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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12 호
단기 4340. 7. 4 (음력 5.2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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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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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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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하게 사는 이점의 하나는 끊임없이 멋진 발견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A.A.밀른 (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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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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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간절한 뜻을 지닌 문학을
시에 반드시 힘써야 할 필요는 없으나 성정을 닦고 빛내려면 시를 읊는 것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이즈음 들어 옛스러우면서 힘있고, 기이하면서 우뚝하고, 웅장하고, 한가하면서 뜻이깊고, 맑으면서 환하고, 거리낌없이 자유로운 그런 기상에는 전혀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대신, 가늘거나 미세하고, 자질구레 경박하고, 황당한 문예에만 힘쓰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로다. 단지 율시(여덟 구로 되어 있으며 리듬을 중요시한 시)만 짓는 것은 우리 사람들의 비루한 습관이다. 그 뜻 그 취향의 낮고 얕음과 기질의 짧고 껄끄러움은 반드시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내가 요즈음 다시 생각해 보아도 자기의 뜻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나 회포를 읊어 내는 데는 4자로 된 시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본다.
요컨대 시의 근본은 사람살이의 인륜을 밝히는 데 있으며, 때로는 그 즐거운 뜻을 펴기도 하고, 때로는 원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펴는 데 있다. 그 다음으로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어 방황하고 안타까워서 그냥 두지 못하는 그런 간절한 뜻을 항상 지녀야 바야흐로 참됨 시가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이해득실에만 연연하면 그 시는 시라고 할 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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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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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근대의 사상
1. 전기/개항기-3.1 운동기
1. 척사위정 사상
척사위정 운동의 전개
조선 말 척사위정 운동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패했다는 소식과 북경이 영불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이어 직접 서구 열강들의 이양선이 수시로 출몰하여 통상 압력을 가해 오면서부터이다. 이러한 통상 압력에 직면하여 척사위정론자들은 쇄국책과 더불어 내수책을 내놓게 되었다. 바로 이렇게 해서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지지하는 배후 세력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척사위정론의 역사적, 사상적 연원은 멀리 병자호란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곧 화이관을 바탕으로 한 소중화론의 제가라든가,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학에 대한 수 차례의 탄압 등은 척사위정론의 뿌리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서양의 발전된 기술과 문명에 대한 이해 위에 실학자들이 일찍부터 개국통상론을 제기하였으며, 정약용 같은 일부 실학자들은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새삼 개항기에 전개된 척사위정론이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이제까지의 위기 의식이 천주교의 전래에 따른 전통적 가치 질서의 혼란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 시기에 싹튼 위기 의식은 외압의 성격이 군사적, 경제적인데다 또한 직접적이고도 강력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 대응도 마찬가지로 강력한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의 운동 형태로 발전해 갔으며, 아울러 반침략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개항기 척사위정 운동의 전개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곧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거쳐 개항 이전까지에 해당하는 대원군의 쇄국 정책기와, 정권이 고종으로 넘어가고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맺는 1876년을 전후한 시기, 그리고 1880년 김홍집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오면서 환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 온 후 1881년 고종의 윤음이 내려지기까지의 시기이다. 이처럼 세 단계에 걸친 척사위정 운동은 정치적 상황이라든가 참여의 폭, 구체적 내용에서 다소간의 차별성이 발견되는데, 이러한 점은 제한적이나마 운동의 발전이란 관점에서 평가해 볼 여지를 마련해 준다. 먼저 개항 이전 첫 번째 단계의 척사위정 운동은 대원군의 쇄국 정책을 철저하게 지지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이러한 지지를 표명한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이항로와 기정진의 상소를 들 수 있다. 이것들을 통해서 당시 세계사의 전개와 침략의 성격에 대한 이들의 인식과 대비책 및 한계 등을 엿볼 수 있다.
