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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74 호
단기 4340. 5. 7 (음력 03.2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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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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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제12회 계간 에세이문예 본격수필신인상 작품 공모
고급 수필전문지 에세이문예가 한국문단에서 찬란한 꿈을 펼칠 신인 여러분의 도전을 기다립니다. 무지개 빛깔 삶의 현장으로, 다가올 수필 시대의 주역으로, 당신을 모십니다. 대한민국 1등 수필전문지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에세이문예는 참신한 수필가를 꿈꾸는 여러분들에게 최고의 무대가 될 것입니다.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여 수필의 미래를 밝히고자 하는 에세이문예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수필로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신념이면 충분합니다. 최고 수준의 등단수필작가로 성장하고 싶으시면, 지금 제12회 에세이문예 본격수필신인상 작품 공모전의 문을 두드리세요.
모집 부문 본격수필: 2편 이상(원고지 15매 내외) 원고마감: 2007년 6월 10일 보낼 곳: 607-060 부산시 동래구 온천1동 172-35 협성스카이라인 1019호 O/T 계간 에세이문예사 편집실 문의: 051) 557-5085, 016-572-3862(주간), 018-571-5003(편집인) 방법: 우편 또는 이메일- essaylit@hanmail.net 심사: 응모된 작품은 본지 본격수필신인상선정위원회에서 심사함 발표: 2007년 가을호( 2007년 8월 발행)-사전 개별 통보 대우: 1) 당선자는 수필가로 예우함 2) 당선자로서 소정의 등단 수속을 마치면, 본격수필가로 문단에 등단되며 각종 문인협회에 입회할 수 있음 2) 수시 작품 발표 및 특집 기회 부여 및 문단활동을 적극 지원 3) 에세이문예사가 추진하는 각종 행사에 특별 초대 3) 발표 작품에 대한 전문 해설 및 평론 지원 4) 작품집 발간에 따른 전문 서평 지원 및 대표 작품의 영어번역 지원 유의 사항: -.응모봉투에 <본격수필신인상 응모작품>이라고 적을 것 -.별지에 응모자의 본명, 주소, 나이, 전화번호, 직업, 약력을 반드시 첨부할 것 -.원고는 A4지에 워드로 작성한 이메일 접수를 원칙으로 함 -.응모작품은 반환의 책임을 지지 않음 -.당선자에게만 우편으로 당선 통보함. -.메일 보내는 사람에 반드시 본명을 적을 것 # 참고로, 등단 수속시 당선작품 게재지 50부 인수비가 듭니다.
계간 에세이문예 편집주간 송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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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때때로 낭비해 보는 것은 대단히 유쾌한 일. 그것은 습관이라는 무감각한 타성에 의해 절제하는 것을막아 준다. / 서머셋 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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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六十三章 (노자 - 도덕경 : 제6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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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大小多少, 報怨以德, 圖難於其易, 爲大於其細, 天下難事, 必作於易, 天下大事, 必作於細, 是以聖人終不爲大, 故能成其大, 夫輕諾必寡信, 多易必多難, 是以聖人猶難之, 故終無難矣.
위무위, 사무사, 미무미, 대소다소, 보원이덕. 도난어기이, 위대어기세. 천하난사, 필작어이, 천하대사, 필작어세. 시이성인, 종불위대, 고능성기대. 부경낙필과신, 다이필다난. 시이성인유난지. 고종무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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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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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셋째 장
직역
함이 없음으로 행하고, 일이 없음으로 일을 하고, 맛이 없음으로 맛을 보라. 크고 작고 많고 적은 원한을 값을 때 덕으로 한다. 어려움은 쉬울 때 도모하고, 큰 것은 그것이 작을 때 행한다. 하늘 아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것에서 시작하고, 하늘 아래 큰 일은 반드시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끝까지 큰 일을 하지 않으므로 능히 그 큼을 이룬다.
무릇 가볍게 응낙하는 것은 반드시 믿음이 적고 쉬운 일이 많으면 반드시 많이 어렵게 된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오직 그것을 어렵게 한다. 그러므로 끝까지 어려움이 없다.
