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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99 호
단기 4340. 6. 10 (음력 4.2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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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2007 예담 독서감상문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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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모든 사람이 영웅이 될 수는 없다. 영웅이 지나갈때 박수 쳐 줄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 /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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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가슴은 세상 밖으로
육자정이 말하기를, "우주의 일이란 자기 내부의 일과 같고 자기 내부의 일은 바로 우주의 일이다" 하였다. 하루라도 이런 생각이 없을 수 없나니, 우리의 본분이 애초에 가볍지 않도다. 사나이의 마음가짐이란 마땅히 광풍제월(비온 뒤에 맑게 뜨는 바람과 달)과 같아 털끝만큼도 가린 곳이 없어야 한다. 무릇 하늘이나 사람에게 부끄러운 짓을 아예 저지르지 않는다면 자연히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안정되어 호연지기가 저절로 우러나온다. 만약 포목 몇 자 동전 몇 닢 정도의 사소한 것들에 잠깐만이라도 양심을 저버린 일이 있게 된다면 이건 기상을 꺾고 정신적으로 위축 받게 되나니, 정말로 주의토록 하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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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3. 해체기/양란-개항기 이전
1. 주자학
주자학의 절대화
단독으로 정권을 차지한 서인 내부에서도 남인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난 것은 경종과 영조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진 왕위 계승 시비였다. 경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노론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은 이후 조선 말기까지 정권을 사실상 독점하게 되었다. 영조와 정조가 당파를 무너뜨리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했던 탕평책도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조와 순조의 즉위를 둘러싸고 시작된 노론 내 시파와 벽파의 대립 역시 생산적인 논쟁을 이끌지 못한 채, 사상적으로는 당시 새로이 유입된 서구 문물을 대표하던 천주학을 박해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정치적으로는 세도정치라는 말폐적인 현상을 가져 왔다. 군주를 대신하여 외척 세력이 정치를 전담했던 세도 정치는 비판 세력을 철저히 배제한 독재 정치에 다름 아니었다. 이들은 정치를 독점하기 위한 장치로서 비변사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군부의 힘을 장악하여 막후 정치를 시행하였다. 서인으로부터 노론으로 이어지는 집단을 정치적으로 지배했던 노선은 이른바 '숭용산림'과 '국혼물실'로 집약되었다. 이들이 산림을 중용한다거나 산림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은 산림으로 대표되는 지식인층의 여론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들은 이와 같이 민중과 접촉하면서 여론을 형성하던 산림의 지식인층을 중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이와 달리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유력한 길은 권력의 핵심인 왕의 외척이 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노론의 태두요 기호 학파의 산림 출신이었던 송시열이 추진한 정책들조차 안동 김씨, 청풍 김씨., 여흥 민씨 등 서울 경기 지방의 이른바 경화거족에 의해 거부되자, 그로써 대표되던 산림은 더 이상 여론의 대변자가 아니라 권문세가의 단순한 '얼굴 마담'으로 전락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인이나 소론 등도 민중의 삶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노론과의 정권 투쟁에만 힘을 쏟아 스스로 지식인으로서의 기능을 포기하고 말았으며, 노론을 대체하기는커녕 몰락의 길을 자초하게 되었다.
