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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54 호
단기 4340. 3. 16 (음력 01.27)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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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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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제12회 한겨레문학상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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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당신이 무엇으로 바쁜지 얘기해 주면 당신이 어떤인물의 사람인지 나는 곧 알아맞힐 수 있다. / 요한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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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四十三章 (노자 - 도덕경 : 제4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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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無有入無間. 吾是以知無爲之有益,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천하지지유, 치빙천하지지견, 무유입무간. 오시이지무위지유익. 불언지교, 무위지익, 천하희급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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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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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셋째 장
직역
하늘 아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하늘 아래 지극히 견고한 것을 앞서 달린다.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은 있지 않다. 나는 이로써 함이 없음의 유익함을 안다. 말없는 가르침, 함이 없음의 이로움을 하늘 아래 이것에 다다르는 자가 드물다.
해석
부드럽다. 물은 바위보다 잘 달린다.
견고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게 마련이다. 수용성, 지금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필요하다. 고정관념을 가지고 세상을 자신의 고정관념에 맞추려고 하면 결국 세상에 뒤지게 되는 것이다. 나무의 뿌리는 단단한 바위를 뚫고 자란다. 그 뿌리가 바위보다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무의 뿌리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과 부드러움이 단단한 바위를 뚫는 것이다. 들어갈 틈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들어가는 것이 생명력이다. 이것이 부드러움의 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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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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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물이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바위를 향하여 달려간다. 형체가 없는 공기는 빈틈이 없는 곳에도 무난히 스며든다. 말없는 가르침과 무위의 유익함에 필적할 만한 것이 이 세상에는 드문 것이다.
주
지유: 지극히 부드러운 것, 물을 지칭한 것임. 치빙: 말을 타고 달려간다, 돌진한다. 지견: 아주 단단한 물건, 바위를 뜻함. 무유: 비고 없는 것, 기를 뜻함. 왕필, 오증설 참조. 무간: 간은 빈틈을 말함, 무간은 빈틈이 없는 곳을 뜻함. 무유입무간은 형태가 없는 공기는 빈틈이 없는 곳에도 어려움 없이 스며든다는 뜻임.
해
이 장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약한 물이 지극히 단단하고 굳센 바위를 마멸시키며, 형체 없는 공기가 빈틈없는 곳에도 별 어려움 없이 스며들 수 있음을 예증하고 있다. 그리고 무위가 인위적인 것보다 유익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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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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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귀중한 장서들을 계획적으로 약탈한 가와이
엣부터 귀중한 서적은 다른 여러 분야의 문화재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때에 1차적으로 치명적인 약탈을 당했다. 나머지의 대다수도 그때 건물과 함께 왜병들에 의 해 불질러졌다. 이홍직 교수는 (임진란과 고전유실)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들(왜병)은 조선 팔도에서 마음껏 그 흉악상을 발휘하여 잔학한 살육은 물론, 사찰·관아·궁궐을 방화·파괴하여 역로의 유형적 무물은 거의 다 형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보물과 귀중한 문화재를 계획적 혹은 충동적으로 약탈하였다. 당시 왜장 우키다가 조선에서 약탈한 수십 궤짝의 서적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비서에게 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식자 있는 중들을 등용하여 계획적으로 관아·구가의 장서를 샅샅이 탐색하여 약탈해 갔다. 그것은 실로 놀라울 만한 수량에 달하여 조선에서는 임진 전 간행의 전적은 거의 씨를 말릴 지경이 되었다."(한국고문화론고, 1954년)
구한말과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통감.총독에서부터 여러 계층으로 무법의 약탈 및 불법반출자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두 번째로 당하는 치명적인 전적의 수난이었다. 1908년(융희 2년) 12월 29일, 경기도관찰사는 강화군수로부터 대략 다음과 같은 '정족산성 사고'의 중대사를 김급 보고받았다.
"한 일본인이 일본 헌병 2명과 헌병 보조원 5명의 호위를 받으며 전등사(당시 사고의 수호사)에 찾아와서 사고 안을 조사할 필요가 있으니 문을 열라고 강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드디어는 도끼로 사고의 문짝을 부수고 들어가 두세 시간이나 내부를 뒤진 뒤 21권의 서책을 가지고 갔음. 그 사실을 전등사 주지로부터 보고받은 즉시 강화군 헌병 분견소에 물어 그런 불법행위를 감행한 일본인이 대체 누구인가를 규명하여 본즉, 서울의 동양협회 전문학교(당시 일본의 동양전문학교 경성분교) 간사로 있는 가와이(하불홍, 하합홍민의 잘못 표기)란 자로서 통감부 헌병대장 아카이시 소장의 소개가 있어 그의 신분을 보호해주었다 함."
