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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202 호
단기 4340. 6. 20 (음력 5.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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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전교조 홍보영상 시나리오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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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모범이란 남에게 영향을 주는 주된 일이 아니라, 유일한 일. / 알베르트 슈바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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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게으름뱅이의 하늘
큰 흉년이 들어 백성 중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들 중 하늘을 원망하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보기에 굶어 죽는 사람은 거의가 게으른 사람이 많더구나. 하늘은 게으른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 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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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3. 해체기/양란-개항기 이전
2. 반주자학
양명학
1. 조선 시대 양명학의 성격
정인보는 조선 시대의 양명학 수용자를 세 가지로 구분하여 정리한 바 있다. 첫째는 양명학에 관한 확실한 저서가 있든가 혹은 양명학에 관해 언급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어서 양명학파라고 하기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자, 둘째는 양명학을 비난한 말이 있더라도 전후를 종합해 보면 심중에서는 양명학을 신봉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 자, 셋째는 양명학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채 주희를 신봉하고 있었음에도 평소 주장의 핵심을 보면 틀림없이 양명학자임을 알 수 있는 자 등 세 부류이다. 그리고 첫째 부류로 장유, 최명길, 정제두, 이광신, 김택수 등을, 둘째 부류로 이광사, 이긍익, 이충익 등을, 그리고 셋째 부류로 홍대용을 들었다. 유명종은 위의 세 부류에 다음 사람들을 추가시켰다. 곧 첫째 부류에 남언경, 이요, 허균, 양득중, 이종휘와 한말의 이건창, 이건승, 이건방, 박은식, 정인보 등을, 둘째 부류에 이수광을, 그리고 셋째 부류에 박지원, 박제가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실 조선 시대에 엄밀한 의미의 양명학파가 성립했느냐, 혹은 심지어 지정한 의미의 양명학자가 있었느냐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많다. 이 점은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우리 나라만의 한 특징이다.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쉽게 논의되는 것이 조선이 개국 이념으로 이미 주자학에 기초하고 있었고, 그 후로 이로 인해 발생한 기득권을 무너뜨리기 어려웠다고 하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근본적인 원인으로 다음 두 가지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 지정학적 배경에서 조선은 강력하게 권력이 중앙에 집중된 사회였다. 중국의 경우는 영토가 워낙 넓을 뿐더러 민족과 언어도 여러 가지여서 어느 정도 분권적 성격과 지역적 다양성이 허용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일본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에 비해 조선은 단일한 중앙 집권적 체제가 유지되었고, 따라서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적 사상적으로도 다양성이 적었다. 그런데 본래 관학적 성격에는 양명학보다는 주자학이 적합했다. 태극론에 기초를 둔 리일분수 체계는 어찌 보면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 체계가 투영된 존재론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도 명대에 양명학이 풍미했지만 조정에서 공인한 학문, 즉 관학은 청대 말까지 주자학이었다. 위와 같은 배경에서 어느 사회보다 주자학이 확고했던 조선에서 그와 대립된 양명학이 정립되기는 어려웠다고 하겠다. 둘째로, 역사적으로 보아 조선조 오백 년은 양란을 비롯하여 우환이 많았고, 따라서 각 시대의 지식인들은 강한 사회적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도 주자학은 훨씬 유리했다. 주자학을 배태한 송대는 성립 초부터 시종 북방 이민족에 시달렸으며, 따라서 사회적인 위기 의식은 의리 관념과 대의 명분 의식을 강하게 요구했다. 결국 그러한 성격은 주자학의 근본 동기를 이루게 되는데, 바로 그러한 측면이야말로 조선 사회에서 크게 요청되는 점이었다. 주자학이 중국을 포함한 어느 왕조보다도 조선조에서 강력한 지지와 숭앙을 받게 되는 것은 부단히 위기 의식 속에 명맥을 이어 온 조선 사회의 특성에 기인하는 점이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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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다반사
본뜻 : 옛날에는 밥을 먹은 다음에 차를 한 잔 마시곤 했는데, 특히 불교에서는 차와 선을 한 맥락으로 보고 다선일여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차 마시는 정신에 선이 있고 선하는 과정에 다의 도가 통한다는 뜻이다 즉, 차 한 잔 마시고 밥 한 그릇 먹는 그 속에 삼매의 도리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불교에서 얘기하는 다반사는 평상적인 일 속에 도를 깨우치는 불심으로 향하는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처럼 흔히 있는 일을 말한다.
