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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56 호
단기 4340. 3. 23 (음력 02.0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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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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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신인상 작품을 아래와같이 공모합니다. |
타성에 젖은 우리 시단에 새로운 실험정신을 보여주고 |
21세기 한국문학의 주역이 될 |
역량 있는 신인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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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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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 이상 또는 장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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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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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200자 원고지 70매 안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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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마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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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4월 20일(20일자 우편소인 유효) 하반기 10월 20일(20일자 우편소인 유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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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낼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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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서구 송현 2동 160-1 시와반시사 편집실 (우편번호:704-342/ 전화 : (053) 654-0027/ 팩스 :(053) 622-03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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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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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은 당선작과 함께 발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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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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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기 여름호(6월 1일 발행) 하반기 겨울호(12월 1일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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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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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패 및 소정의 원고료를 드리며 창작활동을 적극 지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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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의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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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응모봉투에 <신인상 응모작품>이라 밝힐 것. ㆍ원고의 앞표지에 응모자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등 인적사항을 밝힐 것. ㆍ작품이 있는 페이지에는 일체 인적사항을 기재하지 말 것. ㆍ평론 응모자는 앞표지에 학력과 논문이나 저서가 있을 경우 밝힐 것. ㆍA4용지에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할 것. ㆍ응모 원고에 대해서는 반환의 책임을 지지 않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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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당신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하루는시작된다. / 존 차디 (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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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四十五章 (노자 - 도덕경 : 제4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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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躁勝寒. 靜勝熱. 淸靜爲天下正.
대성약결, 기용불폐. 대영약충, 기용불궁. 대직약굴, 대교약졸. 대변약눌. 조승한. 정승열. 청정위천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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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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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다섯째 장
직역
크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것 같다. 그 쓰임이 낡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찬 것은 비었는 것 같다. 그 쓰임이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곧은 것은 구부러진 것 같고, 큰 재주는 졸속한 것 같고, 크게 말하는 것은 어눌한 것 같다. 뜀으로 추위를 이기고, 고요함으로 뜨거움을 이기고, 맑고 고요한 것이 하늘 아래의 바른 것이다.
해석
크게 이루어진 것은 완성이 되어서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진행형이다. 시대에 따라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아니 그 틀에 이미 시대성을 초월한다. 그것이 큰 그릇이다. 성경과 고전은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가 말한 시대는 아주 오래 전이다. 현재는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그 시대와는 생산 체제가 다르다. 그러나 그 시대의 말이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인간 이해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것은 그 시대에 따라서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전해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식이 아니다. 진리 탐구에 대한 열망이다. 상식은 당장 이루어진 것 같다. 그리고 실생활에 매우 필요한 것이 틀림없다. 그에 반해서 진리에 대한 탐구는 매우 쓸모가 없고, 좀 덜떨어진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상식은 시시각각 변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열망은 인류에게 아직도 남아서 굽이친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이 아직도 읽히는 것이다. 그것이 모자라 보일지라도, 그 쓰임이 상식같이 일회적이고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의미의 해석이 새로워지기 때문에 아직도 연구되는 것이다.
바다를 본적이 있는가. 바다는 차 있는가. 비어 있는가. 바다는 바닷물로 차 있다. 그러나 바다는 비어 있다. 크게 찬 것은 이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크게 말한다는 것은 말을 잘한다는 것이다. 말을 잘하는 것은 그가 쉬지 않고 말을 쏘아 댄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말을 잘할 뿐이다. 말이란 무엇인가. 서로간의 의사 소통이 아닌가. 말은 의사 소통의 도구이다. 따라서 서로간에 의사 소통이 잘되는 것이 목표이다. 진정으로 깊은 표현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눈빛으로 몸으로 하는 것이다. 느낌이다. 그리고 말을 잘해도 상대가 감복을 받지 않으면 그것은 헛된 에너지의 낭비이다. 단 한마디의 말에도 상대의 동의를 얻어내고, 그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이 말을 잘한 것이다.
추우면 어떻게 하는가. 뛴다. 더위면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조용히 있는다. 이것은 당연하다. 어려운가. 고요함과 맑음은 하늘 아래의 바름이다. 움직이는 것은 열이 난다. 세상에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열이 난다. 그럼 어떻게 하는가. 쉬어야 한다. 고요함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움직임에 치중한다. 세상이 움직이고 자신이 움직인다. 쉴 줄을 모른다. 노는 것도 쉬는 것이 아니다. 노는 것도 움직임 에너지의 소모이다. 이제는 쉴 때이다. 더울 때 열이 날 때 쉴 줄 아는 것이 도이다. 추우면 뛸 줄은 안다. 배고프면 움직일 줄은 안다. 그러나 열이 날 정도로 움직이면서 쉴 줄을 모른다. 그것이 욕망에 대한 추구이다. 이것은 쉴 줄을 모른다. 스스로 열에 받혀서 자체 폭발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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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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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가장 잘 이루어진 것은 오히려 모자란 듯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써도 그 효용은 다함이 없다. 가장 크게 차 있는 것은 마치 빈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작용은 그침이 없다. 가장 크고 곧은 것은 굽은 것 같고, 가장 흠잡을 데 없는 기교는 서투르게 보이고, 가장 유창한 웅변은 더듬거리는 것처럼 들린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추위를 이기고, 고요히 있으면 더위를 이긴다. 맑고 고요함으로써 천하의 바른 것이 되는 것이다.
