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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72 호
단기 4340. 5. 2 (음력 03.1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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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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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제2회 디지털작가상 공모전
4천5백만원 고료
제2회 디지털작가상 공모전
주최 : (사)한국전자출판협회 후원 : 문화관광부, 교보문고, 북토피아, 조은커뮤니티, 인티큐브, 지니소프트
● 개요
문화관광부와 (사)한국전자출판협회는 유비쿼터스 시대에 맞는 우수 텍스트 저작물과 작가를 발굴하여 전자책, 모바일북, 오디오북 등의 출간을 지원하기 위해 제2회 디지털작가상을 공모합니다. 디지털작가상은 기존의 문학 공모전과는 달리 다수의 당선작을 배출하며, 응모작과 수상작이 전자책, 모바일북, 오디오북 등으로 출간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응모가능한 디지털작가상에 많은 분들의 응모를 기다립니다.
● 제2회 디지털작가상 공모전 달라진 점
- 1회 때 대상 작품 상금이 3천만원에서 2천만원으로 축소되는 대신, 우수작품 4편을 선정하던 것을 5편으로 확대
- 응모작의 경우 모바일 서비스를 거쳐 모바일 독자 평가 20%를 반영함.
- 수상작품의 저작권 및 일체의 판권은 해당 작가에 부여함
● 공모 분야 및 주제
- 장르 구분없이 500매 이상 1,000매 이내의 중?장편 소설로 주제는 제한 없음
● 심사 방법
- 작품 선성은 심사위원 평가 80%, 모바일북 서비스(독자 평가) 20%를 합산하여 최종 대상작과 우수작을 선정합니다.
- 응모된 작품은 즉시 SKT, KTF, LGT에 모바일북으로 무료 서비스를 하며 독자 평가는 조회수, 리뷰 등 객관적인 평가 지수를 평균화함.
● 일정
- 원고 마감 : 2007년 8월 14일(화) - 접수된 원고는 모바일 무료 서비스를 통해 독자의 평가를 거침 - 심사일정 : 2007년 10월 1개월간 - 최종 대상 및 우수작품 선정 및 시상 : 2007년 11월중
● 분량
200자 원고지 500매 이상 1,000매 이내 (1,000매가 넘는 작품은 심사에서 무조건 제외합니다.)로
아래한글로 작성
● 당선작 상금 및 상패
- 대상 1편 (상금 2천만원, 대상 작가에겐 문화관광부장관상 수여)
- 우수작 5편(상금 각 5백만원씩 총 2천5백만원, 상금 및 상패)
● 응모자격
- 연령, 성별, 신인 및 기성작가 제한 없음
● 발표 및 시상
- 발표 : 한국전자출판협회 홈페이지 (www.kepa.or.kr) - 시상 : 2006년 11월 말 경 ‘한국전자출판산업전’에서
● 원고 접수 방법
1. 원고접수는 온라인 등록만 받습니다.
- 한국전자출판협회 홈페이지(www.kepa.or.kr) -> <제2회 디지털작가상 공모전 원고접수)에서 직접 온라인 등록
2. 작품 표지에 ①성명, ②주민등록번호, ③주소, ④연락처, ⑤200자 원고지로 환산한 원고 분량을 기재하시고, 그 다음 장에 A4 용지 1페이지 분량으로 시놉시스를 반드시 기재해야합니다.
3. 신문 등 지면에 발표되거나 종이책, e-Book, 오디오북 등으로 기 출간된 원고는 당선작에서 제외합니다.
4. 제출된 작품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 제1회 수상 작품
대상(3천만원 창작지원금)
1. 제목 : 난(亂) / 작가 : 권오단
우수상 (각 500만원 창작지원금)
1. 역사/팩션 : 푸른 꿈을 꾸다 / 고유
2. 판타지 : 기억을 보관해 드립니다 / 이안
3. 로맨스 : 그의 동생과 떠나다 / 김류
4. 추리 : 심령술사(心靈術師) 살인사건 / 박미경
제1회 디지털작가상 심사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순원 소설가 - 이광호 문학평론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 이현경 영화평론가 - 박유희 문학,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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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따분한 인간이 되는 비결은 모든 것을 하나에서 열까지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 /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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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六十一章 (노자 - 도덕경 : 제6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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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國者下流, 天下之交, 天下之牝,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故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小國以下大國, 則取大國, 故或下以取, 或下而取, 大國不過欲兼畜人, 小國不過欲入事人, 夫兩者各得其所欲, 大者宜爲下.