첫째, 이항로는 서양을, 부모와 자식간이나 임금과 신하간의 윤리라든가 태극과 같은 근본적인 원리에 대한 이해는 없이 재화와 여색만을 중시하는 오랑캐로 여기고 있다. 이것은 병자호란 이후 기호 노론들이 정권의 명운을 걸고 지켜 온 화이 사상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서양의 상품에 대해서 모두 사치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점에서는 분명한 인식의 한계가 있으나, 서양의 상품이 공산품인 반면 조선의 상품은 농산품이므로 서로 통상을 하게 되면 조선 경제가 피폐해진다고 생각한 점에서는 일면 날카로운 통찰이 엿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통찰이 당시 서양의 자본주의적 침략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셋째, 이항로는 대외적으로 국방력의 강화를 통한 척화를 주장한 한편, 대내적으로는 나름의 내수책을 내놓는다. 그가 내놓은 내수책은 인심의 수습과 같은 것이 핵심 내용을 이루는 것으로, 여기에서도 인식의 한계를 찾아볼 수 있다. 척사위정론은 다시 1876년 일본과의 개국 통상을 전후해 전개되었다. 대원군으로부터 정권을 물려받은 고종은 민씨 척족 세력을 중심으로 일본의 통상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기호 노론 안에서도 화서 학파가 중심이 되어 다시금 척사위정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는 첫 번째 시기와 달리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성격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기 대표적인 척사위정론의 제기는 김평묵, 홍재구가 중심이 되어 지은 연명 유소와 최익현의 이른바 '오불가소'인 '지부복궐척화의소'를 들 수 있다. 상소의 주된 내용은 화이관을 바탕으로 서양을 금수시한다거나 서양의 상품을 사치품으로 본 것 등 이전의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 시기 척사위정론은 일본과의 개국 통상과 관련하여 일어난 것이니만큼 척사의 주된 대상도 자연스레 일본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제까지는 일본이 교린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더 이상 이전의 일본이 아니라 서양과 똑같다는 '왜양일체론'을 내놓게 되었다.
1880년 겨울 김홍집이 일본에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일본에서 가져오면서 다시금 척사위정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때는 영남 유생 1만 3천여 명과 관동 유생 1만여 명 및 기타 경기, 호서, 호남 지방의 유생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지역적으로 광범위하다는 점뿐만 아니라 당파를 넘어선 범재야 유생들의 운동이란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영남 남인과 김평묵을 중심으로 한 일부 기호 노론이 연대한 점은 당파와 학통으로 깊이 멍들어 있던 조선 후기의 정치사를 생각해 보면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 시기 척사위정 운동은 일본과의 개항 통상을 전통적 교린의 연장선에서 일단 인정하였지만, 서구 열강과의 개항 통상은 반대하는 내용이므로, 이미 개항 통상이 일반화되는 추세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띠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로써 척사위정론자들은 바로 당시 개항을 주도하던 개화파와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이렇듯 척사위정 운동은 반침략, 반외세의 특성이 두드러진 재야 유생들의 상소 운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사의 전개에 대한 인식의 한계와 계급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이들은 근대 민족 국가의 전망을 갖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척사위정 운동을 바로 자각적인 근대 민족주의 운동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이러한 한계가 이 후 민족주의 운동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막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반침략 반외세라는 특성은 이 후 기층 민중의 계급적인 이해와 정서에 연결되어 대중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것을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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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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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리
본뜻 : 본래는 '문열이'에서 나온 말이다. 무녀리는 맨 먼저 태어난 새끼를 이르는 말로서,모태의 자궁문을 제일 처음 열고 나왔다는 뜻에서 '문을 연 놈'이란 뜻으로 쓰였다.
바뀐 뜻 : 태로 낳는 짐승의 맨 먼저 나온 새끼를 가리키는 말인데, 때로는 언행이 좀 모자라는 못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보기글" -이 송아지가 무녀리로 나온 새끼인데 첫날부터 비실비실한 것이 통 기운이 없어 걱정이네 -이씨 할아범 둘째 아들이 무녀리라 걱정이 많다면서요
무진장
본뜻 : 원래 불교 용어인 무진장은 끝이 없이 넓은 덕, 또는 닦고 닦아도 다함이 없는 부처님의 법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어떤 사물이 다함이 없이 굉장히 많은 것을 가리킨다.
"보기글" -북한에 무진장한 지하자원이 있다는 말도 이제는 옛말이지 싶어 -바닷가에 가면 무진장으로 있는 모래도 막상 쓰려면 쉽게 구할 수가 없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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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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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가해자와 피해자의 풀리지 않는 송사 - 아랍인과 유태인
히틀러는 살아 있다?