"보기글" -바다낚시 갔다가 며칠이고 안 돌아오는 일이야 다반사지 뭐 -회장님 일본 가는 일이야 다반사 아니겠어?
단말마
본뜻 : '말마'는 산스크리트어 'Marman'의 음역인데 사혈을 가리키는 말이다. 글자 그대로죽음의 혈이니, 이 혈을 막거나 끊어 버리면 그대로 죽게 된다. 그러므로 단말마의 본뜻은 죽음 또는 죽을 때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숨이 끊어질 때 마지막으로 지르는 비명을 말한다.
"보기글" -유관순 언니가 질렀을 단말마의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떨려 옵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단말마를 지르며 죽어 간 선량한 우리 형님들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지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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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영원한 유랑 민족의 초상 - 집시
집시의 기원과 유랑의 역사
정착하지 못해 떠돌아다닐 뿐이고 사회의 주변에 위치하며, 대개 검은 머리칼과 짙은 피부색을 지닌 집시들은 어디서 솟아난 집단인가. 주의 깊은 관객이라면, 앤터니 퀸 주연의 <노트르담의 꼽추>(장 델라누아 감독, 1957년)에서 답을 찾아보자고 제안할지 모른다. 영화에서 매혹적인 메스메랄다가 춤을 추며 노래하는 모습을 지켜본 파리사람 몇몇이 대화를 나눈다. “저 여자는 대체 뭐지?” 그러자 다른 이가 대답한다. “이집트에서 온 여자이지요.” 15세기 말엽, 정확히는 1487년이 배경인 영화에서 집시는 이집트 출신의 무리라고 설명되고 있다. 엄격한 논픽션 문헌에서도 집시의 기원에 대한 동일한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1700년대 초에 만들어진 최초의 포르투갈어 사전에는 집시가 `이집트 민족 출신으로서 거처 없이 영원히 방랑하도록 신의 형벌이 내려진 무리`로 정의되어 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18세기 초까지 유럽인들이 집시를 이집트 출신의 이방인으로 여겼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이집트인(Egyptian)의 두음이 소실된 결과 집시(Gypsy)라는 표현이 생겨났다는 설명을 납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 <느트르담의 꼽추>나 포르투갈어 사전의 설명이 사실일까. 물론 사실이 아니다. 착각 또는 어림짐작일 뿐이다. 수백 년 동안 유럽인들에게 집시는 연구 대상이 아니었다. 가끔 마주치는 요상한 무리에 불과한 집시가 신성한 아카데미즘의 연구 대상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8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유럽인들의 연구가 진행되어, 집시 언어인 로마니(Romany)가 옛 인도 언어 산스크리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수백 년 동안의 통념과는 달리 집시의 고향이 이집트가 아니라 인도 북서부 지역이라는 사실도 확인된 것이다. 집시가 인도의 사회 제도와 무관한 외부 집단이었는지, 아니면 카스트제도의 한 층위에 속했던 집단이었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하지만, 집시의 기원지가 인도의 북서부 지역이며 11세기 초 그곳을 떠나 서쪽으로 서쪽으로 옮겨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인류의 위대한 모험이 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행해졌다고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인류는 당연히 유럽인들을 의미하는데, 유럽인들은 태양이 잠기는 곳에 대한 무의식적인 탐구욕에 이끌려 서쪽을 향한 여행을 감행했다는 것이며 그 대표적 인물로 율리시스나 콜럼버스를 예시한다. 유럽 문명인이 아닌 집시도 서쪽으로 향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의 이동은 위대한 모험심이나 지적 욕구 때문은 아니었다. 또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집시가 방랑을 즐기는 천성을 지녔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1,000년에 걸친 집시의 유랑은 다름 아니라 사회적 조건에 크게 영향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설명할 유럽인들의 집시 박해가 유럽에서의 집시의 유랑을 해명하는 열쇠라면, 집시가 고향 인도 북서부 지방을 떠난 이유는 이슬람 세력의 잦은 침략 때문이었다. 6세기에 성립된 이슬람 문명권은 무하마드의 죽음 이후 사분오열되기 시작했지만 이슬람 세력의 영토확장 노력은 계속되었고, 11세기 초에는 중앙 아시아와 인도 지역까지 진출한다. 이때의 이슬람 침략 때문에 집시들은 고향인 인도 북서부 지역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 그리고 비잔틴제국 등을 거치면서 계속 이동한 집시들은, 13세기 중반에 유럽 남서부의 발칸 반도(그리스, 알바니아, 불가리아 등으로 구성된 반도)에 도착하게 된다. 집시가 영국, 스페인,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등을 포함한 유럽 전지역에 도착하게 된 것은 15세기 말 또는 16세기경이다. 그들은 개척기의 아메리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 계약 노동자로 파견되거나 추방되었다. 19세기 동안에는 주로 러시아나 발칸 반도에서 많은 수가 아메리카 등 유럽 외부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현재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된 것이다.
