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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53 호
단기 4340. 3. 15 (음력 01.2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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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한 만큼 버는 아름다운 노동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 그행복은 같이 행복한 것인가 아니면 나만 행복한 것인가.
입에 발린 소리 같지만 사실 저는 늘 이 고민을 합니다. 나만 행복하고 가족이 행복하지 않다면? 가족들은 행복한데 나만 행복하지 않다면?
아기가 침 흘리듯 작은 줄기의 물이 아리수를 이루듯이 나와 가정의 행복은 국가의 행복을 이루는 시발점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같이 행복한 길인가 하는 것은 늘 고민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단, 이 고민은 스트레스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즉, 즐거운 고민이어야 합니다. 안그런가요?
바람의 종(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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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제11회 계간 에세이문예 본격수필신인상 작품 공모
고급 수필전문지 에세이문예가 한국문단에서 찬란한 꿈을 펼칠 신인 여러분의 도전을 기다립니다. 무지개 빛깔 삶의 현장으로, 다가올 수필 시대의 주역으로, 당신을 모십니다. 대한민국 1등 수필전문지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에세이문예는 참신한 수필가를 꿈꾸는 여러분들에게 최고의 무대가 될 것입니다. 젊은 작가들을 발굴하여 수필의 미래를 밝히고자 하는 에세이문예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수필로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신념이면 충분합니다. 최고 수준의 수필작가로 성장하고 싶으시면, 지금 제11회 에세이문예 본격수필신인상 작품 공모전의 문을 두드리세요.
모집 부문 본격수필: 2편 이상(원고지 15매 내외) 원고마감: 2007년 3월 30일 보낼 곳: 607-060 부산시 동래구 온천1동 172-35 협성스카이라인 1019호 O/T 계간 에세이문예사 편집실 문의: 051) 557-5085, 016-572-3862(주간), 018-571-5003(편집인) 방법: 우편 또는 이메일- essaylit@hanmail.net 심사: 응모된 작품은 본지 본격수필신인상선정위원회에서 심사함 발표: 2007년 여름호( 2007년 5월 발행)-사전 개별 통보 대우: 1) 당선자는 수필가로 문단에 등단되고, 본격수필가로 인정 2) 수시 작품 발표 및 특집 기회 부여 및 문단활동을 적극 지원 3) 에세이문예사가 추진하는 각종 행사에 특별 초대 3) 발표 작품에 대한 전문 해설 및 평론 지원 4) 작품집 발간에 따른 전문 서평 지원 및 대표 작품의 영어번역 지원 응모요령: -.응모봉투에 <본격수필신인상 응모작품>이라고 적을 것 -.별지에 응모자의 본명, 주소, 나이, 전화번호, 직업, 약력을 반드시 첨부할 것 -.원고는 A4지에 워드로 작성한 이메일 접수를 원칙으로 함 -.응모작품은 반환의 책임을 지지 않음 -.메일 보내는 사람에 반드시 본명을 적을 것
계간 에세이문예 편집주간 송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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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당신이 먼저 등을 구부리지만 않으면 남이 당신 등에 올라타지 못할 것이다. / 마틴 루터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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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四十二章 (노자 - 도덕경 : 제4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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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人之所惡, 唯孤, 寡, 不穀, 而王公以爲稱. 故物, 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人之所敎, 我亦敎之, 强梁者, 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인지소악, 유고, 과, 불곡, 이왕공이위칭. 고물, 혹손지이익, 혹익지이손. 인지소교, 아역교지. 강량자, 불득기사, 오장이위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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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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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둘째 장
직역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은 음을 등지고 양을 끌어 않았고, 텅빈 기가 조화롭게 한다. 사람이 싫어하는 바는 오직 고독하고, 곡식이 부족하고, 곡식이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왕과 공이 이것으로 칭한다. 그러므로 물은 혹 그것을 덜어내어도 채워지고, 혹 그것을 채워도 덜어낸다. 사람이 가르치는 바를 나 또한 가르친다. 강하고 힘센 자는 그 죽을 때를 얻지 못하니, 나는 이것으로 가르침의 아버지를 삼는다.
해석.
도는 무이다. 구별이 없다. 그리고 구체적인 형체를 지니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이제 분화를 시작한다. 하나의 형체가 태어난다. 하나의 형체 이것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라는 말에는 둘이라는 의미가 표현되어 있다. 우리가 이것은 하나다. 라고 규정을 짖기 위해서는 주관과 객관이 분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이 하나는 둘이 되었다. 둘이 되는 순간 개체의 사물과 나를 매개해 주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텅빈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 빔으로 인해서 나와 사물은 구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둘은 셋이 되었다. 나와 사물이 구분이 된다. 그러면 나는 이제 사물들을 마구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이 셋에서 만물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식의 차원에서 본 설명이다.
이 만물은 음과 양을 가진다. 음은 수동성이다. 정체성이다. 양은 능동성이다. 움직임이다. 모든 사물은 움직인다. 동시에 정체성을 가진다. 음과 양은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는 바위가 언제인가는 모래가 되고 먼지가 됨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바위는 바위의 모습을 간직할 것이다. 이것이 바위가 음의 성질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바위는 어느 순간에도 움직이지 않는 순간이 없다. 계속 움직인다. 이것이 바위의 양이다. 음은 양의 상대적인 모습이다. 텅 빈 기가 만물을 조화롭게 해준다. 양의 극단에 이르면 다시 고요함으로 돌아간다. 왕은 사람이 싫어하는 이름을 스스로 칭하여 낮은 자리에 서려고 한다. 이것이 도의 이치이다. 물이 혹 부족하더라도 충기는 그것을 채워 준다. 그리고 물이 혹 넘치더라고 충기는 그것을 덜어 준다. 이러한 가르침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남들도 이러한 가르침을 편다. 그것을 나도 가르칠 뿐이다.
강한 것은 제명대로 살지 못한다. 바위가 양으로 치달아 급속히 움직인다면 아마 얼마 못 가서 바위로서의 삶은 끝이 날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음과 양의 성격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힘이 있다고 마구 낭비하면 자신의 몸을 빨리 분해시킬 뿐이다. 그래서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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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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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도는 한 기운을 낳고 한 기운은 음과 양 두 기운을 낳으며, 이 두 기운은 서로 화합하여 세 번째 기운인 충화를 낳으며, 이 충화의 기운에서 만물이 나온다. 만물은 음기를 업고 양기를 안고 있으며 충화로서 조화를 이루어 자라나고 번성한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으로 고(외롭다)니, 과(부족하다)니, 불곡(모자라다, 미숙하다, 못난이)이니 하는 말들이 있다. 그러나 이 세상 군주들은 이런 말을 자신들의 호칭으로 쓰고 있다. 그러므로 사물은 손해를 보는 것이 도리어 이익이 되는 수가 있고, 그 이익이 되는 것에 도리어 손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 남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 또한 가르치려고 한다. 억세고 사나운 사람은 온당하게 죽을 수 없다. 나도 이 말을 나의 가르침의 좌우명으로 삼으려고 한다.
