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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70 호
단기 4340. 4. 28 (음력 03.1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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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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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 제40회 목월백일장 >
경주가 낳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서정시인인 목월 박영종 선생을 기리고 문학정신을 계승하고자 다음과 같이 제40회 목월백일장을 개최하오니 많은 참여바랍니다.
0. 일 시 : 2007. 5. 27 (일) 10:00 (우천불구)
0. 장 소 : 경주 황성공원내 목월노래비 앞
0. 참가대상 : 전국 초, 중, 고, 대학 일반부
0. 참가부문 : 운문
0. 참가신청 : 당일 현장에서 접수
0. 준 비 물 : 필기도구 (원고지는 현장에서 배부)
0. 발표 및 시상 : 당일 오후 4시, 현장
* 제2회 동리목월기념사업회 백일장과 혼동 하지 않길 바라며 일정은 예정된 계획입니다. 후에 변경될 수 있으니 일짜 임박하여 다시 확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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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들은 대로만 옮기고 그 이상 보태서 꾸밀 줄 모르는 앵무새에게서 우리 누구나 배울 점이 많다. /「조크와 수수께끼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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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五十九章 (노자 - 도덕경 : 제5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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治人事天莫若嗇, 夫唯嗇, 是以早服, 早服, 謂之重積德, 重積德, 則無不克, 無不克, 則莫知其極, 莫知其極, 可以有國, 有國之母, 可以長久, 是謂深根固저, 長生久視之道.
치인사천, 막약색, 부유색, 시이조복, 조복, 위지중적덕, 중적덕, 즉무불극, 무불극, 즉막지기극, 막지기극, 가이유국, 유국지모, 가이장구, 시위심근고저, 장생구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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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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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아홉째 장
직역 다시할 것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는 아낌 같은 것이 없다. 무릇 오직 아낄줄 아는 것을 일컬어 일찍 회복되는 것이라 한다. 일찍 회복되는 것 그것을 일컬어 덕을 거듭 쌓는다고 한다. 덕을 거듭 쌓으면 곧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없으면 즉 그 끝을 알지 못한다. 그 끝을 알지 못하면 나라를 얻을 수 있다. 나라를 얻은 그 어미는 넓고 오래가는 것이니,이것을 일컬어 뿌리가 깊고 단단하고, 오래 살고 오래 보는 도라 한다.
해석
이장은 개벽장이다. 개벽전사 원의 도움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낌이라는 것은 樸散則爲器를 일컷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왜 다함을 알지 못하면 나라를 얻는다고 했을까. 이것에 대해서 개벽전사는 그 당시 사람들이 나라를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방편으로 제시했다고 말했다. 즉 나라라는 그들의 꿈을 내세워 자신의 방법을 행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덕을 쌓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베푼다. 그것이 점점 퍼져 나가면 나라가 스스로 복속해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 나라를 얻는 근본은 바로 덕이다. 이 덕이야 말로 오래 살고 오래가는 도이다. 이 덕의 실천은 아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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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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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일에는 농부처럼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농부는 자연의 섭리를 알고 그것에 일찍 복종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연의 섭리에 일찍 복종하는 것은 덕을 계속해서 쌓아 나가는 일이 된다. 덕을 계속해서 쌓아 나가면, 이기지 못할 일이 없다. 이기지 못할 일이 없으면, 그 도는 무궁무진한 것이 된다. 도가 무궁무진하게 되면, 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 나라의 근본을 차지하면, 그 나라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뿌리가 깊고 튼튼한 것은 오랫동안 살아 나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주
색: 농부, 인색, 검소 등으로 풀이하는 학자도 있음. 조복: 일찍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그것에 '복종'한다는 뜻임. 모: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근본 즉 도를 지칭한 것임. 장생구시: 생명을 오래 오래 유지하는 것을 말함. 적덕: 덕을 계속 쌓는 것. 덕을 계속 쌓아 나가면, 이기지 못할 일이 없다. 주역 곤괘의 문언 전에는 착한 일을 거듭 쌓아 가는 집안에는 반드시 자손 대에 이르기까지 경사가 있게 되고, 악한 일을 계속 쌓아 가는 집안에는 반드시 자손 대에 이르기까지 재앙이 내리게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표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의미상으로는 거의 같은 말인 것이다.