고향을 떠난 이후 집시는 끊임없는 이동과 생활 유지를 모두 가능하게 할 기능을 익혔다. 주로 가축 치료, 점성술, 금속 제품 수선 등이 집시의 특기였는데, 특히 그들이 비잔틴 제국에서 익힌 금속 제품 관련 기술은 발칸 반도 지역에 이르렀을 때 효용성이 큰 기능이었다. 비잔틴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융합을 꽃 피운 것으로 유명한데, 그 문명의 화려함은 당연히 부의 축적으로 가능했다. 제국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플은 중세 유럽의 가장 부유한 도시로서, 특히 사치품이나 금속, 유리 제품을 제작하는 기술 수준이 그 밖의 유럽 지역과 비교할 때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집시들은 비잔틴 지역에서 금속 관련 기술을 습득하여 발칸 지역 등지에서 필요한 기능성을 발휘하였으며, 이 기술은 그들에게 생활 유지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집시는 끊임없이 유랑을 해야 하는 집단이었기에 뚜렷하고 복잡한 사회 조직을 갖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초보적인 수준의 사회 조직은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크리스(kris)라는 것으로 이것은 사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규범을 세우고 또한 규범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파문이나 추방 같은 처벌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여러 집시 집단들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비스타(vista)라는 대표단의 기구가 있는데, 비스타는 느슨하나마 인근 집시 집단 사이의 연대를 유지하게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덜하지만 서구에서는 집시들 중에 `집시 킹`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절대 군주처럼 모든 집시들을 일괄 지휘하고 집시들의 추앙을 받는 존재를 기대하는 것인데, 집시 킹은 서구인들의 상상력의 소산일 뿐이다. 집시 사회에서는 그런 신비한 우두머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집시들은 소집단별로 위계와 규범을 세우고 생활하고 있다. 집시는 워낙 오랜 세월 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문화적인 공통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물론 집시들의 결혼 의식이나 장례식 또는 세례의 방식들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각 집단이 머물렀던 지역 사회와의 교류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언어도 그들이 살았거나 거쳐간 지역 언어의 영향을 받았으며, 집시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국가의 법에 종속된 존재들로 살아간다. 종교만 해도 주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의 종교를 취하는 경우가 많아, 이슬람, 카톨릭, 기독교등 다양한 종교를 수용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집시들과 주변 사회의 교류나 동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집시는 그 어떤 민족보다도 오랜 기간 동안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그리고 끊임없이 여러 지역을 이동하며 살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폐쇄성과 유랑을 집시의 본성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반드시 지적해야 할 사실은 집시라고 해서 불안정한 이동과 배타성을 즐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고향을 떠난 집시들은 한곳에 정착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박해가 가해졌기 때문이다. 편견과 차별이 집시의 정착 가능성을 앗아 갔다. 많은 국가에서는 집시의 차별을 법제화한 경우도 많았으니, 집시가 유랑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욱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주위에서 그렇게 박해가 지속되었으니 교류의 문을 닫는 편이 자연스럽다. 집시는 주위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고 내쫓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유랑하고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유럽인들의 착각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인디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런 명명 과정이 부당하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집시의 경우에도 동일한 판단을 내릴 것이다. 명백히 집시라는 명칭은 적절하지 않다. 그렇게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집시들 자신도 집시라는 명칭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단어는 집시들의 원천을 부당하게 왜곡하며 동시에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로마니 민족(Romani people) 또는 롬(Rom)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게 집시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집시라는 명칭이 일반적 표현으로서 유지될 것 같다. 집시를 경멸하는 일반의 태도는 수백 년간 지속되고 있는 집시 박해의 역사만큼이나 완고한 경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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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3. 부모로부터 멋진 독립을!
