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155 호
단기 4340. 3. 22 (음력 02.0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
한 마디 |
|
|
문학소식 |
계간 시작 신인상
2007년 제정된 <시작문학상>과 시상식 등의 일정을 맞추기 위해 다음과 같이 <시작 신인상> 응모 마감일을 변경합니다.
모집 부문 : 시 10편 이상 , 시비평 200자 원고지 70매 내외 1편 이상 모집 마감 : 2007년 12월 31일 발표 : 계간 [시작] 2008년 봄호 상금 : 각 부문 100만원
<유의사항>
1. 우편 발송시 겉봉에 반드시 <시작 신인상 응모작>이라고 써주십시오. 2. 응모된 원고는 반환하지 않습니다. 3. 심사위원은 본지에서 위촉하고 당선작과 함께 발표합니다. 4. 당선된 시인에게는 상금과 상패를 수여하고, 작품 활동을 적극 지원합니다. 5. 이메일을 통한 인터넷 응모도 가능합니다. 6. 중복 투고 사실이 밝혀질 경우 당선을 취소합니다. 7. 자세한 사항은 [시작] 편집부로 문의하십시오.
<보낼 곳> 주소 : (110-070) 서울시 종로구 내수동 72 경희궁의아침 3단지 오피스텔 331호 계간 [시작] 편집부 전화번호 : 02-723-8668(대표) 팩스 : 02-723-8630 e-mail : poemsijak@hanmail.net
|
|
글터 → 명언 / 격언 |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상대방이 스스로 알도록 하라. 그러면 그는 당신을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것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지
|
|
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四十四章 (노자 - 도덕경 : 제44장)
|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명여신숙친, 신여화숙다, 득여망숙병. 시고심애필대비, 다장필후망,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
|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
마흔 넷째 장
직역
이름과 몸중 어느 것이 가까운가. 몸과 재화중 어는 것이 귀중한가. 얻음과 잃음중 어느 것이 병인가. 이런 까닭에 심히 아끼다간 반드시 크게 쓰게 되고, 많이 숨기다간 반드시 크게 망한다. 만족함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때를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가히 오래가리라.
해석
이름이라는 것은 허울이다. 코카콜라라는 이름이 코카콜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갈증을 해소시켜 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름이 그 사물을 대변한다고 생각을 한다. 소나무라고 하면 우리는 늘 푸른 나무 그리고 솔잎이 있고 솔방울이 있는 나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소나무는 없다. 우리의 관념 속에 있는 소나무는 없다. 자연에 있는 소나무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그대로 독창적이다. 그리고 그 순간 순간 변화한다. 자라난다. 소나무는 인간이 붙은 이름일 뿐이다. 그것이 소나무 그 자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름이 그 사물을 대변한다고 생각을 한다. 노자는 말한다. 소나무라는 이름보다 소나무 그 자체가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그리고 다시 말한다. 몸과 재화중 어느 것이 더 귀한 가라고. 재화보다는 몸이 중요하다. 사람이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개인의 인격이나 신체보다는 재화가 더 중요시 여겨진다. 일억짜리 기계를 차에 싣고 가다가 사고가 나면 사람이 다친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지금은 사람보다 재화가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이것은 노자 시대부터 인간이 안아 온 고질적인 병폐이다. 재화란 무엇인가. 사람에게 유익하고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즐거움은 재화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知足함에서 즐거움이 오는 것이다. 그대는 무엇이 부족해서 재화를 추구하는가. 그것을 얻으면 만족하는가. 혹시 자신의 그림자를 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림자는 아주 가까이 있지만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것임을 아는가.
|
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
44.
명예와 생명은 어느 쪽이 더 절실한가? 생명과 재물은 어느 쪽이 더 소중한가? 이런 것을 얻는 것과 잃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사람을 병들게 하는가? 그러므로 재물을 지나치게 아까워하면 반드시 많이 쓰게 되고, 재물을 지나치게 많이 쌓아 두면 반드시 크게 잃게 된다. 만족할 줄 알면 치욕을 당하는 일이 없고 그칠 수 있을 것이다.
주
명: 명성, 명예. 친: 사랑하다, 친밀하다, 친애하다, 절실하다. 다: 소중함, 가치 있음. 병: 근심, 걱정, 번민, 번뇌. 애: 아끼다, 사랑하다, 집착하다. 후망: 잃는 것이 많다는 뜻. 욕: 모욕, 굴욕, 치욕. 영의 반대어. 장구: 오랫동안 지속함, 즉 편안함을 오랫동안 누린다는 뜻임.
