아갈 곳은 글과 붓이 있을뿐이다. 문득 한 구절 정도 마음에 드는 글을 만났을 때 다만 혼자서 읊조리거나 감상하다가 문득 생각하길 이 세상에서는 오직 너희들에게나 보여 줄 수 있겠다 여긴다. 몇 년의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가면 그 동안 너희들은 나이가 들어 밉상스럽게 변할텐데 어찌 나의 책을 읽으려고 하겠느냐. 내가 보기에 천하에 불효자였던 한나라의 조괄은 그가 아버지의 글을 잘 읽었기 때문에 나중에 어진 아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너희들이 진정 독서를 않는다면 내 저서는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내 저서가 쓸모 없다면 나는 정녕 할 일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마음의 눈을 닫고 흙으로 빚은 토우처럼 될 뿐 아니라 열흘이 못 가서 병이 날 것이다. 이 병을 고칠 약도 없을 것인즉 너희들이 독서하는 것은 곧 내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런 이치를 깊이 생각해 보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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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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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근대의 사상
1. 전기/개항기-3.1 운동기
2. 개화 사상과 서구 사상의 유입
3. 시무 개화파의 개혁과 한계
임오군란을 계기로 개화파의 일부는 변법론을 주장하며 분화해 나갔지만,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등 일부는 여전히 박규수 등 초기 개화파의 논의 수준을 답습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장년층에 속해 있던 인물로서, 청의 양무론적 개혁을 조선 사회 개혁의 모델로 삼고 양무파의 중심 인물인 이홍장과 유대를 강화하며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변법 개화파와 구별되었다. 이들은 집권 민씨 척족과의 관계에서 그들과 정치적 대결을 피한 개명 관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민씨 척족과 대립적이었다기보다는 상호 의존적이었고, 따라서 이들의 지향과 방법은 개량적이었고 온건한 편이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유학에 대해서도 유학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정신적 측면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였다. 임오군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고종이 개화를 지지하는 윤음을 공포하자 이를 계기로 이들은 세력을 확대하였다. 김윤식이 대신 지은 그 윤음의 핵심은 "서양의 교는 사악하므로 당연히 음성미색과 마찬가지로 멀리해야 하지만, 그들의 기(즉 농업, 의약, 군사, 주거의 제도)는 이로워서 진실로 이용후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이후 한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그들이 앞다투어 변법 개화파를 비판하여 스스로를 비호하려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일례로 김윤식은 "갑신정변의 역적들은 서양을 높이고 요순과 공맹을 폄하하며, 인륜 도덕을 야만이라 하여 그 도를 바꾸려 하면서 매번 개화라 칭했다"고 하였다. 이들의 개화 사상은 "개화란 곧 그때그때 해야 할 일일 뿐"이라는 김윤식이 표현 속에 잘 드러난다. 그는 공업과 상업을 발전시키거나 변법을 행해야 하는 서양과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청렴을 숭상하고 가난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휼하는 데 힘쓰며, 조약을 잘 지켜 우방과 틈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런 일이라고 보았다. 이런 시각 때문에 결국 그들의 개화 사상은 개혁의 단계성을 중시하는 비근본적인 시무론에 머무르고 말았다. 유길준의 경우 "무릇 개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온갖 사물이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개화란 온갖 사물을 깊이 연구하고 경영하여 날로 새롭고 더 새로워지도록 기약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하여,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완전한 사회를 이루는 것을 개화라고 지칭하였다. 그는 개화의 단계를 미개 -> 반개화 -> 문명 개화라는 세 단계로 발전한다 하여, 개화를 진보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발상의 이면에는 서양의 진화론의 영향이 있었다.
