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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59 호
단기 4340. 3. 27 (음력 02.0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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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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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MBC `베스트극장` 극본 공모
시리즈 드라마로 변모하는 MBC '베스트극장'이 올해도 극본 공모를 계속한다.
MBC는 소재의 제한 없이 순수 창작극을 대상으로 제16회 베스트극장 극본 공모 를 실시한다고 23일 밝혔다.
이달 중순 막을 내리고 두 달간의 휴식기에 들어간 '베스트극장'은 5월부터 단 막극의 느낌을 살리는 시리즈 드라마로 바뀔 예정이지만 단막극 공모를 계속해 '베 스트극장'에 활용할 계획이다.
내달 16일부터 27일까지 접수하며 서울 여의도의 MBC 사옥을 방문하거나 우편으 로 제출하면 된다.
예심 통과 여부는 6월 중, 수상작은 8월께 결정되며 최우수작 1편에는 1천만 원 이 상금으로 지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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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대화란 의견이 다르면서도 토론이 계속될 수 있음을 뜻한다. / 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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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四十八章 (노자 - 도덕경 : 제4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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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取天下, 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위학일익,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 무위이무불위. 취천하, 상이무사. 급기유사, 부족이취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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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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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여덟째 장
직역
학문을 하는 것은 매일 더해 가는 것이고, 도를 하는 것은 매일 덜어가는 것이다. 덜도 또 덜어내면 함이 없는데 이르게 된다. 함이 없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다. 천하를 얻으려고 한다면 항상 일이 없게 하라. 그것이 일이 있음에 이르게 되면, 천하를 얻는데 부족하게 된다.
해석
지식은 쌓아가는 것이다. 한권의 책을 읽고 또 한권의 책을 읽고, 그는 무수히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다. 그것이 학문을 하는 것이다. 도는 덜어내는 것이다. 가식을 덜어내는 것이다. 내게 주입된 고정된 가치관념을 덜어내는 것이다. 나를 규정지으고 있는 것을 덜어내는 것이다. 그릇을 부수는 것이다. 나는 학생이다. 나는 왕이다. 나는 운전수이다. 라는 틀을 부수는 것이다. 그래서 순수한 나의 존재에 도달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를 규정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규정한 것이 아니다. 남이 나에게 씌운 멍에이다. 그리고 다른사람의 가치판단에 따라서 나도 움직인다. 나도 행동을 한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쫒아가게된다. 이것에서 자신의 주체성은 사라진다. 나를 규정하고 있는 모든것을 던저 버려라. 그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학문을 하는 것은 그릇에 물을 붓는 것이다. 바다위에 그릇이 떠있다. 바다는 존재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릇은 나이다. 이때 학문은 바닷물을 떠서 그릇을 채우는 것이다. 조금 더 조금더, 그러나 한계가 있다. 한계는 그 그릇의 크기다. 그러나 도를 하는 것은 그릇을 부수는 것이다. 해체하는 것이다. 그때 그는 바다와 하나가 된다. 그 자신이 물이된다.
無爲란 함이 없음이다. 그런데 노자는 덜어 내라고 한다. 덜어 내는 것은 爲가 아닌가. 그렇다. 덜어내는 것은 함이다. 목적 의식이 있고 그것에 매진하는 것이다. 함이 없기 위해서 함하는 것이다. 무위 하기 위해서는 해야 한다. 강렬한 추구 그 끝에서야 도달 할 수 있는 것이 무위이다. 함이 없다고. 그것 참 쉽네, 집에 콕 밖혀 있으면 되잖아. 그렇다. 그대는 집에 앉아서 방구들을 바라보며 배를 깔고 누위서 멀뚱멀뚱 있을 수 있다. 그리고는 말한다. 나는 지금 무위하고 있다고. 그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어떻게 사람 단 한 순간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단 한 순간이라도 그대의 육체가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 있는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순간이 바로 죽는 순간이다. 살아 있는 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흡사 태풍처럼 말이다. 태풍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우리는 태풍을 느낀다. 그리고 큰 피해를 입는다. 그런데 단 한순간 태풍이 멈추었다. 그럼 그곳에 태풍이 남아 있는가. 아니다.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멈추는 순간 죽는다. 실에 돌을 매달아 돌려 보아라. 그럼 원이 생긴다. 그것을 아주 빨리 돌려 보아라. 그럼 주위에 막이 생긴다. 다른 것들이 막에 근접하게 되면 돌에 맞아 튕겨져 나간다. 그렇게 되면 그 주위에는 아무도 가까이 오려 하지 않는다. 분명히 허공에는 단 하나의 돌이 떠있다. 그러나 원을 형성하고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다. 그런데 그 중심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돌고 있는 돌만 보인다. 왜 돌을 한 순간이라도 노치면 다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돌이 사람의 팔을 돌린다. 돌을 돌리는 사람이 돌을 멈추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돌을 집어 던질까. 아니다. 그럼 주위의 사람이 다친다. 어쩌면 내가 다칠지도 모른다. 돌에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실을 확 잡아 당길 수도 없다. 천천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속도를 줄여야 한다. 그래서 돌을 멈추게 할 수 있을 때 까지 가야 한다. 