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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67 호
단기 4340. 4. 24 (음력 03.08)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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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편지에 행복을 첨부할 수 있다면 동봉하고 싶습니다.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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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2007 SBS TV문학상
SBS에서는 SBS드라마를 이끌 신인 드라마 작가를 발굴, 육성하기위해
다음과 같이 2007년 SBS TV문학상을 공모합니다.
형식: 특집 드라마용 60분 2부작
내용: 2007년 SBS 창사특집극으로 방송하기 위해 소재는 ‘가족의 의미’,
‘휴머니즘의 회복’, ‘개인과 사회윤리 추구’의 주제로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담보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함. ?
조건: 다른 방송사나 영화 등 매체에서 방송하지 않은, 원작이 없는 순수 창작물에 한함 ?
공모기간 : 2007년 7월 30일까지
공모처 주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탄현동 140. SBS 일산제작센터.
SBS TV문학상 공모 담당자 앞 (우편번호 411-840) ?
당선발표: 2007년 9월 17일(월) (SBS 뉴스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 ? 시상:
대상 : 1500만원
우수상 : 각 700만원
당선 작가는 이후 SBS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할 기회를 드릴 것입니다.
역량 있는 신인 작가 여러분의 많은 참여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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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동정과 이해가 따르지 않는 "정직"은 정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의이다. / 로즈 N.프랜즈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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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五十六章 (노자 - 도덕경 : 제5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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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者不言, 言者不知,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分,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 故不可得而親, 不可得而疏, 不可得而利, 不可得而害, 不可得而貴, 不可得而賤, 故爲天下貴.
지자불언, 언자부지, 색기태, 폐기문, 좌기예, 해기분, 화기광, 동기진, 시위현동, 고불가득이친, 불가득이소, 불가득이리, 불가득이해, 불가득이귀, 불가득이천, 고위천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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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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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여섯째 장
직역
아는 자는 말이 없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며,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얽힘을 푼다. 그 빛을 조화롭게 하고, 티끌을 고르게 한다. 이것을 일컬어 그윽한 같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는 친함을 얻을 수 도 없고, 멀어짐을 얻을 수도 없다. 이익을 얻을 수 도 없고, 손해를 얻을 수 도 없다. 그 귀함을 얻을 수 도 없고, 그 천함을 얻을 수 도 없다. 그러므로 하늘 아래에 귀함이 된다.
해석
말은 최소한의 정보를 나눈다. 일상생활에 필요한 정보를 나눌 수 있다. 그것 뿐이다. 말은 자신의 감정을 조금밖에 전하지 못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아니 말을 해도 알아듣게 하기 힘들다. 도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보여준다. 실천으로 보여준다.
도에는 차별이 없다. 친해 지고 멀어지고, 이익을 얻고 손해를 보는 것은 차별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도는 누구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천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선입관을 가지고 다른 것들을 보지 않는다. 자신의 세력을 쌓기 위해서 친한 사람들을 만들지 않는다. 도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은 있는 그대로 평등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아래에 귀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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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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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욕망의 구멍을 막고 유혹의 문을 닫으며,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며 분규를 해소시키고 그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이것을 신비한 조화와의 하나 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도의 신비한 조화와 하나가 된 사람은 남들이 친근하게 할 수도 없으며, 소원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주
화기광 동기진: 그 빛을 부드럽게 하여 그 티끌과 함께 한다. 여기서 빛은 앎에 의한 지혜와 분별을 뜻하며, 티끌은 세속 내지는 세속임을 의미한다. 도를 체득한 이는 자신이 자부심을 버리고 세속 인과 분규를 풀어 없애고 지혜를 내세우지 않으며 세속 인과 원만하게 어울릴 줄 안다. 만물은 언제나 동일한 차원에서 보는 그는 차별, 배척, 제거 등의 개념을 알고 있지 않다. 그는 세속에 살고 있으면서 세속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의 맑고 깨끗한 본 바탕은 오염되거나 변질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동: 도의 신비한 작용. 도의 오묘한 조화. 도의 신비한 조화와의 합일.
해
아는 사람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원래 도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에 관하여 말한다. 도를 아는 사람은 욕망을 일으키는 자신의 내부를 단속하며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욕의 문도 닫아 버린다. 그는 자신의 지혜로움을 내세우지 않고 분규를 풀고 격한 감정을 누그러뜨려 분쟁의 원인을 원천적으로 없애 버린다. 도와 하나가 된 사람은 자신의 탁월한 지혜를 감추고 세속 인과 원만히 어울리며 그들과 고락을 함께 한다. 세속과 함께 하건만 세속에 물들지 않고 그것을 초월할 수 있다. 도를 체득한 이는 날카로움과 둔함, 밝은 것과 어두운 것, 강함과 약함, 억셈과 부드러움 등의 극단적인 것을 잘 조화시켜 언제나 신비한 작용으로 동일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른 사람을 남들은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멀리 할 수도 없으며, 이익을 줄 수도 없고 해악을 끼칠 수도 없으며 존귀하게도 비천하게도 할 수 없다. 그는 이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초월한 진정한 자유인인 것이다. 