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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06 호
단기 4340. 6. 27 (음력 5.1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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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남해금산’ 100번 읽은 김훈의 독서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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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김훈은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 기자로 일했다. 매서운 단문을 바탕으로 한 시적 표현으로 당시에도 이름을 날렸다. 한겨레신문에 연재하던 ‘거리의 칼럼’ 등을 통해 고정 독자층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김훈의 글은 문학기자 시절, 가장 빛났다. 1980년대 김훈이 읽은 시와, 만난 시인에 대한 이야기 <내가 읽은 책과 세상>(푸른숲. 2003)을 통해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등 김훈의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문장의 검객’이라 불리는 김훈의 글이 어떤 노력으로 완성된 것인지 확인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 책의 발문을 쓴 시인 이문재에 따르면 김훈은 이성복 시인의 <남해금산>(문학과지성사. 1986) 기사를 쓰기 위해 무려 ‘백번’을 읽었다고 한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대한 글을 쓸 때는 전 편을 세 번 정독했다. 대학 노트에 인물, 사건, 구성, 문체 등을 꼼꼼히 정리하던 김훈을 이문재는 ‘탐욕스럽고 까다로운 독자’라고 말한다.
김훈의 독서편력은 일을 하지 않을 때 더욱 심해졌다. 때론, 자신의 이름 뒤에 ‘독서가’라는 이름을 붙이곤 했다. “선배의 글쓰기는 혹독한 글 읽기의 연장”이라고 이문재는 평한다.
한편, 김훈은 책머리를 통해 “여기에 모이는 글 부스러기들은 대부분이 밥을 벌기 위해 허둥지둥 쓴 글들”이라는 방점을 찍는다. 마감시간과 사투를 벌이며 “이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몰고 나간 글. 그걸로 밥을 먹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김훈의 이러한 고백은 금세 무색해져 버린다. 본문을 여는 유려한 문장 때문이다.
“내일이 새로울 수 없으리라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중년의 가을은 난감하다”
이문재는 “이 문장을 외고 다니는 젊은 문인 몇몇을 만나곤 했다”고 회상한다.
책은 기행문 성격을 띤다. 시의 탄생지 곳곳을 누비는 김훈의 발걸음과 함께 시인의 고향과 시 속 배경지가 아름답게 채록된다.
고은의 <섬진강에서>, 김필곤의 <지리산 죽로차>, 김용택의 <섬진강 9>로 이어지는 순례를 통해 김훈은 ‘강’의 의미를 고찰한다. 그는 “시 속의 강은 새로운 시간 속을 흐르는 생명의 강이고, 역사를 관통하는 현실의 강”이라고 쓴다. 이외에 ‘새’ ‘집’ 등 한국 시에서 등장하는 상징적 이미지들이 다양한 의미로 재해석된다.
김훈의 오래된 독자, 새로운 독자 모두에게 이 책은 그의 발원지를 추적할 수 있는 색다른 글묶음이다.
[북데일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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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무덤 앞에서 흘리는 가장 가슴 아픈 눈물은 고인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과 행하지 못한 행위 때문에나오는 것. / 해리엇 비처스토우 (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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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라
옛 성현들이 말씀하였다. "그 자리에 있지 않고서는 그 일에 대해서 의논하지 않는다" "논어"와 "주역"에서도 "군자는 생각하는 범위가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회고해 보면 그때는 나이가 어리고 식견이 얕아 이런 성현의 뜻을 알지 못했었다. 아아, 후회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구나. 임금을 섬길 때는 임금의 존경을 받아야지 임금의 총애를 받는 사람이 되는 건 중요하지 않다. 또 임금의 신뢰를 받는 게 중요하지 임금을 기쁘게 해주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지 않다.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접근하여 임금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임금이 존경하는 사람이 아니며, 시나 글을 잘하고 재주를 가진 사람도 임금이 존경한다고 할 수 없다. 글씨를 민첩하게 잘 쓰는 사람도 그렇고, 얼굴빛을 살펴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 벼슬 버리기를 어려워하는 사람, 차림새가 엄하지 못한 사람, 권력자에게 이리저리 붙는 사람을 임금은 존경하지 않는다.