실질적으로 갑신정변 이후부터 갑오개혁에 이르는 기간까지 개혁의 담당자는 시무론적 개화 사상을 갖춘 이들이었다. 그들은 십여 년간 집권파와 맞서서 미진하나마 점진적인 개화 정책을 추구하려 노력하면서 갑오개혁의 국내적 역량을 키워 갔다. 그러나 그들의 중요한 논리였던 동도서기론에 잘 나타나 있듯이 그들 역시 변법 개화파와 마찬가지로 대중 계몽을 통해 국민적 합의를 획득하려는 과정을 결여하고 있으며, 일본의 뒷받침이 없이는 반대파를 누르고 개혁을 수행할 만큼 강력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소수 엘리트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사회 변혁을 거부하는 체제 내적인 성격으로 인해 자연히 개혁의 방향을 기존의 지배 계층 중심으로 하면서 지지부진하게 이끌어 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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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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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진
본뜻 : 중국 한나라의 명장 한신이 조나라 군을 공격할 때의 일이다. 한신이 조군에게 쫓기며 진을 쳤는데 큰 강을 뒤로 하고 진을 쳤다. 한신의 군대가 친 진을 바라보던 조군은 그 어리석은 진법에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한 발짝이라도 뒤로 물러서면 강물에 빠져 죽게 되어 있는 한신의 군대는 이같은 막다른 진용에서 모든 병사들이 죽기살기를 기약하고 적군을 맞아 싸우니, 끝내는 승리할 수 있었다.
바뀐 뜻 :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어떤 일에 대처해 나가는 태도나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부도 직전에 있다는 회사가 새로운 상표를 내보내고 이미지 광고를 크게 하는 거 보면 뭔가 배수의 진을 친 것 같지? -외국 나가서 제대로 공부하려면 배수진을 쳤다는 생각으로 공부해야 할거야
백병전
본뜻 : 백병이란 본래 혼자 쓸 수 있는 창과 칼 따위의 기본 무기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백병전이란 혼자 몸으로 자기 무기만을 가지고 싸우는 육박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여럿이 얽혀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혼자 몸으로 맞붙어 싸우는 전투를 말하는데, 흔히 비유적으로 어떤 일에 혼자 몸으로 사력을 다해 덤벼드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보기글" -그날 밤에 벌어진 백병전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아프리카 시장 개척이 내게 떨어졌을 때, 나는 백병전에 나가는 병사의 심정이 되었더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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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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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미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 아메리카 인디언
깨어진 평화, 인디언 전쟁의 발발
인디언과 영국인의 평화는 짧게 지속되다가 곧 수백 년 동안의 인디언 전쟁으로 옮아간다. 흉기로 인명을 살상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양비론도 가능하지만, 남의 땅에 들어가 시비를 건 백인이 전쟁의 원인 제공자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국인들이라고 해서 대서양의 선상에서부터 살상을 각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악마적 본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낯선 신대륙에서나마 새 삶을 일구길 소망했던 집단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절박한 소망은 인디언과의 충돌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1607년 버지니아 주에 제임스타운을 세운 사람들은 100명 정도의 성인 남성이었다. 아이나 아내를 데려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신대륙을 정착지로 여기지 않았다. 제임스타운은 무역의 근거지와 같은 곳이었다. 신대륙에서 찾은 황금이나 모피 등을 유럽 시장에 수출하기 위한 거점의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그런 고가품을 얻는 일이 쉽지 않음을 확인했다. 게다가 낯선 주위 환경과 식량난 때문에 일상이 적잖이 고통스러웠다. 영국인들이 아메리카의 비옥한 토지로 눈을 돌리면서 신대륙의 가치가 재평가되었다. 특히 담배 재배의 시작은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담배를 최초로 경작한 영국인이 바로 포카혼타스의 남편 존 롤프였는데, 당시 담배는 유럽 시장에서 황금만큼이나 가치 있는 상품이었다. 인디언들이 피우던 담배는 유럽인들 눈에는 신기하기 그지없었고 쾌감과 함께 신비한 약효도 있는 물건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안에 버지니아 주에는 담배 경작을 기초로 한 경제권이 형성된다. 담배 경작에는 적지 않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영국에서 수많은 이주민들이 옮겨온다. 이주민들은 주로 영국의 하층 계급 사람들이었다. 본국에서 희망 없이 삶을 이어 오던 그들은 차라리 낯선 신대륙으로 이주한다. 하루 12시간씩 노동해야 하고 법적인 권리도 유보된 계약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5년 정도 노동을 하면 자유와 토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주 자원자들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 후에는 잘 알려진 대로 종교적 박해를 받던 청교도들이 들어온다. 그들에게 신대륙은 종교적 탄압이 없는 자유의 땅이었고 종교적 이상을 직접 실현해 보일 수 있는 처녀지와 같았다. 그런데 백인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토지에 대한 수요가 늘었다. 물론 백인들은 버려진 토지보다는 인디언의 영토를 원했다. 가끔은 호소를 통해서도 인디언의 영토를 얻을 수 있었다. 1625년 페마퀴드족의 추장에게 백인 한 사람이 1만 에이커 이상의 토지를 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했다. 땅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인디언이지만, 호의의 표현으로 백인이 작성한 서류에 사인을 했다. 이것이 영국 식민지인과 인디언 사이에 이루어진 최초의 토지 양도 증서로 남아 있다.