일본인들이 감히 사고에까지 침입하여 문짝을 부수고 사책을 훔쳐갔다는 중대한 사건은 경기관찰사로부터 다시 서울의 내각으로 즉각 보고되었다. 그러나 경찰 치안권을 포함한 모든 주권을 이미 일제 통감부와 헌병대에 빼앗기고 있던 허수아비의 대한제국 내각은 총리대신(당시 이완용)의 명의로 사건의 진상을 더 자세히 알아보되 강화도의 일본 헌병 분견소 소장과 책을 가져갔다는 일본인 가와이에게 조회하여 그 책들을 도로 갖다놓게 하라는 소극적이고 형식적인 지시를 경기관찰사 경유 강화군수에게 내렸을 뿐이었다. 모든 범죄 수사권을 일본 헌병과 경찰이 완전 장악하고 있던 터에 명목뿐이던 지방의 일개 군수가 무슨 힘이 있었으랴. 기왕에 체결된 협약과 조약에 따라 한국인 행정책임자를 강력히 보필하기로 약속이 돼 있던 일본 경찰도 헌병의 횡포엔 맥을 못 추고 있던 때였다. 1909년 3월 11일자로 경기도 경찰부장(일본인)은 통감부 경찰국장에게 그동안의 가건 경위를 조사·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발을 빼고 있다.
"인천 경찰서장으로부터 하등의 보고가 없으나 사건이 헌병대에 관련된 것이므로 본건 조사로 인하여 혹시 헌병과 충돌이 일으킬 염려도 있어 경찰에서는 일부로 조사를 단념하였기 내보하는 바임."(국사편찬위원회 보관문서)
결국 통감부 시절에 서울에 와 있던, 책을 알던 일본인 악당 가와이는 이론 헌병대의 무법의 세력을 업고 강화도의 사고본을 계획적으로 약탈하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그의 불법행위가 중앙에까지 보고됐었음에도 불사하고 헌병대의 비호로 버젓이 버틸 수 있었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가와이는 그런 악질적인 수법으로 귀중한 한국의 고서들을 마음껏 약탈 혹은 수집하여 일본으로 빼돌렸는데, 현재 일본 교토대학 부속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른바 '가와이문고' 가 바로 그것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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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 사상별로 본 한국 철학
1.1. 유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유학(또는 유교)이라고 하면 대부분 충효니 조상 숭배니 하는 단어를 떠올린다. 아울러 유학은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봉건 시대의 산물이어서 현대에는 걸맞지 않는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유학의 일면임은 물론 부인할 수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도덕의 회복을 주장하면서 유교적 가족 윤리를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아직도 무언가 현대 사회에서 기능할 면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랜 기간 생명력을 유지해 온 유학이 현대의 산업 사회에서도 우리 사회 의식의 밑바탕에 남아 무언가 요구한다는 것은, 유학이 단순히 구시대의 유물에 그치지 않고 역사 속에서 각 시대의 상황에 적절히 대응해 왔으며, 궁극적으로는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자기 안에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1.1.1. 유학의 성립
유학은 중국 고대의 위대한 사상가인 공자가 창시하여 이미 공자 당대의 기본 골격이 갖추어졌다. 그러나 유학은 시대 상황의 변천에 따라 그 시대의 요구에 맞게 이론을 보완하고 수정하면서 중국 전통 사상의 주류로서 자리를 차지해 왔다. 아울러 유학은 중국으로부터 문화적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 특히 한국과 일본의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유학은 비록 공자가 창시하였다고는 하지만, "옛것을 조술했을 뿐 창작하지 않았다"는 공자 자신의 말대로 그가 독창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공자는 이전의 여러 사상들, 예컨대 은대의 종교적인 상제 관념, 주대의 천명 사상과 조상 숭배 사상 그리고 인륜 질서인 예의 제도 등 전통 문화를 계승, 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유교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종합해서 정리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자각과 실천의 자율성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기존의 여러 관념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교육을 통해 이를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공자의 가르침이 바로 유학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보아도 별 무리는 없다. 유학은 유교를 학문이라는 관점에서 이름 붙인 말이다. 그런데 유교라고 했을 때 이를 불교나 기독교와 똑같은 종교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그렇지만 비록 유교에 종교성이 전혀 없는 바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주안점이 이들 종교와는 달리 철저히 현세의 윤리 도덕에 있다는 점에서, 이 유교는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학자의 가르침이라 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공자의 가르침은 인간의 자각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한 자각은 바로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인간은 서로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므로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물론 상호성을 지니지만, 자신이 남을 사랑하거나 남으로부터 사랑받는 일 모두가 실은 바로 자신의 일이다. 즉 인간의 문제는 인간의 자각을 통하여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공자 이전 은대에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상제라는 인격신을 숭배하는 경향이 강하여 모든 문제를 신의 손 안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므로 상제의 뜻을 헤아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고, 따라서 상제의 뜻을 헤아리는 방편으로 점을 치는 일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주대에 이르러 인간의 의식이 점차 각성되면서 부분적으로 인간의 자주성이 확보되는 것과 함께 통치자의 도덕성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주대의 천명 사상에 보이는 인간의 자각과 자율성은 보편적 인간의 자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통치자 계층의 자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덕적 자각과 실천의 자율성을 보편적 인간한테까지 확대시킨 이는 바로 공자였다. 