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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88 호
단기 4340. 5. 29 (음력 4.1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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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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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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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매순간을 잘 감시하라. 이는 제가 가져온 것보다많은 것을 가지고 살금살금 빠져 달아나는 도둑과 같은 것. / 존 업다이크 (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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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七十七章 (노자 - 도덕경 : 제7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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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之道, 其猶張弓與, 高者抑之, 下者擧之, 有餘者損之, 不足者補之, 天之道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孰能有餘以奉天下, 唯有道者, 是以聖人爲而不恃,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
천지도, 기유장궁여, 고자억지, 하자거지, 유여자손지, 부족자보지, 천지도손유여이보부족, 인지도칙불연, 손부족이봉유여, 숙능유여이봉천하, 유유도자, 시이성인위이불시, 공성이불처, 기불욕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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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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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일곱째 장
직역
하늘의 도는 활을 당기는 것과 같다. 높은 것을 억누르고, 아래것을 들어 올린다. 남음이 있는 것을 덜어 내고, 부족한 곳을 보충한다. 하늘의 도는 남는 것을 덜어내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것이다. 사람의 도는 즉 그러하지 않다. 부족한 것을 덜어내어서 남는 것을 받든다. 누가 능히 남음으로써 하늘 아래 받들어 지는가. 오직 도가 있는 자 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행하되 기대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 져도 자리 잡지 않는다. 그 슬기로움이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해석
활을 당기면 위에 실이 묶여 있는 부분은 아래로 내려온다. 그리고 아랫 부분은 위로 올라온다. 그래야 활이 나간다. 이것이 하늘의 도이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 그래서 부족한 곳을 채운다. 자연계는 모두 이와 같다. 그러나 인간은 이렇지 않다. 가진곳으로 높은 곳으로 모든 것이 몰려간다. 이제는 돈이 돈을 번다. 거대 자본이 있는 곳으로 작은 소자본들은 모여든다. 자연의 법칙과는 완전히 상반된 행위이다.
바다는 넘치면서도 더욱 모여든다. 이것은 도에 있는 자이다. 그는 스스로 낯춘다. 바다와 같다. 바다는 남음이 있지만 강물들이 계속 모여든다. 그 이유는 낮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기 때문이다. 바다는 수증기를 하늘로 보낸다. 그래서 비가 오게한다. 바다가 수증기를 뿌리지 않는다면 모든 육지는 마르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강물도 마르고, 강물로 살아가는 바다도 마르게 된다. 바다는 하늘에 수증기를 주기 때문에 낮게 처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낮은 것은 가장 높은 것과 서로 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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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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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하늘의 이법은 활을 메우는 것과 같은 것인가. 높은 데를 억누르고, 낮은 데를 올려 주며 남은 부분은 덜어내어 부족한 부분에 채워 준다. 하늘의 이법은 이와 같이 남은 것을 덜어내어 모자라는 것에 보태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는 일은 이것과 달라 모자라는 사람의 것을 덜어내어 넉넉한 사람에게 보태어 주는 것이다. 자신의 남은 것으로 이 세상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오직 도를 체득한 성인만이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일을 하고 나서도 자랑하지 않으며, 공을 이루고 나서도 자부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탁월함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주
공성이불처: 공을 이루고나서도 자신의 것으로 자부하지 않는다는 뜻임. 역경에도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겸괘 93의 효사에는 노고 하면서도 겸손하다. 군자에게는 끝까지 길한 일이 있을 것이다. 공자는 말하기를 노고 하여도 자랑하지 않고 큰공을 세우고도 자신의 덕으로 자만하지 않으니, 독실한 마음가짐의 극치인 것이다. 이것은 큰 공을 세우고도 남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이른 말이다. 겸손의 미덕을 강조함에 있어 노자와 역경은 그 발상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기불욕현현: 자신의 탁월함과 훌륭한 점을 나타내고자 하지 않는다는 뜻임. 현은 현과 같음.