주
대: 크다, 위대하다, 무한하다의 뜻임. 인간의 상식적 가치관을 초월하는 본체계를 말함. 노자는 '크다'는 말을 도와 동의어로 쓰고 있음. 크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이 보인다. 노자는 이 장에서도 특유의 역설적 수사법을 구사화여 도의 진면목을 바로 보지 못하는 상식적 가치판단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역문에서는 대를 '가장 잘'로 표기하고 있음. 졸: 서투른 것, 졸열. 조: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것. 정: 바른 것, 바르고 곧은 것, 정을 우두머리의 뜻으로 풀이하는 이도 많음.
해
위대한 완성은 부족한 듯이 보이고, 크게 곧은 것은 굽은 것 같고, 탁월한 기교는 서투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도의 세계이다. 도의 세계가 이렇게 인식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과 경험을 초월한 형이상학적 세계에 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예에 안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추사의 탁월한 작품도 서툰 글씨처럼 보게 마련이고, 미술에 조예가 없는 사람은 칸딘스키의 추상화에 공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도는 완성되고 충만한 세계이지만 일반의 상식적 안목으로는 부족한 것으로만 인식되는 것이다. 이 장에서도 노자는 그 특유의 역설적 표현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우리의 상식적 가치판단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노자를 읽고 있으면 우리의 상식적 가치관의 허와 실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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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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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팔만대장경 도난사건
"해인사에 보존되고 있는 세계적인 문화재 "팔만대장경판" 중 10여 장이 분실되어 있었다."
1969년 10월에 서울과 지방의 신문들이 일제히 보도한 중대한 뉴스였다.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를 위촉받았던 서수생 교수와 조명기 박사가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 을 54년 만에 처음으로 낱낱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낸 것이었는데, 그 내막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자 관리당국과 학계는 미처 알지도 못했던 사실에 모두 충격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문화재관리국에 보고된 분실 경판은 18장이었다. 그러나 이 분실 숫자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또한 그것들이 언제 어떻게 도둑을 맞었는지 정확한 내막은 이미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과거의 총독부 기록 하나가 뒤에 색출되었다. 1937년 12월 20일, 당시 해인사 주지 장제월이 미나미 총독에게 (국보 및 사찰재산 도난 보고의 건)이라 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면 보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년 8월 28일, 당사가 안장하고 있는 고려대장경판목 전부를 만주국 정부의 의뢰로 탑탁(인출)함에 있어 허가를 상신했던바, 본년 9월 11일부로 본부(총독부)의 인가가 내렸기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 다카하시 박사와 지휘 밑에 인경공사를 실시할 제, 당사 소유 국보 고려대장경 판목 및 당사 소유재산 귀중품이 도난되었음을 발견하였음. 도난당한 날짜는 미상임."
그리고 뒤에 도난당한 경판명을 적고 있는데, '대반야바라밀다경' 1장, '대장엄경론' 1장, '대장경목록' 1장, '석교분기원통초' 1장으로 돼 있다. 앞의 도난보고를 받은 총독부에서는 다음해인 1938년 2월 25일부로 경남 도지사에게 "해인사 대장경판(당시 보물 제111호)과 기타 귀중품 도난의 전말을 상세하게, 그리고 시급히 조사하여 보고하라" 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 그 뒷조사 보고는 기록이 없어 상세하지 않으나 그때 도난당한 경판 4장이 되돌아오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최근에 획인된 '18장' 의 분실 경판은 그 4장을 포함한 숫자로 생각되는데 나머지는 그 뒤에, 아니면 같은 무렵에 모두 도난당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1937년의 '팔만대장경' 인경 때엔 두 벌을 떠서 한 벌은 평북 영변의 보현사에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때의 대대적인 작업장(경판고) 경비책임자는 해인사 지구 경찰관 파출소였다. 이 파출소의 주임은 전부터 악질 순사부장으로 유명한 일본인이었다. 과거의 총독부 고적조사 서류철에 입각하여 현지에서 청취된 증언은 1937년의 경판 및 귀중품 도둑이 바로 그 자였다는 것이다. 대장경의 인경 현장을 보호·경비한다고 칼자루를 휘두르며 얼씬대던 순사부장이란 자가 그 경판들이 보통 보물이 아닌 것을 알자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8천 장도 넘는 산더미 같은 경판들 속에서 4장쯤 슬쩍 빼 가진들 누가 알랴 싶었는지도 모른다. 뒷날 누군가가 그 자의 집에서 목격한 바로는, 훔쳐 온 4장의 대장경판을 일본식 4각화로(소위 이로리)의 외곽으로 붙여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그것이 또 어떻게 되었는지 알 도리도 없다(또 다른 증언을 빌리면 그때의 범행자가 가야면의 다른 순사부장이었다고는 한다). 돌어켜보면 1915년에 총독부에서 오다 등 7명이 해인사에 파견되어 '팔만대장경판' 에 대한 첫 조사를 했을 때 결판이 18장이었고, 뒤에 그것을 보각하여 채운 것으로 돼 있으나, 그것들도 그전에 일본인 무법자들이 훔쳐 갔었는지도 모른다.
