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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90 호
단기 4340. 6. 1 (음력 4.1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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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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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신인상 작품을 아래와같이 공모합니다. |
타성에 젖은 우리 시단에 새로운 실험정신을 보여주고 |
21세기 한국문학의 주역이 될 |
역량 있는 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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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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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 이상 또는 장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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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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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200자 원고지 70매 안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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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마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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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4월 20일(20일자 우편소인 유효) 하반기 10월 20일(20일자 우편소인 유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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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낼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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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서구 송현 2동 160-1 시와반시사 편집실 (우편번호:704-342/ 전화 : (053) 654-0027/ 팩스 :(053) 622-03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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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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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은 당선작과 함께 발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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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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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여름호(6월 1일 발행) 하반기 겨울호(12월 1일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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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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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패 및 소정의 원고료를 드리며 창작활동을 적극 지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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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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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응모봉투에 <신인상 응모작품>이라 밝힐 것. ㆍ원고의 앞표지에 응모자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등 인적사항을 밝힐 것. ㆍ작품이 있는 페이지에는 일체 인적사항을 기재하지 말 것. ㆍ평론 응모자는 앞표지에 학력과 논문이나 저서가 있을 경우 밝힐 것. ㆍA4용지에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할 것. ㆍ응모 원고에 대해서는 반환의 책임을 지지 않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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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메아리를 들으며 본디의 소리를 기대하진 말라. /「365개의 인용구가 담긴 달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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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七十九章 (노자 - 도덕경 : 제7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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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大怨, 必有餘怨, 安可以爲善, 是以聖人執左契, 而不責於人, 有德司契, 無德司徹, 天道無親, 常與善人.
화대원, 필유여원, 안가이위선, 시이성인집좌계, 이불책어인, 유덕사계, 무덕사철, 천도무친, 상여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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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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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아홉째 장
직역
큰 원한은 화해해도 반드시 남는 원한이 있다. 어찌 잘했다고 하겠는가. 이런 까닭에 성인은 왼쪽에 계약서를 잡고 있어도, 그 사람을 책망하지 않는다. 덕이 있는 자는 계약을 하고, 덕이 없는 자는 현물로 거래를 한다.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지만 항상 좋은 사람과 함께한다.
해석
원한을 만들지 마라. 원한을 만들고 화해를 하는 것은 아무리 잘해도 잘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원한을 만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다.
덕이란 믿음이다. 상거래를 함에 있어서 신용거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덕이 있는 사람이다. 종이 쪽지 한장에 물건을 빌려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한번 신용을 잃어 버린 사람은 현물(현찰)을 가지고도 거래를 하기 힘든 것이 상거래 이다. 덕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남을 믿을 뿐 아니라, 남도 그를 믿어 주는 사람이다.
하늘의 도는 편애를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하늘이 그에게 가는 것이 아니고, 그가 하늘의 도를 따른 다는 것이다. 하늘의 도를 따르지 않는 것은 스스로 괴로움을 만드는 것이다. 하늘의 도를 따르면 하늘이 그를 돕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늘은 편견이 없다. 단지 하늘의 도를 따르는 사람이 그 길에 맞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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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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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큰 원한은 화해를 하여도 반드시 마음속에는 응어리가 남게 된다. 그것이 어찌 좋은 일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은 좌계를 지니고 남에게 지불을 독촉하지 않는다. 덕있는 사람은 좌계를 지니면서 남에게 내어 주는 일을 하고, 덕없는 사람은 현물세를 징수하는 사람처럼 받는 일을 한다. 하늘의 도는 사사로운 친함이 없이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에 선다.
주
여원: 남은 원한, 화해한 뒤에도 남게 되는 마음속의 응어리. 좌계: 계는 어음을 말하며, 나무 조각으로 어음을 만들어서 두쪽으로 나누어 왼쪽은 물품 보관자가 지니고, 오른쪽은 물품을 받을 자가 지닌다. 좌계를 지닌 자는 우계를 지닌 자에게 물품을 내어 주게 되는 것이다. 철: 주나라 때의 십분지 일세를 말함. 맹자에는 이 제도가 좀 더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또 주나라 사람은 구백묘되는 밭을 여덟 가구에서 제각기 일백묘씩 나누어 받고 남은 백묘는 여덟 가구에서 공동 경작하여 그 농산물을 세금으로 당국에 바쳤는데, 사실은 모두 10분의 1세 였습니다. 주나라 사람의 철법은 전체를 통하여 균일하게 세금을 부담하게 한다는 뜻이며...'
