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161 호
단기 4340. 3. 29 (음력 02.1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
한 마디 |
편지에 행복을 첨부할 수 있다면 동봉하고 싶습니다.
風磬
|
|
문학소식 |
2007 창비신인문학상 작품공모
한국문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 역량있는 신예를 기다리며 본사는 신인시인상과 신인소설상 및 신인평론상을 제정, 운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부터는 신인소설상 상금을 인상 조정하였습니다. 패기있는 신인의 많은 관심과 응모를 바랍니다.
상금 700만원 응모편수 단편(원고지 100매 이내) 2편
상금 500만원 응모편수 시 5~10편
상금 500만원 응모편수 문학평론(원고지 100매 이내) 1편
마감: 2007년 8월 31일(마감일 소인 유효)
발표: 계간 『창작과비평』 2007년 겨울호(11월 20일 간행 예정), 시상 11월 말
보낼곳: 413-756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513-11 (주)창비 계간지출판부
응모 요령:
1. 우편접수만 받습니다. 2. 응모시 겉봉에 응모분야를 꼭 써주십시오. 3. 원고에 성명, 주소, 전화번호, 이메일주소를 꼭 써주십시오. 4. 응모한 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5. 원고는 가급적 A4용지에 출력하여 보내주십시오.
|
|
글터 → 명언 / 격언 |
더 많이 알면 더 많이 용서하는 법. / 캐서린 대제
|
|
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五十章 (노자 - 도덕경 : 제50장)
|
出生入死. 生之徒十有三, 死之徒十有三. 人之生, 動之死地, 亦十有三, 夫何故, 以其生生之厚. 蓋聞善攝生者, 陸行不遇시虎, 入軍不被甲兵,?無所投其角, 虎無所措其爪, 兵無所容其刃. 夫何故, 以其無死地.
출생입사. 생지도십유삼, 사지도십유삼. 인지생, 동지사지, 역십유삼. 부하고, 이기생생지후. 개문선섭생자, 육행불우시호, 입군불피갑병, 시무소투기각, 호무소조기조, 병무소용기인. 부하고, 이기무사지.
|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
쉰째 장
직역
나오는 것이 태어남이오, 들어가는 것이 죽음이다. 태어나는 무리는 열에 셋이고, 죽어가는 무리는 열에 셋이다. 사람이 태어나 죽음의 땅으로 움직이는 자 또한 열에 셋이다. 무슨 까닭인가. 그 삶을 살려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 두텁기 때문이다. 대저 듣건데 삶을 잘 다스리는 자는, 땅을 다녀도 호랑이나 코뿔소를 만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도 갑옷과 병기를 차지 않는다. 코뿔소가 그 뿔을 드러낼 바가 없고, 호랑이가 그 발톱을 내밀 곳이 없고, 병기가 그 칼날을 쓸 곳이 없다. 어째서 이런가. 그 죽음의 땅이 없기 때문이다.
해석
나오는 것이 태어남이다. 어디서 나오는 것이 태어남인가.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 태어남이다. 그리고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다. 그 근원을 노자는 도라고 부른다. 그것을 어떻게 부르든지 상관은 없다. 이 근원에서 세무리가 나오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자들또한 세무리이다. 자연계는 형평성을 가지고 있다. 한곳이 넘치면 한곳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넘치는 곳의 물이 부족한 곳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평형을 유지한다. 그리고 태어나서 삶을 살아가면서 죽음으로 향하는 자들또한 열에 셋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죽음으로 치달아 간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생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생에 매달린다. 그리고 무언인가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한다. 영구불변하는 이름을 남기고 싶어한다. 로마의 황제 네로는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기고 싶어서 로마시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기독교인에게 죄명을 씌워서 무수한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의 소원대로 그의 이름은 아직까지 기억되고 있다. 왜 이러한가. 그것은 죽음이 단지 돌아감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생의 달콤함이 너무 깊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릴 수 없다. 살아가면서 자신의 성벽을 쌓는다. 아주 두텁게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것처럼 쌓는다. 그러나 죽음은 밖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내면에서 찾아오는 것이다. 성벽을 쌓아라. 그러나 죽음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자 원문을 잘살펴 보아라. 열에 셋이 세 번나왔다. 그럼 아홉이다. 그럼 열 개중 한 개가 모자란다. 이 한 개는 무엇인가. 바로 섭생을 잘하는 자이다. 생을 다스릴줄 아는 자이다. 그는 자신이 도에서 나와서 도로 들어가야 하는 것을 안다. 그에게 죽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단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호랑이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갑옷을 걸쳐도 그것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왜 그런가. 그에게 죽음이란 없기 때문이다. 단지 도로 돌아감만 있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갈 뿐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여행자다. 도데체 어느 곳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겠는가.
|
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
50.
사는 곳으로 나가고 죽는 곳으로 들어가는 경우에 살 곳으로 가는 사람이 열 중 셋이요, 죽는 곳으로 가는 사람이 열중 셋이 된다. 그리고 삶에 집착하다가 도리어 죽을 곳으로 가는 사람이 또한 열중 셋은 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생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들으니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뭍에서는 들소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싸움터에서는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들소는 뿔로 찌르지 못하고, 호랑이는 발톱으로 할퀴지 못하며, 무기는 날을 대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에게는 죽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주
섭생: 생명을 기르고 유지하는 일, 양생과 같음. 시: 들소. 갑병: 갑옷과 무기, 병은 무기를 뜻함.