해
이 장에서 노자는 세상 사람들이 명예와 재물에 현혹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을 경계하고 있다. 그것에 현혹되고 집착하다가 끝내는 패가망신한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들 수 있는 것이다. 명예와 재물보다는 자신의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사람의 만족감, 행복감이란 어떤 객관적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자이면서도 가난에 대한 공포와 결핍 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가난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봉사와 만족감으로 살아가는 여유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권세욕, 명예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결국 그 사람의 마음의 자세에 따른 문제일 뿐이다. 명예나 재물에 대하여 적당한 한계에서 만족하여 그칠 줄 알면 치욕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만족할 줄 아는 만족은 언제나 넉넉한 것이다.
|
|
|
글터 → 국사
|
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일본에 유출된 서적들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본 학계엔 조선 연구의 열기가 높았다. 동경제국대학의 한반도를 포함한 대륙관계 연구학자들이 조선총독 데라우치를 움직여 오대산 사고의 (이조실록) 1질과 기타 귀중한 사책 전부를 실어 갔던 처사는, 그러한 열기와 대륙으로 눈을 돌리던 일제 야욕의 일단이었다. 당시 침략적인 대륙진출의 연구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있던 동경제국대학의 이른바 '백산흑수문고'(우리의 오대산 사고본도 이 속에 들어갔었다)의 '백산흑수' 는 '백두산-흑룡강' 쪽을 목표로 한 침략의 야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와 같은 일본 학계의 조선 연구열은 구한말 이후 일제세력에 편승하여 이 땅에 건너왔던 안목 있는 일본인 무법자들로 하여금 각처의 귀중한 고서와 문헌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 혹은 수집케 하였고, 그 대다수는 조만간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약탈자들 가운데는 통감부와 헌병의 권력을 등에 지고 무법을 자행한 자가 많았다. 헌병을 앞세우고 간화 사고본을 백주에 약탈해 간 가와이는 그런 악질 중의 하나였다. 통감부 시절에 통역관으로 와 있던 마에나도 일제 권력을 배경으로 한국의 옛 책을 무수히 수집·반출해 간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수집이 모두 정당한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는 통감부 재직시에 강화도에서 실어 왔던 '정족산성 사고본' 을 비롯하여 곳곳의 전적 문화재를 매만지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적당히 귀중본을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빼앗음으로써 막대한 분량의 한적 컬렉션을 향유할 수 있었다. 뒤에 '마에마 장서' 로 통하게 된 이 한국 책들은 현재 도쿄의 '동양문고'(일본 국회도서관 산하)에 대부분 들어가 있다. 수집가 자신이 비망록처럼 해제한 (고선책보) 3책이 1934년부터 20여 년에 걸쳐 간행됐는데 그 내용은 놀랄 만큼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구한국 학부의 고문으로 왔던 헤이하라도 상당 분량의 한국 책을 수집해 간 일본인의 한 사람이었다. (조선법제사고)라는 논문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땄던 아사미의 방대한 한국 책은 일본의 미쓰이 재벌로 넘어가 '미쓰이문고' 로 보관되다가 2차대전 후 미국의 버클리대학에 팔려 갔다. '탁족문고' 로 알려졌던 가네자와의 한국 책들은 2차대전 중 미군 공습으로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밖에 일제 때 서울의 (경성일보) 주필로 있었던 도쿠도미의 '성기당문고' 와 오사카 시립도서관의 한국 책. 그리고 (삼국유사)(안정복의 수택본)를 포함하여 숱한 귀중본을 수집한 이마니시의 장서 등이 모두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이 땅에서 마구 약탈당했거나 휴지처럼 헐값으로 팔려 간 것들이다. 총독부 초기부터 고적조사위원을 역임했고, 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조선사 전문학자인 이마니시는 훗날 (삼국유사)를 입수할 때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대정 5년(1916년)에 경성의 한 책장수(조선인이었던 듯)가 (삼국유사) 1부를 제공하기에 꿈 같은 심정으로 좋아 어쩔 줄 모르면서 그것을 구입했다. 책은 실로 안순암의 수택본으로서 곳곳에 그의 자필지어가 있고, 더구나 귀중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완본인 '신전본'·'덕천본'에 탈루돼 있는 일곱 장을 완비한데다가 그 일곱 장에는 대단히 중요한 기사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전본'·'덕천본' 하는 것은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한적의 일본 안에서의 전래문고를 말한다. 이마니시는 또 미국으로 팔려 갔다는 '미쓰이문고' 의 수집가인 아사미가 한국 최고의 승전인 (해동고승전)(고려 고종 때인 1215년에 간행)의 유일한 낙질 2권을 입수해 간 것도 서울에서였다고 그의 (고려사연구)에 적고 있다. 모두 지난날의 부끄러운 기록들인데, 1913년 2월의 (매일신보) 사설이 당시의 딱한 정황을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몰지각한 부류들은 선조 및 고철의 영묵잔편을 진개처럼 여기고, 혹 몇 푼의 동전에 매각불석하니 인문의 쇠퇴가 어찌 이리 심하뇨. 가련하도다." (사설 제목은 (고서적의 필보호) ) |
