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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52 호
단기 4340. 3. 13 (음력 01.2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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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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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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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당신도 가끔 속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않는 것이 현명하다. / 로렌스 J.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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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四十一章 (노자 - 도덕경 : 제4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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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士楣, 勤而行之, 中士楣, 若存若亡, 下士楣,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偸,質眞若?,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상사문도, 근이행지, 중사문도, 약존약망, 하사문도, 대소지, 불소, 부족이위도, 고건언유지, 명도약매, 진도약퇴, 이도약뢰, 상덕약곡, 태백약욕, 광덕약부족, 건덕약투, 질진약투, 대방무우, 대기만성, 대음희성, 대상무형, 도은무명, 부유도, 선대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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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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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한째 장
직역
윗 사람이 도를 들으면 열심히 그것을 행할 것이오. 중간 사람이 도를 들으면 있을까 없을까 한다. 아랫 사람이 도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 웃지 않으면 도에 부족한 것이다. 그러므로 전해 오는 말이 있다.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나는 것 같고, 큰 도는 치우친 것 같고, 윗 덕은 골짜기 같고, 큰 결백은 욕된 것 같고, 넓은 덕은 부족한 것 같고, 홀로 있는 덕은 가벼운 것 같고, 순박한 진실은 변하는 것 같다. 큰 모서리는 각이 없으며, 큰 그릇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고, 큰 소리는 소리가 없는 것 같고 큰 모습은 형체가 없다. 도는 숨어서 이름이 없다. 대저 오직 도만 잘 빌려주어서 이루게 한다.
해석.
진실을 말한다. 도를 말한다. 그런데 도가 세속적인 가치를 가지는가. 돈으로 거래가 될 수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도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도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가 갰는가. 공장을 세울 텐가. 보석처럼 가공을 해서 팔 텐가. 그게 돈 돼 나. 그렇기 때문에 아랫사람은 웃는 것이다. 쓸데없는 일이다. 한평생 배불리 먹고 남위에 서서 호령하는 것 보다 좋은 일이 있는가. 보석에 집착하지 말고 집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하하 웃기는 이야기다. 이것이 하사이다. 조금 물질적인 것만으로 살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다. 그러나 아직 물질적인 유혹에 대해서 눈을 돌릴 용기가 없다. 다 버리면 내일 어떻게 살아가지. 그리고 정말로 도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잖아. 갈등을 한다. 이것이 중사이다. 물을 찾아 나섰다. 목마름으로 타고 있다. 그가 길을 가다가 약수터가 있는 표지판을 보았다. 그래서 수원을 찾아 올라간다. 그곳에는 깨끗한 물이 있을 것이므로. 이것이 상사이다. 그는 도에 목말라 하고 있는 자이다. 그 길이 맞는지 틀리는지 구분할 여지가 없다.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대가 사물을 보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그늘이 있어야 한다. 그늘이 없고 명암이 없다면 어떻게 사물을 구별하겠는가. 빛의 완전 없음과 빛속에 파묻혀 있음의 상태는 같다. 양자다 서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빛속에 파묻혀 있으면 어둡다고 느끼는 것이다. 눈앞에 백열전구를 들이밀어 보아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도는 이런 것이다. 윗덕은 표시를 내지 않는다. 내가 했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자기가 하고서도 드러내지 않음이 윗덕이다.
지구가 돌아갈 때 소리가 날까 안 날까. 움직이니까 당연히 소리가 난다. 그러나 우리는 듣지 못한다. 인간의 귀가 들을 수 있는 사이클은 지극히 미미하다. 만약 우리가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 고막이 터져 죽을 것이다. 아니면 지금의 목소리로는 서로의 의사를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지구의 모습이 보이는가. 우주로 나가야 한다. 그럼 태양계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큰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도는 이렇게 크다. 그리고 다른 것들이 이룰 수 있게 바탕이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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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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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어난 선비가 도를 들으면 최선을 다해 그것을 실천하고, 중간 정도의 선비가 들으면 그것을 반신반의하고, 낮은 수준의 선비가 도를 들으면 그것을 크게 비웃는다. 낮은 수준의 선비가 비웃지 않는 도라면 도라고 할 만한 것이 못될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전해 오는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 '참으로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뒤에서 물러서는 것 같고, 평탄한 길은 울퉁불퉁한 것 같고, 최상의 덕은 텅빈 골짜기 같고, 아주 흰 것은 오히려 검은 것 같이 보이고, 아주 확고부동한 덕은 도리어 불안정하게 보이고, 절박하고 순수한 것은 변덕한 것 같이 보인다. 아주 큰 방향은 모서리가 없고, 큰그릇은 이루어지는 것이 늦으며, 다시없이 큰 소리는 들을 수 없고, 큰 형상은 형체가 없다. 도는 숨어 있으며 이름이 없다. 무릇 도는 이 세상 만물에게 은혜를 골고루 베풀어주고 또 잘 길러 가꾸어 주는 것이다.