경연에서 온화하게 말을 주고받고, 일을 처리할 때 비밀히 부탁하고, 임금이 마음속으로 믿고 의지하여 서신이 자주 오가고, 하사품이 자주 내려질지라도 그런 것을 총애나 영광으로 믿어서는 절대 안된다. 뭇사람들이 노여워하고 시기하게 되니 결국은 재앙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 때 오히려 승진도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느냐? 임금 또한 늘 혐의 받는 것을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신하는 임금이 애첩같이 다루고 노예처럼 부려먹으므로 혼자서만 매우 고달프고 힘들기만 하지 등용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순수한 자기 실력으로 진출한 선비가 가장 좋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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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3. 해체기/양란-개항기 이전
2. 반주자학
경학
2. 박세당
박세당은 32세 때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여러 해 벼슬에 있었던 관료 출신 지식인이다. 하지만 40세에 서울 교외에 은거한 이후 74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대부분의 기간을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저술과 강학에 열중하였다. 박세당의 대표적 저술은 "사변록"이다. 이 책에는 주희의 "사서집주"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 가득하여 윤휴의 주해보다 한결 흥미를 더해 준다. "사변록"의 주해 가운데 주자학과 가장 대비가 되는 것은 역시 "대학"과 "중용"이다. 박세당은 윤휴와는 달리 "대학"과 "중용"의 편장을 구분하여 체계적인 이해를 꾀하였다. 특히 "중용"에 대해서는 20장으로 구분하는 독자적 체계를 세웠고, 문장의 의미와 맥락에 비추어 본문의 순서를 바꾸기까지 하였다. 박세당은 유학이 본래 현실적 실천을 중시하는 사상 체계라는 사실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그가 보는 주자학은 가깝고 쉬운 것을 뛰어넘어 깊고 먼 곳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이론이었고, 이것은 평생 어둡고 어지러운 곳에서 헤매는 무모한 짓이었다. 그래서 자신만이 아니라 남까지도 그르치는 병폐를 가졌다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비판은 "대학" 주해에서 잘 드러난다. 주희는 "대학"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 배움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하면서도, 팔조목의 출발인 '물격'에 대해 형이상학적 완성의 경지를 그려 놓고 있다. 이에 대하여 박세당은 "대학"에 실린 대부분의 글이 모두 처음 배우는 사람들도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을 들어 주희의 해설에 담긴 모순을 지적하였다. 박세당은 '격물'의 '격'은 법칙 또는 바름이라고 풀이하여, '격물치지'란 실천 족에서의 마땅한 행위 기준을 얻어 실천 대상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주희의 말처럼 물리의 궁극에까지 내 인식이 이르는 심오한 이론이 아니라, 일의 당연함에 대한 실천적인 인식일 뿐이었다. 따라서 주희가 보망장에서 말한 활연관통의 경지를 전혀 근거 없는 비약이며 허구라고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논지의 바탕에는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처럼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경험 중시적 입장이 깔려 있다. 이 때문에 그의 견해는 주자학과 방향을 달리하게 된 것이며, 관념적 세계에 대한 탐구보다 현실적 실천에 비중을 두는 방향으로 전개해 간 것이다. "사변록"은 '중용'의 정의에 대한 검토로부터 시작된다. 특히 '용'을 일상적인 의미로 본 주희의 해설과 달리 '항상'이라는 뜻으로 봄으로써, 중용을 중의 도를 얻어 길이 지키는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이러한 박세당의 해석은 중도의 평상성에 대한 인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지속적인 실천에 비중을 두는 셈이다. 그러므로 "중용" 본문을 해석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지극히 정성된 자의 꾸준한 실천에 "중용"의 저작 의도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박세당은 사람의 본성과 사람 아닌 것의 본성 사이에 본질적으로 큰 차이를 두지 않는 주희의 이론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그는 그 이유로 "중용"이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지 사물을 가르치기 위한 책이 아니라는 점을 들고 있다. 이것은 실제로 "중용"의 본래 취지에 충실한 해설이며, 그와 동시에 주자학의 보편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인간 주체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박세당은 본성이 갖는 보편적 원리보다도 마음속에서 타고난 통찰력을 지닌 자각적 주체로서의 의미에 주목하였다. 그 자각적 주체는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실현되는 것이므로, 그의 인간 규정은 주자학에 비하여 훨씬 주체적이며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실천은 효의 실천과 같은 일상적인 실천이었다. 따라서 만리 길의 첫걸음을 떼어 놓는 자리에 성인의 지극한 도리가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주자학은, 실천자 자신에게 아리기 쉽고도 절실한 이치를 보여 주지 못한다고 거부하였다. 또 한 발자국씩 떼어 놓고 한 계단씩 오르게 함으로써 따라가기 어렵다는 탄식이 없도록 하고, 차례를 뛰어넘는 실수가 없도록 하는 것이 경전 본래의 정신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자학은 이 같은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3. 17세기 경학의 의미
