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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60 호
단기 4340. 3. 28 (음력 02.1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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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편지에 행복을 첨부할 수 있다면 동봉하고 싶습니다.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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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공모
한국문학의 흐름을 이끌어온 창비에서 우리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갈 장편소설을 공모합니다. 참신한 상상력과 힘찬 서사로 침체된 한국소설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킬 작품을 고대합니다. 미등단 예비작가는 물론 기성작가에도 문호를 열어놓으니 많은 관심과 응모 바랍니다.
마감 2007년 9월 30일
분량 단행본 1권 분량(200자 원고지 800매 내외)
고료 3천만원
응모자격 신인 및 기성작가 제한 없음.
발표 2007년 11월 15일 본사 홈페이지(www.changbi.com) 및 계간『창작과비평』 2007년 겨울호 (입상자에게는 개별 통지)
시상 2007년 11월말
보낼곳 413-832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파주출판도시 513-11 (주)창비 문학출판부
기타 1. 수상작은 단행본으로 출간합니다. 2. 출간후 고료를 웃도는 인세(정가의 10%)가 발생할 경우 초과분의 인세를 지급합니다. 3. 응모시 겉봉에 ‘장편소설상 응모작’이라고 명기하고, 원고에 성명, 주소, 전화번호를 꼭 써주십시오. 4. 응모한 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5. 마감일 소인이 찍힌 작품까지 유효하고 우편접수만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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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대화를 잘하는 으뜸가는 비결은 다음 어떤 말이 나올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 /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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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四十九章 (노자 - 도덕경 : 제4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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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 德善. 信者吾信之. 不信者吾亦信之. 德信. 聖人在天下, ??爲天下渾其心, 聖人皆孩之.
성인무상심, 이백성심위심, 신자오신지, 불신자오역신지. 덕신. 선자오선지. 불선자오역선지. 덕선. 성인재천하, 흡흡위천하혼기심. 성인개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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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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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아홉째장
직역
성인은 항상된 마음이 없다. 백가지 성의 마음들을 마음으로 삼을 뿐이다. 좋은 사람은 나도 그를 좋게 해주고, 좋지 못한 사람이라도 나는 또한 그를 좋게 해준다. 좋음이 얻어진다. 믿을 만한자는 나도 그를 믿고, 믿지 못하는 자라고 해도 나는 또한 그를 믿는다. 믿음이 얻어진다. 성인이 천하에 있을 때 화해롭다. 하늘 아래에 그 마음을 혼돈되이 한다. 백가지 성의 사람들 모두 그 귀와 눈을 주목한다. 성인은 모두 그들을 어린아이로 만든다.
해석
성인은 자신의 고정관념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백가지 성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말을 한다. 자신들의 이익이나 권리를 주장한다. 이때에 지도자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그들의 말을 공평하게 들을 수 없다. 고정관념을 가지고 들으면 치우치게 된다. 그것은 분열을 가지고 온다. 공평하게 듣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을 가져서는 안된다. 지금의 법관들이 가져야될 자세이다. 어떤 사람을 죄인이라고 생각을 하고 바라보면 그의 죄상만 보게 될 것이다. 그의 일부분을 보고 그를 평가한다. 이것은 좋지 않은 자세이다.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게 자신의 마음을 열어놓아라.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자신또한 그를 좋게 보고, 다른 사람이 그를 좋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는 좋게 본다. 처음부터 선입관을 가지고 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말에 가려서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사람의 단면만 보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선입관을 가지고 보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중간자이다. 다리이다. 두 개의 분열된 집단이 있다. 그들은 서로를 적대시 한다. 그때 성인은 다리를 놓는 자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서로에게 서로의 입장을 전달 할 수 있는 것이다. 극단에 이른 서로의 마음을 성인은 화해시키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신의 마음은 혼돈스러운 것이다. 혼돈이란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선입관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자세로 사람을 대하면 모든 사람과 말이 통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차츰 그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그를 주시한다. 왜냐하면 그야 말로 선입관을 가지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같이 이야기 할 수 있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이때 성인은 이들을 어린아이로 만든다. 어린아이는 어떤 상태인가. 선입관을 가지지 않은 혼돈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성인은 이들에게서 선입관을 배제시킨다. 선입관이 사라진 상태를 노자는 어린아이로 표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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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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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성인에게는 일정 불변한 마음이 없으므로, 천하 만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착한 사람을 나는 착하게 대한다. 착하지 못한 사람도 나는 착하게 대한다. 그렇게 하면 모두 덕과 착함을 갖추게 된다. 믿음성이 있는 사람을 나는 믿음으로 대한다. 믿음성이 없는 사람도 나는 믿음으로 대한다. 그렇게 하면 모두 덕과 믿음성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성인은 천하에 대하여 자신의 집착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천하의 마음과 혼연일체케 한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의 귀와 눈은 성인에게 쏠린다.
