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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66 호
단기 4340. 4. 23 (음력 03.07)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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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편지에 행복을 첨부할 수 있다면 동봉하고 싶습니다.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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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조선일보 대한민국 뉴 웨이브 문학상
■1억원 고료 ‘대한민국 뉴 웨이브 문학상’ 응모 요령 소재·주제·기성·신인 제한 없음
조선일보사는 한국 소설의 중흥을 위해 1억원 고료 ‘대한민국 뉴 웨이브 문학상’을 제정해 기성과 신인 작가 제한없이 신작 장편소설을 공모합니다. ‘대한민국 뉴 웨이브 문학상’은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중간소설(middlebrow fiction)을 대상으로 합니다.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결합한 팩션(faction)과 젊은 여성의 꿈을 그린 칙릿(chick-lit)처럼 오늘날 지구촌 소설시장에서 급부상한 중간소설을 비롯해 판타지, 과학소설, 탐정소설, 스릴러, 로맨스 등 재미있는 이야기와 감동을 안겨주는 소설이라면 장르 구별 없이 응모 가능합니다.
▲응모자격: 신인과 기성 작가 제한 없음
▲분량: 200자 원고지 800장 이상(줄거리 요약 200자 원고지 20장 안팎 반드시 첨부)
▲마감: 2007년 9월28일(마감일 소인 유효)
▲작품내용: 주제와 소재 제한없음(미발표 순수 창작품에 한함)
▲접수: 100-756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61 조선일보사 편집국 문화부
▲문의: (02)724-5368~9
▲당선작 발표: 2007년 11월 초 조선일보 지면
▲기타: 당선작의 출판저작권은 향후 5년 동안 조선일보사가 위촉한 출판사가 갖습니다. 영상물 제작 등을 위한 2차 저작권은 본사·출판사·저자가 3등분합니다. 응모작 겉봉투, 원고의 맨 앞장, 뒷장에 성명·주소·연락처·원고분량을 명기해야 합니다.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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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돈이 많고 건강하면서도 은퇴하는 것은 멋진 일.그러나 돈이 많고 건강하면서 일을 계속하는 것은 더욱 멋진 일. / B.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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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五十五章 (노자 - 도덕경 : 제5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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含德之厚, 比於赤子, 蜂??蛇不?, 猛獸不據, 攫鳥不搏,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而全作, 精之至也, 終日號而不?, 和之至也, 知和曰常, 知常曰明, 益生曰祥, 心使氣曰强, 物壯則老, 謂之不道, 不道早已.
함덕지후, 비어적자, 봉채훼사불석, 맹수불거, 확조불박. 골약근유이악고. 미지빈모지합이전작, 정지지야. 종일호이불사, 화지지야. 지화왈상, 지상왈명. 익생왈상, 심사기왈강. 물장즉노. 위지부도. 부도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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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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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다섯째 장
직역
덕을 머금음이 두텁다는 것은 핏덩어리 아이와 같다. 벌과 전갈, 살모사, 뱀이 쏘지 못한다.맹수가 덤비지 못하고, 새가 움켜쥘려고 달려들지 못한다. 뼈가 약하고 근육이 부드러운데 잡으면 노치지 않고 수컷과 암컷의 합침을 알지 못하는데 완전히 이룬다. 정기가 지극한 것이다. 종일 토록 울어도 목이 쉬지 않으니, 조화로움이 지극한 것이다. 조화를 아는 것을 일컬어 항상됨이라고 하고, 항상됨을 아는 것을 일컬어 밝음이라한다. 삶에 덧붙이는 것을 상서롭다 한다. 마음이 기를 다스리는 것을 강하다 한다. 사물은 굳어지면 곧 늙으니 이것을 일컬어 도가 아니라한다. 도가 아니면 일찍 마친다.
해석
赤子는 갓 태어난 아기를 가리킨다. 덕을 머금음은 이 갓 태어난 아이 같이 해야 한다. 벌이나 뱀이 쏘고, 맹수가 덤비지 못하게 보호한다. 덕도 마찬가지 이다. 간난아이처럼 잘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덕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라난다. 아이가 남녀의 성행위에 대해서 알지 못하지만 막상 닥치면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과 같다.
아이는 하루종일 운다. 그래도 목이 쉬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아이는 지치면 쉰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이 조화다. 지치면 쉬고, 쉬고 나면 운다. 이렇게 할 줄아는 것을 늘 그러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조화를 알면 늘 울 수 있다. 활동할 수 있다.
삶에 덧붓이는 것을 상서롭다 한다. 이 부분에는 두가지 해석이 있다. 나의 해석과 개벽전사들의 해석을 따로 싣겠다. 나는 이 상을 안 좋은 것으로 보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삶에 더해간다. 아이는 살아가면서 더해간다. 즉 지식을 배워간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는 조화를 잃어버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때까지 목이 쉬도록 운다. 지식은 대상을 추구한다. 자신의 목이 쉬는지 쉬지 않는지 모른다. 쉴때도 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끝이 없다. 삶에 지식을 더해가면 조짐이 보인다. 그 조짐은 마음이 나타날 조짐이다. 의식이 분열 되어 간다. 아직 도에서 근원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간난아이는 아직 마음이 없다. 감각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시비를 구별하고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완성되어 기를 다스리면 사람은 강해진다. 이제 마음이 기를 다스리게 된다.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대상을 추구한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강해진다. 자연스러움을 버린다.
壯이란 힘을 쓴다는 말이다.사물은 힘을 쓰면 곧 늙어버린다. 이것은 도가 아니다.