주
일: 하나 즉 도를 지칭한 것임, 노자의 도일원론은 열자의 혼륜, 장자의 태일, 주역의 태극과 형이상학적 발상을 같이 하고 있다. 이: 음기와 양기. 삼: 음기와 양기, 그리고 이 두 기운의 화합에 의하여 발생한 충화의 기운을 말함. 강량자: 성질이 억세고 사나운 자, 강은 강포한 것. 부득기사: 온당하게 죽을 수 없다는 뜻,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불행한 죽음을 당한다는 뜻.
해
이 장에서 노자는 도에 의하여 만물이 생성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도는 만물의 원리로서 하나의 기운을 낳고 이 하나의 기운은 음과 양의 두 기운으로 분화되며, 이 음과 양의 두 기운이 친화하고 화합하여 충화의 새로운 기운을 낳게 되는 것이다. 천하 만물은 음양의 두 기운과 충화의 기운으로 생성되고 화육되며 번성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도가 만물을 생성케하는 현상은 유출이지 창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의 유일신에 의한 천지창조 설과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노자의 조에 의한 만물생성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경의 계사 전과 열자의 천서 편을 비교해 보는 것이 좋을 같다. 주역 계사 전상에 기록되어 있는 태극에 의한 만물생성론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역의 원리로서 만물의 근원인 태극이 있고, 이것이 양의(음양)를 낳고, 양의는 사상(태음, 태양, 소음, 소양)을 낳고, 사상은 팔괘(건, 곤, 이, 감, 진, 손, 간, 태)를 낳는다. 이 팔괘는 길사와 흉사를 정하고, 이 길사와 흉사는 성패를 좌우하는 큰 사업을 낳는다.' 열자의 천서 편에 기술되어 있는 그의 본체론은 다음과 같다. '기, 형, 질이 갖추어져 있으면서 서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혼륜이라 하며 이 혼륜은 보려고 하여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하여도 들리지 않고, 좇아가도 붙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역이라고도 한다. 역은 형체가 없다. 역이 변화하여 하나가 되고, 하나가 변하여 일곱이 되고, 일곱이 다시 변하여 아홉이 되고, 아홉이 변화하여 극점에 이른다. 이것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하나가 된다. 하나는 형이 변화하는 실마리이다.' 독자들은 노자와 주역과 열자의 만물생존론에서 공통된 요소룰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물의 생성은 음양의 화합과 충화의 기운으로 이루어지며 대립과 투쟁은 파멸을 초래할 뿐이다. 도의 이법을 올바르게 깨달은 이는 자신의 몸가짐을 온화하고 겸손하게 가지며 친화와 화합으로 시종일관한다. 그러므로 만 인중 지존의 위치에 있는 임금은 자신의 호칭으로 고니, 과인이니, 불곡이니 하며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겸손함과 온후함은 남과 더불어 화락하게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손실이 이익이 되고 이익이 도리어 손실이 되는 경우가 많다. 자연의 섭리란 흘러 넘치는 것은 덜어내고 빈 것은 채워 주며 강한 자는 억제하고 약한 자는 부축해 준다. 자연의 섭리에는 조화와 균형이 있다. 천도(자연의 섭리)는 인생의 위대한 스승인 것이다. 사람들은 약한 것보다는 강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부드러운 것보다는 억센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약한 것에서 도리어 강함을 보아야 하며 부드러운 것은 능히 억센 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억세고 사나운 사람은 천수를 누리지 못한다. 나는 이 말을 나의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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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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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4대 사고의 기구한 종말
총독부가 접수한 구한국 정부의 역대 장서는 서울의 규장각본 외에도 한일합방 당시까지 병화를 피할 수 있는 심산유곡 네 곳에 소개되어 엄중히 보관돼 있던 엄청난 분량의 사고본이 있었다. 나라를 잃은 후 창덕궁에 연금당하게 된 이왕기가 총독부로부터 기증이라는 모멸스런 형식으로 인수한 무주의 '적상산성 사고본' 은 별도로 치고, 강화도의 '정족산성 사고본' 과 강원도 '오대산 사고본', 그리고 경북 봉화의 '태백산 사고본' 이 그것이었다. 이 지방 4대 사고에는 가장 귀중한 (이조실록)이 각각 1질씩 간직돼 있었다. 정족산과 태백산의 사고본들이 통감부 때부터 이미 서울로 운반되기 시작하여 지금의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자리에 있던 종친부 건물의 임시 규장각 분실에 전부 모여진 것은 한일합방 직후인 1910∼1912년의 일이었다. 정족산 사고본은 1866년의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상륙하여 관청리의 동종(현재 보물 제11호)을 약탈해 가려고 했던 프랑스 함대의 수병들에 의해 이미 상당수가 탈취됐었다고 하나(이홍직 편, (국사대사전) ) 1937년에 경기도가 조사.편찬한 (경기지방의 명승고적)(일문)에는 그런 설명을 다음과 같이 부인하고 있다.
"삼랑성(정족산) 안의 사고는 건립(1660년) 이래 완전히 보호되어 왔다. 프랑스 병사들의 내습도 동문 밖에서 격퇴되었기 때문에 약탈당할 틈이 없었고, 당시 프랑스 병사들이 가져갔다고 전해지는 것은 강화 읍내에 있었던 규장외각의 장서들이었다."
여하간 (이조실록) 같은 귀중본만은 잘 보조시켰던 정족산 사고본과 태백산 사고본은 그런대로 수습이 잘되어 규장각 장서들과 함께 전체가 경성제국대학으로 넘어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고스란히 소장돼 있지만, 총독부가 저들 마음대로 본국의 동경제국대학 부설도서관에 실어 보내 식민지 연구자료로 삼게 했던 오대산 사고본은 10년 후에 가서 기구한 종말을 고했다.오대산 사고본이 총독부의 양도로 몽땅 동경제국대학으로 실려 간 것은 1914년 3월의 일이었다. 총독부는 사고의 보호를 맡고 있던 월경사의 인근 주민들을 강제동원하여 동해안의 주문진 선착장까지 등짐과 달구지로 운반한 뒤 배로 실어 갔다. 그때의 상황이 (월정사 사적기)끝부분에 이렇게 적혀 있다.
"1914년 3월 3일, 총독부 소속 관원 및 평창군 서무주임 오케구치 그리고 고용원 조병선 등이 와서 본사(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직행시켰다. 그때 간평리의 다섯 동민이 동원되었는데 3일에 시작하여 11일에 역사를 끝냈다."