해
이 장에서 노자는 사람의 생사 문제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세상 사람중 오래 사는 사람이 열 사람중 세 사람 정도이고 사지로 가는 사람이 열 사람중 세 사람이며, 그리고 자기만은 꼭 살아야겠다고 집착하다가 도리어 죽을 길로 가는 사람이 열 사람중 세 사람은 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너무 삶에 대한 집념이 강하기 때문에 도리어 죽음의 길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명도 죽음도 다 하늘이 주신 것이며 명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산 자는 반드시 죽게 마련이므로 이와 같은 순리에 몸을 맡겨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것이라는 의연한 자세를 견지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의 정신적으로는 생사를 초월한 것이 된다. 노자는 이 장에서 "섭생을 잘하는 이는... 들소는 뿔로 찌르지 못하고 호랑이는 발톱으로 할퀴지 못하며..." 하고 신비주의적 분위기가 감도는 말을 하고 있다. 그의 이와 같은 발상은 중국의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도교의 신선 사상과 양생 술로 발전하게 된다.
|
|
|
글터 → 국사
|
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백제유적 약탈로 악명 높은 가루베
낙동강 하류와 경주 일원에서 가야고분과 신라고분이 끊임없이 도굴되고 있을 때, 부여와 공주지역에서는 또 백제고분이 같은 수난을 겪고 있었다. 말한 것도 없이 배후의 조종 및 교사자는 수집가를 자처한 돈 있는 일본인 악당과 골동상이었다. 1927년에 공주 송산리 고분들을 조사한 총독부(고적조사보고)에 당시의 도굴실태가 언급돼 있다.
"1927년 3월께 마을사람들의 도굴로 제1호분에서 곡옥·유리옥·철검·도끼 둥의 잔결이 출토됐다는데 현재 그것들은 공주 읍내의 모 일본인이 갖고 있다고 한다. 또 제2호분에서도 순금귀고리 한 쌍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지금 나이치에 있는 아무개의 소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번에 조사산 고분들은 예전에 혹은 최근에 도굴당하고 있어 발견된 부장품은 극히 적었다."
공주와 부여 일원의 백제유적이 처음으로 조사되기는 1909년에 세키노일행이 표면상 구한국 탁지부 위촉으로 한반도 전역의 고적조사를 실시할 때였다. 그들은 1915년의 두번째 학술조사 때엔 공주산성 부근에서 백제고분을 시굴하여 내부 구조도 파악하고 부장품도 꺼냈다. 우아한 문양의 백제와당이 이때 처음으로 주목되었다. 일본인 골동상과 악질적인 도굴꾼들에겐 모두가 고맙기 짝이 없는조사 정보들이었다. 그들은 또 하나의 지하보고에 눈독을 들이고 암암리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1923년 6월 공주고등보통학교 동북쪽에서 배수로 공사가 착수됐을 때 땅속의 약 1.5m 지점에 약 100여 장이 전돌을 쌓아 우물처럼 만든 속에 토기 항아리 하나가 들어 있는 신비로운 백제 유구가 발견되었다. 그때 재빨리 그 전돌들과 토기 항아리를 가로챈 자가 있었는데 그가 일본인 골동상 구라모토였다. 진작부터 공주에 정착하여 백제유물의 약탈 및 도굴품을 서울과기타 지역으로 전매하던 구라모토는 측면에 장식적인 문양과 문자가 나타나 있는 전돌들을 불법적으로 독점한 뒤, 서로 긴밀한 일당이었던 서울의 골동상 아미이케에게 내밀히 연락을 취했다. 구라모토의 연락을 받은 아마이케는 당장 공주로 달려 갔다. 그는 약 100여 장의 전돌 가운데서 장식문양과 문자가 들어 있는, 곧 갑이 많이 나갈 10여 장을 골라 잡고 서울로 올아갔다. 그리고 그는 그중의 8장을 즉각 총독부박물관에 팔아넘겼다. 나머지는 당시 서울 남대문로 3가에서 '조선고미술 공예품 진열관' 이란 간판을 걸고 있던 대규모의 고미술상 도미다에게 들어갔다. 세키노 박사가 총독부박물관에 팔린 공주 출토의 진기한 백제 전돌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깜짝 놀란 것은 10월의 일이었다. 그는 박물관측으로부터 "서울의 골동상 아마이케에게 샀는데 출토지는 공주란다" 라는 말을 듣고는 즉시 현지조사를 떠났다. 그러나 공주에 도착하여 문제의 전돌과 토기를 불법으로 점유했다가 팔아먹은 골동상 구라모토를 찾아 나머지를 보여달라고 했던 그는 또 한번 놀랐다. 같은 날, 세키노를 한발짝 앞질러 공주로 달려온 아마이케가 전에 고르고 남겨놓았던 전돌들을 깨진 조각까지도 몽땅 묶어가버렸던 것이다. 눈치 빠른 골동상의 무법의 매점 행위였다. 어디서나 출토유물을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그것들을 암거래하여 치부하는 자는 모두가 일본인들이었다. 공주에서는 1920년에 이미 송산리고분의 1호에서 5호까지가 깡그리 도굴되고 있었다. 그렇듯 고분 속의 모조리 약탈된 후, 5호 고분의 텅 빈 현실에는 당시의 마코라는 일제 담뱃갑 하나가 남겨져 있어 도굴꾼의 여유작작했던 범행을 말해주고 있었다(현장을 목격한 공주 고인의 증언). 1926년 8월에 개최되었던 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회의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유래, 조선에서는 고분은 선조의 영역으로 신성시하였고, 그 부장품과 같은 것에 손을 대는 일도 있을 수 없었다. 타인이 그것을 파괴하는 것도 고래로 대죄로 여겼다. 따라서 본부(총독부의)의 학술적 조사 때에도 지방민(현지 주민)의 반감을 초래한 적조차 있었다."