대국자하류, 천하지교, 천하지빈, 빈상이정승모, 이정위하, 고대국이하소국, 즉취소국, 소국이하대국, 즉취대국, 고혹하이취, 혹하이취, 대국불과욕겸축인, 소국불과욕입사인, 부량자각득기소욕, 대자의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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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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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한째 장
직역
큰 나라라는 것은 아래로 흐르는 것이다. 하늘 아래가 그것으로 교류하고 하늘 아래의 암컷이다. 암컷은 항상 고요함으로써 수컷을 이기고, 고요함으로 아래에서 행한다. 그러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에 자신을 낮추면 즉 작은 나라를 얻을 수 있고,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 자신을 낮추므로 즉 큰 나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혹은 낮춤으로 취하고, 혹은 낮추기 때문에 취한다. 큰 나라는 사람이 순존하는 것 이외에는 더 욕심을 내지 않고, 작은 나라는 사람밑에 들어가 섬기기를 바라는 것 이외에는 더 욕심을 내지 않는다. 대저 양자가 각기 그 바라는 바를 얻을 수 있으니, 큰 나라는 낮추는 것을 잊지 마라.
해석
이 장 부터는 해석이 사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조금씩이나마 얻은 바를 설명해 보겠다. 큰 나라는 힘을 가진 나라이다. 주위의 약소국들이 큰 나라의 힘을 두려워하여 전전긍긍한다. 그래서 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에 눈치를 살피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큰 나라가 자신의 힘을 믿고 횡포이 군다면 작은나라들은 언제인가 힘을 키워서 큰 나라에 반기를 든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큰 나라라고 해서 강한 힘으로 약소국을 지배할려고 해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큰 나라가 약소국에게 먼저 자신을 낮추어 행동하면 작은나라는 큰 나라에 의지하게 되어있다. 즉 동맹의 관계가 형성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주종의 관계가 된다면 결국에가서는 분쟁과 싸움만이 남게 된다. 이때에 중요한 결정권자는 힘을 가진자이다. 약소국은 강국에게 어떠한 식으로든지 따라가게 마련이다. 이때에 큰 나라가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여 통치한다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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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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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큰 나라는 강물의 하류와 같은 것으로 천하의 모든 것이 모여드는 곳이다. 큰 나라는 천하의 암컷이다. 암컷은 언제나 고요하게 수동적 자세로써 수컷을 이기는 것이다. 수컷을 이길 수 있는 고요함을 지니면서도, 오히려 수컷의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큰 나라가 겸허한 태도로써 작은 나라를 대한다면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 의존하게 되고 작은 나라도 겸허한 태도로써 큰 나라를 대한다면 큰 나라는 그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쪽은 겸허한 태도로서 남에게 받아들여진다. 큰 나라는 남의 나라를 합쳐서 남을 기르고자 하는 것이요, 작은 나라는 큰 나라에 들어가서 그를 섬기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양자 모두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마땅히 큰 것이 아래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
교: 모든 것이 모여드는 곳. 빈상이정승모: 암컷은 언제나 고요하게 수동적 자세로서 수컷을 이기는 것이라는 뜻임. 주역 곤괘의 문언전에도 '곤의 기상은 지극히 부드러우나 그 작용은 강하고 굳세다. 곤은 또한 지극히 고요하나 그 덕은 방정하고 편벽 됨이 없다'고 하며 여성의 덕을 찬양하고 있다. 두 책 모두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강하고 굳센 것을 이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대자의위하: 큰 나라가 마땅히 겸허한 태도를 보여야 된다는 뜻임.