윤휴와 박세당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학문적 교류를 하지는 못한 것 같다. 또한 위에서 보았듯이 경학 연구 방법에도 유사성이 없다. 윤휴가 "대학", "효경" 등에서 원전 그대로의 이해를 꾀한 것에 비하여, 박세당은 "대학"뿐 아니라 "중용"에서도 본문의 편차를 재구성하면서까지 독자적인 해석 체계를 수립하였다. 윤휴에 비하면 박세당의 경학 연구 방법은 훨씬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윤휴도 고전에 들어 있는 유학 정신의 원형인 실천 정신을 부각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이 점이 박세당과 윤휴의 경학 연구가 지니는 공통 분모였다. 이 점은 사변적 이론 체계에 얽매여 있던 당시 주자학자들과 확실히 다른 부분이었다. 학문 교류가 전혀 없는 두 사람에게서 거의 동시에 그러한 경향이 나타났다는 것은 17세기 주자학의 한계가 이들에 의하여 확인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다. 관념적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둔 실천성을 담지할 수 있는 사상 체계를 17세기의 조선은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뒤 18세기 실학자들의 다양한 학술 활동으로 꽃이 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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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도량
본뜻 : 한자로는 도장으로 쓰지만 읽기는 도량으로 읽는다. 도장으로 읽을 때는 태권도나 검도 등을 가르치거나 연습하는 장소를 가리킬 때이고, 도량은 '도를 닦는 장소, 도가 있는 장소'를 일컫는 말이다. 원래는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바뀐 뜻 : 요즘은 일반적으로 불도를 닦는 곳 즉 '절'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인다 좁게는 좌선이나 염불이나 수계 등을 하는 방을 가리키기도 한다.
"보기글" -스님들이 도를 닦는 도량에 왔으면 마음과 몸을 가다듬어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야 -해인사는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불도량으로 일찍이 성철 큰스님이 계셨던 곳이다
도탄
본뜻 : 본래 도는 진흙을, 탄은 숯을 가리키는 말로 진흙 구덩이나 숯불에 빠졌다는 뜻이다.
바뀐 뜻 : 진구렁이나 숯불 속에 있는 것처럼 매우 고통스러운 지경을 이르는 말이다.
"보기글" -조선 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신음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 독재자의 출현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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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가해자와 피해자의 풀리지 않는 송사 - 아랍인과 유태인
나쁜 아랍인, 가련한 유태인
사람의 기억은 영화와 같은 시각 매체에 크게 영향받는다. 영화의 스펙터클을 즐기는 사이, 영화 속에 숨겨진 정치관이나 세계관이 관객들에게 스며들게 된다. 사람들은 그런 지식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세상사를 판단하는 데 잣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무의식적인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영화 속 주장이 관객에게 이식되는 과정은, 영화 관람과 함께 자동적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다. 영화 관람으로 굳어진 우리의 기억은 여러 가지가 있겠는데, 이번 장에서는 그 중 한 가지를 주목하려 한다. 유태인과 아랍인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그것이다. 우리는 유태인을 가련한 민족으로 생각하며, 반면에 아랍인에게는 웬지 모를 적대감을 느낀다. 그런 감상들이 미국영화의 묘사 방식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역사 교과서보다는 영화가 유태인과 아랍인에 대한 이상을 결정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아랍인과 유태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먼저, 아랍인들은 무지하고 과격한가? 많은 영화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레이더스>(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1981년)의 주인공 인디애나 존스(해리슨 포드)는 카이로의 시장 바닥에서 아랍인과 대결을 벌인다. 능숙한 솜씨로 칼을 휘두르는 그 아랍인의 모습에 관객들은 잠시 긴장하지만, 인디애나 존스는 전혀 주눅들지 않고 심드렁할 뿐이다. 칼솜씨 자랑이 클라이맥스에 이를 즈음에 인디애나는 총탄 한 발을 날리고 아랍인 검객은 피식 쓰러진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데이비드 린 감독, 1962년)에서 아랍인들은 더욱 답답한 모습이다. 자신들의 독립을 위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은 미숙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로렌스의 헌신이 없었다면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했을 종족으로 보인다. 아랍인들에 대한 모든 편견을 가장 노골적으로 그리고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영화는 <트루 라이즈>(제임스 카메론 감독, 1994년)이다. 이 영화에서 아랍인들은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고 잔인무도하고 비열한 테러분자들이다. 크림슨 지하드를 이끄는 아지즈라는 인물이 다음과 같이 비장한 연설을 하는 장면이 있다. “부녀자들을 살해하고 우리들의 고향을 파괴한 미국이 어떻게 우리를 테러 분자라 부를 수 있는가. 미군이 페르시아만에서 즉각 완전 철수하지 않으면 핵탄두로 미국의 대도시를 파괴하고 말겠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거대 강국 미국에 선전 포고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장한 연설 장면을 열심히 촬영하던 부하의 캠코더는 건전지가 이미 다 방전되어 깡통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듯 할리우드 영화에서 아랍인들은 난폭하고 바보스러운 불한당이거나 이해 못 할 종교에 젖어 있는 군상들로 묘사된다.