|
|
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 사상별로 본 한국 철학
2. 유학의 전개
유학은 그것이 지닌 이상주의적 성격 때문에 진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는 이념으로 기능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 현실은 국력은 극대화할 수 있는 엄격한 법가적 전제 질서를 요구하였다. 따라서 천하 통일의 이념으로는 법가의 현실론이 차지하였다. 그러나 유가의 도덕주의적 이상은 현실에서는 비록 패배하였을망정, 오랜 중국의 역사에서는 오히려 유학이 생명력을 지닐 수 있도록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유학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진의 뒤를 이어 한이 정치, 사회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정립시키던 시기였다. 한대 초기의 유학자 동중서는 유학을 한의 지도 이념으로 삼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유학적인 소양을 인재 선발의 기준으로 삼는 데도 앞장섰다. 그는 유학에 음양오행설을 받아들여 천인감응설과 재이설을 주장, 전제 왕권을 절대화하는 데 이론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이후 전제 왕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 무제가 오경박사를 둔 이후 유학은 점차 한의 국교로 자리 잡았으며 이에 따라 경학이 확립되어 갔다. 유학이 국교가 되었다는 것은 유학이 국가의 보호를 받는 대신에 전제 권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다는 상호 공존 관계를 이루었음을 말한다. 그러나 한 멸망 후 위진남북조에서 수, 당에 걸친 시기에는 비록 훈고학적인 유학 경전의 연구나 사장학적 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는 불교와 도교가 번성하고 유학은 침체되는 양상을 보였다. 당 말에서 송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이전의 문벌 귀족 지배가 끝나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적 중앙 집권 체제가 구축되는 등 중국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혁기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송대 사회의 담당자들은 사대부 관료였다. 그들 중 개인적으로는 학문과 수양을 통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고, 정치적으로는 왕도의 실현을 목표로 한 이들이 이룬 학문이 바로 성리학(리학, 정주학, 주자학이라고도 한다)이다. 성리학은 원시 유학의 실천 윤리적 입장이나 한당의 훈고 사장학에 비하여 사색적이고 철학적이었다. 성리학은 유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을 확립하고 인륜의 실천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성리학자들은 도교와 불교의 학설이 현실적이지 못한 공허한 이론이라고 배척하였으나, 실제로는 유학적 관점에서 도교와 불교를 종합, 지양하고자 하였다. 성리학은 유학의 이론을 보완하여 형이상학적 근거를 마련하는 등 새로운 해석을 내린 학문이라는 뜻에서 신유학이라 말하기도 한다.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와 같은 여러 성리학자들의 사상을 종합하여 집대성한 사람이 주희이다. 주희는 태극을 리로 규정하고 이 리를 인간과 자연의 보편적 근거로 삼았다. 이것이 이른바 '성즉리'라는 것이다. 태극은 형이상의 리로서 주체와 존재의 근거이며, 형이하인 현실 세계의 모든 운동과 현상은 기의 움직임으로 설명되었다. 이것을 리기론이라 한다. 이 리기론을 인간에 적용하면 바로 심성론이 된다. 주희의 리기심성론에 따르면 우주만물을 성립, 생성시키는 리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관통되어 흐르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다고 한다. 주희의 인성론은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리, 즉 구체적으로 인의예지 등 도덕적 본성을 부여받고 있으며, 그 본성을 바르게 구현하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야 할 길이라는 도덕주의를 본질로 한다. 이는 사람은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주체의 강렬한 도덕적 각성을 주안점으로 하는 것이다. 