해
노자는 언제나 고요하고 겸허한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위대한 도의 참모습이기도 하다. 고요하다는 것은 마음이 안정되어 있다는 것이요, 욕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동요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겸허하다는 것은 안으로는 남의 위에 있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으나 밖으로는 언제나 부드러운 태도로써 수컷을 이긴다. 그것은 언제나 약함과 수동적인 자세로써 강하고 능동적인 수컷을 이겨내는 것이다. 수동적인 것이 결국은 능동적인 것이 된다는 것은 노자 특유의 반어요 역설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노자의 부드러움은 단순한 부드러움이 아니라 겉으로는 부드러우나 안으로는 굳센 면을 갖춘 부드러움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힘으로 쉽게 제압할 수 있다. 그러나 무력에 의한 정복이란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큰 나라가 먼저 겸허한 자세로 작은 나라를 대하게 되면, 작은 나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복종심으로 큰 나라에 의존하려 한다. 작은 나라는 자신의 실력과 분수를 알고 있으므로 큰 나라를 섬겨 자신의 위상을 보호받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천하에는 분쟁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강과 바다는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능히 이 세상의 모든 물줄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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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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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 7장 도굴,도난 위조품
최대 규모의 현풍 도굴사건
논과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혹은 토목 공사장의 인부가, 그 밖에 고철수집상인, 나뭇꾼, 마을 언덕에서 놀던 어린이가 전혀 뜻밖에 중요한 매장문화재를 출토시킨 후 문화재보호법의 절차에 따라 신고하고 물건을 국가에 바침으로써 수만 원에서부터 백만 원대에 이르는 부상금을 타는 일이 1960년대에 속출했지만, 반면 직업적인 범죄의 도굴이 가장 성행한 것도 그 시기였다. 유명한 현풍 도굴사건이 일어난 것은 1963년의 일이었다. 경북 달성군 현풍면 일대에서 두더지처럼 고분을 파고 들어가서 부지기수의 각종 부장품을 꺼내 팔아 먹던 패거리 일당이 검거 되고 나아가서 서울의 유력한 인사가 그들의 도굴품 가운데 일부 중요한 물건을 사 가졌던 사실이 드러나 세인을 놀라게 했던 사건이다. 시가 2천만 원 상당의 고분 유물 400여 점을 약 2년 동안 탈없이 파먹던 최대 규모의 도굴꾼 일당이었다고 당시 신문들이 대서특필했던 이현풍 도굴사건의 배후에는 악질적인 자금 조달 및 불법적인 매수자로 대구의 골동상인 장아무개, 윤아무개, 최아무개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교사되어 현풍면 일대의 고려 및 신라시대 고분들을 조직적으로 도굴했던 불법행위자 6명은 현지의 농민과 외래 침입자였다. 그들의 조직적인 범죄는 1961년 4월 중순에 착수되었음이 경찰조사에서 밝혀졌다. 범인들은 첫 범행으로 현풍면 하동 뒤쪽의 고려고분들을 도굴, 약 50점의 고려자기를 꺼내는 데 성공했다. 장아무개, 윤아무개가 그것들을 사 주었다. 장과 윤은 그중 30점을 당시 대구 J모직회사에 와 있던 일본인 하야시에게 20만 원을 받고 팔아넘겼다. 그후 현풍지방에서는 수십 회에 걸친 도굴이 거듭되었다. 