해석
보답을 바라지 않고 일을 하고, 일을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즐긴다는 생각으로 일을 한다. 즉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 있어서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은 오락이다.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이 된다면 매우 힘든 일이다. 자신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그것이 일이 되는 것이다.
아주 작은 병이 있다. 몸에 상처가 조금 났다. 그때 치료를 하면 괞챦다. 그러나 아주 작다고 그대로 방치하다가 더 큰 병을 불러올 수 있다. 감기가 아주 작은 병이라고 생각을 하고 치부하다가 폐렴으로 번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폐렴으로 번지기전에 처리를 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큰 일은 작은 데서 시작한다. 소홀한 관리 때문에 다리가 무너지고 무수한 인명을 앚아가는 큰 일이 된다. 불은 아주 작은데서 일어난다. 그러나 건물 한채를 태우는 것은 순식간이다. 성인은 큰 불을 앞에 나서서 끄는 사람이 아니다. 큰 불이 나기전에 사전에 관리를 철저히 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고, 큰 일을 하지 않는 것 처럼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더 큰 일인 것이다. 아주 쉽다고 다음으로 미루는 것을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미루기 때문에 아주 쉬운일이 어려운 일이된다. 쉬운일이 곂치면 모두 어려운 일이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때에 그 일을 끝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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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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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하지 않는 것(무위)을 행하고, 일없는 것(무사)을 일삼으며, 맛없는 것(무미)을 맛보고 작은 것을 크게 여기고 적은 것을 많게 여긴다. 원한이 있으면 덕으로 갚는다. 어려운 일은 어려워지기 전에 손대고, 큰 일은 그것이 커지기 전에 해결한다. 이 세상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작은 데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결코 큰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무릇 쉽게 응낙하는 것은 믿음성이 적게 마련이고, 쉬운 것이 많으면 반드시 어려운 것이 많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오히려 쉬운 일을 어렵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주
무위: 도에 순응하여 의도적인 행위가 없는 다스림. 무사: 도에 순응하여 무위자연의 다스림을 행하기 때문에 별다르게 할 일이 없다는 뜻임. 미무미: 맛없는 것을 맛본다는 것이니 도를 체득한다는 뜻. 보원이덕: 원한은 덕으로 갚으라는 뜻임. 노자 윤리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말임. 곧음(정의)으로 원한을 대하고, 덕은 덕으로 갚으라는 공자의 가르침과는 대조를 이룬다. 시비와 선악과 포폄을 초월하는 노자의 윤리관과 원망과 은덕을 다같이 은덕으로 갚는다는 것을 불공평한 행위로 보고 차별적 가치판단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는 공자의 윤리관은 후세 학자들의 논쟁 대상이 되어 왔다. 천하난사 필작어이 천하대사 필작어세: 이 세상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데서 일어나고, 이 세상의 큰 일은 반드시 작은 데서 시작된다는 뜻임. 일이란 쉽고 미세할 때 처리하라는 말이다. 역경에도 '신하로서 임금을 죽이고, 자식으로 아비를 죽이는 일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살펴본다면 점진적인 것이다. 그 징조를 통찰하여 대책을 세우고 일찍 처리하는 데에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에 말하기를 서리를 밟으면 곧 굳은 얼음이 형성될 때가 오게 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은 모든 일은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만사를 쉽고 미세할 때 처리하라고 강조한 점에 있어서 노자와 발상을 같이 한다.