한편 소외된 근기 지방의 남인 계층 일부는 민생의 안정을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로 삼고 실학을 표방하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자 하였고, 일부 소론 계열에서는 양명학을 받아들여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로서는 스스로 자신들의 사상을 제도화할 만한 힘을 갖지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노론을 중심으로 한 기호 학파의 학자들은 주자학적 세계관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이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상적 경향에 대해서는 '사문난적'이라는 죄목을 씌워 이단으로 모든 등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더 경직된 사상 체계를 고착시켜 나갔다. 그 당신 사문난적으로 몰린 대표적인 인물은 윤휴와 박세당이었다. 인조 반정이라는 쿠데타를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서인은 병자호란으로 인한 책임을 '청에 대한 복수'로 전가하면서 배청존명론과 북벌론을 앞세웠으며, 이를 통해 민심의 혼란을 수습하고 어지러워진 체제의 재정비를 꾀하고자 하였다. 이를 주도한 측이 이이, 김장생, 송시열로 이어지는 정통 서인 노선이었다. 특히 송시열은 효종대에 이와 같은 배청존명론과 북벌론을 주창한 핵심적인 이데올로그였다. 송시열의 대명의리론은 청에 볼모로 끌려갔다 온 효종 자신의 뼈저린 체험과 맞아떨어져 북벌론은 상당히 힘을 얻었다. 하지만 당시 청과 조선은 국력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므로, 이런 주장은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만큼 이러한 정책들을 실제로 대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민심의 통합 등을 꾀하려는 대내적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그들은 이러한 명분론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비판을 하는 세력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윤휴가 주희의 "중용장구"를 문제시하여, 주희의 해석을 삭제하고 자신의 견해를 적은 "중용독서기"를 짓고, 박세당도 주희의 "중용장구"와 "대학장구"에 의심을 품어 "사변록"이란 저서를 써 내자,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윤휴나 박세당은 이와 같은 저술을 통해 주희의 장구를 개정함으로써 기존의 권위적인 진리 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이 실천성을 띤 철학 체계를 만들려고 하였다. 윤휴는 이를 위해서 기존의 도덕 관념이 아닌 자연스럽고 간단한 실천 윤리로서 '효제'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이 보증자로서 '리'가 아닌 '천'을 부각시켰다. 그리하여 윤휴는 하층민까지도 포함한 모든 계층을 단결시키는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 세력은 윤휴의 이론 체계 자체를 비판하기보다는, 그가 성인의 경전을 함부로 훼손했다는 점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이러한 비판이 이론 대결로 나타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그것은 이단 비판이라는 마녀 사냥의 형식을 띠고 나타났던 것이다. 박세당도 주희의 학문 체계가 지나치게 고원하고 추상적이라 비판하고, 학문이란 어린애들도 알 수 있을 만큼 쉽고 가까운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사변록"에서 주희의 "대학장구"와 "중용장구"의 순서를 바꾸어 자신의 원칙에 따라 새롭게 주석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노론의 김창협은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았던 것처럼 소론인 박세당을 양명학자와 한 가지라고 몰아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주자'를 경시하고 '주자'와 다른 방식으로 경전 해석을 내리는 것은 바로 양명학 추종자들이 하는 짓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박세당의 학설이 결코 양명학적 경향을 띠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양명학자로 비판받은 것은 당쟁과 연결된 흑색 선전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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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낭패
본뜻 : 낭패는 본디 전설 속에 나오는 동물의 이름이다. 낭은 뒷다리 두 개가 아주 없거나 아주 짧은 동물이고, 패는 앞다리 두개가 아예 없거나 짧다. 그 때문에 이 둘은 항상 같이 다녀야 제 구실을 할 수 있었다. 꾀가 부족한 대신 용맹한 낭과, 꾀가 있는 대신 겁쟁이인 패가 호흡이 맞을 때는 괜찮다가도 서로 다투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만저만 문제가 큰 것이 아니었다. 이같이 낭과 패가 서로 떨어져서 아무 일도 못하게 되는 경우를 낭패라 한다.
바뀐 뜻 :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어그러진 형편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말도 안 통하고 연고도 없는 나라에 가는데 현지 가이드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거 낭패도 이만저만 낭패가 아닌데 그래 -모레 열리는 음악회에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발이 삐었으니 이거 낭패로구만
노골적
본뜻 : 한자 그대로 '뼈를 드러내 보인다'는 뜻이다. 살에 가려져 있는 뼈를 드러내 보일 정도로 하나도 숨김이 없다는 말이다.
바뀐 뜻 : 무엇을 감추거나 꺼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주로 금기시 되어 있는 것을 드러낼 때 쓴다.