해
하늘의 섭리는 넉넉한 것을 덜어내어 부족한 것에 보태어 준다. 그것은 언제나 만물을 평등하게 대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행위는 이것과는 딴판이다. 가난한 백성의 재물을 갖가지 명목으로 빼앗아서 위정자의 사치와 향락에 쓰이게 한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진다. 이와 같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신의 남은 것을 덜어내어 천하의 만백성에게 보태어 줄 사람이 있겠는가. 이 일은 오로지 성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언제나 겸허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세운 공을 내세우거나 자신의 탁월함을 나타내고자 하지 않는다. 도를 터득한 그는 하늘의 섭리를 인간 사회에 실행해 보이는 것이다. 이 장 역시 하늘의 섭리의 공평무사함에 대한 찬양과 인간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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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1. 형성, 확립기/남북국 시대-고려 중기
2. 불교
3. 의상 및 기타
의상은 우리 나라 화엄종의 개창자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중국에 유학하여 중국 화엄종의 2대조인 지엄의 문하에서 중국 화엄종의 대성자인 법장과 함께 수학하고 671년에 귀국하였다. 고려 때의 승려인 체원의 기록에 따르면 지엄은 의상에게는 의지라는 호를 주고 법장에게는 문지라는 호를 주었다고 한다. 지엄의 대표적인 제자 두 사람 중의 하나가 의상이었다는 것을 이 전승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의상이 지엄의 뛰어난 제자이면서 법장의 선배로서 법장의 사상에도 영향을 끼치는 한편 법장 또한 그를 높이 존경하였음은 법장의 "화엄오교장" 등의 저술 및 법장이 의상에게 보낸 편지 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의상의 저술은 "화엄일승법계도"와 "백화도량발원문"이 현재 전해지고 있는데, 후대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그의 화엄 사상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화엄일승법계도"이다. 이는 7언어 30구 210자로 된 시로 네모꼴 도인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발문에 보면 " "화엄경"과 "십지경론"에 의해 원교의 종지를 나타낸 것"이라 한다. 화엄 사상을 총정리하여 수행의 강요서를 만들려고 한 저작이었다. 의상의 화엄에 대한 뛰어난 이해와 실천을 중시하는 그의 사상적 경향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저작은 중국이나 한국의 화엄 사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의상은 국가의 후원을 받아 부석사 등의 사찰을 세우고 화엄 사상을 널리 전파하였다. 그에게는 표훈 등의 십대 제자가 있었다고 전해져 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고, 이로써 화엄종은 신라 불교에서 가장 대표적인 종파가 되었다. 후기 신라에서 융성했던 또 하나의 학파는 유식학 계통이었다. 앞서 말한 원측의 유식학은 그것을 계승한 도증이 귀국하여 신라에 전하였다. 도증의 뒤를 이은 태현은 "성유식론학기" 등의 저술로 유명한 뛰어난 유식학자였다. 그 밖에 경흥도 다양한 저술을 하며 한 종파에 머물지는 않았지만 유식을 중심으로 한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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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갈등
본뜻 : 칡과 등나무가 얽히듯이 까다롭게 뒤엉켜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바뀐 뜻 : 일이나 인간 관계가 까다롭게 뒤얽혀 풀기 어려운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혹은개인의 정신 내부에서 두 가지 반대되는 생각이 벌이는 충돌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보기글" -그 두 사람 사이엔 항상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갈등으로 요즘의 내 마음은 잠잠할 날이 없다
감로수
본뜻 : 불교에서 나온 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육욕천의 둘째 하늘인 도리천에 있는 달콤하고 신령스런 액체를 '감로'라 한다. 이 액체는 한 방울만 마셔도 온갖 괴로움이 사라지고,살아 있는 사람은 오래 살 수 있고, 죽은 이는 부활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불사주로도 일컬어진다 때로는 부처의 교법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인다.