해
하지 않는 것을 행하면, 할 일이 없게 된다. 이것이 무위자연의 다스림이다. 그것은 도에서 나온 것이므로 별다르게 자극적인 맛이 없다. 그저 순수하고 담박한 맹물과 같다. 그러나 우리의 갈증을 풀어 주는 데는 담박한 맹물 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무위자연의 다스림이란 어려운 일은 어려워지기 전에 손대고, 큰 일은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풀어 나가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데서 일어나고, 이 세상의 큰 일은 반드시 작은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은 미세할 때 손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게 되는 것이다. 크게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나 작게는 집의 축대를 손질하는 일 등은 다 미연에 방지하고 미세할 때 손쓰는 것이 최상책인 것이다. 성인은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 손쓰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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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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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 7장 도굴,도난 위조품
새벽에 발견한 황금 보따리
미슬품의 도난이나 위조 행위는 유적지에서 고대 유물을 절취하는 도굴행위와 함께 외국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미술품 범죄사건이다. 어디서나간에 그 범행 동기는 손쉽게 큰돈을 벌려는 일반적인 범죄심리가 지배적이지만 경우에 따라선 질투와 적의 혹은 영웅심에서 발단된 예도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일어난 최대의 세계적인 미술품 도난 사건은 1911년 8월 21일에 파리의 루브르미술관에서 발생했던 유명한 '모나리자' 의 실종이었다. 범행 2년 후인 1913년 11월에 체포된 범인 페루지아(루부르미술관의 고용인이었던 이탈리아 청년)는, 지난날 이탈리아를 짓밟고 이탈리아의 문화재와 미술품들을 마구 약탈해갔던 나폴레옹에 대한 복수였다고 정치적이고 영웅적인 동기를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범인은 '모나리자' 를 이탈리아로 숨겨 갖고 가 "나는 가난하다" 면서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에 10만 불에 팔려고 하다가 붙잡혔던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고 가장 유명한 기록은 1927년 11월 10일 밤에 경주박물관에서 발생한 금관총 출토유물의 도난사건이다. 도난 사실이 밝혀진 것은 11일 아침이었다. 범인은 유물 진열실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서 금관을 제외한 나머지 순금제 유물인 과대·요패·귀고리·팔찌·반지 등을 몽땅 싸 갖고 사라졌다. 황금유물만 노린 도둑이었다. 차마 금관까지는 손댈 수 없었는지 아니면 싸 갖고 가기가 거추장스러워서였는지 어쨌든 그것만 무사했다. 신라왕릉에서 출토된 황금유물 도난사실이 알려지자 경주 시내는 발칵 뒤집혔다. 신문들은 약 1만 원 상당의 신라 귀금속품이 도난당했다고 대대덕으로 보도했다. 용의자 몇 명이 검거되었으나 그들은 범행을 부인했고 증거도 없었다. 범인들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도난당한 순금유물들이 곧바로 일본이나 어디로 유출되지나 않았을까. 혹은 범인이 단순한 금덩어리로 만들어 팔아먹으려고 유물의 형태를 짓이겨버리는 최악의 사태가 나지는 않았울까.' 경찰보다 경주 시민들이 더 초초해 했다. 경찰과 박물관측에선 범인이 보통 무식한 도둑일지 모른다는 전제 하에 "천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금세공품은 아무리 녹여 갖고 있어도 요즘의 금과 달라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또 그때만 해도 무덤 속에서 나온 물건을 집안에 갖고 들어오면 반드시 식구 중의 누가 앓거나 변고가 생긴다는 미신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앓는 사람이 잇는 집이나 무슨 변고가 있는 집을 특히 주목해서 수사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는 유언도 퍼뜨려 범인에 대한 심리적인 작전도 폈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였다. 해가 바뀌어 1928년 봄이 되어도 범인과 도난유물은 오리무중이었다. 경찰 수사는 절망적이었다. 경주로 유람객을 유치하는 데 다시 없는 중요한 박물관 보물을 영원히 잃어선 안된다고 생각한 경주번영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도난당한 물건의 소재지나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람에겐 1,000원의 사례금을 내겠다고 발표했다. 도난미술품에 대한 국내 최초의 거액현상금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정보도 단서도 잡히지 않았다. 안타깝게 5개월이 지났다. 그러던 5월 20일 새벽 5시께의 일이었다. 경주 시내에서 변소를 치러다니던 한 노인이 경찰서장 관사 앞을 지나다가 대문 기둥 밑에 놓여진 흰 백로지로 싼 이상한 보따리를 발견했다. 다가가서 지겟작대기로 넌지시 찔러보니 속에서 찰그락 하고 금속음이 울리고, 싼 종이의 한켠이 벌어졌다. 그 순간 노인은 깜짝 놀랐다. 번쩍이는 황금빛, 숨을 죽이고 물건을 다시 살펴보던 노인에게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박물관 도난품? 노인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황금 보따리를 들어 가슴에 안고 거름지게를 진 채 경찰서로 곧장 달려가서 숙직실 문을 두드렸다. 노인이 들고 온 보따리는 과연 경주박물관에서 도난당했던 그 순금 유물들이었다. 기적의 생환이었으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범인은 반지 하나와 그밖의 순금장식 몇 점만 갖고 나머지를 고스란히 경찰서장 관사 문밖에 갖다놓고 다시 종적을 감추었다.