불상, 탑, 동종 할 것 없이 사찰문화재가 일본인 악당들에게 닥치는 대로 약탈되던 한일합방 전후의 무법시대에 해인사의 대장경을 노린 자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곳의 '팔만대장경판' 을 최고의 보물로 일본인 사회에 알린 조사보고가 1910년에 이미 간행되고 있어 그럴 가능성은 더욱 짙다. 무라야마라는 일본인이 경위를 알 수 없는 (해인사대장경 조사보고)를 발표하였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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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 사상별로 본 한국 철학
3. 유학의 한국적 전개
유학이 언제 우리 나라에 전해졌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그 정확한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단지 원시 유학의 실천 윤리는 한자의 전래와 더불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사군 설치 이후에는 경학 중심의 한대 유학이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유학이 전해진 것은 삼국 시대부터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각국에는 원시 유학에 나타나는 효제충신의 윤리와 경학 그리고 전장 제도로 기능화된 한대 유학이 들어와 정치의 이념 및 교육 제도 등 여러 방면에서 기능하였다. 특히 신라는 우리의 고유 정신에 원시 유학의 도덕 실천 정신과 불교 및 도교를 접목시켜 화랑도를 탄생시켰다. 후기신라의 유학은 원시 유학의 인의, 효제충신 등 도덕 정신과 중국의 한대 이후 이어온 경학 사상에 당대의 사장학까지 곁들여진 대단한 규모의 유학이었다. 유학의 도덕 이념은 국학의 설치와 독서삼품과의 실시 등을 통해 국가 이념의 바탕으로 발전하였다. 주자학 도입 이전의 고려 유학은 건국 초기에는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데 작용하는 동시에 왕도 정치의 정신으로 발휘되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는 불교, 유교, 도교, 토속 신앙을 모두 조화시키고 있으나, 그 중 5개조에 걸쳐 유교적 정치 이념이 반영되어 있다. 광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기간은 유학이 고려에서 틀을 잡은 때였다. 유학 경전을 시험 과목으로 하는 과거제를 실시한 것이라든지 최승로가 '시무28조'를 올린 것 등은 유교적 정치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고 유교적인 방식으로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고려 중기에는 최충을 비롯한 사학 12도가 나와 유학 경전을 위주로 학생들을 교육하였다. 그 후 사학이 쇠퇴하고 관학이 다시 흥성하면서 예종, 인종, 의종 때에는 경전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유학적인 역사 의식을 기초로 씌어진 김부식의 "삼국사기"등 학술 서적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유학은 사장학으로 기울면서 부화에 빠져 의종 때 발생한 무신의 난과 함께 이윽고 침체에 빠지고 말았다. 고려 말기에 이르자 주자학이 수입되었다. 주자학은 고려 충렬왕 때에 원으로부터 안향이 들여 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말에는 불교의 말폐로 말미암아 사회가 혼란과 침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에서 새로운 학풍의 진작이 요구되었다. 이후 백이정, 권부, 이색, 정몽주, 길재와 같은 뛰어난 유학자들이 연이어 나와 주자학을 발전시켰다. 이들 유학자들은 불교에는 현실의 인간 윤리를 도외시하는 약점이 있다고 보았다. 주자학은 점차 고려 말 사대부들의 이념이 되었으며, 조선 왕조가 개국하면서 조선 왕조 500년 역사, 문화, 정치, 교육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고려 말 주자학자들은 불교를 비판하고 유학을 숭상하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새 왕조의 창업과 관련해서 이 새 왕조의 창업에 참여하는 세력과 구왕조를 중흥하려는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을 빚었다. 전자는 혁명론을 강조하고, 후자는 의리론을 주장하였다. 의리파의 대표적 인물이 정몽주와 길재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 건국 이후 정몽주와 길재에게는 의리의 정당성이 부여되었다. 의리론의 흐름은 유학적 이념 집단인 사림파로 이어져 조선조 도학파, 의리파의 정맥으로 굳어졌다. 그 반면 혁명론자인 정도전의 맥은 권근으로 이어져 조선 왕조 초기의 훈구파 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조선 왕조는 유학을 정치 이념으로 삼아 불교를 배척하였다. 유학의 입장에서 불교에 대한 비판을 체계적으로 전개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이는 그 당시 정치 상황에 맞추어 유학을 숭상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적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주자학자인 권근은 "입학도설" 및 "시경천견론" 등의 오경천견록을 지어 주자학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소개하였는데, 특히 "입학도설"은 조선 왕조 중기의 성리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태조에서 성종에 이르는 기간 유학자들은 조선 사회를 주자학적 질서로 재편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 결과 유학적 정치는 정치적 안정과 더불어 민생의 안정도 가져 왔다. 특히 성종 때부터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파 유학자들은 주자학적 순수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도학 정치를 주장하였는데, 이 도학 정치는 정몽주의 의리 정신과 연결된다고 평가받고 있다. 정몽주의 의리 정신은 사육신, 생육신 등의 행위로 나타났고, 이어 조광조의 도학 정치를 통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도학 정치를 표방하는 사림파와 기존의 훈구 세력 사이의 갈등은 수 차례 사화를 불러오지만, 사화기를 거치면서 유학은 오히려 사상적으로 성숙 단계로 접어들 수 있었다. 