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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14 호
단기 4340. 7. 6 (음력 5.2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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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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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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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이란 상황이 아니라 움직임이고, 항구가 아니라 항해이다. / 아놀드 토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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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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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황금보다 무거운 편지의 무게
열흘 정도마다 집안에 쌓인 편지를 점검하여 눈에 거슬리는 번잡한 것은 하나하나 뽑아 적어 두고, 잡스런 것은 불살라 버리고, 그보다 조금 덜한 것은 노끈으로 만들어 쓰고, 그보다 조금 덜한 것은 벽을 바르거나 종이상자를 만들어 쓰면 정신이 맑아지게 될 것이다. 편지한 장 쓸 때마다 두 번 세 번 읽어보면서 이 편지를 사방으로 뚫린 번화가에 떨어뜨렸을 때 나의 원수가 펴 보더라도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 가고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보여지더라도 조롱을 받지 않을 편지인가를 생각해 본 뒤에 비로소 봉해야 한다. 이런 일이 바로 군자가 삼가는 것이다. 내가 젊어서 글자를 너무 빨리 썼기 때문에 여러 번 이 계율을 어긴 적이 있었는데 중년에 화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이런 원칙을 지켰더니 아주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너희도 이 점을 명심토록 하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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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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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근대의 사상
1. 전기/개항기-3.1 운동기
1. 척사위정 사상
사상적 기반
척사위정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특히 이이와 송시열을 잇는 기호 학파의 분화가 눈에 두드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분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개항에 관한 입장의 차이에 있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기였던 첫 단계 척사위정 운동 시기는 아직 분화가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뒷날 개항과 개화 정책의 추진 세력이 되는 박규수와 봉서 학파 계열도 이 시기까지는 쇄국을 바탕으로 한 내수와 어양책을 내놓고 있으며, 단지 그 내용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이었다. 개항에 직면한 두 번째 단계에 이르러 기호 노론은 분화를 겪게 되는데, 개항을 직접 추진한 봉서 학파의 김유식, 신기선과 개항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상소 운동을 벌이고 나중에는 의병으로까지 연결시켜 간 화서(이항로) 학파와 노사(기정진) 학파 계열이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개항은 원칙적으로 반대하되 출처의 문제를 시비삼으며 끝내 현실 정치에 직접적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고산 학파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척사위정 운동의 세 번째 단계에 이르면 화서 학파의 김평묵이 영남 남인들의 만인소에 지지를 보내는 한편, 같은 기호 노론계인 고산 학파와는 행동을 달리함으로써 기호 노론계의 분화를 더욱 촉진시키기도 하였다. 이 같은 현실 인식과 실천관의 차이를 바탕으로 한 학파의 분화에는 사상적인 분화도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곧 중세 봉건 사회를 지탱시켜 주던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해 각 학파는 나름의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개항을 주도한 봉서 학파의 김윤식과 신기선 등은 점차 주자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멀어져 간 반면, 화서 학파와 고산 학파는 정통의 주자학적 세계관을 다시 굳건하게 세움으로써 현실 문제를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 중에서도 고산 학파는 이이로부터 송시열, 임헌회로 이어지는 학맥을 정통으로 여기면서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주기' 학통을 묵수해 나간 반면, 화서 학파는 노사 학파와 함께 기호 학파임에도 리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화서 학파와 노사 학파의 이러한 경향은, 척사위정 운동과 뒷날 의병 운동에 참여하는 영남의 한주 학파가 한결같이 리 중심적 사상의 경향을 나타낸 것과 일맥상통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 주목된다. 