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3. 해체기/양란-개항기 이전
4. 도가
장자 이해
문학적인 측면에서 장자가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으며, 그의 문장에서 엿보이는 호방함은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철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장자에 대한 관심은 노자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 점은 장자 사상이 노자 사상과 거의 다를 바 없다는 당시의 인식과 관련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학자에 따라서는 장자가 노자보다 더 유학의 강상윤리를 비판하였다고 하여 거센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홍석주의 경우가 그 예에 해당한다. 철학적이 측면에서 장자 사상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는 박세당과 한원진이었다. "장자"에 관한 주해서로는 박세당의 "남화경주해"와 한원진의 "장자변해"가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세당이 볼 때 장자는 비록 유가와 묵가를 비롯한 제자백가를 비판하고 배척하여 결국 유학자들로부터 배척당하지만, 그의 근본 의도는 장자가 명가인 혜시와 논변한 대목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장자"에서는 '소요유' 및 '천하'편을 모두 혜시의 이야기를 가지고 끝맺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소요유'편은 혜시의 말을 빌려 자신의 뜻을 밝혔고, '천하'편은 혜시를 깊이 논박함으로써 혜시 학설의 잘못을 밝혔다고 한다. 그는 "장자"의 논리가 수미일관하다고 보고, 혜시와 벌인 논변이 우언의 차원을 넘어선 것임에도 이러한 근본 성격이 아직까지 밝혀진 바 없기 때문에 자신이 그것을 밝히려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그가 "장자"의 본지를 밝히려 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장자"에 보이는 논변의 가치는 물론이고, 나아가 그 사상이 근본적으로 유학자들로부터 배척될 이유가 없음을 밝히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기존의 "장자" 주석서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비판하였다. 박세당은 여러 군데에서 "장자의 본뜻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써 가며 장자를 옹호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장자는 다른 제자백가에 비하여 아는 것이 높고 탁월하며, 사람에게 보여 준 것이 밝고 절실하다. 세상을 걱정하는 장자의 깊은 뜻을 보고서 "장자"라는 책을 평가해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노자는 사사로운 마음으로 우민의 술책을 말하였지만, 장자한테는 그런 것이 없다"고 하여 장자를 높이 평가하였던 것이다.
장자 연구에서도 박세당은 체용관을 그대로 적용하였다. 체용관이 적용되는 것은 거의 대부분 도와 관련된 언급에서 나타나며, 도의 체용에 관한 언급은 '지북유'편에 대한 해설에서 아주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태일을 "주역"에서 말하는 태극으로 이해하고, 태극에서 그 용을 말하면 극이 되고 일이 되며, 그 체를 말하면 무가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이처럼 "장자"에 나타난 우주생성론적인 측면 또는 유무에 대한 이해는 주로 태극과 관련하여 바라보았다. 박세당의 "장자"에 대한 유학적인 이해는 특히 '천지', '천도' 등 유학적 색채가 강하게 나타나는 편명들에 대한 그의 해석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천지'편의 "형은 도가 아니면 생겨날 수 없고, 생은 덕이 아니면 밝아지지 않는다"는 구절에 대해서, 그는 "중용"의 "천명을 일컬어 성이라 한다"는 말과 "성을 좇는 것을 도라 한다"는 말로 이해한다. 그는 이 밖에도 여러 군데에서 천리와 인욕 등의 개념을 동원하여 "장자"의 구절들을 해석하였다. 그런가 하면 리일이니 분수니 하는 개념을 끌어들여 "장자"를 해석하기도 한다. "장자"를 유학식으로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모습은 급기야 '인간세'의 주석에서, 장자의 학문은 인륜을 밝히지 않는 것이라 말할 수 없다고 하여, 윤리적인 측면에서까지 장자 사상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이기조차 한다. 한원진이 쓴 "장자변해"에서 '변해'란 그 내용을 분석하여 그 주장의 참모습을 밝히고 비판한다는 뜻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주자학의 입장에서 장자를 비판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한원진도 장자의 모든 것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장자의 탁월한 문장력, 치밀하고 다양한 방식의 논지 전개, 풍부하고 고원한 상상력 등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장자가 도체라든지 마음이라든지 하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한 점은 오히려 칭찬하기조차 한다. 