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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75 호
단기 4340. 5. 7 (음력 03.2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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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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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제38회 한민족통일문예제전 1. 목 적 ? 한민족의 통일염원을 담은 문예창작활동을 통하여 통일에 대한 관심과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한편 한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촉진하고, 평화통일에의 꿈과 의지를 심어 자주적 토양을 배양하며, 민족의 공존을 통한 한민족의 미래상을 재인식시키고자 함 2. 추진계획 가. 개 요 ? 행 사 명 : 제38회 한민족통일문예제전 ? 주 최 : 민족통일중앙협의회 ? 후 원 : 통일부, 교육인적자원부, 대한적십자사, 통일교육협의회 나. 일 정 ? 공 고 : 2007. 4. 25 ? 작품접수 : 2007. 5. 15 ~ 6. 15 ? 지역심사 : 2007. 6. 26 ~ 7. 5 ? 중앙심사 : 2007. 7. 12 ~ 7. 20 ? 입상자발표 : 2007. 7. 30(예정) ? 시 상 : 2007. 10. 2 ~ 12. 1(시?도별 시상) ※ 시상일정 추후 확정 통보 다. 시 행 (1) 공모대상 : 국내외 초(4년 이상)?중?고?대학생 및 일반국민 (2) 공모부분 :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일반부(4개 부문) (3) 공모주제 : ? 평화번영 ? 한민족 ? 한마음 (4) 공모형식 ? 형 식 : 산문, 수필, 시 ? 제 목 : 주제에 따라 자유롭게 정할 수 있음 ? 부문별 응모원고 매수 - 초등부 및 중등부 : 200자 원고지 10매 내외 - 고 등 부 : 200자 원고지 15매 내외 - 대학부?일반부 : 200자 원고지 20매 내외 ※ 시는 필히 1인 2편 이상 (5) 응모방법 ? 국 내 : 전 부문 공히 거주지 민족통일 시?도협의회 사무국에 제출 (단, 초등부?중등부?고등부는 소속학교 예선을 거친 작품 제출) ※ 제출작품 겉표지에 - 소속(학교)성명, 학년, 반 - 집주소, 전화번호 필히 명기 - 지도교사성명, 전화번호 필히 명기 ※ 제출처 :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 476-3 (문화빌딩 302호) 민족통일대전광역시협의회 우편번호 : 301-803, 전화번호 : 253-2307, FAX : 253-2308 ◎ 필히 직접 또는 등기로 우송바람 (6) 심사 및 발표 ? 심 사 - 예선 : 시?도별 작품심사위에서 부문별 우수작을 엄선하여 각 부문 (초등부?중등부?고등부, 대학?일반부) 3편씩을 중앙심사위에 제출 - 본선 : 예선을 거친 총 200여편(해외작품 포함)을 중앙심사위에서 심사, 최종 입상작 선정 ※지역시상은 중앙심사 등외 작품과 지역심사 우수작으로 선정 ? 발 표 : 최종심사 결과는 중앙심사 완료 후 15일 이내에 시?도협을 통해 개별통보 - 해외입상자는 개별통보 - 홈페이지(http://www.mintong.or.kr)에 공시 (7) 시 상 - 시상식은 10월 ~ 12월중 시?도별로 적기 실시 - 시상내역
시 상 내 역 |
인원 |
기 준 |
대통령상 |
1 |
전부문 중 1편 |
국회의장상 |
1 |
전부문 중 1편 |
국무총리상 |
1 |
전부문 중 1편 |
부총리 겸 교육
인적자원부장관상 |
3 |
3개 부문 선정(초?중?고등부 ) × 1명 = 3명 |
통일부장관상 |
20 |
4개 부문(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일반부) × 5명 = 20명 |
외교통상부장관상 |
3 |
3개 부문(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 1명 = 3명 |
국가청소년위원회
위원장상 |
3 |
3개 부문(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 1명 = 3명 |
대한적십자사총재상 |
9 |
3개 부문(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 3명 = 9명 |
민통의장상 |
40 |
초등부×11명 = 11명, 중등부×11명 = 11명
고등부×10명 = 10명, 대학?일반부×8명 = 8명 |
대전광역시장상 |
15 |
초?중?고, 대?일반 |
시교육감상 |
12 |
초?중?고 |
시의회의장상 |
15 |
초?중?고, 대?일반 |
민통시협회장상 |
20 |
초?중?고, 대?일반 |
계 |
1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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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공자 포상 - 통일부장관표창 16명(각 시?도 1명씩) - 민통의장 감사장 32명(각 시?도 2명씩) ? 유공지도교사 교육감표창 3명(초, 중, 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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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때로 아무 일도 아니할 자유가 없는 사람은 정말자유를 모르는 사람이다. / 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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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六十四章 (노자 - 도덕경 : 제6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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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安易持, 其未兆易謀, 其脆易泮, 其微易散, 爲之於未有a 治之於未亂, 合抱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千里之行, 始於足下, 爲者敗之, 執者失之, 是以聖人無爲故無敗, 無執故無失, 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 愼終如始, 則無敗事, 是以聖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 學不學, 復衆人之所過,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