따라서 척사위정 운동과 리 중심적 사상의 관계성을 밝히는 것은 사상적 기반을 해명하는 주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황이 사칠칠정을 논의하면서 '주리'와 '주기'를 처음으로 말했을 때, 그것은 사단과 칠정에 대한 리와 기의 분속을 말한 것이지 '철학의 근본 문제'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논의의 핵심은 이황처럼 '리기호발'을 주장하여 리에 운동성을 부여함으로써 기에 대한 리의 주재성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이이처럼 '기발일도'를 주장하여 리의 운동성을 부정함으로써 리에 대한 기의 상대적 독립성을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리기론 일반에서는 전체적으로 볼 때 이황 이후 영남 학파는 물론이거니와 이이 이후 기호 학파에서도 리를 기보다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진상은 영남 학파의 학통 의식을 바탕으로 서경덕과 임성주 등을 주기론자로 규정하고서, 이들은 한결같이 기를 위주로 하여 리를 없애 버린 이단이요, 기를 인정함으로써 리를 해친 유학자들이라고 비판하였다. 곧 이단 학설은 갖가지로 나타나지만 그 시작은 모두 기를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되며, 그 끝은 모두 기를 위주로 하는 것으로 귀착된다고 말하여, 이이를 비롯한 그 후 기호 학파들 역시 이단의 설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는 먼저 리를 본과 주로, 기를 말과 객으로 파악하였다. 다시 이러한 리기의 주객, 본말관을 바탕으로 이황의 리기호발설에서 '기의 운동성'은 '리의 운동성'으로 환원시킬 수 있으므로 굳이 기발을 말할 필요가 없으며, 실제 내용으로 볼 때 그것은 리발일도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진상의 척사위정 사상을 계승한 한주 학파의 후예들로는 곽종석과 이승희가 있다. 영남 학파뿐만 아니라 기호의 '주기' 학통을 잇는 이항로 및 그의 후예들인 김평묵과 유중교도 리 중심적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그들은 조선의 여느 주자학자와 다를 바 없이 일단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은 리와 기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입장과 더불어 리와 기가 서로 섞일 수도 없다는 입장을 동시에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주희가 리와 기는 결단코 서로 다른 두 가지 사물이라고 말한 것은 성현들이 서로 전해 온 결정적 단안이라고 규정한 데서, 정작 그의 뜻은 리와 기가 서로 섞일 수 없음을 강조하는 데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들도 역시 리와 기를 주와 객, 존과 비, 명령하는 자와 명령받는 자 등으로 대비하고 있다. 게다가 리를 중시한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리의 운동성을 말하기도 한다. 역시 기호 학파에 속하는 기정진은 기호 학파의 '주기'론적 경향에서 벗어나 리 중심적 경향을 띨 뿐만 아니라, 마침내 리기일체관을 바탕으로 하는 유리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종래 리 중심론자들이 리와 기를 본말과 주객으로 대비한 것에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의 운동은 리의 명령을 받아서 하는 것이어서 결국 기는 리가 운동하는 손발에 지나지 않으므로 기를 리에 대비시켜 거론할 수조차 없다고 보았다. 이것은 바로 기를 리로 일원화시킨 유리론이다. 기정진의 척사위정 사상을 계승한 노사 학파의 후예로 기우만이 있다.
그러면 흔히 공리공론으로 일컬어지는 리 중심적 주자학이 어떻게 척사 또는 척하와 같은 강한 현실관과 실천관을 가지게 되었을까? 척사위정론자들의 '주리' 또는 '유리설'은 우선 리와 기를 분명히 구분해 낸다거나, 아예 기를 없애 버려 리의 절대적 위치를 확보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이것은 당시 지켜야 할 '바른 것'이 무엇이며, 내다 버려야 할 '나쁜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할 그들의 필요와 짝을 이루는 것이다. 또 이것은 리는 선의 근원이며 기는 악의 근원이라는 주자학적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 당시로서는 무엇보다도 어느 것이 선하고 어느 것이 악한가 하는 문제에 대한 분명한 규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기존의 주자학적 봉건 질서를 선한 것으로 파악한 반면, 그것을 위태롭게 하는 세력을 악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렇다면 리 중심론자들의 현실관과 실천관이 주로 척사, 척화의 반침략, 반외세 사상으로 구체화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들이 그렇게도 지켜야 할 것으로 말한 '바른 것'과 강조한 '리'의 세계는 다름 아닌 당시의 봉건 체제였으며, 그들은 그것을 절대선으로 파악하였다. 이 때문에 리 중심적 사상을 바탕을 하는 한 그것으로부터 도저히 반봉건 의식이라든가 근대를 향한 전망을 기대할 수는 없게 된다. 여기에서 리 중심적 철학이 갖는 구체적인 내용과 더불어 한계를 인식할 수 있으며, 나아가 척사위정 운동이 가지는 한계도 자연스레 짚어 볼 수 있다.