부모와 남편으로부터의 독립이 자립의 첫걸음 어른이 된 후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끊임없이 부모에게 보살핌을 받고 싶고 그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존재한다. 일에 있어서도 법률상으로는 어엿한 '성인'이지만 내부의 유아성은 여전히 전재해서 그 역할을 연기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부모와의 관계 여하에 따라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있고 싶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부모와 연을 끊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여성은 일정한 대상에게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처음에는 부모가, 그리고 다음에는 남편이 그녀의 모든 일을 맡아서 처리하게 되어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해낼 수가 없으면, 자신의 삶에조차 수동적으로밖에 참여하지 않는다. 어떤 여성은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라고 말한다. 아이의 특권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모님은 나를 몹시 사랑하셨고 내가 무엇을 해도 잘했다며 칭찬해 주셨습니다. 어린 시절이 몹시 즐거웠기 때문에 그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17살이 지나자 조금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어떤 거이든 부모님의 판단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21살이 되었을 때 5살 위의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였는데, 그때부터는 그에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결혼해서 벌써 15년이 되었지만, 나는 스스로 독립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에 안심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엄마를 꼭 닮은 것 같습니다. 어깨에 기댈 수 있는 남성, 괜찮아 하고 말해 줄 남성이 내겐 필요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 대해 언제나 마음 쓰고 있었던 것처럼, 남편도 나에 대해 언제까지나 진심으로 염려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남성에게 그녀만큼 의지하고 있지 않은 여성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일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뒷걸음질치는 여성이 많다 자기가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정의를 내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누구나 부모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갖고 싶다
여자아이는 어머니와, 남자아이는 아버지와 동질의 인간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질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몸짓이나 하는 행동이 아버지를 그대로 닮거나, 음식에 대한 기호가 어머니와 닮거나, 아버지의 체격에 어머니의 감성을 갖추고 있거나, 아버지의 성격에 어머니의 지능을 이어받았거나 하는등 여러 가지 경우가 있다. 부모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에서 부모의 자질, 가치관,생활 자세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지위에 대한 집착이나 동경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부모의 그 권력을 상징하는 자질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부모에 대한 개인적이 사랑은 없고, 그들에 대한 공포와 야망만 있을 뿐이다. 슬프게도 그러한 자질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마치 선천적인 것처럼 그 사람의 몸에 붙어 버려 결혼생활에서도 대번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남편에 대해서도 부모에게 반항했을 때처럼 그만 무의식중에 당치않은 주장을 내세우거나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고식적인 수단을 쓰거나 모욕하고 반격한다. 일찍이 부모와 대립했던 것처럼 남편과 감정적인 대립을 반복하면서, 대개의 여성은 자신의 자녀에게만은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러나 몸에 붙어 버린 습관은 결국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주부 마샤의 경우는 이러했다.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자주 매를 맞았기 때문에 내 아이에게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딸이 태어났을 때 나는 딸을 그다지 귀여워하지 않았습니다. 값싼 애정 따위는 갖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딸이 뭔가를 할 때마다 공연히 화가 나서 곧 때리고 싶어졌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내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잔혹한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닐까하고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와서 겨우 알게 된 것은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잔혹한 어머니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불안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와서 겨우 알게 된 것은 어머니의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낸 비극의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원하면, 어머니는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듯한 기분이 되어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지요. 처음부터 부정하거나 마지못해서 주거나 화가 나서 나를 때리는 것 가운데 어느 한 쪽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에 화를 내고 있었고, 어머니가 가질 수 없었던 것을 딸인 내가 손에 넣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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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태어날 때 세 번 묻더니 죽을 때도 세 번 신문 당한 성삼문
성삼문(1418-1456)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근보, 호는 매죽당이다. 태어날 적에 공중으로부터 아기를 낳았느냐는 물음이 세 번 이어졌기 때문에 이름을 삼문이라고 하였다. 세종 20년(1438)에 문과에 급제하고 동왕 29년(1447) 중시에 장원하였다. 문종이 동궁 시절에 학문에 힘써서 매달 달 밝은 밤이면 손에 책을 들고 집현전 숙직실로 가서 글을 물었으므로 성삼문은 의관을 벗지 못하고 지냈다. 어느 날 밤중에 옷을 벗고 누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신발 소리가 들려 와서 나가 보니 문종이었다.