다치지 않을 정도까지 속도를 줄여야 한다. 이렇게 속도를 줄이는 것이 무위하고자 하는 위이다. 완전히 멈춘상태가 무위이다. 위는 돌이 계속 돌고 있는 상태이다. 돌이 멈추는 순간 돌을 멈추고자 하는 위는 사라진다. 이세상의 위중에서 단 하나 가치 있는 행동은 돌을 멈추게 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돌이 멈추었으면 그 멈춘 돌이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 돌은 놓고 자유롭게 떠나면 되는 것이다. 무위는 돌이 멈추고 돌을 멈추게 하려는 위가 사라질때 오는 것이다. 무위는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원래 그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돌로 가려진 세상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천하를 얻으려고 하면 일이 없게 하라. 무슨 말인가. 어떤 일이 부상하기 전에 해결하라는 것이다. 즉 사건이 커지기 전에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 사건이 전조조차 보이기전에 해결을 해놓으면 천하에 일이 생길일이 없다. 예를 하나 들겠다. 콜레라가 기승하는 여름이 되기 전에 보사부에서는 예방접종을 맞으라고 홍보를 하고, 문교부와 협조를 해서 각급학교의 학생들에게 거의 의무적으로 예방접종을 맞게한다. 콜레라가 돌기전에 예방을 함으로써 콜레라 균의 한국에 상륙을 하더라로 피해를 최소화 하겠다는 것이다. 예방접종을 하지 않고 방치해둔 상태에서 콜레라 균이 상륙을 하면 일이 커지게 된다. 일이 커지기 전에 예방을 하기 때문에 콜레라 균이 상륙을 하더라도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천하에 일이 없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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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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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학문을 하면 나날이 할 일이 늘어가고, 도를 체득하면 나날이 할 일이 줄어든다. 줄고 또 줄어서 하는 일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 하는 일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행하지 않아도 모든 일은 저절로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천하를 차지하는 것도 언제나 하는 일이 없는 것으로 한다. 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면 이미 천하를 차지할 수 없는 것이다.
주
위학일익 : 학문을 하면 나날이 할 일이 늘어간다는 뜻임. 세속적인 학문은 파고들면 들수록 의문은 늘어가고 지적 욕구도 강해진다. 의문은 또다른 의문을 낳게 하며 여기에 경쟁 의식, 모르는 것에 대한 고민 등으로 우리의 마음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다. 노자는 세속인 들의 박학과 지적 호기심에 대하여 시종일관 고답적 자세와 냉소주의적 태도로 임하고 있다. 위도일손: 도를 닦으면 나날이 할 일이 줄어든다는 뜻임. 세속적인 학문을 버리고 무지 무욕의 경제에서 오로지 도 하나만을 체득하면 번뇌와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날로 덜어낸다는 것은 도를 체득한다는 말이다. 무사: 무위를 뜻함. 유사: 의도적으로 행위 하는 일이 있는 것.
해
배움이란 지식을 쌓는 일이므로 의문도 늘어나고 경쟁 의식 등으로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이에 반하여 도를 닦는 일은 마음을 수양하는 일이므로 지식욕, 소유욕, 경쟁심 등의 겉치레를 하나씩 하나씩 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오로지 도 하나만을 체득하여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달관된 경지에 이른 사람을 우리는 자유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무위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행하지 않아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없는 것이다. 천하를 차지하여 다스리는 일도 작위로서는 성공할 수 없다. 무위자연의 다스림이야말로 천하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첩경인 것이다. 인간을 구속하고 갈등케하는 여러 가지 욕망에서 벗어나 무지, 무욕의 경지에 도달하면 지식이 주는 간교함과 문명사회가 제공하는 관념적 허위 의식에서 벗어나 태고의 순박함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노자의 시니컬한 이 교설은 예악과 배움을 중시하는 유가의 주장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그의 무위, 청정의 사상은 후세 중국인들이 인도의 불교를 수용하고 해석하는데 크나큰 도움을 주게 된다. 노자의 도덕 경을 최초로 외국어 범어로 번역한 분이 불경 번역을 필생의 업으로 삼았던 당의 현장 법사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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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일제의 한반도 침략음모가 오래 전부터 그토록 치밀했다.
가야고분의 처참한 도굴현장
1910년을 전후해서 약 10년간 개성과 강화동 일원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에 의해 감행되었던 고려고분의 남김 없는 파괴와, 수만 점 혹은 그 이상의 고려자기 부장품 약탈에 이어서 1925년을 전후한 약 5년 동안 대동강 하류의 악랑고분 지역에서 전성기를 이루었던 대대적인 도굴은 지난날 한국의 역사유적과 지하의 매장문화재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유린되고 수탈당했던가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규모의 조직적인 고분 도굴과 유물 약탈은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낙동강 하류와 경주지역에 무수히 널려 있는 가야 및 신라고분군도 앞의 두 지역에 맞먹는 무진장한 부장품의 보고였다. 아니, 초기의 소규모적인 도굴과 유물 약탈은 이쪽에서 먼저 착수되고 있었다. 일본 무법자들의 상륙 루트가 부산, 대구, 서울, 개성, 평양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일확천금의 야욕은 그들이 가장 먼저 접촉할 수 있었던 신라와 가야의 유적지에서부터 채워지기 시작했다. 계획적인 고분 도굴 및 모든 종류의 지상문화재 약탈을 뒤에서 조정했던 일본인 골동상이 맨 먼저 거점을 확보한 것도 부산에서였다. 그리고 나서 차차 대구.서울로 제2.제3의 일본인 골동상들이 속속 북상했다. 물론 그들과 함께 해적이나 다름없는 무법자였던 호리꾼들도 북으로 북으로 보물 약탈지역을 확대시켰다. 고령·창령·선산·함안·진주 일대에 널려 있는 5∼6세기 가야고분의 부장품들이 바다를 건너온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유린되던 초기의 몇몇 사실기록이 일본인 조사 확인자들에 의해 증언되고 있다. 1911년 3월에 발행된 일본의 고고학 잡지에서 세키노가 발표한 조사보고 (가야시대의 유적)에 이런 증언기록이 나온다.
