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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80 호
단기 4340. 5. 16 (음력 03.3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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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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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14회 실천문학 신인상 작품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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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마치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것이 칭찬인 경우도있다. 그것은 당신이 다른 사람의 생활 속에 편안하고 신뢰감을 주는 요소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조이스 브라더스 (미 여류심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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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六十九章 (노자 - 도덕경 : 제6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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用兵有言, 吾不敢爲主而爲客, 不敢進寸而退尺, 是謂行無行, 攘無臂, 잉無敵, 執無兵, 禍莫大於輕敵, 輕敵幾喪吾寶, 故抗兵相加, 哀者勝矣.
용병유언, 오불감위주이위객, 불감진촌이퇴척, 시위행무행, 양무비, 잉무적, 집무병, 화막대어경적, 경적기상오보, 고항병상가, 애자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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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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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아홉째 장
직역
병사를 쓰는데 이런 말이 있다. 나는 감히 주인이 될려고 하지 않고 객이 될려고 한다. 감히 촌보를 나가려 하지 않고 한 척을 물러날려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감이 없는 감이오, 팔이 없이 치고, 병기 없이 잡고, 이에 적이 없게 된다. 화는 적을 가벼이 여기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적을 가벼이 여기면 거의가 자신의 보물을 잃게된다. 그러므로 싸우는 병력이 서로 비슷할 때는 슬퍼하는 자가 이긴다.
해석
객은 그 집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제 삼자의 입장에 서야 적과 나를 비교할 수 있다. 적과 나를 동등한 위치에서 놓고 볼 수 있기 위해서는 객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이길려고 성급히 나가지 않는다. 싸움은 희생을 부를 뿐이다. 이기는 것은 자신의 병력이 적게 희생하는 것이다. 이김만 생각하고 자신의 병력을 많이 희생하는 것은 결국 지는 것이다. 적의 병사가 모두 죽고 자신의 병사도 거의 죽었다면 승리는 누가 한 것인가. 자신의 병사와 자기는 이긴 것이 아니다. 살아 남았을 뿐이다. 전쟁은 싸워서 적을 많이 죽이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를 적에게 관철 시키는데 있다. 살육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병력이 희생하는 것을 애통이 여기는 사람이 이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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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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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용병술에 대하여 이런 말이 있다. '나는 감히 전쟁의 주동자가 되지 아니하고 피동자가 되겠다. 감히 한치를 나아가기보다는 한자씩 물러나겠다.' 이와 같은 것을 가르켜 행군을 하지만 행군을 하지 않는 듯하고, 소매를 걷어붙이지 않으니 팔이 없는 듯하고, 치고 들어가지 않으니 적이 없는 듯하며, 무기를 잡아도 잡지 않은 듯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적을 업신여기는 것보다 더 큰 화근은 없다. 적을 업신여기면 나의 삼보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군사를 일으켜 싸우게 될 때는 싸움을 슬프게 여기는 쪽이 이기게 된다.