여기에 공자의 위대한 공로가 있는 것이다. 물론 공자의 사사에 전통적인 신앙의 측면이 엿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자 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자각과 자율성에 대한 믿음, 즉 인간의 자주성에 대한 확신에 있었기 때문에, 미지의 영혼적인 것이나 죽음의 문제보다는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가, 어떻게 해야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올바르게 세워 가는가 하는 문제가 가르침의 중심을 차지하였다. 제자인 자로가 죽음과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은 뒤의 일을 알겠느냐? 살아 있는 사람도 잘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고 하여, 미지의 세계, 귀신의 영역에 대한 관심 이전에 인간의 현실적 삶에 대한 바른 태도와 성실성을 강조한 데서 이 점은 아주 잘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삶에 대한 경건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공자는 인간의 자각과 자율성을 강조하였지만, 그러한 강조는 개인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개인의 각성과 실천의 자율성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남과 나 사이의 관계를 통해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을 구하는 것이라 할 때, 공자가 구하는 사람의 길이란 바로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된다. 공자는 구도에 대한 정열과 구세에 대한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현실적 삶의 과정 속에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자 모든 사람이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이었다. 이것이 보편적 인간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유학의 기본 가르침이다. 구도의 길은 인의 길이며 사람이 가야 할 길이다. '인'이라는 글자의 뜻은 사람과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이란 인간의 개인적 각성 및 관계 속에서의 실천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으며, 다른 말로 인간다움이라 할 수 있다. 그 핵심 내용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공자가 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효제가 인을 실천하는 데 근본이 된다", "얼굴빛을 꾸미고 말을 교묘하게 하는 사람 치고 어진 사람은 드물다" 등등의 짤막짤막한 말로 인의 모습을 다양하게 묘사하여, 현실 생활 속에서 인이란 무엇이며 또 어진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을 뿐이다. 그의 가르침은 딱딱한 이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각자의 각성과 실천을 끌어 내는 현실 속의 산 교훈이다. 인간 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다. 그래서 공자는 효를 지극히 강조하였다. 효란 인간이 지니는 가장 근원적인 정감에 기초한다. 기본적 인간 관계의 근원적 정감을 바탕으로 삼아 그것을 확대해 가면 사회 전체의 질서도 바르게 된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효가 인간의 근원적인 정감에 기초하고 있다는 주장은, 인간 관계 속의 올바른 실천에 대단한 힘을 지니게끔 하는 것이었다. 중국 특유의 종족 관념과 관련 지어 볼 때 가족 도덕으로서 효를 강조하는 것은 당시의 사회 질서인 종족적 봉건 신분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한다고 하는 정치적 측면에서도 유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효의 관념은 충효라는 관념으로 확대되었으며, 이는 신분 질서를 나타내는 예와 더불어 근대에 들어 봉건 신분 질서가 무너질 때까지 오랫동안 유학의 생명력을 유지시켜 준 원천이 되었다. 이 인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이 예이다. 예란 인간의 질서와 관습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예는 인의 실천 과정에 있는 것이므로, 예는 인이 바탕이 되어야 비로소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공자가 말하는 예란 인간의 도덕적 각성을 바탕으로 올바른 인간 관계를 나타내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의 신분 질서는 예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예를 강조한 공자의 입장은 위정자의 도덕적 각성과 실천을 통해 각 개인을 교화시켜 도덕성을 제고한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이 세상은 도덕으로 가득하게 되고 천하는 평화로이 다스려진다는 것이다. 이는 곧 철인 정치의 이상과 연결되는데, 이것이 바로 덕치주의이다. 덕치주의는 뒤에 맹자의 왕도 정치로 이어지고, 이 후 유교 정치 철학의 근본 입장이 된다. 유학이 강조하는 덕치주의는 도덕적으로 뛰어난 위정자가 백성을 교화한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니만큼 통치자는 정치의 주체가 되고 피치자인 민중은 정치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이전에 민중을 오로지 생산의 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 도덕이나 예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여기던 입장에 비하면 진보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유학이 중국의 역사에서 봉건 사외 구조를 지지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뛰어넘는 보편적 가르침으로서 역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공자의 가르침인 유학이 바로 보편적 인간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구도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자가 세운 유학의 세계는 정밀한 이론적 체계라기보다는 생활 속의 실천 윤리라는 측면이 강하다. 공자의 유학을 나름대로 해석, 어느 정도 이론적 체계를 갖추어 세상에 널리 알린 사람은 공자보다 100여 년 후에 활동한 맹자와 그보다 50년쯤 뒤늦게 활동한 순자였다.