현재 국보 제88호로 지정돼 있는 금관총 '과대와 요패' 가 그때 도난당했다가 되돌아온 물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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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5. 도교란 무엇인가
5. 도교, 도가의 한국적 전개
우리 나라에서 도가와 도교 사상의 흔적은 매우 일찍부터 나타난다. 단군이 신선이 되었다는 단군 신화의 내용은 도가 사상이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문헌상으로 볼 때도 삼국 시대의 막고해나 을지문덕 등과 같은 무장들이 "노자"의 문장을 인용해 적을 격퇴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노자"의 병가적 성격을 참조한다면 이 당시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가 사상에 관심을 가졌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 종교로서의 도교가 전래된 연대는 연개소문의 건의에 의해 당에서 수입했다는 643년이다. 고려 예종은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도관인 복원궁을 건립하였다. 이러한 도교는 이후 조선 시대에 들어 주자학이 세력을 잡기 이전까지, 때로는 무속적인 요소와 결합하고 때로는 지리도참 사상과 결합하면서 정치적인 측면에서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조선에서는 소격서가 혁파된 이후로 유학에 밀려 사상적으로는 지식인들에게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건강 관리라는 측면에서 수련 도교의 양생술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황과 같은 유학자도 도교적인 양생술에 매우 깊은 관심을 보였고, 허준의 "동의보감"과 같은 의술서에서 그 의학적인 진면목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도교와 관련된 인물 중 유명한 사람은 신라의 경우 최치원과 김가기, 고려의 경우 강감찬과 한유한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의 경우 남궁두, 김시습, 홍유손, 정렴, 전우치, 곽재우, 권극중 등이 유명하다. 전우치 등은 백성들에게 초인적인 인간으로 여겨져 많은 추앙을 받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학문적으로 도교를 가장 깊게 연구한 사람은 "참동계"에 대한 주해서를 낸 권극중이다. 이 밖에 비록 도교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도교에 많은 관심을 가진 학자로 허목, 서명응, 이규경 등을 들 수 있다. 역사의 기록으로 볼 때 "도덕경"이 중국에서 우리 나라에 정식으로 들어온 것은 당대 초기의 일이다. 고구려 영류왕 7년(624)에는 당의 고조가 보내 온 도사가 "노자"를 강론하였고, 보장왕 2년(643)에는 당 태종이 "도덕경"을 왕에게 보내 왔다.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도교의 전래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울 나라에서 역사서에 기록된 도가서를 강해한 최초의 사례는 고려 예종 3년(1118)에 한안인에게 "노자"를 강론하게 한 것이다.