서경덕과 이언적을 거쳐 이황과 이이에 이르러 주자학적 사유는 조선에 탄탄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황과 이이는 조선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인물들로 후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의 주자학은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는 인간 내면의 성장과 도덕 가치의 문제를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이황과 기대승, 이이와 성혼간의 사단칠정, 인심도심에 관한 논쟁은 리기성장론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켰다. 이 후 조선의 학계는 이황을 따르는 퇴계 학파와 이이를 따르는 율곡 학파라는 양 학파를 형성하여 발전하게 되었다. 그에 반해 이 시기에 들어온 양명학은 이단시되어 배척당하였으며, 이에 따라 공공연한 연구가 불가능하였다. 그 후 17세기에 이르러서야 조선의 대표적인 양명학자로 평가되는 정제두가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주자학의 내면적 도덕 원리를 탐구하는 인성론은 정구, 김장생, 박세채, 허목 등에 의하여 유학의 행위 규범인 예에 관한 상세한 학설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 주자학계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사물의 본성과 같은가 다른가 하는 이른바 인물성동이 논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것은 주자학 이론이 심화 발전된 것이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주자학적 경전 해석의 독존적 지위를 비판하고 자주적으로 유학의 경전을 해석하려는 학풍이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윤휴, 박세당 등의 학문이다. 이들이 일으킨 학풍은 아울러 주자학의 이론 지향적인 경향에 맞서 실천적인 경향을 띠기도 하였다. 이들의 학문은 조선조 실학자들의 사상 경향과 내재적인 맥락을 갖는다고 본다. 이들의 실천적 경향은 곧 실학자들의 경세론으로 나타났다. 17세기 중기에서 19세기 초기까지 이어진 조선의 학풍이 실학이다. 실학자들은 주자학이 강조하는 내적 수양이나 도덕 이념보다는 현실의 구체적인 민생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들은 주자학의 교조적인 이념 추구보다는 원시 유학이 지니는 실천성, 즉 도덕의 실천과 민본주의의 현실적인 실천이라는 경세적 측면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와 동시에 주자학의 권위화된 이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양명학, 서학, 고증학 등의 학문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주자학의 이론적 탐구를 심화시켜 가는 경향도 이어졌다. 이현일, 이항로, 기정진 등의 리 중심의 철학과 임성주 등의 기 중심의 철학이 그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원론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리 중심 철학의 철저한 이념 지향을 바탕으로 한 이항로, 기정진 등 개항을 전후로 한 의리 학파의 이론은 척사위정론으로 나타났다. 그 뒤 양명학을 바탕으로 하면서 주자학적 이념 지향에 반대한 박은식의 유교 구신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현대에 유학이 기능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깊이 따져 보아야 할 문제이다. 유학이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유학은 낡은 것이라고 무조건 배척하는 태도는 잘못이다. 그러나 현대의 산업 사회가 빚어 내는 모든 문제를 단지 유학의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족 윤리로 해결하려는 태도도 그에 못지 않은 잘못이다.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누려야 한다는 것은 인류의 이상이다. 도덕이란 인간다운 삶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이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아름답게 맺어 주는 끈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각성은 시대를 초월하여 필요한 것이다. 한편 가장 가까운 인간 관계는 가족이다. 그러므로 삼강오륜 등 봉건적 사고를 과감히 벗어 버리고 도덕적 인간 사랑이라는 유학의 보편적 의의를 밝히는 방향으로 새로운 가족 윤리를 정립해 나아간다면, 유학이 무언가 현대에도 공헌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 더 읽어 보아야 할 책들 한국동양철학회, "동양철학의 본체론과 인성론"(연세대학교 출판부, 1982) 노사광, "중국철학사", 정인재 옮김(탐구당, 1986) 장대년, "중국철학사방법론", 양재혁 옮김(이론과 실천, 1988) 하급수, "중국철학문답", 황희경, 황성만 옮김(한울, 1991) 중국철학연구회, "논쟁으로 보는 중국철학"(예문서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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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초리
본뜻 : 사람의 뒤통수나 앞이마에 뾰족이 내민 머리털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부분이 마치 제비의 꼬리같이 생겼다고 해서 제비초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것을 흔히 제비추리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제비추리는 소의 안심에 붙은 고기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혼동해서 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뀐 뜻 : 사람의 앞이마나 뒤통수 끝에 제비 꼬리처럼 뾰족이 나온 머리털을 가리킨다.
