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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63 호
단기 4340. 3. 31 (음력 02.1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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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편지에 행복을 첨부할 수 있다면 동봉하고 싶습니다.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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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한국에서 팔경(八景)은 곳곳에 포진한다. 이 중 가장 저명한 곳이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읊어 더욱 유명세를 타게 된 관동팔경. 하지만 팔경은 삼척, 청도, 남해, 군산, 논산, 단양, 강릉 등지에도 있다. 그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출신으로 양정고 교사인 전경원(田京源.37) 박사는 소상팔경(瀟湘八景)을 지목한다. 소상팔경이란 글자 그대로는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라는 두 강에 어우러지면서 연출하는 경승 8가지를 말한다. 두 강은 한국이 아니라 중국에 있다. 주의할 대목은 팔경은 장소라기보다는 그런 장소에서 빚어지는 자연풍광이라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는 후난(湖南)성 동정호 남쪽 근처 두 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빚어지는 산시청람(山市晴嵐)ㆍ어촌석조(漁村夕照)ㆍ소상야우(瀟湘夜雨)ㆍ원포귀범(遠浦歸帆)ㆍ연사만종(烟寺晩鐘)ㆍ동정추월(洞庭秋月)ㆍ평사낙안(平沙落雁)ㆍ강천모설(江天暮雪)을 말한다.
그것이 한반도 문화에서도 얼마나 유명했던지, 춘향전이며 심청전, 흥부전, 수심가,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와 같은 저명한 작품에 빠지지 않으며, 김만중의 구운몽은 아예 소상팔경을 공간으로 설정했다. 이들 작품의 작가 대부분은 소상팔경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음에도 누구나 소상팔경을 들먹였다.
한데 소상팔경만큼이나 이를 소재로 한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라는 그림 또한 유명하다.
도대체 소상팔경도는 언제 등장했을까? 이에 대한 교과서적인 해설은 11세기 북송시대 송적(宋迪)이란 사람에게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 박사는 그보다 100년 가량이 빠른 10세기, 당이 망하고 오대십국(五代十國)이 명멸하는 시대를 살다간 이영구(李營邱), 일명 이성(李成. 919-967)이라는 사람이 소상팔경도를 그렸다는 증거를 중국측 고문헌인 호남통지(湖南通志)에서 찾아냄으로써 소상팔경도의 역사를 1세기나 끌어올렸다.
나아가 전 박사는 시조나 가사, 판소리 외에도 소상팔경과 관련된 고려 이후 조선시대 사대부 문인들의 한시 600여 수를 정리하고 이를 모두 현대어로 옮겼다. 이 작업에만 꼬박 7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최근 발간된 '동아시아의 시와 그림, 소상팔경'(건국대출판부)이라는 단행본은 그 결과물이다.
하지만 단순히 자료만 모으고 주제별 분류를 시도한다 해서 소상팔경의 문화사적 의미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힘든 작업은 이를 해명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전 박사는 산시청람에는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한 미의식이 내포돼 있으며, 연사모종에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구도(求道)의 자세를 지향하는 의식이 표출돼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기에 이른다. 420쪽. 1만5천원. (서울=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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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독서가들은 책을 읽고서 기억하는 부류와 책을 읽고 잊어버리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 W.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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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五十二章 (노자 - 도덕경 : 제5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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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有始, 以爲天下母, 旣得其母, 以知其子, 旣知其子, 復守其母, 沒身不殆, 塞其兌, 閉其門, 終身不勤, 開其兌, 濟其事, 終身不救,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爲習常.
천하유시, 이위천하모, 기득기모, 복지기자, 기지기자, 복수기모, 몰신불태, 새기태, 폐기문, 종신불근, 개기태, 제기사, 종신불구, 견소왈명, 수유왈강, 용기광, 복귀기명, 무유신앙, 시위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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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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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두째 장
직역
하늘 아래 시작이 있으니 이것을 천하의 어미로 삼으라. 이미 그 어미를 얻었으면 그 자식을 알아야 한다. 이미 그 자식을 알았거든 다시 그 어미를 지켜야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다.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으면 몸이 끝날때 까지 다함이 없을 것이다. 그 구멍을 열고, 그 일들에 건너다니면, 몸이 끝나도록 구하지 못할 것이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음이라고하고, 부드러운 것을 지키는 것을 강함이라 한다. 그 빛을 사용하여 그 밝음으로 다시 돌아가면 몸에 재앙이 남지 않는다. 이것이 항상됨을 익히는 것이다.
해석
도에서 하나가 나온 것이 하늘 아래의 시작이다. 이것은 근원을 가리킨다. 텅 비어 있다. 그러나 이것에 머무르면 안된다. 이 상태는 갓 태어난 아이의 의식상태이다. 이상태에서는 인간의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만물을 구분할 줄 모르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겠는가. 그래서 어미의 자식을 알라는 것이다. 이제 만물은 구분이 된다. 개물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아는 것이다. 지식이다. 만물은 지식으로 다가온다. 노자는 지식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식은 필요하다. 나무를 나무로 보지 못하고 강물을 강물로 보지 못한다면 그는 며칠 못가서 죽으리라. 자 이제 지식을 알았다. 우리가 지식을 아는 것은 도의 자식을 알고 있는 상태이다. 만물을 구분할줄 안다. 그러나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제 그 어미를 지킨다. 만물이 자신만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차별화 시키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평등하다. 사물의 특수성을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모든 것은 동일하다. 왜냐하면 한 곳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우치는 것이 그 어미를 지키는 것이다. 그럼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않으리라.
구멍은 무엇이고, 문은 무엇인가. 바로 밖과 통하는 통로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아홉개의 구멍과 감각기관 즉 몸이다. 이것을 닫아라. 이제 그는 만물을 구분하게 되었다. 그럼 어미를 지켜라. 그 어미를 지키는 것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을 닫고 구멍을 막고 내면으로 길을 떠나라는 것이다. 내면으로 떠나는 길은 설명하는 것보다 스스로 해보는 것이 더 낳으리라 본다. 그 길은 스스로 가는 것이다.