을해년(1455)에 단종이 선위하였을 때 성삼문은 예방승지로서 옥새를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세조 2년에 중국 사신을 맞는 잔칫날 단종을 복위하기 위하여 거사 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세우지 못하게 되자 성삼문은 운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낌새를 챈 김질이 밀고하여 사건이 발각되었다. 세조가 삼문을 불러서 세 번 심문하니 웃으면서 그 말이 다 맞다고 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이 나를 배반하느냐?"
세조가 물으니 삼문이 소리를 질러 대답하였다.
"우리 임금을 복위하려고 하는 것이 어째서 배반이오? 천하에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누가 있소?" "너는 나의 녹을 먹으면서 나를 배신하였으니 너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다" "상왕이 계시는데 어찌하여 나를 신하로 여깁니까? 나는 녹을 먹지 않았으니 우리 집을 몰수하여 계산하시오"
단근질을 당하였으나 성삼문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신숙주를 돌아보면서 질책하였다.
"너와 내가 집현전에 있을 적에 세종 임금이 원손을 안고 뜰을 산보 하시면서 우리들을 돌아보시고 '천추만세 후에 경들은 이 아이를 잘 보호하라'고 한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거늘 너는 잊었단 말이냐?" 신숙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희안을 신문하였으나 불복하자 세조가 다시 삼문에게 물었다.
"강희안도 함께 모의하였느냐?" 삼문이 대답하였다. "그는 우리의 모의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름 있는 선비를 다 죽이지 말고 남겨 두고 쓰십시오"
이 때문에 강희안은 죽음을 면하였다. 삼문은 죽음에 임박한 순간에도 태연자약한 안색으로 사람들을 보고 말하였다.
"자네들은 어진 임금을 잘 보좌하여 태평성대를 살게나. 나는 지하에 들어가 우리 임금을 만나겠네"
죽은 뒤에 그 집을 몰수하고 보니 세조가 즉위한 이후로 받은 봉록을 한 방에 고스란히 모아 놓고 각각 어느 달 봉록이라고 써 놓았다. 집에 변변한 살림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침실에 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성삼문이 남긴 절명시는 다음과 같다.
북소리는 둥둥 목숨을 재촉하는데 서풍에 해는 뉘엿뉘엿 지려고 하네 황천에 주막집 하나 없다 하니 오늘 저녁엔 뉘 집에서 잘꼬
성삼문이 중국에 갔을 적에 어떤 사람이 가리개에 시를 써 달라고 청하였다. 그는 그림을 보지 않고 먼저 두 구를 썼는데, 나중에 보니 수묵도였다.
눈같이 흰 옷에 옥 같은 발뒤꿈치 연못 속 물고기를 얼마나 엿보았느냐 우연히 날아서 산음현을 지나다가 왕희지의 벼루 씻는 연못에 추락하였나
시를 본 그 사람은 매우 감탄하였다. 매월당 김시습, 추강 남효온이 성삼문의 시체를 수습하여 노량진 아차현 남쪽 기슭에 장례 지냈다. 성삼문이 언젠가 중국에 들어가서 백이, 숙제의 묘 옆을 지나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써 붙였는데, 비석에서 땀이 흘렀다고 한다.
말고삐 잡고 감히 잘못을 간했으니 그 충의 당당하여 햇빛처럼 빛나네 초목 또한 주나라 이슬 먹고 자랐거늘 수양산 고사리는 어느 나라 고사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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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
사이렌
10년에 걸친 '트로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오뒤세우스'는 희랍으로 돌아오는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 본대와 떨어져서 외톨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지중해 연안가지 이르렀는데 당시 그곳에는 갖가지 괴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특히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새인 괴물 '사이렌' (희랍어로는 '세이레네스, Serienes)' 3자매의 가까이로 배가 지나가면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선원들의 마음을 흘린다. 일단 '사이렌'의 노랫소리를 듣게 되면 저도 모르게 정신이 빼앗겨 바닷가 암초로 배를 몰고 가며 끝내는 난파하여 '사이렌'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행히 '오뒤세우스'는 마녀 '사이렌'이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배가 '사이렌'의 소굴 가까이 이르자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간단히 틀어막고 자신은 배의 중앙 돛대에 비끌어 매게 했다. 그런 다음 "내가 아무리 몸부림을 치거나 아우성을 쳐도 절대로 나를 풀어 놓아서는 안된다. 너희들은 힘껏 노를 젓기만 해라"하고 단단히 일러 두었다. 이윽고 '사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오뒤세우스'는 그 소리를 듣자 미친 듯 몸부림치며 배를 그곳으로 몰고 가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귀를 틀어막아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선원들은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리하여 배는 무사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고 약이 오른 '사이렌'은 자살해 버렸다.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 쇨,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 때로는 한가롭고 때로는 다급하게 느껴지는 사이렌 소리도 그 근원을 살피면 아득한 옛희랍 신화속의 마녀에서 유래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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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
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폭력배를 물리친 여성
법학 박사 하토야마 가즈오가 1890년 제1기 중의원 선거에 입후보했을 때의 어느 날, 반대당의 폭력배들이 일본도를 뽑아들고 그의 집에 들이닥쳤다. 무서운 살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아직 서른 살밖에 안 된 젊은 부인 하루코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성큼 나섰다.