개벽주- 개벽전사들은 마음이 기를 다스리는 것을 좋게 본다. 즉 멋대로 날뛰다 보면 자칮 몸이 망가질 수 있다. 기는 통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强자와 壯자가 글자가 다르다. 그 의미가 다른 것이다. 마음이 몸을 통제하면 수행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강해 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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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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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덕을 깊이 간직한 사람을 비유한다면 어린아이 같아서 벌이라든가 전갈도 쏘지 못하고 독사도 물지 않으며, 맹수도 할퀴지 못하고 사나운 날짐승도 덮치지 못한다. 어린아이의 뼈는 약하고 근육도 부드럽지만 쥐는 힘이 억세다. 남녀의 교합하는 정을 알지 못하는 데도 생식기는 일어선다. 정기가 몸속에 꽉 찼기 때문이다. 온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으니 조화의 극치이다. 조화를 아는 것을 영구 불변이라 하며, 영구 불변의 진리를 아는 것을 밝게 살핀다고 한다. 작위 하여 생명을 연장하려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며, 마음이 기를 거세게 부리는 것을 억세고 사나운 것이라고 한다. 만물은 기세가 너무 왕성하면 곧 쇠퇴하게 된다. 그런 것은 도가 아니며 도 아닌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주
함: 머금다, 지니다, 간직하다. 적자: 어린아이. 봉채: 벌과 전갈. 훼사: 이무기와 뱀. 석: 벌레가 쏘는 것. 확조: 독수리, 매 등의 사나운 새. 확은 후리치다, 움켜쥐다의 뜻임. 박: 후리치다 , 잡다, 두드리다. 전작: 전은 최 즉 어린아이의 생식기를 뜻하며 작은 일어난다의 뜻임. 애: 목이 쉬다. 화: 음양의 조화. 상: 상은 일반적으로 좋은 징조의 의미로 쓰이고 있으나, 나쁜 징조 또는 불길한 징조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음. 본문에서는 불길한 징조를 뜻함. 강: 억세고 사나운 것, 자연의 순리에 따르지 않는 인위적인 집착이나 폭력을 뜻함. 물장즉로: 만물은 기세가 왕성하게 되면 곧 쇠퇴하게 된다는 뜻임. 주역의 건괘상전에도 '절정에 도달한 용이다, 후회함이 있으리라, 가득 찬 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구양수는 추성부에 '만물은 절정기를 지나게 되면 마땅히 죽게 되는 것이다.'고 표현하고 있다. 모두 똑같은 발상인 것이다.
해
노자는 이 장에서 어린아이의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도와 덕에 비유하여 칭송하고 있다. 그는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그런 것을 오래 전에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자기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어린이는 욕심이 없다. 부드럽고 약하지만 싱싱한 생명력이 용솟음치고 있다. 남녀의 교합은 아직 모르고 있지만 그 생식기는 일어서고 있다. 온종일 울부짖어도 목이 쉬는 일이 없다. 그것은 생명의 정기가 몸속에 꽉 차 있기 때문이다. 조화의 극치이다. 이와 같은 조화를 아는 것을 영구 불변의 법칙이라 한다. 그리고 영구 불변의 법칙을 아는 것을 밝게 살핀다고 한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의 무지 무욕을 본받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은 부질없는 일일뿐 더러 불길한 징조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음의 기를 부려 거칠고 억세게 행동하는 것도 무위자연의 도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름지기 어린아이의 무지 무욕과 순진 무구함으로 돌아가 조화로운 도와 하나 될 때 참다운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지성 무욕을 도와 덕의 진수로 보는 노자의 독특한 발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워즈워드의 시세계와 공감을 나누고 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여라. 바라기는 내 생명의 나날들이여. 타고난 자비로서 맺어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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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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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4장 8.15해방 직후 - 일제 패망 후의 적산문화재들
1945년 8월 15일, 일본 군국주의는 드디어 패망하고 한국의 그들에게 36년간이나 강점당했던 국토를 되찾았다. 감격스런 조국의 광복, 민족의 해방, 그동안 이 땅에서 그토록 기세등등하게 군림하고 있던 각계각층의 일본인들은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집히자 당장 기가 꺾였다. 그들은 한국인의 보복을 겁내며 목숨만이라도 부지하려고 전전긍긍했고, 온갖 추태로 과거를 사죄하려고 들었다. 그런가 하면 그 판국에도 귀한 물건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으로 가지고 가려고 치밀하게 움직인자도 많았다. 그들의 귀한 물건이란 금불이 패물과 이 땅에서 약탈 혹은 수집해 가지고 있던 역사유물과 미술품들이었다. 9월 들어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이 서울에 진주해 와서 일제 조선총독의 항복을 받았다. 이어서 미군정장관에 취임한 아놀드 소장은 본국으로 철수하는 일본인들에게 1인당 고리짝 2개씩 허용한다고 1차 군정령을 발표했다. 그렇게 되면 작은 불상이라든지 고려자기 같은 것들은 꽤 숨겨 갖고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처음의 군정령은 "육색 1개 이상 안된다"로 변경되었고, 미술품 수장자와 공동상이었던 일본인들의 속셈은 좌절되었다. 