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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77 호
단기 4340. 5. 10 (음력 03.2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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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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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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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떡갈나무가 넘어질 때는 온 숲 속에 그 넘어지는소리가 메아리치지만 수많은 도토리들은 미풍에 소리없이 떨어져 새로운 씨앗이된다. / 토머스 칼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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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六十六章 (노자 - 도덕경 : 제6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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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故能爲百谷王, 是以欲上民, 必以言下之, 欲先民, 必以身後之, 是以聖人處上而民不重, 處前而民不害, 是以天下樂推而不厭, 以其不爭, 故天下莫能與之爭.
강해소이능위백곡왕자, 이기선하지, 고능위백곡왕, 시이욕상민, 필이언하지, 욕선민, 필이신후지, 시이성인처상이민부중, 처전이민불해, 시이천하낙추이불염, 이기부쟁, 고천하막능여지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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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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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여섯째 장
직역
강과 바다가 능히 백개의 계곡의 왕이 되는 바가 있는 것은, 그들의 아래를 좋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백개의 계곡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백성의 위에 서고자 바란다면 반드시 말로써 그들의 아래에 있을 것이오. 백성에 앞서고자 바란다면 반드시 그 몸을 그들의 뒤에 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이 위에 있어도 백성이 무겁지 않고, 앞에 있어도 백성이 해롭지 않다. 이런 까닭에 하늘 아래가 즐겁게 밀면서도 싫어하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다투지 않으니, 그러므로 하늘 아래 능히 그와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해석
바다가 큰 이유는 포용력이 있기 때문이다. 바다에는 온 갓 강에서 흘러드는 물이 모여든다. 바다는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찬물 뜨거운 물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크게 되는 것이다. 인간사도 마찬가지 이다. 자신에게 조금 이롭다고 사귀고, 조금 감정을 상하게 했다고 떠나면 결국에 자신의 옆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바다는 강물이 싱겁다고 차별하지 않는다. 자신의 품에서 짜게 만든다. 강물은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린다. 그래도 강물은 바다로 몰려든다. 그것은 바다가 스스로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
남의 위에 서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힘과 권력, 돈으로 남의 위에 선다. 그러나 이런 자리는 항상 위협을 받는다. 언제 자신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 자신을 꺼꾸러 뜨릴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이 꺼꾸러 지면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은 그를 멸시하게 된다. 그러나 성인은 스스로 낮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렇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그를 추대한다. 그리고 그와 다투지 않는다. 왜냐햐면 그는 항상 자리에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다른 사람이 하고 싶어하면 자리를 비워준다. 자리가, 권위가 무엇인가. 부정부패를 하지 않는다면 그 보다 힘든 자리도 없다. 그는 항상 물러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바다로 남는다. 강물이고자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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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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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강과 바다가 능히 모든 골짜기의 제왕이 되는 것은 그것이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모든 계곡의 제왕이 되는 것이다. 도를 체득한 성인이 백성의 위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그 말을 낮추며 백성의 아래에 있는다. 백성들의 앞에 있고자 하면 반드시 자신을 백성의 뒤에 있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이 위에 있어도 백성들은 부담감을 느끼지 않으며, 앞에 있어도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치 않는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백성들이 즐거이 떠받들고 싫어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도무지 다툴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와 다툴 수가 없는 것이다.
주
백곡왕자: 왕자는 이 세상의 모든 백서들이 의지하는 지배자이다. 강과 바다는 많은 계곡의 물줄기가 흘러들어 물의 제왕이 된 것이다. 왕자의 경우나 강과 바다의 경우나 모두 자신을 낮은 위치에 두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다. 선하지: 골짜기의 밑에 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는 대명사 '그것'으로서 골짜기를 지칭하고 있음. 민부중: 백성들이 무거워 하지 않는다는 말임. 성인은 무위 무사와 겸허한 마음가짐으로 백성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성인의 정치에 전혀 압박감이나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임. 낙추: 즐겁게 추대하다, 기꺼이 떠받들다. 이기부쟁: 도를 체득한 성인은 도무지 다툴 줄을 모른다는 뜻임.