기안이지, 기미조이모, 기취이반, 기미이산. 위지어미유, 치지어미란. 합포지목, 생어호말, 구층지대, 기어누토, 천리지행, 시어족하. 위자패지, 집자실지. 시이성인, 무위고무패. 무집고무실. 민지종사, 상어기성이패지. 신종여시칙무패사. 시이성인, 욕불욕, 불귀난득지화, 학불학, 복중인지소과, 이보만물지자연이불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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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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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네째 장
직역
그것이 편안할 때 가지기가 쉽고, 그 조심이 나타나지 않을 때 계획하기 쉽다. 그것이 연약할 때 부서지기 쉽고, 그것이 미세할 때 흩어지기 쉽다. 그것이 아직 있지 않을 때 하고, 그것이 아직 어지럽지 않을 때 다스려라. 합쳐서 끌어안는 나무도 새싹에서 생기고, 아홉층의 누대도 한줌 흙에서 일어난다. 천리의 걸음도 발아래에서 시작한다. 할려는 자는 패할 것이고, 잡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함이 없으므로 패함도 없고, 잡음이 없음으로 잃음도 없다. 사람들이 일하는 것은 항상 거의 이루다가 패한다. 끝을 삼가기를 시작과 같이 하라, 그러면 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스러운 사람은 욕망이 없기를 바라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배우지 않음을 배우고, 뭇 사람이 지나치는 곳으로 돌아간다. 이리하여 온갖 것이 스스로 그러함을 돕고. 감히 행하지 않는다.
해석
움직이는 것을 잡기는 어렵다. 땅투기는 그 조짐이 일기전에 땅을 사두어야 한다. 땅 값이 오르기 시작하면 것잡을 수 없게 된다. 즉 일을 닥치기전에 미리 계획을 해두면 편하다. 지금 눈앞의 이익만을 보지 않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도 염두에두고 행동을 한다.
合包之木이라는 것은 서로 껴안아서 닿을 수 있는 나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굵은 나무이다. 이런 나무도 그 시작은 매우 미미한 것이다. 일을 할 때에는 큰 나무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싹을 가지고 해야 편하다. 일이 작을 때 미리 미리 해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끝이 다됬다고 방심하지 마라.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쉽다. 그러나 실제의 삶속에서 이렇게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성인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데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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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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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안정된 것은 유지하기가 쉽고, 아직 징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손대기 쉽다. 취약한 것은 깨어지기 쉽고, 미세한 것은 흩어지기 쉽다. 일은 이루어지기 전에 미리 처리하고, 혼란은 그것이 오기 전에 다스려야 한다. 아름드리 큰 나무도 작은 씨앗에서 자란 것이고 9층의 높은 대도 한줌 흙이 여러 번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천리의 먼길도 한 걸음에서 시작된다. 작위 하는 사람은 실패하고, 집착하는 사람은 잃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의도적으로 하는 일이 없으므로 실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잃지도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건대 거의 성사가 될 무렵에 실패하고 만다. 끝마무리를 시작할 때 처럼 하면, 실패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세상 사람들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라고, 손에 넣기 어려운 보물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며, 세상 사람들이 배우지 않는 것을 배운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의 허물을 도에 복귀시키고, 만물이 자연의 이법에 따르도록 도울 뿐, 감히 인위적으로 행하지는 않는다.