히틀러는 패전을 확신한 직후 자살했다. 그는 죽기 전에 두 가지 일을 마지막으로 처리한다. 먼저 1945년 4월 28일 자정 즈음에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다. 다음으로 남아 있는 심복들에게 국가 통수권을 위임한다. 부부는 4월 30일 자살했고 히틀러의 유지에 따라 불태워졌다. 히틀러가 연합군에 체포되지 않고 자살을 한데다가 시신이 이미 불태워졌다는 사실 때문에 후에 무수한 루머를 낳았다. 에바 브라운은 음독 자살한 것이 확인되었지만 히틀러의 사인이 권총 자살인지 아니면 음독 자살인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판명되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 히틀러가 살아 있지 않을까 하고 우려 또는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히틀러의 생존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끊임없이 들려왔다. 1956년 10월 히틀러의 유해를 분석하고 히틀러의 죽음을 재확인하는 해프닝이 불가피했을 정도로, 히틀러의 생사 여부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다. 말장난이 허락된다면 현재도 히틀러는 살아 있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최소한 몇몇 독일인의 가슴 속에는 타민족에 대한 야만적 테러를 가하던 나치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말이다. 2차 대전 후 나치 정당은 금지되고 지도자들은 처벌받았지만 독일이나 미국 등에 소규모의 나치 조직이나 정당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1990년 통일 이후, 특히 옛 동독 지역에서 타민족에 대한 테러가 되살아나고 1992년 극에 달한다. 터키 출신의 한 여인과 두 소녀가 네오나치의 테러에 살해되었고 1992년 한 해 동안에도 방화 500건을 포함해 약 2,000건의 폭력 행위가 외국인을 향해 자행되었다. 1993년 의회는 독일을 피난처로 삼은 외국인의 권리를 제한하기 위한 헌법 수정에 동의하였다. 그만큼 신나치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컸던 것이다. 이렇게 히틀러는 독일인의 가슴 속에 네오나치즘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있다. 불행하게도 타민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정신은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세계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는 일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 보스니아 내전에서의 인종 청소 그리고 현재 1만 명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백인 집단인 KKK단 등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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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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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4.남자의 마음을 도마 위에 놓고
어머니라는 막강한 변호사에게 보호받는다.
정복형은 언제나 남에게 칭찬받거나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한 남성은 무슨 일을 해도 아들을 비판하지 않는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을 일찍부터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머니는 무슨 일이 발생할 경우 아들의 변호를 자신해서 떠맡고 나선다. 예를 들어, 교사가 댁의 아들이 운동장에서 다른 아이를 때렸어요 라고 말하면 어머니는 아마 그 애가 우리 아이를 먼저 때리려고 했을 거예요. 우리 아이는 그런 짓을 할 애가 아니거든요 라고 변명한다. 이런 식의 변명은 죄를 지은 아들을 변호하는 다음과 같은 어머니의 변명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우리 아들은 17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단지 총을 쏘았을 때 그 사람들이 총 앞에 서 있었을 뿐입니다. 아들이 무슨 일을 하든 어머니는 아들을 위한 변명을 준비하고 있다. 아들이 교통위반을 하면 그 벌금을 지불하고, 차 사고를 내면 그것을 수리해 주며, 그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고 자기의 마음에만 담아둔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곤란한 것은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법을 아들에게 가르친다. 어째서 그렇게 뚫어지게 보고 있는 거지 그 때문에 컵을 떨어뜨렸잖아. 섹스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당신 때문이야. 다른 여자와는 이런일이 없었어. 당신 말 듣고 그 회사에 들어갔지만 재미도 없고 사실과 달랐어. 왜 당신같이 무능한 사람이 하는 말을 들었을까 우리의 결혼이 잘못되었을 리 없어. 잘못된 것은 당신의 사고방식이야. 대개의 경우 정복형의 남자는 극히 좁은 시야로 사물을 보게 된다. 그리고 아내나 다른 사람과 의견이 엇갈릴 경우 상대의 의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자기와 다른 견해가 있다는 것을 결코 용납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습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타인의 존재는 전혀 보려고 하지 않는다. 언제나 남에게 무언가 받기만을 기대하고, 타인에게 무언가 베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정복형의 남성은 자기 자신을 직시하여 자신의 결점을 살펴보지 못한다. 자기가 틀렸다거나 잘못된 행동을 취했다거나 분별을 잃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우겨댄다. 아내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다 하는데, 그 사람은 불평만 하고 만족하는 일이 없어 진정하라니, 날 보고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마! 지금까지 행동을 제한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자주 이런 식의 경솔한 말들을 한다. 또 여자란 남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박혀 있어서 여성에게 잔인하며 무엇 하나 해주는 일이 없다. 잘되면 모두 자기 공이고 잘못되면 다른 사람 탓을 한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생각만 그럴 듯하다. 국제적인 규모의 레스토랑 경영자인 것처럼 행동하는 다방주인 이라고나 할까 반면에 자기를 시험하는 일은 극도로 두려워한다. 책임지는 일에 대한 경험 없이 어른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일찍이 어머니가 해주었던 것처럼 타인이 자기에게 칭찬을 해주어도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사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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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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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제주도민에게 장례법을 가르친 기건