해
강과 바다는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모든 계곡의 물이 모여드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능히 그 크기를 이루게 된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군주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는 언제나 겸허한 태도와 너그러운 아량으로 만백성의 복지를 위하여 노력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은 뒤로 미루면, 천하 만민의 마음이 그에게로 쏠리게 될 것이다. 대저 남의 위에 서고자 하면 우선 남의 아래에 처할 수 있는 겸허함과 남을 먼저 내세우는 아량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백성들의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라 했다. 천하 만민이 떠받드는 이는 진정한 의미의 왕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는 그는 도무지 이 세상의 그 누구와도 다툴 줄 모른다. 그렇게 처신하는 그에게는 적개심을 품고 맞서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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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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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 7장 도굴,도난 위조품
국보 청동향로와 난중일기 도난사건
봉은사에서 보물 제321호의 고려시대 청동향로 도난사건이 있은 지 1년 7개월 후인 1965년 1우러 19일 새벽의 일이었다. 이번엔 경남 밀양의 표충사에 보관돼 있던 국보 제75호의 또다른 고려시대 청동향로(정식 명칭은 청동함은향완)가 또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에도 도난 사실의 발견자는 국보 유물의 보호관리자인 절 측이 아니라 밀양교육청에서 향로의 보존상태를 확인하러 갔던 문화재 관계직원이었다. 밀양교육청의 이운성 문화계장이 표충사를 찾아간 시간이 마치 국보 향로의 도난 사실을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19일 오전 10시께였다. 그러나 그는 사실 아무런 예감도 없었다. 그는 사무적으로 유물관의 바깥문 열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 유물함을 살펴보려고 하다가 국보 향로를 노린 침입자가 있었던 흔적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중삼중으로 채워진 자물쇠가 그대도 매달린 체 유물함은 무참히 파괴돼 있었다. 그리고 사라진 국보 향료, 승려들도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고 펄펄 뛰었다. 다른 유물들을 조사해 보니 사찰보물인 금당저 하나와 가사고리 1조도 없어져 있었다. 긴급신고를 받은 밀양 경찰은 표충사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입체적인 범인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승려들의 증언으로 사건 하루 전날인 18일 오후 2시께 부산 수산대학생을 자칭한 5명의 청년에게 도난당한 국보 향로를 특별히 관람시킨 사실을 주목했으나 범인의 단서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경남 경찰국은 도난 국보의 해외 유출을 봉쇄하기 위해 부산과 기타 항구에 연락하고 형사를 급파하는 한편, 전국 경찰에 범인 체포의 협조를 의뢰하는 전국적인 수배를 강화했으나 범인은 교묘히 행방을 감추고 있었다. 신문들은 연일 도난당한 국보 향로의 사진과 특징 기타 상세한 기록을 보도하여 경찰수사에 협력했고, 시민들의 협조도 간접적으로 있었으나 범인은 70일간이나 수사망을 피해 다녔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붙잡혔다. 5월 28일밤, 서울 영등포서가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고 범인을 급습하여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표충사를 찾아가 계획적으로 국보 향로를 훔쳤던 주범 송아무개(당시 30세)는 영등포구 고척동의 그의 집에서, 그리고 그가 훔쳐온 향로가 국보지정문화재인 줄 알면서도 5만 원에 사 갖고 있던 이아무개(당시 43세)는 충무로 3가에서 각각 체포, 긴급 구속되었다. 도난당했던 국보 향로는 장물아비였던 이아무개의 집에 숨겨져 있었다. 당시 신문보도를 따르면 이아무개는 한국은행 촉탁으로 고금회폐 컬렉션의 감정과 정리를 맡고 있던 자칭 고화 전문가로 S초급대학 강사라는 신분이었다. 주범 송아무개도 대학교육을 받은 인텔리청년이었음이 경찰조사에서 밝혀졌다. 그는 표충사 국보 향로를 절취한 뒤에도 경찰 수사망을 비웃으며 또 다른 범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경찰에서 자백한 바로는 그는 표충사에서의 범행 20일 뒤인 2월 10일 새벽에도 경기도 안양읍의 염불암에 침입하여 벽에 걸려 있던 불화를 훔쳤고, 다시 5일 뒤에는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로 가서 경계가 허술한 틈을 이용하여 작은 석불좌상 2점을 훔쳐 서울로 갖고 와서 공모관계의 장물아비였던 이아무개에게 1,500원과 5,000원에 각각 팔아먹었다. 그때의 불화와 석불좌상 2점도 이의 집에서 압수되었다.