도굴유물들은 그때마다 장아무개와 윤아무개, 최아마개에게 넘어갔다가 다시 서울로 밀매되어 일부 중요한 것들은 많은 수장가의 손에 들어갔다. 1963년 2월 8일, 대구 경찰에 의해 일망타진된 현풍 도굴꾼과 배후의 조종자 및 도굴품의 중간 취득자들이 경찰에 자백하면서 그 압수한 각종 유물 가운데 관계전문가들이 깜짝 놀란 중요한 물건은 삼국시대의 '금동안장금구'와 '금관', 기타 희귀한 가형토기, 마형토기, 오리형토기 등이었다. 삼국시대 유물로는 최초의 출현인 말안장의 금구는 1961년 10월에 도굴배 일당 중의 강아무개와 구아무개가 안동군 일직면에 있는 구분에서 캐낸 후 대구 골동상에게 단돈 3만 6천 원을 받고 팔았다. 그후 중간 취득자였던 골동상인은 당장 100만 원을 호가하면서 비밀히 전해할 곳을 찾고 있다가 미처 처분하지 못했던 수백 점의 다른 도굴 유물들과 함께 경찰에 압수당ㅎ다. 압수 도굴품들은 뒤에 국립박물관이 모두 접수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국보급의 순금관 하나를 현풍 도굴꾼들이 도굴했던 사실이 마저 드러난 것은 범인들이 대구 지검에 구속·송치된지 약 5개월 후인 7월에 검찰의 심문과정에서였다. 이 금관은 1962년 3월에 일당 중의 구아무개가 도굴하여 대구의 윤아무개에게 구화 110만 환을 받고 팔았다. 그러나 실제로 도굴한 것은 5개월 전 고령지방에서 였다고 범인은 검찰에서 자백했다. 윤은 그의 손에 들어온 최대의 고분유물인 삼국시대의 금관을 돈 많은 수집가에게 거액으로 전매하기 위해 즉시 서울의 골동상 김아무개, 장아무개와 접선했다. 그러다 장아무개의 소개로 이병철 컬렉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의 계약 가격이 구화로 1,100만 환(화폐개혁후 110만원)이었다고 한다. 현풍 도굴사건의 주범들은 검거된 수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했다. 반면 몇 다리를 건너 금관을 입수했던 이병철 재벌은 선의의 수집이 묵인되어 별 말썽없이 그의 수장품으로 낙착되었다. 그러나 이 금관은 그후 근 10년간 일체 공개하는 일이 없어 관계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겼었다. 그러다 1971년 4월에 국립박물관에서 호암(이병철 씨의 아호) 컬렉션이 특별전시될 때에 처음으로 공개된 후 국보 제 138호로 정식지정되었다. 1964년 10월엔 서울에서 도굴꾼 일당이 검거되었다. 서울 중부서가 박아무개 등 3명의 직업적인 범인과 그들의 도굴품을 사 주던 배후의 장물아비 김아무개를 긴급 구속하고, 김의 집에서 고분 도굴유물인 고려자기와 조선자기 수 백점을 압수했던 사건이다. 서울에 주소를 둔 이때의 도굴범들은 특히 전국 곳곳의 태릉을 전문적으로 파헤쳐 조선 역대황족의 태를 넣어 묻었던 최고 품질의 백자태항아리들을 꺼내다가 김모를 통해 팔아먹고 있었다. 경찰에 검거되어 자백한 바로는 그들은 구속될 때가지 3년 동안 서울 인근은 물론, 경기도 광주지방, 더 나아가서 강원도 원주 속초 삼척, 충북 충주, 경북 울진등지까지 도굴지역을 확대시키다가 마침내 꼬리가 잡혔다. 그들에게 태릉의 소재지와 태항라이ㄹ 전문지식을 알려준 김아무개는 한국전쟁 전부터 골동 중개인이며 암매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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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5. 도교란 무엇인가
3. 도교 신앙의 전개
도교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노장이 떠받들어졌다 하더라도, 그 내실에서 도교는 이른바 주술적인 오두미도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도교의 원류는 보통 후한 말기인 2세기 무렵 순제 때에 잇따라 나타난 태평도와 오두미도라는 두 종교 교단에서 구할 수 있다. 즉 태평도와 오두미도에 의해 비로소 성전에 의거한 교법과 교단을 갖춘 종교로서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다. 먼저 장도릉의 오두미도를 보자. 병을 고치거나 배우기 위해 장도릉을 찾는 자들은 모두 오 두의 쌀을 헌납하였으므로 이들을 오두미도라고 불렀다. 