주희는 만물의 근원인 유일하고 보편적인 리는 지적 탐구와 개인적 수양을 통해서만 체득될 수 있다고 이해하였다. 그것이 '거경궁리'라고 하는 학문 방법이다. 주희는 또 이른바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를 확립하여 새로운 경학을 완성하였다. 그는 사서의 이론적 관계를 통일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의 사상 체계 안에서 재구성하였다. 그 후 주자학자와 양명학자는 물론이고 그 밖의 학자들한테도 사서는 중요한 경서가 되었다. 사서오경에 대한 주희 및 그 학파의 주석서는 원대에 이르러서는 관리 등용 시험에 필수적인 교과서가 되고, 명대에는 "영락대전", "성리대전"이 편집되어 주자학은 관학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수립하게 되었다. 명대의 학자들은 점차로 리를 구명하기보다는 실천을 중시하는 쪽으로 나아갔는데,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이 왕수인이다. 왕수인과 그 학파의 학설을 양명학이라고 하는데, 양명학의 실천성은 자기 자신의 내적 각성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주자학의 '성즉리'에 대하여 '심즉리'라 표현된다. 그런 점에서 양명학은 본질적으로 주희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는 주자학의 영역 가운데 내적 수양 부분을 근본으로 삼고, 주자학에서 내적 수양과 동시에 강조했던 지적 탐구 부분, 즉 학문의 의의는 약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양명학이 실천 문제에서 주체를 강조하는 점은 주자학의 규범성에 질곡되어 있던 주체를 해방시킨다는 진보적인 의미를 띤다. 청대 초기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를 비롯한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관념적이고 이념적인 성격을 비판하면서, 한편으로는 경서의 의의를 밝히는 데 힘을 기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세치용의 실학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그 후 청대 유학의 일반적 경향은 널리 자료를 수집해서 정리하고 문자 용어의 고의나 고제 등을 구명하는 경학과 사학 등 이른바 고증학이 학계의 주류를 이루는 모습을 보였다. 청의 통치가 약화되고 서구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는 이러한 정세에 맞추어 학문의 개혁을 통해 서구 사상에 대처하고자 한 초기의 금문경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공양학이 나타났다.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 5, 4신문화 운동을 거치면서 봉건 체제의 이념으로서 역할하던 유학은 철저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중국 공산당의 유학 비판에 대한 반동에서 유학의 이념을 부활시키기도 하였다. 모택동의 사회주의 이념에 의해 통일된 뒤 중국에서 유학은 철저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 극치를 이룬 시기는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중반에 걸친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다. 문화대혁명의 구호는 바로 '비공', 즉 공자로 대표되는 유학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모택동 사후 중국의 개방화가 진행되면서 유학은 그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논의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고 있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장가들다
본뜻 : 현재 국어 사전에는 장가들다가 한자어가 아닌 고유어로 나와 있지만, 아내의 아버지를 장인, 어머니를 장모라고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장가의 어원이 처가 집을 가리키는 장가라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시집간다'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여자가 결혼하는 것을 시부모가 있는 시댁으로 '시집간다'고 하는 것과 같은 구조다. 결혼함으로써 여자는 시댁에 가는 것이니, 남자는 자연히 처가 집인 장가에 들락거리게 되는 것이다.
바뀐 뜻 :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장가들다' '장가간다' 두 가지 표현 모두 쓰인다.
"보기글" -노총각인 김 대리가 이번에 드디어 장가를 든다며? -장가든다고 하는 말이 맞아? 장가간다고 하는 말이 맞아?
잡동사니
본뜻 : 조선 시대 실학자 안정복이 쓴 "잡동산이"에서 온 말이다. "경사자집"에서 문자를 뽑아 모으고, 사물의 이름이나 민간에서 떠돌아다니는 패설 등 여러 분야의 다양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바뀐 뜻 : 순수하게 한 가지나 한 분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한데 뒤섞인 것을 가리킨다.