"작년(1909년인 듯)에 가야유적을 조사학 때, 창년에 이르러 고령에서 본 것보다고 더 큰 고분을 조사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이미 발굴되어 석곽 일부를 노출시키고 있었다." "진주 동북쪽의 옥봉에도 이미 발굴된 고분이 있었다. 이 고분에서 도굴된 숱한 도기(가야토기)와 칠기가 진주경찰서에 보관돼 있었다(도굴자로부터 압수했던 듯). 이것들은 공과대학(동경제국대학 공대)에 기증하기로 되어 근일 중에 도착할 것이다."
그자가 그자였다. 일본인 무법자가 도굴했을 유물을 일본인 경찰서에서 불법행위로 압수해 갖고 있다가 학술조사를 나왔다는 세키노를 통해 저들 맘대로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 마음대로 움직이는 세상이었다. 낙동강 하류에 산재하는 수천 기의 고분들이 개성 일원의 고분과 대동강 하류의 고분처럼 일본인 호리꾼과 배후의 조종자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도굴되기 시작한 것은 한일합방 직후인 1914년께부터였다. 1917년에 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었던 이마니시(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 참상을 보고하고 있다.
"선산군:본군에 유존하는 약 1천 기 혹은 그 이상의 고분은, 2∼3년 전부터 이 지방에 고분 속의 유존고물을 완롱하는 폐풍이 일어 사리의 도당들이 매수하는 바람에 무뢰한의 끊임없는 도굴장이 되었다. …군집하는 고분이 도굴로 인해 파잔. 황폐하는 참상은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이고, 실로 잔인혹심의 극이다. 이는 현대인의 죄악이며, 땅에 떨어진 도의를 보려거든 이 고분 군집기를 가 보라."
그 광경이 얼마나 처참하고 분노를 금치 못하게 했었으면 이마니시의 조사보고를 이처럼 흥분하게 했을까. 그러나 그도 그런 천인공노할 대규모의 고분 도굴이 주범이 일본인이란 말은 차마 못 쓰고 간접적으로만 시사하고 있을 뿐이다. 경북 선산지역에서 가야고분의 처참한 도굴현장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던 이마니시의 조사보고엔 또 이런 증언이 포함돼 있다.
"제6구:2∼3년 전에 고적조사원(총독부 소속)이 발굴·조사했는데, 전문한 바로는 완전한 광(묘혈)이 유존하여 금환 등이 유물이 있었다고 하나, 그 상세한 사실을 알 수 없음은 유감이다. 또 1기의 외에는 모조리 도굴되었는데 그 중엔 아직 생토가 채 마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총독부에서 내려갔던 고적조사원이란 자까지도 순금 팔지 같은 값진 출토품은 슬쩍 제것으로 만들어버렸던 사례가 암시적으로 고발돼 있다. 이마니시는 계속해서, 선산군 옥성면의 고분지역에서는 그럴 생각만 있으면 얼마든지 손쉽게 값진 유물들을 꺼내 가질 수 있게 무덤 속이 드러난 것조차 있는데도 주민들의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그런 것에 조금도 손을 대고 있지 않은 것은 사실에 감동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곳의 고분들 중에는 묘광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도 있다. 고분의 봉토가 유실되어 그렇게 광을 노출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이 거기에 접근하지 않고, 또 침해하지도 않는 순박함이여. 사자에 대한 예를 결하고 있는 현대의 도굴·파괴, 고인의 분묘에 능욕을 가하고 있는 현대인(일본인)에 비하면 송연한 바가 있다. 구조선의 도덕을 보려거든 이 옥성면의 제분을 가 보면 족하리라."
이 조사보고는 '분노를 금할 수 없는 고분 도굴범은 조선인 중엔 없으며, 모두가 도의를 상실한 일본인 무뢰한들' 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시사하고 있다. 이마니시는 또 서울의 한 골동가게(주인은 물론 일본인이었을듯)에서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선산지방에서의 도굴품임이 분명한 가야문화의 귀중한 유물들이 일본인들에게 팔려 나가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일도 있었다. 그때 메모했던 유물 목록까지도 그는 조사보고에 밝히고 있는데, 1)순금귀고리(경주 보문리의 부부총 부장품과 동일형식) 2)순금팔지(여러 개가 나왔을 듯) 3)곡옥 4)관옥 5)유리옥 6)기타 옥류 7)검두 8)무기·철창·직도 9)마형대구 등이 그것이다. 이중 2) 3) 4)는 그후 교토대학으로 들어갔다. 이마니시는 다시, 함안과 창녕에서도 그때 대다수의 가야고분이 도굴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함안군: 본군 고분들도 이미 상당수가 도굴당했으나 최근 수년 동안은 뜸했던 것 같다." "창녕군: 이 지방의 대부분의 고분도 파괴·도굴되어 그 패해가 너무나 심하다. 목마산 동남쪽 언덕 위의 제1군 8호분은 수년 전에 병사(일본 병사)가 발굴하여 다수의 와기(토기)를 획득했다는 설이 있다. 창녕읍의 북쪽 제5군에서도 대규모의 도굴이 시도되다가 중지한 흔적이 있었다."
