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3. 해체기/양란-개항기 이전
1. 주자학 영남 학파
조선 시대 사림파의 형성은 먼저 영남 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말 농업 생산력의 발달을 매개로 재지 중소 지주 출신 신진 사대부들이 과거를 통한 중앙 진출이 다시 활발해지며, 조선 초기에는 특히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길재를 잇는 사림이 형성되었다. 이 때문에 영남 지방을 '인재의 보고'로 중시하여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다"고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조선 시대 성균관의 문묘에 배향된 18현 가운데 광해군 시대까지 조광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영남 출신(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이라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한편 인조 반정 이후의 문묘 배향 인물이 기호 학파 출신 일색이라는 사실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영남 학파가 정치적으로 위치에 놓였는가를 암시하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구체적으로 영남 학파의 학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주자학이 도입, 형성되는 고려 말의 안향으로부터 시작하여 우탁, 권보, 정몽주, 박충좌, 이숭인, 정도전, 권근, 길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영남 출신으로서 조선 초 사림파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이어 조선 초기에 중심적인 활동을 한 인물로서 김종직을 비롯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도 이 후 영남 학파가 형성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영남 학파의 사상적 특징은 김굉필이 실천 유학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담고 있는 "소학"을 중시하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소학"은 철학적인 면보다는 윤리 도덕의 지침서로서 성격이 더 강했으므로, "소학"의 중시는 곧 그들의 실천 지향적 성격을 강하게 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실천적 전통은 이후 영남 학파의 두 연원을 이룬 이황의 '경' 중시 사상이나 조식의 '경의' 중시 사상에서 엿볼 수 있듯이 영남 학파의 성격을 뚜렷이 확정 짓는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이론적으로도 실천적 지향성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이언적, 이황 등의 리 중심의 리기론이 확립되었으며, 영남 지방의 학자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리 중심의 리기론을 추종, 답습하면서 이이를 추종하는 기호 학파의 리기론을 논박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학파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 조선 시대 말까지 자신들의 학맥을 이어갔다. 이황의 제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유성룡, 김성일, 이덕홍 등을 들 수 있으며, 김성일한테 사숙하여 그 학문을 계승한 이현일에 이르면 이황의 리기론과 인심도심설 등에 자신의 설명을 덧붙이면서 기호 학파의 리기론에 치밀한 논변을 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황의 학문은 김성일, 유성룡, 정구에 이어 이현일, 이재, 이상정, 유치명, 이진상 등으로 이어진다. 19세기의 이진상에 이르러서는 철저한 리 중심 철학으로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이황과 함께 영남 학파의 양대 산맥을 가르는 조식의 학문은 정인홍, 김우옹, 정구 등으로 이어지지만, 인조 반정 이후로 정계와 하계가 서인의 수중에 장악되면서 이들의 학문은 단절되며, 임진왜란시의 의병 운동이나 광해군 때의 개혁 정치 등에서 나타난 이들의 실천적인 유학 사상도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한편 일시적으로 이황한테서도 배운 적이 있는 김우옹과 정구 및 그들의 후예는 퇴계 학파로 간주되어 그 학문적 계통과 명맥을 유지해 나가게 되었다. 이와 달리 이익 등 정권에서 소외된 근기 지방의 일부 남인들은 리기론보다는 경세 사상에 관심을 두어 이 후 '경세치용 학파'라 불리는 실학파의 한 계열을 이어나가기도 하였다. 이익은 유형원으로부터 실학 정신을 이어받기도 하지만 정구의 제자인 허목에게서도 실학적인 학풍에서 영향을 받았던 관계로 특히 실천 지향적 성격이 강했던 조식 학풍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영남 학파의 철학 사상에서 뚜렷한 특징이라 할 '리' 중심적인 경향은 우선 이황의 제자 가운데서 유성룡이란 김성일 등 실제 정치에 관심을 기울였던 인물보다는 이황의 학설에 충실하게 리기론을 전개했던 이덕홍에게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황과 마찬가지로 리의 능동적 작위성을 인정하여 사단칠정은 리기가 함께 발동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기 없이 리가 홀로 발동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지행 관계에서도 지와 행이 둘이면서도 하나라는 입장을 전제하고, 지는 내외를 겸하여 행은 동정을 겸한다고 주장하였다. 영남 학파에서 반드시 거론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인물로서 장현광을 들 수 있다. 그는 정구의 조카사위이자 제자로서 스승의 학설을 이어가면서도 자신의 독창적인 학설을 전개하였다. 그는 리는 날줄인 경이고 기는 씨줄인 위라고 하고 이것들이 도에 통일된다는 도일원론을 폈다. 따라서 리와 기는 원래 두 가지 근본을 갖지 않는다고 하면서 경위라는 체용 구조 속에 끌어들여 논지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장현광의 리기론은 이황의 리 중심론을 잇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이이의 학설과 절충하고자 한 독자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정경세는 유성룡의 제자로서 주리적인 입장에서 기가 동정하는 원인은 리에 동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는 이이의 제자인 기호 학파의 김장생이 리가 본래 한 가지라고 주장한 데 반박하면서, 리와 기가 두 가지임을 분명히 하고 현실적으로는 리기가 공존하더라도 본체론적으로는 리가 기에 앞서 존재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하였다. 그는 예학에도 대가를 이루어 당시 김장생과 더불어 쌍벽을 이룬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김성일의 학통을 이은 이현일은 사단칠정론과 리기론 등에 대한 송시열 등 기호 학파의 비판에 맞서 정시한과 함께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섬으로써 퇴계 학파의 거두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이이의 리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리무위설을 논박하면서 리에 동정이 있으며 사단과 칠정은 각각 리와 기가 발한 것이라는 이황의 견해를 철저히 견지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입장에 따라 그는 영남 학파 내에서도 조식의 학풍을 비판하는가 하면, 절충적 경향을 보인 장현광의 사상을 기호 학파에 가깝다고 논박하기도 하였다. 이상정은 이재의 제자로서 '소퇴계'라 불릴 정도로 이황의 학설을 추종했던 인물이다. 그는 기가 동정할 수 있는 것은 리에 동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리는 기를 바탕으로 삼아 그 속에 존재하지만, 그 본원을 추구한다면 먼저 리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모든 현상 세계는 리와 기가 혼륜되어 있는 것으로 리가 기를 타고 유행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리기의 혼륜과 분개 양면을 함께 파악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리기론을 바탕으로 그는 사단과 칠정에 대해서도 혼륜설과 분개설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유치명은 남한조로부터 퇴계 학파의 계통을 이은 인물로서 이황의 리발설을 발전시켜 리활물설을 주장, 리의 동정을 주장한 이상정의 견해를 리 중심으로 더욱 심화시켰다. 그는 리가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리 실재론을 주장하고, 나아가 하늘의 도리가 유행하여 만물을 발육한다든가 태극의 동정으로 음양을 생성한다든가 하는 것들이 모두 리의 동정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나중에 이진상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이같이 이황의 리기론을 주축으로 한 영남 학파의 철학 사상은 후대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리 중심적인 경향을 강화해 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황의 성리설에 이미 배태되고 있었지만, 기호 학파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같은 리 우위론적 경향성은 실천을 중시한 영남 사림의 전통이 저변에 짙게 배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보다는 도덕성의 제고를 통한 신분 사회의 안정적 유지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따라서 인간의 도덕성을 리라는 형이상학적 원리에 의해 보증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특성 때문에 영남 학파는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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