주
주: 주동자, 전쟁 주동자. 객: 마지못해 싸우는 응전자, 전쟁의 피동자. 행: 행군 . 행무행: 마지못해 싸움터에 나아가기 때문에 행군을 하기는 해도 행군이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함. 잉: 치고 들어가는 것. 항병: 군사를 일으키는 것, 병력 동원. 상가: 서로 맞부딪쳐 싸우는 것. (왕필의 주석 참조)
해
노자는 이 장에서 전쟁의 주동자가 되지 말고 피동자가 되라고 역설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전쟁의 참상과 그 파괴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먼저 도발하는 것의 잘못을 지적한 말이다. 전쟁 도발이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는 없다. 다만 상대방의 침략으로 이쪽의 자위와 방어 목적에서만이 전쟁의 정당성은 인정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못해서 싸움터에 나가는 쪽은 먼저 적의 진영으로 쳐들어가는 일이 없으며, 무기를 잡아도 살상을 즐길 일이 없으므로 잡지 않는 것과 같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전투에 임하여 상대를 업신여기는 것은 큰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다. 상대를 업신여기면 그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하기 쉽다. 함부로 전쟁을 도발하는 것은 막대한 희생을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된다. 비록 나라가 크고 강하다고는 해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게 된다는 경고는 사실인 것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상대의 침략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싸우게 될 때에는 전쟁의 참상을 애통해 하는 쪽이 이기게 되는 것이다. 지도자가 이와 같은 자애로운 마음을 보여 준다면 그를 따르는 백성들과 병사들은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전 주의자요 평화주의자인 노자는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춘추 전국의 난세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활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전쟁의 참화일 것이다. 전쟁 도발을 규탄하는 노자의 지론에는 인간의 생명에 대한 외경이 짙게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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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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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부록
경천사 십층석탑 수난 전말
-1907년 대한매일신보 고발 및 논평 속보 전문
이 책 본문의 '경천사 십층석탑' 비화는, 1972년 당시(서울신문에 연재 집필할때)의 조사·취재 범위에서 그 탑이 1907년에 일본인 악당들에게 참담하게 당했던 수난의 내막을 밝힌 것이다. 고려시대의 그 걸작 대리석탑 약탈의 장본인은 1906년 12월에 한국에 특사로 왔던 당시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였다. 그러나 상세한 그 내막과 정확한 경위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가운데 1976년에 한국신문연구소가 영인본으로 발간한 대한매일신보(1904.8.∼1910.10.)의 1907년 3∼6월 지면에서 나는 여기에 전문을 전재하는 경천사탑 수난의 추적 고발기사와 그를 민족적으로 분개한 논설의 속보들을 감명 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보도는 일제의 한국 침략 가속화와 일본인 악한들의 무법적인 민족문화재 약탈 및 일본으로의 반출에 대한 엄숙한 항변이었고, 전체 한국인의 울분을 대변한 민족언론의 통렬한 고발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 와서도 한국인의 자존심을 충족시켜 준다. 그 당시에도 국내에서는 대한매일신보만이 그러한 항일 고발기사를 정면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는 당시 니로쿠신문과 만조보가 경천사탑의 일본으로의 불법반출 사실을 비판적으로 보도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의 언론들도 그 사건을 문제삼았던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음이 대한매일신보의 그 전재보도가 확인해주고 있다. 반면 당시 오사카 아사히신문은 한국 국왕이 다나카 특사에게 그 팁을 기증하여 일본에 가져오게 되었다고 다나카를 거짓보도를 하고 있었음도 대한매일신보에 밝혀져 있다. 한편 비운의 경천사 십층석탑이 당시 경기도 풍덕군의 절터에서 주민들을 총과 칼로 위협한 일본인 악당글에게 마구 해체되고 일본 헌병의 비호를 받으며 개성 기차역으로 불법반출되던 과정에거, 군수가 주민들과 함께 분노하여 그 만행을 끝까지 저지하려고 했으나 결국 불가항력이었던 당시 실정도 대한매일신보는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그 보도에는 경천사탑의 피탈 상황을 알고 있던 내부(내무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려 하지 않은 당시의 무력했던 정부 실정도 통분스럽게 드러나 있다.