이 무렵 공주에는 중학교 교사로서 백제고분을 연구한답시고 여우처럼 부장품을 파먹은, 참으로 악질적인 일본인이 등장하고 있었다. 가루베, 1945년에 일제 패망과 함께 한 트럭 분량의 백제유물 컬렉션을 갖고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간 후, (백제미술)(백제유적의 연구) 등의 저서를 출판하여 백제통을 자처했던 인물이다. 지금도 공주에 가면 지난날의 그의 고분 도굴 사실과 악질적인 유물수집의 내막을 잊지 못하고 분개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주 나쁜 놈이었다. 연전에 송산리에서 무령왕릉이 기적적으로 발견되어 그속에서 수천 점의 부장품이 쏟아져나와 국내외에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소개되었지만 바로 그 앞 왼쪽으로 붙어 있던 제6호분을 완전히 파먹은 자가 바로 가루베였다는 사실은 여러 증거로써 이미 명백히 입증돼 있다. 공주 시민이 잊지 못할 최고로 악질적인 도굴꾼이요, 유물 약탈자였다. 당시 같은 일본인 사회에서도 그 자는 용서할 수 없는 못된 자로서 말해졌을 정도다."
이는 공주의 여러 증언자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그토록 악명높은 가루베가 처음으로 조선에 발을 디딘 것은 1924년이었다. 그는 공주고등보통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10여 년 재직했다. 그동안 그는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백제유물을 수집 혹은 도굴했다. 그는 백제문화를 연구한답시고 심지어 학생들까지 동원했었고, 유적지를 알아 오는 일과 유물 수집을 숙제로 내주는 일조차 있었다 한다. 뒤에 알려진 바로는 그는 부산의 일본인 골동상과 늘 연락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또 교토에서 골동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1927년에 송산리 제1호 고분에서 도굴된 유물들이 공주 읍내의 모 일본인에게 들어가 있다는 당시의 총독부 (고적조사보고)의 도굴품 소장자가 가루베였을 가능성도 있다. 가루베 자신은 어떤 글에서도 그의 도굴품에 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으나 불상을 입수했던 일은 약간 밝히고 있다. 공주읍 부근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상'(높이 약 7cm)과 이인면 목동리 부근에서 출토된 '동조보살상'(높이 약 18.2cm), 그리고 부여군 규암면 내리에서 출토된 '금동협시보살상'(높이 약 5.7cm)등이다. 그보다도 가루베는 송산리 제6호분의 단독 도굴과 부장품의 독점적인 약탈에서 최고의 악명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1933년의 일이었다. 여러 증언을 종합하면 그는 제5호 고분 바로 옆에 위치하는 제6호분을 연도 입구의 천장께에서 곧바로 파들어가서 모든 부장품을 깨끗이 약탈해먹은 것이 확실하다. 어떤 증언자는 그가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개를 집어넣었다는 내막까지 말하고 있다. "당시 나이 서른 안팎이었던 가루베는 중학교 교사의 탈을 쓴 천하의 고얀 놈이었다" 고 공주의 증언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제가 도굴해놓고도 그 사실을 공주경찰서에 신고하여 완전범죄를 꾀했을 정도로 대담했다. 공주경찰서의 보고를 받고 현장에 급히 내려갔던 총독부박물관 촉탁 고이즈미(뒤에 평양박물관 역임)는 뒷날 "그것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벌써 "저 가루베가 아무래도 수상쩍다" 는 말이 나돌았는가 함은 얼마 후에는 일본인 수집가들 사이에서 "가루베 자식, 이번에 한 20만 원 벌었을 거야" 하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었다고 한다. 논 상답 한 마지기에 70∼80원 할 때 20만 원이라면 그때 가루베가 도굴해 먹은 송산리 제6호분의 유물 내막이 어느 정도였을까가 어림된다. 전문가들은 1971년에 무령왕릉에서 나온 부장품을 염두에 두고 상상할 수 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가루베는 공주에서 강경의 중학교로 전근해 가서 이번엔 호남 일대의 유적을 조사·연구한다고 유물을 수집 혹은 탈취하다가 일제 패망의 8·15해방을 맞았는데, 그 겨를에도 그는 그의 온갖 불법행위를 컬렉션을 모조리 일본으로 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송산리 고분 전경]
8.15 직후, 가루베는 강경에서 트럭 1대에다 그의 컬렉션을 몽땅 싣고 재빨리 대구로 도망쳤다. 대구에서 같은 악당이었던 오구라와 합류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으로의 비밀 반출 루트를 물색할 수 있었다. 해방과 함께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으로 취임했던 유시종 관장이 미군정청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간 가루베에게 과거의 컬렉션을 어떻게 했느냐고 문의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화신이 "공주박물관에 모두 갖다놓고 왔다" 는 것이었다. 뻔뻔스런 거짓말이었다. 유관장은 공주지구 미군정관과 함께 강경까지 가서 가루베가 살던 집도 뒤져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
