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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71 호
단기 4340. 4. 29 (음력 03.1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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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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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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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따분하기는 매한가지야. 하기 싫은 일들을 노상 하고 있거나, 하고 싶은 일들을 아예 못하거나 / 에릭 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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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六十章 (노자 - 도덕경 : 제6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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治大國, 若烹小鮮, 爾?天下, 其鬼不神, 非其鬼不神, 其神不傷人, 非其神不傷人, 聖人亦不傷人, 夫兩不相傷, 故德交歸焉.
치대국, 약팽소선, 이도리천하, 기귀불신, 비기귀불신, 기신불상인, 비기신불상인, 성인역불상인, 부양불상상, 고덕교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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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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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째 장
직역
큰 나라 다스리기를 작은 생선 쌂는 것 같이하라. 도로써 하늘 아래에 임하면, 그 귀신들이 신령하지 않다. 그 귀신들이 신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신령함이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신령함이 사람을 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인도 또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무른 양자는 서로 상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덕이 서로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해석
이 장도 개벽장이다. 작은 생선조리는 자꾸 손을 대면 안된다. 자꾸 손을 대면 먹을 것이 없다. 왜 냐하면 쪼개저 버리기 때문이다.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귀신도 그를 상하게하지 못한다. 사람이 상하는 까닭은 남을 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남을 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상처를 입어야 한다. 왜 그런가 다른 사람을 이유없이 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마음부터 모질게 먹어야 한다. 그럼 자신의 순박함이 사라진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때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먹을 써야 한다. 에너지의 소비이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기 위해서는 함정을 파야하고 잔대가리를 수없이 굴려야한다. 스스로 몸을 혹사한다.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부귀공명인가. 그것이 중요한가 몸이 중요한가. 그렇기 때문에 남을 상하게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처를 감수해야 한다. 귀신이라고 해도 아무런 이유없이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귀신 자신이 상처를 입어서까지라도 그를 상하게 할 이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상하지 않는 것이다. 성스러운 사람도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그를 상하게 할 이유가 없다. 자신이 상해가면서 까지. 서로가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서로가 자신에게 상처를 내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덕이 쌓아져 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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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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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작은 생선을 삶는 일과 같다. 무위자연의 도로써 이 세상을 다스리면 귀신도 자신의 신령한 힘을 나타내지 못한다. 귀신이 신령한 힘을 나타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힘으로 백성을 해치지도 못한다. 귀신이 백성을 해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성인도 또한 백성을 해치지 못한다. 대체로 양쪽 다 백성을 해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덕을 합하여 다함께 도에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주
소선: 작은 물고기, 작은 생선을 말함.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작은 생선을 삶는 일과 같다는 말은 무위자연의 도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최상의 정치라는 뜻이다. 작은 생선을 조리할 때 자주 뒤적거리다 보면, 가루가 되어 먹어 볼 것이 없게 된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법령을 조령모개식으로 자주 바꾼다든가, 행정력을 명령, 간섭, 규제, 단속 일변도로 행사한다면 백성들은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하고 생업에 열중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노자의 도처에는 기성 정치에 대한 비판과 환멸을 표현한 귀절이 많다. 그의 이와 같은 발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둘러싼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위정자의 탐욕과 착취, 계속되는 전쟁, 초근목피로 이어가는 백성들의 피폐한 생활상, 간섭과 규제 일변도의 행정력 등이 그의 독특한 정치철학의 산실이 된 셈이다. 이: 이와 통하여 군림하다, 다스리다의 뜻임. 신: 신령을 뜻함, 귀신의 불가사의한 힘. 성인: 본문에서는 천하의 지배자를 지칭하고 있음.