주
약존약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는 뜻임. 반쯤은 믿고 반쯤은 의심하는 태도를 말함. 대소지: 범속한 사람들이 인식을 부족으로 도를 크게 비웃는다는 뜻임. 건언: 입언, 법언, 격언. 이도약뢰: 이는 평탄하다는 뜻임, 뢰는 엉킨 실뭉치를 말함. 평탄한 길을 오히려 울퉁불퉁한 길로 보인다는 뜻임. 욕: 욕(때묻을 욕)과 의미가 통하므로 새까맣게 때가 묻어 있다는 뜻임. 건덕약투: 건덕은 확고부동한 덕을 말하며, 투는 도둑질하다 훔치다 구차스럽다의 뜻임. 확고부동하게 세워진 덕은 외관상으로는 불안정하게 보인다는 뜻임. 투: 변하는 것. 대음회성: 참으로 큰 소리는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이다, 도의 초월성을 뜻함. 대상: 큰 형상 즉 도를 지칭한 말임. 선대: 천하 만물에게 은혜를 골 구로 베풀어준다는 뜻임.
해
도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본질을 밝히고 실천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이다. 탁월한 선비는 도를 들으면 곧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 게으르지 않다. 평범한 보통 수준의 선비는 그것을 들으면 완전히 깨닫지 못하므로 반신반의한다. 속되고 어리석은 하급의 선비가 도를 들으면 괴탄한 소리로 알고 크게 비웃는다. 도는 만물의 이법이다. 백성들은 날마다 이 도에 따라서 생활하고 있지만 그것의 존재함이나 고마움을 잊고 있는 있는 것과 같다. 도는 만물의 배후에 숨어 있으므로 있어도 없는 것 같고 그 이름조차 없다. 다만 크나큰 힘으로 천하 만물을 길러 주고 보호해 주는 것이다. 이 장 또한 역경의 계사 전과 그 정신적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품성이 어진 자는 이것을 보고 인이라 하고, 품성이 지혜로운 자는 이것을 보고 지혜라고 하며 지자가 아닌 일반 백성들은 이것에 따라 생활하고 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를 체득한 이는 드믄 것이다. 천지의 도는 인으로 그 작용을 나타내며 자연의 변화를 통하여 은밀하게 만물의 활력소가 된다. 그러나 성인이 중생을 인위적, 의식적으로 지도하는 것과 같은 일을 도는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성대한 덕이고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천지 만물을 총괄하고 포섭하는 일 이것이 대업이며, 끊임없이 작용하여 날마다 새롭게 하는 일 이것이 성대한 적이라 한다.' 노자서와 주역은 같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동복 형제이다. 그러므로 노자서의 이해에 역경 연구가 크게 도움이 됨은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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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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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통감부가 빼돌린 구한국의 고서
규장각의 장서들은 통감부가 고스란히 접수·정리하여 잘 간수하다가 경성제국대학(현재 서울대학교)으로 이관시킨 것처럼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규장각 장서도 사실은 통감부 시절이거나 그 이전에 벌써 상당수의 귀중본이 일제의 침입자들에 의해 유린돼 있었다. 약 60년 후인 1965년에 와서야 그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무뢰한은 다름아닌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 확실한 기록을 과거의 총독부 서류철에서 처음으로 찾아낸 사람은 당시 규장각 도서들을 관리하고 있던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백린 열람과장이었다. 과거의 규장각 도서를 정리하다가 그는 1911년의 총독부 취조국 서류철 하나를 발견했다. 규장각 장서를 접수할 때의 관계 서류철이었다. 그 속에 그때까지 관계 학계를 포함하여 누구도 알지 못했던 놀라운 내막이 하나 들어 있었다. 그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규장각에서 골라잡은 후 일본에 빼돌렸던 귀중본의 목록이었다. 1911년 5월 15일자로 일본정부의 궁내부대신 와타나베가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대략 다음과 같은 골자의 조회공문을 보내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 관계사항의 조사를 목적으로 일본에 가져온 조선의 서적들이 있는바, 이토가 죽은 후로 그책들은 궁내성 도서료에 보관되고 있음. 이는 일본 왕족 및 공족의 실록편수에 참고로서 필요하며, 또 이 조선책들은 일본의 제실도 서관에는 없는 것들이니 아주 양도되기를 원함."