"보기글" -너 뒤통수에 나온 제비초리가 참 매력적이구나 -앞이마에 난 제비초리 때문인지 그 사람 첫인상이 손오공 같더라구
적이
본뜻 : 적게나마
바뀐 뜻 : 말 그대로 '조금'이라는 뜻이다. 흔히 쓰는 '저으기'는 잘못 쓰는 말이다.
-소식이 없어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그나마 편지라도 받으니 적이 마음이 놓이는구나. -전쟁이 난 곳이 이란이 아니고 이라크라니까 적이 안심이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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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7.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대표 없이 과세 없다
세금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말썽이 많았다.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이것이 커져 혁명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건들, 예를 들어 영국혁명이나 프랑스혁명, 미국독립전쟁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은 단지 세금이 가혹하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세금이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부과되었다는 점이다. 근대 국가가 성립되면서 각국은 국가의 재정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거두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왕이 자의적으로 세금을 부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시에도 초보적인 형태이긴 했지만, 국민의 대표가 모이는 의회가 존재하고 있었고, 세금의 부과는 오로지 이 의회의 몫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회의 동의를 얻어 세금을 부과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이 의회를 소집하여 세금을 부과해 달라고 하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동의해 줄 의회는 없었다. 오히려 과세를 문제삼아 왕을 괴롭힐 뿐이었다. 그래서 왕은 될 수 있으면 의회의 동의를 얻기보다는 대금융가들에게 손을 빌리거나 편법으로 과세하려고 들었다. 대금융가들에게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고 파산을 선고한 왕들도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이 어쩔 수 없는 지경에 빠지면 왕도 별 수 없이 과세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혁명이나 프랑스혁명도 그러한 경우였다. 약간 사정은 다르지만 미국독립전쟁이 벌어지게 된 배경에도 이와 유사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1763년 영국은 일찍이 없었던 막대한 채무를 안고 있었다. 그 해에 끝난 '7년 전쟁'을 치르는 데 너무나 많은 돈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 전쟁에 승리하여 국가의 위신을 드높일 수는 있었지만, 문제는 국가의 체면이 막대한 채무를 어찌해 주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영국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미대륙 식민지에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고, 그 징수를 엄격하게 하는 길이었다. 당시 영국내의 세금은 이미 과중한 터여서, 국내의 세금을 더 올리려다가는 예상치 않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설탕법을 내세워 설탕에 대한 세금을 엄격하게 징수하는 한편, 모든 신문과 잡지, 법적 문서, 심지어 트럼프까지 인지를 사서 붙이도록 하는 인지법을 공표했다. 이것이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식민지인들 사이에서는 세금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는데, 이 인지법이 그러한 불만을 폭발시켰던 것이다. 특히 인지법은 다른 세금과 달리, 직접 호주머니에서 꺼내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식민지인들은 이 세금의 부당함을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식민지인들이 볼 때 자신들이 영국에 세금을 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1620년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좀더 나은 생활을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올 때함께 이곳 식민지는 아름다운 낙원이 아니라 불모의 땅이었다. 그런 땅에서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내면서 이제 살만큼 만들어 놓았는데, 다시 세금으로 빼앗아 간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직접 행동에 나서는 한편 영국 정부에 항의할 법적 근거를 찾았다. 그것이 바로 "대표 없이 과세 없다."였다. 이들은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것은 영국 헌정의 기본이므로, 버지니아인에게 과세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버지니아 의회뿐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영국 관리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사실이 그랬다. 그들의 주장대로 그것은 중세 이래 영국 헌정의 전통이었다. 이제 명분을 지닌 식민지인들은 영국과의 정년충돌도 불사하기 시작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주장을 제기한 사람은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9-1799)라는 젊은 변호사였다. 당시 29세에 불과했던 그는 1765년 5월 버지니아 의회가 소집된 가운데 이러한 제안을 내놓았다. 이것은 결국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중요한 근거였다. 패트릭 헨리는 온건하고 유화적이며 종교문제에 있어서는 성인이지만, 정치에 있어서는 악마 그 자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아주 급진적이었다. 과거에 사냥꾼, 상인, 농부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실패를 거듭했지만, 타고난 웅변을 밑천으로 삼아 갑자기 변호사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는 성서와 리비우스의 역사서를 주로 애독하였고, 간명하고 고전적인 표현을 한 명연설을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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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숨어 있는 신기루