그를 얽매이게 하거나 구애받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인 것이다. 이 장에 나오는 도와의 신비한 합일이라는 말은 노자 철학의 초월적, 신비주의적 분위기를 잘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뒷날 남북조 시대의 도교 사상의 핵심적 개념이 된다. 노자의 철학은 이성과 논리를 초월하여 무지 무욕의 경지에서 오로지 도 즉 자연과의 합일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서양 철학이 이성과 논리를 내세우며 자연을 해부하고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객관적 지식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노자의 이와 같은 초월적 신비주의는 뒷날 도교의 신선사상등으로 발전될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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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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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5장 한국전쟁과 잃어버린 국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지켜낸 박물관 유물들
북한공산군이 38선을 넘어 전격적으로 남침을 감행한 1950년 6월 25일은 전쟁 도발자가 치밀하게 계산한 일요일이어서 국립박물관엔 책임 있는 직원이 아무도 출근하고 있지 않았다. 김재원 관장이 그의 사택으로 급히 달려온 박물관 연구원 최순우로부터 사태의 위급함을 안 것은 그날 오후였다. 서울 거리는 벌써 완전히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외출 혹은 휴가 장병의 즉시 귀가를 독촉하는 급박한 목소리가 거듭 울리고 있었다. 26일 아침, 모두 불안스럽게 출근한 박물관 직원들은 정확한 전황을 알길이 없는 채 만약에 대비한 비상조치를 서둘렀다. 진열장에서 모든 유물과 미술품들을 꺼내 안전한 창고 속에 격납했다. 어떤 상황 아래서도 박물관 소장의 국가 문화재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의 임무였다. 당시 서울 국립박물관의 직원들은 김관장 외에 이홍직·김원룡·황수영·최순우 등이었다. 27일 밤엔 서울 시내에 공산군의 박격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28일, 공산군은 마침내 서울에 들어왔고 박물관은 고립되고 말았다. 박물관 직원 가운데 유물 보호를 포기하고 혼자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탈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김관장 이하 모든 직원은 경복궁안의 관사를 중심으로 모여 전세의 귀추를 초초하게 지켜볼 뿐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7월 5일게였다. 북에서 온 이른바 물질조사 조사보존위원회의 서울 지구 책임자라는 김아무개가 박물관을 접수한다고 찾아왔다. 그는 뒤켠의 관사에서 직원들을 불러내어 유물 보호를 계속 맡도록 하라고 말할 뿐 당장은 별다른 행동이 없었다. 김관장만 관사에 연금당하는 상태였다. 한국 전쟁으로 자기 정체를 드러낸 공산당원 하나가 박물관에도 있었다. 사진실에 근무하던 김영욱이었다. 그가 박물관 책임자로서 상부 공산당 조직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상성분이 비교적 온건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박물관 직원들은 다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8월에 들어서자 B29의 실지 서울 폭격이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도심지나 고궁은 피했기 때문에 박물관 창고의 유물은 안전했다. 유엔군의 공중공격과 위협은 날로 심해지고 공산군의 패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부 발물관 직원들은 몰래 숨겨둔 라디오의 단파 방송으로 유엔군의 참전과 철수했던 국군의 북진 기세를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박물관에 김아무개가 다시 나타나 유물소개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라는 심각한 지시를 해왔다. 전세가 악화되자 북으로 실러 가려는 건지, 아니면 서울 안의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려는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직원들은 "빨리 모든 유물을 포장하라" 는 독촉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만 점의 박물관 물건을 모두 포장하여 신속히 이동시킨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큰 철조와 석조 미술품은 그대로 두고 중요하고 작은 것만 수천 점이 포장되었다. 그것들은 일단 경복궁에서 덕수궁미술관의 더 완벽한 지하창고로 옮겨졌다. 덕수궁미술관(당시 관장은 이규필) 소장의 미술품도 중요한 겻은 역시 모두 포장되어 지하창고로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 때, 공산당 관계책임자들은 덕수궁도 불아했음인지 이번엔 종묘 경내의 숲 속에 땅굴을 파도록 박물관과 미술관 직원들을 동원시켰다. 이곳으로 성북동의 간송미술관 소장품을 포함한 기타 민간 소장품즐도 모두 옮겨올 계획이었다. 밤마다 땅굴 파는 작업이 강행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유엔군의 극적인 인천 상륙과 서울 수복의 임박으로 중단되고, 공산군과 공산당 조직은 서울 시가전 대비와 북으로으 후퇴를 서두르느라고 갈팡질팡이었다.
9월 20일, 한국군 해병대를 선두로 한 유엔군은 드디어 한강을 건너 서울 탈환의 마지막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때 경복궁 뒤뜰의 박물관 관사에서는 김재원 관장이 급히 영어로 된 신분증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드디어 박물관이 위치한 경복궁에도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중앙청이 불붙고, 몇 채의 고건물이 말아갔다. 남쪽에서 쫓겨 온 공산군의 일부가 궁 안으로 밀어닥쳐서 개인호를 파고 지뢰를 매설하는 등 서울에서의 마지막 저항과 시가전을 준비하고있었다. 박물관 직원들은 무서운 포화 속을 뚫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유물이 있는 덕수궁으로 갔다. 3개월간의 공산치하에서 박물관 책임당원으로 등장했던 김영욱은 한 직원에게 "나는 북으로 떠납니다. 같이 가자곤 않겠습니다" 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덕수궁미술관 지하창고에 모두 무사히 모인 박물관 직원들은 각자 최후의 안전처를 선택하여 미술관 건물과 옆의 석조전 지하실 금고 같은 곳으로 들어가 숨었다. 석조전에 포탄 하나가 명중하여 불길이 치솟았다. 유물이 보관돼 있는 미술관 건물이 불붙지 않은 것이 천행이었다. 최악의 공포속에 며칠이 지나갔다. 9월 26일, 유엔군은 마침내 서울을 완전 탈환했다. 유물들과 박물관 직원들은 극적으로 모두 무사했다. 석조전이 불탈 때 동료직원의 안전을 확인하려고 밖으로 나온 이홍직 학예감이 가까이에서 작렬한 포탄의 파편을 이마에 맞는 부상을 당했을 뿐이었다. 9월 28일 정부 수복. 29일,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대동하고 공로로 서울 귀환. 수도 서울 탈환식 거행. 유엔군은 계속 북으로 공산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30일엔 북진하는 유엔군에게 38선 돌파명령이 내려지고, 10월 18일엔 '평양 입성' 이라는 전격적인 공세가 감행되었다. 그리고 11월 1일엔 마지막 선인 신의주와 한.만국경에 육박하고 있었다. 전쟁의 종식과 국토통일은 목전에 있었다. 그러나 거기가 고비였다. 10월 중순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정부가 중공군의 개입 기미를 발표한 것은 서울이 수복된 지 20일 후인 10월 17일이었다. 국립박무관에선 평양박물관 접수문제를 숙의하던 참이었다.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정세를 주목한 김재원관장은 백낙준 문교부장관을 은밀히 만나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 소장의 문화재를 남쪽의 안전지역으로 소개하는 대책이 긴급하다는 점을 협으했다. 백장관도 그 중요성을 금세 깨달았다. 그는 그 즉시 이대통령에게 가서 설명했다. 이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문화재의 인식이 높았다.
"극비로 속히 서울을 떠나게 하라. 부산의 안전처로 운반하되 민심이 동요치 않도록 비밀을 유지하라. 그리고 우반 도중의 보호에 최선을 다하되, 모든 기관이 협력하라."