내역은 정치·역사·인물에 관한 책과 소수의 문지 및 읍지들로서 모두 33부 563책이었다. 과거의 장서각 장서목록과 대조시켜 본 결과 백린은 읍지를 제외한 모두가 원래부터 규장각 도서였음을 확인했다. 읍지 74책도 영조 연간에 홍문관에서 작성한 고본들로서 고종 32년(1895년)에 홍문관이 폐쇄되면서 규장각으로 이관됐던 것들이었다. 이 규장각 장서들은 이토가 정확히 언제 어떤 수법으로 일본에 반출해 갔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백린은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직후인 1904년 3월과 다음과 11월의 을사보호조약 체결 때에 이토가 특사로 왔었던 사실을 들어 그때 가져간 것이 틀림없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검토를 빌리면 그때 이토가 반출한 도서 등에 현재 국내에 없는 유일본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에 낙질로 돼 있는 귀중본은 (조감) 4권, (국조통기), (삼충록), (영남인물고) 13책, (반양일기), (동사보유), (기재답기) 등이다(백린, (서지학) 창간호 (윤승전문에 대출된 규장각 도서에 대하여), 1968년). 약 60년 전에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개성 근방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이 난굴한 고려자기들을 무더기로 입수해서 일본으로 실어내 간 사실은 이미 앞에서 상세히 언급했지만 규장각에 비장돼 있던 책까지 공공연히 반출해 갔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또 한번 아연하게 만든다. 그 책들은 한일합방 직후 일본 궁내부대신과 조선총독 데라우티사이에, 그러니까 침략자인 저들끼리의 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일본정부에 양도되어 현재 도쿄 궁내청 서릉료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66년의 문화재반환협정 때에는 한 권도 되찾아 오지 못했다. 사전에 벌써 규장각 귀중본에 손을 대고 그중에서 한국침략에 도움이 될 책들을 골라 일본으로 불법반출했던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는 드디어 초대 통감이 된 후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접수 혹은 수집한 무수한 옛 책과 문헌들을 통감부 이름으로 일본에 빼돌렸다. 그 일부가 역시 도쿄의 궁내성 서릉료에 소장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엔 2대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가 반출한 책들도 들어가 있었다. 이른바 '통감부 장서' 와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 으로 총 163부 852책인데, 다행히 이것만은 1966년에 반환문화재로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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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1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3. 자유와 결단
자기 반성이 결여된 인간의 행동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로 나타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현대인을 특징짓는 하나의 개념이기도 하다. 바로 우리집에서 그리고 옆집에서 "자유로부터의 도피" 현상을 쉽사리 관찰할 수 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보호아래에서 남들이 하는대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린 아이 자신은 원하지 않아도 미술학원에서, 피아노 학원에 또는 콤퓨터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안된다. 왜 그런 곳에 다녀야 하는지가 그들에겐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한다. 다른 아이들이 다니고 부모가 다니라고 하니까 다닌다. 그들이 커서 대학생이 된다. 그들은 "내가 꼭 대학엘 가야만 하는가? 아니면 대학에 가지 않고 다른 어떤 것을 하여야만 하는가?"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서 남들이 대학에 가고 부모들이 가라니까 대학엘 들어간다. 결혼도 마찬가지이고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삶은 나의 삶이라기 보다는 "지나쳐 버리는" 삶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우리들은 현대인의 인간 상실이라든가 소외를 이야기한다. 지나쳐버리는 삶에는 자유와 결단이 은폐되어 있다. 그러나 지나쳐버리는 삶이 극단적인 무의미와 허무에 직면할 때 자유의식은 더 이상 암흑 속에 머물지 않고 결단하는 의지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세상은 기계와 같은 로보트 인간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며 삶의 순간순간은 결단할 하등의 필요없이 정해진 프로그램에 의해서 삶 아닌 물질의 인과적 운동이 지루하게 연속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며 또한 자신과 남을 연결하여 관계 속에서 대화하고자 한다. 