오늘 아침 신문에는 어떤 유명인사의 이혼사건이 크게 실려 있었습니다. 이런 기사를 대할 때마다 나는 몹시 불쾌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전체에 대하여 적이 실망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그런 사실이 왜 세상에 드러나고 추한 소문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하물며 공공 보도기관에 의하여 보도까지 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남녀의 일이란 그 두 사람밖에는 알 수 없는, 결코 타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아주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이는 한 쌍의 남녀가 별스런 큰 이유도 없이 헤어지는 것을 보는가 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녀가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어울리는 데는 정신적인 일체감과 육체적인 일체감을 동시에 갖지 않으면 매우 기형적이고 심한 갈등이 생겨나게 마련이지요. 유교사상에 젖어 있던 조선조 오백년 동안의 대부분의 우리나라 여성들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그들은 다만 집안의 일을 돌보고 자손을 낳기 위해서만 그들의 육체를 필요로 했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늘 애정에 대한 갈구와 그 애정을 충분히 즐기지 못하는 한이 맺혀 있었고, 남자와 사회제도에 의하여 늘 억압되고 갇혀 있는 성의 갈등으로 괴로와 했습니다. 그들의 성은 오직 자손을 번성하는 생식의 역할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원시적인 모권제도의 풍습이 미미하게나마 남아 있던 신라나 고구려, 백제에서는 더러 자유연애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는 향가나 설화를 찾아볼 수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우리의 고대소설속에서 다룬 남녀의 문제는, 정절을 목숨 같이 여기는 여자의 얘기였고 또, 근대소설에서 다룬 남녀의 문제도 거의가 가정 중심의 윤리관을 바탕으로 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서구의 문화가 흘러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의 여성들도 매우 개방적인 성도덕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 또한 염연한 현실입니다. D.H.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영국에서 일어났던 외설물 시비와 출판금지 사건은 세계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흔히 성의 문제는 비도덕적이며 죄악이라고 비난을 받기가 쉬운 일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모두 그것에 대한 은밀한 욕망을 갖고는 있으면서, 백일하에 드러내기는 부끄러워하는 내방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작가로서 성의 문제를 매우 아름답게 다룬 작가로는 아마 이효석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효석은 자연주의 작가로서 매우 감각적이고 향토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인간 본연의 건강한 생명의 동력과 신비성을 추구하고자 한 작가였습니다. 야생의 건강미와 인간 본연의 것을 추구하기 위하여는 성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었고, 감각과 관능이 자연과 교류하고 있는 화음의 상태, 교감의 상태를 그는 즐겨 다루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성이란, 모든 생명과 인간이 나누는 단순한 본능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설은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리듬이 가득히 깔려 있고 그의 문장은 매우 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이효석과 거의 같은 연대에 살았던 D.H.로렌스의 작품은 이효석보다 훨씬 농도 짙은 성의 문제를 다루었지만, 그 역시 성을 단지 쾌락으로서 다룬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떤 초월적 세계, 이상적 세계에 이르는 지름길로 보았습니다. 현대의 기계문명과 산업주의에서 인간이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육체에 뿌리박은 성의 법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그는 남녀의 욕망을 자연의 질서라고 했으며, 남녀의 결합을 우주의 리듬과 합치하는 부드러움이라고 했습니다. 로렌스나 이효석보다 먼저, 그러니까 연애를 성애와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었던 19세기 전반의 철학자인 쇼펜하워(Arthur Schopenhauer. 1788~1860, 독일)는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습니다. “모든 연애란 그것이 아무리 영묘함을 가장한다고 하더라도 성 본능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또 프로이드는 `연애는 리비도(Libido. 애욕)가 승화된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인간을 지나치게 성적인 존재로 규정한 프로이드나, 정신적인 연애를 무가치한 것으로 본 소펜하워의 설에 나는 결코 전적인 동의를 할 수는 없지만, 남녀의 관계에 있어서 성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것이라는 점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이 자신의 결핍을 메꾸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에서 나오는 것인 이상 정신 뿐 아니라 육체에도 그 결핍에 대한 의식이 있기 마련이며 그 모자람을 충족하고자 하는 욕구가 당연히 따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본래 정신적인 존재인 동시에 육체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전인적인 것일 때 정신적인 것 뿐만이 아니고 육체적인 부분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벨라르. 나는 사랑에 있어서 육체적인 결합이 곧 완전한 결합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이라면 정신적 사랑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육체의 욕망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욕망을 부끄럽게 생각할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사람의 정신세계는 제삼자로서는 결코 들여다볼 수 없는 미묘한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육체에도 개개인의 비밀이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한 남자와 여자의 결합과 헤어짐에 대하여, 어떻게 제삼자가 옳고 그름을 논할 수가 있겠습니까. 