주
기취이반: 취약한 것은 흩어지거나 깨어지기 쉽다는 뜻임. 함포지목: 두팔로 끌어안아 겨우 손끝이 맞닿을 정도의 큰 나무, 아름드리 거목. 호말: 터럭, 털끝, 지극히 작은 것. 위자패지: 작위 하는 사람은 실패한다는 뜻임. 민지종사: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건대.... 이 경우의 민은 인으로 해석해야 함. 기성: 거의 이루어질 무렵. 거의 완성하게 될 때. 욕불욕: 세상 사람들이 바라지 않는 것을 바란다는 뜻임. 복중인지소과: 여러 사람의 잘못을 도에 복귀시켜 고치게 한다는 뜻임.
해
안정된 것은 유지해 나가기가 쉽고, 아직 징조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처리하기가 쉽다. 취약한 것은 깨어지기가 쉽고, 미세한 것은 흩어지기가 쉽다. 모든 일은 발생하기 전에 처리하고, 나라는 혼란이 오기 전에 다스려져야 한다. 아름드리 큰 나무도 작은 씨앗 하나가 자란 것이고, 9층 누대도 흙덩이가 한줌씩 쌓이고 쌓여서 그 높이를 이루게 된 것이다. 만사는 작고 미세할 때 처리해야 잘 다스려 질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모든 일을 미연에 잘 다스리는 사람이다. 그는 무리하게 작위 하는 일도 없고, 너무 일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실패도 잃어버림도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매우 열심히 해 나가다가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미리 방심을 하고, 끝마무리를 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마무리를 시작할 때처럼 정신차려 한다면 결코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성인은 얻기 어려운 재보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무위자연의 도를 체득할 뿐이다. 그는 이 무위자연의 도에 세상 사람들의 허물을 복귀시켜 그것을 고쳐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만물을 자연의 섭리에 따르도록 할 뿐 감히 의도적인 일을 행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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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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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 7장 도굴,도난 위조품
도난당한 황금 모조금관
경주박물관의 금제유물을 노린 도둑이 1956년에도 있었다. 1927년의 첫 번재 도난 때엔 범인이 지붕과 벽면을 뚫고 유물 진열실로 침입하려다 실패한 후 나중엔 정면의 이중철문의 자물쇠를 뜯고 들어갔지만 이번엔 저녁 때 박물관 진열실 문이 닫히기 전에 관람객을 가장하여 잡입해 있다가 범행을 감했했다. 이때의 목표물은 바로 금관이었다. 금관총 출토유물의 두번째 수난이었다. 앞의 범인은 금관에만은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자질구레한 금제품이 아니라 신라고분에서 나온 최대의 국보유물인 금관, 바로 그것을 훔쳐 팔아먹으려고 했으니 참으로 대담한 자였다. 치밀하게 유물실에 잠복해 있던 범인은 밤중에 이르러 성공적으로 일을 치렀다. 그는 국보 금관만 싸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국보 금관의 도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똑같은 모조품을 만들어 진열장에 넣었던 가짜 금관이었다. 전문가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눈을 가진 사람이면 그것이 모조품이란 것을 한눈으로 식별할 수 있었지만 범인은 찬란한 황금빛에만 현혹됐을 뿐 유물 감식엔 무식햇다. 사건 발생 후 경주박물관에선 도난당한 금관이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해명하고, 신문들도 그렇게 보도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범인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훔친 금관을 막보따리처럼 싸 갖고 부산 방면으로 탈출하려고 경주역에 나가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범인은 자신의 범행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를 읽어보고 그제서야 그것이 '가짜 금관' 이란 사실을 알았다. 범인으로선 청천벽력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물건을 박물관에 도로 보내지도 않았고 경찰에 자수하지도 않았다. 그는 경주역에서 곧장 시외의 서천께로 도피해 가서 모래밭을 깊숙이 파고 그 속에 일확천금의 어리석었던 꿈과 진짜로 알았던 모조 금관을 함께 묻어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범인은 결국 금관 도난사건의 용의자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는 모든 경위를 자백했다. 그러나 그의 자백에 따라 서천 모래사장으로 갔던 경찰은 그곳에 묻었다는 모조 금관을 찾지 못했다.