사태가 그렇게 되자 할 수 없이 소장품 목록을 작성하여 현품과 함께 덕수궁미술관과 전의 총독부박물관(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갖다 바치고 떠나는 사람이 나타났는가 하면, 끝까지 물건을 포기하지 않은 부류들은 평소 친했던 한국인 친구에게 뒷날 적당한 시기까지 물건을 맡아 보관해 달라고 교섭하거나 싼 값으로라도 모두 처분하려 들었다. 한편 총독부박물관을 접수한 김재원 박사는 미군의 협조로 과거에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미술품과 기타 모든 한국 유물들을 적산문화재로서 국가에 귀속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하루는 서울 남산동에 있는, 전에 사이토라는 일본인이 살고 있던 집 창고 속에 각종 미술품이 가득히 쌓여 있다는 정보가 박물관에 들어왔다. 김박사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과연 정보 그대로였다. 술장사로 큰 부자였던 사이토의 수집품이었던가 본데 그는 그것들을 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지 창고 속에 모두 모아놓고는 그대로 급히 일본으로 떠난 것 같았다. 김박사는 일단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그 엄청난 분량의 물건들을 박물관으로 운반 운반하려던 트럭과 인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날 즉각 운반수단을 강구하지 못한 것은 큰 실수였다. 며칠 후 다시 남산동을 찾아갔을 때엔 누군가가 깨끗이 실어내 가고 창고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불법적인 반출자는 사이토의 컬렉션 내막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어떤 약삭빠른 한국인 골동상인이었거나 그와 손을 잡은 폭력배의 소행이었을 것으로 믿어지지만 그 자가 누구였는가는 끝내 밝혀지지 않고 말았다. 해방 직후 무법의 혼란기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남산동의 적산문화재 접수엔 실패했지만 그 대신 김박사는 수집가와 연구들 사이에서 보통 '니와세불상' 으로 통하고 있던 유명한 백제불인 '금동관음보살입상'(높이 21.4cm)을 입수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것은 1907년에 충남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서 마을 사람이 우연히 출토시킨 것을 일본인 헌병이 강제로 빼앗아 갖고 있다가 당시 이미 서울에 정착해 있던 니와세라는 일본인에게 팔아먹었던 한 쌍의 완전한 걸작 백제불상 중의 하나로 해방 당시의 소장자는 경성제국대학의 의학부 교수 시노자키였다. 미군정청으로 박물관장직을 위촉받았던 김재원 박사에게 '니와세불상'의 소장처를 알려준 사람은 총독부박물관 때의 책임자였던 아리미쓰 교수였다. 그는 별안간 박물관을 인수하게 된 한국인들에게 박물관 유물과 기타 내막을 상세히 파악하게 해주기 위해 약 1년간 귀국을 보류하고 있었다. 아리미쓰의 정보 제공으로 김재원 관장은 아직 일본으로 떠나지 않고 있는 시노자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상이 다 아는 그 백제불상은 일본에 갖고 가지 못할 테니 다른 생각 말고 박물관에 보내라" 고 넌지시 찔러보았다. 그랬던니 대답이 꽤 당당했다. "나도 많은 돈을 주고 산 물건이니 그 액수의 돈을 갖고 오라"는 배짱이었다. 그것도 "현찰을 갖고 오지 않으면 내놓을 수 없다" 고 끝까지 버틸 듯이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김관장은 미군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몇 시간도 안되어 지프를 타고 출동했던 미군 헌병이 그 백제불상을 들고 박물관에 들어섰다. 현재 보물 제195호,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해방 직후의 위급한 상황 하에서도 부산·대구에 거주하고 있던 돈 많은 일본인 수장가, 가령 대구의 오구라나 이치다 같은 악명 ㅁ은 수집가들은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독점하고 있던 부지기수의 한국문화재들 가운데 알짜들은 모두 묶어 갖고 밀선을 이용하여 유유히 한국을 탈출했다. 이치다는 서울에서 김재원 박물관장이 미군 헌병의 협력으로 일본으로의 출발 직전에 극적으로 압수할 수 있었던 이른바 '니와세불상'과 함께 같은 때 같은 장소에서 출토되었던 또 하나의 보물급 백제불상을 갖고 있었다. 1922년 니와세에게서 양도받은 것이었다.
서울에서 하나를 붙잡은 김관장은 마땅히 대구 것도 속히 손을 써서 접수해닥 다시 짝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번에도 미군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땐 이미 늦어 이치다는 벌써 문제의 백제불상은 물론, 모든 알짜 수장품을 몽땅 꾸려 가지고 일본으로 도망친 뒤였다. 결국 그 백제불상은 영영 놓치고 말았다. 믿을 만한 후일담을 빌리면, 호눌룰루미술관이 일본에서 그것을 사 가려고 애썼으나 끝내 못 사고, 이치다도 그 뒤 노령으로 죽었다고 한다. 세상이 다 알던 악질적인 일본인 수장가는 끝까지 악질적이었다. 그들은 이제 때에도 말기에도 총독부의 승인 없이 이 땅의 중요한 문화재를 일본으로 반출할 수 없었건만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면서 쫓겨가는 마당에서도 한가닥 속죄삼의 표시는커녕 그들의 수장품을 거의 모조리 일본으로 불법반출했다. 그것은 최대의 마지막 악질행위였다. 공주의 송산리 백제고분을 깨끗이 도굴해 먹은 가루베의 경우도 앞의 '백제유적 약탈로 악명높은 가루베' 항목에서 이미 언굽했지만, 도쿄의 미극동사령부에까지 협조를 의뢰하여 미군 헌병으로 하여금 일본의 어느 시골로 돌아가 있는 그를 찾아가, 한국에서의 수장품들을 어찌 했느냐고 추궁케 했었으나 "현지엔 모두 두고 왔다" 는 거짓말로 불법반출을 부인하더라는 통보가 서울의 미군정청을 통해 박물관에 전달됐을 뿐이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 이른바 조선총독부 시정기념관 주임으로 있던 가토 간가쿠의 경우가 있다. 가토는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인류학과 고고학 연구를 빙자하여 소련을 드나듯 전신 스파이로서 1905년엔 경북 팔공산의 동화사에 숨어 있으면서 그곳에 정착하여 총독부 관리로 오래 있다가 시정기념관 주임이라는 중요한 직책에까지 올랐던 것인데, 그땐 나이도 많았던 탕이었겠지만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보자 그렇게도 하루아침에 표변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이 가토가 경복궁의 박물관으로 김재원 관장을 찾아와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하면서 애원했다.