노장 사상은 조선에서는 이단으로 지목되어 비판을 당하지만, 수용하는 입장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학자들이 볼 때 가장 대표적인 이단 사상은 노장 사상과 불교 사상이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불교 사상은 강상윤리를 철저하게 부정한다는 점에서 전혀 용납하지 않았지만, 노장 사상은 강상윤리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수기치인이라든지 수기치국의 측면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예외를 두었다. 조선 초기 정도전, 권근 등이 노장 사상을 이단으로 여겨 학문적으로 비판을 가하였지만, 이이가 "순언"이라는 "노자" 주석서를 낸 이후부터는 학자에 따라 노자 사상을 다리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 후 박세당, 서명응, 홍석주 등도 "노자"를 수기치인의 책이라 본 이이와 같은 맥락에서 "노자"를 주석하고 있다. "장자"의 경우 한원진은 부분적으로는 부정하고 부분적으로는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박세당은 매우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유학자들의 노장 이해에서 공통적인 면은 "유학의 입장에서 노장을 이해한다"는 것이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노장 사상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시인 묵객 치고 노장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유학자의 경우도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노장 사상을 문학에 이용해 시대를 비판한 학자도 나타나는데, 허균이나 박지원 등이 그 대표적인 학자이다. 도교는 비록 유학을 바탕으로 한 위정자들에게 때로는 혹세무민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때로는 개인의 안위만을 꾀하는 사상으로 여겨져 비판받기도 하였고, 또 실제로 그러한 면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특히 무속과 결합된 도교는 그러한 면이 더욱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이런 도교가 백성들에게는 자신의 한과 억울함을 풀어 주는 심리적 기제로 작용하였고, 때로는 그것이 강한 응집력을 보여 기존의 체제를 부정하는 사상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중국의 오두미도를 바탕으로 한 황건적이 바로 그 한 예이고, 조선 후기 일제의 침탈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저항을 하게 만든 원동력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런 점은 왜 일제가 우리의 무속을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가를 생각하면 잘 알 수 있다.
노장 사상도 때로는 몰락한 지식인들에게 현실 도피처로서 역할하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 측면으로는 그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문제점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인물들에게 학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나아가 이상 사회를 꿈꾸었던 사람들의 근간 사상이 되기도 하였다. 도교와 도가 사상에 깃들어 있는 이런 저항 정신과 비판 정신을 정확하게 이해할 때 오늘날 그것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간략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더 읽어 보아야 할 책들
이능화, "조선도교사", 이종은 역주 (보함문화사, 1977) 차주환, "한국도교사상연구" (한국문화연구소, 1978) 송항룡, "한국도교철학사" (성균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 1987) 한국도교사상학회, "한국도교와 도가사상" (범양사, 1988) 이강수, "도가사상의 연구"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1990) 한국도교사상학회, "한국도교와 도가사상" (아세아문화사, 1992) 주정충부 외, "도교란 무엇인가", 최준식 옮김 (민족사, 1993) 문영오, "연암소설의 도교철학적 연구" (태학사, 1994) 한국도교사상학회, "도교의 한국적 수용과 전이" (아세아문화사, 1995) 한국도교사상학회, "노장사상과 동양문화" (아세아문화사, 1995) 김충열, "김충열교수의 노장철학강의" (예문서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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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특하다
본뜻 :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온 일을 가리키는 말로서, 매우 드물고 특이한 일을 가리킨다.
바뀐 뜻 : 주로 어린아이를 칭찬할 때 쓰는 말인데, 말이나 행동이 특별하여 귀염성스러울때를 일컫는다.
"보기글" -아이고, 고 녀석 기특하기도 하지 할미 먹으라고 과자를 다 가지고 왔어? -어른을 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꼬박꼬박 인사를 잘 하니 얼마나 기특해?
기합 주다
본뜻 : 글자 그대로 어떤 힘을 발휘하기 위한 정신과 힘의 집중을 얘기한다.