"보기글" -그 소설의 애정 묘사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오히려 혐오감을 주더라구 -돈 얘기를 노골적으로 꺼내는 데는 그 사람을 당할 자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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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꽃을 든 사회 혁명 - 히피
늙은 히피 티모시 리어리의 죽음
60년대는 이미 지나갔다. 자유 발언 운동을 주도한 마리오 사비오가 90년대 초에 사망했으며 블랙 팬더도 이미 오래 전에 몰락했다. 블랙 팬더의 창립자 중 하나인 에드리지 크리버는 보수적인 정치가가 되었고 휴이 뉴턴은 마약 거래를 하다가 뒷골목에서 죽음을 맞았다. 히피의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대표하던 그룹 그레이트풀 데드의 리더 제리 가르시아도 1995년 사망했다. 60년대 문화를 상징하는 인물들 중 에서도 티모시 리어즈(Timothy Leary, 1920~1996)의 죽음이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이다. 그는 바로 LSD의 효과를 직접 시험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1960년부터 한사람당 20달러씩을 지불하면서 LSD 실험을 진행했다. 그 실험 대상을 자원했던 사람 중 하나가 앞서 말한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 간 새>의 원작자 켄 케세이이다. 케세이는 LSD가 황홀하고 진보적인 경험이라고 주장했다. 자신과 세상에 대한 전혀 색다른 느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학자들이 LSD가 정신병이나 알코올 중독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는 설명을 발표했다. 그 결과 LSD 사용이 일반화되는 상황이 발생하여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까지 LSD를 즐기게 된 것이다. 미국 정부는 1966년 LSD의 사용과 실험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티모시 리어리는 1967년 한 히피 집회에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인생이라는 게임을 중요한 어떤 것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신경 계통과 감각 기관과 몸 속 에너지의 흐름 전체를 소중한 것으로 여긴다면, 당신은 함게 어울리고 약물에 취하여 이 사회를 벗어나야만 한다(Tune in Turn on Drop out)." 그렇게 해서 티모시 리어리는 미국 어른들의 저주를 한 몸에 받고 닉슨 대통령에게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고 지목받게 된 것이다. 1920년 아일랜드계 부모의 외아들로 출생한 그는 엘리트 코스를 거쳐 하버드대의 심리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티모시 리어리가 처음 접한 환각제는 LSD가 아니었다. 그는 1960년 멕시코산 버섯에서 우연히 환각제 성분 실로시빈을 추출해 내고 직접 효과를 보고 난 뒤, 환각제의 놀라운 효과를 체험한다. 인지 능력이 훨씬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 세상은 평소보다 100배쯤 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느껴지더라는 게 그의 회고이다. 1962년 봄 영국의 철학도 마이클 홀링스헤드라는 청년이 티모시 리어리를 찾아와 선물을 전한다. 그것은 LSD를 묻힌 설탕 조각들이었다. 그 청년 덕분에 티모시 리어리는 LSD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가 LSD에 취했을 때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엉키는 우주적 드라마가 눈앞에 펄쳐졌다고 한다. 그후 그는 LSD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했고 LSD의 긍정적 기능을 선전하기 시작한다. 티모시 리어리의 설명은 히피의 논리 바로 그것과 일치했다. LSD는 개인의 의미 있는 변화를 가능하게 하며, 세상의 평화를 실현하게 할 도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의 동료 올더스 헉슬리가 죽음 직전까지 LSD를 요구했다거나, 리어리의 세 번째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이 모두 LSD에 취한 상태였다고 하는 일화들이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다.