해
큰 원한은 한 번 품게 되면 화해한 다음에도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이 남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아예 원한 관계가 성립될 소지를 없애야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다툼이란 이해관계에서 생기는 것이 보통이다. 성인은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항상 양보하고 베푼다는 마음가짐으로 남을 대한다. 그러므로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하늘의 이법은 사사로운 편애가 없지만 이처럼 선한 사람에게는 복을 내려 주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얼핏 보기에는 인위적인 것이 유능하고 실효성이 있을 것 같으나 긴 안목으로 보면 천도에 따르는 성인의 처세가 가장 현명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유가의 천, 천도, 천명과 도가의 도, 천도의 개념상의 차이점에 대하여 언급하기로 하자. 공자의 천, 천도는 만물의 주재자이며 지식과 의지를 지닌 인격적인 존재이다. 논어에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라든가. '하늘이 나에게 덕(세상을 구제할 사명)을 내리셨는데 환퇴 그가 나를 어찌 하겠는가?'. 또는 '하늘이 아직 그 문화를 없애고자 아니하셨는데 광인들이 나를 어찌 하겠는가?' 또는 '군자는 세 가지 일을 두려워한다. 천명을 두려워하고, 높은 어른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고 피력하고 있다. 요컨대 공자의 천, 천도, 천명은 만물의 주재자요 종교적 의미를 지닌 존재라고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노자의 도, 천도는 인격적 요소가 배제된 존재이다. 그것은 무심하게 이루어지는 활동력인 것이다. 노자서 37장에는 '도는 언제나 자연스러울 뿐 무엇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 그러나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고 기술되어 있다. 도는 이처럼 욕망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낳아 주고 길러 주고 감싸주고 보살펴 준 만물에 대하여 그것을 주재한다든가, 공덕을 자랑한다든가 소유하려는 의지가 없다. 그것은 비인격적이며 무의도적으로 행하여지는 활동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자의 도, 천도에서 종교적 의의가 배제된 자연 자체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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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1. 형성, 확립기/남북국 시대-고려 중기
2. 불교
고려 시대의 불교 철학
고려 시대에 들어서도 불교는 왕권의 비호를 받아 계속 융성하였다. 이론적인 면에서 볼 때 신라와 같은 활발함은 보여 주지 못하지만 다수의 교승들이 나오고 국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수많은 사찰이 세워지며 대장경 판각도 이루어지는 등 계속 번영을 누렸다. 고려 시대 불교는 선과 교가 대립적으로 병립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과 교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고려 시대 불교계의 큰 관심사였다. 의천이 교관겸수를 주장하고 지눌이 정혜쌍수를 주장하는 것도 그런 문제의식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 의천
대각국사 의천은 지눌과 더불어 고려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출가한 왕자 출신의 승려였다. 왕자 출신이었기에 여러 문헌들을 모아 분류, 정리하는 작업 및 속장경 편찬 사업 등 대규모의 여러 가지 불교 사업을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저술은 이러한 불교 문헌의 수집 정리로 이루어진 "신편제종교장총록", "원종문류", "석원사림" 등과 천태종에 대한 "천태사교의주" 및 유식학에 관한 "간정성유식론단과" 등이 있다. 그의 사상은 화엄으로 다듬어졌으나 그밖의 여러 이론도 널리 탐구하였다. 의천이 활동하던 당시의 고려 불교계는 선과 교의 대립이 컸다. 따라서 의천은 그러한 대립을 해결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 교관겸수와 선교합일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선교의 대립을 해소하여 선교합일을 한다고 해도 교를 주로 하고 선이 종이되는 것이었다. 교의 입장에서 선을 융섭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선의 관을 무시하고 교의 경 공부만 해도, 또 그와 반대로 선의 관만을 하고 교의 경 공부를 도외시해도 모두가 불충분하다고 하였다. 또 경 공부를 제 아무리 잘하였다 하더라도 선의 관문을 모르는 자라면 비록 경을 강한다 하더라도 믿을 수 없다고 하고, 그렇다고 어리석은 선만을 가지고 시비를 다투고 있음도 딱한 일이라 하며, 선을 교외의 별전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도록 삼가야 한다고 하였다. 