이 같은 무법의 고분 도굴사태가 조사·보고되자 총독부는 아직 성한 고분이 많이 있는 창녕 교동 일대에서 약 100기를 서둘러 발굴했다. 이때의 부장품 출토 상황에 대해 다니는 마차 20대, 화차 2간 분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917년도 총독부 (고적조사보고) ). 그러니 일본인 무법자들이 선산과 기타 지역에서 수천 기를 도굴한 가야고분의 부장품 유물의 분량이 어느 정도였을까가 능히 상상된다. 그 도굴품들은 그 즉시로 대구.부산.서울 그리고 본토의 일본인 수집가 수중으로 사라져 갔다. 순금귀고리의 경우만을 말한 다음과 같은 후지다의 증언적인 지록은 그 전모의 일각을 알려주는 데 불과하다.
"조선에서 발견된 귀고리(순금)는 실로 상당수로, 학술적 발굴조사를 거친 것만도 70쌍에 이르지만 사인의 비장품이 되어 조선과 도쿄·교토에 있는 것도 대단히 맣다. 도쿄의 네즈, 교토의 기요마치와 모리야가 가진 것만도 수십 쌍이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신라와 가야지역인 경주·달성·선산·안동·합천·고령·거창 등지에서의 출토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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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 신유학이란 무엇인가
3. 신유학의 형성-유학의 새로운 변용
물론 유학이 변모하도록 만든 요인을 설명하기에는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앞서 말한 것이 유학을 변모하게 한 현실적 요건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또 다른 요인은 그 이념적 요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인의 문화적 자존심과 연계된 것이다. 당대 말기부터 5대 시대를 거쳐 송대로 나아가는 동안의 역사는 중국인에게 자존심을 손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당 왕조는 늘 변방 세력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이 점에서는 송 왕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송 왕조는 출발부터 변방 세력의 위협에 직면해 있던 허약한 왕조였다. 특히 북방 세력의 위협 앞에서 중국인들은 중국적인 것의 파괴에 대한 위기 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수당 시대에 정점에 이르렀던 불교를 외래적인 것, 비중국적인 것으로 의식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한유 이래로 몇몇 유학자들이 선도해 온 불교에 대한 비판 의식이 더욱 고조되는 한편, 유학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친애감을 나타내면서 마침내 시대적인 사상으로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학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중심 사상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명제가 중국인의 자존심과 연계되어 표면화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유학은 시대를 내려갈수록 점점 더 이념적 색채를 뚜렷이 갖추게 되었다 유학자들은 선언적인 측면에서는 이단에 대한 배척의식을 강하게 표출시켰으며,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유학의 강력한 적이 되는 불교나 도교의 사상에 대응하여 유학을 훨씬 더 철학적이고 체계적인 모습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러한 유학의 사상적 전개는 불교 사상과 도교 사상이 갖는 장점과 특징을 자기 속에 용해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유학을 탄생시킨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유학의 변용은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송대 초기만 하더라도 이와 같은 움직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에는 다만 현실 지향적인 세력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이들의 사상적 도구로서 유학이 선택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유학에 부여된 책무, 즉 유학이 총체적으로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의식이 커 가면서 서서히 한당 시대의 유학으로부터 송명 시대에 걸맞는 유학으로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북송 시대 초기의 고문 운동에서 단초가 발견되다가 정학 운동에 이르러 본격화한다.
범중엄이 주도했던 정학 운동은 한당 유학과는 다른 송명 유학의 특성이 구체화되는 시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송대를 통틀어 전개되는 유학의 새로운 양상은 학파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는 데 있다. 이 시대의 유학은 학파들 사이의 대립과 논쟁을 통하여 구체적인 모습을 세밀히 갖추어 나간다. 이 때 등장하는 학파들은 크게는 세상을 어떻게 경영해 나갈 것인가 하는 관점의 차이로 분화와 대립을 보이기도 하고, 작게는 신유학의 철학적 개념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해 나갈 것인가 하는 점에서 서로 갈라져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초기에는 주로 앞의 특성이 나타나다가, 후기에 들어서는 주로 뒤의 특성이 나타난다.