티모시 리어리는 사회의 비판에 직면하게 되고 1963년에는 하버드대학에서 해고당한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는 모든 히피 집회에 참석하여 젊은이들을 선동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엑스터시의 정치학> 등의 저서를 발간하면서 LSD 사용의 정당성을 계속 주장한다. 결국 1970년 1월 리어리는 마약 복용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지만 곧 앞에서 말한 웨더멘이라는 조직의 도움으로 9월에 유럽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1973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체포되어 미국으로 이송된 후 3년간 투옥되었다. 닉슨 대통령처럼 리어리를 혐오하고 적대시하던 기성 세대도 부지기수였지만, 그는 히피들에게 가장 뜨거운 환호를 받은 영웅이었다. 티모시 리어리는 1996년 5월 31일 전립선 암으로 사망했는데, 암 진단을 받은 그는 자살 계획을 세우고 인터넷으로 전세계에 자살 과정을 생중계하려고 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냉동하여 미래 세계에서 되살아나겠다는 의향도 밝힌 바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티모시 리어리의 사망이 크게 보도되지 않았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한때 미국 젊은이들의 대대적 이탈 사태를 주도했고 우드스톡과 보비 딜런과 마돈나를 가능하게 했으며, 가장 오래 버틴 히피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티모시 리어리와 뜻을 같이했던 미국 젊은이들은 곧 가정으로 되돌아와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미국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을 그들 50대의 미국인들은, 히피 현상을 혈기 넘치던 젊은 날의 추억쯤으로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현재 대부분의 문헌들은 히피 문화를 무모한 정치 운동에 불과했다고 비판하거나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외면할 뿐이다. 하지만 맑은 정신을 되찾고 사회로 돌아온 그들이 공들여 만든 현재 미국 사회가 아름답고 안락한 곳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그 밖에 위대한 정치가들이나 사회 개혁 운동도, 티모시 리어리나 히피의 그것만큼 뜨거운 열망을 품었다고는 믿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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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2.꿈을 실현하기 위한 도약
간절히 바라면 꿈은 반드시 실현된다.
여성이라고 해서 무능한 남성이나 처치 곤란의 남성에게 언제나 부드러운 간호의 손길을 뻗쳐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권리도 있을 뿐만 아니라 가정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기의 인생을 실현할 만큼의 능력도 있는 것이다. 불행이나 불만을 초래하는 필요 없는 의구심을 버리고 긍정적인 사고로 자신을 재구성함으로써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그것에 도달할 방법은 반드시 있다. 또한 적극적인 자세로 노력한다면 자기를 위한 시간은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해리 스택 설리번은 다음과 같이 재치있게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사랑이란 서로가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과 그에 대한 만족감이 똑같이 중시되는 것이다.
이 정의는 상대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또 한 사람의 요구가 희생되는 일이 없는 대등한 관계를 말하고 있다. 공동의 목표나 상대에 대한 존경, 상대의 안락과 행복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비로소 우리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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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세조로부터 받은 봉록을 고스란히 쌓아 둔 하위지
하위지(1387-1456)의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중장, 또는 대장이며 호는 단계, 또는 적촌이다. 세종 20년(1438)에 문과에 장원하여 집현전에 들어갔다. 과묵하고 조용하며 공손하고 예의가 있어서 대궐을 지나갈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 아무리 비가 오더라도 길을 피해 간 적이 없었다. 시강원과 경연석에서 많은 활동을 하여 그 당시 인재를 말할 적에 하위지를 으뜸으로 꼽았다. 김종서가 죽음을 당한 뒤 좌사간에 올랐으나 사양하여 나가지 않고 공실(왕실)을 강하게 하고 내치를 엄하게 하며 권문을 막으라는 상소를 올렸다. 세조가 등극하여 예조 참의가 되었으나 봉록을 쓰지 않고 고스란히 쌓아 두었다. 단종 복위 모의가 발각되자 그 재주를 사랑한 세조가 은근히 타일렀다. "그 일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하면 용서해 주겠다" 하위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세조가 직접 나와서 죄인들을세 차례나 단근질을 하였다. 드디어 하위지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말하였다. "이미 역적 이름에 올랐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죽음인데 또 물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세조는 화가 났으나 단근질은 하지 않았다. 하위지는 성삼문과 같은 날에 죽음을 당했다. 영조 34년(1758)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시호는 충렬이다.