문을 열고, 구멍을 열면 이제 그는 밖의 사물에 사건에 뛰어다닌다. 그는 많은 지식을 축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아는 것은 아들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신토록 그 어미를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씨앗은 작다. 그러나 하나의 씨앗은 어미다. 그 어미를 보는 것을 밝음이라고한다. 부드러움은 새싹이 자라나는 모양이다. 이 부드러움을 지켜나가면 거대하게 클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부드러움을 지켜라. 그럼 누구보다도 강해진다. 그 빛을 이용하여 그 어미를 볼 수 있는 데로 돌아가면 몸에 재앙이 남지 않게 된다. 빛이란 인간의 내면의 눈이다. 쉽게 말하면 통찰력이라고 할 수 도 있다. 나무를 보고 작은 씨았까지 알수 있는 눈으로 그 어미를 보고 그 근원을 보아 사람, 사물을 바라보는 자신의 차별성을 떨처 버린다면 몸에 재앙이 남지 않는다. 근원은 변함이 없다. 아니 변화환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고정되어 있는 것은 자신의 관념이다. 이 고정되어 있는 자신의 관념을 부수면 끊임없이 움직이는, 살아숨쉬는 도로 돌아가게 된다. 그것이 항상됨을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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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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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천하에는 시초가 있다. 그것이 천하의 어머니이다. 이미 어머니를 알았으니, 다시 그 아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미 그 아들을 알고 다시 그 어머니인 도를 지키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욕망이 일어나는 구멍을 막고 물욕이 들어오는 문을 닫으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수고롭지 않을 것이요, 욕망의 구멍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작은 것을 잘 볼 수 있는 것이 밝은 것이요, 부드럽고 약한 것을 잘 지키는 것이 강한 것이다. 그 겉에 드러나지 않은 빛으로 밝음의 본바탕인 도에 되돌아가게 한다면 자신의 몸에 재난을 초래케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을 도의 영원함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다.
주
시: 처음, 시초, 태초, 이것은 도를 가리킨 말임. 모: 어미, 근본, 근원, 이것도 도를 지칭한 말임. 자: 아들, 자식, 도를 모체로 하여 생성된 우주의 삼라만상. 색기태: 태는 구멍을 뜻함, 모든 욕망이 생기는 내부의 구멍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뜻임. 폐기문: 외부에서 들어오는 유혹과 물욕의 문을 닫는다는 뜻임. 근: 노고, 수고로움. 광: 빛, 광선, 여기서는 지혜를 상징한 말임. 복귀기명: 그 밝음의 본바탕인 도에 되돌아 간다는 뜻임. 여기서 밝음은 지혜와 도를 상징하고 있음. 습상: 습은 습과 뜻이 통하며, 습상은 도의 영원함을 배운다는 뜻이다.
해
도는 천하만물의 시초요 어머니이다. 먼저 도를 알면 천하만물의 원리를 아는 것이 된다. 도를 체득한 사람은 사물의 지엽적인 것과 피상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며, 도에 어긋나는 무리한 행위를 하여 몸을 망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모든 욕망이 일어나는 자기 내부의 구멍을 막아 버리고 바깥에서 들어오는 물욕과 정욕의 문을 닫아 버린다면 마음의 안정을 얻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수고로움이 없을 것이다. 작은 것을 잘 보는 것을 밝음이라고 하고 부드럽고 약한 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을 강함이라고 한다. 도는 스스로 강한 체하지도 무리한 힘을 구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부드럽고 약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천하의 그 무엇도 그것을 지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도는 진실로 강한 것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슬기로움으로 만물의 본바탕인 도에 되돌아갈 수 있다면, 자신의 몸에 재앙을 끼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도는 만물의 근원적 지혜요, 영구 불변의 실재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이와 같은 도의 근원적 지혜와 영구 불변성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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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3장 서양인의 수집
마르텔의 회고담
에밀 마르텔은 자신이 서울에서 골동품을 수집하기 시작하던 때의 일화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골동 수집을 몹시 좋아하여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1894년)의 이야기지만 내가 처음으로 조선에 왔을 때에는 이렇다 할 재미있는 골동품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프랑스공사 플랑시 씨의 집이라든지 미국 공사 알렌 씨 집에서 처음으로 고려자기를 관상하게 되면서 나는 그것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당시만해도 그러한 고려자기의 꽃병이나 항아리·접시·사발 같은 것은 서울 거리를 아무리 걸어도 어느 골동상에서도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구하려 해도 좀처럼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몇 해 후가 되니가 스스로 구허려고 하지 않는데도 조선인이 자꾸 팔러 오는 바람에 차차 수집을 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인이 골동품을 팔러 오는 광경은 매우 재미있었다. 그들은 골동품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아주 소중하게 들고 오지만 그 태도가 도무지 심상치 않고 시종 주위를 살피는데 어딘가 불안에 쫓기는 듯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엇던 것 같다. 즉, 양반의 소장품을 몰래 부탁받고 팔러 오는 경우와 고분의 도굴품을 밀매하러 오는 경우였다. 당시 가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팔러 오던 측이 골동에 관해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못했던 사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마르텔은 도 구한말의 골동 가격을 말하는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갖고 온 물건들 속에서 눈부신 것 서너 개를 집어 들고 하나씩 가격을 묻는다. 그러면 그들은 4개를 모두 사준다면 10원만 받겠다고 말한다. 나는 그건 좀 비싸니까 8원으로 하자고 교섭하나 그들은 좀처럼 응하지 않는다. 나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내일이면 8원으로도 살 사람이 없을 거다, 7원밖엔 못 받을 거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내일 가서 보라' 고 말해서 돌려 보낸다. 그러면 그들은 잠시 떠나갔다가 곧장 되돌아와서 '그러면 8원으로 하자' 고 한다. 결국 그런 식으로 물건을 팔고 갔다. 나는 당시 값이 너무나 싸기도 했으므로 그렇게 상당수를 수집하였고, 나 외에도 그런 방법으로 산 사람이 상당수 있었던 걸로 안다."
