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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73 호
단기 4340. 5. 6 (음력 03.2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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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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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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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땅은 봉사해 준 대가로 나무를 붙들어 두지만 하늘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나무를 자유롭게 내버려둔다. /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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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六十二章 (노자 - 도덕경 : 제6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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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者, 萬物之奧, 善人之寶, 不善人之所保, 美言可以市, 尊行可以加人, 人之不善, 何棄之有, 故立天下, 置三公, 雖有拱壁以先駟馬, 不如坐進此道, 古之所以貴此道者何, 不曰以求得, 有罪以免邪, 故爲天下貴.
도자, 만물지오, 선인지보, 불선인지소보, 미언가이시존, 행가이가인, 인지불선, 하기지유, 고립천하, 치삼공, 수유공벽이선사마, 불여좌진차도, 고지소이귀차도자하, 불왈이구득, 유죄이면사, 고위천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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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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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둘째 장
직역
도라는 것은 만가지 것의 보금자리요, 좋은 사람의 보배이며, 좋지 못한 사람도 보유하고 있다. 아름다운 말은 시장에 어울리고, 고귀한 행동은 남에게 부담을 준다. 사람이 좋지 못하여도 어찌 그것을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천자로 서서, 삼공을 두고, 비록 보석을 바쳐들고 사두마차를 앞세워도 앉아서 이 도에 나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옛부터 이 도를 귀하게 여긴 것은 무었 때문인가. 안된다고 하여도 이것으로 구하면 얻고, 죄가 있어도 이것으로 면책을 받음이 아닌가. 그러므로 하늘 아래 귀하게 여긴다.
해석
좋은 사람은 도를 보배로 여기고 잘 간직을 하고 키워간다. 좋지 못한 사람도 도를 가지고 있다. 도는 좋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남에게 아름답게 꾸며서 물건을 팔고, 위선된 행동을 해도 그 도는 떠나지 않는다. 아니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의 깊은 곳에는 도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어서 장관들을 거느리고 돈 다발을 들고서 리무진을 타고 다녀도 이 도에 나가는 것만 못한 것이다. 그러한 일들이 영원하리라 보는가. 잠깐의 순간이다. 영화가 크면 클 수록 사라지고 난뒤의 폐허는 더욱 클 뿐이다. 외면의 것은 모두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내면의 도뿐이다.
죄는 없다. 단지 조금 빗나갔을 뿐이다. 도로 다시 돌아오면 된다. 도로 돌아오면 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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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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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도는 만물을 생성하는 오묘한 밀실이다. 도는 착한 사람에게는 보물이요, 착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보호되는 곳이다. 도에서 나온 아름다운 말은 어떤 보물보다도 소중한 것이며, 도에서 나온 기품 있는 행위는 남들이 우러러보는 존귀한 것이다. 착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어찌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천자를 옹립하고 삼공을 임명했을 때, 비록 아름드리 구슬은 안고 남보다 먼저 사두마차로 달려와서 그것을 바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만히 앉아 이 도를 진상하는 것만 못한 것이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이 도를 소중하게 여긴 까닭은 무엇인가. 도에 의하여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비록 죄를 짓더라도 사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주
오: 어둡고 깊숙한 방, 밀실을 뜻함. 도는 만물을 감싸주고 덮어 준다. 그러나 그 작용은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하다. 그래서 밀실이라고 한다. 미언가이시: 도에서 나오는 유익한 말은 어떤 보물보다도 소중하다는 뜻임. 존행가이가인: 도에서 나오는 기품 있는 행위는 남들이 우러러보는 존엄한 것이다. 삼공: 백관 중에서 최고위급 관원, 태사, 태부, 태보를 말함. 공벽: 아름드리 둥근 큰 구슬, 팔을 벌려 두손끝이 겨우 맞다을 만한 큰 구슬을 말하는 것. 벽은 크고 둥근 구슬을 뜻함. 사마: 말 네필이 끄는 마차 유죄이면야: 죄가 있어도 구제된다는 뜻임. 만물을 보호하고 육성해 주는 도는 그 너그러운 품속에 모든 것을 차별 없이 포용한다는 뜻임. 야를 야로 쓴 판본도 있으나 뜻은 같다.