"살려주십시오. 박물관 어디에라도 써주십시오. 일본인 망하고 조선이 독랍한 것은 정말 잘된 것입니다. 저는 조선에 그대로 살겠습니다. 저의 아내는 조선 여성입니다. 일본의 침략정치 때엔 조선인들에게 일본이름으로 창씨를 강요했습니다만 이번엔 제가 조선 이름으로 창씨 하겠습니다. 오늘부터는 저를 이관각으로 불러주십시오."
참으로 흉물스런 표변이었다. 그의 부인은 사실 한국 여성이었고 그녀의 성이 이씨였다. 그리고 그는 과연 부인의 이씨 성을 따른 이관각이란 한국인 이름으로 내내 서울에 숨어 있었고, 나중엔 세검동 밖으로 나가 살다가 한국전쟁 직전에 거기서 죽었다. 그동안 그는 한국에서의 연명의 수단으로 진귀한 '은제탑' 을 유력한 미군 장교에게 선물했더라는 얘기도 있었고, 또 숱한 미술품과 기타 골동품들을 내다 팔면서 생활을 유지했는데, 그 물건들은 가토가 한국에 계속 눌러 산다는 바람에 급히 귀국하던 일본인 친구들이 적당한 시기까지 보관을 부탁한다고 맡겨두고 간 것들이었다. 현재 이화여대박물관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107호의 조선백자 '철사포도문항아리' 의 8·15 전의 수장자는 1916년 이후 총독부 철도국에 근무하다가 뒤에 조선척도 주식회사 전무가 되었던 시미즈라는 일본인이었다. 앞의 항아리 외에도 그는 상당수의 도자기를 수집해 갖고 있었다. 드디어 일제의 패망으로 한반도에서 쫓겨가게 되자, 그는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라도 그 '철사포도문항아리' 만은 숨겨 갖고 가려고 하였다. 높이 53.3cm의 당당한 크기인데다 철사의 포도덩굴이 멋지게 그려진 최대의 걸작어었기 때문에 만일 무사히만 갖고 갈 수 있었다면 말할 것도 없이 거액의 신용수표나 다름없었다. 미군정청의 처음 군정령이 한 사람 앞에 고리짝 두 개까지 혀가한다고 했을 때 시미즈는, '그렇다면 갖고 갈 수 있다' 고 생각하고 치밀한 은닉수단을 강구했다. 그는 한지를 한 아름 사오게 해서는 항아리의 안팎을 겹겹으로 싸 발라 깨지지 않게 한 후 누가 봐도 귀중한 조선백자 항아리라고는 도저히 깨닫지 못할 만큼 위장시켰다. 그러나 처음 군정령이 다시 바뀌어 육색 한 개로 대폭 통제되자 그의 치밀한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자기의 부탁을 들어줄 만한 한국인 친구를 찾아가서 특히 그 백자항아리를 적당한 시기까지 잘 좀 보호해 달라고 당부하면서 그의 모든 수장품을 맡겼다.
시즈미가 일본으로 떠난 지 약 1년 후의 일이었다. 일제 때부터 골동품 중개인이었던 조아무개란 사람이 큰 물건 하나를 잡았는데, 바로 시미즈가 한국인 친구에게 보관을 부탁하고 간 '철사포도문항아리' 였다. 그것을 골동가로 들고 나와 판 청년은 다름아닌 보관자의 아들이었다. 항아리가 골동가에 나왔을 때 조아무개는 당장 큰 물건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급히 돈을 마련하여 그것을 붙잡아놓고는 같은 골동가의 중개인으로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던 유모·한모를 통해 고미술품 수집가이며 당시 수도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에게 가지고 갔다. 물론 상당한 액수를 불렀다. 그러나 몇 달 후 그는 불의의 병고로 죽었다(수집가 선우인순의 증언). 결국 장택상 컬렉션에 들어간 국보급의 '백자철사포도문항아리' 는 1950년대 말까지 소장자의 시흥 별장에 애장되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물건을 보고 몹시 반했던 김활란 박사(당시 이화여대 총장)가 그때 돈 1,550만 환으로 인수하여 이화여대박물관에 넣었다. 국보 지정이 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지금 이화여대박물관은 앞의 국보 백자항아리 말고도 보물 제237호로 지정돼 있는 높이 35cm의 청자항아리를 갖고 있는데, 고려 초기인 '순화 4년'(993년)에 만들어졌다는 관명의 굽 밑에 새겨져 있어 과거의 조선총독부 때 이미 보물로 지정됐던 물건이다. 해방 전까지의 소장자는 역시 일본인이었다. 잠사회사의 중역이었던 이도라는 사람으로 그는 꽤 안목이 있는 수집가였다.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도는 지정보물을 포함한 그 진귀한 수장품들을 빨리 돈과 바꾸어야겠다고 정세를 판단하자 조선인 광산왕으로 미술품 수집가였던 최창학을 찾아가서 모두 인수하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최창학은 자기 나름의 기호가 강했다. 그는 아무리 보물로 지정된 물건이라도 색깔과 기형이 별로 아름답지 못한 '순화 4년명 청자항아리' 는 비싼 값에 비해 감상할 가치가 너무 없다고 거절했다. 그 대신 그는 다른 지정보물인 고려청자 대접과 그밖의 아름다운 감상용 도자기들을 일괄해서 사들였다. 해방과 함께 '순화 4년명 청자항아리' 가 어떤 경로로 이도의 집에서 흘러나왔는지, 그리고 한국전쟁을 어디에서 무사히 견디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세인에게서 완전히 잊혀진 유전하던 그 항아리가 서울 화신백화점 뒤의 한 골동가게에 방긋이 나타난 것은 1955년께의 일이었따. 그러나 가게 주인은 그 물건의 과거의 내력이나 진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그 가게에 들었다가 '국내에서 드디어 나타났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흥분하며 부르는 값을 적당히 지불하고 재빨리 입수한 구안자는 당시 이화여대박물관 창설을 맡고 있던 장규서였다. 그것은 눈의 승부였다. 몇 해 후, 장씨는 그가 개인돈으로 샀던 '순화 4년명 청자항아리' 를 이화여대박물관으로 들여보냈다. 8·15전까지 군산에서 큰 지주로 군림하면서 가나한 농민들을 수탈하여 부와 취미를 마음껏 즐기던 미야자키란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지금의 서울 시청 근처에 위치한던, 조선인 경영으로는 최대의 골동상이었던 '문명상회' 주인 이아무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당수의 일품 고려자기와 불상 등을 수집하고 있었다. 