해
백성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일에 농사짓는 일처럼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농부는 자연의 섭리에 일찍이 순종하며, 그것에 의하여 농업을 영위할 뿐이다. 때에 맞추어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며 결실기에는 거두어들인다. 이 모든 일은 햇빛과 토양과 강우량과 온도 등 자연의 혜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농부는 열심히 땀흘려 일하나 그 성패의 결과는 자연의 섭리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그는 분수에 넘치는 일을 결코 하지 않는다. 일찌감치 자연의 이법에 복종하며 그것을 공경할 줄 아는 그는 그와 같은 경건한 자세를 통하여 남모르게 덕을 쌓아 나가는 것이다. 덕을 쌓아 나가는 사람에게는 경쟁자나 적대자가 있을 수 없다. 도와 덕을 지닌 이에게 천하 만민은 즐겨 복종하게 된다. 그는 나라를 가질 수도 있다. 뿌리깊은 나무가 쉽사리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위자연의 도로 나라의 근본을 삼으면, 그 나라는 오랫동안 번영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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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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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6장 매장문화재
문화재 보호법의 제정. 공포
한국전쟁 후에 새로운 보물을 탄생시킨 가장 사건적인 문화재 보수공사가 1959년에 있었다. 경북 칠곡군 동명면 송림사의 쓰러져 가던 통일신라시대의 오층전탑(당시 국보 제313호, 지금은 보물 제 189호)에 정부예산으로 보호의 손길이 미친 것은 그때 4월의 일이었다. 탑을 해체 수판으로 오려 만든 금빛 찬란한 작은 사리탑은 그 안에 새파란 유리로 된 너무나 아름다운 형태의 사리병을 안치하고 있었다. 또 은판을 투각한 섬세한 나무 모양의 상징적인 금구엔 금실로 고정시킨 무수한 영락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밖에도 수십 점의 각종 유물이 들어 있었다. 다만 12세기의 고려청자 합 하나가 따로 발견되었는데, 이 뜻밖의 유물은 고려 중엽의 중수 사실을 말 해주는 증거였다. 현재 이 귀중한 송림사 전탑유물들은 보물 제 325호로 일괄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같은 해 12월엔 경주 동남쪽 동해안께의 감은사터(월성군 양북면 용당리)의 삼층석탑(현재 국보 제112호) 2기를 해체 수리하다가 이번에도 통일신라시대의 놀라운 미술문화를 재확인시키는 걸작 사리장치 유물들을 발견했다. 유물들은 동서 쌍탑 중 서쪽 탑 속에 들어 있었고, 청동제 사리기와 사각감이 나왔다. 특히 정방형의 기단을 가진 보탑형의 사리기를 중심으로 난간 네 귀통이에 배치한 주악천인들과 높직한 기단의 사면을 파고 넣은 팔부신장은 일찍이 볼수 없었던 최고의 의장이었다. 이 감은사 석탑유물들도 보물 제 366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1960년을 전후한 시기는 정부 당국은 물론 매스컴을 포함한 일반 국민들의 민족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급속도로 높아지던 때였다. 동시에 지난날 일본인 도굴꾼과 악질적인 수집가들의 앞잡이 혹은 하수인으로서 매장 문화재에 관한 지식을 쌓았던 일부 골동상인과 그들의 조직망에 의한 불법적인 도굴이 곳곳에서 성행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였다. 그들의 배후에는 돈 많은 장물아비와 수집가가 있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이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이 시급산 문제에 강력히 대응한 것이 문화재보호법의 제정, 공포였다.