|
|
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신유학이란 무엇인가
6. 왕수인과 신유학
왕수인은 육구연이 제창하였던 심학적 입장을 자기 학문의 토대로 삼았다. 이 때문에 흔히 육구연과 왕수인의 사상을 하나로 묶어서 육왕학 또는 육왕 심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정이와 주희의 사상을 묶어서 정주학이라 부르는 것과 대비된다. 그러면 주희 계열의 학문과 왕수인 계열의 학문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첫째, 주희 계열에서는 성품이 곧 이라고 말하는 데 반해, 왕수인 계열에서는 마음이 곧 이치라고 말한다. 둘째, 주희 계열에서는 객관 사물 속에도 있다고 말하는데, 왕수인 계열에서는 이치는 마음이 사물을 인식하는 작용을 통하여 드러난다고 말한다. 셋째, 학문하는 방법에서 주희 계열에서는 덕성을 함양하는 존덕성 공부와 아울러 지식을 추구하는 도문학 공부를 똑같이 중시하는 데 반해, 왕수인 계열에서는 존덕성 공부만을 중시한다. 넷째, 주희 계열에서는 지식과 행위를 일단 구분한 뒤 이 양자의 합일을 추구하는 데 반해, 왕수인 계열에서는 지식과 행위는 애당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들만 가지고는 왕수인이 육구연의 심학을 받아들여 발전시켜야만 했던 필연적인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 필연성을 살피기 위해서는 다시 시대적인 문맥을 찾아보아야 한다. 주희 계열의 학풍이 이미 화석화되어 시대 사조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왕수인은 주희의 학문이 추상적인 이치 안에 숨어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기를 상실하고 말았으며, 지식을 중시한 나머지 진실한 수양과 노력의 측면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살아 있는 인간의 마음과 행위, 지식, 이치 등을 일체로 간주하는 심학 체계를 구축해 냈던 것이다. 송학이 주희로 대표된다면, 명학은 왕수인으로 대표된다. 왕수인의 후예들은 왕수인이 언급한 '사구교'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좌파, 우파 등으로 나누어진다. 한편 이들은 양지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현성파, 귀적파, 수증파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이 중 좌파에 해당하는 현성파는 돈오적 문맥에서 양지를 자연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발현이라고 받아들이는 계열이다. 명 말에 이르기까지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 주는 것이 이 현성파이다. 현성파의 한 갈래에 서 있는 왕간은 태주 학파를 개창하는데, 이 계열에서는 도덕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러한 측면은 이지에 이르면 극단적인 양상을 드러낸다.
송명 시대 신유학은 지식과 사상을 통하여 인간과 사회를 지도해 나가고자 한 지식인의 의지를 바탕으로 전개된 유학의 한 형태였다. 그러한 점에서 신유학은 유학의 건강한 측면을 드러낸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실제로 신유학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느냐 하는 논의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신유학도 그 형식을 완성하여 한 시대의 의식을 대변하는 학문 체계로 굳어진 다음에는 화석화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측면은 비단 신유학에서만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모든 사상은 처음에는 인간 자체를 위한 발언을 하다가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옹호하는 역사의 전철을 밟게 마련이다. 그러니 만큼 여러 시대를 통하여 살아남는 것은 다만 어떤 사상을 배태하기까지의 내적인 고뇌와 그 고뇌를 촉발시키던 건강한 양심일 뿐이고, 그 고뇌의 구체적 결과로서 표현되는 사상은 항상 그것의 껍질로서 역사의 부침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천둥벌거숭이
본뜻 : 천둥이 치는데도 무서운 줄 모르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빨간 잠자리를 천둥벌거숭이라고 한다.
바뀐 뜻 : 천둥벌거숭이 잠자리처럼 무서운 줄도 모르고 함부로 날뛰거나 어떤 일에 앞뒤 생각 없이 나서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기글" -그 아이는 나이가 그만큼이나 먹었는데도 하는 일을 보면 꼭 천둥벌거숭이란 말이야 -비록 내 자식이지만 뭣도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 같아서 바깥에 내보내기가 꺼려지니 선생님께서 잘 이끌어 주시고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칠칠하다
본뜻 : 채소 따위가 주접이 들지 않고 깨끗하게 잘 자랐다는 말이다.