주
상심: 고정된 마음, 집념, 일정 불변한 마음, 아집. 덕선, 덕신: 성인은 착한 사람이나 착하지 않은 사람이나 다 선의로 대한다. 그의 무차별한 덕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선하고 믿음성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흡흡: 마음을 비우고 아집을 버린 상태. 이런 상태에서는 천하의 모든 것을 차별 없이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흔기심: 천하 만민과 혼연일체된 마음. 선악에 의한 애증도 친소에 의한 차별도 모두 초월하여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선의로 대하는 마음을 뜻함. 주기이목: 이 세상 모든 백성들이 성인의 선의와 포용력을 알고 그에게 관심을 쏟는다는 뜻임. 해지: 어린아이로 대우한다. 무지, 무욕의 순진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한다는 뜻임[왕필의 주석 참조]
해
성인에게는 고정된 마음이 없다. 아집과 편견과 선입관을 그는 일찌감치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만백성의 마음을 살펴 그것을 자신의 마음으로 한다. 성인은 선한 사람도 선하지 못한 사람도 다 선의로 차별 없이 대우한다. 성인은 도를 체득한 사람이다. 도의 초월적인 입장에서 보면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인간의 상대적 가치 판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도는 이와 같은 세속적 가치판단에 대아여 중립이다. 도와 하나가 된 성인이 임금이 되어 이 세상을 다스릴 때 자신의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이 세상의 만백성의 마음과 혼연일체가 된다. 그는 선인도 불선인도 신의가 있는 사람도 신의가 없는 사람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우한다. 백성들은 자연히 임금의 거동에 관심을 쏟게 된다. 성인은 천하 만백성을 무지 무욕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보살펴 준다. 이렇게 성인은 차별 없이 덕을 만백성에게 골고루 베풀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늘의 이법이 선한 사람의 밭에도 선하지 못한 사람의 밭에도 골고루 단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하늘의 이법에 사사로운 친소, 후박, 애증이 없듯이 성인의 덕화도 만백성에게 차별 없이 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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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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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신라고분의 황금유물에 미친 무법자들
경주 일원의 신라고분들도 낙동강 하류 일대의 가야고분과 마찬가지로 최악의 수난을 겪었다. 순금의 왕관·팔지·귀고리를 비롯한 1천 수백 년 전의 고귀한 미술품과 값진 유물이 무진장 부장 돼 있던 신라고분들은 가야고분과 함께 일본에서 맨손으로 건너온 무법의 보물 약탈자들에게 입이 벌어지는 일확천금의 광대한 지하보고였다. 일제 초기의 한 조사기록은 경주 부근에서만도 수만 기의 삼국시대 신라고분들이 있었다고 조사돼 있다. 1915년네는 총독부 위촉으로 최초의 학술적 조사발굴이 경주 남산 밖의 황남리고분에서 이루어져 철검·철창, 기타 토기들을 출토시켰다. 같은 때 보문리에서도 또 하나의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서는 순금으로 된 팔찌·귀고리·반지가 발견되었다. 뒤에 이 고분은 '부부총' 으로 명명되었다. 이어서 1918년에는 경주 동쪽의 명활산 기슭에 있는 고분이 조사·발굴되었는데 여기서도 순금 귀고리, 금·은 팔지와 반지, 기타 옥류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신라고분의 놀라운 부장품 내막은 소위 학술적 발굴이라는 이름의 합법적 고분 파괴자들에 의해 갈수록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동시에 그 내막은 경주지역에서 일확천금의 유물 약탈을 노리던 도굴꾼들에겐 더욱 풍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결과를 빚었다. 무법자들을 신라고분의 황금유물에 미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은 1921년에 경주 남문 밖의 파괴된 커다란 고분 속에서 황금보관을 위시해서 역시 순금으로 된 귀고리·팔지·반지·과대·요패·은합 등이 쏟아져 나왔을 때였다. 뒤에 금관총으로 명명된 이 고분의 출토유물들은 신라미술의 극치를 집중적으로 입증시키기에 족했다. 이때의 출토품인 금관은 현재 국보 제87호로, 그리고 과대와 요패는 국보 제88호로 지정돼 있다. 3년 후인 1924년에도 황금보관과 귀고리·요패·도제기마인물상, 기타 주형토기 등이 부장돼 있던 금령총이 발굴되었다. 이때 출토된 금관은 현재 보물 제388호, 도제 기마인물상은 국보 제91호로 지정돼 있다. 이러한 일련의 찬란한 신라유물 발굴은 도굴꾼들의 사리심을 갈수록 자극시켰다. 1925년 4월 15일자 (경성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경주지방은 신라 천년의 구도로 세인이 알다시피 최근 수년간 고분 발굴로 귀중한 출토품이 있었고, 황금의 보관·패도, 기타 고고학상 심대한 참고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근자엔 밀굴자가 많아, 어떤 소식통을 빌면 그 상습자가 약 20명에 달하고 있으며, 그 출토품(도굴폼)은 주로 일본인 고매자(고물 매수자)가 착착 구입하여 부당한 이익을 보고 있는데, 최근의 현저한 출토품으로서 '당삼채' 와 같은 항아리를 밀굴하여 수천 원에 밀매한 자가 있으나 그 항아리 속에는 또 5개의 금자(금붙이 유물)가 들어 있어 비상히 귀중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것이 일본인 고매자에 의해 대구의 호사가에게 팔려 갔다고 하는데 그러한 부정밀굴에 대해서 당국의 엄중한 취체가 기대되고 있다."