신라시대의 황금 보관을 노린 도둑은 8·15 직후 서울의 국립박물관에도 나타났다. 그때 박물관에선 과거 일제 때에 경주 고분에서 발견된 세 금관(금관총·금령총·서봉총 출토)의 모조품을 하나씩 만들어 일반에게 관람시키고 있었다. 진짜 유물들은 불안한 사회정세에 비추어 금고 속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다. 출토지인 경주의 박물관에는 가장 유명한 금관총금관의 모조품을 내려 보내고, 서울의 경복궁박물관에 진열된 것은 금령총과 서봉총 금관을 모조한 것이었다. 그런데 박물관에서 짐짓 염려하고 대비했던 그대로 금관을 노린 도둑이 침입했던 것이다. 어느날 밤, 경복궁의 국립박물관 금관 진열실에 잠입한 도둑이 두 금관을 모조리 들고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에야 박물관 직원이 그 사실을 알았다. 이때의 범인도 10년 후에 경주박물관의 모조 금관을 훔쳤던 범인처럼 그것이 모조품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무식한 도둑이었다. 박물관측에선 즉시 신문을 통해 도난당한 금관이 순금이 아닌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해명하고 물건을 돌려보내 달라고 호소했지만 허사였다. 역시 신문보도로 가짜란 사실을 안 범인이 실망하여 밟아 뭉개버린 모양이었다. 서울과 경주박물관에서 두 번에 걸쳐 도난당했던 금관들이 모두 진짜 유물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리고 만일 그 범행이 성공적이었다면 아마 일본이나 다른 외국으로 영원히 팔려 나갔을지도 모른다. 국내에서는 세상이 다 아는 지정 국보의 금관을 그것도 박물관에서 훔쳐온 물건을 몰래 사 가질 어리석은 수집가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극적으로 위기를 모면한 한국의 세계적 고대 미술품인 3개의 금관 중 '금관총 금관'은 현재 국보 제87호, '금령총 금관' 은 보물 제338호, 그리고 '서봉총 금관' 은 보물 제339호로 각각 지정 보호되고 있다.
국보 제87호 - 금관총 금관
보물 제338호 금령총 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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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시대별로 본 한국 철학
1. 역사 개관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에는 기원전 1000년 무렵 청동기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고 사적 소유가 생겨남에 따라 원시 공동체 사회가 붕괴하고 고대 국가가 등장한다. 대체로 고조선과 부여 등이 고대 사회 성립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은 고대 사회 발전기에 나타난 국가로 볼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개별 가호 단위의 농업 경영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채 생산자층은 수장층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강도 높은 인신적 지배가 가능했다. 고대 사회 초기 각 지역에서 형성된 다수의 읍락 사회는 상호 불균등한 발전을 배경으로 지배 복속 관계를 맺어 가게 되었으며, 빈번한 전쟁은 이를 더욱 급속히 추동하여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 형성을 가속시켰다. 고대 사회 초기 지배자의 권력은 종교적 권위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 고대 사회의 신화는 대부분 '시조 신화' 또는 '건국 신화'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신화를 통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형성이란 의미를 갖는다. 한편 삼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유학과 불교 등은 고대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쓰인다. 곧 유학과 불교는 이전 종교나 신화가 지녔던 기능과 권위를 대신해 갔던 것이다. 우리 나라의 중세 봉건 사회는 지주제와 신분제를 바탕으로 한 중앙 집권적 정치 형태가 특징이다. 지주제는 대토지 소유자인 지주와 그 토지를 빌려 경작하는 전호 농민 사이에 맺어지는 경제 제도로서, 우리 나라 봉건 사회의 기본적인 생산 관계를 이루고 있다. 신분제는 경제 외적 강제를 통해 봉건 사회를 지탱시켜 주는 또 하나의 제도적 장치이다. 이러한 지주제와 신분제를 바탕으로 정치적으로는 중앙과 지방 및 군사 제도에서 방대한 중앙 집권 체제가, 사상적으로는 보편적 세계관과 지배 질서의 논리를 제공해 주는 유학과 불교가 발달하였다.