1962년 1월 10일자로 공포된 전문 7장 73조, 부칙 3조의 이 문화재보호법은 처음으로 문화재의 개념과 종류를 설정하고( 1)유형,무형문화재 2)기념물 3)민속자료), 정부 자문기구로 전문적인 문화재위원회의 설치를 규정했다. 이 문화재보호법은 또 매장문화재의 처리규정과 발견 혹은 신고자에 대한 표창(보상) 그리고 불법적인 도둑이나 임의의 취득자, 그밖에 문화재의 불법적인 국외반출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도 규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선량한 매장 문화재의 발견 및 신고자에 대한 응분의 표팡과 보상규정은 획기적이었다. 밭을 일구다가, 혹은 토목공사장에서 우연히 출토시킨 문화재를 지방 행정계통을 통하거나 문화재 관리국 또는 국립박물관에 직접 신고했을 때, 물건의 귀중성과 가치평가에 준해서 정부가 적절한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이 규정은 골동상인들에 의한 중간 탈취와 귀중한 발견 문화재가 또 다시 종적을 감추는 악폐를 막을 수 있을뿐 아니라 선량한 발견 및 신고자를 위해서도 지극히 고무적인 조처였다. 가령 시골의 한 주민의 국보나 보물급의 유물을 우현히 출토시켰다고 할 때, 만일 뜨내기 골동상인에게 적당히 처분하려 든다면 최소의 가격으로 빼앗기기가 일쑤다. 그리고 공돈이라고 몇 푼 받고 물건을 거저 빼앗겼다가 매장문화재 발견의 신고를 이행하지 않은 사실이 적발되면 그는 법에 규정된 처벌을 면할 수가 없다. 그런 일이 실제로 수없이 있었다. 대개 법을 모르는 시골 사람들이 당하는 일이다.
또 그전까지는 매장문화재를 발견한 사람이 그 사실을 당국에 신고한 경우에도 국가에서 적절한 표창이나 정당한 보상이 없어 섭섭히 여긴 일이 많았다. 그런 일은 발견자로 하여금 굳이 신고할 생각을 하지 않게 하는 결과를 빚고 있었다. 그런 모든 부당한 처사에 정부가 현실적으로 대처한 것이 '표창과 보상'의 명혹한 규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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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5. 도교란 무엇인가
도교의 용어인 '옥황상제'라는 말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인 용어로 쓰여 왔다. 그뿐 아니라 건강을 위해 환약을 먹는다거나 단전 호흡이나 기공, 도인 등을 하는 것도 모두 도교와 관련이 있다. 한의학도 도교의 발달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도교는 우리와 매우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런데 도교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는 매우 어렵다. 도교라는 말에 내포된 의미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교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도교'라는 용어에 대한 이해부터 하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이러한 개념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여 종교로서 도교의 모습을 전반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도가와 도교
우리는 도교 이외에 또 '도가'와 '노장'이라는 말을 자주 혼용하여 쓰고 있다. 도가라는 말은 전한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사기" '태사공자서'와 "한서" '예문지'에서 볼 수 있다. '태사공자서'에서는 도가를 "음양의 큰 순리에 따르며, 유가와 묵가의 좋은 점을 채용하고, 명가와 법가의 요체를 취하며, 때에 따라 움직이며 사물에 응하여 변화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로 볼 때 도가는 당시의 다양한 학파를 종합해서 성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도가는 철학, 도교는 종교라는 식으로 도식적인 이해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도식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도가와 도교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말할 수 있다. 첫째, 도가의 철학과 도교의 사상 사이에는 아무런 정합성도 없고, 도가의 철학이 도교의 사상들 안에 아무런 무리 없이 포함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주로 전통적인 도교인들의 주장으로서 양자가 동질적이라는 관점이다. 둘째, 양자는 전혀 이질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견해가 있다. 도가는 '순자연'의 사상이고, 도교는 '역자연'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셋째, 도가와 도교는 서로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후대의 도교에서 노장 사상을 어떤 틀에 억지로 꿰맞추어 원용해 왔을 뿐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것들은 도가와 도교를 이분법적으로 이해한다든지 도교의 역사 발전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각각 문제가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문제가 없는 견해로서 도교가 도가의 철학 및 다양한 요소들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는 하나, 그것은 단순한 절충이나 혼합이 아니라 거기에 어떤 일관성이 흐른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것은 도가와 도교가 불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선상에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이 관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종래의 중국 철학사에서 도가라고 하면 선진 시대의 노장 사상을 서술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도가는 선진 때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한대에 들어서도 '술'의 측면을 중시한다든가 노자를 신선화, 신격화한다든가 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양의 유협은 '멸혹론'에서 도가의 삼품을 논하였는데, "상은 노자를 표방하고, 중은 신선을 좇으며, 하는 장릉의 교를 따른다"고 하고 있어 이른바 도교를 도가라 부르고 있다. 