해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일과 같다. 이 말에는 노자의 정치철학이 잘 표현되어 있다. 위정자가 법령을 너무 완벽하게 정비한다든가, 간섭과 규제와 금지 위주의 행정력으로 백성의 생활에 압박을 사한다면, 그들은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더구나 위정자가 쓸모 없는 공명심에서 백성들을 노력동원등에 투입하게 한다면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큰 부담이 될 것이다. 이에 반하여 위정자가 무사 무위의 도로써 백성들에게 임한다면 그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게 된다. 원래 백성들은 그들의 생존의 근거가 재난이나 착취 등으로 위협을 받게 되면 귀신의 힘등에 의존하여 살길을 찾고자 한다. 안정과 만족한 생활에서는 백성들은 귀신의 존재를 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신도 자신의 신령과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위자연의 도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만물에 길러 주고 덮어 주고 감싸준다. 위대한 도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세상에서는 귀신도 성인도 백성들에게 해악을 끼치지 못한다. 귀신도 성인도 백성들에게 해악을 끼칠 수 없게 되면, 그들은 덕을 합하여 위대한 도로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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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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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6장 매장문화재
매장문화재를 발굴한 사람들
1963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경남 밀양읍 용평일에 살던 김락화(당시 23세) 들 3명의 청년이 가까운 호성리의 형원사 절터 쪽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부도탑이 세워져 있던 자리에 반쯤 흙에 묻혀 있는 기단부 석재를 호기심으로 들춰보다가 깜짝 놀랐다. 밑에서 석실이 나타나고, 그 안에는 온갖 무늬를 가진 파란 빛깔의 눈부신 옛날 그릇들이 들어있었다. 세어 보니 사기 그릇이 모두 8점, 그리고 유기그릇이 하나였다. 일찍이 본 적이 없는 희한한 옛날 그릇들이었다. 청년들이 발견한 그릇들은 모두 고려시대의 상감청자로 '죽조화초문매병'하나, '운봉문'과 '모란학국연화문'의 대접이 둘, 나머지는 팔각접시들이었따. 유기그릇은 뚜껑이 있는 합이었다. 순간적인 호기심에 발견해낸 이 매장문화재들이 어떤 경로로 신고됐는지는 상세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그후 경북대 박물관에 보관되다가 문화재 관리국이 출토경위를 조사 확인한 후 국가 귀속물로 접수했다. 그리고 정부는 1년후 발견자인 3명의 청년에게 '매장문화재 발견 및 신고자에 대한 보상규정'에 따라 물건의 가치평가로 책정한 10만원의 보상금을 지불했다. 이는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후 중요한 매장문화재의 발견자가 정부로부터 처음으로 큰 액수의 보상금을 지불했다. 이는 문화재 보호법이 제정된 후 중요한 매장문화재의 발견자가 정부로부터 처음으로 큰 액수의 보상금을 받은 매우 고무적인 사례의 하나였다. 앞의 경우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정상적인 귀착이고 보상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매장문화재의 발견을 큰 횡재로 여기고 몰래 숨겨 갖고 있다가 많은 돈을 받고 팔아먹으려고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밀양에서 나무를 하러 다니던 가난한 청년들이 귀중한 고려자기들을 출토시킨 지 50일 후인 6월 22일에 경북 월성군 천북면 북군리의 저수지 근처에서 높이 44cm에 둘레가 46X50cm나 되는 최초의 대형 가형토기를 우연히 발견한 황모 노인의 경우가 그러한 예의 하나였다. 황노인은 장마비가 쑤셔놓은 저수지 북쪽의 모래밭을 걷고 있었다. 한참 걷다보니 눈앞에 시커멓고 이상한 물건 하나가 모래 위로 솟아나와 있었다.다가가서 조심스럽게 파내어 보니 완전한 형태의 큼직한 기와집 토기였다. 노인은 크게 값나갈 옛날 물건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꿈을 잘 꾼 횡재라 생각하면서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경주의 골동상을 찾아갔다. 경주에서는 윤아무개(그 후 수차 문화재 도굴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구속되었고, 한때는 복역까지 한 골동상)가 4만 원을 집어주고 물건을 잡았다. 물론 불법적인 거래였다. 법적으로 그것은 장물이었다. 귀중한 대형 가형토기의 출토 사실과 그것이 불법적으로 거래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당시 박일훈 경주박물관장이 장물을 산 윤아무개를 찾아가 문화재 보호법의 매장문화재 규정에 입각한 국가 귀속을 주장했으나 그는 그 자리에서 15만 원을 요구했다. 마땅히 국가에 귀속돼야 할 물건을 움켜쥐고 흥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법을 냉소하고 있었다. 경찰에 고발할 수 있었지만 경주박물관은 좋게 물건을 입수할 방법을 찾기 위해 일단 문제의 가형토기를 인수하여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갖고 왔따.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이 그것을 불법적인 장물 취득자로부터 살 수는 없었다. "국가에서 안 사주겠다면 딴 곳에 팔겠다."고 호언하는 윤아무개가 물건을 다시 찾아가자. 박물관 측에서 할 수 없이 경찰에 협조를 의뢰했다. 끝가지 버티려던 윤아무개는 뒤잡은 가형토기를 경주에서 다시 서울로 갖고 올라와서 팔 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서울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희귀한 물건을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거나 좀처럼 접근하기 힘든 수집가들에게 안전하게 팔아주고 구전을 먹는 이를테면 거물급 골동상인들이 있었다. 서울에 올라온 윤아무개는 그들과 접선하고 있었다. 반면 경주박물관측에선 그의 행동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서울로 뒤쫓아온 한 박물관 직원이 그의 거처를 찾아냈을 때에는 모처에 50만 원을 받고 팔기로 이미 계약이 돼 있다고 호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지명수배하고 있는 사실을 알자 그는 기가 죽었다. 그는 체념한 듯이 물건을 내놓았다. 7월 19일의 일이었다. 결국 국가가 매장문화재로 압수한 그때의 대형 가형토기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가 있다.