"아무리 폭력배라 해도 여자를 베진 않겠죠."
그녀는 남편을 대신해서 응접실에 나가 폭력배를 만났다.
"그 번쩍거리는 건 뭐죠? 여자인 나를 벤들 당신들의 명예가 높아지지도 않을 테고, 그런 짓을 하면 오히려 하토야마에게 동정이 모아질 겁니다. 우선 그 칼부터 거두세요."
그녀의 차분하고 가라앉은 말투에 기세 등등하던 폭력배들은 기가 꺾여 칼을 칼집에 넣었다.
"용건이 뭐죠?"
폭력배들은 서로 미루면서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부인은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아, 하토야마를 위해 열심히 일할 테니 보수를 받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죠?"
폭력배들이 어안이 벙벙해서 서 있자 종이에 싼 것을 내밀었다.
"이쪽에서 부탁한 적이 없으니 드릴 수 없어요. 적은 돈이라도 좋다면 이번만은 내 약간의 성의를 보여 드리지요."
하루코 부인의 태도에 압도당한 폭력배들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고 거북한 듯이 인사를 하고 나가 버렸다. 옆방에서 그 모습을 엿보고 있던 이 집의 서생들이 수군거렸다.
"마치 연극 한 편을 보는 것 같았어.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사모님의 태도에 정말 탄복했어."
너무나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서른 살밖에 안 된 젊은 부인의 차분한 태도는 관객의 갈채를 받기에 족하다. 관객은 다음 세 가지 요점 때문에 갈채를 보냈을 것이다. 우선 여느 부인이라면 그 살벌한 분위기에 질려 맨 먼저 안으로 도망쳐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부인은 도망치기는커녕 남편을 대신하여 자발적으로 나서 폭력배와 맞섰다. 안방마님은 연약하다는 이미지를 깨는 속이 후련한 장면을 연출했다. 예기치 못했던 일에 대항하여 즉석에서 하기 힘든 행동을 한 것이다. 둘째는 쓸데없이 위세를 부리기 좋아하는 폭력배들의 속성을 잘 알고, 항상 기선을 제압하는 말로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폭력배뿐만 아니라 누구든 기선을 제압 당하면 으레 수동적으로 변해 공세를 늦춘다. 여기서도 "용건이 뭐죠?"라고 물어도 서로 미루면서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상대방이 혼란에 빠졌다. 폭력배와 맞서는 상황에서 실로 적절하게 대응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는 여기에 이르러서 완전히 주도권을 잡았는데도, 정치가의 부인답게 억제해야 할 것을 확실하게 억제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돈을 주어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하토야마가 아니라 부인의 성의로 이번에 한해서만 주겠다고 다짐하고, 따라서 소액으로 해결했다는 것이다. 상대를 완전히 압도하고, 게다가 시종 압도당한 폭력배들이 인사까지 하고 돌아가게 한 것은 감탄스러울 정도로 차분한 태도다. 이상 세 가지 요점이 갈채를 받았고, 게다가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한 행동이기에 그녀의 행동은 한층 더 두드러졌다. 말할 것도 없이 돌발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평소부터 하루코 부인이 스스로의 자질을 가꾸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그리고 그것이 하토야마 가즈오의 정치 활동 하나하나에 큰 보탬이 되었으니 이 사건에 감탄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내들은 귀감으로 삼아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굳이 정치가 부인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아내들은 평소에 그런 자질을 갈고 닦아 아내의 자리를 더욱 견고하게 다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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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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