대통령의 긴급 비밀지령이었다. 미국대사관에도 협력을 요청했다. 앞에서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던 나머지 국가 문화재의 철수작전을 펼 겨를이 없었지만, 만약에 대처하는 이번 비밀 소개계획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미국대사관에선 크네츠 문정관(뒤에 워싱턴 인류학박물관 근무)이 최대의 협력으로 트럭을 마련해주고, 유엔군 작전열차 소에 특별 회차도 주선했다. 10월말, 국립박물관은 비밀 간부회의를 갖고 부산으로의 유물 운반계획에 착수했다. 김관장과 소수의 간부직원들만이 진행시킨 비밀 작업이었다. 덕수궁미술관 지하창고에 그대로 보호돼 있던 박물관과 미술관 소장품들은 밤중에 트럭에 실려 서울역으로 운반돼 갔다. 서울역에서 군용열차의 특별 회차에 실린 박물관과 미술관 유물들이 아무도 모르게 부산으로 출발한 것은 11월 4일이었다. 예측했던 대로 중공군의 개입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약 1주일 만에 부산에 도착한 1차 소개 유물들은 사전에 연락이 되어 급히 안전창고로 개조한 미공보관 건물(한국전쟁 발발 당시엔 대사관이 사용해다) 차고에 격납되었다. 유물관 간부들뿐이었다. 이들은 1.4후퇴 때까지 3차에 걸쳐 박물관과 미술관 유물을 무사히 부산으로 운반하는 데 성공했다. 중요한 물건은 거의 서울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은 물건은 있었다. 서역벽화 같은 큰 덩어리의 귀중한 유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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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불교란 무엇인가
3. 보살도의 대승 불교
이론 중심적이고 출가 중심적인 부파 불교는 제가 신자들의 구제문제(해탈)를 봉쇄시키고 있는 셈이다. 부파 불교의 구제론에 따르면 해탈을 얻으려면 일단 출가 수행을 해야 하며, 또 참된 수행을 위해서는 부처의 가르침(법)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제론은 번쇄한 법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엘리트에게만 가능하였다. 이러한 한계와 문제점은 결국 불교 개혁 운동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재가 신자들과 기존 불교권 내 진보적 출가 비구들이 서로 호응하면서 부파 불교의 폐쇄적이고 경색된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대대적인 개혁 운동이 발생했던 것이다. 기원 전후 무렵에 일어난 불교의 이러한 개혁 운동은 마침내 성공을 거두어 불교를 새로운 면모로 발전시켰다. 이를 대승 불교라 한다. 대승 불교는 먼저 부파 불교의 기본적 이념을 문제삼는다. 불교의 근본 목적인 해탈을 성취할 가능성은 출가 비구들로 제한되어 있는가? 그리고 해탈의 방법에서도 법을 이해하는 것이 그 필요 조건인가? 그들이 이제까지 해왔던 부처에 대한 믿음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대승 불교의 주체 세력들은 이와 같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불교의 본질적 문제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그들의 태도는 곧 부처로 돌아가자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들이 주목한 것은 '석가의 삶' 그 자체였다. 부처가 되기 전에 석가는 그들과 같은 한 인간이었다는 사실과 부처가 된 석가의 삶은 부처적 삶의 내용이라는 사실을 주목했고, 이것을 불교 개혁 운동의 출발지로 삼았던 것이다. 기존 불교의 구제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재가 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전자는 곧 자신들의 해탈 가능성을 확인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해탈의 주체임을 발견하였고 이를 '보살'이라 선언하면서, 오히려 자기들만의 해탈만을 추구하는 기존 교단의 출가 비구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또 부처가 된 다음의 석가의 삶(중생 구제)에서 볼 수 있듯이 부처가 부처다울 수 있는 진정한 이유는 '타인 구제에 힘쓰는 삶'에 있다는 후자의 사실은 보살이 부처로 전환할 수 있는 '보살의 길'을 내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깨달음을 내용으로 하고 그 실현으로서 타인 구제에 힘쓰는 주체적 삶이야말로 불교의 본질이며, 이것이 바로 부처로서의 석가의 삶에 들어 있는 참된 의미요 보살의 길이라는 것이다.
기존 교단에 대한 비판과 개혁으로 나타난 대승 불교는 한 마디로 부처가 된 석가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일종의 원형 회귀 운동이며 부처 중심의 불교 운동이기도 했다. 또한 불교적 이념의 중심축이 변한 것은 출가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재가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고려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곧 해탈의 보편화를 의미한다. 또 이에 따른 부처관과 구제론도 변화하게 되었으며 그 의미도 확대되었다. 해탈의 보편화란 해탈 가능성의 일반화, 즉 불성의 문제를 말하는데, 이것은 부처관과 관련되면서 나중에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장 확장된 결론으로 귀결된다. 부처를 보는 관점도 애초의 석가불로부터 이를 시공간적으로 점점 확대시켜 삼세제불 및 일체불 혹은 이를 조직적으로 개념화시킨 법신, 응신, 보신의 삼신관으로 정리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를 내재화시켜 여래장 사상으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그제론(수행론)도 부파 불교에서처럼 주로 법의 이해를 통한 해탈의 방법보다는 부처와의 일체를 통한 수행론이 강조되었다. 이를테면 부처에 대한 믿음이나 타인 구제에의 서원이라든지, 부처에 대한 염원과 명상 그리고 부처로부터의 보증 등과 같은 새로운 구제론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대승 불교의 새로운 수행론에 들어 있는 핵심은 타인 구제의 이념과 부처와의 관계를 중시한 것이다. 대승 불교는 이러한 입장에서 그 구체적 실천 강령을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 등 소위 '육바라밀'로 새로 조직해 내었다. 언뜻 보면 부파 불교에서 거론하는 삼학의 내용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의미상으로 차이가 많다. 어쨌든 대승 불교는 큰 성공을 거두어 중국, 한국, 일본 등 주로 북방 불교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대승 불교의 성장과 발전이 하나의 구심점을 가지고 일사불란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부파 불교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이념적 공통성을 가졌다 해도 대승 불교 운동을 추진해 간 주도 세력의 지역별 차별성만큼 대승 운동의 내부적 속성도 여러 갈래가 있었다. 