그렇게 해서 일본으로 반출돼 간 오대산 사고의 (이조실록) 1벌을 포함한 사책들은 데라우치 총독의 한일합방 선물로서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보관되다가 1923년에 도쿄 일원을 불바다로 만든 관동대지진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살아남은 책은 교수들이 밖으로 대출해 갔던 20여 책에 불과했다. 다른 사고들도 다 마찬가지였지만 오대산 사고도 내부의 장서를 몽땅 일제에게 빼앗긴 뒤로 빈 건물만이 쓸쓸히 남아 있다가 그조차 주저앉아 없어지고 지금은 겨우 그 터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지만, 가장 귀중한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유서깊은 곳이어서 사적 제37호로 지정돼 있다. 다른 사고들 역시 한 채의 건물도 보호되지 못했다. 무주 '적상산성 사고' 의 경우는 산성 안의 수호사였던 안국사에서 사고 건물 하나를 헐어다가 명부전을 삼고 있으나 원형을 상실하고 있다. 또 언제 그렇게 뜯어 옮겨졌는지도 확실치 않다. (적성지)에는 (이조실록)을 보장하던 선원각이 6간, 그외 사고 12간과 수사당 6간이 세워져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이곳의 모든 장서가 이왕가의 장서각으로 옮겨져 가던 한일합방 직후까지는 그 건물들이 모두 건재했었음을 당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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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1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4.양심과 세계 구성
윤리적인 차원에서 볼 때 자유는 양심이다. 제5장 "행복을 찾아서"에서 나는 양심을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의 "부름"과 "들음"이라고 말하였다. 양심은 자기 반기 반성을 확인하는 부름과 들음이다. 나 자신의 부름과 들음 속에서 우리들은 나의 존재 근거와 타인의 존재 근거를 들으며 부른다. 양심은 나의 내면의 부름과 들음으로서 그것은 인간을 관계로 성립시켜준다. 그리하여 관계로서의 인간은 의무와 자율과 권리를 필연적으로 소유한다. 우리들은 꽃과 나무를 알고 신에 대한 신앙을 가지며 음악과 미술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우리는 "부름"과 "들음"의 내면적인 운동에 의하여 알고 믿으며 느낀다. 들에 핀 한송이 꽃은 우리들이 그것을 꽃으로 알기 이전에는 꽃이 아니라 그저 어떤 것에 불과하다. 자아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부름과 들음은 그저 어떤것을 꽃으로 구성하게 한다. 우리가 꽃으로 대상화함으로써 아는 것은 결국 꽃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반성은 나 자신의 "부름"과 "들음"에 의하여 성립한다. 부름과 들음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를 포함한 나 자신을 부르고 듣는 것이다. 절대자 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신을 부르며 신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 신 역시 그저 어떤 것이나 아니면 허무에 불과하다. 인간이 자신을 부르고 들을 때, 인간은 세계 근원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며 절대자 신에 대한 신앙을 소유한다. 인간은 절대자 신의 음성이 부르는 것을 듣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부름과 들음의 양심을 통하여 종교세계를 구성한다. 예술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부르며 듣는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은 양심의 부름과 들음을 통하여 유한성과 무한성의 이중적 성격을 가짐으로써 유한한 시간속에 영원한 멜러디를 그리고 제한된 공간 속에 무한한 색깔과 형태를 소유하게 된다. 자아의 부름과 들음은 인간의식의 가장 원초적인 동적인 힘이다. 그것은 본능적인 충동에 물들어 있으면서도 충동과는 또다른 인간의 존재 근거를 제공해주는 근원적인 힘이다. 양심의 부름과 들음에 의하여 인간은 세계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변형시킨다. 그러나 한층 더 나아가서는 인간은 세계를 구성한다. 인간의 세계 구성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의 부름과 들음에 의한 필연적 창조작업에 속한다. 앞에서 우리들은 인간이 어떻게 학문과 종교와 예술의 세계를 구성하는가를 살펴보았다. 인간의 자아의 부름과 들음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구성하면서 동시에 삶과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각 인간의 삶의 구성에 대한 자유와 책임은 각각의 인간 주체에게 있는 것이다. 삶과 세계의 전체성 및 미래 지향성이 보장될 수 있는 장소는 인간의 양심 이외에는 어떤 다른 곳에도 있을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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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씨년스럽다
본뜻 : 을씨년은 1905년 을사년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긴 을사조약으로 이미 일본의 속국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당시, 온 나라가 침통하고 비장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날 이후로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다.
바뀐 뜻: 남보기에 매우 쓸쓸한 상황, 혹은 날씨나 마음이 쓸쓸하고 흐린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녁
본뜻 : '하오'할 사람을 마주 대하여 좀 낮게 이르는 말이다. 주로 호남 지방에서 널리 쓴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남편이 아내를 가리킬 때 쓰는 말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친한 사이라면 누구에게나 쓸 수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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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특히 험난한 시대를 산 인물이었다. 그가 태어난 1588년은 영국을 침입한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의해 무참하게 패배한 해였다. 영국으로 보자면 이제 대서양의 패자로 발돋움했음을 상징하는 해이기도 했다. 그러나 홉스의 어린 시절 가정생활은 불운했다. 목사였던 아버지가 가정을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에 어린 시절을 숙부의 손에서 보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좋아했던 그는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뒤 데반셔 백작의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이는 홉스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백작의 서재에는 대학 도서관 못지않게 책이 많아서 마음껏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백작의 집에는 당대의 명사들이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에 그들을 만나면서 정치토론도 할 수 있었다. 1610년에 그는 데본셔 백작과 함께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당시는 종교전쟁으로 유럽이 소란했었다. 이때 전쟁의 참화를 목도한 것이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1640년에 홉스는 "법의 원리"에서 국왕과 교회, 국왕과 의회와의 관계, 그리고 주권분할의 불가능성과 왕권의 절대성을 논했다. 그러나 당시는 청교도혁명을 눈앞에 둔 시기였고, 의회가 왕권 옹호자들의 처벌을 요구했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홉스는 재빨리 프랑스로 망명했다. 1642년 청교도 혁명의 발발과 함께 그의 정치사상은 반혁명이론으로 낙인찍혔다.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1651년에 "리바이어던"이 출간되었는데, 여기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그 유명한 말이 나왔다. 홉스는 구약성경 욥기 40-41장에 나오는 괴물의 이름 리바이어던을 따서 근대 국가를 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이 괴물을 빌어 국가의 괴력을 설명했다. 먼저 국가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하여 인간론에서 출발했다. 그에 의하면 국가가 존재하기 이전의 자연 상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여서 각자가 서로 불신하고, 모두가 권력을 원하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산업이나 문화도 없을 것이고, 그의 말대로 하자면 인간의 생명은 외롭고, 가엾고, 구차하고, 짐승 같고, 그리고 단명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남을 죽일 수 있는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모두가 불안한 상태이고 그들은 법과 질서를 바라게 될 것이라고 홉스는 생각했다. 