맹자는 공자를 성인으로 숭상하고 인을 인의로 확대 해석하였다. 또 공자의 덕치를 바탕으로 어진 정치인 왕도를 구상하고, 왕도는 민중을 근본으로 한다는 민본 사상을 제시하였다. 이 민본 사상, 왕도의 이상은 그 후 중국 봉건 사회의 갖은 제약 속에서도 민중을 위하는 정신으로서 긍정적인 기능을 하게 되었다. 한편 맹자는 도덕 실천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인간에게는 천부적으로 선한 도덕심이 고유하고 있으며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천부적인 도덕심을 '사단지심', '본심', '양지양능'등의 여러 말로 설명하였다. 인간의 본질이 선하다는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에 대한 공자의 신뢰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의 선한 행위란 내면의 각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선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맹자의 성선설이란 공자가 말한 인간의 각성 가능성을 이론적 근거로 해서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의 유학자들은 맹자가 공자의 가르침을 이론화했다고 여겨 맹자의 학설을 계승하였다. 특히 송대의 성리학자들은 맹자의 학설, 특히 성선설을 자신들의 인간론으로 받아들여 맹자를 공자 사상의 정통 계승자로 자리 매김하였으며, "맹자"를 사서의 하나로 규정하여 경전으로 격상시켰다. 맹자의 유학 이론화 작업은 당시의 제자백가들과의 사상 논쟁의 과정에서 더욱 다듬어진 것이다. 맹자의 이론은 공자의 도덕주의를 발전시킨 것이지만, 그의 이론은 당시의 현실에 비추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결함이 있었다. 이에 당상의 현실에 비추어 유가의 학설을 정비한 사람은 순자였다. 순자도 공자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그러나 순자는 공자의 학설을 맹자처럼 이상주의적으로 해석하지는 않았다. 그는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유가의 학설을 따랐지만 법가나 도가 등 다른 사상의 장점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관점에서 유학을 해석하였다. 순자는 개인의 도덕적 각성이라는 측면보다는 공동체의 전체적 질서와 조화라는 측면에서 유가의 학설을 발전시켰으며, 그 질서와 조화가 곧 예라고 이해하였다. 순자는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각성이 관계 속에서 바르게 드러나는 형식을 예라고 이해하는 대신,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그 기능을 밝힘으로써 유교의 예설을 합리적으로 구성하였다. 순자는 공자 이래 내려온 전통에 따라 인간이 자주적인 존재이며 자연적으로 고유의 정신을 갖는다는 신조를 지니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바로 도덕심이며 인간의 본질이라 보았던 맹자와 달리, 욕망이야말로 더욱 근원적인 인간의 본질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욕망을 무제한 추구한 결과가 사회적으로는 악이 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인 성이 악하다고 하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성악설은 인간의 본질이 악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주장되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이 주체적으로 분수에 맞게 욕망을 충족하거나 극복하는 것이 인간의 올바른 도리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악설을 말했을 뿐이다. 그 올바른 도리가 바로 순자가 말하고자 한 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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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자그마치
본뜻 : '자그마하게'에서 나온 말로서 '자그마하게 말하더라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바뀐 뜻 : 어떤 사물이나 돈의 액수가 예상보다 훨씬 많을 때에 '적지 않게'의 뜻으로 쓰는말이다. '자그마치 1억이나!' 하는 표현은 자그마하게 말하더라도 1억이나 된다는 말이니굉장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강조 부사다.
"보기글" -오나시스가 하루에 쓴 돈이 자그마치 1억이나 된다며! -지난 토요일 프로 야구 경기를 보러 잠실 구장에 모인 인파가 자그마치 5만이라며!
자라목
본뜻 : 자라의 짧은 목을 가리킨다.
바뀐 뜻 : 보통 사람보다 짧고 밭은 목이나 그런 목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때로는 어떤 사물이 오므라들거나 움츠러든 모양을 가리키기도 한다.
"보기글" -그 사람 왜 키가 작아 보이나 했더니 남유달리 자라목이더구만 -새로 산 터틀 스웨터를 한 번 빨았더니 자라목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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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우리들 다음의 대홍수
절대군주의 궁정에는 항상 아름답고 화려한 주제가 넘쳐흐르는 귀부인들이 등장한다. 그들 중에는 사교와 회화에 뛰어난 매력적인 여성이 많았다. 18세기 프랑스 왕궁을 빛나게 한 보바리 부인(Madame Bovary)은 이러한 상류사회 귀부인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품위있는 언행과 미모와 지성을 갖춘 그녀 주위에는 궁정 귀족뿐 아니라 예술가와 문필가들이 모여들었다. 계몽전제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던 디드로도 그녀가 주축이 된 모임에 가담하였다. 이와 같은 모임을 '살롱'이라고 한다. 상류층의 모임이지만 살롱은 확실히 그 시대 문화의 산실이었다. 파리 출신이었던 보바리는 매력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돈도 많았다. 국왕 루이 15세는 그녀에게 반해서 그녀를 베르사유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보바리에게 사랑의 포로가 된 루이는 그녀를 남편과 이혼하게 하고 후궁으로 삼아 가까이 머물게 했다. 그녀는 왕의 애인, 살롱의 여왕, 그리고 궁정의 아이디어맨이었다. 