일본에서 건어론 무법자들이 고려고분에서 고려자기를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인 가운데에도 어느덧 도굴한 유물을 외국인에게 들고 가서 몇푼 받고 팔아넘기는 불쌍한 행상이 하나씩 둘씩 나타나던 때를 마르텔은 말하고 있다. 한편, 나중에 도자기류의 수집품을 모두 파리의 기메미술관에 넣었다는, 당시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 플랑시는 1903년까지의 재임기간 중 고서도 적잖이 수집했다. 오랫동안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비장돼있다가, 1970년대 초 유네스코 주최 '책의 역사' 전시회에 처음으로 나와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고 크게 뉴스가 되었던 고려의 활자본 (직지심체요절)(1377년, 청주 흥덕사 간본)으 서울에서의 입수자가 바로 플랑시였다. 그 사실도 1970년대에 와서야 밝혀졌는데, 당시 파리의 국립도서관 동양도서 책임자인 세귀 여사의 증언을 통해 국내에 알려진 내막은 이러하다. 콜랭 플랑시는 서울에서 프랑스 공사로 있으면서 수집한 수백 권의 고서를 프랑스로 가지고 갔다. 그는 1930년에 사망했는데, 그 전에 그 한국고서의 일부를 파리의 동경대학에 기증했고, 나머지는 옛 책과 미술품 경매장이던 드루오호텔에 내다 경매에 붙여 팔았다. (직지심체요절)은 뒤의 경매품 속에 들어 있었다. 동양고서 전문가의 평가에 따라 파리국립도서관이 (직지심체요절)을 입수하려고 했을 때엔 이미 그 진본은 앙리 베베르의 수중에 들어간 뒤였다. 그러나 베베르는 도서관측의 간곡한 교섭을 받자 "내가 죽은 후에 기증하겠다" 고 약속했다. 이때에 약속은 이행 되었다. 1950년, 베베르가 사망하자 (직지심체요절)은 약속대로 파리국립도서관으로 들어갔다. 플랑시가 (직지심체요절) 같은 귀중본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것은 그가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로 있을 때 데리고 있던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의 협력에 의한 것이었던 것 같다. 쿠랑은 1890년부터 1년 반 동안 서울의 프랑스 공사관에 근무하면서 조선의 옛 책들을 연구했는데, 그의 권고에 따라 플랑시 공사는 많은 귀중본을 수집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귀국한 후 프랑스어로 된 (한국서지)를 발간했는데, 그 속에 이미 (직지심체요절)이 소개돼 있다. 쿠랑의 (한국서지)는 1894년부터 1901년까지 4권으로 묶은 한국 고서목록르로 약 3,821종을 다루고 있다. 뒤에 플랑시가 그의 한국 고서 컬렉션 일부를 파리의 동야대학에 기증했다는 것도 쿠랑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1880년대에 들어와 서울엔 외국 공관이 다투어 등장하면서 많은 서양인들이 조선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 반도가 세계로 향해 문이 열릴때의 급격한 시대적 변화였다. 서양인들은 극동의 작은 '은둔의 나라, 조선'(1882년에 미국인 그리피스가 지은 영문 (한국사)의 표제)의 지리.풍속과 역사.문화에 처음으로 접촉하면서 각자 취미껏 이 땅의 전통적인 공예품.미술품 기타 골동품을 수집하였고, 조선 연구를 위해 귀한 책들도 입수해 가졌다. 그중에서도 교양 있는 서양인들 사이에 가장 환영을 받은 것은 역시 개성 근처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에 의해 도굴되기 시작했던 고려자기였던 것 같다. 미국 공사와 프랑스 공사를 위시해서 많은 서양인들이 서울에서 그것을 사 갖고 있었다고 에밀 마르텔은 그의 회로록에서 말하고 있지만, 당시의 독점적인 수집 및 매수자는 역시 일본인들이었다. 1902년에 한국에 건너와서 고건축물과 미술문화를 조사했던 세키노의 (한국건축 조사보고)(1904년 간행)에 이런 말이 나온다.
"도기에 이르러서는 근년에 개성 부근의 고분을 발굴(도굴)하여 그것을 얻는 일이 빈번한데 모두 부장품이다. 그러나 분묘를 파는 것은 나라가 금하는 행위로서 범법자는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데 그것을 얻으려 면 다소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나는 서울과 개성에 거류하는 일본인 동포에게서 그와 같은 많은 도기를 보았다. 야마요시 씨도 전에 주한 일본공사관에 근무할 때에 그것을 수집하여 거의 수백 점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도쿄 제실박물관에 방을 하나 얻어 그것들을 진열하고 있다."
한편,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이른 봄께, 달성군 팔공산 속의 한 절에서 모종의 비밀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일본인 특무대원 하나가 있었다. 이름은 가토, 그는 병을 정양한다는 구실로 신분을 감추고 약 3개월간 절에 머무르면서 특무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는 금당암의 수미단 밑에 이상한 나무궤짝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 그 속을 조사해 보자고 노승들에게 제의했다. 일본인 특무대원의 요청을 노승들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수백 년 동안 누구도 건드린 적이 없는 궤짝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속엔 뜻밖에도 커다란 고려청자 항아리가 하나 들어 있었다. 뒷날 가토가 일본의 잡지에 밝힌 바로는 그때의 도자기는 높이가 약 80cm에 우아한 연화당초문이 양각돼 있고, 그 굽 밑에는 유약이 칠해져 있지 않은 태토에 관기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뒤에 들으니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에 그 고려자기 항아리는 어느덧 대구의 거주하는 서양인에게 팔려 나갔고, 그 뒤 다시 인천을 거쳐 외국으로 반출되었다"고 하더라고 가토는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절에서 그것을 팔았다는 말이 없고, 오히려 그런 일이 발생하자 절에서는 한때 난리가 났었다는 전문도 있는 것을 보면 가토 자신이 소문을 낸 이후 일본인 무법자들이 그것을 뺏어다가 서양인에게 팔아먹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가토가 말하는 대형 고려청자 항아리를 궤짝 속에 전래시키고 있던 절은 현재 대구시 도학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어 있는 동화사였다. 그는 또 이런 얘기를 적고 있다.