이를테면 반야계 대승 운동, 정토계 대승 운동, 화엄계 대승 운동, 법화계 대승 운동 등 매우 다양한 갈래로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유식계 대승 운동이나 여래장계 대승 운동과 같이 선행했던 대승 불교 운동의 종합적 지양 혹은 그 극복의 대안으로 일어난 것도 있었다. 이들 각 대승 운동이 나름대로의 지지 기반을 얻어 다른 대승 운동과 경쟁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론적 기반을 다시 정립해야 했다. 역설적이게도 부파 불교의 이론적 번쇄함을 비판하면서 시작했던 대승 불교 운동이 이제 그들 자신의 이론 정립을 위해서 다시 부파 불교의 이론과 개념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승 불교의 이론과 개념은 대승의 이념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 폭과 깊이에서 부파 불교의 그것과 확연히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대승 불교의 아비달마화, 즉 대승 불교의 체계적 이론화 작업에서 성공한, 대승 불교의 대표적인 학파는 반야계 대승 불교의 중관 학파와 유식계 대승 불교의 유식 학파이다. 전자의 학파를 형성한 자가 용수와 제바이고, 후자의 학파를 형성한 자가 미륵과 무착 그리고 세친이다. 용수가 저술한 "중론"을 기초로 한 중관 학파의 사상은 부파 불교의 중심 개념인 '법'(존재)에 대하여 그 실체성을 허물어 버리고 존재와 인식을 통일하는 '공' 개념을 통하여 세계를 총체적으로 설명해 내고 있다. 우리는 이 세계를 총체적으로 설명하려 할 때 존재를 기반으로 해서 인식의 문제까지 설명해 내거나, 아니면 인식을 기반으로 존재의 문제까지 설명해 나가거나 하는 이원론적 대립의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중관 학파는 깨달음의 정점에서는 이러한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 이것을 개념 파괴적인 개념, 즉 '공'의 개념으로 접근해 나가고 있다. 실체론적 의미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개념적 언어를 통해서는 반야의 지혜에 원천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문제 때문에, 이 학파의 논리는 개념 파괴적이고 논리 파괴적이다. 이것은 중관 학파의 기본 취지가 불교의 핵심인 깨달음과, 그 깨달음에 기초한 세계의 참모습이 언어의 세계를 뛰어넘는 저편의 문제라는 점을 드러내 보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관 학파는 그들의 입장을 드러냄에 있어서 철학적 태도를 결코 배제하지 않았다는 데서 불교 사상사의 금자탑과도 같은 위치에 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무착과 세친에 의해 형성된 유식 학파는 중관 사상에 대한 비판적 극복의 대안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유식 학파는 우선 중관 학파의 논리 파괴적인 논리와 개념 파괴적인 개념이 엄청난 오해를 가져 오고, 나아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 자체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중관 학파가 자기 파괴적 논리와 개념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본체론적 측면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라 여겼다. 즉 공이라는 말이 부정하고 있는 것은 명칭을 통해 임시로 설정된 사물을 실체인 양 보는 일에 대해서이다. 가설된 것은 무이다. 그러나 사물의 세계는 가설된 것과 똑같은 의미에서 무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식 학파는 가설된 것과 그 기반이 되는 사물의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명확히 구별하고, 공이라는 말이 부정하는 의미가 적용되는 범위를 가설된 것에 한정함으로써 사물적 세계의 존재를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그 세계를 '식'이라는 말로 치환하여 세계를 통일적으로 설명하였다. 현상에 대한 실체론적 접근 태도를 부정적 논리로 설명하는 중관 학파와 달리, 미리 현상 세계의 한계를 설정하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유식 학파는 식일원론을 취하는 일종의 불교 현상학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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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망구
본뜻 : 지금은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점점 높아지고 있지만 멀지 않은 옛날만 해도 60세를 넘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만 나이로 60세가 되면 환갑 잔치를 성대히 치름으로써 그 동안살아온 노고를 축하하고 또 앞으로의 장수를 기원했던 것이다. 만 60세를 환갑이라 하는 것처럼 나이에 따라 각기 부르는 명칭이 따로 있는데, 70세를 고희라 하고 77세를 희수라고 하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 80세는 이미 황혼으로 접어든 인생이라 하여 모년이라 하고, 81세는 90세까지 살기를 바라는 나이라는 뜻에서 망구라고 한다 '할망구'라는 말의 유래를 여기에서 찾기도 하는데, 할망구란 망구(90세)를 바라는 할머니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할머니만을 가리키는 할망구라는 말만 있는가 하는데 와서는 사회생물학적 해석이 가능하다 옛날에도 남자보다 여자의 평균수명이 높았기 때문에 나이 든 할아버지보다 할머니들이 훨씬 더 많았던 연유로 연세 많은 할머니만을 지칭하는 말로 굳어진 것이다. 한편 88세는 미수라고 하고, 90세는 모질이라고 한다 모질의 글자 생김을 보면 금방 그 뜻이 이해가 갈 것이다 늙을 로 밑에 터럭 모를 씀으로써 몸에 난 터럭까지도 하나 남김없이 늙어 버렸다는 뜻이다
바뀐 뜻 : 할머니를 조롱하거나 장난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보기글"
-옆집 할망구가 글쎄 나한테 같이 약수터나 다니자고 그러지 않겠어? 그러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늙은이들이 연애한다고 할 거 아닌가?
-엄마, 머리 염색을 안 하니까 갑자기 할망구가 된 거 같아요 나이 드실수록 젊게 꾸며야 마음도 젊어지시지요
핫바지
본뜻 : 보통 별볼일 없이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속어로 쓰이는 '핫바지'라는 말은, 원래 솜을 두어 지은 두툼한 바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지에 솜을 두었기 때문에 모양이 나지 않을 뿐더러 입었을 때 어딘가 둔해 보이고 답답해 보인다.
바뀐 뜻 : 솜을 두어 지은 겨울 바지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주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이나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놀리는 말로 쓴다.