해
도는 만물을 길러 주고 감싸주는 오묘한 존재이다. 그것의 작용은 신비하고 불가사의하다. 그러므로 도는 착한 사람을 비호한다. 그러나 과거에 지은 착하지 못한 사람도 비호한다. 시비와 선악과 포폄은 모두 인간적 차원에서의 구분이다. 그것은 결국은 개개인의 주관적 판단 기준에 의하여 구분되고 선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세계에 있어서의 모든 가치판단이란 동전의 양면처럼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절대선 이니 절대 악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도는 이와 같은 상대적 가치판단의 세계를 초월하여 근원적 시점에서 만사를 차별과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도를 우리는 함부로 값을 매길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와 삼공에게 이 무위자연의 도를 알게 해 준다면, 그것은 사두마차를 몰고와서 아름드리 구슬을 안겨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선물이 될 것이다. 도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관건이다. 도에 의존하면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고, 죄가 있더라도 사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도는 이 세상 만물을 감싸주고 길러 주는 자애로운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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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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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 7장 도굴,도난 위조품
석가탑 다라니경의 위기일발
재벌과 사회 권력층의 고미술품 수집열은 도굴을 조장하는 한 원인이었다. 1965년을 전후해서 전국의 직업적 또는 일시적인 도굴군의 총수는 약 천여 명으로 추산됐다. 그들은 고분만 도굴하는 것이 아니라 국보 석탑까지 무너뜨리거나 지렛대로 한쪽을 들어올리고 내부의 사리장치 유물을 훔쳐냈다.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각종 도굴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범인들은 그때마다 수배당하고, 대개 검거 구속된 후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았으나 얼마 안 있어 모두 풀려나왔다. 문화재보호의 최대의 암인 도둘꾼의 범행은 좀처럼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최근엔 법이 강화되어 도굴사건이 거의 사라진 듯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근절됐다고 믿기도 어렵다. 전체국민의 분노를 샀던 가장 악질적이고 대담한 도굴배들의 범행은 경주 불국사 석가탑(국보 제12호)의 유린과 내부유물의 탈취 기도였다. 1966년 9월의 사건이었다. 감히 석가탑의 내부 유물을 노린 범인들의 배후의 인물은 경주 시내의 악명 높은 골동상인 윤아무개였다. 9월 3일, 윤의 집에서 유아무개, 주아무개, 임아무개 등 4명이 치밀한 계획을 짠 후 그날 밤 11시에 불국사로 침입했다. 그러나 주가 준비했던 재크가 거대한 삼층석탑(석가탑)의 중심부를 한쪽으로 들어 올리기엔 너무 작아 1차 기도는 결국 실패앴다. 다음날, 대구에 가서 급히 구해 온 대형 오일 재크를 갖고 유와 주가 2차로 불국사에 접근해 갔다. 역시 밤 11시께 고요한 한밤중을 택했다. 그들은 재크로 석가탑의 1층 옥개석 한쪽을 들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날 밤, 3차 범행이 시도되었다. 이번엔 3층 옥개석을 들어 젖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범인들이 노렸던 사리장치 유물은 만질수 없었다. 또 허탕이었다. 만일 다음날 아침에 불국사 승려가 석가탑의 이상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었던들 법과 사회 도의를 비웃던 범인들은 그날 밤 2층 옥개석을 마지막으로 들어올려 보고 마침내 세계 최고의 목각 인쇄물인 다라니경과 참으로 귀중한 불국사 창건 당시의 수십 점의 석가탑 사리장치 유물(현재 일괄하여 국보 제126호)을 고스란히 절취하는 데 성공하였을는지도 모른다. 위기일발의 모면이었다.