당시 대구에는 그러한 도굴행위를 뒤에서 조종하고 혹은 직접 지원한 돈 많고 악질적인 일본인 수집가가 여럿 있었다. 오구라와 이치다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23∼1924년의 총독부 (고적조사보고)에 그들의 장물 컬렉션 일부가 소개돼 있는데 먼저 오구라에게서 전문가가 주목한 것은, 1)은제투조패식금구(완전품) 2)물고기를 물고 있는 조형토기 3)안구가 얹힌 마형토기 4)쌍배차륜토기 등으로, 출토지는 '남선(영남지역) 발견' 이라고만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치다는 역시 '남선 출토' 라는 금동관의 '조형전립금구' 와 양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변형칠유경' 등을 갖고 있었음이 밝혀져 있다. 1905년 가을에 수학여행이란 명목으로 한국에 건너와서 고대 역사유적을 답사하며 유물 실태도 조사했던 동경제국대학의 사학도 하나가 있었다. 당시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이마니시(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다. 그는 경주에 이르러 남산 쪽에서 신라시대의 와당과 토기, 기타 불상(석불이었던 듯)의 파편을 채집했고 사천왕사 근처에서는 보상화문이 나타나 있는 전과 10여 장의 와당을 주워 동경제국대학 문과대학으로 갖고 갔다고 여행기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당시의 도굴실태를 기록하고 있다.
"소생은 대형 고분 하나와 중형의 것을 몇 기쯤 조사했는데, 그중 하나는 이미 발굴(도굴)되어 내부가 교란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서는 83개의 고기(토기)가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경주의 신라고분들은 근년에 와서 한국정부의 정령문치의 결과, 소생이 여행할 당시는 도굴이 끊임없이 행애져 그 발굴품은 모두 일본인 상인의 손에 들어가고 있었다. 고분 속에서 꺼내진 유물이 부산과 대구에 나와 있어 소생은 비교적 좋은 것을 구할 수 있었다. 발견품(도굴품)은 거의 토기 뿐이지만 이 토기들은 일본의 그것과 비교하면 극히 우수한 작품이다. 소생이 여행할 당시는 고분 도굴이 성하진 않았으나 개성 부근에서의 고려시대 분묘 도굴이 크게 유행하자 그후 경주에서도 맹렬히 발굴되어 소생은 작년(1909년)에 대구에서 그런 발굴품이 고물상의 손에 적취함을 보았는데, 2∼3점의 철기 외엔 토기들이었다."
이 이마니시의 기록은 1905년 당시 이미 신라고분의 도굴이 착수되고 있었고, 출토유물들은 모조리 일본인 상인(골동항) 수중에 들어가고 있었음을 명백히 알려준다. 그리고 1909년에는 부산과 대구의 일본인 골동상이 신라와 가야고분에서 도굴한 토기와 철기들을 산적해놓고 있음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다가 총독부의 학술조사와 발굴로 촐토된 황금빛 보관·순금귀고리·팔지 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도굴은 극성기를 맞게 된 것이다. 대구에서 남선전기 사장으로 있으면서 풍부한 재력으로 마음껏 도굴품을 사들이고 또는 뒤로 돈을 주어 계속 도굴해 오도록 지원했던 악명 높은 수집가 오구라가 아주 작고 완전한 순금관을 입수한 것도 그때였다. 국보급인 이 작은 순금관은 현재 일본에서 '중요미술품' 으로 지정되어 도쿄국립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물론 소장자는 '오구라 컬렉션' 이다. 일본인 무법자들에 의한 경주지방의 유적 파괴와 고분 도굴은 일제 말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25년 8월의 일이었다. 동경제국대학 농학부의 하라라는 교수가 신라시대의 정원을 조사·연구한다고 경주를 찾아왔었다. 그는 총독부의 사전 승인도 받지 않고 현지의 고적보존회를 움직여 인부를 사서 임해전지(현재 사적 18호)의 유구를 함부로 출토시키고는 큰 발견이라고 떠들었다. 그리고는 파헤친 자리도 그대로 버려둔 채 도쿄로 돌아가버렸다. 물론 그가 빈손으로 갔을 리는 없었다. 그의 불법적인 발굴은 물론 뒷수습조차 하지 않은 그의 처사는 많은 사람의 분노를 사게 했던 듯, 총독부가 뒷조사한 보고서에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자였다. 엄중한 취체가 있어야겠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이다. 1934년 4월에는 같은 임해전지에서 또다시 매장문화재를 무더기로 도굴한 경주 거주의 일본인 무뢰한이 있었다. 다음은 그때 경주박물관이 서울 총독부박물관에 보고한 내용이다.