"보기글" -이보게, 자네 핫바지 같은 김 서방을 뭘 그렇게 두려워하나? -시골에서 갓 올라왔다는 그 이씨 말야 말하는 거 보니까 완전히 핫바지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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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영국은 각자 그 의무를 다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나폴레옹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를 심어 준 것은 바로 영국이었다.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이 영국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패망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사실 육상 제국인 프랑스가 해상 제국인 영국과 전쟁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국은 이미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바 있는 최강의 해군 국가였다. 그러나 영국이 단지 강력한 해군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군을 물리친 것은 아니었다. 당시 해전에 임한 전력만을 비교한다면 오히려 영국이 열세였다. 1805년 10월 12일 나폴레옹의 명령을 받은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인 스페인 카디스항 근처의 트라팔가곶 앞바다에서 영국의 넬슨(K. Nelson, 1758-1805) 제독이 이끄는 함대와 격돌했는데, 영국 함대는 27척이었고 연합함대는 33척이었다. 이 전투에서 넬슨은 전력상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넬슨은 자신의 함대 일부를 프랑스 연합함대 후미에 배치하고 자신은 나머지 함대를 이끌고 연합함대를 따라다니며 포격을 가했다. 영국의 손실은 전사자 1,600명이었고 함선의 손실이 없었던 데 반해서, 프랑스의 손실은 전사자 7,000명에 침몰 5척, 나포 17척이나 되었다. 넬슨은 이 전투에서 사망했는데, 그는 승전 보고를 받고 "신이여 칭찬할지어다. 나는 나의 의무를 다했다."고 말하고 곧 숨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이 승리한 것은 물론 해상의 전술과 기량면에서 영국군이 프랑스군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당시 넬슨 제독이 내건 구호가 영국군의 사기를 크게 드높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넬슨 제독은 기함 빅토리아호와 돛대에서 명령을 내렸는데, 그것이 바로 "영국은 각자 그 의무를 다하기를 기대한다."는 유명한 말이다. 여기에 맞선 프랑스군은 "황제 만세!"를 외쳤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조국애를 고취한 것이 승리의 비결이었던 셈이다.
나폴레옹에 대항한 또 다른 영국 인물은 '철의 공작'으로 유명한 웰링턴(A. Wellington, 1769-1852)공작이다. 백일천하로 다시 집권한 나폴레옹과 워털루 전투에서 자웅을 겨룬 사람이 바로 이 웰링턴이었다.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군과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은 연합하여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무찌름으로써 나폴레옹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런데 웰링턴은 워털루 전투 후에 "워털루 전투는 이튼 운동장에서의 승리가 가져온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곧 이튼 학교 시절에 운동으로 다져진 육체와 정신력이 워털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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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지금은 자신을 사랑할 때
"결혼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이 말은 내 인생의 진부한 표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말은 내 인생의 진로를 크게 변화시켰다. 아직 내가 나아갈 진로를 모색 중이기는 하지만 한가지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의 기쁨 뒤에는 대개 실망과 노여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남자가 여자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무한한 바람막이가 되어줄 것이라는 '환상'이 사라질 때가 반드시 찾아온다. 남편이 다정함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갑자기 짜증을 내거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별안간 병이 나거나, 1달러가 아까워 투덜거리는 등의 상황은 어떻게든 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이 자기에게 새로운 인생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떠맡아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아내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도리다. 인생은 스스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계획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남성에게 보살핌을 받겠다는 환상과 결별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현실'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은 흔히 지나간 일에 매달려 자기가 자립할 수 없는 이유를 이것저것 늘어놓는다. 가장 자주 듣는 말이 "나는 가족의 뒤치다꺼리만 하도록 생겨먹었어"라는 변명이다. 중요한 것은 인식의 문제이다. 자립심이 풍부한 어른이라면, 과거의 실패를 자주 검토하여 또 다른 결론을 이끌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실패' 라고 생각했던 것도 견해를 달리하면 무형의 재산으로 여기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당신은 자신의 인생이 남편과 주의의 탓으로 어긋났다고 단정짓고 스스로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한때는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애인이나 가족, 친구를 원망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나 자신의 운명을 저주한 적도 있었다. 그토록 어두웠던 내 마음에 한줄기 빛이 흘러 들어와 자립에 대한 길을 비추기 시작한 것은 내가 21살 때였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나의 인생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인생을 풍부하게 하고 주위 사람들의 생활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과거에 얽매이고 타인의 계획이나 뜻에 따라 살아가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건전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며, 건강한 아이를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운이 좋았다. 나는 내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도 자신이 가야 할 바른 길을 발견하기 바란다. 부모로부터 철저히 주입 받은 사고방식을 다시 검토하고, 부모나 연인 , 남편과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려고 애씀으로써 자기를 보는 눈을 길러야 한다. 자기 자신을 비하시키는 습관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아내는 가져도 인생의 전부로 삼지는 말아라."남성들은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여성에게도 적용 될 수 있는 말이다. 남성이 여성의 삶에 있어서 전부가 아닌, 즉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여성의 알찬 인생에 보내지는 감미로운 디저트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여성은 자신을 매도하는 일없이 보다 현명하게 인생의 동반자를 택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무조건적으로 그의 수중에 떨어질 염려는 없을 것이다.
1.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여성
나는 단지 나일 뿐
수년 전 나는 혼인 서약을 하려고 하는 신랑 신부에게 행해지는 주례사를 들은 적이 있다. 설교는 주로 신부를 향한 것이었다.
"오늘부터 당신은 제인 로버트가 아니라 제인 브룩스입니다."
단호한 어조로 목사가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은 브룩스의 아내로 인정받게 될 것있니다. 남편의 성, 하나의 침실, 공동의 인생 목표를 가지고 서로 가까이 다가서서,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심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개별이라는 단어는 아내가 되는 당신과는 거리가 먼 단어가 될 것입니다."