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칠순 고령의 시어머니와 5남매를 거느리고 막벌이 가장 노릇을 하던 가난한 강갑순 여인(당시 41세)이 18세의 큰아들 전병철 군을 데리고 마을 밖의 도로공사장에 나가 돌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공사장은 야산 비탈이었다. 강여인이 아들과 둘이서 묵묵히 돌무더기를 헤치고 있을 때였다. 곡괭이에 널찍한 잡석하나가 덜컥 걸려 젖혀지면서 무심히 그 밑으로 시선을 보내던 모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금빛 찬연한 작은 부처님이 반듯이 눕혀져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눕혀져 있는 공간은 폭 30cm, 길이 40cm, 그리고 깊이가 30cm가량이었다. 잡석으로 급히, 그러나 정성껏 꾸며진 작은 석실이었다. 부처님은 배모양의 광배를 뒤로 붙이고 있는 높이 약 16cm의 완전한 '금동여래입상'으로 광배엔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발견자인 촌부와 소년은 그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값진 옛날 유물인지를 알 턱이 없었다. 그들은 다만 금으로 만든 부처님인가보다고 속으로 마음을 설레고 흥분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수상쩍은 흥분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날의 품일이 끝났을 때 강여인은 아직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품속에 소중히 품고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을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 강여인은 부처님을 집안 깊숙한 곳에 꼭 간직하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법에 따라 경찰에 가서 발견경위를 신고하고 물건도 바쳐야 할 것이라고 타일렀다. 가난했으나 그지없이 순박하기만 했던 강여인은 동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대의면 지서에 신고된 강여인 발견의 매장문화재 금동불은 곧 경남 도당국에 보내진 후, 즉각 문교부에 보고 되었다. 그리고 수차에 걸친 전문가들의 현지 조사와 불상의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남한지역에서 출토된 유일한 고구려불로 밝혀졌다. 전체적으로 뛰어난 조각미와 균형을 가진 이 의외의 고구려불은 특히 광배에 새겨진 '연가 7년' 으로 시작되는 4행 47자의 아주 귀중한 명문을 지닌 최대의 국보급이었다. 관계학계는 해방 후 땅 속에서 출현한 불상으로는 가장 큰 발견이라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다만 출토지가 그런 불상이 나타날 만한 절터도 아니며, 그럴 수 있는 불교 유적지도 아닌 점이 수수께끼로 남았다. 불상은 그해 12월 4일, 서울로 올라와 즉시 국보 제 119호로 지정된 후 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년 동안의 법적 공시기간이 지난 1964년 10월 14일, 발견자인 강여인은 생전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특별히 문교부 장관이 수교하는 보상금 20만원을 받았다. 그때 불상이 출토된 땅의 임자였던 전형진(당시 56세)도 20만 원을 보상받았다. 지하 출토유물인 매장문화재의 국가 귀속과 함께 정부가 책정한 40만 원을 법에 따라 발견자와 반씩 나눈 금액이었다. 그것은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된 후 최대 액수의 보상이었다. 한편 강여인이 즉각 국보로 지정될 만큼 참으로 귀중한 '연가 7년명'의 고구려 불상을 돌더니속에서 기적적으로 출토시키던 무렵, 같은 의령군의 봉수면 서암리에서도 높이 12.5cm의 '금동여래입상' 하나가 출토되었다. 서암리에 사는 농부 엄필섭(당시 50세)이 강우술 소유의 논바닥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를 헤치다가 뜻밖에 발견했던 것인데, 발견자는 마땅히 자기 소유물인 것으로 착각하고 그 불상을 2년 이상 집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사실을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자, 경찰이 매장문화재의 불법 점유를 들어 법적으로 압수하기에 이르렀다. 1966년 2월의 일이었다. 불상은 곧 서울로 보내져 국립박물관에 들어갔다. 국가 귀속이었다. 비록 스스로 신고하지 않았던 압수물건이긴 했으나 정부는 법을 몰랐던 발견자와 출토지 임자에게 12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중요한 매장문화재를 출토시켜 정부로부터 10만 원 이상의 보상금을 받는 사례가 날로 잦아졌다. 그것은 일반의 문화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반증이었다. 정부 행정망과 매스컴의 계몽도 컸다. 1964년 4월 12일에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향교리의 논에서 고려시대의 청동범종 하나와 기타 청동향로, 쇠솥,고려청자 등 모두 6점을 출토시킨 윤성복, 박광선 등 4명은 발견 유물을 곧장 당국에 신고하여 국가에 귀속시킨 후 3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같은해 5월 27일엔 대구 시내의 육군 503방첩대 건물의 대장실 마루밑에서 전기 누전방지공사를 하던 전기공 백승원 씨가 8.15때 일본인들이 숨겨두고 갔던 삼국시대의 와당과 토기, 그밖에 고려자기 조선자기 청동자기 등 142점의 유물을 무더기로 발견하여 1년 후에 14만 4천 원의 정부 보상금을 받았다. 백씨가 발견한 물건들은 지난날 대구의 그 건물에 살았던 악명높은 일본인 수집가 오구라가 8.15을 전후해서 중요한 것들은 모조리 일본으로 갖고 가고, 미처 가져갈 수 없었던 나머지를 마루밑에 감쪽같이 감춰두었던 것으로 해방 후 19년 만에 처음으로 그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가지 일본에 살아 있던 오구라(당시 96세)의 반응은 너무나 뻔뻔스러웠다. "예전에 내가 살고 있던 집에서 찾아냈다는 물건들 중 일본 그림을 포함한 59점을 돌려달라"는 수작이었다. 그해 10월에 그런 뻔뻔스러운 요구를 적은 오구라의 편지를 친절하게도 서울의 문화재관리국에 전해준 재일 교포가 있었다. 그때 "일본 물건을 돌려받고 싶으면 오구라 자신이 일본에 반출해 간 수천 점의 중요한 한국문화재부터 먼저 돌려 보내야 할 게 아니냐?"고 누가 반문하자 이아무개라는 쓸개 없는 교포는 자기가 답변할 성질이 아니라고 회피하여 빈축을 샀다. 20년 가까이 교묘하게 은닉돼 있던 오구라 수집품의 일부는 그것들이 발견됨과 동시에 과거의 적산문화재로 국가에 귀속되어 경주박물관에서 모두 인수했다.