어떤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장도릉의 가르침을 믿고 그가 규정한 규율과 의식을 따르면 부수에 의해 반드시 낫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 오두미도는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장도릉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 "도덕경", 즉 "노자"를 읽고 암송하게 하였다. "도덕경"을 경전으로 삼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도덕경"의 문장은 간단하고 압운이 많으므로 외우기에 편리하였다. 더욱이 "도덕경"에 엿보이는 사회주의적인 요소(제75장, 제77장)는 장도릉이 무료 여관을 지어서 운용한 것과 상통하였다. 거기에다 "도덕경"은 또 섭생(제50장)이라든지 장수(제33장, 제59장)를 귀하게 여겼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장도릉은 오두미도를 연 초창기부터 노자를 교주로 여겨 '태상노군'이라 높여 불렀으며 간단히 '노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오두미도는 2대 장형, 3대 장로를 거치면서 20년 동안 섬서와 사천 지방에서 종교와 정치 그리고 군사적 지배권을 가진 종교 교단을 형성하였고, 184년에는 "창천(후한을 가리킴)은 죽었다. 황천(새 왕조를 가리킴)이 곧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유명한 황건적의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장도릉의 오두미도부터 도교가 비롯되었지만, 도교가 종교로서 성립하기 위해서는 도교의 목적이라 할 장수와 행복을 획득하는 데 필요한 방법 따위를 설명해 줄 이론적인 뒷받침이 필요하였다. 그때까지는 어쨌든 황금을 만들기 위해 단사를 변화시킨다든지, 장수하기 위해 복령을 복용한다든지 하는 여러 방술이 있긴 하였지만, 아직 이를 질서있게 정리한 사람은 없었다. 또 신선은 과연 존재하는가, 또는 보통 사람이 신선이 될 수 있는가 등등의 문제에 관해서도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누구라도 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여 세인들의 의문을 풀어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위백양과 갈홍은 그 임무를 수행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신선술의 이론적 근거와 방법 따위를 제공하고, 누구나 신선이 되어 방술을 부릴 수 있다고 단언함으로써 종교로서 도교의 튼튼한 기초를 세웠다. 갈홍은 도교의 중요한 요소인 신선 방술을 집대성하여 교의면에서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가 지은 "포박자"의 내편은 신선 방술에 관한 일을 기술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불사의 신선이 실재한다고 인정할 뿐 아니라, 이 신선은 보통 인간과 다르지 않으며 누구나 신선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의 신선도가 진 시황이나 한 무제와 같은 한정된 특권자에게만 점유되던 것과 달리, 누구나 다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하여 이 신선도를 만인에게 널리 개방하였다. 북조에서 천사도를 개혁하여 도교를 최초의 국가 종교로 삼은 사람은 북위의 구겸지였다. 그는 신천사도를 세워 스스로 '천사'가 되었으며, 태상노군이라는 명칭을 이용하여 도교의 정화에 착수하였다. 이때의 태상노군이란 한낱 존칭으로 상정된 것이 아니라, 교무를 친히 다스리는 명실상부한 교주로 묘사되었다. 도교가 중국 사회에서 확고한 기초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구겸지가 기울인 노력의 결과였다. 그때까지 도교는 단지 민간들 사이에서 신앙되는 데 불과하였지만, 이제는 조정의 존경과 신망을 얻게 되어 불교를 압도하게 되었다. 남조에서는 송의 육수정이 갈홍에 이어서 도교의 교의를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육수정에 의해 착수된 도교 교의의 정리는 제, 양대의 도홍경에 의해서 대성되었다. 도홍경은 당시 사회의 봉건 등급 제도와 관계 제도를 도교에 끌여들여 허구적인 '진령위업도'에 신선의 계보를 배열하였다. 여기에도 '태상노군'과 '노담'의 존호는 높은 위치에 자리하였다. 도홍경이 이끈 도교의 계통을 상청파라고 하는데, 이들은 수당 시대에 크게 융성하였다.