의병 운동은 운동사나 인적 사상적 맥락에서 볼 때 분명히 이전 척사위정론과 연원이 닿아 있다. 그렇지만 의병 운동은 이미 상소를 중심으로 한 개항기의 척사위정 운동과는 질적으로 다르며, 다시 의병 운동도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내용적으로 발전적인 과정을 밟아 왔다. 또 그런 가운데 유생 출신 의병장들의 의식도 일부 전환을 겪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철학 사상적으로는 전혀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전기 척사위정 사상과 똑같은 철학 사상적 기반 위에 서 있었다. 이것은 결국 사회 실천관에 한계를 가져 오는 요인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사상적 한계는 근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그들의 척사위정론이 더 이상 역사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만들었다. 한편 후기로 오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민중 중심의 의병 운동은 일제 강점기를 맞으면서 독립군 운동으로 전환하여 무장 항쟁론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따라서 몇몇 유생 출신 의병장의 사상을 통해 전체 의병 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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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계
본뜻 : 원래 미인계는 병법의 하나인 36계 중의 31계에 해당하는 책략이다. 강대국과 대적해서 싸우게 될 땐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지니 형세에 순응해서 일시적으로라도 적을 섬겨야 하는 경우가 있다. 섬기는 방식에도 상중하책이 있기 마련인데, 영토를 떼어 주고 화친을 구하여 섬기는 것이 제일 하책이요, 재물을 주고 화친을 구하여 섬기는 것이 그 중간이요, 아름다운 여자를 보내 섬기는 것이 상책이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내 섬기면 적장의 마음이 해이해지고, 군대의 규율이 흩어지니 자연히 전력이 약하게 될 수밖에 없다. 월나라 왕 구천이 서시라는 미인을 오나라 왕 부차에게 보내 그가 서시의 미모에 빠지게 했다. 부차가 서시에게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는 틈을 타, 오나라를 친 구천이 전에 맛보았던 패배를 승리로 이끈 데서 나온 말이다.
바뀐 뜻 : 미인을 미끼로 하여 남을 꾀는 계교를 일컫는 말이다. 요즘은 여자 스스로가 나서서 남의 마음을 흐트려 놓아 이익을 도모하는 것도 미인계를 쓴다고 한다.
"보기글" -미인계는 아무나 쓰는 것인 줄 아니? 미모와 지성을 겸비해야 제대로 쓸 수 있는 거란다 -저 아저씨나 우리 남자들이 가니까 인상만 쓰고 더 이상은 안 깎아 주는데 옥이 니가 가서미인계 좀 써 볼래?
밀월
본뜻 : 신혼여행을 나타내는 허니문(honey-moon)의 번역 말이다. 즉, 신혼 여행 기간이 꿀같이 달콤한 밤의 연속이라는 뜻이다.
바뀐 뜻 : 신혼 기간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어떤 사업이나 일을 협력해서 시작할 때, 서로 사이가 좋은 기간이나 협력 기간을 나타내는 말로 쓰기도 한다.
"보기글" -김과장, 그래 밀월여행은 잘 다녀왔어? 신혼기간은 매일 매일이 꿀같이 달콤한 날의 연속이라구 -지금 한대 상사와 삼선 상사가 새로 시작되는 신규 통신 사업 때문에 밀월 관계를 즐기고 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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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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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미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 아메리카 인디언
신대륙의 발견, 낙원의 정복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은 바이킹 에릭슨이다. 콜럼버스보다 500년 정도 앞서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에릭슨은 정착촌까지 세웠지만 그것은 개인적 사건에 불과했다. 자신이 밟은 땅이 신대륙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뿐 아니라 유럽은 에릭슨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1492년 10월 2일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자신이 신대륙을 발견했음을 알지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하고 그곳 원주민을 인디오라 불렀던 그는 죽는 날까지 인도로 가는 무역로를 개척한 줄로만 알았다. 그렇지만 16세기 들어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 대륙의 가치를 확인하고 열광하기 시작하면서 콜럼버스의 역사적 쾌거가 인정받는다. 신대륙은 유럽인들이 갈구하던 모든 천연 자원을 품고 있는 땅이었다. 유럽의 4배에 달하는 넓은 땅에는 황금과 광물이 넘쳐났고 초원과 계곡과 산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 유럽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 유럽인들에게는 흥분과 번영의 계기였지만 아메리카 원주민, 즉 인디언 입장에서는 수난의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영화 <1492 콜럼버스>의 주제가 제목처럼, 신대륙 개척은 인디언의 시각에서는 바로 `낙원의 정복` 과정이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동북 아시아가 고향이다. 사냥 부족이던 그들은 빙하기인 2만~3만 년 전에 사냥터를 찾아 떠돌다가 당시 알레스카로 이어져 있던 육로를 통해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디언은 곰이나 버팔로를 사냥했으며 부분적인 경작을 통해 생활을 유지했다. 