자유,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반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힘이다. 인간은 자유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결단할 수 있다. 자유는 인간에게 삶과 세계의 근원을 추구하게 해주는 필연적인 힘이며 또한 주체를 구성하게 해주는 가장 내면적인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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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우려먹다(울궈먹다)
본뜻 : 흔히 어떤 구실을 내어 남을 위협하거나 달래어 제 이익을 챙기거나 먹을 것을 챙기는 것을 '울궈먹는다'고 한다. 그러나 '울궈먹는다'는 말은 엄연히 '우려먹다'에서 나온 방언으로,'우리다' '우려먹다'가 표준어이므로 마땅히 '우려먹다'로 써야 한다. '녹차'같은 것을 따뜻한 물에 담겨서 먹을 때는 '우려먹다'란 표준어를 곧잘 쓰면서도 사람을 구슬리거나 협박해서 단단히 한 몫 챙기는 것은 '울궈먹는다'란 표현을 쓰는데, 두 가지 뜻 공히 '우려먹다' 한 가지 말로 통용되므로 다르게 쓰지 않도록 한다.
바뀐 뜻 : 위에서 설명한 대로 두 가지 뜻이 있다. 녹차같이 어떤 물건을 담가서 맛을 내 먹는다는 뜻과, 남을 위협하거나 달래서 물건이나 재물을 빼앗아 오는 것을 가리키는 뜻이 있다.
웅숭깊다
본뜻 : 이 말은 본래 우묵하고 깊숙하여 잘 드러나지 않는 장소나 물건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었다.
바뀐 뜻 : 그러던 것이 요즘에 와서는 주로 사람의 성품을 가리키는 말로 쓰는데, 온화하고 도량이 넓고 속이 깊은 성품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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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유명한 철학자인 동시에 유명한 수학자가 또 있는데, 그가 바로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이다. 그야말로 수학의 천재였다. 더욱이 그는 수학에서는 '파스칼의 정리'를, 물리학에서는 유명한 '파스칼의 원리'를 남겼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철학자였다. 그가 살았던 17세기는 불안정한 세기였다. 독일은 30년전쟁으로, 프랑스는 신교도들의 반란으로 한창 시끄러웠다. 이러한 종교적인 분쟁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당시가 과학의 혼돈 시대였다는 것이다. 케플러, 갈릴레이, 데카르트, 베이컨이 연이어 나타나 스콜라적인 과학지식에 반기를 들고 관찰과 실험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가고 있었다. 파스칼은 19세에 계산기를 제작했는데, 계산기를 만들면서 기계가 인간 못지 않게 논리적 추론자임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하다 보니 인간과 기계 사이의 구별이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은 데카르트 사상 전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간과 기계는 이성을 통해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에서 '생각하는 갈대'라는 정의가 탄생했다. 그는 "팡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한 대의 갈대, 자연 중에서 가장 약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는 갈대, 생각하고 있는 갈대이다. 그를 쳐부수는데 우주 전체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증기나 한 방울의 물만으로도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죽인다 해도 인간은 여전히 그를 죽이는 그것보다 좀더 고귀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거기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파스칼이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내린 '내기'의 결론도 역시 유명하다. 신을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믿는 것이 손해보는 짓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수학에서의 확률을 창시한 사람으로서 도박친구들과 함께 확률을 계산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신앙도 확률로써 설명학자 했고, 그래서 그 신앙에 도달했다.
"우리는 '신은 있다 혹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편으로 우리는 기울어지는가? 이성은 여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당신은 어느 쪽에 내기를 거는가? ... 둘 중 어느 쪽이든 그 가능성을 물리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당신이 어느 쪽을 택한다고 해도 그 이유를 대놓고 논할 수는 없다."