바뀐 뜻 : 주로 군대나 학교 같이 단체 생활을 하는 곳에서 규율이 잘 지켜지지 않을 때, 그런 상태를 기가 흐트러졌다고 한다. 그렇게 흩어진 기를 모으게 하여 정신과 행동의 규율을 되찾게 할 목적으로 체벌이나 벌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보기글" -너희들, 그렇게 떠들면 단체 기합 받는다 -국어 시간에 떠들었다가 운동장 열 바퀴 뛰는 기합을 받았더니 다리가 후들거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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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19세기 초 유럽대륙은 아직도 혁명의 몸살을 앓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의회정치의 기틀을 마련해 가고 있었지만, 유럽 전체에서 보자면 영국이 오히려 예외적인 과정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진통은 프랑스혁명을 통해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한 시민계급이 아직도 여력이 남아 꿈틀거리는 봉건적 질서와 마지막 싸움을 하고 있는 과정이었다. 그럴 즈음에 터져 나온 것이 바로 <공산당선언>이다. 1848년 '혁명의 해' 2월에 나온 이 <공산당선언>은 시민계급의 타도를 선언하고 노동자 세계의 도래를 알렸다. 시민계급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제 막 지배권을 확립할 참인데, 갑자기 다시 노동자의 세계라니! <공산당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다.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비밀경찰 등 낡은 유럽의 모든 권력들이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체결했다." 노동자들은 막 시작되고 있던 산업혁명으로 그 수가 많이 불어나긴 했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들의 의식수준도 그리 높지 않았다. 자신들이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투표권를 박탈당한 채 살고 있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닌 사회의 모순 때문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럴 즈음에 <공산당선언>이 나와 이들이 역사의 주인임을 선포하고 나선 것이다. <공산당선언>에서 선언한 바는 "이제까지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사실이다. 곧 지금까지의 역사는 착취하는 지배계급과 착취당하는 피지배계급 사이의 투쟁이었다. 부르주아지는 봉건귀족에 억압당하는 계급이었으나 계급투쟁에서 승리했고, 이제 지배계급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프롤레타리아트를 억압하는 지배계급이 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 내에서 계급투쟁은 부르주아계급과 프롤레타리아계급 사이의 투쟁이다. <공산당선언>은 노동자들이 이러한 대립에서 승리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단결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모든 지배계급을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트가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밖에 없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이처럼 <공산당선언>은 이제 막 성장하고 있던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정치적 선언문 가운데 <공산당선언>만큼 큰 성공을 거둔 것도 별로 없다. 처음에는 독일어로 나왔으나 삽시간에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고, 현재에는 거의 모든 나라의 언어로 출판되었다. 선동적이고 명쾌한 논리가 돋보이는 이 선언문은 모든 정치적 선언문의 교과서가 될 만하다.
선언문의 작성자는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였다. 마르크스는 독일 출신이지만 정치적인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다. 영국은 그에게 정치적 자유와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대영박물관에 틀어박혀 자료를 뒤적이며 연구에 몰두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자본론"으로 이는 자본주의를 해명해 놓은 책이다. 엥겔스는 그의 충실한 경제적 지원자였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 동지였다. 마르크스에 가려져 엥겔스의 뛰어남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 역시 뛰어난 학자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다. 한쪽에서는 '폭력과 유혈을 선동하는 사람'으로 비난받았고, 다는 쪽에서는 '인류와 노동자의 해방을 위한 새로운 사상의 창조자'로 찬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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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자신의 수준에 걸맞은 남성을 얻게 된다.