서구인들이 몰려든 15세기 당시 인디언 문화는 석기 시대 수준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들은 엄연히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다. 게다가 전세계인들이 즐기는 감자, 토마토 등을 최초로 재배했고 칠면조를 처음으로 사육했다는 점에서는 인류에게 혜택을 준 존재이기도 하다. 미개인으로 기억되는 인디언들이지만 그들의 사회는 그 어떤 문명 사회보다 이상향에 가까운 것이었다. 인디언 사회에 대한 연구는 전문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인데,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도 없지 않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열린책들)을 보면 인디언 사회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자료는 얻을 수 있다. 베르베르는 사람과 자연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조화 속에서 공존하던 세상이 바로 인디언 사회였다고 설명한다. 인디언들은 스스로를 자연의 정복자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여겼다. 단적인 예로 인디언들은 사냥감이 줄어들면 곧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생태계가 황폐해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적당한 때에 자연을 자연의 품으로 되돌려주는 미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권력 관계도 조화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무시무시한 인디언 추장을 떠올리기 쉽지만, 추장은 합의와 신임에 의해서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영구 추장은 없었고 추장의 의사가 부족 전체를 지배할 수도 없었다. 전쟁터의 인디언은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인디언들은 생명을 중시했고 그래서 적을 향한 창의 끝은 뭉툭했다는 게 베르베르의 설명이다(첨단 살상 무기에 익숙한 문명인들 눈에는 어처구니없을 이 전쟁 장면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영화 <작은 거인>을 보면 된다.) 신대륙의 풍경은 그랬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산천초목과 버팔로와 인디언의 낙원이었다. 그런데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유럽의 모국어로 지역을 명명하고 말뚝을 박아 경계를 세운 다음 그 자리를 자신의 영토라고 선언할 뿐이었다. 인디언들은 유럽인의 눈에 참으로 성가신 미개인이었다. 유럽인들의 이기적인 시각과 막강한 화력은 인디언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사회의 주변으로 몰아세웠다.
인디언들의 인구 통계가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단적으로 증명해 보인다. 신대륙 발견 당시 인디언 인구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치가 있지만 어떤 자료로도 신빙성을 고집하기는 어렵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가 질병, 기아, 전쟁 등으로 급격히 줄어든 상태에서 유럽인의 기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문헌에 따라 그 추정치가 몇 배 편차를 보이는데, 그 중 가장 후한 통계에 따르면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는 9,000만명에 이르는 인디언이 있었고 북아메리카 인디언만도 1,000만 명이었다. 그런데 1990년 현재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숫자는 200만 명 남짓이다. 지난 500년 동안 인디언들은 자기 증식을 하지 못하고 북아메리카에서만 5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간 아메리카 대륙을 빙하기나 대지진 같은 천재지변이 휩쓸었다는 기록이 없음은 물론이다. 백인들의 신대륙 발견과 개척 과정이 인디언들에게는 천재지변만큼이나 치명적이었다는 설명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인디언들의 입장에서 서로운 또 다른 사실은 그들이 정당하게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많은 서부 영화들은 아메리카 인디언을 가장 유명한 원주민 악당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인디언들은 단란한 백인 가족들의 포장 마차를 습격해 약탈하고 포로의 살껍질을 벗겨 내거나 백인 여성을 강간하는 모습이다. 아니면 백인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충 같은 존재이다. 서부 영화들은 인디언에게 견디기 힘든 지옥과도 같은 경험일 것이다. 다음에서는 아메리카 개척사를 정리할 것인데, 서술의 주인공은 인디언들이다. 비록 물리력이 약해 참패하고 말았지만 인디언들은 엄연히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으니 그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역사 서술이 억지일 수는 없다. 이 글에서는 영국과 미국에 맞섰던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를 중심으로 기존의 세계사가 제외해 온 온전한 아메리카의 역사를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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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4.남자의 마음을 도마 위에 놓고
의존적인 남자는 상냥함을 설득의 무기로 삼는다