단 하나의 해결책은 바로 신이 있다는데 내기를 거는 것이라고 파스칼은 말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당신은 모두 이긴다.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이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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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너에게로 가는 먼길
아가페와 에로스
아벨라르.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하필이면 이룰 수 없는 사랑, 내가 소유할 수 없는 당신이라는 존재로 해서 눈 뜨게 된 나의 열정이 갑자기 원망스럽고 절망적인 심정 속으로 나를 밀어부치고, 사랑의 불가마 속에서 열에 들뜬 사람처럼 당신을 그리워 하고 당신과의 생활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는 나의 고뇌가 스스로 미워지기까지 합니다. 한 인간이 이성의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정신적인 사랑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는가. 육체의 사랑이란 꼭 불결하고 죄악시해야 할 성질의 것인가. 혹은 성애란 사랑을 더 깊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을 타락하게 하는 것인가에 대하여 나는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지고한 사랑에 그 정신이 닿아 있다고 믿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몸에 닿고 싶은 일정의 성애적 열망을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요. 오늘밤은 인간의 근원, 존재의 근거로서의 사랑에 대하여 새삼 깊이 생각해 봅니다. 흔히 사랑을 아가페적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인격적 사랑, 하느님을 향하는 사랑, 혹은 인간 상호간의 형제애를 뜻하는 아가페는, 육체를 초월한 헌신적이고 능동적이며 보상이 없는 사랑을 일컫는 말입니다. 에로스라는 말은 성애라는 의미와 함께, 철학에 있어서는 세계를 만드는 기본적인 원리의 하나로 보기도 하고, 플라톤(Platon, 427~347 B.C. 그리스)은 그의 저서 <향연<Symposium)>에서 에로스는 지혜, 미, 선을 사랑하며 추구하는 것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에로스가 내포하고 있는 성애의 의미는 쾌락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가장 인간적인 사랑-즉 정신도 육체도 함께 하는 전인적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 신화에 에로스가 사랑의 신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육체와 정신을 함께 지니고 있는 이상, 정신을 완전히 육체에서 분리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그러므로 인간의 사랑, 특히 남녀간의 사랑에 있어서 플리토닉 러브를 지고의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아주 힘든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애가 엄마의 품에 안기고 싶어하는 마음, 엄마의 젖을 만지고 싶어하는 마음, 또 반가운 친구끼리 오랜만에 만나면 저절로 서로 껴안게 되는 것, 이런 모든 것은,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육체적 접촉을 본능적으로 원하고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아름다운 물건을 보면 그것을 만지고 싶고 갖고 싶은 것과 같이, 좋아하는 사람의 옆으로 좀 더 가까이 가고 싶고, 그 사람의 목소리를 더 자세히 듣고 싶고, 되도록이면 그 사람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은 곧 그와 나와의 사이를 공간적으로 좁히고 싶다는 애기이며, 공간적인 거리를 좁히고 싶다는 애기는 결국 그의 몸에 내 몸을 밀착시키고 싶다는 애기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만나고 싶고, 손을 잡고 싶고, 안고 싶고, 하나가 되고 싶어지는 것이겠지요. 두 사람이 그들의 가슴 속에 고여 있는 것을 아무리 말로 표현하고 글로 써도 확인되지 않던 사랑을, 잠깐 동안의 포옹으로 확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가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를 들면, 사람이 화가 났을 때는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붉거나 하얗게 질리거나 하여 그 사람의 감정이 밖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또 즐겁고 행복할 때는 눈이 반짝이고 온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고 혈색이 감돌아 아름답게 보입니다. 무서울 때는 온 몸에 소름이 돋고 손과 발이 차갑게 되고 눈이 위로 치켜집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감정이나 마음의 상태는 모두 곧바로 육체로 옮겨져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얼굴이 예쁘게 보인다는 말도 바로 그런 뜻이지요. 한 사람에게 집중하여, 그에게 아름답게 보이려고 노력하고, 사랑의 감정이 고조되면 몸 속의 혈액이 빨리 돌게 되며, 또 그와 함께 있으면 행복해지므로 자연스럽게 표정이 사랑스러워지며, 모든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므로 경이와 즐거움으로 눈이 빛나게 됩니다. 