나는 점점 목사가 강조하고 있는 내용들에 화가 나기 시작하였다. 남성의 형편에 맞추어 여성의 개성을 말살시키는 것이 '일심동체'라니, 이것은 '일심동체'라는 말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주례사는 각각의 개체로 서 있는 두 사람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 결혼 생활이며, 그 속에서 두 사람이 각자 성장해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할 것이다. 부부를 일심동체라고 생각하는 여성은 일생을 자신이 아닌 다른 인간으로 보내게 될 것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어떠한 인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로 인생을 끝마치게 되는 것이다. 일심동체라고 하는, 언뜻 로맨틱하고 유혹적으로 느껴지는 단어도, 일단 환상이 깨지고 난 후에는 엄연한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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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명성황후 시해, 그 '여우사냥'의 비밀
대원군의 탐욕 (3/3)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공덕리 별장을 물러나와 곧바로 인천으로 향한다. 조선정부의 방심을 유도하자는 면밀한 작전이었다. 그가 인천에 숨어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뜻밖의 사태가 발생한다. 군부대신 안경수가 미우라 공사를 찾아와 일본 교관이 조련한 조선훈련대를 해산하겠다고 통고한 것이었다. 미우라 공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훈련대가 해산되면 흥선대원군의 입궐이 불가능해지고, 따라서 명성황후의 시해작전에도 큰 차질이 빚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우라 공사는 황급히 스기무라 서기관에게 명하여 인천에 있는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그 일당들의 귀경을 명했고, 호리구치 영사관보를 불러서는 오카모토 류노스케를 마중하여 작전계획을 앞당기도록 명했다. 이때의 일을 히로미사 지방재판소의 예심판사가 작성한 예심결정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피고 미우라는 경성수비대의 대대장 바야하라에게 훈련대를 조정하여 대원군의 입궐에 대한 모든 일을 지휘하게 했다. 그리고 피고 아타치와 구니토모를 공사관으로 초치하여 관련자를 규합하고 용산으로 달려가서 대원군의 입궐을 호위할 것을 명하면서, 우리가 처한 20년 내의 화근을 뿌리뽑는 일이 실로 이 일에 있음을 믿고, 입궐하면 황후폐하를 살해할 것을 교사했으며 한편 피고 호리구치는 말을 달려 용산에 이르렀고, 피고 하기하라는 비번인 순사들에게 사복을 입고 도검을 착용하여 용산에 집합하라 명하고 자신도 달려갔다. 피고 아사야마는 이주회를 만나 오늘밤 대원군을 입궐하게 한다는 것을 알리고, 그로 하여금 관련 조선인을 규합하여 용산으로 가게 하고, 오카모토를 총지휘자로 하여 공덕리에 도착, 이주회의 일행과 함께 다음날 오전 3시경 대원군의 교여를 호위하고 출발했다.
이와 같은 경우에 따라 경복궁을 범궐하려는 무리들인 일본 낭인들의 몰골은 어떠했는가. 역시 앞의 글에 이어 다음과 같이 적어 놓고 있다.
일행 30여 명은 용산의 쇼시, 기타니의 양 점포와 일본경찰서에서 잠시 휴식하고, 밤 12시가 진서 결속을 마치고 공덕리로 향했다. 양복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허리에 칼을 찬 사람도 있었고, 몽둥이를 든 자, 짚신을 신은 자, 양복을 입고 밀짚모자를 쓴 자, 그 해괴한 모양은 초적폭도의 일단과 같았다.
일국의 국모를 시해하려는 무뢰배의 몰골로는 아주 제격이지만, 외교공관에서 주도하는 비밀작전으로는 한심한 지경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증언하는 당시 공덕동의 밤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공덕리로 가는 길은 양쪽으로 커다란 버드나무의 가로수가 서 있어 그 그림자가 땅 위에 늘어져 있었고, 달빛은 싸느랗게 밝아지고 바람은 찼다. 오른쪽으로는 남산의 수목이 솟아 보이고 왼쪽으로는 한강의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8월 20일 새벽 3시. 이윽고 노구의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거처에서 나와 교여에 올랐다. 시간이 이처럼 지체되었던 것은 흥선대원군이 입궐을 망설인 탓으로 되어 있다. 국모이자 며느리인 명성황후를 해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일흔 여섯 살의 노탐, 그 순간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은 눈 닦고 찾아도 없다. 그러나 아무리 격앙된 탐욕이라고 하더라도 지나치다는 생각, 추하고 더럽다는 생각밖에 들지를 않는다. 흥선대원군을 태운 교여의 앞뒤는 경성수비대의 장병 4백여 명이 호위하고 있었고, 이들과 합세한 조선훈련대의 제2대장 우범선(식물학자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이 길을 잘못 들어 2시간 가량 지체했던 탓으로 이들이 경복궁에 도착한 것은 새벽 5시, 여명이 트여 올 무렵이었다. 일본인 낭인들이 경복궁의 담장을 뛰어넘는 범궐을 감행하자 경복궁의 수비대는 대장 홍계훈과 군부대신 안경수의 지휘로 출동한 시위대와 힘을 합쳐 총격전을 벌이며 사투하는 듯했으나, 홍계훈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고 안경수가 도망가자 대원들은 순식간에 뿔뿔이 흩어지는 오합지졸이 되고 만다. 승기를 잡은 일본인 낭인들은 흥선대원군의 교여를 호위, 광화문을 지나 근정전 앞에 당도하여 고종의 배알을 청하는 한편, 경복궁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대로 지옥도나 다를 바가 없었다. 선잠에서 깨어난 상궁과 내시들은 살인귀로 돌변한 일본인 낭인들과 대적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길 뿐이었다. 이때, 명성황후의 침전은 경복궁의 북쪽인 건청궁의 곤령합이었다. 미친 듯한 왜인들의 발길이 여기를 놓칠 까닭이 있을까. 처음 얼마 동안 명성황후는 상궁들에게 섞인 채 방안에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침입자의 눈에는 누가 명성황후인지를 판별할 수가 없었다. 궁내부대신 이경식은 문득 명성황후의 신변에 위험을 느꼈다. 그는 건청궁을 누비며 명성황후를 찾아헤메다가 미친 듯이 날뛰는 일본인 낭인들에게 발각되면서 무참하게 살해된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명성황후와 상궁들은 거처를 뛰쳐나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명성황후는 사력을 다해 달아나려 했으나, 옥호루의 근처에서 일본인 낭인들이 휘두르는 칼에 맞아서 목숨을 잃는 통한의 최후를 맞게 되지만, 참으로 놀라운 것은 사건 100년째가 되는 1995년에 이르러 당시에 사용되었던 일본도가 일본땅 큐슈에서 발견되었고, 그 도검의 칼집에 '순식간에 여우를 해치우다'라는 글자까지 새겨져 있었다면 그날의 참상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또 조선정부의 고문으로 있던 다치스카가 일본의 스에마츠 법제국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명성황후의 시신을 능욕한 듯한 구절마저 보이고 있어 일본인 낭인들의 무도한 작태가 어느 지경에 있었는지도 알게 된다.