바뀐 뜻 : 일반적으로 맛이 썩 좋은 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보기글" -야, 감로수가 따로 없이 바로 이 가야동 계곡 물이 감로수네 그려! -댁의 우물물은 시원하고 단 것이 마치 감로수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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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신은 죽었다
1943년 히틀러는 뭇솔리니가 방문했을 때, 그에게 정성껏 제본한 전집 한 질을 증정하면서 이탈리아가 연합국측에 패배한 것을 위로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니체 전집이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9100)가 이렇듯 파시스트들의 숭배를 받은 것은 그의 사상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런 연유로 해서 사람들은 니체가 제1차, 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대한 일단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러한 혐의를 많이 벗었지만, 그래도 그의 사상을 위험스럽게 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그가 파시스트들의 숭배자가 된 것은 한 마디로 그가 '망치를 든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구래의 모든 가치를 가차없이 부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가치와 이상을 수립하고자 했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새로운 창조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나 일체의 가치를 그 뿌리로부터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파괴자라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특히 과거 서구의 전통인 기독교를 완전히 부정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란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원래의 가치가 전도된 가치이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신의 개념은 병들어 있는 신의 뜻이다. 이렇게 모든 기존 가치를 부정한다는 것을 그는 한 마디로 말했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 인간은 허무상태에 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초인을 등장시켰다. "모든 신들은 죽었다. 바야흐로 우리는 '초인'이 살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면 초인이란 무엇인가? 초인은 일단 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자이다. 니체의 말대로 한다면 '선과 악을 초월해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선과 악은 인간을 기만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이고 영원불멸한 선과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선과 악 이란 진정한 의미의 선이나 진정한 의미의 악이 아니다. 말하자면 선과 악은 약한 사람이 핑계거리로 생각해 낸 도구인 셈이다. 합리성과 이성을 파괴하고 의지를 중시한 이러한 사상은 그 당시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이용되었다. 니체의 사상은 국가주의의 정치가나 산업 자본가 가운데 있는 초인들의 행동을 설명하고 찬양하는 데 이용되었고 초자연적인 종교나 관습적인 도덕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니체의 스승이었던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철학이 제1차 세계대전의 길을 쉽게 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낳은 니체의 생애 자체가 기존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그는 한때 바그너를 숭배하다시피 했지만, 그가 기독교의 십자가 앞에 스스로 굴복했다는 이유로 해서 그와 단교했다. 이런 경향 때문에 그는 항상 혼자였다. 니체가 루 살로메에게 구애했을 때에도 그녀는 릴케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이러한 고독 속의 니체를 지켜 준 것은 그의 누이 엘리자베트 니체였다. 어머니와 누이의 보살핌 속에서 니체는 12년 동안을 혼수상태에서 헤매다가 1900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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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일단 행동을 시작하면 망설임은 사라진다.
이상적인 결혼생활이란 두 사람이 서로 끌리고 있으며, 왜 끌리는지를 알고 있어서 서로 필요를 잃지 않도록 늘 노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두사람은 상대에게 설득 당하지 않고 함께 성숙하는 한 사람의 인간이다. 부부란 서로 일체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남녀의 역할이 분명히 나누어져 있는 상태에서 일심동체를 지향한다면 한쪽은 상대에게 점점 작은 존재로 비쳐질 것이며, 결코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려고 하는 이상 어느 한 쪽은 자기다음을 잃어야만 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결혼하려 하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자기의 인생을 서로 나누어 갖기 위해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단지 어린애처럼 보살핌을 받기 위해서인가? 존경할 만한 사람과 공동의 목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자기 대신 상대가 목표를 달성해 주길 바라서인가? 주위의 기대 때문에 어쩔 수 없어서, 즉 결혼 그 자체가 목표였던 것인가? 이제라도 한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뎌 보자. 과거의 일은 이미 어쩔 수 없다. 기록된 역사를 다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일을 위해서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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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의 황희
황희(1363-1452)의 본관은 장수이고, 자는 구부, 초명은 수로, 호는 방촌이다. 고려 우왕 기사년(1389)에 문과에 급제한 조선의 이름난 재상이다. 시호는 익성이고, 죽은 뒤에 세종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그는 나라일에만 힘을 기울이고 집안 일은 돌보지 않았다. 어느 날 집안에 있는 여종들이 서로 싸우다가 한 여종이 와서 호소하였다.