본문에서 밝힌대로 다나카가 국내외가 범죄시한 여론과 조선총독부의 반환 요구에 굴복하여 하는 수 없이 서울로 되돌려 보낸 시기는 확실치는 않으나 1919년 무렵 일이었다. 그 탑재들은 원위치의 복원 조립이 불가능하게 부분적인 파손이 너무나 심했다. 때문에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쌓아놓은 채 방치되다가 해방 후 1960년에 경복궁 동쪽 건춘문 안에 억지로 복원 건립이 이루어져 국보 86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런대로 그위치에서 지난 35년간 위용을 빛냈던 경천사탑은 수년 전부터 착수된 경복궁 자체의 대대적인 복원계획 진행에 따라 1995년에 또다시 해체되어,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전문가들이 현재 탑재들의 참혹한 상처와 파괴된 부분을 새로이 최대한 보수하는 작업이 실시되고 있다. 이 작업은 여러 해 걸릴 예정이고, 앞으로의 재조립 위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신축·이전되는 용산의 박물관 경역으로 예정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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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시대별로 본 한국 철학
2. 고대의 사상/고조선--삼국 시대
3. 불교
승랑
승랑은 고구려 요동성 출신이라 하나 그 정확한 생존 연대는 알 수 없다. 중국 남조 제나라 말의 건무(494-497) 무렵에 하북에서 강남으로 내려왔다고 전하므로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활약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승랑은 후대에 삼론종의 중흥조로 기림을 받는다. 삼론종은 보통 5세기 초엽에 중관 학파의 저서를 구마라습이 번역하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이후로 연대가 오래되면서 거듭된 사회 경제적 혼란 등으로 인하여 관심을 집중하지 못한데다가 연구도 드물게 되면서 승랑의 시대에는 이 방면의 이해가 희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새롭게 삼론학의 교의를 연구하고 그것을 드높인 이가 승랑이다. 승랑은 당시에 유행하던 "성실론"을 공의 올바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사물을 계속 나누어 가면 결국 공과 같은 상태에 이르므로 모든 것이 공이라는 식으로 공을 설명하는 성실파를 공격하고 삼론학의 정통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이 삼론종은 승랑 이후로 승전을 거쳐 법랑에 이르고, 이 법맥을 다시 길장이 이어받아 대성하기에 이른다. 승랑이 초당사에 있을 때 주옹이라는 사람이 그에게서 삼론의 근본 사상을 배워 그것을 토대로 "삼론종"이라는 책을 써서 "이제는 중도를 체로 함"을 밝혔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의 체를 중도로 하는 승랑의 근본 사상을 "삼론종"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주옹이 승랑의 가르침을 받아 이 기록을 저술하였다는 사실은 길장이 그와 같이 전한 바에 따른 것인데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도 있다. 즉 "삼론종"은 승랑이 초당사에 오기 전에 씌어졌다는 주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길장이 사실을 틀리게 썼을 것 같지는 않으며 길장의 기록 외에 다른 결정적인 문헌이 없으므로, 우리는 주옹이 승랑에게서 삼론학을 배워 "삼론종"을 썼다는 길장의 기록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또 설령 승랑이 주옹의 "삼론종"의 내용을 직접 가르치지 않았다 하여도 "삼론종" 외에도 길장에 의해서 승랑의 학설이라고 인용되는 것이 많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의해서 승랑의 사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승랑의 삼론 관계 저술은 현재 전해지는 것이 없다. 삼론 계통이 아닌 저서로 승랑의 저술로 인정하기는 의문점이 없지 않은 "대반열반경집해"가 남아 있을 뿐이다. 승랑 사상의 특징은 이제를 가르침으로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이제는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깨달음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진제라고 하여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제의 체가 무엇이냐 하는 다양한 논의에 대하여 승랑이 중도가 이제의 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이다. 속제(세속적 일상적인 진리)와 진제(궁극적인 진리)의 두 제를 합론함으로써 중도를 밝히는 이른바 이제합명도설에 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삼중의 절차를 밟아 전개된다.