바뀐 뜻 : 사람이나 푸성귀가 깨끗하고 싱싱하게 잘 자란 것이나, 일을 깔끔하고 민첩하게 처리하는 것 등을 모두 '칠칠하다'고 한다. 흔히 깨끗하지 못하고 자신의 몸 간수를 잘 못하는 사람이나 주접스러운 사람을 보고 '칠칠맞다'고 하는데 그것은 '칠칠치 않다' '칠칠치 못하다'라고 써야 한다.
"보기글" -텃밭에 심은 시금치가 칠칠하게 아주 잘 자랐어요 -그 사람은 무슨 일을 시켜도 칠칠하게 해내니 믿고 맡길 수가 있다구
|
|
|
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자유여, 그대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던가?
프랑스혁명 때 정치의 중심은 물론 의회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정치의 무대는 의회보다 유명한 부인들의 살롱이었다. 의원들은 혁명 전의 습관대로 유명한 부인의 살롱에 모여들어 정치를 논했다. 살롱을 연 부인들 가운데 유명한 사람으로는 한때 혁명의 상징이었던 네케르의 딸 스탈 부인, 과부인 도당 부인, 그리고 롤랑 부인 등이 있었다. 살롱은 저마다 정치색을 지니고 있었는데, 센강 퐁네프 근처에 있던 롤랑 부인의 살롱에는 주로 온건파인 '지롱드파'가 모여들었다. 그녀의 살롱은 지롱드파의 사령부였으며, 당연히 정치에 그녀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그녀의 남편 롤랑은 공화국에서 내무장관을 지냈고 그녀보다 스무 살이나 연상이었지만, "내무장관은 롤랑이 아니라 롤랑 부인이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롤랑은 성실하긴 했지만 판단력이 부족하여 혁명과 같은 시기에 정치를 하기에 부족했다. 그러나 롤랑 부인은 어려서부터 성경보다는 영웅전을 애독할 만큼 개방적이고 대담했다. 지방의 정치가였던 롤랑이 혁명을 맞이하여 출세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녀의 덕분이었다. 루소의 작품을 애독하는 정열적인 민주주의자였던 그녀는 1780년 롤랑을 만났고 신성한 계몽주의자들의 모임에 참여하고 싶어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그와 결혼했다. 젊고 아믈다웠던 그녀는 자신의 매력과 정치술을 발휘하여, 그녀의 남편을 파리로 진출시켰고 많은 지롱드당을 확보하여 '지롱드파의 하트'라고 불렸다.
당시 지롱드파와 대립하고 있던 정파는 산악파였다. 지롱드파는 지롱드 지방 출신의원들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산악파는 그들의 의석이 의회내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다고 해서 생겨난 명칭이었다. 이들 두 파는 모두 공화주의를 지향했지만 산악파가 지롱드파보다 훨씬 급진적이었다. 산악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혁명을 완수하려 한 반면, 지롱드파는 좀더 온건한 정책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들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특히 롤랑 부인은 당통이나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산악파 지도자들을 아주 미워했다. 이들은 특히 루이 16세의 처형을 둘러싸고 대결했는데, 산악파의 주장이 승리를 거두어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사라졌다. 루이 16세는 단두대 앞에서 "국민이여, 짐은 죄 없이 죽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루이 16세의 처형 이후 산악파는 지롱드파를 누르고 공포정치를 감행했다. 롤랑 부인은 "민중이 빵을 요구하면 시체를 주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던 시기가 바로 오고야 말았다."고 말했는데, 바로 그런 시기였다. 공포정치 아래에서 혁명재판소는 수많은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냈다. 새로 발명된 단두대는 사용하기도 간편했고 미덕의 재단이었다. 먼저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했다. 그 다음 차례는 정적이었던 지롱드파였다. 지롱드파의 후원자였던 롤랑 부인도 결국 단두대에 섰다. 도망중인 남편을 대신해서 롤랑 부인은 처형 판결을 받았다. 그래도 그녀는 의연한 태도로 단두대 옆에 있는 거대한 자유의 여신상을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오, 자유여! 그대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던가?" 그녀는 자유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의 피를 뿌리게 하는 공포정치를 경고하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인 롤랑은 도망중에 아내의 처형 소식을 듣자 루앙 근처의 길가에서 자살했다. 부인에게 많은 것을 의지했던 그로서는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 이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자살을 택한 것은 모든 것을 의지했던 부인을 잃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살이 아니고 단두대에서 처형될 경우 남은 재산이 딸에게 돌아가지 않고 혁명정부에 몰수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
|
|
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빈 껍질 같은 시간들
당신은 지금 병석에 누워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교통사고로 인하여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누워 있습니다. 전화로 그 소식을 듣고,나는 마치 나를 얽어매고 있던 질긴 끈이 단숨에 끊기어 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신과 만나면서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이 바로 당신이 건강을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신이 고통 당하는 것이 내게 주는 괴로움이나 안쓰러움도 견딜 수 없는 일이지만, 그보다 괴로운 일은 당신이 완쾌할 때까지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건강을 잃고 나면, 아무리 높은 뜻,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할 능력이 없어집니다. 