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2. 재편기/고려말--양란 이전
2. 불교
고려 말이 되면 불교는 타락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유학자들은 이러한 불교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하게 된다. 비교적 온건한 이색이나 정몽주 등은 불교 자체의 잘못이라고까지 비판하진 않지만, 정도전은 "불씨잡변"에서 불교의 이론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비판까지 하게 된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이 조선을 세운 신진 사대부들은 유학 사상으로 무장하여 불교를 배척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 이제까지 왕권의 비호 밑에서 안존하던 불교는 숭유배불의 거센 바람을 맞게 된다. 그리하여 불교에 대한 여러 박해 정책 밑에 어려운 시대를 맞기에 이른다. 불교가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교단 자체가 크게 타락했을 뿐 아니라 불교 자체도 일반 민중들의 삶과는 동떨어졌으며, 승려들은 특권층으로 행세하여 못된 형태를 보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불교가 크게 탄압을 받아 조선 후대에는 승려가 천민 비슷한 위치에까지 떨어져 업신여김을 받기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가 민중에게 더욱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런 가운데서 불교의 민중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왕권과의 결탁 아래 힘없는 민중을 착취하는 불교가 더 이상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밖으로 보이는 것만을 놓고 이 시대를 불교의 암흑 시대라고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쨌든 이론적인 면이나 불교 예술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이전만큼 활발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고려 말의 승려로는 선사인 보우와 혜근이 유명하다. 이들은 각각 중국에 유학하여 중국으로부터 선종의 일파인 임제종을 새로 받아들였다. 후대에 많은 사람들이 한국 불교의 법맥을 임제선맥으로 잡고 그 시작을 이들에 의한 임제선 도입에 두므로, 그런 점에서 볼 때에는 임제선의 도입은 나름대로의 중요성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조선 초기의 승려로는 이성계의 스승이라는 무학이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이론적으로는 "현정론"으로 유명한 기화가 중요하다. 기화는 당시 배불의 대세 속에서 "현정론"을 저술하여 불교의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며, 불교에 대한 여러 비판에 맞서 불교를 옹호하고자 하였다. 출가와 불살생과 불음주와 나라에 충성하는 것, 그리고 화장법에 대한 불교적 의미 및 불교의 삼세인과의 타당성을 밝혔으며, 불교가 오랑케의 종교라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불교도가 무위도식하는 무리가 아님을 증명하는가 하면, 일부 승려의 잘못됨과 불교의 본질을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등 불교를 옹호하는 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불교를 유학과 비교하여 불교도 유학만큼이나 훌륭하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 "현정론"에서 유학의 오상과 불교의 오계는 서로 공통성이 있다는 등 유학과 불교의 같고 다른 점과 깊고 얕은 것을 비교하여 변론하였다. 유학은 현실적으로 백성을 잘 살게 하는 데 그 뜻이 있고, 불교는 영원한 이상을 위하여 세속을 떠나서 수도하면서 좀더 차원 높은 이상 세계로 향해 나아감을 그 교지로 하는 만큼, 유학에서 다하지 못한 인생 문제를 불교로써 보충할 수 있다고 하여, 유학과 불교가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공존이 가능함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불교의 정당성을 주장한 것이다. 배불 정책이 주류를 이루던 조선 시대에 명종대의 섭정 문정왕후는 불교를 재건하는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는 보우를 중용하여 불교를 재건하는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다. 문정왕후는 선교 양과의 과거를 부활시켜 승려들을 과거를 통해 뽑았는데, 이 때 급제한 사람 중 유명한 이가 휴정이다. 문정왕후는 또 선교 양종을 세우고 그 으뜸 사찰을 정하여, 봉은사를 선종의 근거로 삼고 봉선사를 교종의 근거로 삼아, 보우와 수진을 각각 봉은사와 봉선사의 주지로 삼았다. 보우는 선사로 간주되었지만 화엄의 도리에도 밝았다. 그는 문정왕후의 후원 아래 많은 불교 정책을 실행하였지만, 문정왕후가 죽은 후에는 다시 배불의 분위기가 지배하면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휴정은 조선 시대 불교 사상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휴정의 법맥은 보우로부터 이어 온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는 임진왜란 때에 승병 활동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휴정의 저서로는 "선교석", "선교결", "선가귀감", "삼가귀감" 등과 시문집인 "청허집"이 있다. 그의 사상적 입장은 선을 주로 하는 것이었다. 대표적 저서인 "선가귀감"에서 그는 임제가풍에 의한 조사선문의 공부길을 요약하였고, 선과 교는 공부의 양대의 문으로 이 선심교어(선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의 말이다)의 두 길은 초입자로서는 없어서는 안 될 관문이라고 말하면서도, 법에는 사교입선(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감)하는 길을 제시하여 선주교종의 입장을 주장했다. 결국 모든 사상의 귀결은 선의 본지를 아는 데 있다고 본 것이다. 그에 따르면 본연의 마음을 찾는 기초 원리가 선인 것이다. 휴정은 지눌의 뜻을 그대로 받들었는데, 그의 입장은 지눌의 간화선적 입장과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선가귀감"이나 "선교석"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지눌의 사상을 거의 문자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보아도 틀림없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휴정은 선을 교와 대등한 것으로 보아 융화하기보다는 교에 앞서 선을 기본적으로 더욱 강조하였다. 휴정의 만년 저서로 아려진 "선교석"의 내용을 살펴보면 선의 진경에는 교의 입장을 용납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선의 독자적인 우위성을 크게 강조한 것이다. 물론 그는 염불도 하고, "삼가귀감"에서는 유, 불, 도의 합일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휴정의 염불은 서방 왕생을 위한 염불이 아니었다. 그에 따르면 자성이 곧 아미타임을 알고 일심으로 염불하여 확연하게 본래의 면목이 현전하는 것이 곧 서방정토에 왕생하는 것이라고 한다. 염불이 바로 견성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유, 불, 도 삼교의 합일을 주장함에서도 삼교 모두가 그 근본은 인간의 마음을 가장 중시하는 불가의 사상과 동궤임을 증명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인간의 마음을 중시하는 것이 불교라고 보는 그의 입장이 선의 입장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휴정의 동문인 선수는 광해군 시대에 불교의 중흥을 위해서 노력한 선승이다. 그에게서도 많은 훌륭한 제자가 배출되어 이후의 조선 불교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제자 중에는 각성이 유명하다. 휴정의 제자로는 유정, 언기, 태능, 일선 등이 유명하다. 이들은 휴정의 정신을 계승하여 저마다 제자를 키워 이른바 4파를 이루었다. 그 밖에 교에 밝았던 조선의 고승들로는 의심, 도안, 유일, 최눌 등이 있다. 의심과 도안은 화엄에 밝았고, 유일은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에 밝은 선과 교를 두루 갖춘 대학자로 알려져 있다. 최눌도 교에 밝아 "묵암집", "화엄과도" 등을 저술하였다.
조선 시대 말기의 불교계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건은 이종선, 삼종선의 논쟁이다. 이는 긍선이 삼종선을 주장한 것에 대하여 의순과 그의 문인 홍기가 이에 반대하고 이종선을 주장하여 논쟁한 것이다. 긍선은 그의 저서 "선문수경"에서 임제의 삼구설을 들어 모든 선을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의 세 종류로 구분하고 조사선이 가장 뛰어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의순과 홍기는 선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그 세 가지 사이에 능력의 심천이나 우열에 의한 등급을 인정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보았다. 다만 인명으로는 조사선, 여래선이라 하고, 법명으로는 격외선, 의리선으로 분류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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