또 당을 창업한 이연은 노자의 성명이 이이로 같은 이성이라는 데서 노자를 극도로 숭상하였고, 특히 당 현종은 도가 사상을 신봉하는 열의가 대단하여 742년에 노자를 현원황제라는 존호를 붙여 친묘에서 몸소 배향하는가 하면 장자를 남화진인, 열자를 충허진인이라 하여 노자에 배향한 바 있다. 결국 도가 중 어떤 부분은 단순히 이론 집단으로 그치지 않고 종교화의 길을 걸어 왔으며, 특히 육조 이후에는 도가와 도교라는 말이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야 도가와 도교의 철학 사상적 발전과 전개 과정이 궁극적으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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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가관이다
본뜻 : 본래의 의미는 '볼만하다'는 뜻으로 '설악산 단풍이 가관이다'같은 경우에 쓰는 말이다.
바뀐 뜻 : 참으로 볼만하다는 감탄의 뜻이 완전히 역전되어 '꼴 보기 좋다' '구경거리가 될정도로 우습고 격에 맞지 않는다'는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남의 말이나 행동이 꼴답지않을 때 비웃는 말이다.
"보기글" -옥아, 너 어른 앞에서 옷 입은 꼴이 그게 뭐냐 이만저만 가관이 아니구나 -김 대리 외국 나갔다 와서는 젠체하는 꼬락서니가 가관이더구만
가차없다
본뜻 : 가차는 한문 글자 구성의 여섯 가지 방법 중에 하나로서, 어떤 말을 나타내는 적당한글자가 없을 때, 뜻은 다르지만 음이 같은 글자를 빌어서 쓰는 방법이다. 독일, 불란서 등이그 좋은 예로, 주로 외국어를 한자로 표기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런 경우, 빌어다 쓴 한자는 단지 외국어를 비슷하게 소리내기 위한 것일 뿐, 한자 자체가 가지고 있는 뜻은 없다. 그러므로, '가차없다'는 임시로 빌어다 쓰는 것도 안될 정도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일의 주도권을 가진 쪽에서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는 것 또는 용서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자신의 태도에 가차없는 판단을 내려봐라 -이번에 실수하면 가차없다는데 잘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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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해 행해지는 정치의 연장이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전쟁은 과거의 전쟁과는 많은 점에서 달랐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의 전쟁은 과거처럼 왕위계승권과 같은 한정된 문제를 둘러싸고 행해진 것이 아니라 삶의 원칙이나 철학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한 마디로 과거의 전쟁은 왕과 같은 지배자들에 의해서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참혹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인해 국민이 실질적인 지배자로 등장한 이후에는 그와 같은 우연적인 전쟁의 발발은 줄어들었다. 대신 국민들 사이의 신념 차이로 벌어지는 대규모적이고 필연적인 충돌이 크게 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쟁의 양상도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과거 전쟁의 승패는 소수의 뛰어난 지휘관이나 군인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말하자면 개인들의 역할보다는 전체 국민이 중요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이야말로 이러한 전쟁의 의미와 변화를 꿰뚫어 본 사람이었다. 그의 천재성은 바로 그 점에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나폴레옹의 군사적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것을 이론화시킨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클라우제비츠(Karl von Clausewitz, 1780-1831)였다.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 출신으로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황태자와 시종부관를 역임하는 등 패기와 야심에 가득 찬 전도유망한 청년 장교였다. 그는 나폴레옹과의 전투인 아우에르스테트 전투에서 포로가 된 적도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것이 "전쟁론"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과정에서, 전쟁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을 수행하는 하나의 도구임을 이해한 것이다. "전쟁의 결과가 결코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그의 말처럼 전쟁의 배후에는 항상 정치가 작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고 한마디로 규정했다. 다만 폭력이라는 수단을 사용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전쟁론"을 쓴 클라우제비츠를 종종 오해하곤 했다. 말하자면 그가 전쟁광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저서에는 '전쟁이란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을 일소할 목적을 가지는 폭력행위이다.'라든지, '전쟁의 철학에서 완화의 원리를 도입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라든지, 아니면 '유혈없이 정복한 장군에 관한 것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하자.'라는 표현이 많이 있어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군국주의자가 아니었다. 다만 전쟁의 현실적인 성격에 주목했을 따름이었다. 게다가 이 "전쟁론"은 미완성 작품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다. 12살의 나이로 프로이센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39년 동안 직업군인으로 복무했던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을 다 완성하지 못한 채 콜레라로 죽었던 것이다. 그의 부인이 이 미완성의 유작을 정리하여 출간했던 것이다.