즉, 사람들은 절대적 권위를 갖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명령할 사람을 임명하거나 선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잡아죽이는 파국을 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국왕은 절대권력을 가지며 자신이 원하면 어떤 법률이라도 제정할 수 있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국왕은 그를 선출한 개인들에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국왕과 개인들 사이에는 아무런 계약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홉스는 복종을 강요하기 위하여 모든 권한을 지배자에게 위탁했던 것이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라는 말은 군주권을 옹호하기 위한 하나의 가정이었지 그러한 자연상태가 실제 존재했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역사적 사실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사상을 전개하기 위해서 논리적 토대를 그렇게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홉스의 정치사상은 많은 고전들을 읽고 연구한 학문적 연구의 소산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경험의 소산이기도 했다. 즉, 불우한 가정환경, 종교의 차이에서 왔던 유럽의 종교전쟁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조국인 영국에서의 청교도혁명의 와중에서 국가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여러 당파가 타협하지 않고 격렬하게 싸우는 것 등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이론을 내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인간은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도 한다. 모두가 굶주린 이리와 같이 방심하고 있는 먹이를 노리고 있다. 19세기 초에는 헤겔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시민사회는 사람들이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투쟁하는 사회라고. 이렇게 홉스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과 커다란 조정능력을 가진 국가, 이 둘 사이의 관계를 냉철히 관찰했다. 그의 주장이 오늘날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워도 인간의 본질과 국가 권력의 문제에 대한 그의 정치사상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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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하나밖에 없는 사랑과 슬픔
어둡고 가난한 골짜기 빈 꿈에 매달려 벌레처럼 밤 지키며 속 끓이고 있지만 빈 들판에 버려져 비 맞고 두엄더미처럼 썩어가고 있지만
사랑이여 끝내는 썩지 못하는 나의 희망 나는 너에게로 가서 모두가 되고 싶다 들판에 몸져 누워 깊은 병 얻고 상하여 세상에서 가장 큰 서름 가장 큰 남루가 되고 싶다
뼈와 껍질로만 남아 창칼같은 추위에 기대어 있는 겨울의 빈 나무 야위고 야위어서 사랑이여 얼어붙은 땅 한 뼘 마른 뿌리처럼 파고 들어가 눈만 남아서 눈만 남아서 한 자리에 묻히고 싶다
-강계순 <연가>
아벨라르. 나는 당신에게로 가서 모든 것이 되고 싶어요. 당신의 눈썹 끝에 매달린 수심, 귓가의 짧은 머리카락, 당신의 팔 안쪽에 숨겨져 있는 작은 얼룩이 되고 싶어요. 당신의 손 끝마다 손톱으로 자라서 당신의 몸안의 확실한 한 부분이 되어 밤마다 당신을 지켜보고 싶어요. 당신으로부터 몇 천 리 멀리 떨어져 있는 이 호숫가에는 깊은 안개가 내려 가로등도 슬픔에 젖어 있는 듯 뿌우옇게 흔들리고, 모든 나무들은 여름밤의 뜨거운 열기에 몸져 누운 듯합니다. 이름 모들 새들의 우짖음, 작은 바람의 사운대는 입김, 호숫가에서 깊이 숙이고 있는 작은 풀잎들, 허공에 묵묵히 떠서 혼자 저 무한대의 하늘을 순례자처럼 떠돌고 있는 달의 모습조차도, 그리움에 상처입고 떠나온 내 가슴의 언저리를 아프게 건드리고 있습니다. 이 먼 곳까지 와서도 당신의 모습은 더욱 명료하게 떠올라 당신의 눈가에 가늘게 잡힌 작은 주름살, 내 이마 위에 부드럽게 닿던 당신의 입김, 조용히 나를 지켜보던 당신의 눈에 고였던 눈물, 그리고 나를 늘 전류에 닿은 듯이 꼼짝없이 묶어 놓던 당신의 손길이 마치 지금도 내 옆에 있는 듯이 느껴집니다.
아벨라르. 될 수만 있으면 나는 당신에게서 해방되고 싶어요. 당신 옆에 있기만 하면 온 세상이 정지되는 듯이 캄캄해지는 나의 이 격정으로부터, 당신을 내 옆에 묶어 놓고 싶어서 불에 데인 듯이 안타까와지기만 하는 나의 이 끝없는 욕심으로부터, 어느 한 순간도 당신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내 인생의 허황한 설계로부터, 그리고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어야만 실감있게 내 몸 속에 관류하는 뜨겁고 치열한 기쁨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요. 그리하여 먼 곳에 당신을 두고 순수하고 헌신에 찬 사랑을 당신에게 보내면서, 당신으로부터 존경받는 소중한 목숨으로 있고 싶어요.
아벨라르. 나의 격정이 당신을 괴롭히고 당신을 짜증나게 하며 당신에게 부담을 드린다면 그것은 결코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빛나는 존재로서 당신의 일생을 지배하는 유일한 여자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하여 나는 나의 눈물을, 나의 격정을, 나의 그리움을 스스로 현명하게 다스려야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어떤 경우에도 불구하고 욕심의 끈을 달고 다니는가 봅니다. 언제나 끝없이 부족하여 목마르며 내 몸의 부피로 당신의 시야를 가리고 싶고, 내 목소리로 당신의 귀를 멀게 하고 싶은 이 욕심을, 당신에 관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샅샅이 알고 싶은 이 집요한 관심을 내 의지로는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아벨라르.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요. 당신의 머리칼과 채취, 심지어는 모공마다 배어나는 땀냄새가 어떤 냄새인지, 그리고 당신이 잠들었을 때 당신이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당신의 몸 속에 흐르는 피는 얼마만큼 뜨거운 것인지, 당신의 가슴 속에는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쌓여 있는지, 그 많은 생각들 중에 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만큼이 되는지. 당신은 하루에 어느 정도의 물을 마시며, 몇 시간쯤 잠을 자며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나는 그 모두를 샅샅이 알고 싶어요. 내가 이렇게 내 열정에 스스로 데어 상처입고 있을 때마다 나는 저 유명한 작품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속의 열정적인 엘로이즈의 편지를 떠올립니다. 온 세상을 감동과 비애와 흥분의 도가니로 휘몰아 넣었던 슬프고도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의 편지로 묶여져 있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라는 책은 중세에 있었던 실제의 사건과 인물에 근거한 것입니다. 중세의 유명한 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 박사는 엘로이즈와의 연애사건으로 불의에 남성의 성기를 잘리는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 그는 결국 세속에서 격리된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고 사랑과 죽음의 그늘에서 온갖 박해와 고난을 겪고 초췌하게 시들어 가면서 하느님에게로 가는 신앙을 단련합니다. 엘로이즈 역시 수녀원에 들어가 오직 아벨라르를 사랑하는 기도로써 하느님께 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아벨라르가 교회의 종순한 자식으로서 그 기구한 생애를 마친 것은 그의 나이 63세 때였습니다. 그는 그의 생전의 소원대로 엘로이즈의 손에 의해 파라클레 수도원의 땅에 묻혔습니다. 그후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의 영혼을 안고 무덤을 지키면서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엘로이즈가 죽은 뒤 그녀는 아벨라르의 관속에 합장되었습니다. 엘로이즈는 수녀원에서 침묵과 고행의 나날을 보내면서 한때는 그의 연인이었으며 남편이었고, 또 그를 하느님에게로 인도해 준 유일자인 아벨라르를 향해 뜨겁고 간절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는 아벨라르에 의해서, 아벨라르를 위해서, 하느님의 종이 되었으나, 감미롭고도 눈물겨운 사랑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어서, 하느님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의 아벨라르를 향해서 사랑과 그리움의 고뇌를 호소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느님조차도 아벨라르를 통하지 않고는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수녀원의 고행도 아벨라르에 대한 간절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하여 견디어 낼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의 편지 중에서도 특히 사랑의 고뇌를 회상하며 아직도 열렬히 아벨라르의 사랑을 구하고 있는 두 번째 편지와 제 번째 편지를 아낍니다. 이 애절한 엘로이즈의 편지를 당신은 알고 계신지요?