"보기글" -창고에 들어가 보니 쓸 만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잡동사니만 가득하더라 -잡동사니도 정리하다 보면 개중에 쓸 만한 것이 끼어 있기 마련이라구
|
|
|
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는데
역사상의 명언에는 출처가 확실치 않는 말이 많다. 우리 귀에 익은 이 말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가 진짜 한 말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녀의 삶을 통해서 반추해 볼 때 충분히 했음직한 말이기는 하다. 1789년 여름에 파리 민중이 식량 폭동을 일으켰다. 그해 봄의 보리 흉작으로 빵 가격이 폭등해서 서민들이 값싼 빵마저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7월 14일에는 파리 민중이 압제와 전제의 상징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프랑스혁명의 불길의 치솟았다. 또한 10월에는 6,7천 명의 파리 아낙네들이 베르사유 궁전까지 행진하여 국왕에게 압력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태가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앙투아네트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몰랐다. 밖이 시끌시끌하자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종에게 물었다. "밖이 왜 이리 시끄럽지?" 이에 대해 "파리 시민들이 먹을 빵이 없다고 아우성입니다."라고 시종이 대답하자 왕비는 말했다. "아니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않는가?" 왕비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일로 그녀는 당시 프랑스의 문제를 체험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 그리고 그의 아이들이 파리 민중에 의해서 베르사유 궁전에서 파리의 튀일루리궁으로 압송되었기 때문이다. 왕과 그 일족을 파리로 데리고 오면서 아낙네들과 파리 민중이 '빵집 주인과 그 마누라와 빵집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길이라고 외쳤다. 다른 이야기도 있었다. 7월 14일 바스티유 함락의 날, 국왕 루이 16세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사냥을 나갔다가 폭동 소식을 들었다. 일기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한 줄만 썼다. 사냥에서 얻은 성과가 없었다는 뜻이다.
(Marie Antoinette, 1755-1793)
이처럼 루이 16세나 왕비 앙투아네트는 민중의 고통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몰락이 눈앞에 닥칠 때까지도 그들은 궁정생활이 주는 안락함에 안주했던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공주로서 마리 테레시아 여왕의 딸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정적이었던 부르봉가로 시집와서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다. 정략결혼인 셈이다. 겨우 14세에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와서 화려한 나날들을 보냈다. 딸기에 크림과 사탕을 발라먹는 풍습은 그녀가 시작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빵과 과자의 일화가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혁명의 와중에서도 그녀는 철저히 반혁명적인 행동을 보여 민중의 분노를 자극했다. 애인인 스페덴 귀족 페르센과 짜고 왕과 함께 국외로 도주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그후에도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를 부추겨서 프랑스혁명에 대한 무력간섭을 촉구했다. 그러나 1792년 8월 봉기 이후 루이 16세와 함께 투옥되었던 마리앙투아네트는 1793년에 먼저 처형된 남편 루이 16세를 뒤따라 파리의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때 그녀 나이 38세였다. 이미 왕년의 아름다움은 완전히 없어졌다고 한다. 당시 절대왕정의 위기의 근본 원인이었던 재정궁핍을 고려함이 없이 허영과 부분별한 사치 등으로 평판이 좋지 못했던 앙투아네트는 결국 민중의 아픔에 둔감했던 탓으로 비참한 종말을 맞았던 것이다.
|
|
|
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아이를 갖고 싶어요
아벨라르. 일본의 신문학사상 가장 천재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는 다지이 오사무가 쓴 <사양>이라는 소설을 읽고 나는 매우 충격적인 감동을 얻었습니다. 이 소설 속에는 가즈코라는 여자가 등장하고 있는데, 패전 후 몰락하고 도태되어 가는 귀족의 비극적 삶이 가즈코의 독백과 그의 동생인 나오지의 수기로 엮어진 소설입니다. 이야기는 가즈코가 그의 어머니와 함께 동경의 니시가다 거리의 집을 팔고 이즈(일본 태평양 연안 지방명)의 중국식 산장으로 이사오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때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해의 겨울, 이를테면 일본의 전후 귀족의 몰락을 뜻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버지도 죽어 버렸으므로 생계는 오직 한 사람의 육친인 와다 아저씨가 돌보아 주었지만 세상이 바뀌자 별로 신통하지 못했고 더욱이 어머니는 중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동생인 나오지는 흡사 불량소년처럼 굴다 대학 재학 중에 소집되어 남방의 섬으로 출정한 후 소식이 끊긴 채 종전이 되죠. 결국 행방불명이어서 죽은 걸로 단념하고 있었습니다. 가즈코는 동생의 마약 중독으로 인한 약국의 빚이 원인이 되어 전 남편 야마기와 이혼하고 아기를 사산한 후 혼자 살기로 결심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동생의 스승인 우에하라 지로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녀는 어느날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어머님 나는요, 이 근래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인간이 딴 동물과 전연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말도, 꾀도, 생각도, 사회의 질서도 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물들도 모두 갖고 있잖아요? 그런데 다만 한 가지가 있어요. 그건 말이지요. `간직하는 일`이라는 것이에요.”
가즈코는 아내도 자식도 있는 애인의 사랑을 간직하는 것이 삶의 최대의 보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몇 차례고 애인에게 사랑의 편지를 씁니다. 물론 답장도 없고, 보내기만 하는 간절한 글월입니다.