고철수집상이던 윤태진, 윤석진 형제가 휴전선 가까운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원당리의 영농지역에서 높이 약 37cm의 고려동종과 1369년에 만들어 졌다는 44자의 귀중한 명문이 새겨져 있는 '청동반자'를 철물탐지기로 출토시킨 것은 1966년 1월 17일이었다. 경기도 파주에 주소를 둔 잡상인이었던 윤씨 형제는 비록 생활은 가난했으나 마음씨가 착했다. 그들은 철물탐지기에 걸려 나온 옛날 유물인 동종과 반자를 들고 자진해서 서울의 덕수궁미술관(1969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됨)을 찾아갔다. "보통 고철로 팔아넘기기엔 좀 아까운 귀중한 옛날 물건 같아서 갖고 왔으니 중요한 것이면 나라에 바치겠다." 윤씨 형제의 선량하고 소박한 말이었다. 미술관엔 마침 이호관 연구관이 있다가 물건을 인수하고 그들에게 국가 보상의 길을 열어주었다. 1년 후, 그들은 35만 원의 보상금을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윤씨 형제가 고려동종과 반자를 출토시킨 지 8개월 후인 9월 6일에는 또 전남 고흥군 포두면 송산리에서 돌담을 헤치던 정병임이란 사람이 역시 고려시대의 동종 하나를 발견하고 당국에 신고한 수 1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5월 9일에는 '연가 7년명' 의 고구려 불상과 또 하나의 '금동여래입상' 을 출토시킨 경남 의령지방의 칠곡면 외조리 뒷산에서 조선 중종 23년(1528)에 꾸며졌던 왕자 숭수아지씨의 태실이 발견되고, 그 속에서 왕실의 백자항아리와 태의 주인공을 기록한 태지판이 2장이 나타났다. 발견자는 마을의 전용중 씨였다. 그는 산을 개간하다가 우연히 태신을 발견했던 것인데, 그 속에서 나온 유물들을 고스란히 당국에 신고하여 12만원의 보상금을 탔다. 1964년 10월에 서울의 김아무개라는 골동상인이 박아무개 등의 도굴꾼을 시켜 전국의 조선 왕실태릉을 계획적으로 도굴, 수십 점의 품질 좋은 백자항아리를 불법적으로 꺼내 암매해 먹다가 적발당해 모두 구속되었던 사건을 상기할 때 잊혀졌던 의령태릉에서 출토된 유물의 법적인 수습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매장문화재의 발견 및 신고자에 대한 기록적인 보상은 1967년 1월 28일에 서울 성북구 삼양 1동 108번지의 산비탈에서 백제불로 추정된 '금동관음보살입상' 이 출토되었을 때였다. 발견자는 6년 전에 제기동 집을 화재로 잃은 후 삼양동 골짜기의 국유지에 집을 마련하고 살던 박용출 씨(당시 52세)였다. 전날 밤 꿈에 집 뒤의 비탈이 무너져 내리면서 온 식구가 깔려 죽는 일을 당했던 박씨는 아침에 눈을 뜨고도 불안한 생각이 가시지 않아 장남과 함께 새삼스럽게 위험이 느껴진 쪽으로 깊게 하수도 공사를 착수했었다. 1m쯤 땅을 파 내려갔을 때였다. 괭이 끝이 금속물에 닿는 예리한 음향이 울려 나왔다. 출토되자마자 국보 제 124호로 지정되어 120만 원이라는 기록적인 보상금을 책정케 한 삼국시대의 걸작 불상인 높이 20.7cm의 '금동관음보살입상' 이 출토되던 순간이었다. 박씨가 꿈 때문에 출토시킨 금빛 찬란한 보살상은 괭이로 맞은 옷자락 부분이 약간 부서졌을 뿐 완전한 상태였다. 떨어졌던 부분도 흙속에서 찾아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박씨는 며칠간 그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가 당시 동국대학교 박물관의 불상전무가인 황수영 교수를 찾아가 평가를 요청했다. 황교수는 그 자리에서, '국보급의 놀라운 불상' 이라고 경탄하고, 속히 법적 절차를 밟아 문화재 관리국에 신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발견자는 황교수의 말을 따랐다. 2월 7일, 서울지역에서 출토된 놀라운 삼국시대 불상은 발견자의 자진 신고에 따라 매장문화재로서 국가에 귀속되었고, 이어서 즉각 국보로 지정되었다. 발견자 박씨는 문화재보호법 제 47조(매장문화재) 규정에 의한 1년동안의 유실물 공고기간이 지나자 책정 보상액이었던 120만 원의 절반인 60만 원을 받았다. (나머지 절반은 법적으로 출토지의 땅임자가 받게 돼있다).