당대에 이르러 도교는 한때 극성하였다. 노자는 당 황제에 의해 당 왕조의 선조로 받들어졌으며, 그에 대한 신격화도 더해져 그 지위가 더욱 상승되었다. "구당서"에는 당 고종 원년에 노자를 '태상현원황제'로 추존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 이후에는 '노군'에 관계된 종교적 전설이나 전기, 경서, 예술 작품 등이 나날이 늘어나서 노자를 더욱더 과장되게 꾸미기 시작했으며, 도교의 교주 및 우주 최고의 천신으로서 노자의 지위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만큼 되었다. 또 당 고종 3년(678)에 "도덕경"을 상경으로 한다는 조령이 내린 이후부터는 관리 등용 시험을 보려는 사람은 "도덕경"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 현종 21년(733)에는 일반 가정에서도 "노자" 한 권은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명령이 내렸고, 매년 관리 등용의 시험 과목에서도 유학 경전인 "상서", "논어" 등의 비율을 줄이고 그 대신 "도덕경"을 더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현종 29년(741)에는 또 현학을 숭상할 것과 국립대학의 학생에게 "노자"와 "장자"를 학습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노자는 이미 '현원황제'로 추앙되었다. 그 다음해(742)에는 이어 장자를 '남화진인'이라 하였고, 당 현종은 친히 도교에 입문해 도사황제가 되었다. 도교는 황실의 종교로 되었기 때문에, "노자"도 따라서 성전이 되었고, "도덕진경"으로 추앙되었다. 후한 시대는 도교의 발전 과정에서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대는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도교, 즉 민간 도교 혹은 교단 도교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특징을 보여 주는 시기이다. 이보다 앞선 시기의 도가, 무속 신앙, 신선 사상은 아직도 적극적인 의미의 도교가 아니었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도교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후한의 오두미도나 태평도이다. 이것들은 도가나 그 변형인 황로 사상과 민간의 무속, 신선 사상 등 여러 요소들이 결합하여 도교화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태평경"은 태평도나 오두미도에 사상적 뿌리를 제공하며, 또 원시 교단 도교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간주된다. 중국 사상의 2대 지주는 유학과 도교이다. 유학이 정부나 왕조 안의 관료 지성인을 중심으로 하는 교학이라면, 도교는 대체로 농민과 일반 백성의 신앙을 가리킨다. 도교는 백성들의 신앙을 기초로 하는 종교적 집단 결사 혹은 왕조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교단을 가리킨다. 일반 백성을 중심으로 사회적 집단을 형성하였던 도교를 민중 도교라 하며, 그 뿌리는 이미 후한 시대에 형성되어 송대 이후 크게 번성하게 되는 것이다. 송대 이후 도교는 유, 불, 도 삼교의 합일을 특징으로 하며, 왕중양의 전진교, 유덕인의 진대도교, 소포진의 태일교 등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도덕적 선행을 강조하는 "선서" 등을 근간으로 하는 삼교합일적 집단과 민중의 도교적 결사 운동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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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관자놀이
본뜻 : 옛날에 상투를 틀던 시절에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돈하기 위해 머리에 쓰던 망건이란 물건이 있었다. 이 망건을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한 당줄이 있었는데 이것을 꿰어 거는 작은 고리가 바로 관자였다. 맥박이 뛸 때마다 귀와 눈 사이에 매단 관자가 움직이기 때문에 '관자가 노는 자리'라는 뜻으로 쓴 말이다.
바뀐 뜻 : 귀와 눈 사이에 있는 맥박이 뛰는 자리로 한의학에서는 이곳을 태양혈이라 일컫는다. 눈으로 쉽게 알기로는 음식을 씹을 때마다 움직이는 자리를 보면 된다.
"보기글" -신열이 있어서 관자놀이가 벌떡벌떡 뛰는구나 -아까 그 사람, 끓어오르는 화를 참느라 그런지 관자놀이가 울끈불끈 하더라
근사하다
본뜻 : 거의 같다, 비슷하다는 뜻이다.