인디언들은 상상도 못 했겠지만 백인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눈에 보이는 백인은 한줌에 불과했지만 바다 건너 유럽 대륙에는 천배 만배의 백인들이 살고 있었고 그 중 많은 이들이 아메리카를 동경했다. 급속히 늘어난 백인들이 인디언들의 영토를 넘나들자 인디언들은 상당한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인디언은 물리력을 동원하여 자기 보호에 나섰고, 영국 이주민들도 생존을 위해 무기를 들었으며 군대를 동원했다. 그렇게 인디언과 백인의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평화의 상징으로 기록되어 있는 포와탄의 부족만 해도, 사실은 인디언과 영국 이주민들 사이에 일었던 최초의 무력 충돌의 주연이기도 하다. 포카혼타스의 결혼을 계기로 평화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포카혼타스가 사망하고 또 다음 해에 포와탄마저 사망하자 곧 상황이 악화된다. 인디언과 백인 간의 갈등은 증폭되고 1622년 처참한 결과를 낳는다. 포와탄의 동생 오페칸카노프가 제임스타운을 공격하여 총 2,000명의 영국인 중 350명 이상이 희생된 것이다. 전쟁은 십수년간 진행되었는데 영국군의 보복으로 오페칸카노프가 체포됨으로써 포와탄의 부족은 몰락하고 만다. 포와탄의 부족과 함께 초기 인디언 전쟁의 희생자가 된 부족은 피쿼트이다. 1637년 영국군은 피쿼트 부족을 궤멸시키고 영토 확장에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은 잔인한 학살 행위로 많은 인디언들을 살해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살아남은 피쿼트 부족은 노예로 팔리거나 운이 없으면 불태워져 죽었다고 한다. 1990년 현재 피쿼트 부족은 536명만이 생존해 있다. 이렇게 17세기 초반부터 본격화된 인디언과 영국의 전쟁은 독립 전쟁(1775~1783)후 아메리카의 주역이 미국으로 바뀔 때까지 계속되었다. 인디언들은 영국과의 전쟁에서도 그리 큰 전과를 얻지 못했다. 많은 전쟁 중에서 우리는 두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한 가지는 가장 비극적인 결과를 낳은 것으로 기록된 킹 필립의 전쟁이다. 뉴잉글랜드지역 왐포노아그 부족의 추장인 마사소이트는 1621년 영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다. 그의 아들이 메타코메트인데 추장의 자리에 오른 그를 영국인들은 킹 필립이라 불렀다. 메타코메트가 추장이 된 후 한동안 평화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백인 정착민들이 증가하면서 영토를 잠식해 들어오자 잦은 충돌이 야기되었다. 전쟁의 구체적 계기는 프락치 문제였다. 영국인의 첩자 노릇을 하던 인디언 한 사람이 살해되자 영국군은 그 보복으로 살해 가담자들을 처형하였다. 그러자 그간 쌓여 있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1675년에 전쟁이 발발한다. 킹 필립의 전쟁으로 뉴잉글랜드 지역 전체가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영국인과 인디언은 어린이와 부녀자를 가리지 않고 학살과 보복을 반복한다. 그 결과 영국인들의 정착지 12개 마을이 완파되었고 드넓은 농경지와 산업 시설이 황폐화되었다. 이때의 인디언의 피해 사황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백인은 600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심각한 수준의 인명 피해와 경제적 피해를 낸 이 전쟁은 1676년 킹 필립이 동족에게 살해되면서 종결되었다. 백인들은 킹 필립의 가족을 포함한 인디언 부녀자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몇몇 인디언들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그 거래를 수용한 인디언 전사 몇몇이 킹 필립을 살해한 것이다. 18세기에 영국군은 최강의 적을 만나게 된다. 오타와 부족의 추장인 폰티악은 오타와, 오지브웨이, 포타와토미 부족을 하나로 결집한다. 폰티악은 1755년 프랑스와 연대하여 현재의 피츠버그에서 영국의 브래드독 장군 군대를 궤멸시키는 전과를 세웠다. 얼마 후 로버트 로저스가 이끄는 영국 군대와 폰티악은 잠시 동안 평화 관계를 유지한다. 폰티악은 기본적으로 영국군을 불신했지만 전쟁의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고, 또한 영국군이 인디언을 공정하게 대할 것이라는 약속을 했기에 평화 조약은 체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폰티악은 백인과의 화해는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영국군은 이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영토 확장에 나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폰티악이 이끌었던 여러 인디언 부족들은 1763년 디트로이트 요새를 공격한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요새를 공격하고 장악하는 전술에 익숙하지 않았고, 영국군에게 보급품과 지원군이 제공되는 경로를 차단하지 못한 결과 전세는 불리해졌다. 