증언자들의 말을 빌리면 문명상회가 입수했던 물건 가운데 값나가는 알짜들은 대부분 군산으로 보내져 미야자키의 컬렉션 속에 들어갔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이아무개는 미야자키의 그동안의 수장품들을 몽땅 뒤잡아 서울로 올려 왔다. 그중에 희귀한 오리형 청자연적이 하나 포함돼 있었다. 현재 국보 제74호로 지정돼 있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청자압형수적' 과 거의 모양이 같으나 부분적으로는 약간 다른 특질을 갖는 걸작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소장자는 해주 동중학교의 다나카라는 일본이니 서무주임이었다. 그것을 1934년에 당시 해주 황해도청에 근무하고 있던 조선인 수집가 선우인순이 처음으로 보고 그때 돈으로 1,600원이란 거액으로 인수했었는데 출토지는 연평도란 얘기였다. 말할 것도 없이 도굴품이었다. 그후 오랫동안 이 명품 '청자오리형연적' 은 선우씨가 애장하다가 사정으로 서울의 문명상회에 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엔 이 또한 문명상회의 주인 이아무개의 손으로 군산의 미야자키에게 넘겨졌었다. 해방과 함께 다행히 일본으로 반출되지 않고 서울로 다시 올라온 이 '청자오리형연적' 은 뒤에 손아무개에게 들어갔고, 지금은 또 다른 수장가에게 넘어가 있다는 말이 있으나 확인돼 있지 않다. 뒤의 수장가는 또 과거에 서울 충무로에서 '오사카야' 라는 책방을 열고 있던 이토라는 일본인의 수장품이었던 뚜껑이 붙은 흑백상감무늬의 대형 걸작 고려자기 항아리도 여러 다리를 거쳐 입수해 갖고 있다고 고미술상가에선 말하고 있으나 역시 확인돼 있지 않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일본인 수집가들이 급히 처분하려고 허겁지겁 내놓은 미술품들을 계획적으로 긁어 모은 사람은 많았다. 장아무개라는 골동상인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마포에 있던 그의 집 창고를 들여다본 적이 있는 한 증언자는 트럭으로 수십 대 분량의 쌓여 있었는데, 내용도 온갖 것이 다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기회를 민첩하게 포착하고, 모든 방법으로 적산문화재들을 독립적으로 긁어 모았던 장아무개는 미군정 말기까지 서울의 골동사회에서 가장 활발한 실력자로 군림했다. 그러다가 수완 좋게도 미군 군용기에 상당량의 값진 물건들을 싣고 일본으로 출국했는데, 증언자들은 그가 밀선도 이용하여 다른 일본인들의 수장품과 기타 문화재들까지 불법 유출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미군을 매수했던 것 같고, 일설엔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하지 중장에게 유명한 일본도 '마사무네' 를 바치는 등 대단한 술수를 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문화재 밀수와 불법 출국 사실은 곧 당국이 알게 되었고, 대한민국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이 당장 그를 잡아오라고 지명 체포령까지 내렸었다는 얘기가 있다. 조국의 해방이나 독립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골동상인이었다. 그는 방금 이 땅에서 쫓겨간 과거의 침략자인 일본으로 자진해서 빠져나간 후 불법반출해 간 각종 문화재와 미술품을 처분하고 그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1970년 무렵에 죽었다. 미군정청에 근무하던 테일러 중령과 과거 일본인 수장가의 얘기도 전해진다. 서울 남산 밑에 상당수의 물건들을 그대로 남겨놓고 급히 떠나버린 일본인이 있었다. 그 집에 테일러 중령이 세들어 살고 있었다. 그는 전의 일본인 집주인이 수집해놓은 도자기와 기타 미술품을 발견하자 견물생심의 환성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으로 돌아갈 때 그는 그것들을 몽땅 실어 가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불법반출품들을 미굴에서 금세 문제가 되어 출처를 추궁받은 후 외국재산의 불법취득 및 반입죄로서 처벌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그때 서울의 미군정청에도 조회가 왔었다고 한다(당시 국립박물관장 김재원 박사의 증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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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불교란 무엇인가
2. 부파 불교--불교의 체계적 발전
석가의 입멸 후 불교는 여러 사정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다양한 교파가 발생하게 되었다. 각 교파는 석가의 가르침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면서 다른 교파를 비판하고 자기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각 교파들은 서로 비판과 반비판을 하면서 마침내 논리성과 체계성을 가진 교리를 갖추게 되었고, 또 용의주도한 갖가지 불교 개념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이른바 부파 불교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석가 자신의 가르침인 경과 율을 문자화시키는 작업 이외에도 경률에 내재한 이론을 체계화시킨 논서까지 정비하였다. 이러한 논서들도 처음에는 석가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이론에 치중하다가, 나중에는 경전과 직접적 관계 없이 그들 나름의 이론을 자유롭게 구성해 가는 단계로 발전해 갔다. 