당시 석가탑은 범인들의 무자비한 재크 사용으로 석탑의 한 부분이 깨져 나가고 탑신 전체가 한쪽으로 기울어 무너질 듯한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도굴범들의 소행임이 분명하다고 본 불국사측은 긴급 신고를 했고, 경주경찰서는 용의자를 수배한 지 며칠 만에 범인 일당을 검거했다. 잡혀 온 범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탑을 해체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었다. 범인들이 건드려 한쪽으로 위험스럽게 기운 석가탑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문공부 문화재관리국은 탑의 피해상을 바로잡고 사리장치 유물의 안전 여부도 확인하기로 결정했다. 문화재 전문가와 석조물 보수 전문가들이 현지에 내려가 해체·보수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작업 도중 2층 옥개석이 로프에서 떨어져 일부가 파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또 발생했다. 그러나 바로 그 밑에서 '다라니경' 과 사리장치 유물들이 완전한 상채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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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5. 도교란 무엇인가
4. 도교의 경전
도교의 최초 경전은 "태평경"이라고 한다. 경전 목록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서 최초의 것은 갈홍의 "포박자" 내편이다. 도교 총서로서는 "도장"과 "도장집요"가 있다. '도장'이란 도교의 모든 경이라는 뜻으로 불교의 대장경에 상응하는 것이다. 현재의 "도장"은 명대 1445년에 480함 5,305권의 도교 경전을 수집한 것이다. 이것을 정통 도장이라고 부른다. 그 후 1607년에 정일교 제50대 천사 장국상이 명을 받아 32함 180권의 도교 전적을 수집하였는데, 이것을 "속도장"이라고 한다. 오늘날 간단히 줄여서 "도장"이라고 하면 대개 정통 도장과 "속도장"을 가리킨다. "도장집요"는 청의 가경 연간(1796_1820)에 장원정이 편집한 것이 최초의 것이다. 도교와 관련된 "노자"의 주석서로 유명한 것은 "노자하상공장구"와 "노자상이주"이다. 이 밖에 도교의 중요한 경전에는 "상청경", "참동계", "황정경", "운급칠첨", "음부경" 등이 있다. 그런데 도교가 중국 사회 일반에 걸쳐 신앙화된 까닭은 그와 같이 난해한 경전 덕분이 아니라, 실제로는 "태상감응편", "음즐문", "공과격" 등 세 책의 힘이 매우 컸다. 이 세 책은 송대 이후 널리 중국 전체에 유포되어 사회 일반의 도덕을 유지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그 내용은 일상 생활에 직결되는 도덕적 교훈이었지 결코 고상하고 유현한 철리는 아니었다. 특히 위백양은 "주역참동계"를 지어 리학자들에게 많은 관심거리를 제공하였다. '참동계'란 말에서 참은 잡, 동은 통, 계는 합이라는 뜻이다. 그 사상이 "주역"과 같은 원리이고 뜻이 통하며 대의가 합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노장 철학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입장에서 도교에 대한 연구에 일조를 담당한 사람은 바로 주희였다. 그는 위백양의 "주역참동계"에 주를 달았는데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것을 이용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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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기구하다
본뜻 : 본래 '기구'라는 말은 험한 산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이 사람살이에 비유되어 험난한 인생살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바뀐 뜻 : 세상살이에 곤경이 많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월남전에서 남편을 잃고 5.18때 아들을 잃은 광주 댁이야 말로 기구하다 할 수 있으나, 그녀는 그 모든 고난을 꿋꿋하게 이겨내고 오늘의 위업을 이루어 냈다. -아무리 기구한 인생살이 중에도 웃음꽃이 피는 날이 있게 마련이다.
기절하다
본뜻 : 몸 속을 흐르는 기가 어느 한 순간, 갑자기 그 흐름이 막히면서 끊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바뀐 뜻 : 공포, 두려움, 놀람, 슬픔 때문에 한때 정신을 잃고 숨이 막히는 상태를 표현하는말이다.