"그와 비슷한 또 하나를 나는 보 적이 있는데, 1915년 10월 말에 총독부에서 경남 양산군의 통도사 출장을 명령받았을 때다. 그것은 대종형의 고려청자 향로였는데, 한 선방의 불단 밑에 있던 오랜 궤짝 속에 많은 파경과 함께 들어 있던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내가 그것을 목격하던 당시엔 저 유명한 십불골탑(금강계단을 말한 듯) 좌측에 위치한 작은 불전의 향로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후 수년이 지나서 그것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까, 오래 전부터 부산에 살고 있던 일본 왕래의 상인(일본인 골동상을 말한 듯)이 오사카에서 만든 커다란 진유향로를 갖고 가서 그것과 바꾼 후 어디론가 가지고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이 증언은 통도사의 희귀한 전세품 고려자기 향로도 결국 일본인 악당이 악랄한 수법으로 탈취해 갔음을 알려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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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실학이란 무엇인가
중국에서 비롯된 유학은 인근의 여러 민족, 국가로 전파되면서 동아시아 전통 사회의 학술과 문화의 근간을 이루었다. 특히 한국과 일본은 중국과 더불어 오랜 동안 유학의 영향을 받으며 사회 체제와 문화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세 나라의 역사는 각각의 독자성 못지 않게 동아시아 역사 전체의 일반적 성격을 강하게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유학은 방대한 규모와 강인한 탄력성을 갖추었다. 이로 인해 유학은 매 역사 시기마다 사회, 문화를 광범위하게 장악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스스로를 갱신하면서 오래도록 유지, 발전해 갈 수 있었다. 주자학은 동아시아 사회 체제의 변동기에 형성된 유학의 한 형태로서 오랜 동안 동아시아의 사회 문화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주자학도 사회 체제가 다시금 격동하면서 그 지배력을 차차 상실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유학의 새로운 갱신이 다시 한 번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17세기를 전후로 하여 시작된 사회 체제의 변동은 중세로부터 근대로의 이행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던 만큼, 유학의 갱신 역시 그에 상응하는 획기적인 것이 요청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바로 실학이었다.
1. 실학이 발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
중세 말기 동아시아 각국은 내재적인 계기를 통해 그 토대부터 변화, 발전하는 양상을 드러내었다. 중국의 경우 명대 중기에 이르면서 수공업이 발전하고 고용 노동이 증대하며 상업이 발전하고 고리대업이 흥기하는 등 자본주의의 맹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여전히 농업 위주의 낮은 생산력 단계를 크게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전통적인 자급자족적 자연 경제 체제가 와해될 기미를 보인다는 측면에서 이는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이러한 사정은 어느 정도 시차와 구체적인 양상의 차이는 있었지만 조선이나 일본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조선은 임진, 병자 양란으로 인한 피폐를 극복하면서,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농업 부문의 생산력 발달을 바탕으로 수공업과 상업 부문의 사영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사회 신분의 변동이 발생하여 신분제가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지리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던 일본은 각 지역마다 정치적, 경제적 독립성이 비교적 강한 독특한 체제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체제하에서 상업이 발달하고, 마침내 18세기에 이르러 이른바 전기적 상인 자본이 출현하여 산업의 발전을 선도하게 되었다. 이렇듯 내재적인 발전의 계기를 마련해 가는 과정에서 동아시아는 외부로부터 충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유럽 각국은 16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대외 무역을 통해 생산력의 발전을 도모하는 단계에 다다랐다. 무역 전쟁으로 표출되기도 하였던 그들 사이의 각축은 급기야 무대를 동아시아로까지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16세기 말 기독교 선교사들의 출현은 종교적 사명 이외에, 유럽 각국의 경제적, 문화적 팽창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의 단절된 채 발전해 오던 동서양 양 세계를 잇는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동아시아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은 서양 문물의 전달자였다. 그들이 선교의 도구로 가져 온 과학 기술과 세계 지리에 관한 정보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에서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안겨 주었다. 특히 일본은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17세기 중엽부터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공식화하여, 18세기 말에는 난학이라는 서양 학문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동아시아는 사회의 토대로부터 발전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유럽 문화와 접합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유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불테르나 라이프니츠와 같은 유럽의 근대 사상가들은 선교사들을 통해 동양의 사회상과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일정하게 그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볼 때 하나의 단위로서 세계의 역사는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본격화되었지만, 이미 17세기부터 동아시아와 유럽은 더 이상 서로 고립된 세계가 아니었다.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 발전은 이제 동아시아의 영역을 넘어 세계사의 영향 아래 놓이기 시작하였다.