다양한 교파가 각기 독립적으로 존속한다는 것은 독자적인 기반과 이론적 정당성을 그만큼 확보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러한 현상은 대외적으로는 분열적이지만 대내적으로는 경쟁을 통한 자기 발전을 의미한다. 부파적 분열의 가장 빛나는 결과는 불교가 사색과 토론의 방법면에서나 체계적인 이론면에서나 철학적 면모를 완전하게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인식론과 우주론, 혹은 형이상학이나 윤리학 등 철학의 어떤 영역도 모두 상당한 수준으로 다루고 있었다. 이 후에 나타나는 어떠한 성격의 불교 교리도 궁극적으로는 부파 불교 시기에 발전시킨 개념이나 이론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부파 불교는 불교 역사상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세계의 현상을 인간의 인식 주체와 인식 작용, 그리고 대상적 존재 등으로 영역화시켜 놓고 매우 치밀하게 분석하고 그 관계를 체계화시키는데, 주로 인식론적 측면보다는 존재론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파 불교를 그들의 공통된 특징에 빗대어 '존재의 분석학파'(아비달마 불교)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존재의 분석을 주로 하는 부파 불교란 결국 실천적 수행보다는 이론 중심의 불교이며, 또한 일상 생활에 기반을 둔 대중보다는 출가한 사제들을 위주로 하는 불교가 되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나에 대한 믿음보다는 진리 그 자체를 믿고, 타력에 의존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해탈을 얻으려는 석가의 유훈을 경직되게 받아들여 석가의 삶을 부처적 삶의 전형으로 보지 않는 결과이기도 했다. 그들은 다만 법(진리)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법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출가 수행하는 것만이 해탈의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석가의 삶에서 나오는 역동적 생기와 그 인격에서 나오는 훈훈함을 배제시킨 채, 그의 가르침을 형해화시킨 메마른 이론과 엄정한 출가 수행주의만이 불교를 지키는 뼈대로 생각했던 것이다. 요컨대 근본 불교로부터 부파 불교로의 발전은 종교로서의 발전이라기보다는 철학으로서의 발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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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한참동안
본뜻 : 본래는 역참에서 나온 말이다. 한참은 한 역참과 다음 역참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말이었다가 나중에는 한 역참에서 다음 역참까지 다다를 정도의 시간을 나타내는 말로 바뀌었다.
바뀐 뜻 : 지금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보기글" -약속 장소인 조계사 해탈문 아래서 한참동안 기다려도 그가 나타나질 않자 초조한 마음이들었다 -한참동안 너를 찾았는데 어딜 갔었느냐?
한통속
본뜻 : 한통속은 줄여서 '한통'이라고도 하는데, 한통은 화살을 재우는 활의 한가운데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후대로 내려오면서 본뜻보다는 서로 마음이 통하여 모이는 한패나 동아리를 가리키는 말로 더 널리 쓰이고 있다 대개의 경우, 좋지 않은 일로 한패가 된 경우를 가리킨다.
"보기글" -이번 사건은 대기업과 도매상이 한통속이 되어 소비자를 농락한 거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경마장 주변에는 사채꾼들과 경마 거간꾼들이 한통속이 되어 선량한 시민의 주머니를 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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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위대함과 우스꽝스러움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코르시카섬 출신인 나폴레옹은 프랑스혁명 이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유럽 정복에 나섰다. 프랑스 민중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 인물에 매혹되기 시작했다. 그는 유럽을 정복함으로써 프랑스의 위신을 한껏 높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명성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유럽 전역에서 나폴레옹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의 지배체제는 확고했다. 프랑스군에 참담한 패배를 맛본 프로이센에서도 나폴레옹은 위대한 인물로 칭송되었다. 앞서 말한 헤겔이 그 한 예이다. 나폴레옹의 위대함은 무엇보다도 뛰어난 전쟁술에 있었다. 이 점은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의 권력은 나의 명예에서 나온 것이며, 나의 명예는 내가 거주는 전쟁의 승리에서 비롯된다. 새로운 명예와 승리가 없다면 나는 권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정복만이 현재의 나를 만들고 정복만이 나를 유지시킬 수 있다."
과연 그의 말대로였다. 그의 용병술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이집트 원정을 앞두고 그가 병사들을 격려한 말은 유명하다.