1967년엔 100만원대의 보상금을 받은 매장문화재의 발견 신고자가 잇달아 나왔다. 정초에 서울에서 국보 '금동관음보살입상'이 발견된 데 뒤이어 4월 18일에는 고철수집상 이영주 씨가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품리에서 철물탐지기로 동종 하나와 기타 유물을 출토시켜 당국에 신고하고 1년후 1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7월 6일에는 충남 대전시 괴정동 244-4에서 밭을 일구던 손용갑 씨가 땅 속에서 뜻밖에도 초기 철기시대의 발견 신고하여 12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11월 10일엔 또 경북 금릉군 부항면 사등 1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주목할 만한 '금동보살입상' 하나가 출토되었는데, 이때의 발견 신고자인 마을의 이관하 씨와 땅임자에게는 새로운 보상기록인 140만 원이 1년 후에 지급되었다. 문화재 관리국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1961년부터 1996년 7월 현재가지의 매장문화재 발견 및 신고 건수는 모두 4,304건이고, 보상 총액은 6억 4,850만 8,595원에 이르고 있다. 그중 한 사례로 1970년대 초반에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고양리에서 13세의 어린이가 통일신라시대의 작은 '금동여래입상'(높이 13cm)을 출토시켜 당시로서는 매우 큰 돈인 80만 원을 보상받은 일을 들 수 잇다. 행운의 어린이는 임계국민학교 6년생이었던 이춘달군으로 불상을 출토시킨 날짜는 1971년 6월 21일이었다. 이군은 그날 마을 뒷산에서 놀이터를 만드느라 땅을 파다가 불상이 나타나자 소중히 들고 산을 내려와서 아버지(당시 62세)에게 가져다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도 그 불상이 얼마나 중요한 문화재인지를 알지 못했다. 당국에 신고하면 정당한 보상금이 나온다는 문화재보호법 상식도 없었다. 이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우연히 캐 온 불상을 갖고 있다가 엿장수에게 단돈 2천 원을 받고 팔았다. 그 사실이 강원도 공보실에 뒤늦게 신고되었다. 도 공보실에서는 즉시 불상의 행방을 수배한 끝에 마침내 그것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불상은 곧 서울의 문화재 관리국으로 올라왔고, 평가심의회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불상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발견자인 이군과 땅임자에게는 80만 원의 보상액이 책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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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5. 도교란 무엇인가
2. 도교의 개념과 도교 신앙의 형성
노장 사상이 귀족 지식인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무렵 그것과 평행하여 민간 신앙을 모체로 하면서 급속히 교의를 정돈, 이윽고 유, 불에 견줄 정도로 성장한 종교가 도교이다. 도교라는 말은 본래 도, 즉 진리에 관한 가르침이라는 뜻의 보통 명사이다. 이것이 하나의 종교의 명칭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5세기 무렵 남북조 이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도교라는 용어가 문헌에 최초로 나타난 것은 "묵자"로 여기에 보면 "유자는 도교라고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의 도교란 유가의 가르침, 성인 및 선왕의 도에 대한 가르침, 성인이 도를 설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동진 초 갈홍이 쓴 "포박자"에서는 "도교가 마침내 융성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때의 도교라는 것도 도를 설한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또 "모자이혹론"이라는 책에서 오경을 도교라고 부르고, 오경 즉 도교의 입장에서 도가의 신선, 장생 사상을 비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때로는 불교를 도교라고 한 것도 있다. 양의 "고승전" '구나발마전'에는 "송에 가서 도교를 유행시키기를 바란다"는 글이 보인다. 이 때의 도교는 불교를 의미한다. 5세기 북위의 구겸지 때에는 훗날의 이른바 도교가 도교라고 불렸고, 동시에 불교도 도교로 불렸다. 그리고 "위서" '석로지'에서는 도교란 도가 쪽에서 보면 도교이고, 불교 쪽에서 보면 불교가 된다고 하여 두 가지 의미로 전하고 있다. 이러한 예증을 통해 볼 때 도교라는 말이 원래는 단지 도교 자신뿐 아니라 유교와 불교까지도 의미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상 논한 도교를 편의상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도교는 일반적으로 고대의 민간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신선설을 그 중심에 두었고, 둘째 거기에다 도가, 역리, 음양, 오행, 참위, 의술, 점성 등의 논법 또는 이론과 무술적인 신앙을 보태었으며, 셋째 그것을 불로장생을 주요한 목적으로 삼아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흉내 내어 뭉뚱그렸고, 넷째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 자연 발생적인 종교로서 매우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는 도교는 유교와 마찬가지로 중국인 및 중국 사회의 문화 복합체로서, 거기에는 철학, 사상, 미신, 종교, 민중의 생활, 관행, 도덕, 문학, 예술, 과학 등의 요소가 들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도교는 방기가의 일파인 신선가를 통해 발달되었으며, 생명의 참된 본원을 보존하고 방외의 세계에 소요하는 것을 중심 강령으로 삼았다. 