우리 나라 중세 봉건 사회는 크게 형성, 확립기와 재편기 및 해체기로 나눠 볼 수 있다. 후기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에서 고려 중기까지, 고려 말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생한 양란 이전까지, 그리고 양란 이후로부터 19세기 중엽 개항 이전 시기까지가 각각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 역사에서 봉건적 특성이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는 7, 8세기 무렵이다. 이 시기에 이르면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가 발전하면서 지배층에 대한 경제적 급부가 식읍의 분급에서 수조권의 지급으로 나타났다. 지배 방식도 노예나 하호에 대한 인신적 지배에서 토지를 매개로 한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고려에 오면 전시과 제도가 실시되어 이전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일원적인 수조권 분급 제도가 갖추어 지면서 중세적 토지 제도의 토대가 발전, 강화되었다. 사상적으로 불교가 일상 생활을 지배하였던 반면, 유학은 통치 제도와 정치 이념을 확립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면 휴한 농법이 극복되고 연작 상경 농업일 일반화되어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 지배가 한층 발달하면서 수조권에 입각한 토지 지배가 극복되기에 이른다. 농민의 경영상 자립을 바탕으로 양천제가 확립되어 양인 안에서 법제적인 평등이 인정되는가 하면, 과거제 실시가 일반화되면서 과거를 통한 재지 중소 지주층의 중앙 정계 진출이 눈에 두드러지게 되었다. 흔히 이들을 신진 사대부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에는 이들의 양반 지배 체제가 공고히 되었다. 사상적으로는 신진 사대부들이 원에서 들여 온 주자학이 통치 체제나 정치 이념에서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불교를 대신하여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봉건 사회는 토대로부터 해체 과정을 밟게 되면서 새로운 사회의 싹이 자라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농촌 사회의 계급 분화가 촉진되는데, 농민층 가운데 일부는 새로운 농업 경영을 통해 부농층으로 성장하는 한편 대다수의 농민은 빈농이나 임노동자로 점차 몰락해 갔다. 이에 따라 신분제가 전면적으로 동요하고 봉건적 부세 제도의 모순도 심화되었다. 이처럼 봉건 사회의 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이에 대한 수습 방향을 둘러싸고 붕당 사이에 노선이 대립하면서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었다. 사상적으로는 주자학을 통해 흐트러져 가는 봉건 사회 체제를 유지시키려 하지만, 도리어 주자학은 경화되고 각질화되면서 이미 당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상적 탄력성을 잃어가게 되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주자학적 지배 이념에 맞서 실학, 양명학, 경학과 같은 새로운 사상이 대두하는데, 이에 맞서 집권층의 사상 통제가 강화되기도 하였다.
조선은 무력을 앞세운 일본과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병자수호조약)를 맺고, 7월에 그 내용을 구체화한 '조일수호조규부록'과 잠정적 통상 협정인 '조일무역규칙'을 조인하였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세계 자본주의 질서 속에 강제로 편입되면서 왜곡된 자본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 곧 우리 나라의 근대는 자주적인 형태가 아니라 강제되고 왜곡된 형태로 맞게 된 것이다. 따라서 대내적으로는 봉건적 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채 근대 속에 온존한 결과 계급 모순이 첨예하게 일어났고,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서구 열강이 중첩적으로 압박을 가해 와 민족 모순 또한 심각한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다양한 형태의 운동이 등장하였다. 먼저 비교적 반침략, 반외세에 철저했던 계열로 재야 유생들이 중심이 된 척사위정 운동이 있다. 이들은 정통 주자학을 더욱 강화함으로써 현실의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였다. 다음은 비교적 반봉건에 철저했던 계열로 재경 집권 노론층이 중심이 된 개화 운동이 있다. 이들은 그들간 다소의 편차는 있지만 서구 열강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런 가운데 서구의 근데 계몽 사상과 진화론 등에 귀기울이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을 이중적으로 담지하고 있던 민중들의 운동이 있다.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전통의 유, 불, 도 삼교와 고유 사상 등을 결합시켜 다양한 형태의 근대 민중, 민족 종교를 만들어 냈다. 한편 이 시기에는 미국으로부터 기독교가 전래해 오기도 하고, 불교의 근대적 개혁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민중 운동과 부르주아 개혁 운동이 모두 좌절됨에 따라, 우리 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독점적 반식민지를 거쳐 1910년 마침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 후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 지배 체제가 전사회적으로 공고히 된다. 일제는 지배와 수탈에 적합한 범위에서 우리 나라의 사회, 경제 구조를 자본주의적으로 개편해 갔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는 일본 자본주의에 더욱 예속되었고, 민족 경제는 한층 더 왜곡, 파괴되었다. 한편 이렇게 왜곡된 형태로나마 자본주의적 관계가 확대됨에 따라 노동자 계급이 형성, 확대되기도 하였다. 일제는 강점 초기 강압적인 방법을 통해 식민지 지배 체제를 강화시켜 나가다가, 마침내 3.1 운동이라는 전민족적 저항에 부닥치자 일종의 유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 정책을 일시적으로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30년대 이후 침략 전쟁을 수행하면서 한반도에 대해 대륙 침략을 위한 군수 기지화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자본주의적 관계는 급속히 확대되지만, 민족 경제의 왜곡과 파괴가 한층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창씨 개명과 조선어 사용 금지 등의 민족 말살 정책이 병행되었다. 결국 일제 강점기중 학술 사상의 전개는 3.1 운동 이후, 그것도 제한적인 형태로 잠시 동안만 가능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먼저 유학을 중심으로 한 전통 사상에 대한 반성과 비판 및 근대 철학으로 변모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한편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강단 동양 철학이 등장한다. 아울러 경성제국대학 졸업생이 배출되고 해외 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서구 부르주아 철학이 수용, 전개되며, 국내 노동자 계급의 형성과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 수출에 따라 마르크스 철학 또한 수용, 전개된다.