"저 파라미드의 꼭대기에서 4천년의 세월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자신들의 이집트 원정은 중대한 역사적 행위라고 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한층 높였던 것이다. 과연 그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것처럼, 그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유럽대륙을 거의 손아귀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위대함을 아직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국가가 있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그러했다. 1805년 영국의 넬슨과 맞선 프랑스군은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심상치 않은 조짐이었다.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내려 땅에 떨어지고 있는 자신의 체면을 되살리려 했다.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항복을 받아내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러시아가 대담하게도 나폴레옹의 길을 가로막고 나섰다. 러시아는 영국으로부터 곡물을 수입하고 있었던 차라, 대륙봉쇄령을 지킬 수 없어 프랑스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총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1812년 나폴레옹은 대병력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보급이 끊긴 나폴레옹은 곧 총퇴각을 지시했으나 겨울이 닥치면서 동장군이 엄습했고, 설상가상으로 러시아군의 잦은 습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대패였다.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와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은 바로 이러한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이 패배로 나폴레옹의 위대함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퇴각 도중에 만난 폴란드 대사 드 플라트에게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위대함과 우스꽝스러움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나폴레옹군은 이제 난공불락의 군대가 아니었다. 1813년에 나폴레옹은 결국 유럽동맹군에 패하여 퇴위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위대함에 대한 집착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1814년 이탈리아의 엘바섬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여전히 황제 칭호를 갖고 있었으며 400명의 근위대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너무도 좁은 왕국이었다. 그는 자신의 재기를 꿈꾸었다. 한동안 유배생활을 한 그는 다시 그곳을 빠져나와 프랑스에 입성했다. 그 자신이 호언한 대로 총 한 방 쏘지 않고 다시 파리에 도착했다. 샤토브리앙의 말을 빌자면, '개인이 혼자서 나라를 침략'한 것이다. 아직 '황제 만세'를 외치며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을 회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폴레옹이 파리에 가까이 가는 동안 그에 대한 평가가 줄곧 변했다는 것이다. 처음에 그의 탈출은 '괴물이 유형지에서 탈출'한 것으로 보도되었으나, 점차 '코르시카의 늑대', 얼마후에는 '호랑이'로 변했다가, 다시 '비참한 모험가', '악령'으로 보도되었다. 리용에 이르렀을 때는 '독재 황제'로 불렸다. 파리에서 50마일에 떨어진 곳에서는 '참주', 파리 근교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보나파르트'라고 불렸다. 이어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황제 폐하, 퐁텐블로궁에 환궁'이라는 찬양으로 돌변했다. 그러나 그의 천하는 단 백 일로 끝이 났다.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그는 이번에는 대서양에 있는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형의 길을 떠났다.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도 "나는 포로가 아니라 영국의 손님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곳에서 최후를 마쳤지만, 그의 영광과 전설은 프랑스에 계속 살아 남았다. 결국 1852년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이 왕위에 즉위함으로써 살아 있는 나폴레옹 신화가 입증되었다. 나폴레옹 신화는 소설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의 주인공 소렐도 나폴레옹을 숭배하여 군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스탕달은 평생을 나폴레옹 숭배자로 지냈으며, "나폴레옹 전기"를 쓰기도 했다. 그 자신이 나폴레옹이 이끈 이탈리아 원정과 모스크바 원정에 참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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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지구의 끝, 사막에서
아벨라르. 나는 불타는 사막, 끝없는 지평선, 습기 한 방울 없는 메마른 태양의 나라 요르단에 와 있습니다. 양떼를 몰면서 치렁치렁한 옷을 발끝까지 내리고 사구의 군데군데에 천막을 치고 살다가 어느 때든지 다시 그 천막을 걷어 치우고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의 나라 요르단의 황량한 사막에서 거의 한나절을 차를 타고 달려서 가 본 요르단 강에는 이끼 낀 작은 강물과 볼품없이 자란 잡풀들만이 세례 요한의 추억을 회상케 해주었습니다. 이 강물에서 세례를 주던 요한, 그의 고행의 순례, 드디어는 살로메에게 목이 잘린 순교자 요한의 자취는 검푸른 이끼와 낮게 흐르는 더러운 강물, 이스라엘과의 국경 분계선을 이루는 철조망 등으로 성스러운 분위기는 조금도 지니지 못한 채 폐기되어 있었습니다. 지능도, 문명도, 모두 외면한 채 당나귀의 등에 짐을 싣고 양떼를 몰고 다니는 유목민들은 더러운 손과 발, 검은 눈을 내리뜨고 이방인들을 경계하는 듯했습니다. 성서 속의 가나안 땅에는 회교 사원들이 우뚝 우뚝 솟아 묘한 아이러니를 느꼈습니다. 다시 몇 백 킬로를 달려가 본 페트라(Petra)는 거대한 바위로 된 자연 요새로서 그 바위의 오묘한 빛깔과 암벽면에 새겨져 있는 사원, 무덤 등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은 비록 지금은 폐기되어 있지만, 로마가 세계를 장악했던 당시의 찬란했던 문화와 웅장한 비잔틴 문화의 잔재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 `페트라`라는 말은 바위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오랜 옛날에 `페트라`는 거대한 바위로 된 하나의 도시였습니다. 그 거대한 바위가 갈라져 있는 좁은 길을 통하여 옛날 대상들이 지나다녔다고 하는데, 우리는 관광용으로 길들여진 말을 타고 그 길을 둘러보며 지나갔습니다. 마치 아라비아 사막을 달리는 대상이 된 기분으로, 한 필씩의 말을 타고 좁은 자갈길을 끄덕끄덕 흔들리며 지났습니다. 오묘한 색깔로 물들어 있는 이 자연의 바위 틈에서 우리는 마치 몇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 기원 전의 옛 사람이라도 된 듯 화려하고 장엄한 옛 문화의 숨결을 깊이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대 제국에 쫓기고 지배당했던 이곳 원주민 나타비언들의 몰락이 눈에 보이는 듯하여 도도한 역사의 흐름과 그 무상함에 절로 가슴이 사무쳐 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끝없는 황야 속을 차를 타고 는 거대한 사구...입니다.