더구나 아군이라고 믿었던 프랑스가 영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희망은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폰티악은 1765년 평화 조약을 체결한다. 인디언 항쟁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디언 연대를 이루었던 폰티악은 몇 년 후 다른 인디언에게 살해된다. 폰티악 전쟁이나 킹 필립의 전쟁 이외에도 숱한 전쟁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으로 킹 윌리엄의 전쟁과 퀸 앤의 전쟁 등이 있지만 전쟁의 원인과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인디언은 영국인들의 영토 확장에 맞서다가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데 영국군이 인디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한 주체는 아니었다. 독립 전쟁을 통해 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들이 미국으로 독립한 후, 미국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1783년 파리 조약을 통해 영국은 미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13개 주를 포기한다. 그런데 영국과 미국은 인디언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치명타를 입은 영국은 인디언까지 배려할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미국으로서는 인디언은 자신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존재였다. 다만 인디언들은 새로운 조국의 외부에 존재하는 무리였기에 거래 대상이거나 때로는 적이 될 수도 있는 세력이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새롭게 만난 미군은 영국군보다 훨씬 집요하고 강했다. 미국은 끝도 없이 영토 확장에 골몰했고 조우하게 된 인디언들을 차례로 무력화했다. 미국의 개척 역사는 또는 인디언의 멸망사는 여러 편의 미국 영화에 조각조각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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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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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4.남자의 마음을 도마 위에 놓고
때와 장소에 따라 역할교환이 필요하다
결혼하기 전에 상대 남성과 그 어머니와의 관계를 잘 관찰해 보자. 그는 어머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와 닮은 여성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의 어머니는 다소곳한 사람으로 앞에 나서서 행동하는 일이 없었다고 어떤 남성은 말한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잘 보살펴주었지만 어머니는 무슨 일이나 부정적으로 보았다. 어머니에게는 세상에 좋은 일 따위는 하나도 없고 인간은 모두 시시하며 모든 것이 비판의 대상이었다. 나는 보다 활동적이고 나름대로 취미나 목적을 갖고 있는 여성이 좋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머니의 인생은 기쁨이나 행복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그는 아내가 될 여성에게 어떠한 성격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 까? 그의 아버지는 아내를 학대하지 않았을 까 그렇게 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여성을 대하는 극히 당연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은 그를 높이 대우하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그를 변호하는 일은 없는가? 그는 신뢰할 수 있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남성일까? 어떤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남편은 좋은 인간관계를 만드는 일은 인간이 경험 할 수 있는 가장 창조적인 행위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그에게 같이 있어 달라고 할 때는 곁에 없거나 약속시간에는 으레 늦었으며, 친구와의 부부동반 약속을 한마디 상의도 없이 변경하였습니다. 내가 몹시 언짢아하고 있으면 그는 고작 이렇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어렵겠는데,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창조적인 인간관계가 듣고 놀라겠지요. 이상적인 인간관계에서는 연인끼리 서로의 역할을 교환할 수도 있다. 당신 두 사람은 한 사람이 앞에 나서면 또 한 사람은 한 걸음 물러선다는 식으로 때와 장소에 따라 역할을 교환할 수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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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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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온종일 벌주를 마신 구 정승 구치관