2. 주자학 비판과 새로운 학문의 태동
주자학은 전시대 역사 발전의 산물이었다. 주자학의 핵심은 사회 문제를 도덕 문제 위주로 파악하고, 도덕 문제를 본성의 회복이나 마음의 수양을 중심으로 해서 해결하려는 데 있었다. 주자학의 체계 속에는 경세론 등 유학의 전통 분야들이 그대로 담겨 있었지만, 주자학을 주자학이게끔 하는 본질은 그 도덕주의적, 내면주의적 사고 방식에 있었다. 리기심성론은 그러한 사고 방식의 대표적인 표현 양식이었다. 이 리기심성론은 세계를 추상하는 고차원의 이론 도구로서, 자연과 인간 및 사회에 관한 사람들의 통일적인 이해를 한 단계 고양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주자학은 동아시아 사회가 새로운 변동에 직면하자 이에 더 이상 적극적인 기능을 발휘하기 힘들었고, 오히려 역사 발전에 질곡이 되었다. 그리하여 주자학을 대체하는 유학의 새로운 갱신이 동아시아 각국에서 진행되었다. 명대의 양명학은 주자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그것은 도덕의 원리인 천리를 주관화함으로써 그 대상화의 길을 트고, 그리하여 일부에서는 오륜, 오상 위주의 전통적 도덕 규범을 부정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그러나 양명학은 기본적으로 도학의 내면주의적 성격이 더 강화된 것이었고, 도덕주의적 성격 또한 근본적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명의 멸망과 청의 중국 지배로 표출된 사회변동의 과정에서 양명학은 오히려 불교의 선학과 유사한 것으로 인식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지식인들은 좀더 실용적이고 객관적인 학문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다음의 세 사람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황종희는 처음에 양명학을 공부했지만 곧 양명학적 폐단의 시정과 사회적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그에게서 사회적 실천이란 개인의 도덕적 수양과 실천을 넘어서 구세제민을 위주로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학, 경학, 천문, 역법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연구를 진행하였고, 그 결과 군제 전제를 비판하고 군민공치를 제기하는 등 초기적인 계몽 사상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고염무 역시 양명학에 대한 비판을 학문의 출발점을 삼았다. 그는 양명학의 범람이 명조 멸망의 근본 원인이라 파악하고, 경전을 객관적 준거로 삼아 거기에서 치세의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음운학, 경학, 역사지리학 등의 영역으로 확장된 그의 학문은 도학을 벗어나 고증학이라는 청대 학술의 새로운 영역을 개창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왕부지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기 일원론을 집대성한 사람이었다. 그는 경학, 사학, 천문, 역법 등에 연구를 집중하여 명청 교체기의 새로운 학풍을 철학 이론적 측면에서 뒷받침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들은 모두 경세학, 고증학, 기철학이라는 서로 다른 학문 경향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지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주자학으로부터 양명학으로 이어진 도학적 전통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고, 사회 현실의 실질적인 문제에 학문적 관심을 쏟았다는 사실이다. 조선에서는 관학으로서의 지위를 굳힌 주자학이 비교적 일찍부터 양명학에 대한 경계심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이황의 양명학 비판이 대표적인 예의 하나인데, 그 이후 양명학은 정제두 등 몇 사람의 연구자가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성리학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기능을 시험할 기회를 얻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17세기 이후 사회 현실의 변화에 사상을 조응시키기 위한 모색은 경세치용이나 이용후생 등 유학의 전통적 교의에 입각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모색은 학파에 따라 약간의 경향성의 차이를 드러내었는데, 대표적인 두 학파는 남인 계열의 성호 학파(경세치용 학파)와 노론 계열의 북학파(이용후생 학파)였다. 이익으로부터 비롯되어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성호 학파는 경전에 대한 재해석을 주자학 비판의 유력한 무기로 삼는 등 비교적 경학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반면에 북학파는 홍대용과 박지원으로부터 비롯되는데, 그들은 대체로 리기론과 경학적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연 과학적, 문학적 소양을 새로운 학문 형성의 유력한 무리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학파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양의 자연 과학 등 새로운 지식에 개방적이고 성리학으로 상징되는 낡은 사고에 비판적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과 유대를 나누어 갖고 있었다. 일본의 경우도 주자학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17세기초에 도쿠가와 막부는 주자학을 관학으로 제정하고 장려하였지만, 곧이어 이에 대한 반발이 발생하였다. 그 반발은 대체로 세 갈래로 이루어졌는데, 하나는 일본의 전통적 신도를 선양하는 국학파이고, 다른 하나는 양명학파이며, 또 다른 하나는 공맹 유학의 회복을 주장하는 고학파였다. 이 세 학파의 사상은 서로 뒤얽히면서 전개되다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개국론을 비롯한 근대적인 제 개혁론으로 이어졌다. 특히 야마가 소코, 이토 진사이, 오규 소라이 등의 고학파는 주자학자들이 자아의 내면에 관심을 쏟았던 것과는 달리 외부 세계, 즉 자연과 사회 문제로 눈을 돌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연 경제와 화폐 경제 사이의 모순 문제와 같은, 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경세문제를 중시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들이 중심이 되어 마련한, 세계를 바라보는 합리적인 안목은 18세기에 들어 양학과 결합되고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개국론과 결합되면서 중세 말기 일본의 위기를 타개하는 주된 사고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 삼국에서는 17세기를 경과하면서 주자학 위주의 학문 풍토에 대한 비판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던 만큼,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 발전의 필연적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학문 사상의 구체적인 전개가 나라마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음에도, 역사 발전의 일반 법칙에 따르는 사상 전개 양상의 공통된 경향성 또한 존재하게 마련이었다. 그 공통적 경향성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학문 사상에서의 실용성과 객관성의 제고이다. 실용성과 객관성이야말로 주자학을 위시한 종래의 낡은 학문 사상을 비판하고 그것을 대신하는 새로운 학문 사상을 확립하는 데 소용되는 유력한 무기이자 준거였다. 우리는 이렇듯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세 나라에서 실용성과 객관성을 기치로 내걸고 새로이 출현한 학문 사조를 실학이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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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푼돈
본뜻 : '푼'이란 옛날의 화폐단위로서 돈 한 닢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 냥 두 냥 할 때 한 냥의 10분의 1 이 한 푼이다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10원 정도이다. 이처럼 아주 작은 돈의 액수를 푼이라 하는데, 거지들이 손은 내밀며 '한 푼만 줍쇼!' 하는 것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이 밖에 '무일푼'이라는 말도 자주 쓰는데 '무일푼' 또한 한 푼도 없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서 나온 '푼돈'은 곧 한 냥이 채 못되는 정도의 아주 작은 '돈'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푼돈이 모여서 몫돈이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몫돈을 모으는 사람이 어디 있다더냐 ? -푼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푼돈 때문에 울게 될 것이니 푼돈을 우습게보지 말거라
품
본뜻 : 모양이나 동작, 됨됨이 등을 나타내는 말이다.
바뀐 뜻 : 흔히 영어의 form(폼)과 혼동해서 쓰는데, 뜻은 비슷하다 할지라도 말이나 문장에서 쓸 때는 우리말 '품'이 훨씬 더 풍부하고 정확한 의미를 나타낸다.