기건(?-1460)의 본관은 행주이고, 집이 청파동 만리고개에 있었기 때문에 호를 청파라 하였다. 제주목사로 부임해 보니 백성들은 전복을 따먹고 밥을 먹지 않았다. 또 부모가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않고 언덕이나 구릉에 갖다 버렸다. 이를 본 기건은 고을 사람들에게 관을 짜고 장례 치르는 방법을 가르쳤다. 제주도 사람이 부모 장례를 치를 줄 알게 된 것은 기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어느 날 기건이 꿈을 꾸었는데, 3백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뜰 앞에 와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공의 덕택으로 우리의 뼈다귀를 거두었으니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금년에 공은 반드시 어진 자손을 둘 것입니다"
과연 그 해에 손자를 낳았으며, 그는 문과에 합격하여 응교가 되었다. 그 뒤로 기씨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으니 그 꿈이 맞은 것이다. 그의 벼슬은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단종조에 벼슬을 그만두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사람을 일체 사절하였다. 세조가 대군으로 있을 때 그의 집을 세 차례나 방문하였으나 기건은 자기의 눈이 청맹과니라고 핑계하였다. 세조는 사실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 침을 들고 그의 눈을 찌르는 시늉을 하였으나 기건은 눈 한 번 깜짝거리지 않고 끝내 일어나지도 않았다. 또한 우리 나라 풍습에 부인들이 외출할 적에 너울을 쓰지 않았는데 기건이 처음으로 너울을 만들어서 쓰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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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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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나무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은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는 갖가지 나무를 나게 했으며 에덴동산 한 가운데는 생명의 나무와 그 열매를 먹으면 선악을 분간하게 되는 나무를 심었다. 그 열매가 곧 '금단의 열매'이다. 그리고 '아담'과 '이브'에게 이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 두었다. 그러나 뱀이 나타나서 "이 열매를 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처럼 선악을 분간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하고 유혹했다. 마음이 약한 '이브'는 그 유혹에 넘어가서 열매를 따 먹었을뿐더러 '아담'에게도 권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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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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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2장 내가달라져야 하는 이유
시저의 몸값
기원전 75년 7월의 어느 날 밤, 휘황하게 빛나는 달빛을 받아 거울처럼 잔잔한 지중해를 조용히 항해하던 배 한 척이 갑자기 해적의 습격을 받아 아수라장이 되었다. 배에 옮겨 탄 해적들은 화물이며 귀중품을 강탈했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에 떠는 승객들 중에서 몸값을 뜯어낼 수 있겠다고 보이는 사람들은 따로 추려내 억류했다. 마침 그 배에 타고 있던 훤칠한 풍채의 줄리어스 시저도 해적의 눈에 띄게 되었다.
"넌 누구냐?" "나를 모르는가? 내가 바로 시저다. 머지않아 천하를 호령할 사람이니까 잘 기억해 두어라!" "풋내기 주제에 이놈이 큰소리를 치는군." 해적 두목은 그 와중에서도 태연자약한 시저의 대담함에 약간 놀라면서 말했다. "어디 가는 거냐?" "로도스 섬의 대웅변가 모론 선생 밑에서 공부하러 간다." "흥, 조금은 건더기가 있는 놈 같군. 좋아, 네놈의 몸값은 이십 탤런트로 해 주지. 네놈의 가신을 로마로 돌려보내 줄 테니 돈을 가지고 오게 하라. 그때까지 네 몸은 내가 맡아 두겠다." "잠깐!" 시저가 끼여들었다.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뭐라고? 몸값이 비싸서 놀랐나?" "아니다. 내 목숨이 겨우 그 정도 값으로 거래될 수 없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다!" "뭐라고?" "아무리 많은 금액을 말한다 해도 부족하겠지만, 하다 못해 네가 말한 몸값의 두 배 반으로 해 주지. 그러나 그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의 몸이 되면 너희들을 남김없이 나무 기둥에 묶어 놓고 찔러 죽일 테니 지금부터 각오하고 있는 게 좋을 거다." "이놈이 잠꼬대를 하는구먼."
해적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비웃으면서도 시저의 대담한 태도에는 혀를 내둘렀다. 이윽고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된 시저는 곧 군대를 모아 해적들을 모아 잡아 처형함으로써 약속을 실행했다.
우리 생활은 대부분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가득 찬 채 흘러간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둘러싸고 내가 옳다 네가 옳다 떠들어 대고, 끝내는 서고 욕을 퍼붓고 때리며 유혈 참사마저 일으킨다. 그러나 조금만 높은 곳에서 그런 꼴을 바라보면 보잘것없는 미물의 꿈틀거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소한 일에 구애되지 말라. 얼굴을 붉히고 흥분하는 어리석은 자신을 돌아다보라. 이제 차원을 전환시키고자 노력하라. 그렇게 할 때 욕도 시기도 탐욕도 분노도 모두 흔적 없이 사라지고 활달하면서 대담하고 당당한 인생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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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풍경 - 물,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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