1967년에는 두 달 간격으로 국보 제119호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과 역시 국보 제76호의 '이충무공 난중일기' 가 도난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문화재 관리당국에 대한 매스컴과 여론의 비판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사건은 너무나 중대했다. 다행이 이번에도 도난당했던 두 국보 중 불상은 사건 발생 13시간 만에, 그리고 (난중일기)는 열흘 만에 되찾았지만, 거듭된 이 국보 도난사건은 국가 지정문화재의 보호대책에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특히 불상의 경우는 백주에 덕수궁미술관 진열장에서 감쪽같이 사라졌고, 범인은 그것을 훔쳐 팔아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뚤어진 영웅심과 사회에 대한 어떤 적의에서 사건을 저질렀던 듯한 증거와 경위를 남겨 관계당국과 세인을 더욱 놀라게 하였다.
연가7년명금동불입상(6세기), 국보 제119호, 높이 16.2cm
국보 제75호 - 표충사청동함은향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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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시대별로 본 한국 철학
2. 고대의 사상/고조선--삼국 시대
1. 고유 사상
무속의 신앙과 사상
무속은 우리 고유의 것이지만, 우리만의 독자적인 신앙은 아니다. 그것은 중국, 만주, 시베리아 등지에 퍼져 있는 종교 현상인 샤머니즘의 일종이다. 샤머니즘으로서의 무속은 신령의 매개자인 무(샤먼)를 통해 복을 빌고 앞날을 예언하고 병을 물리치며 죽은 자의 영혼을 다른 세계에 보내는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역할은 굿이라는 형식을 빌려 이루어지는데, 오늘날의 개인굿과는 달리 고대에는 집단굿이 원형이었다. 이 집단굿을 통해 풍성한 수확이나 공동체의 안녕을 빌고 신의 의사를 묻곤 하였다. 여기에는 유일신이 아닌 범신이 숭배 대상이 되고, 나름의 세계관과 역사 의식 등이 가로놓여 있었다. 우리 고대의 신화에는 무속적 요소가 풍부하다. 단군 신화뿐만 아니라 주몽 신화, 박혁거세 신화 등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구지가', '처용가' 등의 고대 가요 속에도 무속적 함의가 들어 있다. 부족 국가 시대의 제천 행사(하늘굿), 즉 부여의 영고라든지 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은 집단굿의 원형이다. 이 때 행해진 가무와 음주, 놀이 등은 무속의 특징인 '푸는' 의식이나 '놀이' 기능과 관련된다. 민간 신앙은 문서화된 경전이나 체계적인 조직을 갖는 인위적인 종교와는 다른 자연 발생적 종교이다. 무속도 크게 보아 민간 신앙의 범주에 들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하여 경전이나 조직 등을 전혀 갖추지 않은 것은 아니다. 초월적인 존재인 신령을 믿고, 특정 제사장에 의해 의식이 치루어지며, 오늘날 무속에서 기록된 경문을 읽는 행위, 그리고 이 경문 혹은 주문에 천지 창조, 신들의 역사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속이 나름의 조직과 체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나아가 이 같은 조직성, 체계성은 여기서 산재한 민간 신앙을 아우르면서 확장되고 변화하였다. 특히 무속은 외래 종교가 도입되면 그것에 섞여 들어 무속화의 방향으로 내용을 변질시켰다. 불교의 무속화를 비롯하여 고려의 도교, 근대의 신흥 종교 등이 바로 그러한 경험을 하였다. 이는 무속이 우리 민족의 의식 구조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외래 종교나 사상을 자기화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무속의 영향
외래 종교와 사상의 유입이 우리 고유의 무속을 약화시켰음은 틀림없다. 특히 불교라는 외래 종교는 국가 종교로서 무속의 역할을 이미 대신하였다. 그러나 외래 종교나 사상이 무풍을 쉽사리 잠재울 수는 없었다. 무속은 민간 깊숙히 뿌리 내리고 있었으며, 정책적으로 채택된 외래 종교가 민간에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무속과의 결합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속은 자신의 요소를 외래 종교에 투영함으로써 외래 종교의 토착화에 기여하였다. 한국 불교가 기복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무속의 영향 때문이다. 