"저 계집종과 다투었는데 저 계집종은 매우 간악합니다" "네 말이 맞다"
이번에는 다른 계집종이 와서 역시 이 계집종이 나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네 말이 맞다"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카가 못마땅한 말투로 말하였다.
"아저씨의 흐리멍텅함이 너무도 심합니다. 이 아이는 이렇게 말하고 저 아이는 저렇게 말했으니, 이 아이가 옳고 저 아이는 옳지 못합니다"
그는 역시 이렇게 대답했다.
"네 말도 맞다"
황희는 때도 없이 글을 읽되 결코 자리를 구분하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밭에서 일하다가 왕명을 받고 궁궐에 들어갔는데, 쓰고 있던 삿갓과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입궐하였으므로 행색이 매우 초라하였다. 태종이 세종에게 위촉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런 사람이 있어야한다"며 즉시 예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그는 정승으로 30년 동안 있으면서 이미 있는 제도를 힘써 따랐고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일을 처리할 때는 순리를 따랐고 도량이 넓어서 일을 처리함에 대신의 체모를 잃지 않았다. 세종도 그 사려 깊은 행동과 신중한 일처리를 늘 칭찬하였다. 어쩌다가 옛 제도를 변경할 경우에는 반드시 이렇게 말했다.
"신은 임기응변의 재주가 없어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일은 감히 논의할 수가 없나이다"
그는 이론이 공평하고 항상 일처리가 너그러웠지만 큰일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시비를 가리는 데 과감하여 아무도 그의 뜻을 꺾지 못하였다. 벼슬을 내놓은 뒤에도 국가에 일이 있으면 반드시 황희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은 뒤에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90세의 나이에도 총명한 머리가 감퇴되지 않고 모든 제도와 문헌을 환하게 기억하고 있었으며, 도량이 너그러워 감정을 좀처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의 평소 생활을 보면 자손들과 종의 아이들이 항상 모여 시끄럽게 하여도 그것을 금지하는 일이 없었으며, 어떤 때는 아이들이 수염을 당기고 볼을 때려도 그대로 다 받아 주었다. 한번은 낮은 관리 하나를 옆에 두고 붓에 먹을 적셔 편지를 쓰는데 남자종 아이가 그 서류 위에 오줌을 쌌다. 그래도 그는 화를 내지 않고 그 오줌을 말없이 닦아 냈다. 하루는 여자종이 반찬을 들고 공에게 기대서서 관리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술상을 내오리까?" "천천히 차리거라" 비스듬히 서 있던 여종은 불손하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왜 그리 늦지요?" 할 수 없이 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차려 내라"
술상이 나오자 남루한 옷과 맨발로 아이들이 몰려들어 공의 옷을 밟고 깔고 앉아 그 반찬을 손으로 다 집어먹고 어떤 아이는 손으로 공을 툭툭 치기도 하였지만 공은 "아이고 아프다. 아이고 아프다" 할 뿐이고 아이들을 꾸짖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대부분 종의 아이들이었다. 밥을 먹을 때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면 공은 아이들에게 밥을 나누어 주곤 하였다. 종들이 간혹 잘못을 저질러도 매를 치는 일이 없으며 종들도 사람인데 학대하면 안 된다고 늘 말하였다. 뜰 앞에 붉게 익은 복숭아를 이웃 아이들이 와서 따먹으면 공은 부드러운 소리로 아이들을 타일렀다.