"보기글"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돌아왔다는 소리에 안산 댁은 그만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달도 없는 깜깜한 밤길을 혼자 걷는 순이는 풀섶에서 개구리만 튀어나와도 그만 기절할 듯이 자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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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부자가 되라. 그러면 선거권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과거에는 지금처럼 성년 남녀가 모두 선거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성들이 선거권을 갖게 된 것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였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남성들이 누구나 선거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세기에 선거권의 확대가 가장 잘 이루어졌던 영국에서도 남성들이 거의 모두 투표할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 말의 일이다. 그 이전에 이처럼 사람들 사이에 선거권을 구분하게 된 가장 중요한 기준은 경제적인 능력이었다. 말하자면 세금액의 기준에 따라 선별해서 선거권을 주었던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을 때는 사람들을 소위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으로 나누어 '능동적 시민'에게만 선거권을 주었다. 그후 혁명이 더욱 급진전하여 공화국이 성립했을 때에야 비로소 이 차별은 없어졌지만,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프랑스뿐 아니라 프로이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선거를 치를 때 소위 '3급 선거제'라고 하여 재산에 따라 선거권에 커다란 차별을 두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1830년 혁명을 일으켜 7월왕정을 이룩했지만, 그 이전보다 나아진 것을 별로 없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선거권은 많은 사람의 불만을 사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선거권이 확대되었다고는 하지만 인구 3천만 명 가운데 고작 16만 명 정도만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연간 200프랑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는 부자들로 제한되었다. 그러니 7월 혁명을 지지한 사람들로서는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혁명을 일으켰으나 선거권조차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토크빌은 7월왕정에 대해 '모든 일이 주주의 이익을 위해서 행해지는 일종의 주식회사'라고 비꼬아 말하기도 했다.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투표자들의 재산자격을 낮추어 선거권을 확대하라는 요구를 계속했지만 내각을 이끌던 프랑수아 기조(Francois Guizot, 1787-1874)는 끄떡하지 않았다. 선거권 확대 요구에 대해 그는 "일해서 부자가 되라, 그러면 선거권을 얻을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기조의 정책은 철저히 부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자 프랑스혁명과 7월혁명을 경험한 사람들, 특히 노동자들은 이러한 기조내각의 사임을 요구했다. 이에 기조는 '선거개혁을 하느니 차라리 사임하는 것이 백번 낫다'고 응답했다. 개혁주의자들이 연회를 열어 모임을 갖고 이를 성토하자, 기조는 그것마저 금지시켰다. 결국 사람들은 기조내각에 반대하여 시위를 일으켰고 또다시 혁명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바로 1848년에 일어난 '2월혁명'이다. 2월혁명 결과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유럽에서 처음으로 성년 남자 보통선거권이 실시되었다. 그런데 원래 기조는 7월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자유주의 역사가였다. 소르본느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한때 반동정책에 대한 비판 때문에 교단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는 반골파 학자였던 것이다. 반동정치에 과감히 반대하여 7월혁명을 이끌고 낸 그가 7월혁명으로 성립한 7월왕정에 입각하자마자, 완전히 태도를 바꿔 현실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돌변했다. 말하자면 그의 말대로, '반동과 싸운' 그가 '왕정복고를 지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1830년 하원에서 "무질서는 운동이 아니다. 혼란은 진보가 아니다. 혁명적 상태가 사회가 진정으로 진보하는 상태가 아니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보통선거제를 자유와 질서를 파괴하는 제도로 규정하고, 보통선거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자유와 민주주의와 역사발전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철없는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그가 특히 선거권의 확대에 반대한 것은 정치적 자유의 확대를 번영과 질서와 평화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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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충실한 조역'보다는 '분방한 주역'을 선택하라