그의 저작이 처음부터 유명해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죽고 20년이 지난 후에 새로 책을 찍어냈지만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후에 프로이센의 참모총장을 역임했던 몰트케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제1차세계대전 때 독일측의 전쟁계획을 담당했던 슐리펜에 의해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쟁에 대한 명언을 하나 더 추가하자면, 오스트리아의 명장 라데츠키의 말을 들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이란 분명히 말해 과학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이다. 그것이 예술인 한,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그 장엄함은 누구에게도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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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인생의 동반자를 선택하기 전에 먼저 자립하라
남성을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하고 싶다면, 즉 식사의 '메인 코스'로 삼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당신 자신의 개성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자존심까지도 잃게 될 것이다. 남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사람을 우러러 받들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그 남자의 '종'이 되어 어린애처럼 그에게 인정받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남자를 단순히 디저트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다. 즉 스스로 자기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여성에게 주어지는 '포상'으로 간주해야 한다. 인생의 동반자를 선택하기 전에 우선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자립해야 한다. 이것은 여성의 책임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결단력, 용기, 경제적 기반, 자신의 일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 개인적 만족-을 남성이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 여성은 당연히 실망하게 될 것이다. 멋진 남성과의 만남을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그 여성은 자신의 힘이나 능력을 계발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남편은 결혼생활을 지탱하는 동반자가 아니라 단순한 부양가족이나 피해자, 때로는 가해자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맡은 일을 해나가는 여성이라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남성 또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늘날까지 여성이 계속해 온 당연한 행위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믿음은 '일심동체'라는 그럴듯한 유혹에 눈속임을 당한 보수적인 여성들만 품고 있는 것이 아니다. 훌륭하게 자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여성조차, 남성에게 정신적으로 좌우되어 "그가 없으면 안정이 안 돼요"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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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어느날 밤, 태조가 정도전을 비롯한 여러 훈신들을 불러들여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태조가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과인이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 경들의 힘이다. 우리들은 서로 공경하고 조심하여 자손 만세토록 변치 말자" "옛날 제환공이 포숙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포숙이 거땅에 있던 시절을 잊지 말라고 하였고, 제환공은 포숙에게 함거에 갇혀 있던 때를 잊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성상께서 말에서 떨어지셨던 때를 잊지 않으시고, 신 또한 죄를 지어 목에 칼을 썼던 때를 잊지 않는다면 자손 대대로 번창함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계에게 옥새를 바친 개국일등공신 배극렴
배극렴의 자는 양가이고, 본관은 성주이다. 고려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여러 번 문하좌시중에 이르렀고, 청렴하고 근검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공양왕 4년(1392) 6월 16일에 조준, 정도전 등 대소신료들과 함께 옥새를 받들고 이성계의 저택에 가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유하여, 태조가 드디어 보위에 올랐다. 태조의 비 신의왕후는 청주 한씨이다. 6형제를 낳았는데 정종이 둘째이고 태종이 다섯째이다. 또 둘째 왕비 신덕왕후 곡산 강씨는 2남 5녀를 두었는데 방번이 일곱째 왕자이고, 방석이 여덟째이다. 어느 날 태조가 배극렴과 조준을 내전으로 불러들여 세자 책봉을 상의하였다.