4. 북송 초기의 세 학파
송대 초기에 나타나는 학파들의 분화는 정학 운동 기간 동안에 뿌려진 씨앗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학 운동은 유학자들 사이에 유학의 책임과 기능에 대한 광범한 논의를 촉발시킨 사상적 용광로라 할 만하다. 정학 운동은 기본적으로 개혁의 당위성을 전제로 하면서, 시대를 개혁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 유학이 어떠한 사상적 구조를 갖추어야 하는가 하는 점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북송 시대에는 이러한 관심의 방향에 따라 크게 세 학파가 등장하여 논란을 벌였다. 도학 계열과 신법 계열 그리고 촉학 계열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조금씩 그 사상적 입각점을 달리하면서 서로 경쟁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 도학 계열은 정치적 측면에서는 수구적인 입장을 가지며 점진적 개혁을 통하여 사회 문제를 다하고자 하는 유파이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도덕이 사회의 치란 여부를 결정한다는 입장을 갖는다. 이들은 군왕의 도덕적 성품을 근간으로 하여 도덕 사회를 구현해 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전통 유학의 문법을 그대로 계승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한유와 유종원 등 신유학 이전 시기 선각적 유학자들의 의식을 계승 발전시킨 사람들이 바로 이들로서, 호원, 손복, 석개 등을 시발로 하여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신법 계열은 정치적으로 혁신적 입장을 가지며 급진적 개혁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유파이다. 이들은 세상아 바뀌면 도덕도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회의 치란 여부를 도덕의 문제로 파악하지 않고 훨씬 더 실제적인 측면에서 보고자 하였다. 즉 법제를 완비함으로써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법가적 전통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도덕을 말하기보다는 공리를 표방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 계열의 대표적 인물은 왕안석이다. 촉학 계열은 소식, 소철 등으로 대표되는 소씨 일가를 가리킨다. 이들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입장에서는 점진적 개혁 쪽에 기울어 있으며, 군왕의 도덕적인 마음이 도덕 사회를 구현해 내는 바탕이 된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입각점 역시 전통 유학의 맥락 위에 놓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유학의 당파적 특징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유학의 당파성은 송명 시대에는 이단 배척의 논리로 나타났다. 이 논리는 후기의 도학 계열에서는 신앙과 같은 의미를 지닐 정도였다. 그러나 촉학 계열에서는 이러한 당파성 논리가 별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이들은 유학 경전을 해석하면서 도교와 불교를 원용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이들은 뒤에 주희에게서 선학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송명 시대 신유학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이들의 위상은 사상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문학적 측면에서 두드러졌다. 이와 같은 사상적 분기가 일어나던 무렵은 이미 송대의 지배 집단 내에서 계층적 분화가 시작되던 때였다. 당대 말기부터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한 신진 사대부 계층 가운데 일부는 관인으로 등장하면서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독점해 나가는가 하면, 일부는 대지주나 대상인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할 때 왕안석의 집정은 이러한 독점으로 인한 불균형을 시정하고자 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왕안석의 신법은 이들 대지주와 대상인들의 이익을 억제하고 소지주와 소상인들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안석은 자신의 경전 주석을 교본으로 하여 과거를 치루게 하는 등 사상적으로도 독점을 행하여 이내 도학 계열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학 계열과 신법 계열 사이에는 격렬한 투쟁이 일어나는데, 이는 마침내 도학 계열이 대세를 장악함으로써 끝이 나며, 남송 시대에 들어가면 신법 계열은 거의 몰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법 계열이 소지주와 소상인들의 이익을 보장해 줌으로써 균등한 관계의 새로운 질서를 구현해 내려는 입장을 가졌다고 한다면, 도학 계열은 이미 틀을 잡고 있던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고 강화시키는 데 더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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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지루하다
본뜻 : '지리하다'에서 온 말이다. 어떤 사물이나 상황이 서로 갈라지고 흩어져 있어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고, 형태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바뀐 뜻 : 같은 상태가 너무 오래 계속되어 진저리가 날 지경으로 따분하다는 말이다.
"보기글" -근 한 달째 지루하게 계속되는 장마에 온 집안에 곰팡내가 진동하였다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여 나는 슬그머니 일행을 빠져나왔다
지름길
본뜻 : 원의 한 가운데를 지나는 두 점을 잇는 가장 짧은 직선을 지름이라고 한다. 이처럼 원 둘레를 빙 돌아 맞은편에 닿는 것이 아니라 원의 한가운데 지름을 질러 가는 길을 지름길이라 한다.
바뀐 뜻 : 어떤 목적지까지 가장 가깝게 통하는 길을 말한다 한자로는 첩경이라고 한다.