바뀐 뜻 : 본뜻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는 대표적인 말로서, 주로 어떤 사물의 모양이 보기 좋거나 훌륭할 때 칭찬이나 감탄의 뜻으로 쓰는 말이다.
"보기글" -야, 너 그렇게 차려입고 나서니까 아주 근사하다! -이 그림 아주 근사한데, 누가 그린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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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고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되돌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19세기 역사가 그러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비인회의가 성립되자, 각국은 한동안 다시 보수적인 물결에 휩싸였다. 그동안 일어났던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은 한 순간의 악몽처럼 사람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지워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왕을 단두대에 보냈던 파리 시민들이나 낫과 괭이를 들고 영주를 습격하였던 농민들이 모두 다시 온순한 시민으로 되돌아왔다. 광란의 시간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기가 도래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귀족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특히 혁명을 피해 도망갔던 귀족들은 이제 기쁨에 넘쳐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혁명 때 민중들의 행동에 겁을 집어 먹은 귀족들은 줄지어 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들이 망명하자, 국내에 있는 그들의 재산은 당연히 혁명정부의 수중에 떨어졌다. 혁명세력들은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애국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귀족들은 옛 특권과 토지를 다 잃어버렸다. 이들이 망명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귀족이라는 명칭뿐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들은 당당했다. 승리자로서 프랑스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복귀한 왕과 귀국한 귀족은 이전의 향수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예전에 누렸던 특권과 토지를 되찾으려고 날뛰었다. 게다가 그들은 대다수 국민들을 함부로 우롱하고 다녔다. 가령 루이 18세는 자신이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영국 왕 덕분이라고 했으며, 유럽을 정복한 삼색기 대신에 부르봉 왕가의 백색기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왕정이 복고되었다고는 하지만, 단지 왕정만 복고되었지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이 복고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온순해 보이는 국민이 혁명을 이룩했고 왕을 단두대에 보낸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것을 깜빡 잊었던 것이다. 귀족들은 지난 25년간 프랑스 사회가 이룩해 놓은 업적을 정당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무시하고 혐오했다. 한 마디로 그들은 그동안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고, 아무것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이 당시 귀족들의 행태를 빗댄 이 말은 나폴레옹 치하와 왕정복고시절에 외무대신으로서 비인회의에서 프랑스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던 탈레랑(Charles Maurice de Talleyrand, 1754-1838)이 한 말이다. 그러니 혁명을 경험한 민중들은 부르봉 왕가의 통치에 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결국 1830년 7월에 민중들은 다시 혁명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7월혁명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자유의 여신은 한손에는 장총을 쥐고 다른 한손에는 프랑스 공화정의 상징인 삼색기를 들고 바리케이트를 넘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노틀담에 백색기 대신 삼색기가 다시 날리게 된 것이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아무것도 잊지 않았던' 망명귀족들의 종말이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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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끊임없이 성장하는 개성 있는 여성