1945년 해방은 일제 강점 아래 국내외에서 계속된 민족 해방 운동의 성과이자, 미국과 소련에 분할 점령당하는 불완전한 해방, 곧 분단의 시작을 의미한다. 따라서 해방으로부터 시작된 우리 나라의 현대는 '분단 시대'라는 역사적 특징을 깊이 간직하게 되며, 분단의 극복을 통한 민족 통일 국가의 건설이 역사적 과제로 남게 된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 점령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두 개의 정권이 남과 북에 각각 수립되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은 민족의 분단과 남북의 이질화를 더욱 심화시키고 체제의 경색과 권력의 독점을 더욱 강화시켰다. 북한은 정권 수립 후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을 추진하였으며, 중, 소 대립 후인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 주체 사상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하였다. 반면 남한은 국가 권력의 강력한 주도 아래 종속형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그 결과 남한 사회는 경제의 양적 성장을 이룩하긴 했지만 대외 의존과 계급적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한편으로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1980년대 이후부터 광범위한 대중을 중심으로 민족민주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남북한이 체제 경쟁에 몰입하면서 그것이 철학 방면에 미친 파장은 심대하였다. 곧 이념적인 편향에 따라 제한적이고 기형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나갔다. 남한은 관념론의 길을, 북한은 유물론의 길을 따라갔던 것이다. 그나마 1980년대 남한에서 민족민주 운동이 일어나면서 이념의 벽을 넘나들며 이론과 실천 방면에서 활발한 토론을 전개한 것은 우리 현대 철학사에서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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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난장판
본뜻 : 옛날 과거장에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수많은 선비들이 질서 없이 들끓고 떠들어대서정신이 없었다. 그런 과거 마당의 어지러움을 일컬어 난쟁이라 하였다.
바뀐 뜻 : 여러 사람이 뒤섞여 어지리이 떠들어대거나 뒤죽박죽이 된 관계.
"보기글" -유세 장이 반대파의 방해 때문에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아이들만 집에 남겨 놨더니 온 집안이 난장판이 된 거야
맥적다
본뜻 : 단어 본래의 의미는 '맥이 적게 뛴다'는 뜻이다. 외부로부터 별다른 자극이 주어지지 않을 때, 즉 잠잘 때 같은 때는 평소보다 맥박 수가 떨어진다. 반대로 흥분하거나 두려울 때는 본인이 느낄 정도로 심장 박동이 뛰면서 맥박 수가 많아진다. 그러므로 '맥적다'는 말은 그만큼 무료하고 심심하다는 뜻이다.