“최초로 드렸던 글월 속에 저는 가슴 속에 걸린 무지개 이야기를 썼습니다만, 그 무지개는 반딧불의 빛깔이나 또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그렇게... 저의 가슴 속의 무지개는 불꽃의 다리입니다. 가슴이 터져 없어질 것 같은 간절함입니다. 마약 중독자가 마약이 떨어져서 약을 구할 때의 마음도 이렇게 괴롭고 간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즈코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동생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어느날 그녀는 우연히 동생이 마약 중독으로 괴로와 하고 있을 무렵의 일기를 발견하고 읽게 됩니다. 가즈코는 이때부터 동생의 죽음을 예감합니다. 얼마 후 어머니가 죽고, 이어 나오지가 애틋한 유서를 남긴 채 누이가 없는 틈을 타 산장에서 전혀 사랑하지도 않는 댄서를 옆에 두고 죽어 버립니다.
“누님! 나는 내가 왜 살아 있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전연 모르겠어요. 살아 있고 싶은 사람만이 살면 되지, 인간에게는 살 권리가 있는 것과 똑같이 죽을 권리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애절한 장문의 유서에서 나오지는 어느 중년의 화가 부인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면서, `누님만이라도 나의 오늘날까지의 생명의 괴로움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동생이 이룰 수 없는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의 좌절로 괴로와 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을 알게 된 가즈코는 그가 사랑해 왔던 우에하라 지로에게 거의 전투개시를 하는 것과 같이 전격적으로 그에게 자기를 내어던지기로 합니다.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 있을 수만은 없다. 나에게는 기필코 싸워 찾아야 할 것이 있다. 새로운 윤리라고나 할까,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사랑 그것 뿐이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그 슬픔 때문에 몸과 영혼을 게헤나(Gehena, 지옥)에 멸망시킬 수 있는 자. 아. 나야말로 그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라고 독백하면서 결국 아내도 자식도 있는 그의 애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에 다름과 같은 편지를 애인에게 씁니다.
“그리웠던 사람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제 도덕혁명의 완성입니다. 저의 가슴에 도덕적 혁명의 무지개를 걸어 주는 이는 당신입니다. ...저는 한결 같이 사랑의 모험적 성취만이 문제였습니다. 그 소원이 완성되어 이제 저의 가슴 속은 숲속의 호수처럼 조용합니다. 저는 이겼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낡은 도덕을 무시하고 좋은 아이를 얻었다는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사생아와 그 어머니 - 하지만 우리들은 낡은 도덕과 어디까지나 투쟁하면서 태양처럼 살아갈 것입니다.“
여자의 모성으로서의 본원적인 소원을 강력하게 피력하면서 기존의 도덕에 도전하고 있는 이 대담한 가즈코의 편지는 섬짓하리만큼 자학적으로 느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수했다고 생각하고, 그 뒤에 오는 모든 타인의 질시와 사회의 냉대를 감수할 것을 각오한 한 여인의 용기와 모럴은 매우 강하고 새로우며 도전적으로 보입니다.
아벨라르. 한 남자를 사랑해 본 여자라면 당연히 그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구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그의 아기를 갖게 되었을 때의 기쁨과 감동은 여자가 아니고는 맛볼 수 없는 매우 귀중하고도 강한 경험입니다. 물론 남자의 편에서도, 사랑하는 여자의 몸 속에서 그 자신의 분신이 잉태되고 있다는 것은 큰 감동이 되겠지요. 그러나 여자의 기쁨에 비하면 남자의 기쁨은 아무것도 아닌 미미한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완전히 그 남자를 소유하는 것 같은 만족감과 성취감에 이르게 되며, 그 아이를 통하여 그의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고 사랑하는 남자와의 끊을 수 없는 결속을 확인하게 됩니다. 여자는 아이로 인해서 스스로 그의 세계를 좁히고, 그의 자유를 고정시키며, 작은 우주 속에 안주합니다. 이 자유를 속박하는 일, 세계를 좁히는 일, 작은 우주 속에 안주하는 일은 한 여자가 어머니로서 성숙되고 위대해지기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만일 범속한 한 여자가 어떤 남자를 사랑하면서 그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고 아마도 단순한 우정에 지나지 않거나 쾌락을 향유하고자 하는 감정에 불과할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유의 정신에 닿아 있고 끊임없이 그 자유를 확인하고 살아가면서 지적 작업에 몰두해 있는 사람이나, 혹은 현세를 철저하게 즐기고자 하는 일부 서양사람들에게서 아이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더러 발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편의에 의해서 아이를 가지려 하지 않을 뿐이지 그 본능에 있어서 아이를 갖고 싶은 감정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사랑이나 감정보다 이성과 편리를 더 많이 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본능은 성적 충동과는 전혀 다른 매우 깊은 사랑의 근저에서 우러나오는 열망입니다. 