(두 번째 편지) 나의 주, 나의 아버지, 나의 남편, 나의 형제인 아벨라르에게 (전략) 제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을 것을 버렸는지, 또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파렴치한 폭행이 당신을 앗아감과 동시에 저 자신도 얼마나 철저하게 파멸해 버렸는지, 또 손실 그 자체보다도 그 손실의 수단, 방법이 얼마나 저를 괴롭혔는지에 대하여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도 알고 계실 거예요. 정말이지 고통의 원인이 크면 클수록 위로의 대책도 그에 비례해서 크지 않으면 안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저는 다른 어느 누구에게 서보다도 바로 당신에게서 위로를 받고 싶은 것이에요. 당신이 슬픔을 불러일으킨 유일자라면, 위로를 주는 유일자도 당신이 아니어서는 안되겠어요. 사실 당신은 저를 슬프게도 하고 즐겁게도 하고 또는 위로를 주실 수도 있는 단 한 사람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직 당신만이 그것을 제게 하실 수 있는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저는 당신의 명령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무조건 맹목적으로 따랐으니까요. 정말 당신의 명령이라면 저 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조차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요. 무슨 일에고 당신에겐 거역할 수 없는 저에요. (중략) 제가 이제껏 당신 이외의 그 어느 누구도 구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계시겠지요. 오직 당신만을 구했을 따름이며, 당신에게 속한 물질적인 것을 바라진 않았어요. 결혼의 서약도, 어떤 값진 결혼 예물도 저는 기대하지 않았던 거에요. 당신도 알고 계시겠지만, 요컨대 저는 제 만족과 의지를 충족시키려고 하지 않았으며, 오직 당신의 만족과 의지만을 충족시켜 드리기에 힘썼던 것이에요. 그리고 아내라고 하는 명칭이 보다 신성하고 보다 건전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제게는 늘 애인이라는 호칭이 훨씬 달콤했었어요. 솔직하게 말씀드려요. 저는 첩이나 창부라는 이름으로 불리어도 조금도 언짢게 여기지 않았을 거에요. 우둔한 제 머리로는, 당신을 위해서 저를 천대하면 할수록 한층 더 당신의 총애를 받을 수가 있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써 또한 당신의 혁혁한 명성이 되도록이면 손상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었던 것이지요.(중략) 저는 당신이 받들고 있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제 소원을 말씀드려요. 무엇이든 가능한 방법으로 당신을 제게 보여 주세요. 말하자면 무엇인가 위로의 글월을 제게 써 보내 주세요. 적어도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저는 절로 용서가 솟구칠 것이고, 한층 열심히 하느님에게 봉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번째 편지) (전략) 제 삶의 전 계단에 있어서-하느님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저는 하느님을 진노하게 하는 것보다는 당신을 노엽게 하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해 왔어요. 하느님 마음에 드시기보다는 당신이 흐뭇해 하시도록 애써 왔어요. 제가 성의를 입은 것도 당신의 뜻에 좇은 것이지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서 한 짓은 아니니까요. (중략) 저는 쉴 새 없는 기도에 의해 당신으로부터 도움받지 않고서는 배겨날 수 없어요. 정말이지 제가 건전하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당신에게서 치유할 약의 혜택을 받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있어요. 제발 제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 역경에 처해 있어 곧 구원을 받지 않으면 안돼요. 행여 저를 강한 여자로 보지 말아 주세요. 저는 당신이 받들어 주지 않으면 쓰러질지도 몰라요.
이렇게 간절한 엘로이즈의 편지에 대해 아벨라르는 다음과 같은 기도로써 답하고 있습니다.
주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 마음대로 합치게도 하고 떨어지게도 하실줄로 아옵나이다. 주님이시여! 당신이 자비로써 이루어 주신 것을 자비로써 성취하게 하옵소서 당신이 이 세상에 떨어지게 한 무리들을 하늘에서 당신 곁에 다시 맺게 하옵소서. 주님이시여! 당신은 우리의 소망이요 기대요 위로이옵나이다. 주님이시여! 우리를 축복해 주옵소서. 아멘.
엘로이즈는 아벨라르를 부를 때 `그리스도에 버금가는 나의 유일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나의 주, 나의 아버지, 나의 남편, 나의 형제인 아벨라르에게`라고 쓰고 있습니다. 엘로이즈에게 있어서 아벨라르는 바로 우주 그 자체이며 죽은 다음 내세에까지 이어질 오직 하나밖에 없는 사랑이며 종교며 기도이며 또한 슬픔과 고뇌와 그리움입니다. 수녀원에서조차 그의 연인을 그리워하며 뜨거운 열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엘로이즈를 당신은 부정하고 나쁘다고 욕하시겠습니까? 진실한 의미의 사랑을 체험해 본 사람이라며, 참으로 한 사람을 열망하고 그를 통해서 세상을 내다보고, 그를 통해서 고통과 기쁨의 의미를 체득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리움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강렬하게 사람의 오관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 무서운 힘을 가진 것인지를 겪어 본 사람이라면, 결코 엘로이즈를 부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로이즈는 그의 편지 속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서 7장 25절)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능력, 사람을 사랑하는 기쁨을 알게 해주신 초월자인 하느님에게 그는 감사했습니다. 비록 사랑이 곧 고통이며 암흑일지라도 그 사랑이 진실하고 순수한 것이라면, 그 사랑과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에게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그는 이미 깨닫고 있었으며 초월자의 품 안에서 그와 그의 연인이 일체가 될 수 있음을 감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도 그가 높은 곳으로 아름답게 승화되기 위하여 그는 욕심의 고통, 관능의 고통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아, 나도 엘로이즈처럼 이 열망으로 하여 초월자에게 도달할 수 있다면, 욕심이나 질투, 관능과 눈물을 지나서 당신의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면 나의 사랑은 얼마나 순백의 향기를 뿜는 빛나고 고귀한 것이 될까요.