하위지는 호와 박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때 박은 채 스무 살도못되었다. 박은 조금도 떠는 기색 없이 금부도사에게 말했다. "어머니께 작별인사 드릴 시간을 주시오" 그는 꿇어 앉아서 어머니에게 고하였다.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죽음을 당했는데 자식이어찌 혼자 살겠습니까?" 또한 누이동생을 돌아보며 단단히 일렀다. "몰수되어 노예가 되겠지만 여자의 의리는 마땅히 한 남자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 절대 개돼지 같은 행동은 하지 말아라" 그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사약을 받자 사람들은 과연 하위지의 자식답다고 말하였다. 하위지의 동생인 생원 강지, 기지는 형 하위지와 함께 나란히 문과에 합격하였고 소지는 생원이었는데 모두 함께 죽음을 당했다. 하위지의 아들 박은 뒤에 지평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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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세익스피어'의 대표적 비극 '햄릿'의 제1장 - '햄릿'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외친다. "살아야 할 것이냐, 죽어야 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구나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햄릿'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웬만하면 다 알고 있는 구절이다. 어머니에게서 인간이 지닌 음탕한 애욕의 본보기를 발견하여 절망한 '햄릿'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벅찬 일에 짓눌려 살아 있기가 고통스러워진다. 그렇다고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말귀만치 자기나름대로 적당히 변형하여 쓰이는 말도 드물 것이다. "그녀와 결혼을 하느냐 않느냐, 그것이 문제다" 퇴근 길에 "대포를 한 잔 하느냐 안 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등등... 미국 학생들 사이에서는 "TV, or not TV; that is the question"이라는, 발음까지도 비슷한 걸작이 있다. "텔레비젼을 보느냐, 안 보고 공부를 하느냐" 이것은 미국 뿐만 아니라 우리들 가정에서도 날마다 한 번 쯤 되풀이해 보는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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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
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구두가 없어도 걸어다닐 수 있다
영국의 문호 사무엘 존슨 박사는 소년 시절에 집이 가난해서 구두마저 사 신을 수 없었다. 그래서 늘 맨발로 걸어 다녔다. 존슨이 옥스퍼드 대학에 다닐 때 부잣집 아들을 친구로 사귀었는데, 그 친구는 존슨의 가난을 매우 딱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 새 구두를 몰래 그의 방문에 걸어 두었다. 외출했다가 돌아온 존슨은 그것을 보자 창 밖으로 홱 던져 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남에게 구두를 얻어 신는 것은 남의 비호를 받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비록 굶어 죽는 일이 있더라도 남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다. 옥스퍼드의 거리를 구두 없이 걸을 수 없다면 생각을 달리 해야겠지만 , 나는 지금 훌륭히 걸을 수 있는 맨발을 가지고 있다. 구두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존슨은 여전히 맨발로 통학했다. 굳이 맨발로 다니는 것이 훌륭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길을 걸으려면 단정하게 구두를 신고 걷는 것이 좋고, 아무래도 그쪽이 자연스럽다. 존슨이 맨발로 걸은 것은 취향 때문이 아니라 구두조차 살 수 없을 정도로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지만,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두 가지가 우리를 감동시킨다. 우리의 생활과 비교하여 곰곰이 생각할 문제를 던져 주는 것이다. 하나는 '굶어 죽는 일이 있어도 남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다'라는 견고한 정신이다. 우리가 그런 가난한 지경에 놓이면 어떻게 행동할까? 어떻게 해서라도 도움을 받을 계기를 만들려고 애쓰지 않을까. 숙이고 싶지 않은 머리를 얼마든지 숙여서라도 도움을 구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잠자코 도움을 주면 뜻밖의 행운이라고 덥석 달려들지 않을까. 적어도 이왕에 생긴 새 구두를 창 밖으로 내던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남의 호의를 무시하는 행동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문제와는 분명히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문제와는 별도로 생각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남의 도움을 거절한 당당한 태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절대로 남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정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깨끗한 인격을 쌓아올리는 기반이 된다. 요즈음 세태가 너무나 물질적인 것에 휘둘리고 있고, 또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들 사이에 횡행하고 있기 때문에 구두를 창 밖으로 내던진 존슨의 굽힘 없는 행동은 더욱 빛이 나는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구두를 신지 않고 다니는 데 대해 조금도 구애되지 않은 마음가짐이다. 훌륭하게 걸을 수 있는 두 다리가 있으니 구두를 신지 않으면 어떠냐는 떳떳함이다. 그것은 결코 가난에서 비롯된 허세가 아니다. 이상한 허세 나 저항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면 맨발로 걷는 것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존슨은 아무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태도로 생활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옥스퍼드 거리를 맨발로 당당하게 걸어다니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이 흐뭇해진다. 어떤 일에도 구애되지 않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상당히 어렵다. 존슨이 문호로서 크게 성공하여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강한 의지 덕분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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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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