건강은 곧 자유의 원천이며, 건강을 잃는 것은 자유를 상실한다는 뜻과 동일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며, 자리에 누운 채 공상과 안타까움으로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당신과 나와 같은 관계의 연인 사이에서 당신의 병은 곧 우리의 만남을 단절시키는 일입니다. 당신 곁에서 당신을 간호하고 돌보아 드리고 싶은 나의 소박한 희망은 다만 상상 속에서만 허락될 뿐입니다. 당신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보살핌과 관심 속에서 당신의 병을 치유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라고 굳게 믿어 왔던 나의 생각이 결국 완전한 착각에 불과하다는 확인이 뚜렷한 절망으로 와 닿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벽의 두께가 얼마나 두터운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고,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속으로 빠진 채 나는, 이 엄연한 현실을 인식하기 위하여 몇 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벨라르.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머리와 가슴으로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정열을 태우는 것이 사랑일까요! 그것은 다만 관념적인 사랑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뿌리 내리지 못하고 안개처럼 떠도는, 비실질적이고 허황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지불하고 노력하며 자아를 희생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고통을 통하여 서로 결속하고, 그 고통을 함께 뛰어넘는 것, 서로가 서로를 위해 괴로움을 참고 견디는 일, 또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고 보호하는 행위, 바로 이러한 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닐까요? 감미롭고 열정적인 사랑의 첫단계를 지나고 나면, 두 사람은 서로 익숙하게 길들여지고, 상대의 아픔이나 결함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느껴지고, 그를 위해서는 온갖 더러움이나 치졸함마저 스스럼없이 거두어 주는 자세, 이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요? 그러나 나의 사랑은 당신을 위해 무엇인가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일을 해 보고 싶은 기회마저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앓아 누워 외롭고 불편할 때 내가 곁에서 당신을 보살펴 주고, 아픈 상처를 간호하며 또 당신께 음식물을 떠 넣어 주면서 당신의 고통을 나눌 수가 있다면, 그래야만 마땅히 나는 진정한 `당신의 여자`가 될 수 있는데, 또 이렇게 간구하는데도, 당신의 고통과는 먼 자리에 떨어져 앉아 나는 하릴없는 근심과 안타까움만 지니고 있을 뿐이며, 초라하고 빈 껍질 같은 시간들을 소모하고만 있습니다. 당신에게 있어서 나란, 나의 존재나 비중이란, 이렇게도 하잘것 없고 무용한 것이라는 생각에 참담하고 비통해져서 나는 나 자신을 가눌 수조차 없습니다.
아벨라르. 나는 갑자기 우리의 사랑에 대해 짙은 회의와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 이상은 절대로 좁혀질 수 없는 거리, 이 이상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시간이 견고한 문이 되어 내가 보는 앞에서 둔중한 소리를 내며, 결코 두번 다시 열리지 않을 듯 완전하게 닫혀 버린 것 같은 이 절망감은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공포감으로 나를 떨리게 합니다. 물론 나는 당신을 사랑하면서부터 이미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하여 절망했었고, 그 이후로도 줄곧 그 절망을 인식하면서 당신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마음 속에서 이상하게도 그 절망의 인식은 점차 엷어지기 시작했고, 현실을 뛰어넘는 이 고귀한 영혼의 사랑이 너무나 아름답고 진실하게 여겨져 어떤 의미로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값지며 영원할 수 있다고도 생각해 왔었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면서 나는 우리의 사랑을 미화하고, 경건한 자리로 끌어올리려 했고, 또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당신이 건강을 상하여, 나와는 별개의 공간에서, 다른이의 보살핌 속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구체적인 상황에 맞닥뜨리자, 말이나 생각으로만 아름답게 채색하여 높은 자리에 올려놓은 나의 사랑의 초라함과 무용한 역할에 대하여 나는 실의에 빠지고 좌절당한 느낌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자신이 이렇게 초라하게 보이고 이렇게 미미한 존재로 생각되어, 어디 숨을 곳이 있다면 깊이 내 몸을 감추어 이 부끄럽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떠나 버리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벨라르. 이 고통마저도 나의 욕심에서 비롯한 것일까요? 다른 사람의 손에 당신을 맡기고 싶지 않은 나의 이 심정은 유치하고 무분별한 나의 욕심일까요? “사랑하면서도 또한 현명해지려는 것은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신만이 비로소 겸할 수 있는 일이다”라고 말한 셰익스피어는 참으로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잘 꿰뚫어 보았습니다.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은 결코 현명해질 수 없습니다. 우둔하고 유치하며 단순한 감정의 상태로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모든 이성과 지성을 팽개치고 오직 당신에게로 향한 외골수의 감정에만 사로잡혀 욕심과 고통으로 단금질 당하고 있는 것도, 결코 현명하고 이성적으로 될 수 없는 사랑의 단순성 때문입니다. 부디 몸 조심하세요. 하루라도 빨리 완쾌하여 당신 특유의 다정하게 웃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습니다.