아벨라르. 그러나 나는 아직도 당신의 모든 것을 갖고 싶고, 당신에게로 가서 당신의 모든 것이 되고 싶으며, 당신과 함께 땅 속에라도 같이 묻히고 싶은 열망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의 시체를 손수 묻고 그 무덤을 지키고 살았으며 끝내는 그 자신조차도 아벨라르와 같은 관 속에 합장된 것은 영혼과 육체가 완전히 합인하여 죽음에까지, 아니, 신의 나라에까지 도달한 사랑이라 믿어집니다. 엘로이즈는 지상에서의 사랑을 죽음에 이르러서라도 이루고 싶었고, 지상에서 갖지 못했던 아벨라르의 육신을 죽어서 비로소 소유한 것입니다. 나도 엘로이즈처럼 당신을 완전히 가질 수가 있다면 죽음에까지라도 따라가 작은 땅 한 평을 골라 나란히 묻히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완전한 소유, 완전한 성취를 이룰 수만 있다면, 나는 비록 그것이 죽음의 문이라 할지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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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성공한 문학인도, 실패한 정치인도
왕조실록의 하자
교산 허균의 문학적인 인생은 나무랄 데 없이 빛나는 것이었지만, 관직에 입사하여 그 직이 높아지는데 비례하여 그의 행적은 기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는 주자학을 학문과 행실의 근간으로 삼는 유학의 나라에서 태어났으되, 그로 인한 고질적인 제도와 관행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으며, 따라서 개혁적인 차원에서의 참여의식을 분출한 때가 많았다. 허균의 '호민론'이 이를 잘 말해 준다.
대체로 자기가 처한 상황을 깊이 인식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면서 윗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백성을 항민이라 한다. 이들은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다. 다음은 살이 닳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모은 재산을 착취당하고 혼자 우는 백성들이 있다. 이들은 위정자를 원망하는 백성, 즉 원민이라 한다. 이들은 그렇게 무서운 존재는 아니다. 다음으로 호민이다. 이들은 잘못되어 가는 세상일에 불만을 품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잠적한다. 이들이 몸을 감추는 것은 잘못된 세상을 자기 손으로 바로 잡을 기회를 노리기 위한 것이다. 이들이 무서운 존재들이다. 이들이 주먹을 흔들며 개혁의 뜻을 외쳐 대면 원민들은 소리만 듣고 모여든다. 이렇게 되면 수종하던 항민들도 호응한다.
이른바 민초들의 저항의식을 자극하고 예견할 수 있는 '호민론'은 "홍길동전"의 주제의식으로 구체화되면서 허균의 삶을 관통하게 된다. 허균은 유학의 나라에서 태어나 주자학을 익혀서 관직에 등용되었고, 판서의 반열에 오를 만큼 학문에 통달했으면서도 제도의 모순점에 대해서는 개혁의지를 날 세웠던 진보적인 사상가였고, 배불숭유하는 나라의 고위관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불경에 통달하여 퇴청 후에는 먹장삼을 걸치고 승려들과 교유하였다 하여 간관들의 탄핵을 받은 바 있었으며, 강원도 삼척부사가 되어 임지에 도착하여서는 기생들과의 스캔들이 문제되어, 또 부처를 섬겼다는 비방이 추가되어 임지에 도착한 지 13일 만에 파직되는 등 그의 행적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허균을 말할 때 유, 불, 선에 통달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교산 허균은 47세가 되던 해(1616년), 형조판서에 제수되었다가 다섯 달만에 파직된다. 그의 파격적인 행적으로 미룬다면 파직은 예정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겠지만, 다시 1년 뒤에 좌참찬으로 발탁되는 것은 기적적인 그의 회생이라기보다는 광해조 말기의 난정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허균은 누님 난설헌처럼 자신에게 닥쳐오는 비극적인 종말을 알고 있던 게 분명하다. 그는 이미 4년 전에 자신의 문집을 완벽하게 정리한 다음, 절필을 밝히고 있다.
마흔세 살 되도록 글이나 짓는다고, 천금을 널리 털어 애쓰며 버티었네. 시와 문장 열 권을 방금 옮겨 쓰길 마쳤으니, 오늘부턴 이 몸이 다시는 시를 짓지 않으리
'문집을 다 엮고 나서' 전문
급기야 정치가 허균에게 비극적인 종말이 밀어닥친다. 허균의 애제자인 예조좌랑 기준격이 자신의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허균의 반정계획을 고발하는 비밀상소를 두 번에 걸쳐 올린 것이었다. "광해군일기" 9년 12월 24일 조에, 성공한 문학인이자 행동하는 양식이었던 교산 허균의 비극적인 종말을 예고하는 기준격의 상소가 실려 있다. 비밀상소라고 강조되어 있는 것이 다소 께름칙하지만, 여기에 그 비밀상소의 전문과 형이 집행되기까지의 과정을 옮겨 놓는 것은 교산 허균이 '폐모론'에 연루되어 사형이 되었다는 등, 그에 대한 마지막 정리가 대단히 애매하고 미흡한데서 오는 여러 가지 오해의 소지를 불식하기 위한 고충임을 헤아려 주기를 바랄 뿐이다.