그와 가장 깊이 맺어지고자 하는 열망, 그와 결코 끊어지지 않는 끈을 이루고 싶은 소망이 여자로 하여금 그의 아이를 갖고 싶게 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사랑을 시작한다”라고 어느 작가가 말한 것처럼 아이는 여자에게 있어서 거의 그 사랑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특히 그것이 열렬히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일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다시 소설의 얘기로 돌아가지만 가즈코의 모럴이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하는 판단은 개인마다 다를 것이겠지만 나는, 가즈코의 강렬한 모성 본능과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집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잉태하는 일은 그 남자와 여자를 근원적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사랑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벨라르. 기존의 도덕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일어선 가즈코의 용기에 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은 여자가 어찌 가즈코 혼자 뿐일까요. 모든 사랑에 빠진 여자들은 아마도 한번쯤은 그런 강한 욕구를 자기 속에서 느낄 것입니다. 그와 나를 하나로 이어 줄 아니, 그의 모습이 투영된 새로운 생명이 내 몸 속에서 자라고 있음을 확인했을 때의 그 황홀하고 만족한 상태야말로 사랑하는 남자를 가진 여자가 도달하고 싶은 최고의 소원이며 성취감의 정점일 것입니다. 행복이란 바로 그런 순간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내 가슴 속이 서늘하게 비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아무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한 가슴으로 시계의 초침소리를 헤아리며 나는 이 밤을 뜬눈으로 아프게 보내고 있습니다.
|
|
|
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심양에서 돌아온 환향녀
조선관
심양성. 심양성은 청나라의 첫 도성으로 만주대륙으로 이어지는 서북쪽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요충이다. 봉천이라고 불리운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옛 지명을 따서 그대로 심양으로 불리우며 동북삼성의 요충임을 자부하고 있다. 보행으로 왕래하던 조선 시대를 심양과 한양과의 거리를 대략 1천 6백 60리로 여겼으나, 지금은 대한항공의 직항로가 개설되어 2시간이면 오갈 수 있게 되어 가슴 아팠던 지난날의 역사를 쉽사리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심양은 옛날 읍루의 땅으로 한나라 때에는 요동군에 속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안동도호부에 속하였었다. 요, 금 2대에 와서 비로소 요양에 동경을 세우고 심주소덕군을 설치하였는데, 원나라에서는 심양로라고 불렀다. 명나라에서는 심양위를 두어 만주의 여진족을 경계하였으나, 광해군 13년에 후금의 태조 누르하치에 의해 함락되었다. 누르하치는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심양의 정령이 시급하다는 생각으로, 4년 후인 인조 3년에는 수도를 요양에서 이곳으로 옮겨 중원진출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청태종 홍타이치는 인조 9년에 거대한 내외 성곽을 쌓고 내성에 여덟 개의 문을 세웠으니, 남쪽 왼쪽에 있는 것이 덕성문, 그 오른편에 있는 것이 천우문, 북쪽의 왼편에 있는 것이 복승문, 그 오른편에 있는 것이 지재문, 동쪽의 남편에 있는 것이 무근문, 그 북편에 있는 것이 내치문, 서쪽의 남편에 있는 것이 회원문, 그 북편에 있는 것이 외회문이다. 성의 모양은 방형이고 문로는 가로 세로 성안을 꿰뚫어서 마치 우물 정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남과 북, 동과 서의 네 길이 서로 교차하는 곳에는 모두 십자누각이 서 있고, 그곳을 중심으로 민가가 즐비하여 시장이 성해 사람들의 생활이 무척 사치스럽다. 종루는 북소문이랄 수 있는 북승문 안의 큰 시가에 있고, 고루는 지제문 안의 큰 거리에 있다. 소현 세자와 봉림대군이 기거하던 '조선관'은 성내 동남쪽에 있었다고 막연히 전해지고 있었는데, 환력이 여섯 번이나 돌고난 새 병자년에 그 조선관의 규모를 알리는 '조선관도'가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청나라로 가는 사신에게 심양에 들려 '조선관'이 있었던 위치를 찾아서 그림으로 그려 오라는 영조의 명을 받은 사신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라면, 소현 세자가 볼모살이를 한 지 1백 20년 뒤에 그린 그림인 셈이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의 이규태 씨는 그의 칼럼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3년 전 옛 문헌에 기재된 글을 모아 이 심양의 조선관을 찾아 본 일이 있었다. 김창업의 연행록에 보면 심양의 대남문을 들어가서 1백여 보를 걸어가 동쪽으로 꺾어 드니 조선관터가 나왔다 해서 그 기록대로 방향을 잡아 발자국을 헤아리며 걸어갔더니 화양절충식의 'ㅁ'자형 2층집이 나왔다. 옛 심양지도에 바로 이 골목이 고려관호동으로 되어 있고, 일본제국주의 시대에는 이곳에 대동학원이 자리잡고 있었다는데, 바로 그 건물임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지금은 시립 심양아동도서관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도서관장은 장국철이라는 한국인 2세였다. 물론 그 장씨는 그 자리가 인질관터인지 모르고 있었다.