|
|
|
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찬란한 여명 그리고 선각자의 고독
김옥균의 암살
역사는 픽션보다 더 진하고 강한 드라마를 잉태하면서 미래를 향해 줄기차게 흘러간다. 나는 평생을 픽션의 이치와 효용의 방법을 몸에 익히면서 살아온 극작가의 한 사람이지만, 역사가 빚어내는 절묘한 사실이 픽션의 위력을 훨씬 넘어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수없이 체험하게 되면서 극작가의 능력에 한계를 느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역사의 흐름에도 법도가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는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를 관장하는 신은 언제나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나를 감시하고 있으며, 나는 기꺼이 그의 감시하에 들기를 원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개화 2세대들에 의해 주도된 '갑신정변'은 비록 실패로 끝난 쿠데타였지만,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연출한 열정의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갑신정변'에는 픽션 작가의 능력을 비웃으면서 고조되는 서스펜스가 있는가 하면, 드라마의 법칙이랄 수 있는 기승전결의 흐름을 빈틈없이 진행하면서도 극의 상승과 하강 그리고 반전까지도 완벽하게 갖추고 있기에 픽션의 한계를 넘어선 한 편의 명작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고종 21년 10월 17일 유시. 우정국 청사의 낙성을 기념하는 성대한 연회가 시작되면 안동에 있는 별궁이 방화로 인해 화마에 휩쓸리게 되고, 이를 신호로 연회장에 참석한 수구세력들을 차례로 참살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시간이 되어도 안동별궁에서의 방화가 여의치 않게 되자 이에 당황한 김옥균, 박영효 등 정변의 주도세력들은 연회장 근처의 초가집에 불을 지르면서 민영익의 몸뚱이를 난자하는 것으로 불안한 출발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허둥지둥 창덕궁으로 달려간 정변의 주도세력들은 고종과 중전민씨를 비롯한 왕실의 윗전들을 경우궁으로 이어하게 하면서 일본군의 호위를 왕명으로 요청한다. 일본공사 다케조에와 그렇게 약속한 때문이었다. 일본군이 출동하여 경우궁을 호위하는 것이 청나라의 병진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정국의 연회장에서 민영익이 피습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청나라 진영의 원세개는 중전 민씨와의 접촉을 시도하면서 일본군을 섬멸할 작전수립에 임한다. 이때 이미 '갑신정변'의 양상은 일본공사관과 청나라 군진간의 대립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10월 18일. 김옥균 박영효 등은 고종의 탑전에 나아가 지난밤 민영익, 민영욱, 민태호, 조영하 등을 참살하게 된 불가피함을 고하면서 새로운 내각을 임명하여 조정의 면모를 일신할 것을 강요, 조각의 내용을 공표하였다. 그리고 조정이 일신되었음을 알리는 이른바 '신정강' 14조를 발표하였으나, 일시에 혈족을 잃은 중전 민씨는 창덕궁으로 환궁할 것을 강청하면서 청나라 군진에도 도움을 청한다. 일본군과 청나라 병사들의 충돌이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긴박한 사정이었다. 고종은 창덕궁으로 환궁하자는 중전 민씨의 강청을 뿌리칠 수가 없었기에 김옥균, 박영효 등을 설득하여 우선 계동궁으로의 이어를 서둔다. 계동궁은 신정부의 영의정에 제수된 이재원의 집이었다. 계동궁으로의 이어를 마치자, 중전 민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창덕궁으로의 환궁을 다시 강청하고 나선다. 계동궁이나 경우궁이 모두 협소하여 불편하기가 다를 바 없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에 있어서는 2백여 명의 일본군으로는 창덕궁을 수비하기가 어려울 것이나, 1천 5백여 명의 청나라 병사들은 진격하기가 쉬울 것임을 중전 민씨는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본군의 선발대가 먼저 창덕궁으로 떠나고, 고종의 어가를 호위하기 위한 1백여 명의 전영군과 나머지 일본군이 전열을 가다듬는 와중에서 중전 민씨는 청군의 출병을 청하는 서찰을 적어 심상훈에게 건넸다. 마침내 운명의 날인 10월 19일. 창덕궁은 아침부터 초연 속에 묻혔다. 청나라 병사 1천 5백여 명이 화력을 앞세우며 창덕궁으로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중과부적이었던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쿠데타를 주도했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은 고종 임금을 모시고 옥류천으로 피했으나 여기서 대왕대비를 비롯한 중전 민씨의 일행이 북묘로 피했다는 보고를 듣고 아연실색하게 된다. 고종의 어가가 위험을 피해 다시 옥류천 뒤의 북장문으로 옮겨졌을 때, 청군과의 접전을 포기한 일본군의 패잔병과 공사 다케조에가 달려왔다. 이젠 마지막 대책을 논의할 수밖에 없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강화도로 몽진할 것을 눈물로 간청하였고, 고종은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전황을 불리하게 느낀 다케조에 공사는 정변의 주역들에게 피신처를 제공할 것을 약속한다. "전하!" 누군가가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하자 고종의 용안도 물기에 젖었다. 통한의 작별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제 고종의 타전을 떠나면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을 것이지만,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다케조에 공사를 따라 일본공사관으로 피신하기로 하였고, 홍영식과 박영교는 궁원에 남아서 신하된 도리를 다하기로 하였다. 떠나가는 김옥균 등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고종의 어가가 청나라 병진으로 떠나가자, 20여 명의 조선 무감들이 홍영식과 박영교에게 달려들어 매질로 목숨을 앗아냈고, 자식이 개화당의 수괴였음을 알게 된 영돈녕부사 홍순목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종사에 속죄하는 결연한 최후를 마친다.