연애란 가장 인간적인 정신생활의 정수라고 나는 믿고 있으므로, 사랑과 사랑 아닌 것과의 분별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사랑은 신적인 것이어야 하며 상대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또, 창조하기도 하며 상대를 위하여는 어떤 것이라도 헌신하고자 하는, 거의 신앙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신적인 것이라든가 신앙에 가까운 것이라고 해서 인간이 갖고 있는 육체적인 조건을 외면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온 정신과 온 육체로 전인적 사랑에 몰두함으로써, 그들만의 초월적인 세계로 도달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은 숨기고 가꾸며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또 반드시 지켜져야 합니다. 마치 신앙이, 남에게 과시하거나 자신의 장식적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되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한 성경의 말씀처럼, 남에게 자랑하지 않고 선과 덕을 쌓으면서 신의 사랑 안에 닿아야 하듯이, 사랑 또한 그렇게 지켜져야만 하며, 사랑하는 두 사람만의 전 재산으로 온전히 보전하고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남녀의 문제는 그들끼리 해결하고 마무리지어야 할 만큼 미묘하고 복잡한 여러 가지 감정의 얽힘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남의 말이나 생각으로 결정되고 비난받을 성질의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숨어 있을 때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세상에 드러나면 비천한 사람들의 입과 생각에 의하여 때묻고 긁히어 손상되고 마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사랑은 상식을 뛰어넘는 어떤 초월의 세계이므로, 상식적인 사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의당 그것은 한낱 웃음거리가 되거나 불결한 것으로 보이게 되는 거지요. 그러기에 사랑은, 사랑을 해 봤거나 사랑하고 있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이며, 타산적이고 공리적인 세상의 눈으로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신기루와 같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생애 동안, 그 이상한 신기루를 발견한 사람이야말로 지복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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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심양에서 돌아온 환향녀
최명길과 김상헌
요즘 신문지상에 가끔 오르내리는 말에 '열지자도 가요, 습지자도 가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알기 쉽게 풀면 '찢는 사람도 옳고, 줍는 사람도 옳다'가 된다. 이 말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심오하다. 어떤 일이 극단적인 이견으로 대립되어 있을 때, 그 상반된 견해에 대하여 양쪽 모두 일리가있다는 것이므로 일종의 명분론으로 자주 인용되는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협상의 길을 여는 중요성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양시론이 생겨난 데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1623년, 광해군을 밀어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이 암암리에 추진해 온 실리외교에 대한 방향전환에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반정으로 광해군을 밀어냈던 인조인지라 광해군의 향금정책을 지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조정 중신들의 의향도 향명배금이었다. 이런 연유로 인조 5년에 정묘호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당하게 된다. 이 무렵에 등장하는 것이 최명길이 주도하는 '화친론'과 김상헌이 주도하는 '척화론'이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목숨을 건 대립이었지만, 여기서는 그 배경을 상세히 기록할 지면이 없으므로 간략히 적기로 한다.
최명길이 주장하는 '화친론'은 당시 조선의 힘으로는 욱일 승천의 기세로 치솟아 오르는 후금의 국력을 당할 수 없으므로 서로 화친을 하여 조선의 안위를 보전하는 것이었고, 김상헌의 '척화론'은 이미 2백 년이나 섬겨 온 명나라가 있으니 오랑캐와 화친을 꾀하는 것은 도리를 모르는 금수의 소행이므로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는 이 두 가지 대립을 놓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최명길의 '화친론'에 타당성을 부여하게 되지만, 당시의 사정으로는 그 명분에 있어서 김상헌의 '척화론'이 우위에 있었으므로 최명길의 '화친론'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매국노의 누명을 써야 할 만큼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명길이 보여 준 공직자로서의 소신과 용기에 아낌없는 박수와찬사를 보내게 된다. 만일 최명길이 명리에만 급급하는 안일무사한 생각으로 자신의 소식을 아랑곳하지 않고 시세에만 영합했다면, 오늘 우리의 처지가 어찌 되었을까 하는 아찔한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와 같은 '화친론'과 '척화론'의 첨예와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 조선 조정은 또다시 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라는 전대 미문의 국난을 맞이하게 된다. 결과론이지만 최명길의 '화친론'이 조정의 공론으로 채택되었다면 병자호란과 같은 참극은 경험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가 매국노로 몰릴 만큼 '척화론'이 우세한 당시의 정세로서는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남한산성이 청나라 병사들에게 완전 포위된 지 23일째인 1637년 1월 18일, 조선 조정은 마침내 청나라의 진영에 화친을 청하는 국서를 보내기로 했다. 바로 그 국서를 찢어 팽개치면서 최명길을 질타했다.
"지천, 자네의 선대부께서는 사우들 사이에서 지조 있는 선비라고 추앙을 받았는데, 자넨 어찌 그 모양인가. 선대부께서 통곡을 하시고 계실 것일세!"
그러나 최명길은 태연히 대답했다.