파리의 콩코드 광장도 그녀의 구상으로 만들어졌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거꾸로 세우는 헤어스타일, 지금도 '보바리풍'이라 불리는 헤어스타일을 유행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녀는 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외침을 이해하여 베르사유 궁전 가운데에 조그마한 전원풍의 궁전을 만들게 했다. 보바리 부인은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영화를 혼자 독차지한 것 같았다. 이때의 예술 양식을 로코코라 하는데, 섬세하고 아름다운 가구, 회화, 음악이 만들어졌고, 보바리 부인은 로코코의 여신이라 불릴 만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가 영원할 수는 없음을 그녀는 직감한 듯 하다. 그녀가 국가의 전쟁에까지 참견하여 그 결과 7년전쟁(1756-1763)에서 프랑스가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나쁜 징조였다. 그녀가 했다는 "우리들 다음의 대홍수."라는 말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프랑스 절대왕정의 몰락이 눈앞에 오고 있다는 예언이었던 것이다. 이 말을 한 것이 1764년 그녀 나이 42세 때였다. 대혁명까지는 25년 남짓한 시점이다. 어렴풋이 파멸을 예상하면서도 화려한 영화는 매우 아름다웠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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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하나가 되는 것
아벨라르. 세상의 모든 이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람에게는 성성과 수성, 선성과 악성이, 자연속에는 양과 음, 강과 약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감정 속에도 영적이고 정신적인 요소와 관능적이며 육체적인 요소가 아울러 있습니다. 이 영혼과 육체의 싸움, 밝음과 어둠의 싸움을 가장 심각하게 그린 작품이 괴토의 <파우스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두 가지 혼이 아! 나의 가슴에 깃들어 있다. 그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떨어지려고 한다. 하나는 격렬한 애욕으로 진드기처럼 현세에 붙어 있고, 또 하나는 속세를 떠나, 높은 영에 오르려고 한다.
-괴테 <파우스트> 중에서
이렇게 파우스트 박사는 괴로와 했습니다. 쾌락과 만족을 위하여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젊음을 누리고 순결한 처녀 그레첸(Gretchen)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파우스트, 그러나 결국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인간의 선성에 귀의하여 천국으로 가서 다시 그레첸을 만난다는 이 희곡은, 그 줄거리나 몇 마디의 설명으로는 불가능한 인간의 갈등과 고뇌, 선과 악, 육체와 정신의 싸움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정신적인 것만을 가지고 있다면 괴로움이라는 것을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정신에 대립하는 육체의 본능이라는 반작용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인간은 그 갈등과 고뇌를 통하여 창조와 지양을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일찍이 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덴마크)가 말한 바 `야누스와 같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우리들은 천국과 지옥, 고뇌와 행복, 육체와 정신의 사이에서 끝없는 갈등을 겪으면서 인간의 한계에 부딪쳐 좌절하기도 하고, 또한 인간만이 지닌 지고한 영혼의 자리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기도 합니다. 저 유명한 지킬과 하이드(Dr.Jekyll and Mr.Hyde. Robert louis Stevenson. 1855~1905, 영국)가 한 사람이면서 밤과 낮을 전혀 별개의 사람으로 살았던 것을 보면 인간의 내부에는 매우 강렬한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였으며 도학자였던 장자의 저서 <장자>에는 `류`라는 짐승이 나오는데, 이 짐승은 암놈의 역할도 하고 수놈의 역할도 하는 양성 공유의 동물입니다. 이 `류`가 암놈의 역할을 할 때는 얼굴이 예쁘게 되고 수놈의 역할을 할 때는 사나워집니다. 이것 또한 두 개의 얼굴 혹은 양면적 속성을 가진 만물의 근본을 상징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흔히 육체와 본능을 악의 편에, 정신과 영혼을 선의 편에 두는 많은 학자들이 그들 나름의 생각을 서술하고 제시하고 있지만,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 독일)은 “정신과 자연(육체) 서로가 서로를 동경하며 같이 거닐면서 이룩하는 고귀한 만남”이 곧 인간의 사랑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 몽떼뉴(Michel de Montaigne.1533~1592, 프랑스)는 그의 수상록에서, “육체의 욕망은 천하고 정신만을 높이 쳐드는 학자들의 가르침 때문에 사람들은 도덕적인 생활을 매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육체를 천하게 보고 정신을 희생물로 삼으려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물질로 환원한다면 아무리 큰 한국인이라고 할지라도, 비누 일곱 개의 지방, 한 사발 정도의 설탕, 성냥 2천개피 분의 인, 장난감 총알 한 발 분의 포타슘, 3센티 정도의 쇳조각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현시가 십여 만원어치 남짓한 값어치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어느 물리학자의 말을 생각해 보면, 물질로서는 인간의 가치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초라한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이, `영혼`이라고 하는 무엇과도 환치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비로소 인간일 수 있으며, 따라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심과 동시에 선악과를 창조하셨고, 또 하와로 하여금 그 선악과를 따먹도록 유혹한 사탄(Satan)까지도 창조하신 것은 바로 인간에게 육체와 영혼, 죄와 선을 동시에 불어 넣으시고, 그 영혼과 육체로써 신에게 가까이 가는 방법을 우리가 선택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1863~1952, 스페인 태생 미국 철학자)는 “완전한 육체의 결합은 그 자체가 곧 정신의 결합이다”라고 <아킬레스의 상 앞에서> 중에서 언급한 바도 있거니와, 인간은 신이 창조한 정신과 육체 어느 쪽도 경멸하거나 내버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인간에게 악이나 육체가 없다면 선이나 영혼의 고귀함을 알 수가 없을 것이며 추악함이 없다면 아름다움 또한 인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D.H.