또 현세에서 불국토를 이루겠다는 정토종의 확산이나 자신이 미래불인 미륵의 현신이라고 주장한 궁예의 등장 배경도 고대 신화로부터 이어지는 무속의 현세주의적 입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특히 신라 이후 고려 때까지 성행한 팔관회는 고대의 제천 의례를 불교의 형식을 빌려 행한 것으로 술, 노래, 춤을 곁들인 무속적인 행사였다. 이처럼 무속은 외래 종교인 불교와 결합하면서 그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여러 종교의 공존이라는 고려 시대의 종교적 상황에 적응하여 무속은 다시 국가적 종교로서의 면모를 찾을 수 있었다. 앞서 말한 팔관회 외에도 무속은 기우제나 국가적인 복을 빌기 위한 행사를 주도하였다. 한편 민간 차원에서 무속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고려 인종 때 일시에 동원된 무당이 300여 명이었다는 기록은 무속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 준다. 아울러 무속이 지나치게 성하므로 무당을 도성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는 유학자들의 상소가 적지 않았던 것이나, 고려 말 안향의 시에서 불교와 더불어 푸닥거리가 성행함을 한탄한 내용에서도 무속이 민간에 번성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들이다.
한편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무속에 대한 탄압은 더욱 거세어졌다. 그러나 탄압의 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무속이 그만큼 성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왕실의 부녀자와 민간에서 성행한 무속은 성균관의 대성전 뜰에서 굿판을 벌인다거나 도성 밖으로 쫓겨난 무당들을 다시 불러들일 정도의 위세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무당의 치병 기능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아 활인원이라는 국가적인 의료 기관에서 전염병의 치료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황당에서 행해지는 무속적 의례 활동이 유교적 의례로 변형되는 과정 등을 거치면서 조선 중기 이후 무속은 어느 시기보다도 더 침체하게 되었다. 또한 무속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유입된 도교적 관제 신앙과 결합하면서 그것의 조화 지향성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의 변질을 겪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근대 민족주의의 성립 시기에 신흥 민족 종교에 영향을 끼치면서 무속은 다시금 생명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는 물론 무속의 독자적인 발전이 아니라 고려 시대의 경우처럼 여러 종교의 공존이라는 방식으로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학, 증산교, 대종교 등에서 보이는 신비적 체험, 단군 신앙의 부활, 해원 사상 등은 신흥 민족 종교에서 무속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가늠케 하는 것들이다.
근대 이후 일제와 기독교의 선교사들에 의해 무속은 미신으로 낙인 찍히면서 오늘날까지 쇠퇴의 길을 걸어왔다. 아울러 무속의 의례는 간소화되고 세속화되면서 타락하는 양상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종교 현상으로서의 무속에만 주목하지 않는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간직하고 음미해 볼 문화적 가치를 무속으로부터 발견해 낼 수 있다. 맺힌 한을 풀어 내는 정화의 기능, 여러 사상 체계를 폭 넓게 수용할 수 있는 조화 지향의 정신, 음울함보다는 밝음을 지향하는 태도 등은 종교 의례로서의 굿은 쇠퇴하였지만 여전히 우리 의식 구조의 한 켠에 자리 잡은 무속의 중요한 영향력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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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번갈아
본뜻 : 조선 시대에 관가 등을 지키던 일을 '번선다'고 했는데, 지금의 숙직이나 일직과 비슷한 제도였다.
바뀐 뜻 : 일이나 사람이 차례를 따라 돌려 가며 들고 나는 것을 가리킨다.
"보기글" -줄곧 서서 하는 일만 하지 말고, 앉아서 하는 일하고 번갈아 가면서 해야 건강에 무리가없다 -영이가 순이가 번갈아 가면서 마당 쓸기를 했다며?