그러면 유태인들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영화는 그들에게 대단히 우호적이어서, 유태인들은 주로 가련한 피해 당사자로 그려진다. 유태인 영화의 전형은 주로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이전의 시대가 배경인 영화에서도 고통받는 유태인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 로마 시대의 예루살렘에서 유태인들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보여 주는 영화 <벤허>(윌리엄 와일드 감독, 1959년), 20세기 초반 러시아에 살던 유태인의 고난을 그린 <지붕 위의 바이올린>(노먼 주이슨 감독, 1971년) 등이 그것들이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배경으로 유태인의 수난을 가장 끔찍하게 묘사한 영화로 <소피의 선택>(앨런 J. 파큘라 감독, 1982년)과 <쉰들러 리스트>(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1992년)을 들 수 있다. 특히 실화를 영화화한 <쉰들러 리스트>는 가스실에서의 참혹한 학살 장면, 유태인 시신이 집단 소각되는 모습, 아이들이 죽음을 피해 화장실 분뇨통에 몸을 숨기는 모습 등을 대단히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현실에 근거한 역사를 살펴보아야 할 때이다. 진정한 가해자와 피해자는 누구이며, 그들의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갈등의 매듭은 어디서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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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3. 부모로부터 멋진 독립을!
누구나 칭찬과 격려를 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물론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제2의 부모로 택할수 있다면 그보다 나은 일은 없다. 그러나 직접 접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들과 만약 친숙한 관계가 된다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를 상상해 본다. 예를 들면,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본다. 메리라면 내가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할까? 메리라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일상생활에서 제2의 부모와 접촉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상대에 대한 친근감이나 존경심을 언제나 상기할 수 있도록 간직해 두면, 1년에 한두 번을 만나더라도, 또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만날 수가 없다 할지라도 상대의 존재 그 자체가 마음의 지주가 되어준다. 부정적인 사고는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고, 긍정적인 사고를 방해하는 경우가 많다. 친아버지는 당신에게 좋은 점이 하나도 없다고 매번 말한다. 제2의 부모는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강조한다. 이런 경우 당신은 좋은 점이 하나도 없다고 매번 말한다. 제2의 부모는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강조한다. 이런 경우 당신은 어느 쪽을 믿을 것인가? 서로 모순된 경기중 어느 쪽이 진실인지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낡아빠지고 부정적인 생각을 몇십 년이나 되풀이한 까닭에 우리들은 그것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런 낡은 관념에 의해 자아실현을 방해받고 있을 수는 없다. 이상적인 부모를 발견해서 그이 조언에 귀기울이고 실천하도록 하자. 친부모를 자신의 귀감으로 여길 수 있는 행복한 여성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친부모가 아닌 사람을 제2의 부모로 삼고 있다. 낳아준 부모는 생명을 준 것만으로 아이로부터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 제2의 부모는 우리들을 칭찬하고 도와준 것으로 단순한 존경 이상의 존경을 받을 것이다.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부모를 미워하면서 지내는 것은 귀중한 시간과 노력과 정신적 에너지를 시궁창에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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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단종 복위에 실패한 후 평범한 농부로 살았던 성담수