교의 경 공부도 하고 선의 관 공부도 하여 교관을 겸수해야 한다는 것이 의천 사상의 골자이다. 이러한 교관겸수의 입장에서 의천은 그 당시 창건된 국청사에서 천태의 교리를 강하면서 천태종을 확립, 개종하였다. 화엄의 입장에서 사상을 다듬었으면서도 천태종이라는 종파를 개창한 것은 교종과 선종을 융화시킴에 있어 좌선 지관의 수행을 중시하는 천태교관이 더욱 포괄적이며 선종과도 통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선과 교의 다툼을 화해시키는 것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생각했던 의천은 사상의 대립보다 융화를 강조한 원효를 높이 존경하였다. 원효의 화쟁 사상을 최고로 평가한 것이다. 그는 원효를 효성, 해동교주, 원효보살 등의 최고의 존칭으로 불렀다. 그리고 원효의 공을 인도 대승 불교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는 마명이나 용수가 남긴 업적과 견주었을 정도였다. 그러기 때문에 일찍이 경주 분황사로 원효의 상을 찾아 제를 올리며 그의 거룩하고 높은 덕을 추모하면서 원효만이 성과 상을 융화하여 밝히고 백가의 여러 다툼을 화해시켜 일대지공의 논을 얻었다고 칭송하였다. 이와 같이 의천은 원효 사상을 중심으로 한 신라 불교의 전통을 재확인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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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거마비
본뜻 : 옛날에는 교통 수단의 대종을 이루던 것이 수레와 말이었다. 수레와 말로 이루어진 거마는 교통 수단을 가리키는 것이며, 거마비는 곧 교통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바뀐 뜻 : 단순한 교통비를 가리키는 말보다는 주로 강연이나 도움을 준 데 대한 수고비나사례금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보기글" -먼길 오신 김 선생님 거마비는 좀 넉넉히 드리게나 -이번에 참석하신 분들 거마비는 어느 정도 드리면 될까요?
건달
본뜻 : 건달이란 말은 불교의 건달바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건달바는 수미산 남쪽 금강굴에 사는 하늘나라의 신인데 그는 고기나 밥은 먹지 않고 향만 먹고 살며 허공을 날아다니면서 노래를 하는 존재다. 때로는 '중유 상태의 존재'를 건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가에서는 사람의 생을 본유, 사유, 중유, 생유의 네 단계로 나누는데, 그 중 죽어서 다음 생을 받기까지를 중유라 한다. 중유의 몸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살아 생전에 지은 업에 따라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 태어나게 되는데 죽어서 다시 환생하기 전까지의 불안정하고 허공에 뜬 존재 상태를 '중유'라 한다. 건달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뜻이 이러하므로 건달이란 한마디로 존재의 뿌리가 불확실한,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불안한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바뀐 뜻 : 아무 하는 일도 없이 빈둥거리며 놀거나 게으름을 부리는 사람, 또는 가진 밑천을다 잃고 빈털털이가 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천하에 둘도 없는 건달이었던 감나무집 아들이 새 사람이 되었다며? -사업에 실패한 이후로 그 많던 재산 다 날리고, 겨우 하나 남은 집에 들어앉은 건달이 됐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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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냉전
최근에 미국의 권위 있는 잡지에 한 필자가 자신의 논문을 게재하면서 이름을 'X'라는 익명으로 대신하여 화제를 뿌린 적이 있다. 그런데 과거에도 이처럼 정치외교상 중요한 문제를 거론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중에 유명한 것이 바로 1947년 7월 미국의 권위 있는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 실린 논문이었다. 제목은 "소련 행동의 원천"이라는 것이었는데, 이 논문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필자가 이름을 밝히지 않아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 논문의 주장 때문에 더욱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소련은 팽창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미국은 어떠한 세계정책을 취해야 하는가를 이 논문이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당시 미국 외교정책의 근간을 제시했던 셈이다. 이로 인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냉전'체제의 밑그림이 그려진 것이었다. 이 논문의 역사적인 의미는 바로 이 점에 있었다. 나중에 결국 알려진 이 논문의 필자는 당시 국무성 기획국장이었던 조니 케넌(George Forst Kennan, 1904-)이었다. 