민족시인 김소월(902~1934)이 쓴 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에서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모든 사물을 새롭게 발견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을 간략하지만 절실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예전엔 미처 몰랐던 자연과 사물의 의미를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비로서 느끼게 되는 경이가 어찌 사랑에 빠진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지 않겠습니까. 또 사랑은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기도 합니다. 사랑의 신 에로스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탄생 축하연 때 태어났으므로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속성을 지니게 마련입니다. 또한 에로스는 가난의 신 페니아의 자식이기 때문에 늘 결핍을 의식하게 되고 따라서 자기에게 모자라는 것을 채우고 싶어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종의 결핍감, 즉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자각하고 그것을 채우려는 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정신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정신적인 존재인 동시에 육체적인 존재이기도 하므로 사랑이 전인적인 것일 때 그 사랑 속에는 당연히 정신과 육체가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육체를 죄악시하고 사랑의 행위를 불결하게 생각하던 전 시대의 사고방식이 아직도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정신유산 속에서, 우리는 많은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적인 사랑을 구시대의 잔재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사고방식과, 육체적인 사랑을 아직도 죄악시하는 기존의 질서 속에서 어떤 것이 올바른 사랑인지에 대한 확실한 주관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젊은이들 중에는 무엇이든지 재빨리 성취하고 감각적으로 즐기고, 고통을 외면하고 편안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편안하게 살고, 즐기면서 인생을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더 높은 것, 더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상위지향의 의지는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본능입니다. 인간을 다른 하급동물과 구별하는 기준을 영혼의 있고 없음에 둔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맑고 추함, 높고 낮음은 그 사람의 품격을 가늠하는 유일하고도 중요한 기준입니다. 아무리 늠름한 육체와 강한 힘, 또 우수한 두뇌와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영혼이 비열하고 천박하면 그 사고방식과 행위도 비열하고 천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아름답고 추함도 역시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의 높고 낮음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집니다. 헌신과 겸손과 인내의 자세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비록 그 사랑의 끝이 비극으로 끝난다 해도 아름다운 것이며, 욕망과 이해타산, 감각적인 쾌락만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결과가 어떻게 마무리지어진다 해도 그들의 영혼이 썩고 있는 냄새를 숨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가까이 있고 싶고 서로 소유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은 육체를 갖고 있는 인간의 본능이며, 결코 죄악이거나 불결한 것일 수만은 없겠지요. 다만 얼마나 진실한 사랑의 힘에 의해서 육체적인 접촉을 하게 되었느냐가 문제가 되겠지요. 간절하게 사랑하여, 그의 옆에 있고 싶고 그에게 모두를 주고 싶고 그의 모두를 갖고 싶은 사랑의 정점에 도달하면 육체는 자연스럽게 그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사랑을 표현하는 도구나 방법으로 우리의 육체가 쓰여진다면 그 표현에 의해서 얻어지는 기쁨과 환희는 육체를 넘어서서 영혼의 깊은 곳까지 울리고 감동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쾌락을 추구하는 도구나 방법으로만 우리의 육체가 쓰여진다면, 그것은 피부의 어느 부분만을 스치고 지나갈 뿐 결코 감동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육체가 갖고 있는 능력은 어떤 정신적인 극복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있으며 육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육체 이상도, 이하도 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의 깊은 울음, 고뇌, 무한히 가변적인 세계를 육체의 능력으로는 결코 알 수도,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저 복합적이고 끊임없이 변하고 흐르는 인간의 총체는 영혼으로서만 이야기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불가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으로 결합된 육체는 충일한 기쁨과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게 해주며, 쾌락으로 결합된 육체는 관능의 열기 뒤에 오는 허무와 외로움, 씁쓸한 회한밖에는 체험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에로스가 세상을 만드는 기본적 원리의 하나가 된다고 보는 철학적 관점은, 곧 사랑이 세상의 기본이 되는 원리의 하나이며, 또 창조적 작업으로서의 사랑이 우리 존재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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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성공한 문학인도, 실패한 정치인도