왕비를 끌어 내어 두서너 군데를 칼질한 다음 나체로 만들어 국부검사를 하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지르니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잔인함이라.
이를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일국의 국모가 타국의 무뢰배들에 의해 칼을 맞고, 옷이 벗겨지며 그 시신의 국부까지 저들에게 희롱당했다면, 그래서 불태워졌다는 사실을 무엇이라고 적어야 하는가. 춘추 44세, 척분이 빈한하다 하여 중전으로 책립된 명성황후지만 조선왕조의 왕비 중에서 명성황후만큼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한 여인이 또 있을까. 더구나 조선의 근대화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점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된 것은, 그것도 일본국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천인공노할 만행임은 더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후의 전말은 이 시간으로 사형이 된 친위대의 부위 윤석우의 재판기록이나 또 다른 목격자의 진술을 따르면, 이날 아침 윤석우가 광화문, 건춘문의 순시를 마치고 옥호루 근처에 이르렀을 때, 시체 한 구가 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사관풍의 이만성이라는 자에게 물으니 '저것은 궁녀의 시체를 태우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를 의아히 여긴 윤석우는 제2대대장인 우범선에게 보고하면서 '저같이 지밀한 곳에서 시체를 태우고 뼈다귀를 남기는 따위의 결례가 있어서는 아니될 것으로 압니다'라고 항변하듯이 말했다. 이에 대해 우범선은 '시체가 다 타면 근처를 깨끗이 치우고, 덜탄 찌꺼기가 있으면 연못 속에 버리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러나 윤석우는 흩어진 유골을 수습하여 연못에 버리지 않고 근처 숲에다가 묻었다고 되어 있다. 이같이 처참한 비극이 벌어지고 있을 때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건청궁에서 자신의 아들인 고종과 마주 앉아 사태의 수습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명성황후 시해범의 괴수 미우라는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역시 히로시마 재판소에서의 그의 진술을 요약하면 이렇다.
20일 야반에 미우라는 공사관의 누각에서 스기무라 서기관과 통역관 등 세 사람이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경복궁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자, 일이 되어가는군."라고 그가 말했을 때, 고종의 시종이 달려와 말했다. "큰일났습니다. 서둘러 입궐해 주십시오." 시종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도 미우라의 대답은 태연했다.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큰일났습니다. 꽤 많은 사상자들도 있는 모양이올시다." "허, 큰일났군. 곧 간다고 전해올리게." 그리고 입궐을 서둘렀다.
이 기록은 미우라 자신의 진술이므로 그가 얼마나 교활한 자인가를 스스로 입증하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그의 진술은 계속된다.
미우라가 어전에 당도하자 고종은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고종의 밑에는 노인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미우라는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의 옥체에는 별고가 없었습니까?" 그때 고종을 보고 앉았던 노인이 미우라 쪽으로 홱 방향을 돌렸다. "뭣하는 노인인가?" 미우라가 그렇게 묻자, 통역이 대답했다. "대원위 합하십니다."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이 완전히 말려든 것이라고 믿었다.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 아닌가. 미우라 공사는 금후 외국공사들이 배알을 청하는 일이 있어도 윤허하지 않겠다는 고종의 다짐을 받고 나서 흥선대원군과 함께 자리를 떴다.
아침이 되자 각국의 공사들이 새벽에 있었던 참극의 진상을 알기 위해 벌떼같이 일어나 고종의 배알을 청했다. 서양각국의 공사들이 지난밤에 있었던 참상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것은 놀랍게도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현장인 건청궁에 두 사람의 외국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미국인 교관 윌리엄 매키 다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러시아인 기사인 세레진 사바틴이었다. 이들은 일본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현장 근처에 있었던 양관에서 기거하고 있었기에 그 참상을 목격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이들 두 사람의 발설로 사건의 개요가 알려지면서 외국인 공사들의 분노가 뒤따랐지만, 이미 미우라 공사와 약조가 되었던 까닭으로 고종은 그들과의 면담에 응하지 않은 채 이른바 제2차 김홍집 내각으로 일컬어지는 친일내각으로 조정을 개편하였다. 참극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틀 뒤인 22일에는 더욱 기막힌 일이 있었다. '국정에 간섭하여 정치를 어지럽힌 왕비 민씨를 서인으로 삼아 폐출한다'는 조칙이 내린 것이었다. 물론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해묵은 감정의 응어리가 터져 오른 것이었지만, 고종도 세자도 여기에 응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흥선대원군도 더는 어쩔 수가 없었던 모양으로 하루 뒤인 23일에 이르러 '왕태자의 효성과 정리를 생각하여 폐서인 민씨에게 빈호를 특사한다'는 정정조칙이 다시 내려졌다. 한편, 서양 각국의 공사들이 분노하고, 세계의 여론이 비등할 기미가 보이자 일본정부로서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서둘러 외무성의 정무국장 고무라 슈타로를 두령으로 한 진상조사단을 조선으로 떠나보낸 것은 사건 이틀 후인 22일이었고, 그가 주한 변리공사에 임명된 것은 29일이었다. 나는 지난 1991년 일본국 동경에 있는 '외교문서자료관'에 들러 당시에 작성된 고무라 슈타로의 보고문서를 비롯한 '한국 왕비 살해에 관한 자료'라는 아주 두툼한 문서철을 살펴보았는데, 놀랍게도 명성황후가 살해되었다는 최초(양력 10월 8일 오후 2시)의 전보를 받아 쓴 문서가 있었다. 글씨는 삐뚤삐뚤 곤두박질 치고 있어 받아 쓴 사람의 놀라워하는 모습이 뇌리에 그려지는 기막힌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 낭인들이 범궐하여 건청궁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붉은 점선으로 표시한 경복궁의 평면도도 있었고, 거기에는 다이와 사바틴이 현장을 목격한 위치까지도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지난날의 '역사'를 채찍으로 읽으면, 지혜롭고 가지런한 삶을 누릴 수가 있는데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는 가까운 이웃나라에 보존된 공식문서를 살피는 일은 고사하고라도 도처에 산재된 귀중한 자료를 모아서 취합, 분석하는 일조차도 게을리하고 있다. 이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남겨줄 것을 챙기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자초하고 있음일 것이다.