"보기글" -떡집엘 가려거든 고개 너머 왼쪽 지름길로 질러 가거라 -관악산 등산로를 보면 관음사에서 연주암까지 가는 지름길이 따로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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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반란이 아니고 혁명입니다
혁명과 반란의 차이는 무엇일까? 과거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면, 쉽게 말해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반란인가? 하지만 그보다는 사건을 보는 시각이 더 문제가 될 것이다. 전문가이든 아니든 간에 사람들마다 사건을 보는 시각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그 사건을 새로운 질서로 평가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 이러한 용어의 차이가 생겨난다. 예를 들자면, 영국혁명도 처음부터 용어가 '영국혁명'이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 그것은 '대반란'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영국혁명 이후에 생겨난 질서를 새롭게 평가하는 사람들에 의해 '혁명'이라는 용어가 정착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프랑스혁명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지배층은 혁명을 단순한 반란으로 보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아니 실제 그러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조차 그것이 과거와는 다른 어떤 새로운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더욱이 프랑스 민중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전만 하더라도 전만 하더라도 선량하고 왕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미국에서처럼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를 내걸고 피나는 투쟁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미국독립전쟁에도 참전했던 라파예트는 프랑스 민중의 유약함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프랑스 사태는 민중이 극한 수단에 호소할 태세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는 대서양 이편에서 유행하는 표어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같은 투쟁의 불길이 민중에게 한번 옮겨붙자, 그 불길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민중에게 혁명의 불길을 옮겨 놓은 사건은 1789년 7월 14일에 일어난 바스티유 감옥 함락이었다. 국왕이 베르사유 궁전에 군대를 집결시킨다는 소식을 들은 파리 시민들은 무장할 필요성을 느꼈다. 무기를 찾던 파리 시민들이 대상이 바로 바스티유 감옥이었다. 사실 바스티유 감옥 자체는 그리 중요한 곳이 아니었다. 바스티유 감옥은 국립형무소 가운데 하나였고, 파리 동쪽을 지키는 요새구실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격분한 민중들이 그곳을 습격했을 때 그 안에 있었던 죄수는 단 7명뿐이었다. 그것도 수표 위조범이 4명, 두 사람은 정신이상자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게다가 민중들이 필요로 했던 탄약과 무기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엄청났다. 이때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그날 루이 l6세는 온종일 사냥을 하여 곤히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왕의 측근인 리앙쿠르공이 왕을 깨워 바스티유 감옥을 민중들이 함락했다고 전했다. 그러자 왕은 "그거 반란인가?"하고 물었다. 리앙쿠르공은 "반란이 아니고 혁명입니다, 폐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렇다. 반란이 아니고 혁명이었다. 바스티유의 함락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민중은 갑자기 자신들의 힘을 알아차렸다. 전제정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졌고, 민중들이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바스티유 감옥의 소장이었던 드 로네와 파리 시장이었던 플레셀은 이미 살해되어 파리 민중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아직 왕의 목숨을 붙어 있었지만, 머지않아 그도 역시 그들의 뒤를 따를 것이었다. 몇 년,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순하기 그지없었던 민중들이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전제정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혁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일화는 민중에 대한 왕의 무지와 무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을 달라고 외치는 민중들의 아우성을 듣고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 역시, 왕실과 민중 사이에 깊이 패인, 뛰어넘을 수 없는 단절의 골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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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배반 아닌 배반
어제는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비엔나 국립 발레단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저 유명한 누레예프가 출연하는 공연으로서 국내 팬들의 열렬한 요청을 받아 모 신문사의 초청에 의한 내한했다고 합니다. 그 나라를 여행해 본 사람도 미리 예약을 하지 못하면 잘 볼 수가 없다는 유명한 공연이므로 무용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요행을 놓치고 싶지 않은 공연이지요. 그 공연이 시작되기 한 시간쯤 전에 우리는 만났지요. 커피를 마시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당신은 당신의 가족들과 함께 발레공연을 가기로 한 약속을 어쩔 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게 미안한 표정을 하고 일어섰습니다. 일어서서 저만큼 걸어가시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왠지 버림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또 내가 아무리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당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위하여 그 약속장소에 가야 하고 그들과 함께 아름다운 무용공연을 보면서 행복을 음미해야 할, 그것은 당신이 당신의 가정을 가지고 있는 한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특히 지상에서 가장 가까운 끈으로 묶여 있는 당신과 당신의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비집고 들어갈 한 치의 틈도 없다는 것을 어제처럼 절실하게, 그리고 처절하게 느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과연 나는 당신에게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일까요. 당신이 내게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유일하고 전체적인 것인 데 비하면, 나는 당신에게 있어서 당신의 아이들과 아내 다음에, 남아서 비어 있는 조그맣고 이차적인 자리를 겨우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어제는 얼마나 선명하게 내 가슴에 부딪쳐 왔던지, 공허하고 억울한 감정에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싶었습니다. 