삼가 생각건대, 국가가 불행하여 역변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역적의 뿌리는 실로 허균인데 그가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신은 몹시 분통합니다. 지금 허균이 역적의를 세워서 서궁을 끼고 정사를 보게 하려 한 진상을 일일이 진달하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전하께서는 아마 죄인을 알게 될 것이고 종묘 사직도 공고해질 것입니다. 기유년 겨울에 신의 아비는 외지에 있었고 신만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허균의 집에 갔더니, 신의 아비의 안부를 묻고 이어 말하기를, "의창은 선왕이 아끼던 자식이었으므로 매번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으나 너의 아비의 저지로 옹립할 수가 없었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아마 의가 출생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옹립하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또 신해년 겨울에 신의 아비가 역시 외지에 있었고 신만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허균의 집에 갔더니, 허균이 말하기를, "연흥이 나로 하여금 정세의 딸을 며느리로 삼도록 윤수겸에게 청혼해 달라고 하였다. 연흥은 수겸이 일찍이 도감의 군사들에게 호감을 샀기 때문에 혼사를 맺고서 큰일을 시행하여 시체 두 구를 끌어내고 대군을 세워서 대비로 하여금 정사를 대행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뼈가 저리고 가슴이 막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얼마 후 두 시체는 누구를 말하느냐고 천천히 물었더니, "임금과 동궁이다. 오늘 내가 연흥과 함께 가서 윤수겸을 만나 보고 청혼을 했다. 윤수겸이 비록 싫더라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 "윤이 뭐라고 하던가?" 하니, 들어줄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허균이 또 말하기를, "연흥을 통하여 궁중의 사실을 얻어 듣건대 임금에게는 이러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차마 듣지 못할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내가 지금 연흥에게 지휘 받고 있지만 일이 성사된 뒤에는 내가 병권을 장악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무력을 행사하여 연흥도 함께 죽임으로써 나의 권력을 가장 크게 만들고 대비를 끼고 온 나라를 호령하여 다른 사람들은 숨도 쉬지 못하게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상책이다. 그리고 상에게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이러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황제에게 모두 진달할 것이다. 그리고 적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 폐지하고 적자인 의를 세웠다고 한다면 은을 1만여 냥까지 쓰지 않아도 일은 순조롭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내가 권력을 잡는 것은 좋지만 심가 집에서는 그대의 집을 원망하고 있으니 심가가 뜻을 이루게 되면 그대의 집은 크게 패망하고 말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때 신이 그의 표정을 보니 의기양양하여 곁에 있는 사람은 안중에 없는 듯이 행동하였습니다. 신이 이 말을 듣고 즉시 상소하려 하였으나 그 당시 온 조정이 동인, 서인, 남인, 북인을 막론하고 모두 신의 집을 미워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혹시 신을 위협하고 죄를 뒤집어씌우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로 백방으로 생각을 해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그 혼사를 중지시키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사약 조희형을 불러서 이르기를, "듣건대 심가와 윤가 사이에 혼사말이 있다고 한다. 그대는 윤가와 서로 알고 있으니 꼭 나를 위하여 윤가에게 말하기를 '아무리 김가와 허가가 정세의 딸을 며느리로 삼도록 권하더라도 따르지 말아야 한다. 허가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간사한 사람이니 만약 그의 말을 따른 뒤에는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다'고 하라." 하였습니다. 그후 며칠이 지나자 희형이 돌아와 말하기를, "윤가는 생원님의 분부에 따라 혼사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수겸은 즉시 신과 절친한 사람인 송구를 청하여 손을 잡고 머리를 흔들면서 말하기를, "김가와 허가가 와서 혼사 문제를 말하여 내 몹시 민망스러웠다. 만약 기생원이 혼사를 중지시키지 않았더라면 나는 위태로웠을 것이다. 꼭 기모에게 달려가 만나 보고 혼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 주고 고맙다고 해달라." 하였다 합니다. 그 당시 심가와 김가는 신을 얼마나 미워했겠습니까. 지금도 소름이 끼칩니다. 허균이 윤수겸에게 혼사를 권한 전말이 명백하게 드러났고, 수겸, 희형, 송구가 다 살아 있으므로 속일 수가 없는 일입니다. 수겸이 신의 덕을 입어 혼사를 하지 않았지만 만약 혼사를 하였더라면 어찌 균에게 나쁜 영향을 받아 나라에 화를 끼치지 않았겠습니까. 신이 비록 용렬하지만 속으로는 노중련과 이병길의 높은 의리를 본받아 혼란된 것을 배제하고 큰 화변이 확대되기 전에 방지하고서도 감히 공로를 말하지 않았으니, 신을 일러 화단 사전에 방지하였다고 말하더라도 옮을 것입니다. 그러나 허균은 역적의 주모자입니다. 대개 허균은 선왕을 해치려고 음모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공주목사로 있다가 파면 당하고 부안으로 돌아갔을 때 그 고을 수령은 바로 광세였는데, 균은 그와 함께 의를 세우고 권세를 잡을 것을 음모하였습니다. 또 경술년에는 죄를 받고 옥에 갇혔으며, 신해는 정월에는 귀양갔으며 석방되어 돌아온 뒤에는 균의 집이 광세와 문을 맞대고 있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상종하면서 감히 역적 음모를 하였습니다. 허균의 성질이 경박하고 또 망령되기 때문에 신이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는데, "소진은 제 나라에 있으면서도 연 나라를 위하여 제 나라를 쇠퇴하게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허균은 김제남과 공모하면서 서울을 옮기자는 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참서의 본문에 없는 말을 더 써넣어 '첫째는 한, 둘째는 하, 셋째는 강, 넷째는 해이다'고 하였는데, 하라고 한 것은 교하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의 인심을 원망하고 소란하게 한 다음 이어서 손을 쓰려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그가 스스로 말한 것이었습니다. 허균이 공주목사 시절에 영을 셋이나 두었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의 식객인 심우영, 윤계영을 두고 이른 말입니다. 우영은 균의 처갓집 친족으로서 서로 친밀하기가 한몸과 같았다는 것은 온 나라에서 다 아는 바입니다. 허균이 일찍이 시문을 지어 우영에게 주기를 '나의 벗 심군'이라고 하였습니다. 균은 한평생 정도전을 흠모하여 항상 '현인'이라고 칭찬하였으며, '동인시문'을 뽑을 때에도 정도전의 시를 가장 먼저 썼고 우영의 시도 그 안에 뽑아 넣었습니다. 그런데 계축년 뒤로 허균은 말하기를, "나는 복이 있다.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을 때 우영에게 준 시를 모두 가지고 와서 나의 문집 속에다 넣으려 하였는데 때마침 일이 터져서 나만 화를 면하였다." 하였습니다. 심우영과 서양갑은 모두 허균이 친히 기른 자들입니다. 균이 양갑의 자를 석선이라고 지어 주었으니 그것은 전설 속의 신선 황초평이 돌을 양으로 둔갑시킨 일에서 뜻을 취한 것입니다. 허균이 매번 하는 말이 '오늘날 영웅은 내가 본 바로 는 서석선뿐이다' 하였는데, 허균이 법망에서 빠져나가게 된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계축년에 허균이 태인에서 올라온 후에 말하기를, "옥사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신경이 쓰여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는데, 죄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마음이 놓이게 되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오던 길에 선전관을 만나자 혼이 떨어져 나갔는데, 내가 서 있는 곳을 그냥 지나가자 매우 기뻤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역적의 격문은 내가 지었지만 내가 우영으로 하여금 내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끝내 죄를 면할 수 있었는데, 허실은 어떻게 내가 지었다는 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말했단 말인가. 매우 잘못하였다." 하였습니다. 또 경술, 신해년 간에 이르기를 '상이 법궁으로 이어하지 않으면 법궁에는 반드시 주인이 있게 될 것이다' 하기에, 신이 묻기를 '이른바 주인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하였더니, 허균이 말하기를, "천시와 인사를 놓고 볼 때 대군이 마침내 주인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계축년 전에는 허균이 스스로 말하기를 '의가 성사만 되면 원훈을 바로 이루게 될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매번 말하기를, "이이첨의 집에 머리가 큰 뱀이 있는데 최영경과 김직재의 귀신이라고 한다. 그러니 얼마 후에 망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변란이 발생하여 몸둘 곳이 없게 되자 결국 이이첨에게 의탁하였습니다. 신이 계축년 가을 무렵 그에게 묻기를 '전에는 어찌 대비로 하여금 의를 왕위에 앉혀 놓고 수렴청정하게 하겠다고 해놓고 오늘날은 그를 폐위시키겠다고 하는가?' 하니, 허균이 대답하기를, "너는 나이가 어리니 무엇을 알겠는가. 말로를 걷는 사람은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다가 과녁을 세워야 세상을 무사히 지낼 수 있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마 허균의 성품이 경솔하지 않았다면 신은 필시 허균의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그의 마음도 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방자한 말을 함부로 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그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신의 집안이, 그의 전일에 임금을 모해한 사실과 서궁을 부추겨 의를 세우려 했던 사실과 심가와 윤가의 혼사를 의논한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싫어하여 기필코 우리 식구를 다 죽이고자 기회를 틈타 모함을 하기에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신은 허균에게 큰 은혜를 베푼 셈인데, 알면서도 일찍이 진달하지 않은 죄는 마땅히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허균의 죄는 그 진상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신의 아비의 차자는 시대 상황을 알지 못한 나머지 스스로 죄를 범한 것이므로 그저 그릇된 일인 줄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남곤이 광국의 공훈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비록 허균이 없더라도 다른 사람이 있어서 변무하는 일을 감당할 것이며, 대론의 경우는 삼사와 우의정, 동벽과 서벽의 다른 관리들이 응당 수일 안에 처리할 것이므로 허균과 같은 역적이 간여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담당하면서 뒤로 물리고 또 물려 고의로 지연시키면서 오로지 신의 아비를 무함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공적인 일을 빙자하여 사적인 원수를 갚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허균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천지간에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가게 한 것은 신의 죄입니다. 허균이 말하기를, "정협이 자복하는 날에 이원형이 먼 곳으로부터 손을 흔들며 오기에 내심 그의 공초에서 말이 나올까 우려했는데 도착한 후에 문초하였으나 발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겨우 모면하였다." 하였습니다. 균이 또 말하기를, "내가 만약 정권을 잡고 대비가 청정을 하게 된다면 내가 심이기가 되는 것도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땅히 원상이 되어 온 나라의 일을 결정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렇듯 무뢰하고 패려스러운데다 흉악하기까지 한 허균의 죄는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지금은 대론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허균과 같은 역적의 도움이 없더라고 일을 변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을 모해하고 의창을 세우려 한 죄와 의를 내세워 서궁으로 하여금 수렴청정하게 하려 한 허균의 죄를 다스리소서.