'남자는 단순히 디저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때, 나는 동음의 다른 낱말인 '디저트'의 의미도 포함하여 사용하고 있다. 결국 여성은 자기에게 걸맞은 남성을 얻게 된다. 당신이 자신을 반쪽짜리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자기와 합하여 둘이 될만한 한 배 반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남성을 발견할 가능성은 적다. 반쪽짜리 인간을 택할 것이 뻔한 것이다. 자신의 값어치를 영점으로 매기고 있는 경우에는, 저울질해 보는 사람의 겉모습이 활달하고 매력 만점이며 자신감이 넘쳐 보여 훌륭하게 생각되겠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 역시 영점일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는 한 사람 몫의 인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이 택하게 될 동반자는 결혼하길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남성일 것이다. 자신을 의지할 수 있는 어깨가 필요한 나약한 여자라고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결국 당신은, 아내에게는 무엇하나 결정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에서 열까지, 예를 들면 스타킹의 색깔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신을 때까지 사사건건 간섭하고 싶어하는 까다로운 남편과 만나게 될 것이다.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남성을 찾으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를 그대로 닮은 사람과 만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도대체 무엇을 간과하고 있는 것일까? 대개의 여성은 요람에서 학교로 옮겨가고, 운이 좋으면 대학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하기도 한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일정기간 동안 직장에 다니다가 결혼을 한다. 자신이 어떠한 인간인지 돌아볼 겨를도 없이 모든 단계가 자동으로 척척 넘어간다. 모든 것은 남편을 손에 넣는 일, 그것 하나에 달려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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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살아 돌아온 함흥차사 성석린
성석린(1338-1423)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자수, 호는 독곡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 방원은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인데, 태조가 창업할 때 가장 공이 많았다. 계비인 신덕 강씨의 소생인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고, 정도전이 방석에게 아부하여 방원을 해치려 하였다. 이 음모를 알게 된 방원은 선수를 쳐서 군대를 동원하여 정도전을 죽이고 방석을 폐출시켰다. 화가 있는 대로 난 태조는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고 밤중에 함흥 관저로 떠나버렸다. 이때부터 문안사자가 잇달아 함흥으로 갔지만 가는 족족 다 죽고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 그것을 일러 '함흥차사'라고 부르는 말은 이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더이상 함흥차사로 가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자 성석린이 자원하고 나섰다. 태조와 친분이 있는 그는 자기가 태조의 마음을 돌리고 오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태종은 기꺼이 허락하였다. 그는 무명옷에 백마를 타고 떠났다. 함흥에 도착하자 그는 말에서 내려서 나그네가 하듯 밥을 지었다. 밥짓는 연기가 나자 멀리서 바라보던 태조가 그에게 환관을 시켜 물어 왔다. 성석린은 환관에게 "볼일이 있어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말도 먹일 겸 투숙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환관이 돌아가서 그대로 아뢰자 태조가 반갑게 그를 불러들였다. 석린은 조용하게 인륜의 중요함을 말하고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을 개진하였다. 태조가 갑자기 얼굴빛을 바꾸며 물었다.
"너는 너의 임금을 위하여 나를 설득하려고 왔느냐?"
겁을 먹은 석린은 엉겹결에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제 말씀이 거짓이라면 제 자손은 반드시 장님이 나올 것입니다"
어쨌든 태조는 그 말을 믿고 마음을 돌렸으며 아들 태종 임금과 화해하게 되었으나, 문제는 성린의 집에서 생겼다. 그의 맏아들 지도는 장님이고, 둘째인 발도는 자식이 없고, 지도의 아들 창산군 귀수와 귀수의 아들이 모두 뱃속 장님이었다. 성린의 벼슬은 영상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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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 컨테스트
우리 나라에서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라고 하는 것이 더 이해가 빠를 것 같다. 그나마 요즈음 '미스 000'도 흔해 빠져서 '미스 관청, 회사'에서부터 화장품과 약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자못 다양하다. 그러나 그 역사를 살펴보면 아득한 희랍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희랍신화에서 '헤라', '아데나', '아프로디데'의 3여신이 트로야의 왕자 '파리스'를 심판관으로하여 미를 다툰 끝에 그것이 원인이 되어 트로야 전쟁이 발생했다고 하는데 아마 '미인 컨테스트'의 효시라하여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신화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 고대희랍에는 오늘날 유행인 '미인 컨테스트'가 행해지고 있었다. '레스보스'섬, '테네도스'섬, '알카디아'의 '바실리스' 등에서 거행 되었는데 요즘은 수영복 차림이지만 그 당시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기 않는 완전한 누드였다. 남성들로서는 군침이 돌만한 얘기지만 오늘날처럼 화장품 회사가 스폰서로 나서는게 아니고 종교적 행사여서 지극히 엄숙한 것이었다. 또 '에리스'와 '아테네'에서는 '남성미 콩쿠르'도 거행되었는데 이 역시 완전 나체로서 종교적 행사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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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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