어머니에게 지나치게 충실하거나 복종적인 남자는 주의해야 한다. 그러한 남성에게는 반드시 문제가 있다. 그는 언제나 어머니와 함께 있고 싶어하고, 결혼 후에도 어머니와 같이 살려고 할지도 모른다. 물론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며 달려올 것이다. 의존형의 남성은 어머니처럼 의지할 사람을 항상 찾고 있다. 이러한 남성은 섹스에 있어서도 의존적이다. 섹스가 잘 되지 않을 경우 가정 밖에서 여성을 찾는 일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자기의 성기능에 불안해한다. 아내 또한 남편을 아이처럼 보기 때문에 성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는 상대를 즐겁게 해주기는커녕 불평을 듣지 않기 위해서 상대의 지시를 원하는 것이다. 의존형의 남성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이렇게 들어왔다. 엄마는 너를 위해서 희생해 왔어. 엄마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네가 있는 거야. 그 결과 그는 어머니에게 빚이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도대체 그 빚을 어떻게 갚으라는 것인가. 한심하게도 의존형의 남성은 처량하게 한탄을 하거나 투덜투덜 불평을 하기도 하고, 작은 속임수를 써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경우도 있다. 자기 생각대로 하기 위해서라면 꾀병이든 뭐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이다.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파서 죽을 지경인데, 당신은 야학 나부랭인지 뭔지 하느라고 아픈 남편을 저녁밥 짓게 만들어도 되는 거야? 또 외출이야? 그만둬 부탁이니까 집에서 내 시중이나 들면서 함께 있어 줘. 코맹맹이 소리로 응석을 부리면서 아내에게 기댄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아무쪼록 약자의 무기에 주의해야 한다. 이런 남편은 감정 면에서 불안하고 적극성이 없기 때문에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감정적인 문제는 피해 지나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한다.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여성에게 끌리는 일은 자주 있지만, 자기에게 그러한 솔직한 감정 표현을 요구하는 것이 두려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입에서 사랑하고 있어 하는 말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에게 호기 있게 한턱 내거나 자기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충분히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 50달러. 자기가 멋진 생일 선물을 사도록 해. 내가 꼭 예쁘다고 말해야 해? 스스로 거울을 보면 알잖아. 언 뜻 견실하고 안정되어 자제심이 있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그의 정서가 단순하고 변화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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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국을 식게 만드는 사람 권람
권람(1416-1465)의 본관은 안동, 자는 정경, 호는 소한당이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했고 큰 뜻을 품었으며 계책이 뛰어났다. 책을 싸가지고 깊은 명산에 들어가 한명회와 함께 공부를 하였다. 35세가 되도록 과거에 응하지 않고 있다가 세종 말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잇달아 장원을 세 차례나 하였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적에 총재가 되어 '무경(고대의 병서)'에 주석을 달았다. 그는 수양대군의 시종이 되었는데, 대군은 그의 큰그릇을 알아주고 대우를 극진히 하였다. 그는 수양대군의 장래 꿈이 무엇인지 알고 그의 집을 은밀하게 드나 들었으며, 한번 들어가 논의하기 시작하면 해가 늦도록 계속하였으므로 수양대군집 궁인이 공을 보면 "국을 식히는 양반이 또 온다"고 하였다. 수양대군이 공을 내전으로 불러 위로 잔치를 베풀고 정희왕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사람이 옛날 국을 식히던 사람이오"
영의정으로 길창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익평이다. 세조묘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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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
'팔레스타인'의 '시딤'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던 두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열 명의 의인조차 찾아볼 수 없으리만치 사악과 음란으로 가득 차 있어, 마침내 하나님이 내린 불과 유화의 세계를 받아 모두 불타고 말았다. 이들 도시는 현재 사해 남쪽 바다 속에 잠겨 있다. 이런 연유로 해서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벌을 받은 본보기로 성서에 곧 잘 등장한다. 훗날 '소돔'의 죄, 즉 '소도미'는 자연에 반하는 사음 즉 계간, 수간, 남색, 동성연애자 등 성적 도착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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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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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2장 내가달라져야 하는 이유
내가 가는 길은 내 손으로
서양화단의 대가이자 서예가로서도 이름 높은 나카무라 후세츠는 집이 가난하여 열두 살 무렵에 마츠모토시에서 한 잡화상의 심부름꾼으로 일하게 되었다. 바쁜 고용살이 속에서도 얼마 안 되는 월급으로 책을 사고 밤에는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살았다. 열 일곱 살 때 한 화가에게 그림의 초보를 배우고는 장차 화가가 되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그는 월급을 모아 여비를 만들어 1888년 도쿄로 갔다. 그리고 그 무렵 서양화단의 거장이라 일컬어지던 고야마 쇼타로를 찾아가서 마츠모토에서 그린 그림 세 장을 보이고 입문을 간청했다. 고야마 쇼타로는 그 화풍에 장래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다행히 입문을 허락해 주었다.