산통 깨다
본뜻 : 점을 치는데 쓰는 산가지를 넣어 두는 통을 가리켜 산통이라 한다. 산통점은 흔히 육효점이라고도 한다. 향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가느다란 산가지에 1부터 8까지의 숫자를 새겨 산통 속에 집어 넣고 흔든 다음 왼손으로 산가지를 세 번 집어내어 초, 중, 종의 각 괘를 만들어 길흉화복의 운명을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산가지를 집어넣는 산통이 깨어지면 점을 칠 수가 없게 되니 산통점으로 먹고 사는 점쟁이에게는 그 같이 큰 낭패가 없는 것이다.
바뀐 뜻 : 어떤 일을 이루지 못하게 뒤트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보기글" -내가 장장 두 시간에 걸쳐서 거의 다 설득시켰는데 갑자기 동생이 나타나서 사실대로 말하는 바람에 산통이 깨졌지 뭐야 -김대리 화난다고 괜히 영희씨 선보는 데 산통 깨지 말고 고이 낚시나 가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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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운하는 여왕 폐하의 것입니다
수에즈 운하는 바그다드 철도나 시베리아 철도와 함께 유럽 제국주의의 상징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토록 멀게만 느껴졌던 유럽과 아시아 사이가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아주 가까워졌던 것이다.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유럽인들이 인도를 가려면 400여 년전 바스코 다가마가 발견했던 희망봉 항로를 따라가야 했다. 대서양 해안을 타고 남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거쳐 인도에 이르는 항로는 여러 모로 불편했다. 그런데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기간과 경비가 절반 정도로 단축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에즈 운하는 유럽이 아시아를 침략하는 관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수에즈 운하 공사는 당시로서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어려운 공사였다. 약간의 대상로를 제외하고 모두 황야지역이었던 이곳에 운하를 건설하는 데에는 많은 장비와 인명의 손실이 뒤따랐다. 그야말로 이것은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능력을 가늠하는 시험대였던 것이다. 결국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10여 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1869년 이 대공사가 마무리됐다. 그 해 11월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등 각국의 명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개통식이 지 열렸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에 관련된 이야기로 베르디의 가극 "아이다"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이집트 국왕이었던 아스마일 파샤는 수에즈 운하의 개통과 카이로 국립극장의 개장을 축하하기 위해 베르디에게 오페라 작곡을 의뢰했다. 베르디는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나중에 그 줄거리에 흥미를 느껴 작곡했던 것이다. 결국 개통 후 2년 만에 이 가극은 이집트에서 초연되었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원래 이 공사를 주도한 사람은 프랑스인인 레셉스(F. Lesseps, 1805-1894)였다. 그러나 이집트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영국은 이집트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주력하다 수에즈 운하를 매입하게 되었다. 수에즈 운하를 관리하던 회사의 주식 중 절반 이상이 프랑스인들의 수중에 있었으나, 이집트 정부가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소유하던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팔았다. 영국은 곧바로 그것을 매입했다. 이때 영국 정부에 낮은 이자로 자금을 조달해 준 사람이 대금융가인 로스차일드였다. 수상은 수에즈 운하 주식의 매입를 결심하고 곧 여왕에게 이러한 말을 전했다고 한다. "바로 지금 결정되었습니다. 운하는 이제 폐하의 것입니다." 이 한 마디로 수에즈 운하와 이집트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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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남아도는 '내부 에너지'를 잘 활용하라
부부를 묶어주는 공동의 목표나 함께 즐기는 공동의 취미,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한 나름대로의 어떤 계획도 없다면,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성장해 가는 경우는 거의 있을 수 없다. 갓난아기가 '아빠'하는 말 다음에 무슨 말을 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마음쓰는 남성은 거의 없다. 빨래를 깨끗이 하는데는 B라는 세제보다 A쪽이 좋다든지, 낮에 장모님이 전화로 무슨 말을 했는지 등 남성은 사소한 일상사에는 아무런 흥미나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색다른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가정생활은 자정 무렵에 주고 받는 대화에 조금의 활기도 주지 않는다. 남편의 하루하루도 같은 일의 반복이겠지만 거기에는 어느 정도 변화를 가져오는 작은 사건이 있게 마련이다. 전업주부인 아내를 둔 남자는 저녁나절 현관을 들어서면 어떠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대개의 경우 그에게는 흥미 없는 일들이며, 그래서 일정 부분은 무시하게 된다. 전업주부의 가치를 경시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어머니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한 인간의 인격을 이끌고 계발하고 형성하는 것이므로 처음 몇 년 간은 여성을 분발시키기에 충분하다. 