많은 여성들이 현재 처해 있는 자신의 처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결혼을 한다. 결혼만 하면 자기 인생이 순조롭게 풀려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성들은 스스로 불완전하고 미숙하며, 정신적 경제적으로 자립해 나갈 만큼의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부양자이며 후원자이고, 연인이자 영웅인, 자신에게 있어 '전부'인 남성을 찾으려고 한다. 그녀들은 자기를 반쪽의 인간, 즉 뛰어난 쪽의 반을 구하는 열등한 반쪽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들이 남편이라는 존재를 통해 완전한 인간으로 바뀔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확실히 결혼 그 자체는 근사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신성한 결합이 '결혼 즉 완성'이라는 사고 방식에 여성을 예속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러한 사고방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여성 그 자체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결혼이라는 형태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식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우리들은 들어왔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생각으로 남편을 선택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예상이 전혀 빗나가서, 여성들이 결혼 생활에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결혼은 어째서 우리 여성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 것일까? 그 초조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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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왕자의 난에 희생당한 당대의 석학 정도전
정도전(?-1398)의 자는 종지이고, 호는 삼봉, 본관은 봉화이다. 이색의 문하에서 배웠고,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삼각산 밑에 집을 짓고 살면서 제자들을 길렀는데, 항상 여색을 멀리할 것을 가르쳤다. 성균관 좨주에 발탁되고 뒤에 자원하여 남양 군수로 나갔다.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울 것을 태조에게 권했으며, 그 공으로 좌명공신에 녹권되고, 정당 문학에 제수되었다. 개국하던 해인 임신년(1392) 7월에 태조의 개국을 도운 공으로 봉화백에 봉해지고, 태조의 명을 받아 한양 천도와 성 쌓는 일을 맡았다. 어느 날 밤, 태조가 정도전을 비롯한 여러 훈신들을 불러들여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태조가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과인이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 경들의 힘이다. 우리들은 서로 공경하고 조심하여 자손 만세토록 변치 말자" 정도전이 대답하였다. "옛날 제환공이 포숙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포숙이 그땅에 있던 시절을 잊지 말라고 하였고, 제환공은 포숙에게 함거에 갇혀 있던 때를 잊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성상께서 말에서 떨어지셨던 때를 잊지 않으시고, 신 또한 죄를 지어 목에 칼을 썼던 때를 잊지 않는다면 자손 대대로 번창함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조는 늙어서 어린 방석을 사랑하여 세자로 삼았는데, 정도전은 남은 등과 함께 방석을 옹호하면서 정안군 방원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무인년 8월, 정도전은 태조에게 중국의 예에 따라 여러 왕자를 각 도로 나누어 분봉하자고 비밀히 건의하였으나 태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태조가 정안군에게 넌지시 일러주었다.
"밖에서 논의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여러 형제들에게 조심하도록 깨우쳐 주어라" 또 점쟁이 안식이 이방원에게 말하였다. "세자의 이복형제들 중에서 왕위에 오른 사례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이방원은 즉각 이렇게 응수했다. "정도전을 즉시 제거할 작정인데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 태조의 병이 위독해지자 정도전 등은 왕위 계승에 관한 일을 논의한다는 핑계로 왕자들을 불러들인 뒤 틈을 보아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마음먹고 자기의 일당을 궁궐 안에 숨겨 두었는데, 전 참찬 이무가 이러한 모의를 정안군에게 밀고하였다. 정안군은 즉시 익안군 방의 등과 더불어 영추문으로 달려가서 정승 조준, 김사형 등에게 백관을 소집하도록 하였다. 그날 밤 정도전은 이직과 함께 남은의 집에서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정안군은 이숙번을 시켜 남은의 집에 불을 질렀다. 정도전이 급히 뛰어나와 민부의 집에 들었다. "배가 하얀 놈이 들어왔다!" 이 사실을 안 민부가 소리지르며 집을 수색하여 정도전을 찾아낸 다음 꽁꽁 묶어 정안군에게 끌고 갔다. 정도전은 정안군에게 애걸했다. "만약 나를 살려주면 있는 힘을 다하여 보좌하겠습니다" "너는 이미 왕씨를 배신하였는데 이제 또 우리 이씨를 배신하려느냐?" 정안군은 그 자리에서 그를 죽였다. 정도전의 저서로는 '삼봉집', '심이기편', '경제문감','경국전' 등이 있다. 진, 담, 유, 영 네 아들을 두었다. 진의 아들 문형은 성품이 온순하면서도 굳세고 단아하였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부사에 이르렀고 청백리에 뽑혔으며, 시호는 양경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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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missile)
'미사일'이 대륙간 탄도탄임은 세 살 먹은 어린이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실은 꽤 오래된 말로서 돌 던지기, 투창 등 집어 던지는 무기 나아가서 화살, 총알 등 비살무기를 통틀어 '미사일'이라 한다. 2차대전 후 유도탄의 비약적 발전을 보아 중거리 탄도탄(IRBM), 대륙간 탄도탄(ICBM) 핵무기의 운반 수단으로서 미, 소 양국이 유도탄 개발에 치열한 경쟁을 벌임에 따라 '미사일'이란 말도 일반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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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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