아벨라르. 나의 이런 생각이 잘못인 줄은 물론 압니다. 당신은 당연한 일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나를 쓸쓸하게 하는 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과 질투의 감정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어찌 그리도 왜소하고 비참하며 억울해지기까지 했는지... 마치 내가 당신에게 희롱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던 참담함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당신을 열렬히 희구해도, 또 당신을 나의 남자라고 굳게 믿고 있다고 해도, 엄연하게도 당신은 다른 여자의 남편이며 두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마치 전혀 모르고 있던 일에 접했을 때처럼 강한 충격으로 나를 쓰러뜨리려 했습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가려고 준비했던 발레공연의 입장권 두 장을 찢어 버리고 하릴없이 밤 거리를 헤매다가, 우리가 함께 자주 들르던 카페에 들려 술 한 잔을 청하고 망연히 앉아 있었습니다. 카페에는 마침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그 도입부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 왜 하필이면 이 밤, 이 시간에 운명교향곡인가요? - 라고 나는 소리지르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그 비통한 울림에 짓눌리어 다시 한번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아니 나는 쓰러지고 싶었습니다. 마구 흐트러진 내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그냥 밖으로 내쏟아 나의 참담한 배반감에서 헤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요.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이었습니다. 결코 당신이 나를 배반한 것도 아니며, 당신은 그들 쪽으로 가지 않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충분히 양해하고 인지함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묘한 배반감으로 괴로와지는 것은 왜일까요? 사랑의 전제적 힘-상대에게 모두를 요구하며,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절망하게 되는, 강렬한 전제적 힘이 나의 몸속에서 불길처럼 끊어올랐고, 끝내 나의 욕구는 눈물로 터져나오고 말았습니다. 얼마 동안을 울고 있던 나는, 나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비참해져서 그 카페를 나와 다시 어둠 속을 지향없이 걸었습니다. 마주 보이는 아파트의 창에는 따뜻한 불빛들이 새어 나와, 그 속에 인간의 생활이, 낮은 웃음소리와 다정한 눈짓과 평화로운 분위기의, 안정된 인간의 삶이 있다는 것을 내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것은 살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마음과 몸을 섞으면서,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하기도 하면서, 서로 위안하고 위안받고 의지하면서, 질기고 건강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따뜻한 증거였습니다. 아벨라르. 나는 그 많은 창문의 불빛들을 바라보면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생활... 그래요. 나는 생활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연애가 아닌 당신과 함께 하는 생활을 나는 열렬히 염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옷을 손질하고 아침 커피를 끊이고 당신과 함께 외출하고 돌아오면서 누리는 생활을 내가 얼마나 간절히 원하고 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밤마다 창에 불을 밝히고 서로 자기의 일에 열중하기도 하고, 그러다 지치면 편안히 잠들 수 있는 생활. 아무 불안이나 긴장감이 없이 자연스럽게 풀어져서 서로를 바라보고 안심할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가정이라고 하는 견고한 울타리를 만들어 그 속에서 서로를 확인하고 서로를 도우며 두 사람이 하나의 `우리`가 되는 것을 나는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늘 당신에게서 뭔가 불만 같은 것을 느끼고 목말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가정을 이룰 수 없는 우리의 관계에서 오는 결핍감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벨라르. 내 속에서 강렬한 힘으로 자라고 있는 이 두려운 소망을 내가 어찌 당신 앞에 내보이겠습니까. 우리가 늘 주장하고 있듯이 지적 반려, 영혼의 반려자로서 우리는 자족해야 하며, 그 이상을 원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비극적인 종말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나는 비애와 좌절로 맥이 풀려 집으로 돌아와, 캄캄하게 불이 꺼져 있는 나의 방, 내가 외출을 하고 나면 사람의 체온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나의 방에 돌아와서 `외로움`의 의미를 온 몸으로 느끼면서 어둠 속에 그냥 쓰러졌습니다. 전에는 그처럼 편안하고 자유롭던 나의 방이, 왜 어제는 내게 그토록 무섭고 외롭고 차디차게 느껴졌던지, 나는 덜덜 떨면서 온 몸을 움추리고, 꽉 다문 입 사이로 새어나오는 울음을 밀어넣으며 나 자신을 힐책했습니다. 아, 그렇게도 절망적이었으면서도 아벨라르. 나는 당신이 마냥 그립기만 했습니다. 행여 당신이 전화라도 걸어 주지는 않을까, 밤 늦게라도 내 문을 두드려 주시지는 않을까,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아벨라르. 어제는 내게 있어 참으로 최악의 날이었습니다. 나의 질서에서 완전히 이탈되어 걷잡을 수 없는 혼돈 속으로 내닫는 듯한, 최악의 상태로 하얗게 밤을 지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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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찬란한 여명 그리고 선각자의 고독
"조선국포교일지"
1866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선주는 미국인 프레스턴이었고, 덴마크인 선장 페이지와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 그리고 청국인 통역 이팔행 등을 포함하여 서양인 5명, 청국인 13명 등 총 23명의 승무원 중에는 다섯 사람의 흑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흑인을 오귀자라고 불렀던 일부 조선의 지식인들까지도 그 몰골을 처음 보는 지경이었고, 또 신식대포가 뿜어내는 화력에는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1866년 7월 12일부터 같은 달 24일까지 13일 동안, 대동강을 피로 물들였던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병인양요'의 개막을 알리는 이양인과의 본격적인 접촉이자, 조선 개항사를 여는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었다. 물론 '제너럴 셔먼'호는 평양 부민들의 화공으로 참혹한 종말을 맞았지만, 바로 이 점이 흥선대원군의 자부심에 불을 질렀다는 점에서 우리 근대사의 진로를 대단히 어렵게 하였다. 그리고 두 달 후인 9월. 프랑스함대가 내침하여 천하의 요새임을 자랑하던 강화도를 점령하여 쑥밭으로 만드는 이른바 '병인양요'가 발발했다. 프랑스군 병사들은 외규장각에 보존된 귀중한 문화재를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프랑스군이 강탈해 간 외규장각의 전적은 전체 3백 40여 책 중에서 1백 91종, 2백 97책이나 되었는데 대개가 '왕실의궤'류의 귀중본이었다. 함대 사령관 로즈가 본국의 해군성 장관에게 보낸 서신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역사적, 과학적 견지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물건들을 수색, 수집하였다.