"최근 석빙고 근방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임해전지 부근의 토지를 발굴하여 전돌과 기와 등을 채취했음을 탐지하고, 즉시 현지 도굴상태를 조사해 본바, 도굴자는 인왕리 입구에 거주하는 하시모토라는 자로서 목하 경찰에서 취조 중임. 도굴 유물은 화강석 석재 이백 수십 개, 전돌 188개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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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신유학이란 무엇인가
5. 주희와 신유학
도학 계열은 남송 시대로 들어가면서 금의 침략 행위에 맞서 주전파와 강화파로 다시 갈라졌다. 국왕을 포함한 권신들은 주로 강화파에 속했다. 그러나 주전파든 강화파든 남송 초기의 학자들은 대부분 정호, 정이 형제, 특히 정이의 학통을 계승한 사람들이었다. 정이의 학통은 정권측에서는 남송 초기에 정권을 장악한 진회에 의하여 장려되었고, 학파적 측면에서는 양시, 윤돈, 사량좌 등에 의하여 수만은 문도들이 배출되었다. 그 후 정호, 정이의 학통은 호안국, 호굉, 장식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번성했던 정호, 정이의 학통은 마침내 주희에 의해 계승되면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주희는 양시, 나종언, 이동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며, 남송 중기의 신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남송 중기의 유학계는 동남 3현이라고 불리던 장식과 여조겸 그리고 주희로 대표된다. 장식은 호안국, 호굉 부자에 의해 개창된 호상 학파를 계승 발전시켰다. 주희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던 그의 사상은 정호의 심학적 입장과 정이의 리학적 입장이 복합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송 초기에 가장 흥성했던 호상학은 장식 이후로는 단절되고 말았다. 여조겸은 주희와 육구연의 대립 사이에서 절충적인 입장을 보였다. 특히 그는 중국의 제도와 문물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역사 연구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 때문에 여조겸의 입장은 주희에 의해 "넓지만 혼잡스럽다"는 비판을 받았다. 주희가 계승한 학통은 정호와 정이의 사상적 특징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희는 '심'속에 초월적인 '성'의 체가 존재함을 깨달은 40세 이후로는 정호의 심학보다는 정이의 리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정이는 "성품이 곧 이치이다"는 명제를 주장하여 송명 시대 신유학이 전개되는 데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낸 사람이다. 그러한 정이의 입장은 마침내 주희에게 계승되어 완정된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주희는 송대 유학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남송 중기 유학의 사상적 지평을 확장하고 제고시킨 사람이다. 주희에 의해 성리학이라고 이름 붙은 신유학의 한 형태가 일차적으로 완성을 이루게 되는데, 이후의 유학사는 주희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거나 비판 극복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유학사 속에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지대하였다.
주희는 자기 주장을 개진하는 데 적극적이었으며 이단을 배척하는 데는 단호한 면모를 보였다. 그는 논쟁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입장을 확정해 나가면서 남송 중기의 학술계를 이끌어 갔다. 그는 여조겸의 주선으로 아호사에서 육구연을 만나 학문 방법에 대한 논쟁을 벌였으며, 진량하고도 왕도와 패도, 의와 리에 관한 문제를 두고 5년 동안 논쟁을 벌였고, 육구연 형제들과 무극과 태극에 관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육구연이 주희와 같은 도학 계열에 있으면서 학문하는 방법 및 신유학적 개념에 대한 시각 차이를 드러내는 정도의 미세한 차이점을 갖는다면, 진량은 주희의 도학 계열과는 완전히 다른 의식을 가졌다. 진량은 주희와 달리 왕도와 패도, 의와 리를 완전히 통합시켜서 바라보며, 도를 세계 내의 모든 사물 및 인간 사회의 여러 일들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주희의 학문은 그가 생존할 당시 권신인 한탁주에 의해 거짓된 학문이라 하여 금지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지만, 명실 공히 남송 말기를 대표하는 학문으로 지위를 굳건히 하였다. 송이 망하고 원이 중국을 통일하자, 주희의 학문은 북방 지역에까지 전파되어 나아갔다. 원의 학술계를 좌우하였던 조복, 요추, 허형 등에 의해 주희의 학문은 관학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원대 유학은 하기, 황백, 김이상, 허겸 등으로 이어지는 금화 학파, 조복, 혀형 등으로 대표되는 북방 리학, 오징을 대표로 하는 강우 리학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원대 유학은 전체적으로 정이, 주희 계열의 리학적 특징을 강화시켜 나가면서 점차 육구연의 심학하고도 조화를 추구하려는 경향을 띤다고 하겠다. 원에 이어 명이 들어선 다음에도 주희 계열의 학문은 관학으로서 위상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그러나 주희 계열의 학문은 그 사회적 위상은 높아졌음에도 학문적 발전은 오히려 그 때문에 정체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학문 자체가 형식적으로 되면서 생명력을 상실하고 화석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이 점은 명대 초기 과거 시험 문제로 정착된 팔고문의 형식적인 모습에서 웅변으로 증명된다. 이처럼 주희의 학문은 이미 명대 사회의 시대적인 모순에 적절하게 대응할 만한 탄력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 결과 주희의 학문은 시대와 겉돌면서 단지 과거를 치루는 유생의 시험 답안에서만 고고한 형체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시대적 고민을 담아 내는 좀더 활기 있고 새로운 사상의 출현을 갈망하였다. 그와 같은 요구에 대응하여 나온 사상가가 왕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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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진저리
본뜻 : 찬 것이 별안간 살에 닿을 때나 오줌을 누고 난 뒤에 무의식적으로 몸이 부르르 떨리는 현상을 말한다.