기준격이 올린 비밀상소문의 전문이지만, 역모를 꾀했다는 확증을 제시하지 못한 채 산만한 내용과 허술한 진술로 일관하고 있다. 또 역모를 고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도 처리되는 과정이 애매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도 이 상소문에 담긴 내용에 대해 반신반의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역모를 고변한 상소문이라면 지체없이 관련자를 잡아들여서 사실의 확인을 서둘러야 하는데도, 몇 달 동안이나 방치하여 두었다는 사실이 같은 날짜의 실록에 '해설기사'로 등재되어 있음이 이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상소를 오랫동안 궁중에 머물러 두었다가 무오년 윤4월 14일에 추국청에 계하하였다. 당신에 기자헌은 강가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준격이 이 상소를 올려 그의 아비를 구하였다. 허균의 세력도 이때부터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조정의 반응이 신통치 아니하자, 기준격은 이틀 뒤인 26일에 다시 비밀상소를 올려 허균의 반역모의를 고변하였지만 그 내용도 먼저 올린 비밀상소문과 대동소이할 뿐 더 새롭고 구체적인 사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과정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대목은 교산 허균이 기준격의 상소를 반박하는 비밀상소를 올렸는데, 그 상소문이 분실되어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실록이 적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정을 고려한다면 교산 허균의 상소문은 누군가에 의해 파기되지 않고는 분실될 수가 없고, 또 분실되어서도 아니되기에 의도적으로 그를 무고하였거나 모함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1617년 12월 26일자의 "광해군일기"는 우참찬 허균이 비밀리에 상소문을 올렸으나 그 내용이 유실되었음을 적었고, 다시 1618년 윤 4월 7일자에는 궁색하게도 허균이 올린 비밀상소문의 '대체적인 내용을 요약해서 등재' 한다는 애매모호한 기사까지 있고 보면 교산 허균에 대한 국문에 문제가 있었음을 자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삼가 정원의 계사를 보건대, 곽영의 상소에 신의 이름과 경준의 흉격 등의 말이 있습니다. 이에는 명확한 말의 출처가 있을 것이 분명하니, 곽영과 함께 궐정에서 신문을 받아 그 출처를 끝까지 캐내어 허실을 밝힘으로써 모함 당한 신의 원통함을 씻을 수 있도록 해주소서.
물론 허균의 반대상소는 채택되지 않았고, 조정은 그를 국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역모의 확증이 드러나지 않았기에 이 사건을 의심하고 해괴이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형편이었고, 교산 허균의 자복을 받아 내지 못한 채 그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논란이 일게 되었다. 물론 허균의 확실한 자복이 있을 때까지 국문을 계속해야 한다는 상소도 있었다. 이같이 황망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관들은 '해설기사'를 써서 이 사건의 애매함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하인준과 황정필이 대체로 공초에 자복하였으나 또한 서로 미루고 핑계 대어 옥사의 실정을 다 캐내지 못했는데 국청이 급급히 허균을 아울러 죽이고자 계청하였으니, 이는 대게 이이첨이 옥사를 완결 짓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후에 형을 받은 사람들은 불과 한두 차례의 형신에 잇따라 죽어 나갔으니 그 음험하고 비밀스러운 상황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광해군은 정승들과 의금부의 당상들을 거느리고 친국에 임했다. 잡혀 온 사람들은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문초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혹독한 매질 속에서 작성된 현웅민의 공초는 음미해 볼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후의 흉서는 모두 신이 한 짓으로 허균은 모르는 일입니다. 단지 신만을 정형하소서. 허균이 죽는 것은 억울합니다."
친국이 더 길어지면 허균이 입을 열지도 모른다. 그가 입을 열어서 '서궁을 핍박한 일' 등을 거론한다면, 폐모의 난정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공초에 적혀야 하지를 않겠는가. 이를 두려워한 이이첨 등은 서둘러 정형하기를 목청 높이 주청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광해군이 이를 가납함으로써 친국을 끝내게 되었다.
교산 허균은 결안에 승복하지 않은 채 광해군 10년 8월 24일에 이르러 서쪽 저잣거리로 끌려 나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진실로 파란 많았던 인생을 마감하는 허균다운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교산 허균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기자헌은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 허균을 역모의 괴수로 몰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이 바로 자신의 아들(기준격)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기자헌의 탄식에는 조선 선비의 양식이 담겨져 있었고, 또 "왕조실록"은 그것을 적어서 후세에 전하고 있음에 가슴 뿌듯한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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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의 사람
이태리에서 비롯된 문예부흥은 인간과 자연의 발견을 모토로 했으며, 부자유스러운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려는 기운이 팽배했다. 이와 같은 이상을 충분히 나타낸 사람이 바로 '만능의 인간'이라 일컬어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였다. 그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등 화가로서도 불후의 이름을 남겼거니와 조각, 건축, 토목, 군사에도 밝았고 해부학, 생물학, 수학, 물리학 등을 연구했으며 철학자로서도 뛰어났었다. 또한 하늘을 날아 다니는 새를 평생토록 연구하여 비행기에 관한 이론의 기초를 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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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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