그는 당시 소련이 펼치고 있던 팽창정책에 대항하여 미국도 '소련을 봉쇄하는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양국은 군비증강을 통해 군사적으로 대립하는 양극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이 곧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기묘한 대립체제가 되었다. 평화도 아니고 전쟁도 아닌 이상한 군사대결이었다. 이러한 구조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이렇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승전국인 연합국은 또다시 전후처리를 도맡게 되었다. 이때의 주역은 미국과 소련이었다. 미국은 이전까지의 고립적인 대외정책을 버리고 세계의 변화에 책임감을 갖고 대처하기로 했다. 세계가 이제는 너무나 축소되어서 각국만의 문제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자유무역제도를 세계적인 규모로 확대하고 싶었다. 미국은 자유무역제도만이 미국의 경제력을 무제한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위치는 바로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서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소련봉쇄'정책을 추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은 경제적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미국은 마샬플랜으로 알려진 경제원조를 했다. 미국이 이때 유럽에 제공한 약 120억 달러의 경제원조를 밑바탕으로 하여 서유럽경제는 급속히 회복되었고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이룩하여 결국 공산세력의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한편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의 팽창에 온 노력을 다했다. 자본주의 국가로 둘러싸여 있는 그 당시 현실에서 공산주의가 살아 남는 길은 일단 자신들의 군비를 확장하고 미국의 자본주의체제를 막는 방파제를 만드는 일이었다. 스탈린이 말했듯이 '전쟁준비만이 예측할 수 없는 사태에 대비해서 소련의 안정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세계 각국, 특히 주변국가들을 사회주의화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철의 장막'이다. 이러한 양 진영의 대립이 냉전의 양상을 띠게 된 것은 핵무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로 인해 미, 소를 중심으로 한 동, 서 양 진영은 직접적인 충돌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핵전쟁이 일어나면 어느 쪽도 승리할 수 없다는 자각이 전쟁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기울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평화도 전쟁도 아닌 묘한 대결만이 남게 되었다. 이데올로기나 사회구조상 서로 대립하면서 적대적인 군사적 대치 상태에 이르렀지만 핵무기 소유로 인해 직접적인 전쟁은 회피하는 긴장상태로 남아있게 되었던 것이다. 냉전이라는 말은 원래 버루크안(소련이 원자폭탄을 생산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원자탄의 관리권을 국제연합에 주자는 안)으로 알려진 미국의 버나드 버루크가 1947년 4월 16일 연설에서 "여러분 속지 맙시다. 우리는 지금 냉전의 과정에 있습니다."고 말한 것이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 그 진위 여부야 어떻든 간에 그후 미국의 평론가인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 1889-1974)이 이 말을 신문이나 그의 저서에 많이 인용함으로써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그는 "냉전"이라는 저서에서 캐넌의 논문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소련을 봉쇄함으로써 내부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안이한 생각일 뿐 아니라, 봉쇄해 놓고 상대방이 나오면 이를 때리겠다는 생각은 외교상의 주도권을 소련에 넘겨 주는 결과가 되어 미국은 언제나 그 뒷다리를 긁는 위치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어찌되었든 냉전 체제는 소련의 해체로 인해 끝이 났다. 양축 가운데 한 축이 사라지자 냉전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던 것이다. 그러나 냉전구조는 핵무기의 위험이 상존하는 한 언제든지 새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비록 직접적인 전쟁의 회피라는 차원에서 보면 다행스러울지 모르지만 영구적인 평화의 길이 아니라, 칼날 위에 선평화라는 점에서 위태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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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남자는 단지 디저트일 뿐!