바뀐 뜻 : 겁나거나 징그러운 것을 봤을 때 자기도 모르게 온몸이 움츠러들며 떨리는 현상이나, 어떤 일에 싫증이 나서 지긋지긋해진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보기글" -그녀는 장마 끝에 기어 나온 손가락 만한 지렁이를 보더니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자료실에서 근 10여년을 있다 보니 이제 신문 스크랩 하는 일이라면 진저리가 난다
쫀쫀하다
본뜻 : 천의 짜임새가 고르고 고운 모양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본래의 뜻으로도 쓰이지만, 주로 아주 작은 일까지도 세세히 신경 써서 손해 안 보게끔 빈틈없고 야무지게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고 있다.
"보기글" -그 사람 참 되게 쫀쫀하더라 천 만원 짜리 복권에 당첨되고도 기껏 한턱 낸다는 게 짜장면이더라구 -야, 이 카페트 짜임이 되게 쫀쫀한데 그래 이쯤 되면 세탁해도 늘거나 주는 일이 없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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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프랑스 사회를 우리는 '구체제'라고 부른다. 구체제는 그야말로 모순이 가득 찬 사회였다. 아직 봉건적 잔재가 많이 남아 있던 프랑스에서는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들이 많은 특권을 누리면서 향락을 일삼고 있었던 반면, 농민들은 염세, 부과금, 인두세 등 무거운 세금에 짓눌려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세 신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신분은 성직자, 제2신분은 귀족, 그리고 제3신분은 평민이었다. 이러한 세 신분은 '기도하는 사람(성직자)', '싸우는 사람(기사)', '일하는 사람(농노)'이라는 중세 봉건시대의 구분이 그대로 이어져 온 것이다. 프랑스 의회인 삼부회라는 것도 이 세 신분의 대표자들이 모인 데서 나온 말이다. 인구의 다수를 차지했던 제3신분은 농민들이 대다수였으나, 중세 후기부터 등장한 상인들과 법률가, 의사, 문필가 같은 새로운 전문직업 종사자들이 늘어나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소위 '부르주아지'라고 불리는 이러한 사람들은 신분적으로는 제3신분에 속하긴 했지만, 귀족이나 성직자에 못지않은 재력과 능력이 있었다.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능력만큼 국가나 사회로부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귀족은 단지 혈통을 잘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는 데 비해, 자신들은 뛰어난 재능과 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귀족들의 들러리 노릇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기회만 있으면 이러한 모순을 제거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그런 기회는 기묘하게도 귀족이 먼저 제공했다. 당시 프랑스 왕실은 만성적인 재정부족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왕실재정은 더욱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루이 16세는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내게 함으로써 재정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이에 응하지 않고 세금의 부과에는 삼부회의 동의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소위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주장이 여기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그러자 왕은 마치 '사표를 던지는' 기분으로 오랫동안 소집하지 않았던 삼부회를 마침내 소집했다. 샤토브리앙의 말대로, 귀족이 혁명을 시작하고 평민이 이를 성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삼부회 소집 소식을 들은 제3신분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그러나 그 감격은 잠깐이었다. 모두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제3신분 대표로 나설 사람도 그것을 뽑는 사람도 당면한 문제가 어떤 것이고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했다. 말주변이 뛰어난 법률가 등은 자신감을 갖고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명확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정치 팜플렛이었다. 수천 종의 정치 팜플렛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상류층의 규방에서 오두막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치 팜플렛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말주변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팜플렛을 보고 나서 우쭐대며 자신이 아니면 정치할 사람이 없는 듯 행동했다. 여기서 가장 유명한 팜플렛이 바로 시에예스(Abbe Sieyes, 1748-1836) 신부가 쓴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였다. 이 소책자는 3만 부가 팔릴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책 제목에 대해 시에예스 신부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답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이다. 그러나 족쇄가 채워지고 억압된 상태의 모든 것이다. 특권을 누리는 계층이 없다면 제3신분은 무엇이 될 것인가? 모든 것이다. 게다가 자유롭고 번영하는 모든 것이다. 어떠한 것도 제3신분 없이 이루어질 수 없지만, 다른 신분이 없어진다면 모든 것이 훨씬 더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말하자면 제3신분만이 프랑스 국민 자격이 있고, 나머지 신분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신분이 있으면 국가에 오히려 거추장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특권계급을 지나치게 공격하면 프랑스를 공포상태로 몰아갈 수도 있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는 일반의 권익을 위한 세제개혁과 처벌의 개선만을 주장했다. "국왕은 우리에게 불만을 호소할 자유를 주셨다. 얼마나 귀중한 은덕인가! 인자하신 관심을 가지고 국민들에게 하문하시려는 국왕폐하께 무어라 감사드려야 할지!" 사실 시에예스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샤르트르의 보좌신부 출신으로 당연히 성직자 신분이었지만 삼부회에서는 성직자로서가 아닌 제3신분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유명해진 사람이었다. 물론 혁명직전에 주교나 수도원장과 같은 고위 성직자는 귀족이나 다름없었고, 사제나 대다수의 수도사와 같은 하위 성직자는 사실상 평민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이해될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시에예스 신부는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등장하자, 독재헌법을 기초하기도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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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당신 곁에서 죄인 되리라