이 문장으로 보면 저들의 조선 문화재약탈은 치밀한 계획하에서 이루어진 야만적인 행위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역사는 무심히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그로부터 1백 28년이란 긴 세월이 흐르고 난, 지난 1994년 9월에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내한하여 '병인양요' 때 약탈해 간 "휘경원 원소도감의궤" 상권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돌려 주면서 '영구 대여'라는 구차한 명분을 달았으나, 실상은 자국의 떼제베(TGV) 고속전철이 한국의 경북간 고속전철로 채택되기를 기대하는 염원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역사가 지나간 과거만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지는 맥락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도 드물 것이다. '병인양요'로부터 5년 뒤인 1871년. 이번에는 미국함대가 내도하여 다시 강화도를 유린한 '신미양요'의 진화가 일었다. 조선으로서는 어재연 장군 형제를 비롯한 4백여 명의 장병들을 잃어야 했던 참혹한 전쟁이었지만, 미국은 스스로 이 '신미양요'를 일러 '미국의 전쟁 사상 가장 작은 전쟁'이라고 했고, 또 '승리는 승리였으나 누구 한 사람 자랑할 것도 못 되었으며, 누구 한 사람 기억에 남겨 두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자평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사정은 판이하게 달랐다. '신미양요'를 기점으로 도성의 변화한 거리와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 오랑캐를 물리쳐서 나라를 보위한다는 이른바 개항과는 거리가 먼 양이, 보국 정책을 더욱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때로부터, 1백 24년이 지난 지금도 강화도의 광성보에는 미해병들에 의해서 쏘아진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그때의 결전을 실감케 하고 있으며,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4백여 명의 무명 순절 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서 있어 무심히 지나는 길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때를 전후하여 명치유신에 성공한 근대 일본정부는 왕정회복의 기치를 펄럭이며 공공연하게 정한론을 거론하였고, 조선과 충돌할 수 있는 전단을 찾는데 혈안이 되더니 마침내 대만을 무력으로 침공하여 점령하는 등 극동의 정세도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1875년 8월. 유신 일본국은 '운양호사건'이라고 일컬어지는 무력 도발을 감행하며 조선침략의 마각을 드러냈고, 뒤이어 '강화도 조약'이 강제 체결되면서 조선땅에 일본인들의 상륙이 허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저들의 공관보다 앞서 일본 불교의 포교를 빙자한 사찰이 부산포에 상륙했다는 점이다. 일본국 교토에 본찰을 둔 히가시홍간지에서 승여 오쿠무라 엔싱과 그의 여동생인 오쿠무라 이오코를 부산포에 보내 동본원사 부산별원을 개원하게 한 것이었다. 오쿠무라 엔싱은 일본국 구주의 나가사키 현에 있는 고덕사의 주지였는데, 이 고덕사의 역사에도 일단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덕사는 임진왜란 때 부산포에 있었던 일본 사찰이었다. 그 사찰을 오쿠무라 엔싱의 13대조 할아버지 오쿠무라 소신이 개창 하였다면, 장장 3백여 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13대 선조의 유훈을 다시 이어받은 것이 되지를 않겠는가. 1591년 도오툐미 히데요시를 돕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오쿠무라 소신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조선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가라쓰 땅에 절터를 정하고, 번주 데라사와의 허락을 얻어 고덕사를 세운 것은 언제든지 조선땅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소망 때문이었는데, 그로부터 3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서야 뜻을 이룬 셈이다. 오쿠무라 엔싱과 함께 조선땅으로 건너 온 그의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코의 존재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그녀의 행적을 살펴보면 비록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장부의 기상을 넘어서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오쿠무라 이오코는 일본인 낭사들과 더불어 국사를 논할 만큼 남성적이며 정치적인 성향이 강했고, 이미 세 번에 걸친 이혼 경력이 있으며, 정한론자들과도 가까이 지내면서 조선 진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던 여장부였다. 후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스스로 종군하기도 하였고, 일본국으로 돌아가서는 '일본애국부인회'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특히 갑신정변 이후, 금릉위 박영효가 일본땅에 망명하였을 때는 그의 통역이며 여비서요, 간호원임을 자처할 만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오라비 오쿠무라 엔싱이 자필로 적고 있다면, 조선 개항사를 거론하면서 오쿠무라 남매의 활동을 추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두 남매가 명치유신을 이끌어 낸 근왕파의 일원으로 분류된다면 그들의 조선 진출이 정치적으로도 무관하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지를 않겠는가.
오쿠무라 엔싱이 조선에 머무는 동안, 히가시홍간지의 별원은 전라도 광주에도 개설되었고, 함경도의 원산별원도 문을 열게 된다. 오쿠무라 엔싱은 조선에서의 포교활동을 세세한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조선국포교일지"라는 일기체의 귀중한 기록에는 당시 조선국의 사정도 심심찮게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고종 15년 4월 9일에는 부산포의 용두산을 포위하고 호랑이 사냥을 했다는 시를 남기고 있어 당시 부산포의 사정이 어떠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호랑이는 잡지 못했어도 이 시로 미루어 1백 18여 년 전의 용두산이 얼마나 숲이 울창한 심산이었던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할 뿐만이 아니라, 예의 "조선국포교일지"에는 개화당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유홍기의 모습도 그려져 있으며, 특히 이동인의 밀항과 일본에서의 활동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어 조선개항사의 연구에도 귀중한 사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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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Messiah)
구세주를 가리키는 말. 히브리어로는 '기름 부음을 받는 자'의 뜻인데 희랍어에서는 '크리스토스'라고 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구약시대에는 예언자, 사제, 왕 등에게 성유를 붓는 습관이 있었다.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 이 세상에 강탄한 그리스도는 예언자, 대사제, 왕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는 구세주라하여 '메시아'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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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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