자기 능력을 계발하는데 그다지 많은 노력도 해보지 않고 좌절과 절망의 수렁에 빠지는 여성들이 있다. 그녀들은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자신의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결혼을 하고 남편에게 자신의 모든 운명을 맡겨 버린다. 남편의 꿈에 동조하고 협력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표를 단념하고, 자기의 인생을 오로지 남편의 관심이나 요구나 목표를 축으로 해서 회전시킨다. 그렇게 봉사하는 대가로 남편의 사랑과 배려, 아내로서의 행복을 보증받으려 하지만, 기대했던 대로 일이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다. 남편은 이러한 사람이고, 자신은 그와의 결혼으로 이렇게 변화될 것이라는 여성들의 기대에, 대개의 경우 남편은 응해 주지 않는다. 그녀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분노 이상으로 남편으로부터 혹시 버림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결국 자신은 헌신적인 아내로서, 그리고 충실한 조력으로서 그 역할을 다해 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버림받을 이유가 없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그리고 아내로서의 자신의 존재나 활동을 인정하고 감사하게 생각할 것을 남편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그 요구는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체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상처받기 쉽고 약해서, 그 나약함은 타인에 대한 의존심을 부채질한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인생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해 아무래도 남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은 지금 이 자리에서 버리는 것이 좋다. 그런 다음 천천히 자신의 능력, 인격, 자존심을 다시 평가해 보아라. 마음이 풍요로워지면 풍요로워질수록 필요로 하는 것은 적어지는 법이다. 마음이 풍요로워질수록 필요로 하는 것은 적어지는 법이다. 마음이 풍요로워지면 상대로 기쁘게 하는일에 급급해하지 않아도 확고히 자기 자신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또한 자기를 행복하게 하거나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음이 풍성해지면 남자 때문에 슬픈 생각이 들거나 행복한 기분에 잠기는 일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여성의 모든 요구에 책임을 갖고 응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한 마음이 풍요로워지면 '메인코스'는 남성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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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끝내 중이 된 태조 이성계의 친구 이지란
이지란(1331-1402)의 본관은 청해이고, 자는 식형이다. 본래의 성명은 퉁두란이었다. 그는 용맹스럽고 힘이 셌으며,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했다. 대대로 여진 부락에서 살았는데, 원나라 말 나라가 매우 혼란하자 가족을 데리고 강을 건너 북청에 와서 살았다.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서로 만났는데, 첫눈에 의기가 투합하여 숙식을 함께 하였다. 고려 우왕 때 일이다. 어느 날 활쏘기로써 여러 장수들이 실력을 겨룬 적이 있었다. 세 차례 시합에서 태조가 번번이 일등을 하자 지란이 그 실력에 감탄하면서 그 실력을 함부로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당부했고, 태조도 이를 매우 고맙게 받아들였다.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이 미워서 태조가 영흥으로 갔다가 풍양으로 돌아오자 지란은 상소하여 중이 되겠다고 한 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수염만은 깍지 않고 두었으니 대장부의 표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두문불출한 채 여생을 보냈다. 72세 때 목욕하고 앉은 채로 죽었다. 그는 아들들이 조정에서 돌아오기 전에 화장하여 그 사리로 탑을 만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아들들은 그의 의관을 가지고 장례를 치러야 했다. 선조 25년(1592) 이전에는 아무도 소나 말을 타고 감히 그의 묘 앞을 지나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지란이 북쪽으로 돌아가던 날 태조에게 이렇게 상소했다고 한다.
"임금을 도와 나라를 정하니 군신의 의가 정해졌고,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니 군신의 의가 끊어졌소"
그 상소문 속에 자기의 상투를 잘라 바쳤으므로 태조가 도저히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허락하였다고 한다. 지란은 건주 정벌의 공으로 청해백에 봉해졌으며, 벼슬은 좌찬성에 이르고 개국 공신 일등에 녹훈되었다. 시호는 양렬이며, 태조의 묘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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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 교향악
음악에 별로 소양이 없는 사람도 '슈베르트' (1797-1828) 작곡의 '미완성 교향악'을 모른 사람은 거의 없다. 원 이름은 '교향곡 제8번 b단조', 제2악장까지만 작곡을 해 놓고 끝을 맺지 못했기 때문에 통칭 '미완성 교향곡'이라 부르게 된 것. 31세로 숨진 이 천재가 남겨 놓은 대량의 악보 가운데서 발견되어 1865년에 처음으로 연주되었다.
이 '미완성 교향곡'에 대해서는 '슈베르트'가 두 번에 걸쳐 음악의 가정교사로 있었던 헝가리의 '엘스텔하지' 백작의 딸 '카로리네'에게 실연하여 작곡 도중에 집어치웠고, 그 악보에 '내 사랑에 끝이 없음과 같이 이 곡에도 끝이 없을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이는 근거없는 속설에 불과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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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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