이광수와 부인 허영숙이, 집안의 반대를 끝내 이겨내고 매우 어렵게 결혼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렇게도 어렵게 결혼한 부부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벌써 중년이 되어 당당하게 한 사회인으로서의 몫을 하면서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를 보면서 나는 이광수가 허영숙에게 보낸 열렬한 사랑의 편지를 꺼내어 읽어 보았습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엄격한 윤리관을 갖고 있던 1910년대의 우리나라는, 비록 개화의 물결이 서서히 밀려오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연예의 자유가 허용되기에는 너무나 아득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사랑> <무정> 등의 많은 소설을 써, 우리 신문학의 개척자로 공헌한 춘원 이광수는 자유연애의 실천자로서도 한 몫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후에 그의 아내가 된 허영숙에게 보낸 편지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랑의 고통과 또 새로운 도덕관과 낡은 도덕관 사이에서 괴로와 한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편지입니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가 허영숙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열렬히 구애했던가를, 그의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었으며, 한 작가가 사랑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생각은 어떤 것이었는가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내 영에게 -(전략)- 우리의 사랑이 만일 진실로 절대한 것일진댄, 그것이 무엇의 지배를 받고 억압을 받겠습니까? 자연의 힘이, 즉 죽음이나 증오가 우리를 떼기 전에 뉘가 능히 우리를 떼겠습니까? 설혹 그것이 죄악이 되어서(죄악이란 말이 벌써 어떤 표준을 세운 뒤의 말이지만) 우리의 몸과 영이 함께 지옥의 화염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지옥의 화염이 우리를 온통 살라 버리기까지 뉘가 우리를 떼겠습니까? 영이여 만일 우리의 사랑을 죄악이라 하거든 영이여! 죄인이 되어 주십시오. 나를 떠나서 선인이 되려 말고 나와 함께 지옥의 죄인이 되어 주십시오!
1918년 7월 이광수
지옥의 불도 무섭지 않고 죽음도 무섭지 않으며 죄악도 그의 사랑을 해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사랑. 사랑의 성취를 위해서는 어떤 것이라도 불사하려는 외골수의 사랑을 그의 편지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예술가들의 사랑이란 하나 같이 열정적이기는 하지만, 동양의 나라, 특히 엄격한 유교적 윤리가 그 근간을 이루고 있던 한국의 1910년대에도 이렇게 열정적인 편지가 은밀하게 교환되었다는 사실은, 사랑이라는 불길이 한 사람의 영혼에 점화되었을 때 작용하는 열도와 도취의 무분별성, 강인성이야 말로 시대와 연대를 초월하여 늘 그 본연의 모습을 띄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시대가 삭막하고 감각적이고 물질만능주의가 팽배되어 있는 시대라고 해도, 사랑이 갖고 있는 본연의 모습은 어디엔가 숨어서 젊은 영혼을 불태우고 상처 입히며 끝없는 동경과 열망으로 거기에 도달하고자 하는 높은 자리를 엄연히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벨라르.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낱말은 아마도 이 지구상에서 결코 소멸되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유일하게 신선한 낱말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말은 존재라는 말과 같은 뜻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한, 사랑 또한 존재하며, 불멸의 빛깔과 향기를 가지고 우리의 영혼을 감동 속으로 몰아넣는 가장 영원한 이름입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판도라`의 상자 속에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과 같이 우리를 끊임없이 일깨워 주는 어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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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찬란한 여명 그리고 선각자의 고독
이동인의 밀항
이동인은 밀항을 해서라도 일본땅으로 건너가 존황토막이라는 기치를 펄럭이며 저들의 명치유신을 성공시킨 비결이 무엇이며,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의 근대국가로 탈바꿈 할 수 있었던 일본국의 저력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 이동인에게 오쿠무라 엔싱 남매가 부산포에 상륙하여 사찰을 열었다는 정보는 백만원군이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었다. 1878년 6월 2일부터 이틀간에 걸쳐 이동인은 히가시홍간지 부산별원을 찾아가 오쿠무라 엔싱과 양국간의 관심사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두터이 하였고, 그해 12월에 이르러서는 부산항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군함 비예호에 승선하여 신식 군함의 위력과 설비를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서는 일본으로의 밀항을 더욱 서둘러 단행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이동인은 오쿠무라 엔싱 남매에게 애원하듯 매달리며 일본국으로의 밀항을 성사시켜 줄 것을 간청하였고,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를 만난 자리에서도 자신의 밀항이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더욱 부드럽고 순조롭게 할 것임을 집요하게 설득하였다. 