아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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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명성황후 시해, 그 '여우사냥'의 비밀
대원군의 탐욕 (2/3)
1895년(고종 23)의 여름은 길고 잔인했다. 전국 각처에서 창궐한 콜레라로 무려 4천여 명의 사망자를 내고 있었지만, 예방이나 치료시설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때라 서울천지는 그대로 연옥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무렵에 학제의 개혁이 있어 '소학교령'과 '한성사범학교령'이 공포되어 성균관의 명망이 쇠퇴되기에 이르자 민심까지 뒤숭숭한 판국이었다. 이같이 어려운 시기에 주한 일본공사의 경질이 있었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후임으로 새 일본전권공사 미우라 고로가 부임해 온 것이다. 신임공사는 7월 15일에 창덕궁의 장안당에서 고종을 배알하고 국서를 올렸다. 미우라 고로는 일본군 예비역 육군중장에 정삼위 훈일등 자작의 지위에 있는 강골의 무장이었다. 이 같은 강골의 미우라가 조선주재 일본공사가 되어 부임하게 된 것에는 까닭이 있었다. 첫째는 날로 실추되어 가는 일본국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일본 정부가 시도하고 있는 모종의 음모를 결행하려는 속셈이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겨 요동반도를 손에 넣기는 하였으나,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가 합세하여 그것이 동양평화를 해친다고 맹공하자, 일본은 이에 굴복하여 배상금 3천만 원과 교환으로 요동반도를 되돌려 주기에 이르렀고, 그후 요동반도는 조차의 형식으로 러시아의 수중으로 돌아가기에 이르니 조선 조정을 위세를 잃어 가는 일본을 멀리하고 새로운 세력인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와 같은 조선 조정의 정책변화가 중전인 명성황후의 입김으로 척족인 민씨일문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무엄하게도 조선국의 국모를 제거하겠다는 엄청난 음모를 꾸미게 된 것이었다. 이 엄청난 음모를 실행해 옮기기 위해서는 이노우에 가오루와 같은 민간인 조선공사보다 강력한 공사, 작전능력을 갖춘 강골의 무장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이때 미우라 고로는 온천 지방인 아타미의 한 병원에서 신병을 치료하면서 일본국 외무성으로부터 조선공사로 취임해 줄 것을 교섭받게 된다. 미우라는 조선정책을 자신에게 모두 맡길 것을 조건으로 승낙하였고, 그 조선에 명성황후의 시해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미우라 고로의 부임에는 시바, 쓰키나리와 같은 민간인이 막료로 따라와서, 쿠마모토 국권당에서 경영하는 한성신보사의 감독관으로 나와 있던 아타치, 쿠니도모와 같은 지식인들과 후지가츠, 야마타 등의 민간인 그리고 우익단체인 천우협의 호사키, 다케다 등과 합세하여 음모를 진행하려는 무리를 이루었고, 여기에 조선의 군부와 궁내부의 고문으로 있는 오카모토 류노스케까지 가담하여 '명성황후 시해'의 비밀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특히 사건을 주도한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신상을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그가 단순한 일본인 관리거나 랑인쯤으로 착각한다. 바로 여기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호도하는 함정이 있는 것이다.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본시 일본군 포병소좌로 쿠데타를 주도하였다가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에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문무의 신동이라고 불리웠다는 사실이 우리를 몸서리치게 하지만, 사형의 집행일만 기다리고 있는 그를 살려내어 조선정부의 고문으로 보내려고 한 일본정부의 용이주도한 계획에 또 한 번 몸서리치게 되는 것이다. 오카모토와 동향인 외무대신 무쓰는 옥중에 있는 오카모토에게 폐병이 들었음을 알리기 위해 극심한 기침을 쏟아 놓으라는 밀명을 내린다. 그것을 증거로 오카모토는 가석방을 허가 받게 되고 뒤이어 조선정부의 내무고문이 되어 조선땅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었다. 육군중장 출신의 강골인 미우라 공사가 작전의 신동이라고 평가받는 포병소좌 출신의 오카모토라는 걸출한 참모에게 '명성황후 시해'라는 비밀작전을 수행하게 하면서 암호를 '여우사냥'이라고 했다면 이는 군사작전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웃나라의 국모를 시해하려는 음모를 진행하면서도 미우라 공사는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그는 남산에 있는 일본 공사관에 틀어박혀 불상 앞에 앉은 채 염불만 외고 있었으니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그를 염불공사로 얕잡아 보는 과실을 저지르게 하였다.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계책은 절묘하였다. 그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서는 흥선대원군의 묵은 감정을 자극하여 그를 사건의 중심으로 끌어들여야 하고, 그래서 조선인에 의해서 저질러진 사건으로 위장한다는 것이었다. 가공하게도 이 계책에 동조한 조선인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이주회, 이두황, 우범선 등이었다.
8월 16일. 마침내 국모시해사건의 비밀작전이 행동으로 옮겨진다. 오카모토 류노스케가 공덕리 별장에 은거하고 있는 흥선대원군을 은밀히 찾아간 것이었다. 당시 공덕리 별장은 명성황후 쪽의 감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오카모토의 방문목적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작별인사로 위장되어 있었다. 오카모토는 대원군에게 거사계획을 설명하고 다음과 같은 약조문을 제시했다. 첫째, 대원군은 궁중에 들어가서 사태정리는 꾀하나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둘째,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고 그 밖의 개혁파를 기용한다. 셋째, 이재면, 김종한을 궁내부대신 및 협판에 임용한다. 넷째 이준용(대원군의 손자)을 일본에 유학을 보낸다. 흥선대원군은 이 네 가지 조건을 지그시 되씹어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왕비는 노국공사와 결탁하고 있어 대궐의 경비가 삼엄하고 이를 민씨의 족당이 지휘하고 있는데 그대들이 어떻게 나를 입궐하게 하고자 하는가."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실패할 까닭이 없소. 질풍노도의 기세로 밀어붙일 것입니다." "이달 스무 날이 지나서 거사할 것이니 며칠 더 기다려 주시고 거사 당일에 전하를 모시러 오겠습니다."
비록 문서에는 기록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며느리자 왕비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은연중에 풍기고 있는데, 흥선대원군이 이를 승낙했다는 사실은 그때로부터 백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연치 76세. 노탐일 것일까. 설혹 노탐이라고 하더라도 이해될 일은 아닐 것이다. 다만 '임오군란'의 와중에서 살아 있는 명성황후의 장례를 서둘게 했던 일이 상기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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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축의 신 판
잘못 발음했다간 먹는 빵과 혼동하기 쉬운 이 희랍신화 중의 신은 발레 '목신의 오후'로 유명하다. '판'은 숲과 사냥, 목축의 신으로 몸뚱이는 사람과 같으나 염소의 다리를 가졌고 머리에 뿔이 났으며 음악을 무척 좋아하여 곧잘 '님프'와 춤을 추기도 한다. 발레 '목신의 오후'는 '말라르메'의 시에 의하여 '드뷔시'가 작곡할 것으로 1912년 '러시아 발레단'이 처음으로 공연하여 갈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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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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