바뀐 뜻 : 흥미가 없고 심심한 일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보기글" -한창 나다닐 젊은 애가 어찌 그리 맥적게 앉아만 있니? -남의 애인 만나는데 같이 나가는 일처럼 맥적은 일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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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첫 번째는 비극이지만 두 번째는 막간의 희극이다
19세기 유럽의 역사에는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이 두 번 등장한다. 한 명은 전쟁의 천재인 나폴레옹이고, 다른 한 명은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다. 그런데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통해 황제에 오르는 방식은 나폴레옹이 했던 방식과 너무나 흡사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성립된 공화정이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몰락하고 총재정부가 들어선 이후 국내정치가 어수선해지자, 나폴레옹은 1799년 11월('혁명력'으로는 브뤼메르 18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독재정치를 시작했다. 그후 그는 통령정부를 구성했으나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자 황제가 되어 나폴레옹 1세라 칭하였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제1제정이다. 그후 나폴레옹이 전쟁에 패하자, 프랑스는 왕정복고를 거쳐 1830년 7월혁명, 1848년 2월혁명으로 다시 공화정이 수립되는 과정을 밟았다. 7월혁명으로 수립된 7월왕정은 복고왕정보다는 다소 자유주의적이었으나 공화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미흡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불만으로 다시 2월혁명이 일어나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어렵게 수립된 공화정도 얼마 안 가 다시 제정으로 바뀌게 된다. 이 신생 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놀랍게도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었던 것이다. 거의 무명에 가까운 이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의 명성이 아직도 프랑스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고, 보수적이었던 농민층이 공화제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니나 다를까, 루이 나폴레옹은 공화주의자들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점차 확대시킨 끝에 1851년 12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급기야 다음해 12월에는 제정을 선포하고 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이것이 프랑스 제2제정이다. 이렇듯 두 사람은 비슷한 과정을 밟아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이들 두 사람에 대한 역사적 의미는 사뭇 다르다. 그 차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는 천재적인 감각으로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를 예견했고, 그것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 적어 놓았다. 제목을 루이 나폴레옹의 삼촌인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킨 날짜인 브뤼메르 18일로 잡은 것이 의미심장하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디선가 헤겔은 세계사에서 큰 중요성을 띤 사건이나 인물은 두 번 등장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음 말을 잊었다. 그 첫 번째는 비극이요 두 번째는 막간 희극이라는 사실을... 당통과 코오시디에르가 그러했고, 로베스피에르와 루이 블랑이 그러했으며, 삼촌과 조타가 또한 그러했다. 그리고 브뤼메르 18일이 재현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도 그렇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마르크스뿐 아니라 당대의 문호였던 빅토르위고와 프루동도 글을 썼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위고는 주로 신랄하고 해학적인 욕설로 시종했고, 프루동은 역사발전의 필연적인 결과로 해석했다. 마르크스는 이들의 시도와는 반대로, 한낱 우스꽝스러운 필부가 혁명의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그 상황을 추적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 책 말미에 마르크스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마침내 황제의 망토가 루이 나폴레옹의 어깨에 걸쳐지는 순간, 나폴레옹의 동상은 방돔광장의 전승기념비 꼭대기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그의 분석은 곧 여지없는 사실로 드러났다. 그야말로 두 번째의 희극에 의해서 첫 번째가 비극으로 화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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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바로 지금 '무언가'를 해보아라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아라. '나'라는 인간은? 나의 즐거움? 능력은?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그것을 달성할 수단은? 부모를 원망하지 않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자기의 어떤 특성을 살려야 할지? 자신을 비하하는 사고 방식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것을 중단할 수 없는지? 앨버트 엘리스 박사는 저서 [심리요법에 있어서의 이성과 정서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일이나 어른이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자기를 못되게 만드는 주된 사고방식 12가지를 들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의 다섯 가지이다.
1.무슨 일이건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매우 불쾌하다. 2.자기의 괴로움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며, 자기이외의 타인에게 원인이 있다. 3.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면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피해 지나가는 것이 편하다. 4.자신을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다. 5.자기의 기분을 스스로도 어쩔 수 없다.
이상의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잇다. 자기의 인생은 스스로는 전혀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자신의 생활 방식에 대해서는 누군가 자기 이외의 사람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에 부딪쳤을 때 머뭇거리거나 그 책임을 회피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이란 누군가가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다. 결혼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금물이다. 결혼만 하면 모든 것이 좋은 상황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 따위는 덧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중요한 요인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여성 자신이 이제까지 결혼 생활에서 '언젠가는...'하는 기대감을 갖는 것 외에는 자기 자신을 성장시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질 거야. 언젠가는 남편도 달라지겠지 언젠가는 진심으로 사랑 받게 되겠지. 언젠가는 나도 모두에게 인정받게 되겠지..."