"평화 시대엔 맏아들이 우선이고, 난세에는 공이 있는 아들이 우선입니다"
신하들이 이렇게 진언하였는데, 갑자기 밖에서 여자의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신덕왕후가 이 말을 엿들었던 것이다. 그 뒤 어느 날 배극렴이 또 태조에게 불려 갔는데, 이때엔 맏아들이 우선이니 공로가 우선이니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물러 나와 여러사람들과 상의하였다.
"강씨가 자기의 소생을 세자로 삼으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 방번은 무절제하니 막내를 세우는 것이 그래도 낫겠다"
배극렴이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태조에게 주청하여 방석을 세자로 삼도록 하였다. 그의 벼슬은 좌시중으로서 개국 공신 일등에 영의정으로 특진되었으며, 성산백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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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어떤 사건이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마는 것을 흔히 '미궁에 빠졌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미궁에 빠진 사건은 허다하며 특히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한 '언론인 테러', '국회의원 테러' 등 정치성을 띤 사건은 의례히 미궁에 빠지기 마련이다. 범인이 '오리무중'을 헤매다가 '미궁'에 빠지면 일건 서류는 '영구미제'의 딱지가 붙어 창고에 처막히는 신세가 된다.
미궁을 영어로는 '래버린스' (lsbyrinth)라고 하는데 희랍어 라비린토스(labyinthos)에서 나온 것. '라비린토스'는 옛날 지중해 '크레테' 섬에 있던 왕궁으로 '미노스' 왕이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다에달로스'를 시켜 만들었다고 한다. 이 '라비린토스'는 그 내부가 어찌나 복잡하든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미노타우로스'는 몸은 사람이고 머리는 소인 괴물인데 '미노스' 왕은 그의 지배하에 있던 희랍에서 해마다 소년과 소녀 한 사람씩을 공물로 바치게하여 이 괴물의 먹이로 삼았다. 그러다가 영웅 '테세우스'가 나타나서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도네'의 도움으로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해 버리고 만다. 미궁이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즉 미궁 자체가 미궁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같은 제목의 영화가 우리 나라에도 들어온 적이 있지만 서양에서는 널리 퍼져 있는 옛이야기, 그 중에서도 18세기 중엽 프랑스어로 엮어진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어느 상인이 딸의 부탁으로 괴물의 집 뜰에 들어가서 장미꽃을 꺾는다. 그러자 괴물이 나타나서 딸을 바치지 않으면 상인을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한다. 딸은 자기 몸을 희생하기로 하고 괴물을 찾아갔더니 놀랍게도 괴물은 아름다운 왕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소녀의 헌신으로 악마의 저주가 풀렸던 것이다. 두 사람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산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이야기 가운데서 흔히 볼 수 있는 변신 이야기인데 여기에는 지극히 건전한 교훈이 담겨져 있다. 즉 사람의 가치는 그 외모로써 판단할 수 없다는 것. 괴물처럼 생긴 사람에게 왕자와 같이 고귀한 정신이 깃들어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생김새는 고귀하지만 본성은 야수와 같은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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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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