"대감께서는 찢으셨지만, 저는 도로 주워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최명길은 김상헌이 찢어 팽개친 국서를 주워 모아서 풀로 붙인 것이다. 찢은 사람은 김상헌이었고, 주운 사람은 최명길인 셈이었다. 여기서 '열지자도 가요, 습지자도 가'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두 사람의 상반된 견해를 모두 옳다고 보는 것은 두 사람의 참뜻이 모두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이 꼭 한 가지일 수만은 없다. 김상헌의 명분론도 때로는 필요한 것이었으나, 그 어려웠던 시기에 실리론을 펼칠 수 있었던 최명길의 용기는 더욱 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참으로 절묘한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도 한다. 삼전도의 수항단에서 인조가 청태종 홍타이에게 치욕의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리면서 항복하는 것으로 병자호란은 매듭 지어졌지만, 화친을 주장했던 최명길과 척화를 주장했던 김상헌은 똑같이 청나라로부터 시달림을 받게 된다.
1641년, 전범의 죄인으로 청나라의 도성인 심양땅으로 잡혀가 하옥되어 있던 김상헌이 의주옥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심양땅으로 끌려가서 무기수들이 수감되는 남관의 옥사로 옮겨졌는데, 바로 그 자리에 투옥되어 있던 최명길과 조우하게 된다. 이 무슨 운명의 만남이던가. 그렇게도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했던 두 사람은 비로소 시심으로 서로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김상헌이 먼저 읊었다.
조용히 두 사람의 찾아보니 문득 백 년의 의심이 풀리는구려.
이에 대한 최명길의 회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돌리기 어렵고 나의 도는 고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돌리기도 한다오.
참으로 기막힌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서로 상극과도 같았던 주장을 되풀이하다가 그토록 사랑하던 조국은 패전국이 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적국의 감옥에 유폐되지를 않았는가. 그 애타는 이심전심의 우애로 두 사람은 7년 만에 서로가 품었던 오해를 풀어내는 순간이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강직한 사상은 다시 시로써 표현되어 나타난다. 여기서는 원문을 생략하고 핵심적인 부분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아침과 저녁은 바꿀 수 있을망정 윗옷과 아랫옷을 거꾸로야 입을쏘냐.
김상헌의 명분론은 패전국의 전범이면서도 이와 같았고, 불행을 같이하는 최명길의 실리론도 물러설 줄을 몰랐다.
끓는 물도 얼음장도 다 같은 물이요 털옷도 삼베옷도 옷 아닌 것이 없느니.
전쟁은 패전으로 끝나고 민초들의 고초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두 사람의 심저에 깔린 정기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만리타국에 있는 옥중에 유폐되어 있으면서도, 서로의 명분론과 실리론을 우정에 곁들여서 주고받을 수 있는 우리 선현들의 경륜이 아름답기 한량없다. 이 같은 선비들의 의식을 어찌 당파싸움으로만 매도할 수 있겠는가. 최명길과 김상헌이 주고받은 시문 화답을 조선땅에서 전해들은 이경여는 너무도 감동하여 한 편의 송시를 지어 두 사람에게 보냈다.
두 어른 각기 나라를 위한 것이니 하늘을 떠받드는 큰 절개요(김상헌), 한때를 건져 낸 큰 공적일세(최명길). 이제야 원만히 마음이 합치는 곳 남관의 두 분은 모두가 백발일세.
최명길과 김상헌.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흑백논리에 젖어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화친론'과 '척화론'의 상극된 대명사로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모두가 조선조 시대의 정쟁을 이단시하는 식민지 사관에 젖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지식인들은 아무래도 둥글면서도 도를 잃지 않은 최명길의 경륜과 용기를 더 높이 본 듯하다. 당시의 석학이었던 택당 이식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않았던가!
청음이 남한산성에서 나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비록 지조가 높은 행위이기는 하나, 역시 그가 남한산성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완성군(최명길)이 그 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정치에 관여하게 되면 국익우선이라는 이념은 같을지라도 대책에 있어서는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취할 수가 있다. 이러한 의견의 상충을 유독 조선 시대의 경우만을 당파싸움으로 규정하고, 마치 그것으로 인해 나라가 망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 인식이 편협한 데서 기인된 것이라고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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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모스(mammoth)
'맘모스'는 보통 '거대한'의 뜻으로 쓰인다. 이를테면 '맘모스 빌딩', '맘모스 대학', '맘모스 서울' 등. 빙하기에 살았던 거대한 코끼리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 코끼리는 이빨이 23m나 되고 길다란 털가죽으로 온몸이 덮여 있다. 시베리아의 툰드라 지대에서는 얼어붙어서 거의 살았을 때의 생김새 그대로 남아 있던 것을 발굴한 적이 있다. 아시아, 유럽에서 북 아메리카에서 이르기까지 북반구 거의 전역에서 그 뼈가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빙하기 말기에 전멸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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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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