해가 바뀌어 1879년 6월, 서울에 다녀 온 이동인은 김옥균, 박영호 등에게서 전별금으로 받았다는 금봉을 증표로 제시하면서 자신의 밀항이 어느 개인의 소망이 아님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자신이 일본으로 가야 하는 필연적인 사유를 오쿠무라 남매에게 강조해 보인 것이었다. 마침내 그해 8월, 오쿠무라 엔싱의 주선으로 이동인은 일본국으로 밀항할 수 있게 된다. 더구나 오쿠무라 엔싱과 동행하게 된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동인을 태운 일본군함이 구주의 나가사키 항에 도착하여 정박하는 동안, 오쿠무라 엔싱은 그의 안전을 위해 서양식 양복을 입기를 권했고, 일본식 이름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한다. 이동인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여 조선인 최초로 서양식 양복을 입게 되었고, 아사노 게이잉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일본국 교토에 도착한 이동인은 진종본묘의 거찰임을 자랑하는 히가시홍간지의 대침전에 머물면서 일본어의 수련에 몰두하였고, 진종의 법통과 교리의 터득에도 매진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 4월 5일 급기야 득도에 성공한 이동인은 진종의 승려가 되어 도쿄로 진출하여 아사쿠사별원에서 기거하게 된다. 아사쿠사별원은 조선통신사가 머무는 대찰이어서 이동인의 마음을 들뜨게 하였고, 실제로 사절로 온 김홍집과도 여기서 만나게 된다. 도쿄에서의 이동인은 분주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밀항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촌각도 헛되이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특히 주일 영국공사관의 2등 서기관 어네스트 사토와의 교유는 그 자신에게는 말할 나위도 없었고, 후일 조선외교의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의미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종 17년 5월이라면 한미수교조약이 체결되기 2년 전의 일인데, 그러한 시기에 조선의 개화승과 영국의 직업외교관이 마주 앉아서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주목하고도 남을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네트스 사토는 이동인과의 첫 만남을 이로부터 100년 뒤에 공개된 영국정부의 외교문서 '사토 페이퍼'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880년 5월 12일. 오늘 아침 아사노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이 찾아왔다. 그는 조야라는 이름이 조선야만(Korean Savage)이란 뜻이라고 재치있게 설명하면서, 세계를 돌아보고 자기 나라 사람들을 개화시키기 위해서는 비밀리에 일본에 왔노라고 말했다. 그의 일본어는 서툰 편이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외국의 문물이 엄청나다는 것이 거짓이 아님을 돌아가서 조선인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유럽의 건물이나 그 밖의 흥미있는 사진들을 구입하고자 했다. 또한 영국을 방문하기를 열망하였다. 그는 자기가 서울 본토박이라고 하면서, 서울에서는 쯔(tz)라고 발음하지 않고 츠(ch)라고 발음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요일 아침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이동인과 어네스트 사토의 극적인 만남을 상당히 소상하고도 흥미있게 기술하고 있음을 볼 때, 두 사람은 초대면인데도 불구하고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허심탄회한 의견교환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동인이 영국을 방문하기를 열망하였다는 대목이 그 점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며, 또 조선말의 발음을 교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어네스트 사토가 이미 조선어를 학습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사토 페이퍼'는 다시 이어진다.
1880년 5월 15일. 나의 조선인 친구가 다시 왔다. 그는 조선이 수 년 내에 외국과의 관계를 맺게 될 것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현 정부를 전복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고도 했다. (중략) 그는 한, 일 간의 무역은 전적으로 유럽 상품을 거래하고 있으며 조선이 다른 나라와 교역을 하게 되면 일본과의 무역이 사라질 것이라고 하면서 영국이 조선과 교역할 생각이 없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영국으로서는 어느 나라와도 교역관계를 갖기를 열망하지만, 원하지 않는 나라에게 교역을 강요할 생각은 없으며, 교역을 원치 않는 나라에 사절을 보냈다가 사절이 거절당하고 돌아오게 되면 영국으로서는 이 모욕에 대해 보복을 해야 되기 때문에 그러한 나라에는 사절을 보내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조선이 교역관계에 들어갈 의욕을 보일 때까지는 그대로 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878년에 내가 가지고 갔던 문서의 사본을 보고 내 이름을 익혀서 나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3시간 가량 있다가 갔다. 나는 오는 20일 시계를 사기 위해서 그를 요코하마에 데려가기로 약속했다. 그는 금, 석탄, 철 및 연해의 고래 등 풍부한 조선의 자원을 개발하는 일에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좋은 인삼과 나쁜 인삼의 견본을 나에게 주었는데, 유럽의 의사들이 인삼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 인삼이 조선의 중요 수출품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토 페이퍼'는 더 계속 되지만 이쯤에서 줄이기로 한다. 그러나 일본국의 명치유신을 주도하였고, 일본국 유신정부의 실세로 군림하고 있는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모두 영국에 유학했던 사람들이다. 이를 모를 까닭이 없는 이동인 이라면 어네스트 사토와의 교유를 통하여 무엇을 얻고자 하였는지를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도쿄에서의 이동인의 활동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는 경응대학의 설립자이자 당대 최고의 사상가이면서 일본 조야에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후쿠사와 유키치와 교유했다는 점일 것이다. 