따라서 이들은 뜻을 넓게 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함으로써 삶과 죽음을 초월하고 마음의 두려움을 없애는 데 주안점을 두고 수련하였다. 이러한 도의 수련자, 즉 선인에 관한 기록이 예부터 전해 온다. "한비자" 등에도 불사약의 기사가 실려 있다. 진 시황과 한 무제에 이르면 사람들이 이를 믿는 마음은 더욱 깊어지는데, 역사에 보면 한대에서 위진 시대에 걸쳐 수많은 선술가들이 배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대 초기에 이르러 노장 사상을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는 커다란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분위기는 주로 신선가가 도가에 접근하여 노장 학설의 몇몇 신비주의적 요소를 종교적으로 이용하기도 하고 해석하기도 하면서 나타났다. 본래 현재의 하북성 북부와 요녕성 남부 일대에 해당하는 연과 현재의 산동성 북부 및 하북성 동남부 일대에 해당하는 제의 해안선 일대에서 활동한 신선가들은 방술만 행했지 이론은 부족하였다. 그들은 선진 시대 추연의 음양오행술을 받아들이기도 하였으나 그 학설로는 신선학의 이론적 근거를 이뤄 낼 수 없었다. 게다가 추연의 인물됨이나 학설은 노자의 높은 명성에 전혀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점차로 신선가는 노자에 빌붙게 되었고, 이런 이유로 노자는 일반인의 마음속에서도 점차 신비적인 모습으로 비치게 되었다. 왕충의 "논형"에 나타난 바와 같이 후한 중엽에 이미 도가 사상은 장수를 추구하는 신선가와 혼동되었다.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최초로 도가의 문을 두드린 방술사는 후세에 하상공이라고 불린 사람이다. 한대의 방술사는 하상공이 남긴 가르침에 근거하여 "노자하상공장구"를 지었고, "노자"는 몸을 수양하며 선인이 되는 데 꼭 필요한 수양 경전이 되었다. 그 뒤 신선이 되고자 하는 방술사들은 "노자하상공장구"를 근거로 자신들의 사상을 계발하였으며, 더욱이 그것을 확대 해석하고 견강부회하여 자신들의 교를 꾸미기도 하였다.
동안 시대에 나타난 "태평경"이나 "노자상이주" 같은 책은 초기 도교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태평경"에서는 이미 노자를 지고의 천신으로 높이고 있으며, 노자 사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태평도의 신학 이론을 구성하였다. 동한 말 장로는 "노자상이주"를 지어 노자의 말에 의탁하여 오두미도를 창시하였다. 이리하여 동한 말기에 "노자"는 간길(또는 우길이라고도 한다)과 장도릉 등에 의해 태평도와 오두미도의 경전으로 받들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도교의 근본 신앙은 노자가 말한 '도'와 '덕'에 있다. 도교 신도가 말하는 수련은 한 마디로 "도를 닦고 덕을 기르는"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 사상에서 도는 비물질적인 우주의 근원이며 우주의 주재자이다. 노자 사상의 핵심은 바로 이 동에 있다. 도교에서는 이 도를 인격화하여 '태상노군'이라 불렀다. 그러면 무엇을 덕이라 하는가? 이른바 "도를 닦고 덕을 기른다"는 것은 바로 태상노군을 공경히 제사 지내고, '노군'의 자연지도를 체득하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선한 일을 행하고 공덕을 쌓아 신명의 도움을 얻게 되면 마침내 도를 얻어 신선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도교가 노자에 귀의한 까닭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노자를 추켜세워 유교의 공자, 불교의 석가와 대등한 지위를 갖게 하려 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지만, 이와 함께 "노자" 자체가 그들과 필적할 만한 심오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뿐 아니라 "노자"에 이미 종교에서 원용할 만한 신비주의 사상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특히 그 가운데 우주의 본체를 해명하는 유심주의적 내용과, 불로장생의 도와 같은 신선 신앙, 양생이라든지 수도 등을 말하는 인생 철학 등은 모두 도교가 흡수해서 펼칠 수 있는 사상적인 요소들이었다. "노자"의 구절구절은 정밀하고 간결하면서 뜻이 심오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 후세 사람들한테는 신비스럽게 느껴지기에 충분하였다. 이런 점들이 뒷날 방술지사들이 견강부회하여 종교화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였다. 이렇게 해서 신선 신앙을 핵심으로 하면서 노자의 학문을 외부에 장식한 도교의 구성 체계가 완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후세의 도교라는 말은 어떤 과정을 거쳐 유, 불, 도 삼교 중 도교만을 의미하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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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감소식
본뜻 : 아주 멀어 아득하다는 뜻을 가진 감감하다에서 나온 말이다. 감감소식은 소식이 감감하다는 말이니 대답이나 소식 따위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바뀐 뜻 :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감감소식'보다 '감감무소식'을 더 많이 쓰고 있다. 감감소식이라는 말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없을 무를 덧붙인 것은 소식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둘 다 표준어로 채택되어 쓰이고 있다.