제일(초중): 속제--유를 설함 진제--무를 설함
제이(양중): 속제--유와 무가 둘임을 설함 진제--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 하여 유무가 둘이 아님을 설함
제삼(삼중): 속제--유와 무가 둘이 아니고 비유와 비무가 둘이 아님을 설함 진제--둘도 아니요 둘이 아닌 것도 아님을 설함
이것을 다시 설명하자면 첫째 단계는 세속적인 차원에서는 유를 진리로 보나 사실은 무가 진리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차원의 유가 아니고 무가 진리라고 가르치는 이유는 유에 집착을 버리게 하는 데 있는 것이지, 무 그 자체가 진리임을 말해서 거기에 집착하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속제와 진제를 말함으로써 집착을 버린 중도에 도달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또 이렇게 말하고 나면 사람들은 유무 모두에 매달리므로 유무 모두가 세속적인 진리일 뿐임을 말하는 것이 둘째 단계이다. 그리고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 하는 것이 전제가 되는 것이다. 이 또한 진제인 비유비무가 진리 그 자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셋째 단계로 올라가게 된다. 유무의 이나 비유비무의 불이를 통틀어 속제로 하고, 이도 아니고 불이도 아닌 것을 진제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승랑에서 시작된 '이제를 합쳐서 중도를 밝히는 방법'이다. 이제를 합쳐서 밝힘은 유와 공의 두 변을 떠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므로 중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생각해 보면 변이 있어야 중이 있으므로 변이 없다면 중 또한 없다. 그러므로 유무라고 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로 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나 부득이하여 중이라고 하는 것이다. 유무의 두 변을 멀리 떠나 중도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결국은 '무주'(머무르지 않음)라고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승랑은 무주로써 체중을 삼는 것이요, 이것이 그의 이제합명중도설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제는 용이 되고 중도는 체가 된다. 결국 승랑의 사상은 유의 사상과 논파함과 동시에 공만을 고집하는 사상도 배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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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십상이다
본뜻 : 십성은 본래 황금의 품질을 십등분 했을 때 첫째 등급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주 훌륭한 물건이나 어떤 일이 썩 잘 된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본래는 훌륭한 물건을 가리키는 명사였으나 일반적으로 쓰일 때는 꼭 들어맞는다. 썩 잘 어울린다, 마침 제격이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보기글" -베트남처럼 수시로 비가 오는 나라에서는 일상복 겸용 우비가 십상이지 -김 군한테는 그렇게 땀흘리는 일이 십상이지 뭔가
아귀다툼
본뜻 : 아귀는 탐하고 질투하고 마음만을 가진 굶주린 귀신이다. 아귀에는 무려 36종이 있다고 하는데 그 모양새가 하나같이 끔찍하기만 하다. 일반적인 아귀의 형상은 대개 집채만한 몸에, 작은 입과 가늘고 긴 목구멍을 가지고 있어 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탐한다 이들은 만나기만 하면 음식물을 차지하기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기만 한다. 그 모습이 흡사 지옥도를 방불시키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워 대는 사람들을 가리켜 '아귀다툼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바뀐 뜻 : 처음에는 말다툼을 일컫는 속어로만 쓰였는데, 요즈음엔 먹을 것이나 그 밖의 이익을 위해서 죽을 듯이 싸우는 일을 일컫는다.
"보기글" -얼마 되지도 않는 공업발전기금을 타내기 위해서 중소기업들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딱 이것만 남았으니까 아귀다툼 하지 말고 사이좋게 나눠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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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오늘날의 큰 문제는 오직 철과 피로써 결정된다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는 융커 출신이었다. 융커란 독일의 대지주를 가리키는 말로 비스마르크가 평생토록 보수주의라는 딱지를 떼어낼 수 없었던 것도 이러한 가정환경때문인 탓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냉엄한 현실주의적 정치가이자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인물이었지만, 그에게는 '난폭자 비스마르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술과 싸움으로 시간을 보낸 대학시절도 있었다. 그 당시 그는 한 친구에게 "나는 최고의 건달이 되거나 프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편지를 써보내기도 했다. 비스마르크는 한평생 보수주의자였고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본받아 사회를 개혁하려는 자유주의에 대해 철저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1848년 혁명 때에도 그는 반혁명의 투사로 맹활약했다. 왕이 혁명파에게 양보했다는 말을 듣고 농민들을 모아 베를린으로 쳐들어가고자 했을 만큼 맹렬한 반혁명파였다. 프로이센 수상으로 임명되기 전 그는 한때 러시아 주재 대사를 지냈다. 그가 '철혈재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1862년 프로이센 수상으로 취임하고 난 후 그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통일을 위해서는 우선 군비를 확장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프로이센 의외는 이러한 군비확장에 반대하고 있었다. 당시 의회는 자유주의 세력인 진보당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이들 자유주의자들은 독일의 통일도 중요하지만 프로이센에 자유주의를 확립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군비확장에 동의하면 보수주의 세력이 강화되어 자유주의가 약화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의회의 주장을 무시하고 군비확장을 단행하고자 했다. 그는 수상으로 취임한 지 1주일 만인 1862년 9월 29일 의회의 예산심의회에서 "오늘날의 큰 문제는 오직 철과 피로써 결정된다."는 연설을 했던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의회가 비록 군비확장에 필요한 예산안을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무시하고 예산안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겠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프로이센에서 '헌법투쟁'으로 불려졌는데, 비스마르크가 결국 승리르 거두었다. 그런데 비스마르크가 보수주의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그를 현실주의적 정치가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는 융커 출신이었지만 항상 융커와 손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과감히 그들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제휴했던 적도 많았다. 또 자유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라살레라는 그 당시 유명한 사회주의자와의 타협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조약이나 선언이라는 것을 종이쪽처럼 여기기도 했다.