물론 어네스트 사토의 주선일 것이라고 믿어지지만, 이를 계기로 후일에 이르러 김옥균 등이 후쿠사와의 후원을 받게 되었고, 유길준과 유정수가 최초의 조선인 유학생이 되어 경응의숙에 입학을 하게 되면서 최초의 조선인 유학생이 되어 경응의숙에 입학을 하게 되면서 설립자 후쿠사와 유기치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는 등 일본 지식인들과의 유대관계를 맺게 되는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이동인은 일본에서 개화의 견문을 넓히고 일단 귀국한다. 그가 귀국할 때 가지고 온 수많은 서적을 김옥균, 박영효 등이 밤을 세우면서 읽었다는 서재필의 회고문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가 가지고 온 서적이 많았는데 역사도 있고, 지리도 있고, 물리 화학과 같은 것도 있었으며, 그것을 보기 위해서 3, 4개월 간 그 절에 자주 들렸지만 당시 이러한 책은 적발되면 사학이라 해서 중벌에 처해졌기 때문에 한 장소에서 장시간 독서할 수가 없어, 그 다음에는 동대문 밖의 영도사라는 절에서 독서하고 다시 봉원사로 옮겨가는 등, 이와같이 되풀이하기를 일 년이 넘어서야 그 책들을 모두 판독하였다. 그 책들은 모두 일본어로 씌어 있었지만 한자를 한자 한자 더듬어 읽으면 의미는 거의 통했다. 이렇게 해서 책을 완독한 바, 세계의 대세를 거의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 나라도 타국과 같이 민중의 권리를 수립해야겠다는 생각이 솟아났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개화파로 등장하게 한 근본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이동인이라는 승려가 우리를 이끌어 주었고, 우리는 그러한 책을 읽어 그 사상을 몸에 익혔으니 봉원사가 우리 개화파의 온상인 것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이동인은 고종 임금을 배알하게 된다. 배불숭유하는 나라의 승려가 임금을 배알하기 위해 궐문을 들어섰다면 중벌을 받아서 마땅한 시절이지만, 어찌되었거나 고종은 친히 이동인을 인견하여 일본국의 변화와 서구문물의 실상을 세세히 들은 다음, 그에게 금괴 세 개와 국왕의 신임장을 들려주며 다시 일본국에 다녀올 것을 명한다. 이 밀파가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으면 고종 스스로, "부산에서 떠나면 남의 눈에 뜨일 염려가 있으니 원산에서 떠나라."라고까지 몸소 당부를 하였겠는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온 이동인은 어네스트 사토에게 군함을 구입하겠다고 교섭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이 고종의 뜻인지 이동인의 개인적인 욕망인지는 확실치 않거니와 내용도 소상히 전해지지 않는 것이 유감이다. 이동인은 어네스트 사토의 소개로 고베에 주재하고 있었던 또 한 사람의 영국 외교관(영사)인 애스톤을 만나 우의를 다졌고, 또 어네스트 사토는 주일 영국대리공사 케네디에게 이동인을 소개하면서 그를 조선에 있어서의 영국의 대리인으로 삼도록 권유하기도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일본 땅에서의 이동인의 활동은 비밀외교관의 구실을 톡톡히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행동파 승려였던 이동인이야말로 개항과 수구의 물결 사이에서 혼돈을 거듭하던 당시의 조선에서 개화의 필요성과 함께 외교의 중요성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인물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고종 임금의 자문에 응하게 되면서는 그의 위치가 급격히 부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곧 개화세력이 열망하던 신분의 벽이 무너지는 일이었으며, 따라서 원임훈구와 시임대신들 모두에게 큰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곧 이동인에 의해 조선의 외교정책이 주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탓이었을까. 개화승 이동인은 애석하게도 암살로 목숨을 잃게 되지만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살해되었는지는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많은 사서가 민씨일문이나 흥선대원군쪽의 소행일 것이라는 짐작을 적고 있을 뿐이라 안타깝기 한량없는 노릇이지만, 실상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의 상실을 우려한 청나라 의 자객에 의해, 혹은 조선의 자주외교 노선을 차단하기 위해 일본의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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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 데이(May Day)
일반적으로 국제 노동자의 날로 알고 있으나 옛부터 서양에서는 봄을 맞이하는 5월 1일, 봄의 축제를 베푸는 습관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영국에서는 이날 남녀가 교외 숲으로 가서 꽃과 나뭇가지를 꺾어 들고는 길 모퉁이에 세워진 검정과 노랑 얼룩무늬의 '메이 폴' (5월의 기둥)을 장식한다. 그밖에 이 기둥에는 리본이며 흰 바탕에 적십자를 그린 '세인트 죠지'의 깃발을 장식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 메이폴을 둘러싸고 하루종일 춤과 노래로 즐기는 것이다. 또 이날 마을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아가씨를 '메이 퀸' (5월의 여왕)으로 뽑는다.
우리 나라에서 맨 먼저 이러한 풍습을 받아들인 것은 이화여대로,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메이 퀸'을 뽑고 화려하게 대관식을 올리는 행사는 전통적인 것이 되어 있으며 근래에는 각 대학에서도 이를 본받고 있다.
이 메이 데이가 노동절로 된 것은 1886년 5월 1일 미국 각지에서 노동자가 시위 행진을 한 데서 비롯된다. 이 시위 운동은 미국은 여러 노동 단체가 '해마다 이 날을 기하여 8시간 노동제 획득을 위해 총파업을 단행한다'고 결의한 데 의거한 것이었으며 그 결과 '메이 데이' 이후 각지에서 8시간 노동제의 실시를 보았다.
미국에서 노동자의 시위가 성공한 것을 본 '제2 인터내셔널'에서는 '메이 데이'를 국제적인 노동자의 날로 정했으며 1890년 구미 각 도시에서 최초의 국제적 '메이 데이'의 행사가 거행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해방 이후 좌익 계열의 난동으로 '메이 데이'도 실질적인 노동자의 날이 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되어 오다가 1959년부터는 3월 10일을 '노동절'로 정하여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갖가지 행사를 벌여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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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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