나는 부부의 형태, 즉 여성이 남성을 '메인코스'로 삼는 과정을 매우 잘 알고 있다. 나 자신이 일찍이 그렇게 해 왔으므로. 나는 14살 때 한 소년과 만났다. 결혼 상대자는 그밖에 없다고 마음먹었다. 그가 대학에 재학하던 4년 동안 매일 편지를 썼고, 내가 그에게 필요한 사람임을 잊지 않도록 했다. 마음은 항상 1,500마일 저편의 그의 곁으로 날아가 있었다. 결국 그는 둘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든지 나와 결혼하든지... 그는 나와 결혼했다. 그는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한편 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린 자녀를 양육했다. 생각해 보면 25년에 이르는 결혼생활의 초기에 우리 부부는 상대에게 성장할 기회를 주는 일이 없었다. 그와 맺어졌다고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그 사람 쪽에서는 내게 상처를 줄까 두려워, 내가 그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다행히도 그의 의학 연구가 어느 사이엔가 우리들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두게 하였기 때문에, 나는 싫어도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그것은 그다지 큰 부담이 아니었고 불행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계속해서 걷고 끊임없이 전진했기 때문이다. 굳이 박사학위를 따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단지 가능하면 끝마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을 가지고 있었고, 두 명의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 일을 가지고 있었고, 두 명의 박사학위를 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학교 따위는 그만두어라. 남편을 부양할 생각이나? 누가 아이를 보살펴 줄 거냐?고 말씀하셨다. 남편도 이견이 분명하지 않았으며, 이번에는 철학을 수강한다고 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런데 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결혼한 여성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과거와 인연을 끊고 지금까지의 습관을 바꾸는 일은 어렵지만,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독신여성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자기가 훌륭한 남성에게 어울리는 여성이고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결혼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를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고. 자기 자신을 '메인코스'로 삼고, 남성은 '단순한 디저트'로 생각하라. 디저트를 주식으로 삼고 살 수는 없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자립한 후에 천천히 디저트 테이블에 앉아서 그 중의 하나를 택하는 즐거움 내지 해방감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하지만 자기 인생을 스스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의 남성을 얻는 포상보다 한층 더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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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앉아서 세종의 술잔을 받은 최윤덕
최윤덕(1376-1445)의 본관은 통천이고, 자는 여화이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 운해는 국경을 지키러 나가고 집에 없었다. 최윤덕은 그 이웃 동네 양수척(무자리:사냥과고리를 걸어 파는 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의 집에서 길러졌다. 그는 차츰 자라면서 힘이 세고 활쏘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어느 날 목우산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윤덕이 즉시 달려가서 화살 하나로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양수척이 윤덕을 데리고 그의 아버지가 있는 합포진으로 갔다. 운해에게 윤덕의 재능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자 운해가 "한번 시험해 보리라" 하고 사냥을 시켰는데, 달리면서 좌우로 쏘는 족족 다 맞추었다. 아버지 운해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의 손이 제법 빠르긴 하지만 아직 법도를 전연 모르는구나. 네가 보인 솜씨는 하찮은 재주일 뿐이다"
아버지는 그 길로 아들에게 병법을 가르쳐 드디어 명장으로 만들었다. 세종 원년(1419)에 이종무와 함께 주사(해군)를 거느리고 대마도에 들어온 왜군을 토벌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전과가 보고 되자 세종은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그를 우찬성 겸 평안도 절제사 및 안주목사를 겸직하게 하였다. 그는 공무가 끝나는 여가여가로 관청 뒤 빈 땅에 손수 채소를 가꾸었다. 어느 날 채소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소송을 하러 온 백성 하나가 그가 목사인 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향해 "지금 사또께서 어디 계시오?" 하니, 윤덕이 시치미를 떼고 "지금 관청에 있소" 하고 재빨리 가서 관복으로 갈아 입고 그 소송을 처리하였다. 어느 날 부인 한 사람이 울면서 고하였다.