구치관(1406-1470)의 본관은 능성이고, 자는 이율이다. 세조 13년(1467)에 영의정이 되었다. 야인 여얼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여 세조는 구치관을 정서대장군으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다. 세조는 말했다. "구치관은 나의 만리장성이다" 이때 구치관은 신숙주와 더불어 세조의 신임을 받은 터였다. 신숙주는 영의정으로 있었고, 구치관은 새로 우의정이 되었다. 어느 날 세조는 두 정승을 내전으로 불러 놓고 말했다. "경들에게 내가 질문을 할 테니, 경들은 바른 대답을 해야 한다. 만약 실수하면 벌주를 마셔야 한다" 조금 후에 세조가 신 정승을 불렀다. 신숙주가 대답하자 세조는 "나는 신 정성을 불렀는데, 잘못 대답한 것이다" 하고 신숙주에게 벌주를 먹였다. 또 구 정성을 불렀다. 구치관이 "예"하고 대답하자 세조는 "나는 구 정승을 불렀는데 경이 잘못 대답하였다" 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 정승과 구 정승은 하루종일 벌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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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영화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 '이스라엘' 왕국의 제3대 왕이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탁월한 지혜와 교묘한 정치 수완을 발휘. 민심을 얻는 한편 주위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이스라엘'은 유례없는 국력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솔로몬'은 즉위 4년만에 부왕의 유지를 받들어 대사업을 착수했는데 곧 신전의 건조였다. 건축에 동원된 인원이 3만, 자재 운반에 7만, 석공 8만, 공사 감독의 관리 3천3백이었으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 건축은 7년 걸려 완성했으며 내부는 순금으로 장식했다. 신전의 준공에 이어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하나님에게 바친 소가 2만2천 두, 양 20만 마리, 다시 14일 동안의 잔치를 베풀었다. 신전에 이어 이번에는 자신의 궁전을 건조했는데 이 역시 호화를 극한 것으로 옥좌는 전부 상아로 만들었으며 계단은 여섯 개로 나누어 각 계단마다 한 쌍의 황금사자를 비치하고 황금의 방패 5백 개로 궁전을 장식했다. 심지어 식기에 이르기까지 은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금으로 만든 것만 썼다. 차츰 오만해진 '솔로몬'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이방인의 여자를 처첩으로 삼았는데 그의 비는 총 7백 명, 첩은 3백 명이었다. 이방인의 여인이 왕을 에워싸고 궁전을 차지하자 이로 말미암아 국론이 분열되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운 가운데 이 세상에서 더할 수 없는 영화를 누린 '솔로몬' 왕은 제위 40년만에 세상을 하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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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2장 내가달라져야 하는 이유
천재가 된 열등생
1871년 아이치현의 오카자키에서 태어난 혼다 고타로는 철강분야의 대학자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에게는 형이 둘 있었다. 여렸을 때는 두 형이 뛰어난 성적을 올려 장래가 촉망된다는 평을 듣는데 반해, 고타로는 초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한 열등생이었다. 그래도 학과목 중에서 단 하나 물리학만은 탁월한 성적을 얻었다. 그래서 저능아로 손가락질 받지는 않았지만 다른 학과목은 맹타이라 모두들 '낙제생'이라고 깔보았다. 가정에서도 모두 바보 취급했고, 부모님은 공부 잘하는 두 형은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면서도 고타로만은 초등학교를 나오자 외갓집에 맡겨서 들일을 거들게 했다. 농사일밖에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타로는 다른 친구들은 모두 중학교에 진학하는데 자신만이 농사를 짓는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형과 어머니에게 자신도 도쿄로 가서 공부하게 해 달라고 졸랐다. 물론 아무도 그에게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1888년 열 여덟 살 때 마침내 허락을 했고 고타로는 기뻐서 도쿄로 향했다. 걸어서 코즈까지 가서 거기서 비로소 기차를 탔는데, 너무나 빠르고 편리한 탈것을 본 소년 고타로는 마음속으로 놀랐다. 그리고 그는 굳게 결심했다.