근대화된 새로운 국가를 세워서 세계의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하였던 '갑신정변'이 이렇게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게 되자, 김옥균, 박영효 등에게 개항사상을 가르쳤던 백의정승 유홍기도 행방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이날 이후 유홍기를 만났다는 사람은 아직 없고, 그의 최후를 적은 기록이 없는 것도 후학의 마음을 저리게 하지만, '갑신정변'의 후유증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만큼 길고 잔혹하게 이어지게 된다.
일본군 병사들에게 호위된 다케조에 공사와 김옥균 등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간신히 일본공사관에 당도하였으나, 거기도 이미 난장판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공사관 직원들의 가족과 거류민 3백여 명이 몰려와서 북적대고 있었고, 분노한 조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으로 달려와 투석, 방화를 자행하면서 충동을 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당황한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일단 인천으로 철수하여 기회를 보리라고 다짐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에게 공사관 직원들이 입던 양복을 건네 주며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일본인들에게 섞여서 일본 공사관을 빠져 나가자고 한다. 거절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오후 2시, 공사관의 대문이 열리면서 1백여 명의 일본군 병사들이 허공을 향해 총격을 시작하면서 철수작전을 강행하였고, 이들이 인천항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인 21일 새벽이었다. 이들을 피신케 할 일본 선박 치도세마루는 이미 제물포항에 입항해 있었다. 인천에서의 사정도 이들에게는 여의치가 않았다. 조선 조정에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을 비롯하여 이미 죽고 없는 홍영식을 오적으로 규정하고, 조병호, 홍순학, 독일인 뮐렌도르프를 인천에 급파하여 다케조에 공사를 윽박지르며 그들의 인도를 요구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조선국의 역적이다. 지체없이 우리에게 인도하라!" 이에 당황한 다케조에 공사는 김옥균, 박영효 등에게 하선, 자수해 줄 것을 청하면서 그것이 곤경에 처해진 일본국과 자신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강변했다. 배신도 이만저만이 아닌, 교활하고 파렴치하기까지 한 태도의 돌변이었다. 김옥균, 박영호 등은 울분을 삼키며 애원하였다. 여기서 하선하게 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케조에 공사는 이미 조선의 고관에게 인도를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이 절대절명의 순간에 구원의 손길이 뻗쳤다. 치토세마루의 선장인 쓰지 가쓰사부로가 다케조에 공사의 파렴치한 행태를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선장의 권한으로 승선을 허락하며, 안전을 책임질 것이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조선의 개화를 주도하였던 젊은 준재들은 치토세마루의 선저에 몸을 숨긴 채 언제 다시 돌아올 지도 모르는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된다. 대역부도의 죄인으로 몰렸던 개혁파 인사들이 일본국으로 도주하자 조선 조정은 그들의 가족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김옥균의 아내 유씨 부인은 30대의 젊은 나이로 충청도로 끌려가 관비 생활을 해야 하는 딱한 처지가 되고야 만다. "조선의 비극"을 쓴 맥켄지는 삼일천하로 끝나고 만 갑신정변이 실패하게 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소동 전체가 개혁파의 성급하고도 무분별한 처사 때문이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너무나도 짧은 시간 내에 너무나도 많은 일을 성취하려 했고, 그와 마찬가지로 경험이 부족한 일본인 협력자들도 그들을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일을 서두르게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어느 쪽에 있어서도 개운치 않은 일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중국과 일본의 압력을 격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조선국 내의 중국파 즉 수구파의 세력을 증대케 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 당시 중국은 아직 보수적이었고, 그리하여 참다운 개혁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훨씬 뒤의 일이었다.
|
|
|
글터 → 이글저글 |
메이플라워의 맹세
메이플라워는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미대륙으로 건너갈 때 타고 간 배의 이름. 당시 영국에서는 청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일부 청교도들은 '네델란드'로 피신, 그곳에서 '스피드웰'호를 타고 미대륙으로 향했다. '스피드웰'호는 영국을 출발한 '메이플라워'호와 만나서 함께 대서양을 항해해갔는데 도중에서 '스피드웰'호는 난파하여 침몰, 승객들은 모두 '메이플라워'호에 수용되었다. 이때 두 배의 승객들은 한 자리에 모여 상륙 후 신천지를 개척함에 있어 일치 협력하기로 맹세했다. 이것이 곧 '메이플라워의 맹세'이다. 배는 그해 12월 21일 당초의 목적지인 '버지니아'보다 훨씬 북쪽인 '프리마스' 항구에 도착했다. 이때 상륙한 일단의 신교도들을 '필그림 파더즈'라고 한다. 그들의 용감한 정신은 미국의 개척사에 맥맥히 흐르고 있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