"지난 밤에 호랑이가 제 남편을 물어 죽였습니다" "내가 너의 남편 원수를 갚아 주마"
최윤덕은 호랑이를 쏘아 죽여 그 배를 가르고 뱃속에 있는 뼈를 거두어 의복으로 싸서 관속에 넣어 주었다. 그 부인은 감사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여진족 이만주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세종 임금이 최윤덕을 보내어 정벌하도록 하니, 최윤덕이 크게 승리하고 돌아왔다. 세종은 근정전에서 최윤덕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잔치를 베풀고 직접 최윤덕에게 술을 권했으며, 또 세자에게도 술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윤덕이 일어나서 잔을 받으려고 하니 임금은 일어나지 말고 앉아서 받으라고 하였다. 세종이 군관에게 춤을 추라고 하자 술에 취한 윤덕이 일어나서 그 군관과 함께 춤을 추었다.
경원부사 송희미가 군법에 걸려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윤덕은 송희미와 친구 사이였다. 윤덕은 그를 위하여 술상을 차리고 술을 권하면서 위로하였다.
"상심하지 말게. 법은 피할 수 없네 우리 인생은 한번은 죽어야 하네. 나 또한 죽어서 그대 뒤를 따르겠네"
벼슬은 영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렬이다.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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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
베로니카의 수건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처형의 언덕을 향해 가는 도중 군중들 사이에서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달려나와 그리스도에게 수건을 내밀었다. 그리스도는 그 수건을 받아 피로 물든 얼굴을 닦은 다음 그 수건에 자기 모습을 옮겨서 되돌려 주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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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지혜/처세 |
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쌀을 받아 가시오
하이쿠(일본의 단형시)의 작가로서도 이름 높았던 오와리의 이노우에 시로는 당시 전국에 이름을 떨치는 명의였다. 배포가 커서 많은 기행과 갖가지 색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이 일화도 그 중 하나다.
어느 날 겐추사의 화상이 중병에 걸렸는데. 용하다는 의사가 수없이 드나 들어도 차도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시로가 치료하였는데, 그것이 효력이 있어 화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겐추사는 오와리 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영묘로 지어진, 부에서 으뜸가는 큰 절로 세력이 대단했다. 병이 완쾌된 것을 크게 기뻐한 화상은 막대한 사례금을 보냈다. 그러나 시로는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건 너무 과분한데요."
심부름 왔던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돌아갔는데 곧 다시 찾아와서 애원했다.
"화상님이 꼭 드리고 오라고 해서 다시 찾아왔습니다. 만약 받지 않으시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제발 저를 도와주신다 생각하시고 받아 주십시오." 시로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물었다. "할 수 없군요. 그렇다면 제가 받은 액수를 사람들에게 알려도 상관없겠습니까?" "그건 뜻대로 하십시오."
굳이 비밀로 할 필요가 없어서 심부름 온 사람은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하고 돌아갔다. 그러자 시로는 곧 집앞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서 붙였다. '이번에 겐추사에서 이렇게 많은 사례금을 받았는데, 내가 갖기에는 너무 과분하다. 세상에는 어려운 사람이 많으니 이 돈을 전부 쌀로 바꿔서 나눠주고 싶다. 받고 싶은 사람은 며칠 몇 시까지 찾아와 주기 바란다.' 쌀을 나눠주겠다는 날이 되자 시로는 집 문 앞은 밀치락달치락하는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시로도 직접 그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서 쌀 나눠주는 것을 도와주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열 명이면 열 명 모두 엄격하게 평가하면서도 자기를 평가할 때는 좀처럼 같은 척도로 하지 못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실질적인 가치는 5밖에 없는데도 10의 가치를 매기고 싶어한다. 가치를 갑절로 매기고도 태연해 한다. 자기 과신도 여기에 이르면 애교로 봐 주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나 잘 생각하면 우리는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짓을 한다. 특히 위의 일화와 같이 다른 의사가 모두 가망이 없다고 포기한 환자를 치료하여 완쾌시킬 정도라면 누가 보기에도 대단한 의술이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쉽게 자만에 빠지고 거만하게 어깨에 힘을 주고 뽐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로는 단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면 담담하고 태연한 태도를 취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것은 얼핏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지극히 어려운 경지다. 그런 경지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스로 사례금을 과분하다고 거절하고, 억지로 떠맡기니까 어려운 사람에게 송두리째 나누어주는 애정을 물 흐르듯이 베푸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자신을 과대평가 하는 경향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 일화는 따끔한 채찍이 되어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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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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