"히야, 발에 못이 박히도록 걸어도 도쿄까지는 일 주일 이상 걸리는데, 기차를 타니 단 하루밖에 안 걸리네. 앞으로는 모든 길을 철길로 바꾸어 야 해. 좋다, 이 철길과 기차를 열심히 공부해 보자."
도쿄에서 대학에 다니는 형들과 함께 하숙을 하게 된 고타로는 간다 스루가다이의 교릿샤라고 하는 사립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가 좋은지 나쁜지는 문제 삼지 않고 지금까지와는 정반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그 학교를 졸업하자 1890년에는 꿈에도 그리던 제1중학교에 입학했다. 1897년에는 도쿄 제국 대학을 졸업했는데, 그 무렵의 고타로는 조금의 빈틈도 없이 학문에 몰두했다. 일 분 일 초를 아끼며 노력하는 그의 태도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고타로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그대로 학교에 남아 연구에 몰두한 끝에 서른두 살 때 '철의 자성에 관한 신학설'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9년에는 마침내 세계를 경탄시킨 '자석강'을 발명하여 확고한 대학자로서 세계에 이름을 떨친 것이다.
요즘 교육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매우 높아졌다. 특히 유아 교육의 중요성이 떠들썩하게 부각되어, '인간의 성격은 세 살 때쯤 에 결정된다'는 것이 상식으로 자리잡았다. 그것은 옳은 말이기는 하다. 그러나 유아시절에 똑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부모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아, 아이들이 초등학교 과정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하면 앞길이 캄캄하다며 절망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지나친 속단이요, 어림짐작이다. 물론 학습 능력과 유아기에 정해지는 성격에는 상관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학습능력이 뒤떨어지는 데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원인 이 있다. 그런 원인들을 제거하면 학습 능력이 커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학습능력이란 것은 틀에 박힌 듯이 고정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어렸을 때의 성적이 나쁘다고 구제할 길 없는 지진아로 취급하고 무신경하게 대놓고 조롱하면, 아이는 완전히 자신감을 상실하여 학습 능력이 뒤떨어지는 학생으로 굳어지고 만다. 위의 일화가 분명하게 보여 주듯이 학습에 장해가 있고 없고 는 중요하지 않다. 장해가 있으면 그것을 얼마나 빨리 배제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아이들 가운데는 지능 개발이 늦은 대기만성형도 얼마든지 많다. 아이를 교육하는 부모는 아이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그리고 지능을 키우기 위해서는 본인이 자신감을 가지고 끊임없는 노력을 쌓아 나가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아이 스스로 자각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타고난 천재적인 재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노구치 히데요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싫어서 항상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천재적인 재능 따위는 없다.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면서 노력에 노력을 쌓아 남보다 세 배 다섯 배 공부해야 한다. 그것이 천재다."
이런 점에서 아이의 용기를 북돋워 주는 것이야말로 부모로서 취해야 할 교육의 본연의 자세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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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풍경 - 물,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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