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1930, 영국)는 그의 <서간집>에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적나라한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서 완전히, 그리고 맹목적으로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곧 화해하는 일이며, 이 화해야말로 정신과 육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우주의 만물에까지도 그 의미를 확대해서 적용할 수 있는, 우리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벨라르. 적극적인 화해를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자유를 나는 갖고 싶습니다. 그 기쁨과 자유야말로 내 생명을 완성하는 길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맹목과 무아의 상태로 돌아가는 선으로서의 화해, 아름다움으로서의 화해를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며 추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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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심양에서 돌아온 환향녀
* 학문을 하는 자는 오직 정성을 다하는 것과 오래 계속 하는 데에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정성을 다하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요, 오래 계속하면 얻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이수광)
삼전도비 서울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는 강남땅 석촌호수가에 커다란 돌비석이 서 있고, 그것이 약 3백 50여 년 전 청나라의 강압에 의해 세워진 치욕의 '삼전도비'라는 사실은 늦어도 알려져 있지만, 그 비석에 담겨진 통한의 역사는 고사하고 비문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을 만나기는 정말로 쉽지가 않다. 우리는 치욕적인 과거의 역사를 뒤돌아볼 때마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일본제국의 조선침략과 36년간의 식민통치를 입에 담으면서도, 실상은 그보다 더 참담하고 더 수치스러웠던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새겨 보고자 하질 않는다. 고려왕조가 원나라를 상국으로 섬겼던 까닭으로 임금의 묘호에 충 자를 써야 할 만큼 치욕적인 시달림을 당했고, 조선왕조는 창업의 이념이 곧 향명배원이었기에 명나라에 바치는 조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후일 상국으로 섬기게 된 청나라에 당한 것이기에 일시적인 응징이거나 보복쯤으로 생각한 때문이라면, 역사 인식을 날 세우기 위해서라도 '병자호란'을 전후한 치욕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더듬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인조 15년 1월 30일. 남한산성에 몽진하여 적군과 대치하고 있던 인조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병사)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휘하를 거느리고 성문을 나선다. 적장에게 항복을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적장이란 후금을 창업한 누루하치의 아들인 청태종 홍타이치를 말하지만,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 조정과 조선의 사대부들은 그를 오랑캐의 괴수로 멸시해 왔으므로 그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주기다 더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인조는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 올라 청태종 홍타이치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의 삼배구고두로 항복의 예를 올렸다. 조선왕조가 창업된 지 2백 46년, 조선의 임금이 적장 앞에 나가 몸소 머리를 조아린 일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청태종 홍타이치는 항복한 조선왕조에 대해 견딜 수 없는 수모를 강요하였다. 전쟁의 책임을 조선 조정에 전가하는, 이른바 전후 처리라는 착취의 감행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수항단이 마련되었던 자리에 비석을 세워, 청태종 홍타이치의 위명을 영원히 기리되 그 비문은 자신들이 검증한다는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오랜 논의 끝에 대제학 이경석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참판 오준에게 쓰게 했으며, 참판 여이징으로 하여금 전서하게 하였다. 