"애들아, 다 따지는 말아라. 나도 맛은 봐야지"
조금 후에 나가 보니 복숭아는 하나도 없었다. 한번은 정원을 거닐고 있는데 이웃 아이가 돌을 던져서 잘 익은 배가 땅에 가득 떨어졌다. 공이 소리쳐 종을 부르자 돌을 던진 아이는 담밖으로 도망쳐서 몰래 엿듣고 있었다. 종이 오자 그에게 떨어진 배를 주워 도망친 아이에게 주라고 하고 나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공이 여러 재상들과 함께 공무를 보았는데 당시 김종서는 공조 판서였다. 그가 공조의 관원들을 시켜 술상을 차려 와서 대접을 하자 공이 벌컥 화를 냈다. 공은 공조 판서 김종서를 앞에 불러 준엄하게 꾸짖었다.
"국가가 예빈시를 정부 옆에 두는 것은 정승들을 위해서이다. 만약 우리 정승들이 배가 고프면 예빈시를 시켜 준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어찌하여 공조가 이 음식을 차리느냐?"
정승 김극성이 이 일을 경연석에서 임금께 아뢰니, 세종은 "대신이면 마땅히 그래야만 백관을 통솔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황희 또한 김종서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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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
베니스의 상인
피도 눈물도 없이 돈만 긁어모으는 고리대금 업자를 보고 흔히 '저 녀석은 샤일록 같은 놈이다'하고 빈정댄다. 이처럼 악독한 고리대금업자의 대명사가 된 '샤일록'은 영국의 극작가 '세익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 (1597)에 나오는 유태인 고리대금업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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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어떤 난봉꾼
엄격한 리얼리즘을 추구하여 19세기 프랑스 화단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한 드가. 젊었을 때의 그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파리의 경마장을 열심히 드나들고, 메일 밤 오페라 극장에 나타나 분장실을 얼쩡거리는, 누가 보기에도 천박한 난봉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즐기기 위해 경마장이나 오페라 극장을 나다닌 것이 아니었다. 무대에 선 무용수나 달리는 말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들의 순간적인 동작에 화가로서 흥미를 갖고 , 그것에서 여러 가지 모티프를 얻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경주마를 즐겨 그렸는데, 기존의 화가나 조각가처럼 달리는 말의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내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경마장에 40대의 카메라를 세워 말이 지나갈 때 자동적으로 셔터가 눌리게끔 해 두고, 기계를 통해 순간순간 말의 정확한 움직임을 확인했다. 그 결과 그의 그림은 달리는 말의 모습을 잘못 그리던 기존 화가들의 오류를 바로잡고, 화폭에 생생한 박진감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좀 길지만 플로베르의 말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나타내는 단어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을 살리는 것은 하나의 동사밖에 없다. 그것을 형용하는 것은 하나의 형용사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단어를 그 동사를 그 형용사를 발견할 때까지 찾아야 한다.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적당한 것으로 만족하거나 교묘하게 말해서 속이거나 말의 요술을 부려서 바꿔쳐서는 절대로 안 된다."
문학에서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작가는 단 하나밖에 없는 단어를, 동사를, 형용사를 찾아 피투성이가 되도록 몸부림친다. 그것을 찾기 위한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마침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다. 작가는 글을 쓰는 일이 직업이니 적당하게 속이거나 교묘하게 요술을 사용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는 높은 예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회화의 세계에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비록 천박한 난봉꾼이라거나 40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말을 찍어 때는 촬영이 헛 껍데기 허세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쏟아지더라도, 그런 것은 둘째 문제일 뿐이다. 빠르게 움직이는 무용수나 질주하는 말의 생태를 올바르게 포착하려면 그럼 비난이나 비방을 초월한 뼈를 깎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 자신이 항상 내부적으로 타오르는 예술에 대한 정열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동시에, 좀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세속의 손가락질을 뛰어넘는 용기가 늠름하게 넘쳐흘러야 한다. 화폭에 새로운 박진감을 담아 일세를 풍미한 드가의 이 조그만 일화는 언제든지 안이하게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를 엄하게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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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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