그는 철혈재상이라는 별칭에서 풍기는 인상처럼 끝까지 전쟁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1871년 이후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 이후 제1차 세계대전까지 근 반세기 동안은 유럽에 전혀 전쟁이 없었던 평화로운 시기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할 정도의 평화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그만큼 처참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시기의 평화가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이 기묘한 유럽의 평화를 주도했던 사마이 바로 비스마르크였다면 그 또한 어리둥절할 만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당시 막 통일을 성취한 독일이 다른 나라와 충돌할 만한 사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주위의 강대국을 억누르고 통일을 성취한 비스마르크는 독일제국의 취약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독일제국이 형식상 통일은 이루었지만 제대로 정비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비밀외교를 이용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특히 프랑스가 다른 나라와 결탁하여 독일에 보복을 해올까 두려워했다. 만약 프랑스가 러시아와 손을 잡기라도 한다면 독일은 동서 양쪽에서 전쟁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은 그가 재상으로 재임하던 1890년까지는 잘 지켜졌다. 그러나 그가 실각하고 나서 이러한 정책은 무시되었고 결국 프랑스와 러시아가 손을 잡게 되었으며 나중에 유럽의 균형이 깨지고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되었다. '철과 피'라는 말은 흔히 '피와 철'로 잘못 인용되는 수도 많은데, 그것은 이 말이 비스마르크에 대해 부정적인 비판을 할 때 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기수였던 카부르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유독 비스마르크에게만은 비판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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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로맨스는 로맨스일 뿐이다
로맨스는 주말여행이나 밀월여행, 그리고 남의 눈을 피해서 하는 데이트, 또 특별한 경우에 넌지시 주고받는 사랑의 표현으로는 근사하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이다. 로맨스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현실의 생활이나 지식, 삶의 목표를 등한히 하고 하루하루를 꿈속에서 보내면서, 한편으로는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상념으로 상대를 찾게 된다. 그 결과는? 함께 쓰러지는 것이다. 서로 상대를 지나치게 얽어매게 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나 사람으로서 성장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비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맨틱한 이상을 추구하는 행위는 터무니 없고 불건전한 생황을 반복하게 만든다. 그러한 이상의 추구를, 사랑의 발견한다는 목표와 혼돈하고 있는 경우는 더욱 많다. 로맨스에는 비현실적인 환상이 따라다니지만 사랑은 현실에 뿌리박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마음을 쓰기 위해서는 로맨스가 주는 저 숨막힐 듯한 흥분을 계속 느끼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것이 마음으로부터의 애정이라면, 격하게 감정을 폭발시키거나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생각을 하거나 눈물을 흘리면서 드라마틱하게 사랑을 호소하는 일 없이도 상대에 대한 생각을 풀어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랑과 로맨스의 차이를 열애중인 연인의 대사에서 살펴보자. 로맨티스트 당산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소. 다시 한 번 사랑한다고 말해 주오. 사랑하는 여성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살아 있다는 그 사실이에요.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나를 생각해 주는 그것이 나의 인생에는 참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로맨티스트 당신은 나의 전부요. 당신도 마찬가지겠지? 사랑하는 여성 당신과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해요. 로맨티스트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군. 나를 버린다면 뼈저린 고통을 느끼게 해줄 테야! 사랑하는 여성 우리 둘 사이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봐요. 이 관계를 끝내고 싶지 않아요. 로맨티스트의 대사가 자못 광적이고 자포자기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로맨티스트는 즉시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성의 가 없는 증거라고 말한다. 로맨스는 착각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로맨틱한 막간극을 연기하고 있는 지금의 두 사람이 그대로 앞으로의 두 사람의 모습이라고 로맨티스트는 믿는다. 한치의 허술함도 없이 몸치장을 하고, 몸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짜릿해질 만큼 매력적이고, 하나도 나무랄 데가 없는 두 사람으로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일이 계속될리는 만무하다.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사람은 현실 생활과 타협할 수밖에 없다. 정말로 원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로맨스'를 바라는 마음을 달래고 로맨틱하게 다가오는 상대를 객관적으로 차분히 바라보아야 한다. 정신적 쇼크와 경제적 좌절로 기분이 쳐져 있을 때 서로를 지탱해 주고, 갖가지 기쁨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은 '로맨스'가 아니라 '사랑'인 것이다. 제임스 라메이는 저서 <친밀한 사귐>에서 이렇게 말한다.