"보기글" -그 사람은 젊은 사람이 말하는 품이 그만하면 되었다 -씩씩하고 당당하게 걷는 품이 아주 보기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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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용기만이 필요할 뿐
프랑스혁명을 이끈 유명한 새 사람은 천성적인 선동기인 마라(Jean Paul Marat, 1743-1793), 강렬한 성격의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1759-1794), 그리고 음울하고 꼿꼿한 성격을 지닌 로베스피에르(Maximilen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1794)였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자코뱅파로 처음에는 합세하여 혁명을 이끌어 갔지만, 나중에는 단두대로 보내는 적대적인 관계를 갖기도 했다. 마라는 암살당했고,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으며, 로베스피에르 역시 단두대에서 그 종말을 맞이했던 것이다. 마라가 암살당한 것도 유명한 사건이다. 그는 유황탕에서 목욕을 하던 중 공포정치를 증오한 당시 25살 난 처녀에게 단도에 찔러 죽었다. 코르테라는 이 '암살의 천사'는 지롱드파의 선전을 믿고 공포정치를 막기 위해 마라를 암살했던 것이다. 그녀는 현장에서 붙잡혀 혁명광장에서 처형되었는데, 처형당하는 순간에도 눈을 가리기를 거부하고 의연하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음 차례는 당통이었다. 공포정치가 진행되면서 당통은 지롱드파가 재판을 받고 처형되는 것에 몹시 불안을 느꼈다. 상처한 후 16세의 처녀와 재혼한 그는 정치에 염증을 느껴 애정의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공포정치에 불안감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당통을 중심으로, 외국과의 타협을 권유하고 예배의 자유를 주장하는 등 소위 '관용파'를 만들어 온건한 정책을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문제는 로베스피에르였다. 당통파 로베스피에르는 성격이 매우 대조적이었다. 당통은 호방하고 열정적이었던 반면 로베스피에르는 세심하고 결벽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부패할 수 없는'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닐 정도로 청렴하기로 유명했다. 로베스피에르의 비극은 자신만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었다. 금전을 멸시하고 여자를 멀리했던 그였다. 그러나 당통은 전혀 달랐다. 그는 금전욕이 강하고 안일한 생활을 함으로써 많은 스캔들을 일으켰다.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이 혁명에 방해가 되는 존재라고 느끼고 제거할 생각을 갖게 되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는 다른 의원들을 시켜 당통의 부패상을 들춰내어 단두대에 세웠다. 당통은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 로베스피에르의 집 앞을 지나게 되자, "로베스피에르, 숨지 마라. 너도 곧 나를 따르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한다. 그의 말대로, 로베스피에르는 더 강력하고 급진적인 정책을 시행하다가 반동파 의원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결국 그도 단두대에서 사라졌다.
당통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아주 열정적이었던 그는 연설에 관한 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뛰어난 웅변은 1792년 혁명군이 지키고 있던 베르뎅이 프로이센 왕군에게 점령당했을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베르뎅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파리시민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당장 입법회의가 소집되는 등 대책마련이 한창이었을 때, 당통은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유명한 연설을 끝냈다. "지금 울리려 하는 경종은 결코 경보가 아닙니다. 그것은 조국의 적들에 대한 공격신호입니다. 신사 여러분, 우리가 그들을 정복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둘도 용기, 셋도 용기입니다. 그래야만 프랑스가 구원됩니다!" 그는 이 한마디 연설로 의원들을 사로잡아 외국과의 혁명전쟁을 전개했다. 자신에 대한 재판이 벌어진 법정에서도 그는 열변을 토해 내면서 검사의 논고를 단호히 반박했다. 판사가 당통의 웅변에 눌려 판결을 바꿀 기세를 보이자, 검사는 당통의 발언을 중지시키고 퇴장시키기까지 했다. 단두대 앞에서도 그는 "나의 머리를 민중에게 보여주라! 내 머리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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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샌프란시스코 해변에서
금문교의 도시에 왔습니다. 햇빛은 따스한 초가을 같은 금빛 나래를 내리고 건조한 바람이 쾌적하게 불어오는 샌프란시스코의 화창한 일기속에서 그 거대한 붉은 철의 금문교가 마치 공중에 걸린 듯 떠 있는 아름다운 풍경은 몇 번을 가 보아도 갈 때마다 다른 표정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새벽 안개 속을 달려서 가 본 금문교는 가히 절경이었습니다. 안개는 다리의 허리쯤에 걸려 그 밑을 흐르는 물도, 땅도 보이지 않고, 다만 포물선을 그리면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금문교의 붉은 색깔, 조금씩 움직이며 풀려 가는 안개는 마천루처럼 서 있는 금문교를 싣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듯했습니다. 깊은 안개에 머리를 적시며 잠든 도시를 가로질러 뿌우옇게 트여 오는 새벽길을 달려갈 때 안개처럼 부드러운 당신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바닷가의 어느 작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환하게 트인 창 밖으로 옥빛 바닷물이 흰 거품을 일으키며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건조한 날씨 때문인지 샌프란시스코의 바다는, 바다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비린내와 소금 냄새조차 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처럼 맑고 빛나는 도시를 헤매며, 나는 오래 꿈꾸어 오던 동화의 세계 속에 비로서 들어와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바다로 향한 창가에 앉아 읽고 싶은 책들을 읽고 음질이 좋은 라디오를 듣는 아름다운 꿈의 세계를 설계하면서, 완전히 자유로운 나 혼자만의 방을 갖고 싶었던 유년 시절의 소망이 이 도시에 와서 참으로 간절하게 되살아났습니다. 만일 나의 소망이 이루어져서 나의 방, 나의 공간을 갖게 된다면 나는 그 방으로 우선 당신을 초대하여 뜨거운 차를 같이 마시며 진지하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술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소살리토라는 마을은 조용하고 아담한 집들이 마치 동화 속의 그림들처럼 숲속에 띄엄띄엄 서 있었습니다. 숲이 이루고 있는 그늘 속에서 작은 창 밖으로 흔들리고 있는 은은한 색깔의 커튼, 감미롭고 평화로운 생활들이 그 속에는 반드시 있을 것만 같은 창들을 바라보며 안정되고 따뜻한 가정을 가지고 싶은 나의 욕망이 안타까움과 가슴 저리움으로 아프게 전해져 왔습니다.