중국의 문헌인 "성경통지"에 보면 조선관 당시의 건물 배치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 이번에 발견된 그 1백 20년 후의 조선관 배치도와 비교하여 보면 이렇다. 대문은 3칸으로 남향이고 문을 들어서면 5칸의 정방과 동서 양편에 5칸씩 상방이 있다 했다. 뒷방에는 세자와 대군이 기거하고 호방 법규와 예절을 담당한 예방, 마필과 행차를 담당한 마방, 각종 수선을 맡은 공방이 들어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조선관도'에 보면 두 개의 상방 가운데 동상은 남아 있는데 서상만은 그려져 있지 않아 그간에 헐려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또 중문이 가로질러 있어 그 문밖에 하인들이 움막을 짓고 기거했으나, 노숙하는 자도 있었다 했는데 '조선관도'에는 그 중문이 보이지 않는다. 세자는 사신이 들렸다 떠날 때마다 이 조선관 기둥에 기대어 대남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지켜보다가, 그 문밖으로 나가면 신발을 끌고 문밖까지 나가 요동벌 아스라이 콩알만하게 겨자씨만 하게 작아지다가 하늘과 땅이 맞닿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한다. 치욕 문화재를 없애 버린다고 그 치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후세로 하여금 분발하게 하는 반사효과를 위해 보존하는 것이 앞서가는 나라들의 추세다. 이로써 문헌과 그림으로 확인된 심양의 '조선관' 터만이라도 정부 차원이건 민간인 차원이건 이를 매입 재건함으로써 관광자원, 정사자원으로 영구히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
|
|
글터 → 이글저글 |
만우절
'에이프릴 풀즈 데이'를 가리키는 4월 1일날, 악의없는 장난이나 거짓말로 사는 장난이나 거짓말로 사람을 속여 넘기는 습관이 옛부터 있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관습이 세계 도처에 널리 퍼졌으며 이에 속아 넘어간 사람을 '사월 바보'라고 한다. 이 풍습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유럽에서는 옛날 현행 달력의 3월 25일을 새해로 정하고 4월 1일까지 춘분의 축제를 지냈으며, 마지막 날에 가서는 친한 사람들끼리 선물을 교환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샤르르' 9세 때인 1564년, 새로운 달력을 채용하여 신년을 1월 1일로 정했다. 그러나 새 달력은 골고루 보급되지 못했고,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는 옛대로 4월 1일에 선물을 교환하는 예가 많았다. 개중에는 새 달력을 싫어하는 자도 있어 옛설달을 잊지 못하고 4월 1일이 되면 엉터리 선물을 주거나 잔치를 벌여 장난치며 즐겼는데, 이런 풍습이 차츰 각국으로 번져 나갔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 아직도 음력 설날을 못 잊는 것과 흡사하다. 또 영국에서는 옛부터 4월 1일에 축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17세기경 프랑스의 풍습이 건너와서 오늘날과 같은 만우절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동양에서 발생했다는 설로 있다. 즉 인도에서는 춘분날 불교의 설교가 시작되어 3월 31일에 끝난다. 설교를 듣는 동안 제법 믿음이 두터워졌던 사람도 이 날만 넘기면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기 때문에 3월 31일을 야유절이라하여 사람을 놀려주곤 했다는 것. 우리 나라에서 6.25동란 이후 미군의 참전과 함께 차츰 이 풍습이 퍼졌고 한동안 제법 유행하는 듯하다가 시들해졌다. 다만 112, 119등 비상용 전하가 짖궃은 장난꾼들의 허위신고로 골탕을 먹고 있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