성담수(?-1456)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이수, 호는 문두이다. 세종 32년(1450)에 문과에 합격, 교리가 되었다. 단종 때 나라일이 매우 위태롭게 되자 사촌 성삼문과 더불어 왕실을 도우면서 죽더라도 마음을 변치 말자고 서로 격려하였다. 성삼문이 죽게 되자 성담수도 무서운 국문을 받았지만 일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김해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나서 공주로 돌아갔는데, 결국 화병으로 죽었다. 성담수는 높은 식견을 가졌으며 아버지의 묘 밑에 숨어서 가난한 살림을 살았지만 마음은 언제나 태평이었다. 한번도 서울에 간 적이 없고 자신이 명문세족임을 나타낸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평범한 농부로 보았다. 그의 조카 성몽정이 경기 감사가 되어 본 고을을 순시할 때 숙부 성담수의 주소를 몰라 수소문 끝에 찾았다. 그의 집을 찾아가니 쓸쓸한 초가집은 비바람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였고, 앉을래야 앉을 만한 변변한 자리조차 없었다. 탄식하고 집에 돌아온 감사 성몽정은 숙부에게 자리를 보냈다. 그러나 성담수는 곧 자리를 돌려보냈다. "이런 좋은 자리는 우리 같은 가난뱅이 집에는 맞지 않지" 이때 나라에서 죄인의 자제들을 참봉을 시키고 그 거취를 살폈는데 모두 머리를 조아리면서 관의 말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성담수는 끝내 벼슬하지 않고 시를 읊고 낚시로 소일하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정조 5년(1781)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정숙이다. 언젠가 성담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낚싯대 잡고 온종일 강변에 앉았다가 강물에 발 담그고 곤하게 잠들었네 꿈속에서 갈매기와 만 리를 날다가 깨어나니 몸은 석양에 누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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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
산타 클로스
끝에 술이 달린 고깔 모자에 흰 수염, 빨간 옷을 입고 가죽 장화를 신은 '산타 클로스'는 우리 나라 어린이에게도 낯익은 존재가 되었다. '산타 클로스'는 17세기에 미국으로 이주한 '네덜란드'의 이민이 어린이의 수호 성인 '신트 클라에스(Sint Xlaes)를 부른데서 연유한다고 전한다. 이는 또한 사교 성 '니콜라스'의 영국에 있어서의 애칭이기도 하다. 성 '니콜라스'의 축제일, 즉 12월 6일 전날 밤 선물을 주는 기왕의 풍습과 한데 얼려 오늘날처럼 선물 꾸러미를 짊어진 '산타 클로스'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해방후 미군의 진주로 크리스마스 이브의 축하행사가 일반화되자 이에 따라 '산타 클로스'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구세군이 흔드는 자선 남비의 종소리도 빼어놓을 수 없는 세모풍정의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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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
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2장 내가달라져야 하는 이유
장사꾼의 기개
관군과 쇼기다이의 전쟁으로 에도가 떠들썩한 1868년 5월 14일 밤이었다. 쇼기다이 대원 20여 명이 몰래 총포상 오쿠라 기하치로를 찾아와서 을러댔다.
"같이 가자!"
그 전날 밤 총포상 둘이 쇼기다이에게 살해되었다. 그래서 오쿠라는 죽음을 각오하고 그들을 따라갔다. 우에노의 산 속으로 들어가자 살기가 감돌았다. 대장인 듯한 사람이 노려보면서 말했다.
"너는 관군에게는 총을 팔면서 왜 우리에게는 팔지 않나? 팔 건지 안 팔 건지 네 대답에 따라서 제 목숨도 결정된다." 그러나 오쿠라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나는 장사꾼입니다. 돈만 주면 누구에게도 총을 팝니다. 그러나 나는 협박당해도 공짜로는 총을 건네 줄 수 없습니다. 그런 짓을 하면 상도에 어긋납니다. 돈을 지불해 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팔겠습니다." 대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좋다. 재미있는 놈이군. 돈은 꼭 준다. 총을 팔겠다고 약속하라." 대장은 정중하게 오쿠라를 돌려보냈다.
이것은 백 년 전에 있었던 조그만 사건이다. 백 년이라는 세월이 갖가지 모진 시련을 몰고 와 거의 모든 것을 무섭게 변모시켜 버렸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역사라는 것은 항상 새로운 궤도를 찾아 앞으로 앞으로 전진한다. 결코 한 곳에 머물거나 뒷걸음치지 않는다. 역사의 발전에 새삼스럽게 놀랄 것도 없고, 현 시점에 서서 메이지 백 년을 회고하면서 그때가 좋았다고 찬미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러나 집단의 힘에 의존한 폭력으로 법질서를 무시하는 일이 태연하게 먹혀드는 세태를 때마침 일깨워 주는 이 이야기에서 오쿠라 기하치로의 상인으로서의 기개를 엿보면서, 백년이라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잃어서는 안 되는 것마저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시대가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속도는 낡은 것을 깨끗이 버릴 때 더욱 빨라진다. 그러나 이때 낡은 것 중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새롭게 빛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을 확인하는 눈을 잃어 버린다면 새로운 역사를 올바르게 건설할 수 없다. 백년 전의 이 작은 일화는 그 점을 조용히 일깨워 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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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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