조선 조정은 9월 2일에 이르러서야 조선 정부의 군부고문이었던 오카모토 류노스케, 시바 시로 등 일본인 낭인 30여 명에게 퇴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주도한 주한 일본국 공사 미우라 고로의 휘하에서 일하고 있었던 스기무라 서기관, 구스노세 중좌, 구니이타 통역관, 하기하라 경부 등의 4명은 본국으로 소환하도록 조처하였다. 동시에 일본의 사법성에서는 안도 겐기치, 해군성에서는 이슈잉 소좌, 육군성에서는 후쿠시마 중좌 등을 파한하여 사건의 진상과 전모를 조사하게 하였으나, 그들은 교활하게도,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일본인 낭인들에게 부탁하여 조선 정부의 개혁을 시도한 것이므로 일본 공사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라는 터무니없는 공식발표를 하는 등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 계속되었다. 어쨌건 국제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퇴한 명령을 받은 사람들을 태운 배는 사건 열이틀 뒤인 10월 20일에 인천항을 떠났는데, 이들은 배 위에서 또다시 승리감을 불태우면서 고성방가하였다고 스스로 기록하였으니 파렴치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이들을 태운 배는 관문해협을 지나 히로시마의 우스나 항에 입항하여 동부검역소의 앞에서 닻을 내렸고, 낭인들은 배에서 내려 검역을 위한 목욕을 하면서도 고성방가를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 그들 스스로의 기록이다. 명성황후 시해범들인 낭인들이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수십 명의 정복 경찰이 대기하고 있다가 이들을 체포했다. 히로시마 재판소 검사국의 영장에 의한 집행이었다. 미우라 공사를 주범으로 하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심리한 히로시마 재판소는 예상했던 그대로 증거불충분을 내세우면서 피고인 전원을 무죄석방하였다. 사건 당일 흥선대원군을 호위하여 입궐한 훈련대 제2대대장인 우범선은 일본으로 도망을 갔으나, 고종은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던 전 경상감사 고영근을 일본에 보내 그를 살해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고영근은 일본땅 구레시에서 일본여인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두고 있었던 우범산을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그때 4살이었던 우범선의 아들이 후일의 식물학자 우장춘 박사였고, 또 그는 아버지가 저지른 과실을 속죄하기 위해 아내와 자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구환경이 열악한 모국으로 돌아와 실로 엄청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진실로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른바 을미사변이라고도 불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개요와 진상을 살펴보면서 국력이 따르지 않는 외교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며, 또 우리는 꽤나 제 나라의 역사에 대해 무심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성하게 된다.
아무리 국력이 미미했고, 아무리 국제정세에 어두웠기로 어찌 그런 수난을 경험할 수 있을까, 하는 비관은 말할 나위 없고 그 처리 과정에 있어서도 아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조선 정부의 무기력에는 통분이 앞설 따름이다.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으면서 조선에서의 러시아 세력을 강화하고 있었던 손탁의 좌절과 실망은 이루 헤아릴 길이 없었고, 러시아 공사관은 또 다른 음모를 꾸며서라도 실추된 위신을 다시 찾고자 했다. 모두가 휘청거리는 조선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국의 실익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은 이후 조선 조정은 제3차 김홍집 내각의 주도하에 양력의 사용, 종두법의 시행, 단발령의 실행 등 급격한 개혁정책을 펼치고 나서자 민심은 날로 흉흉해지고, 일본세력에 대항하는 의병들이 전국에서 궐기하게 된다. 사정이 이같이 급박해지자 조정은 친위대까지 지방으로 보내야 하는 지경이었다. 친러세력들에게는 호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무엄하게도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 모시는 이른바 '아관파천'을 계획하게 된다. 조선의 왕실을 일본세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구실이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순종은 한밤중에 여인들이 타는 가마에 몸을 숨기고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한다. 이 수치스러운 일을 주도한 사람들이 앞에 거명한 젊은 친러파 인사들인 이완용, 이윤용, 이범진 등이지만, 여기에 손탁이 깊이 관여한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아관파천'은 또 다른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총리대신 김홍집, 농상공대신 정병하, 탁지부대신 어윤중 등은 폭도화된 난민들에게 피살되었고, 유길준, 장박 등은 일본국에 망명하는 것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과 순종은 침실과 접견실이 서양식으로 되어 있는 거처에서 서양식 생활을 하게 된다. 그들을 수발한 사람은 엄상궁(영왕 이은의 생모)이었다 해도, 손탁의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파란 눈의 서양 여인 손탁이 자신의 이름을 딴 손탁 호텔을 운영하면서 거기에 '정동 구락부'를 만들어 조선의 개화에 실로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조선이 일본에 강점되면서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가다가 다시 러시아로 옮겨갔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25년, 향년 71세였다. 그후 손탁 호텔은 이화학당에서 매입하였다가 1971년부터는 서울 예술고등학교가 그 일부를 사용하고 있다. 또 러시아 공사관의 건물은 그 일부가 정동에 위치한 옛 MBC문화방송국 건물의 뒤쪽에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아관파천'으로부터 백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 이르러 한국은 소련과 국교를 다시 정상화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소련 정부는 당시의 러시아 공사관 터를 다시 쓰겠다는 의사를 개진했다고 한다. 역사의 흐름이 참으로 묘미 있는 것은 이 같은 일에서도 다시 볼 수가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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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투쟁
1871년 '비스마르크' 영도하의 독일 정부와 카톨릭교회 사이에 일어난 투쟁을 말한다. '비스마르크'는 사제의 정치 비판을 체형으로 억압하고 교회법에 의하지 않는 결혼을 인정하는 등 카톨릭 억압 정책을 썼다. 특히 프로이센에서는 소위 오월법에 의하여 사제의 임명권을 국가가 장악하며 수도사의 학교 경영까지 금하려고 했다. 이에 대해 카톨릭교도들이 결성한 중앙당이 강력한 반대 투쟁을 벌인 끝에 '비스마르크'가 양보함으로써 일단락 되었다.
독일 이외에서도 교회와 정부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질 때는 이를 문화투쟁이라 부르는 수가 있다. 한편 계급 투쟁에 있어서도 쓰인다. 최근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1965년 문화인에 대한 비판으로 막을 올린 중공의 문화 투쟁으로 급기야는 홍위병을 앞세운 탈권 투쟁에까지 발전, 유소기 일파를 축출하고 모 택동, 임 표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1969년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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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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