"보기글" -그 사람은 한 번 가더니 어찌 된 게 감감소식이냐? -곧 연락을 해주겠다더니 감감무소식이네
강남 제비
본뜻 : 강남은 중국의 양자강 이남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서, 제비가 겨울을 나기에 알맞을 정도로 따뜻한 곳이다. 그러므로 본래 강남 제비라 함은 따뜻한 곳에서 겨울을 나고 봄에 다시 돌아온 제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70년대 서울의 강남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강남 곳곳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사무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 호화 유흥가가 난립하기 시작했고, 강남에 사는 중상류층 유한 부인들을 꾀어 한몫 잡아 보려는 제비족들이 강남 지역 유흥가로 몰려들면서 강남 제비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이 때문인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란 동요에 나오는 강남도 한강 이남의 따뜻한 지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쓰이는 강남 제비는 본뜻 그대로 따뜻한 지방인 양자강 이남에서 겨울을 나고 온 제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요새 한창 주가가 오르고 있는 주말 연속극 때문에 강남 제비들이 호시절을 만났다며? -강남 제비 물 좋다는 얘기도 옛말이야 요새는 신세대 제비들이 극성을 부린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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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아침에 깨어 보니 내가 유명해진 것을 알았다
우리는 바이런(G. C. Byron, 1788-1824)을 낭만주의 시인이자 잦은 여성편력으로 많은 스캔들을 일으킨 사람으로 알고 있다. 사실 그의 시가 말해 주듯이 그는 정열적이고 반항적이었으며 방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가 그리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실로 바이런답게 죽었다는 사실도 상기해야 한다. 정열적이고 방탕한 성격은 그의 선조들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나 아버지, 삼촌 모두가 '악당', '미친 사람' 등과 같은 별칭을 얻은 것만 보아도 바이런의 혈통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피는 못 속이는지 그도 정열적인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선천적으로 약간 다리를 절던 그는 그러한 신체적인 약점을 많은 운동으로 감추었다. 시인이자 미남인데다가 승마, 수영 등 여러 운동까지 잘했던 그가 유럽 사교계의 총아로 군림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첫 시집을 내었을 때는 혹평만 당했다. 혹평을 받은 그는 가만있지 않았다. 곧 풍자시를 써서 응수했던 것이다. 첫 번째 시집으로 별 재미를 못 본 그는 나중에 유럽에 여행하고 나서 쓴 "차일드 해럴드의 편력"이라는 시집으로 유명해졌다. 그때 바이런은 "아침에 깨어보니 내가 유명해진 것을 알았다."고 말했는데, 이 말이 나중에 널리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 시집은 런던뿐 아니라 유럽을 뒤흔들었다. 그의 시집에 당시 일고 있었던 낭만주의의 모든 것, 말하자면 자유, 반항,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 자연, 사랑 등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엄격하고 보수적인 영국 사회는 그와 거리가 멀었다. 그가 세인들의 얼마에 오르내리게 된 것도 잦은 스캔들 때문이었다. 스캔들로부터 벗어나려고 결혼까지 했으나 그 결혼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그는 영국 사회의 비판에 못이겨 영국을 영구히 떠나기로 작정했다. 그 심정을 그는 "나에 대한 세평이 옳다면 내가 영국에 맞지 않는 인간이고, 그것이 틀린 것이라면 영국이 나에게 맞지 않는 나라이다."고 말했다. 스캔들로 유명한 만큼이나 자유에 대한 그의 정열은 남달랐다. 보수주의적이었던 당시 영국 상류층의 정서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같은 그의 정열은 자유에 대한 죽음으로 이어졌다. 당시 유럽에는 보수적이고 복고적인 비인체제가 수립되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다시 질식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점차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회복되면서 비인체제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자유주의가 유럽의 혁명들에 의해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면, 민족주의는 중남미 여러 나라와 그리스의 독립으로 소생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리스의 독립은 메테르니히의 비인체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리스는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그리스의 민족주의자들은 비밀결사를 만들어 1821년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이들은 실패했지만 곧 농민들의 봉기로 이어져 독립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메테르니히는 무간섭을 주장했다. 가만히 놔 두면, 그리스가 패배할 것이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유럽 여러 나라의 정부가 이 독립전쟁에 무관심했지만, 유럽의 낭만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은 일제히 그리스의 독립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들은 친그리스 위원회를 조직하여 물자와 자금을 보내 그리스 독립을 지지했던 것이다. 또 영국의 시인 셀리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라고 했고, 프랑스의 화가 드라크루아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을 화폭에 담았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그리스 땅으로 몰려갔다. 처음에 바이런은 그리스 독립군을 위해 5만 달러를 기증했다. 또 그리스가 위기에 처하자 그는 1824년에 과감히 그리스로 건너갔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에 입대한 지 3개월 후 그리스군의 최후 거점이던 메솔롱기온이 포위되었을 때 말라리아에 걸려 36세의 젊은 나이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죽으면서 그는 "전진! 전진!" 나를 따르라, 겁내지 마라!"라고 외쳤다 한다. 이후 그리스에 대한 원조도 늘어나고,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나섬으로써 1929년에 그리스는 독립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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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라
현재 55세인 안나는 젊어서 결혼했다. 아름답고 마음씨가 고왔던 그녀의 의사와 결혼함으로써 가난했던 자신의 집에 많은 도움을 가져다주었다. 1년 후에 한 아이를 얻었지만, 4년후 그 결혼생활은 이혼이라는 형태로 끝이 나고 말았다. 안나는 다시 학교에 가서 부기를 배우고 싶었지만, 현재의 사무 능력으로 충분하다는 가족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보다는 재혼을 해라." "빨리 재혼하지 않으면 나이가 들고 아이도 자란다. 그때가 되면 누구와도 결혼하기가 힘들어져."