짓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통한의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의 괴수를 황제라 부르고, 그의 은혜를 입어 조선 종사가 유지되며 따라서 백성들이 편하게 살게 되었음을 돌비석에 새겨 만세에 전해야 하는 욕스러운 문장을 지어야 한다면 조선의 사대부로서는 피눈물을 쏟아야 할 수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전문을 여기에 옮기는 것은 수치스러운 역사에 담겨진 교훈을 채찍으로 삼고자 함이지만, 혹여라도 '삼전도비'를 스치며 지나거나, 가까이로 다가서는 기회가 있을 때 비문의 내용을 알고 보면 색다른 감회를 느낄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대청 숭덕 원년 겨울 12월에 관온인성황제께서, 우리 편에서 먼저 화의를 깨뜨렸으므로 크게 노하시어 병위로 임하시어 바로 동녘을 치시니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우리 임금께서 남한산성에 계셨는데, 위태롭고 두려워 마치 봄날 얼음을 밟는 것 같으시어, 밝은 해를 기다리시기를 5순이었다. 동남쪽 여러 군사가 잇따라 패해 무너지고, 서북쪽 장수들은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였으며 성안의 양식 또한 떨어져 갔다. 이러한 때에 황제께서 대군으로 성에 육박하시니, 마치 서릿발 같은 바람이 가을 대나무 껍질을 휘몰아 가려는 것 같고, 화로의 이글거리는 불이 조그만 새털을 태워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황제께서는 죽이지 않는 것으로 병위를 삼으시고 오직 덕을 펴시는 것을 앞세우셨다. 그리하여 곧 칙유를 내리시어, "오라. 짐은 너를 온전하게 할 것이다." 하셨고, 용, 마(용골대와 마부대) 등 여러 대장들이 황제의 명에 따라 길에 가득 차 있었다. 이때 우리 임금께서 문무 모든 신하들을 모아 놓으시고, "내가 대국에 화호를 의탁한 지 10년인데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내가 어둡고 미혹하기 때문에 스스로 천토를 재촉하여 만백성이 어육이 되게 한 것이니, 죄는 나 한 사람에게 있다. 그런데 황제께서는 차마 죄인을 도륙하지 않으시고 이와같이 타이르심을 받들어, 위로 우리 종묘사직을 안전하게 하고 아래로 우리 생령들을 보호하지 않으리오." 하셨다. 대신들이 찬성하여 마침내 임금께서는 수십기를 거느리시고 군전에서 죄를 청하였는데, 황제께서는 예로써 우우하시고 은혜로써 가까이 하시어, 한 번 보고 심복으로 허락하셨으며, 물품을 하사하는 은택이 신하들에까지 고루 미쳤다. 예가 끝나자 황제께서는 곧 우리 임금님을 서울로 돌아가게 하시고, 그 자리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군사를 부르시어 서쪽으로 돌아가게 하셨으며, 백성을 무마하시고 농사를 권장하시니, 멀고 가까운 곳에 새떼처럼 흩어졌던 사람들이 모두 돌아와서 우리 나라의 수천리 산하가 이전과 같이되었다. 돌이켜보면 소방이 상국에 죄지은 지 오래 되었다. 기미년의 전쟁에 도원수 강홍립이 명나라를 돕다가 패하여 사로잡혔는데, 태조 무황제께서는 다만 홍립 등 몇 사람만 머물러 있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돌려보내셨으니 그 은혜가 한없이 컸다. 그런데도 소방은 미혹하여 깨달을 줄 모르다가 정묘년에 지금의 황제께서 동정을 명하시자 우리 임금과 신하는 성으로 피해 들어가서 화평을 청하였다. 황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시고 형제의 나라와 같이 보시어 강토를 복원하시고 강홍립 또한 돌아왔다. 이로부터 예우가 변치 않으시어 관개가 서로 오고갔는데, 불행히 근거 없는 논의가 일어나서 소란꾸미기를 선동함으로 소방이 변방의 신하들을 선칙하였으되, 불손한 말이 계속 돌아다녔다. 그 문서를 상국의 사신이 얻었으나 황제께서는 오히려 관대하게 용서하시어 즉시 군사를 가하지 않으시고, 먼저 명지를 내려 나라에 출정할 시기를 효유하셨는데, 이리 핑계 저리 핑계 할 뿐 아니라, 군사를 일으키지 않다가 몸소 명령을 받고 끝내 모면하지 못하였으니, 소방 군신의 죄가 더욱 모면할 길이 없게 되었다. 황제께서 대병으로 남한산성을 포위하시고 다시 일부 군대에 명하시어 먼저 강도를 함락시켜 궁빈, 왕자와 경사의 가족들까지 다 포로로 하셨는데, 황제께서는 여러 장수들을 경계하시어 소란 떨거나 해치지 못하게 하시고, 종관과 내시로 하여금 간호하게 하셨다. 또 크게 은전을 내리시어 소방의 군신과 포로된 귄속들을 옛집으로 돌려보내셨다. 서리와 눈은 따뜻한 봄으로 변하고, 가뭄은 단비가 되었으며, 망한 것이 다시 살아나고, 끊어진 것이 다시 이어졌다. 동토 수천리가 고루 생성의 혜택을 입었으니, 이는 실로 만고의 기록에 드문 일이다. 한수 상류 삼전도의 남쪽은 곧 황제께서 머물러 계시던 곳이라 단과 뜰이 있는데, 우리 임금께서 수부에 명하시어 그 단을 더욱 높고 크게 하시고, 또 돌을 깎아 비석을 세워서, 황제의 공덕을 드날리어 영원히 전하게 하셨다. 참으로 천지 자연과 함께 함이니, 어찌 우리 소방만이 대대로 영원히 의지하랴. 또한 대조의 인을 행하고 무를 올바르게 다스리면 아무리 먼 곳에 있던 자라도 귀순하지 않는 자가 없으리니, 그것은 다 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큼을 본뜨고, 해와 달의 밝음을 그린다 하더라도, 그 만의 하나라도 방불케 하기에는 모자랄 것이나 삼가 그 대략을 실을 뿐이다. ]
삼학사의 기개
청태종 홍타이치는 조선의 세자 내외와 대군 한 사람을 인질로 요구했다. 조선에 대한 더 많은 요구와 거기에 따르는 핍박의 여지를 남겨 두려는 속셈이었다. 조선 조정으로서는 거절할 수 있는 명분도 힘도 없었다. 인조는 피눈물을 쏟으면서 자신의 뒤를 이어 갈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그리고 봉림대군과 그의 부인 장씨를 홍타이치에게 인질로 내주었다. 세자 내외와 대군 내외가 인질이 되어 청나라의 서울인 심양(북경으로 옮기기 전이다)까지 끌려가자면 그들을 호위하고 수행해야 하는 조정의 관원들과 내시 상궁들도 있어야 하질 않겠는가. 춘성군 남이웅을 재신으로 삼고, 대사간 박황, 참의 김남중 등의 품계를 올려 부빈객으로 삼아서 세자를 호종하게 하였으니, 또 이들을 따를 수행의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이들과는 별도로 전범으로 지목된 척화신들의 강제 연행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쪽 같은 지조로 홍타이치의 면전에서조차 조선 선비의 기개를 꺾지 않았다 하여 병자년의 삼학사로 추앙받게 될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의 당당한 모습은 청사에 빛날 것이다. 조선 세자 일행이 심양에 당도하자 청태종 홍타이치는 몸소 조선인 인질들을 친국하겠노라 선언하고 먼저 전범(척화를 주장하였다 하여)으로 지목된 홍익한 등 삼학사를 친국장으로 끌어 냈다. 3월 7일, 청태종 홍타이치는 홍익한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 준다면 부귀와 영화를 내려서 극진히 우대할 것이라는 등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하려 하였으나, 홍익한은 조금도 굽힘이 없다가 홍타이치의 말이 끝나자 지필묵을 요구하여 자신의 심회를 글로 적어서 보여 주었다.