그가 문제삼은 것은 장자 철학이 진리와 유사한 면이 있지만, 그럴수록 진리를 더욱 왜곡하고 어지럽힌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장자" '천하'편에서 장자가 육경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매우 정확한 것으로 장자 자신의 학문 깊이를 보여 주고 있지만, 거기에는 그 이상의 최고 경지를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미세한 틈 때문에 장차 장자의 학문이 도를 해치는 이단으로 전락되고 말았다고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자" '제물론'의 경우 제물의 근거가 되는 본체를 허정한 그러나 결국 조박한 형기와 다를 바 없는 기 이상의 세계에서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장자는 도를 기로 이해함으로써 도를 형이상의 세계가 아니라 형이하의 생성과 운동의 세계로 추락시키고 말았다고 보았다. 즉 장자는 리와 기를 구분하지 못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결국 이단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것이 한원진의 주장이었다. 장자는 또 마음을 허명이요 영각이라 하여 그 본체를 제대로 보았지만, 거기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였다고 한원진은 비판하였다. 즉 마음만을 알고 그 본성을 알지 못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기에서 리로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광인의 명령된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박세당과 한원진처럼 노장 철학에 관한 주석서를 내지는 않았지만, 노장 특히 노자에 관심이 많았던 학자로 그 밖에 서경덕, 김시습 등을 들 수 있다. 서경덕은 노자가 "유는 무에서 나온다"고 한 것은 기가 바로 허임을 알지 못한 것이라 비판한 바 있으며, 김시습은 노자와 장자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기강이나 도를 닦는 가르침에 대해 언급한 바가 없다는 점을 들어 경세적 입장에서 비판한 바 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노장 철학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표면상으로는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비록 주석서를 통하여 노장을 이해한 학자는 없을망정, 북학파의 경우처럼 사상 속에서 노장 철학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있다. 그 한 예로서 박지원을 들 수 있다. 박지원은 문학적인 측면에서 노장 사상을 끌어들여 주자학의 교조적인 측면을 비판하였다. 그는 "열하일기" 서문에서 자신이 장자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였다. 이를테면 "허생전"에서는 노자의 '작은 나라 적은 백성'의 사상을, "호질"에서는 노자의 반전 사상과 만물 평등 사상을, "예덕선생전"에서는 "장자"의 이른바, '무용지용'의 사상과 "도는 없는 곳이 없다"는 설에 드러나는 평등 사상을 보여 주고 있다. 홍대용의 경우에도 "의산문답"에서 실옹과 허옹의 대화를 통해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과 사물이 똑같다"고 설파하였는데, 이것은 장자의 "도의 입장에서 본다"는 논리 및 제물론의 논리와 매우 흡사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 후기 깨어 있는 학자들 가운데는 노장의 이론, 특히 장자의 '만물제동'이라는 평등 사상을 자신의 철학에 응용함으로써 당시의 사회 구조나 유학 사상을 비판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삼교회통론에 보이는 노장 철학
삼교회통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조선 전기의 기화와 휴정을 들 수 있다. 기화는 "현정론"을 통하여, 휴정은 "삼가귀감"을 통하여 삼교회통론을 주장하였다. 이 회통론에서 우리는 조선 시대에 도가 철학이 수용되어 어떻게 이론적인 전개를 펴나갔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기화는 삼교 사상의 특징적 요소를 들면서 불교는 성과 성체를 중시하고, 유학은 심과 사물을 중시하며, 도교는 기와 변화를 중시한다고 구분하면서, 그러나 유, 불, 도 삼교가 교시한 경전의 내용은 결국 같다는 논지를 폈다. 즉 노자가 말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유학의 "고요하면서 항상 감응한다"는 것과 같으며, 노자가 말한 "함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함이 없다"는 것은 "감응하나 항상 고요하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휴정은 삼교가 각기 입장의 차이는 있으나 일심을 밝혀 리를 닦는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고 보았다. 휴정은 "삼가귀감" 중 '도가귀감'에서 "노자" 원문에 도 또는 대라 되어 있는 것을 심으로 고쳐서 심과 도를 한 가지로 보고 있다. 또 도가에서 말하는 도와 덕을 체와 용에 각각 배속하여, 용인 체가 없으면 생길 수 없고 체는 용이 없으면 묘용이 있을 수 없으므로, 도와 덕을 모두 갖추되 모든 대상에 대한 작용을 버려야 그 묘를 볼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다만 삼교의 회통을 주장한 사람들은 주로 불교적 입장에서 논지를 전개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유학의 숭상으로 불교가 침체기로 접어들었던 당시 조선의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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