'남자란 단순한 디저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문구는 남성을 없신여겨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남성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그 존재 가치와 우수성을 무시하고자 하는 말도 물론 아니다 남성을 '이러한 상태로 존재해 달라'는 이상상으로 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권유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남성에게 신뢰감을 주자는 것이다. 남성 또한 여성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하다면 둘이서 함께 한 사람 몫이 되도록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남자란 단순한 디저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남성은 '메인코스가 아니며, 여자의 인생의 회전축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한 암시이다. 디저트를 주식으로 한다면 살만 찌개 되고 무기력해져서 자멸적인 사고 방식에 휩쓸리게 될 것이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불완전한 삶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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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새끼 딸린 말로 태조의 마음을 돌리고 죽은 박순
박순(?-1402)의 본관은 음성이다. 함흥에 가 있는 태조에게 문안 사신으로 간 사람마다 다 죽고 살아 돌아오는 이가 없던 때였다. 태종은 신하들에게 이번엔 누가 가겠느냐고 물었지만 가겠다고 나서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이때 박순이 가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떠날 때 수레를 타지 않고 새끼 딸린 말을 타고 갔다. 함흥에 들어가서 태조의 행재소(왕의 임시 처소)가 보이는 곳에서 일단 멈추고 새끼말은 거기에 매어 둔 채 어미말만 타고 가니 새끼말과 어미말이 서로 돌아보면서 우는 바람에 제자리걸음을 하게 되고 여간 지체하지 않았다. 행채소에 도착하여 태조에게 인사를 올리자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낀 태조가 그 까닭을 물었다. 박순은 속마음으로 바로 이때구나 하고 입을 열었다.
"길을 오는 데 방해가 되어서 새끼말을 떼어서 나무에 매어 놓았더니 그 야단입니다. 하찮은 미물인데도 어미와 새끼가 차마 서로 떨어질 수 없어서 저렇게 야단입니다"
태조는 가슴이 찡해 옴을 느꼈다. 태조는 옛친구인 박순에게 돌아가지 말고 남아 있으라고 하였다. 어느 날 태조가 박순과 함께 바둑을 두는데 갑자기 '털썩!' 하고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둘러보니 지붕에서 쥐 두 마리가 떨어졌는데 어미쥐가 새끼쥐를 안은 채 죽어 가고 있었다. 박순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바둑판을 밀치고 그 자리에 엎드려 태조에게 눈물로써 돌아갈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드디어 태조로부터 한양으로 돌아가겠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박순은 태조에게 인사하고 귀경길에 올랐다. 태조를 모시고 있는 신하들은 박순도 예외없이 죽여야 한다고 태조에게 강력히 요청하였다. 망설이던 태조는 박순이 용흥강을 다 건너갔으리라고 생각되었을 즈음 비로소 허락하고, 사자에게 칼을 내어 주면서 말했다. "박순이 용흥강을 이미 건넜거든 더이상 추격하지 말라" 그런데 귀경길에 오른 박순은 도중에 병이 나는 바람에 속도가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추격대가 도착했을 때, 그는 막 배에 오르는 중이었고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하였으므로 추격대의 칼에 맞아 허리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몸뚱이의 절반은 강 위에, 절반은 배 안에 있다네"라는 시가 생겨났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는 깜짝 놀라며 애통해 했다.
"박순은 좋은 친구였는데, 내가 그 친구와의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다"
태조는 드디어 한양으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화공에게 명하여 박순의 상반신을 그려바치도록 하였다. 박순의 아내 임씨는 남편의 부음을 받고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박순의 벼슬은 판중추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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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Michael)
천사 가운데는 '루시펠'처럼 그만 불손하게도 하나님 같이 되고자하여 하나님에게 반기를 든 천사가 있었다. 그때 반역한 천사와 싸운 천사군의 총사령관이 대천사 '미카엘'이었다. '미카엘'이란 '히브리'어로 "하나님과 같이 행동하는 자는 누구냐"의 뜻. 반역한 천사를 소탕할 때 '미, 카, 엘'이라 소리치며 그들을 지옥으로 몰아놓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해서 '미카엘'은 이교도와 싸우는 기독교도의 조력자, 악마로부터 개개의 신도를 보호하는 자로 여겨지고 있다. 9월 29일은 '미카엘마스'로서 교회에서는 미카엘의 축제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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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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