아벨라르. 만일 우리가 이 도시로 함께 여행을 할 수가 있다면 나는 꼭 소살리토의 언덕 위에서 며칠쯤 머물고 싶습니다. 한적한 오솔길을 함께 산책하며, 시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인생의 온갖 경이로움과 신의 은총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서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마주보고 미소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새벽의 금문교 앞으로 달려가 마천루 같은 우리의 사랑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도시의 바람과 햇살, 안개와 숲은 잠자던 내 영혼을 일깨워 눈뜨게 합니다. 그리고 마성의 그리움으로 나를 뒤흔들어 긴 밤 내내 잠 못 이룬 채 뒤척이게 했습니다. 나는 이 도시에서 다시 꿈꾸기 시작했으며 다시 소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짝이는 이 도시의 어느 해변에 나는 꿈으로 가꾼 방 하나를 마련하고 당신과 함께 따스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을 어느 먼 날을 위해 나의 그리움 하나를, 나의 소망 하나를, 이곳에 심어 두고 갑니다. 만일 가능하다면 나는 내 신혼의 방을 이곳에 꾸미고, 바닷소리에 귀 기울이며 멀리 보이는 금문교의 붉은빛처럼 아름다운 설계를 실현할 것입니다.
새벽 안개를 밀고 금문교에 가 보아라
건조한 바람 속 온 밤을 뜬눈으로 달려서 안개 속에 반쯤 허리를 묻어 두고 빈 가슴으로 서 있는 새벽의 금문교에 가 보아라.
허물어져 누운 바다 마성의 머리칼을 날리며 천지사방 훨훨 떠돌아 눈도 귀도 멀게 하는 새벽의 안개.
깊이 잠든 혼을 불러 내어 아프게 흔들어 눈 뜨게 하는 안개는 드디어 칼이 되어 날아 들고 그리움의 다리만이 거기에 남아 구천을 헤매는 넋으로 일어선다.
-강계순 <금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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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찬란한 여명 그리고 선각자의 고독
김옥균의 암살 (3/3)
김옥균은 오가사하라 섬에서 유폐와 같은 세월을 보내면서도 섬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게 된다. 고매한 인품과 나무랄 데 없는 학덕으로 소학교의 어린이들에게는 선생님이나 다를 바가 없었고, 섬사람들은 그를 칭송하는 노래를 지어서 부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가사하라 서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뭐니뭐니해도 와타라는 일본인 소년과의 만남이었다. 와타 소년은 김옥균을 아버지라고 무르며 평생을 따르며 모실 것을 맹세한 것이었다. 진순신은 소설 "일청전쟁"에서 김옥균과 와타는 수박으로 인연을 맺었다고 적고 있으며, 김옥균은 무척 수박을 즐겼다고도 적고 있다. 김옥균운 오가사하라 섬에서 3년 남짓한 유폐생활을 보내고 나서 이번에는 북해도로 옮겨진다.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된 북해도도 절해고도에 못지 않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이윽고 고종 27년(1890), 김옥균은 외형상 자유로운 몸이 되어 동경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목숨을 노리는 조선인 자객들의 기승은 도를 더할 뿐이었다. 이때 도일한 자객이 이일식이었고, 그에게는 박영효의 목숨도 앗아 내야 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홍종우가 이일식에게 포섭이 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으나, 귀국한다 해도 자신의 진로가 마땅치 않았으므로 김옥균에게 접근을 시도하고 있던 중에 이일식에게 포섭이 된 것이었다. 결국 홍종우는 김옥균의 암살계획에 가담함으로써 자신의 입신을 꾀한 셈이었다. 김옥균의 처리가 지지부진해지면서 조선 정부와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기에 이르자, 일본 정부는 김옥균울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로 밀어낼 궁리를 하게 되지만, 그를 보낼 만한 곳은 중국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떠나갈 김옥균은 더욱 아니었다.일본 정부는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끝에 김옥균과 이홍장의 면담을 주선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기로 하였다. 당시 이홍장의 지위는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이었으니 실로 막강하다 아니할 수 없었다. 김옥균과 이홍장이 서로 만나서 조선의 장래에 관해 의논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명분이 아니고 무엇인가. 일본 정부는 이홍장의 양아들인 이경방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1890년 이경방은 여서창의 뒤를 이어 주일 청국공사의 지위에 있다가 1893년 7월, 이홍장의 부인 조씨가 세상을 떠나자 공사직을 사임하고 본국 땅 연호 근방에서 휴양하고 있었다. 바로 이 이경방이 김옥균에게 양부 이홍장과의 회담을 주선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정부가 파놓은 덫에 걸려든 것이었다.
김옥균이 일본땅 고베에서 상해로 가기 위해 우편선인 사이쿄마루에 오른 것은 고종 31년(1894) 3월 23일이었고, 그는 이와타 슈사쿠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다. 김옥균이 일본땅에 망명해 있은 지도 어언 9년, 그는 사지로 떠나가고 있으면서도 이홍장과 만나 조선의 미래를 토로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김옥균이 탄 사이쿄마루에는 그의 호위 겸 서생으로 데리고 다니던 와타와 통역을 맡을 오보인이 함께 타고 있었고, 김옥균의 목숨을 앗아낼 홍종우도 승선해 있었다. 사이쿄마루가 상해에 도착한 것은 고베를 떠난 지 4일 뒤인 3월 27일이었다. 이들은 공동 조계의 철마로에 있는 '동화양행'이라는 여관의 2층에 여장을 풀었다. 동화양행은 일본인 요시지마 도쿠사부로가 경영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부연할 것은 우리 나라에서 간행된 통사류의 역사책에는 김옥균이 투숙했던 '동화양행'의 위치를 대부분 미국 조계라 쓰고 있으며, 간혹 프랑스 조계라고 쓴 것들도 있다. 그러나 이미 김옥균이 상해에 도착하기 여러 해 전에 미국 조계와 영국 조계가 합쳐져서 공동조계라고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어떻든 김옥균운 도착한 다음날인 3월 28일에 바로 그 '동화양행'의 2층 방에서 홍종우의 총탄에 쓰러지고야 만다. 그를 호위하고 있어야 할 와타가 외출 중에 일어난 참사였다. 이때 김옥균의 나이 44세. 그를 살해한 홍종우는 물론 체포된다. 일본의 상해 총영사가 외무대신 무쯔에게 김옥균의 암살을 보고한 문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김옥균의 시체에는 세 군데의 총창이 있음. 하나의 왼쪽 관골 밑을 관통하여 뇌에 이르렀고, 하나는 등쪽의 왼쪽 견골의 밑에 박힘.