"그러면 매일 여기 와서 내 일을 거들어 주게. 단 숙식은 자네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게나."
후세츠는 뛸 듯이 기뻐했지만, 당장 들어가 살집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쥐어짜다가 문득 고행 친구가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저택에서 마부로 일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 집으로 달려가 부탁한 끝에 헛간이나 다름없는 한 평 반쯤 되는 방을 무료로 빌릴 수 있었다. 가지고 올라온 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기 때문에 먹고 살 궁리를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틈만 나면 운송업자의 차를 끌기도 하고 밀기도 하면서 돈을 벌었다. 돈을 아끼느라 짜디짜게 볶은 완두콩을 먹으며 지내는 일도 잦았다. 그러나 그림만큼은 일 분 일 초를 아끼며 필사적으로 그렸기 때문에 솜씨가 눈에 띄게 늘어갔다. 그 후 한 장에 1전을 받고 석판화에 색칠을 하기도 하고, 싸구려 초상화를 그려 팔기도 하면서 가난한 생활을 견뎌 냈다. 이렇게 끊임없이 공부를 계속한 보람이 있어서 처녀작 도쇼구의 사생이 메이지 미술전에서 입선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마사오카 시키의 잡지에 표지 그림을 그리는 일을 얻어서 월급 10엔을 받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하여 그는 사생화의 제일인자가 되고, 또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신문 삽화가가 되었다. 그 화풍이 높은 평가를 받아 감칠맛이 나는 서체와 더불어 서화의 확고한 대가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매우 특이한 점은 지독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빚을 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의 큰 뜻을 안 하쿠붕칸의 사장 오하시 신타로가 유학 자금을 대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후세츠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저는 지금까지 아무리 먹지 못해도 남에게서 일 전도 빌린 적이 없습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이 마음만은 지키고 싶습니다."
그리고 피나는 노력으로 돈을 모아서 자기 힘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나 뜻을 이루었다.
수박 겉핥기 식의 자극과 감각에 취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이 청춘의 특권인 양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것은 당치도 않은 태만한 착각이다. 정신과 육체가 활짝 꽃을 피우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착각이다. 정신과 육체가 활짝 꽃을 피우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청춘이야말로 몸과 마음을 모두 쏟아 '나의 길'을 발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른바 큰 뜻이란 무엇인지 정확히 확인하고, 그 큰 뜻을 향하여 정진하는 불굴의 정열을 불태우는 것이 그 시기만의 유일한 특권이라 할 수 있다. 내가 가는 길은 내 손으로 개척하고 내 발로 딛고 나아가는 것.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따라서 이 길을 나아가기 위해서는 심혈을 기울여 몰두하고 열심히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정진'이라 일컫는다. 내가 선택하여 가는 길이 무엇이든 아무런 장해나 곤란이 없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무슨 일에나 필연적으로 정진이 요구된다. 자신의 길이 평탄하게 개척될 것처럼 안이하게 예상하는 것은 가련한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짜디짜게 볶은 완두콩을 먹으며 큰 뜻을 밀고 나간다면 반드시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우리는 후세츠의 이 작은 일화에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또 파리로 유학할 비용을 대 주겠다고 하면 누구나 선뜻 달려들겠지만, 평생 한 번도 빛을 진 적이 없었다는 이유로 거절한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 역시 후세츠의 청빈한 정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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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풍경 - 물,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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