[ 조선에서 잡혀 온 신하 홍익한은 척화한 사실의 내용을 분명히 말하고자 하나 말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글로써 대신하고자 하오. 온 세상은 다 형제가 될 수 있으나 천하에 아비가 둘 있는 자식은 없소, 조선은 본래 예의를 존중하고 간신은 오직 바른 대로 주장함이 풍습으로 되어 있는 까닭으로 지난해 봄 간관의 직을 맡고 있을 때, 금국이 장차 맹약을 배반하고 황제를 참칭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만약 정말 맹약을 어긴다면 이는 곧 형제를 거스르는 것이고, 또 황제를 일컫는다면 이것은 곧 천자가 둘 있게 되는 것이오. 한 집안에 어찌 형제가 어그러지는 일이 있을 것이며, 하늘과 땅 사이에 어찌 두 천자가 존림할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나는, 위로 임금과 어버이가 다 계시되 모두 안전하게 부호해 드리지 못하여 왕세자와 대군을 포로가 되게 하였고 늙으신 어머니의 생사조차도 모르고 있소. 내 한 장의 상소로 인해 나라에 환란을 가져오게 하였으니 충효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는데 어찌 삶을 바랄 것인가. 천만 번 죽더라도 마음에 달게 여기고 피를 북에 바르면 넋은 하늘을 날아 고국으로 돌아가 놀 것이니, 이 얼마나 좋고 즐거운 일이오,. 이밖에 더 할말은 없으니 어서 나를 죽여 주기 바라오. ]
홍익한의 뒤를 이어 윤집과 오달제도 홍타이치의 친국장에 끌려 나왔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가기 전날인 1월 29일에 두 사람은 최명길에 의해 적장에게 넘겨졌었다. 적진에 당도하기 전 최명길은 윤집과 오달제에게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빌면 무사할 것이니 자신의 말을 따라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였으나 두 사람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었다. 홍타이치는 역시 타이르는 말로 두 사람을 극력 회유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저들의 목을 치라!"
세 사람의 조선 선비들은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다는 결기를 굽히지 않은 채 심양성의 외양문 밖에 마련된 형장에서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참되고 값진 삶을 마감하였다. 후일 청나라 조정에서도 삼학사의 높은 기개를 가상히 여겨, 그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심양성 외양문 밖에 사당과 비석을 세우고, 그 비에 '삼한산두'라 새겼다. 조선의 태산, 북두와 같이 빛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죽어서 아름다운 이름을 영원히 남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어도 이름을 남길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민초라 불리웠던 백성들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독자들이여, 놀라지 마시라. 병자년의 호란으로 만주땅에 끌려간 조선인 남녀의 수는 자그마치 60여 만을 헤아렸고, 그들의 대부분이 곱고 나이 어린 규중처녀들과 사대부가의 내당마님이었기에, 후일 그녀들이 용케도 목숨을 부지하여 고향이 돌아왔을 때 조선땅에는 화냥년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병자년의 호란이 안겨다 준 치욕적인 비극에 다시 한 번 몸서리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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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유전한다
기원전 5세기경의 희랍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 그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초기 희랍 철학자 가운데서 가장 난해하며 깊은 통찰력을 지닌 학자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말 '만물은 유전한다(반타 레이)'는 당시의 유행어였던 모양으로 같은 시대의 희극작가 '에피칼모스'의 희극 가운데 그 말이 나온다.
한 사나이가 돈을 빌리고는 그 사람이 받으러 오자 "돈을 빌렸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사람이 달라졌다. 반타 레이"하며 돈의 반환을 거절했다. 화가 난 빚쟁이는 그 사나이를 두들겨 패서 마침내 법정에 서게 되었는 데 그때의 빚쟁이 왈 "때렸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사람이 달라졌다. 반타 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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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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