김옥균의 죽음이 조선 조정에 알려지자 조병직을 원세개에게 보내 김옥균의 시체와 홍종우를 돌려 줄 것을 요청했고, 일본은 나름대로 감옥균은 일본이 보호하고 있었으므로 마땅히 일본으로 송환되는 것이 옳다는 여론을 일으키고 있었다. 김옥균의 시체는 호위 겸 서생이었던 와타에게 인도 된다. 와타는 그들이 타고 온 사이쿄마루로 김옥균의 시신을 운구하고 있었다. 일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반전된다. 조계 경찰의 태도가 돌변한 때문이었다. 이홍장이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이홍장은 김옥균의 시신과 홍종우를 응분의 죄가로 처벌할 것과 다른 하나는 김옥균의 시신에 형벌을 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김옥균의 시신은 그가 목숨을 잃은 지 열흘 뒤인 4월 7일 청국군함인 위정호에 실려 상해를 떠났고, 닷새 뒤인 4월 12일 일에 인천항에 도착하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다시 복잡해지기에 이른다. 김옥균의 시신이 양화진 민방에 안치되자 조선 조정은 병사들을 보내 이를 지키게 하였고, 일본 특명 전권공사 오오시마는 본국의 훈령이라 하며 김옥균의 시체에 가해하지 말 것을 요청했으나 조선 조정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 문제는 청나라에서도 논의되고 있었다. 주청 영국 특명 전권공사 오코너도 조선 국민의 격양된 감정의 폭발을 염려하여 공관을 설득, 김옥균의 시체를 조속히 매장하고, 홍종우를 중용하지 않을 것을 조선 정부에 권고하고자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김옥균의 시신을 능지처참하기로 결정했다. 김옥균은 고국을 떠난 지 9년 만에 시체가 되어 돌아왔는데도 또 한 번의 모진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의 사지는 떨어져 나갔고, 목은 효수된다.
"모반대역부도죄인 김옥균 당일양화진두불대시능지처참."
그토록 개화된 근대 정부의 수립을 염원하던 풍운아 김옥균의 처참한 종말이었다. 이 같은 조선정부의 조처에 엉뚱하게도 일본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김옥균이 처음 일본으로 망명했을 때부터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냉대했었다. 그를 국외로 추방하려 했던 일본인들이 이번에는 김옥균에게 가형한 조선 정부를 비방하고 나서는 이중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김옥균 추도회 또는 김옥균 기념회, 김옥균 연구회 등을 조직하여 연일 추도 모임을 갖는 것이었다. 일본측의 기록에 따르면 4월 21일에는 간다니시키정 금휘관에서 '김옥균사건 연설회'가 열렸고 4월 23일에는 정계 유력자 1백여 명이 모여서 '대외경파대간친회'라는 모임이 아사쿠사에 있는 본원사에서 열렸는데 대단한 성황이었다고 되어 있다.
이 어처구니 없는 작태를 살펴보면서 오늘날의 일본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연유는 무엇일까. 따지고 보면 김옥균은 일본 정부의 모진 냉대에 시달리고 분노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상해로 떠나게 된 것도 일본 정부에서 내몰았던 것이었는데, 그의 추모를 빙자하여 조선 정부를 비방하는 것도 달갑지 않지만, 김옥균의 무덤이 일본땅에만 두 개씩이나 있어야 할 까닭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오야마의 외인 묘지에 우뚝 서 있는 김옥균 묘의 비석에는 박영효가 비문을 짓고 이준용이 글씨를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상 그 비문은 유길준이 쓴 것이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때 유길준은 조선에서의 또 다른 쿠데타에 연루되어 일본정부로부터 오가사하라 섬의 모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김옥균이 유폐되었던 바로 그 절해고도에서 김옥균의 비문을 써야 하는 유길준의 심정은 착잡함을 넘어서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김옥균의 묘는 본향구입의 진정사에 있는데, 여기에는 김옥균의 머리칼이 묻힌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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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의 미소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29)의 작품인 '모나리자'는 르네상스가 남긴 최고의 예술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모나리자'란 '나의 엘리자베드'의 뜻. 이 그림은 '다 빈치'가 피렌체의 부호 '프란체스코 델 죠꼰드'의 의뢰로 그의 아내 '엘리자베드'를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1503년에서부터 4년 동안 그녀의 나이 24세에서 27세까지의 사이라고 한다. 널빤지에 유화로 그린 이 그림의 크기는 77㎝*55㎝. 이 정도의 소품을 그리는데 4년이 걸리고도 미완성이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그 수수께끼 같은 미소에 대해서는 '엘리자베드'가 그 당시 아기를 잃었기 때문에 비탄의 빛이 절로 어렸다는 등 갖가지 설이 있지만, 화가 자신의 깊은 인간 관찰이 그처럼 복잡한 표정을 그려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 빈치'는 프랑스의 '프랑소아' 1세의 초청을 받고 갈 때 이 그림을 가져갔는데 왕은 이 그림을 사서 폰텐브로의 성에 보관했다. 그 후 수 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보존되어 오다가 지금은 파리 루불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으나 '모나리자'의 입가에는 여전히 신비로운 미소가 감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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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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