아이는 날이 갈수록 달라지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는 어머니인 것이 실로 멋지고 즐겁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움도 남편과 아내라는 고정된 역할에 구애받지 않고 자녀교육에 협력해 주는 동반자와 함께가 아니라면 맛볼 수 없다. '여성의 일'과 남성의 일'이라는 역할 분담이 일단 정해져 버리면 남성은 그것을 고집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신적으로나 실제의 가사일에 있어서 아내와 남편의 거리는 멀어지기만 할 뿐이다. 아내의 입에서는 무심결에 이런 말들이 튀어나온다. "내가 일을 가지면 좋은 아내도 좋은 엄마도 될 수 없고, 가정을 엉망으로 만들 거라고 하면서, 당신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리라고 하는군요." 최근에 나는 훌륭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업주부를 아내로 둔 한 남성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호기심에서, 부인은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집사람은 질투심이 대단히 많아서요." 그는 쓸쓸하게 웃고 나서 문득 진진한 얼굴로 덧붙였다. "내가 집에 돌아가면 집사람은 내 멱살이라도 잡을 듯한 기세로 달려듭니다. 나를 사랑하고는 있지만 동시에 미워서 견딜 수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 긴 하지만요." 그러나 나는 그 부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이 하루 종일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요 있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남편이 자신의 일에 열중하여 촌각을 아까워한다고 생각하면 견딜 재간이 없는 것이다. 남편이 온종일 사업에 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슬픈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째서 가정에서까지 일에 열중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일이 그의 활력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활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기 자식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첫걸음도 떼지 않은 ,그저 어리기만 한 자녀로부터 남편이 일에서 얻는 만큼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까? 그들이 어려서 어머니를 필요로 하는 동안은 커다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후에는 ?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자질구레한 일들이 과연 어느 만큼이나 있는 것일까? 몇 시간이나 결려서 준비한 식사는 불과 10분 만에 먹어 치워지고, 특별히 감사 받지도 못한다. 도대체 남은 인생은 어디에서 어떻게 소화하면 좋단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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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이성계가 왕이 되는 꿈을 해몽한 예언자 무학대사
무학대사(1327-1405)는 안변 설봉산 토굴에서 살았으므로 산이름을 따서 호를 설봉이라 하였다. 속성은 박씨요 이름은 자초이다.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일이다. 이성계가 어느 날 무학대사를 찾아가 해몽을 부탁하였다.
"꿈에 무너진 집 속에 들어가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왔는데, 무슨 징조입니까?" "경하할 꿈이올시다.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진 모양은 임금 왕자와 같습니다"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진 것은 무슨 징조입니까?"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을 것이요 거울이 깨지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이성계는 매우 기뻐하면서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석왕사라고 하였다. 석왕이란 왕이 되는 꿈이라고 해석했다는 뜻이다. 본시 그 절에는 석왕사라고 쓴 태조의 어필이 있었는데, 불에 타 없어지고 그 글씨를 새긴 현판만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서산대사가 쓴 '산수기'에 전한다. 이 석왕사에는 좋은 배나무가 있어서 해마다 궁중에 진상되었다. 절안에 이화당이 있고, 용추 30여 군데가 있는데 주변 경치가 매우 수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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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 주연의 미국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우리 나라에서 처음 공연된 것은 1957년의 일. 그 후로 '00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유행어가 한동안 사회를 휩쓸다시피 했다. 미국의 여류 소설가 '마가레트 미첼' (1900-1959)의 유일한 작품인 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6)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외국 작품의 하나가 되고 있다.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미첼'은 미국 여성의 한 전형인 '스카렛 오하라'를 창조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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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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