"상대에게 다해야 할 최대한의 의무는 단 하나, 서로 알게 된 시점보다 나빠진 상태에서 상대를 버리지 않을 것, 즉 자기와 알게 된 일이 상대에게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로맨스에 눈이 가려진 채 남성을 선택하면 결국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남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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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억울함을 참고 거위의 목숨을 살린 윤회
윤회(1380-1436)의 자는 청경이고, 호는 청향당이며, 본관은 무송이다. 젊은 시절에 시골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여관을 찾았으나, 여관 주인이 투숙을 허락하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뜰 밑에 앉아 있었다. 그때 주인집 아이가 큰 진주를 가지고 마당에서 놀다가 땅에 떨어뜨렸는데, 마침 곁에 있던 흰 거위가 그것을 삼켜 버렸다. 집주인이 진주를 찾다가 끝내 찾지 못하자, 윤회를 의심하고 그를 꽁꽁 묶어 놓았다. 이튿날 아침에 관가에 데리고 갈 작정이었다. 윤회는 변명 한마디 하지 않고 다만 주인에게 청하여 거위도 묶어서 자기 곁에 두도록 하였다. 이튿날 아침, 거위가 눈 똥 속에서 진주가 나왔다. 주인은 너무도 부끄러워 사과하고 나서 왜 어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윤회가 대답했다.
"만약 내가 어제 말했다면 당신은 저 거위의 배를 가르고 진주를 찾았을 것 아니오? 그래서 온갖 욕된 것을 참고 아침까지 가다린 것이오"
그의 벼슬은 병조 판서에 이르렀고, 문형(대제학의 별칭)을 관장하였다. 시호는 문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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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카스(Bachos)
술을 '바카스의 선물' 또는 그냥 '바카스'라고도 한다. 단 '바카스'는 희랍의 신이니까 이때의 술은 포도주를 가리킨다. '바카스'의 정식 이름은 '디오니소스' (Dionsos)로 주신 '제우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설에서 티바이의 공주 '세메레'라고 하나 소 아시아의 대지의 여신 '제메라'가 옳은 것 같다. '바카스' ('로마'에서는 Bacchus, '바카스'는 그 영어 발음)는 별명 혹은 통칭이며 '로마'에서는 '리베르'(Liber)라고도 한다. '리베르'는 '자유'의 뜻인데 술을 마시면 온갖 근심 걱정을 잊고 몸과 마음이 하나같이 자유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다. 본래는 곡물과 식물의 신이었는데 8세기경 희랍으로 건너오면서 포도 및 포도주와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희랍에는 포도와 함께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 연극은 희랍의 비극이나 희극이 모두 '아데나이'시에서 개최된 '디오니소스'는 형 '아폴로'와 함께 문예계를 다스리게 되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서양의 문예 사조를 '아폴론적인 적' 즉 명석한 이지적 요소와 '디오니소스적인 것' 즉 비합리적이며 격정적인 동향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모 제약회사에서 '드링크' 제의 이름에 '바카스'를 차용, 이것이 히트하여 요즘음 '바카스'가 '드링크'제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 '바카스'의 선물(술)에 곯아 떨어진 주객의 구미에는 '드링크'제 역시 '바카스'가 맞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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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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