독신으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부모님의 설득과 원하는 자리에 취직할 수 없다는 속상함이 함께 어우러져 안나는 재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은 그를 사랑하고 있고, 그 사람을 위해 일을 단념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그로부터 3년 동안 두 명의 아이가 더 태어났다. 그러나 안나는 자신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상냥하게 미소짓는 얼굴을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한번도 보일 수가 없었다. '남편'은 얻었지만 새로운 생활 또한 그녀와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자신'이라는 것이 없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고,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주부로서도 엄마로서도 실격'이라고 믿었으며 가족으로부터 감사와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그녀의 유일한 감점 표출 방법이었다. 아이들에게는 냉담하고, 남편에게는 심하게 잔소리를 하고 책망했으며,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그런데 50대 중반이 된 지금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남편이 방에서 나가면 안정을 잃고, 남편이 일로 외출하면 두려움에 휩싸여 당황하게 되었다. 그 정도로 마음의 평정을 잃게 되면 집안 일이나 남편의 시중은 고사하고 자신의 일조차 처리할 수 없다. 그녀는 인생이 자신을 두 번 다시 일어 설 수 없을 만큼 재기 불능케 만들었으며, 이는 모두 운명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정신적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방법을 배울 능력이나 기회를 갖지 못한 경우, 사람은 타인의 변덕스러움에 좌우되게 된다.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팔아 넘기는 꼴이 되는 것이다. 안나가 부모로부터 배운 것은, "너는 남편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다. 너의 힘이나 노력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 그것은 결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라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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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궁궐 공사로 손발이 갈라 터진 심덕부
심덕부(1328-1401)의 자는 득지이고, 본관은 청송이다. 고려말 음보로 동정에 올라 부원수까지 역임하였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커서 구공신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정몽주, 지용기, 설장수, 성석린, 박위, 조준, 정도전과 더불어 계책을 세우고 원로 종친들과 함께 궁궐로 가서 고려 왕실의 어른인 정비의 명을 받들어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궁궐과 종묘를 건축할 때 그에게 공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건물의 위치와 모양, 넓이와 크기, 성의 둘레와 높이 등이 모두 그의 책임하에 이루어졌고, 공사는 일 년 안에 끝났다. 공사를 감독할 때 일을 너그럽게 처리하고 성의를 다해 설득하였으므로 인부들이 조금도 괴롭게 여기지 않았다. 아들들이 벼슬을 하게 되자 그는 터지고 갈라진 자신의 손발을 내보이면서 훈계하였다.
"나는 손발이 부르트도록 열성을 다해 오늘에 이르렀다. 너희들도 벼슬아치 생활을 편안하게 앉아서 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그는 20년 동안 정승 자리에 있었으나 살림은 항상 넉넉지 못했다. 그는 늘 집안 사람들에게 당부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공직에 있는 몸이니 만약 누가 문안 올적에 선물을 가지고 오거든 절대로 받지 말아라"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고, 청성백에 봉해졌다. 시호는 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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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이글저글 |
미사(missa)
천주교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희생을 이어받는 것으로 빵과 포도주로 구현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사제가 받드는 의식, 이 미사를 통하여 천주를 찬미하고 속죄를 원하며 다시 은총을 기도한다. '그리스도'는 최후의 만찬 때 이를 제정했는데 이 세상이 다 하도록 사제를 통하여 자기를 희생하려는 것으로 십자가의 희생과 미사는 실질에 있어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사제는 미사에 있어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희생의 봉헌을 행하는 임무를 가진다. 신자가 일요일과 축일에 미사를 올리고 노동을 쉬는 것은 철칙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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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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