교산 허균, 난설헌의 삼한
문학적인 소양을 바탕으로 과거에 등과하게 되고, 그것이 입신양명의 길로 들어서는 기초가 되었던 것은 조선 시대의 제도나 관행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문장이나 시문의 대가는 대개가 고위관직에 몸담고 있었던 정치인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사람들을 문학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송강 정철이나 고산 윤선도가 당대의 시문으로 명성을 떨쳤으면서도 정승의 반열에 들지 못했던 것은 예술적, 문학적인 소양이 정치적인 성향을 앞서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 다시 말해서 문학적으로는 대성하였으되 정치적으로는 참담한 패배를 맛본 인물로는 교산 허균을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땅에서 싹튼 저항문학의 효시이자, 개혁성향의 사회소설이요, 참여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되는 "홍길동전"의 내용은 적서의 폐단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만민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이상국가인 율도국을 향해 떠나가는 이른바 핍박받는 민중들의 생생한 모습을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문학적인 저항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더구나 유불선에 통달하였다고 평가받을 만큼의 지고한 학문을 갖추었던 교산 허균이 자신의 소설 "홍길동전"을 이 나라 최초의 '한글소설'로 완성했다는 점은 그의 양식과 용기를 웅변으로 말해 주는 대목이 아닐 수가 없다. 문학사적인 의미에서는 불멸의 작품을 남겼으면서도, 판서(지금의 장관)의 지위까지 올랐던 정치가 허균이 반란의 수괴로 지목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다면 정치적으로는 큰 실패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허균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를 끔찍이도 아꼈던 누님, 난설헌 허초희를 함께 거론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난설헌 허초희의 관향은 양천이고, 자는 경번이다. 그녀가 강원도 강릉의 초당동에서 허엽의 셋째 따님으로 태어난(1563: 명종 9년) 것은 거기에 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조부 김광철은 학문이 깊고 풍류를 아는 예조참판이었다. 그는 지금의 강릉시 사천면에 있는 모기재에 애일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볼 만큼 자연과 낭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먼저 태어난 난설헌이 그랬던 것처럼 교산 허균도 외조부의 무릎에 앉아 자연을 사랑하는 낭만을 몸에 익히면서 자랐다.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자신의 호를 초당이라고 한 것은 장인의 고장을 따서 지은 것이 아닌가 싶고, 허균이 호를 '교산'이라고 한 것은 외조부의 정자인 애일당이 있는 '모기재'에서 연유된 것이라면 그 고장의 풍광이 수려한 탓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그 고장의 생기와 숨결을 간직하려 했음일 것이다.
허엽은 서평군 한숙창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으나, 슬하에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고 사별하였다. 그러니까 허난설헌과 허균의 생모인 강릉 김씨는 허엽의 재취가 되는 셈이다. 허엽과 김씨 사시에서 태어난 소생으로는 천하의 대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하곡 허봉과 허균 그리고 난설헌의 삼남매가 있다. 이런 연유로 허엽, 허성, 허봉, 허균, 허초희를 일러 당대의 오문장가의 가문이라고 하였다. 난설헌이 태어났을 때, 오라버니 허봉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으므로, 난설헌은 문장가의 가문에서 자라면서 학문하는 분위기를 몸에 익힐 수가 있었고, 또 오라버니 허봉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는 천재 소녀의 문학적인 자질이 유감없이 개발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허균의 경우는 달랐다. 유년시절을 외가에서 보낸 허균이 서울의 본가로 돌아왔을 때 참으로 훌륭한 스승과 만날 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달이었다. 이달은 뛰어난 학문과 글재주를 가졌으면서도 계집종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는데, 오직 허엽만이 그를 인간적으로 대하면서 자신의 집에 드나들게 하였다. 물론 자식들의 학문을 보살피게 할 생각에서였다. 중형인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핵하였다 하여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 불운도 겪었지만, 형기를 마치고 적지에서 돌아온 허봉은 아우인 허균에서 몸소 옛 글을 가르치는 한편, 친우 이달에게는 허균을 위해 이백의 시를 강론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으며, 또 자신과 절친했던 유성룡으로부터는 문장을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스승 이달에게서 당나라 시인들의 낭만적인 시세계를 배우면서 서얼의 뼈아픈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가까이서 지켜보게 되었고, 통한과 좌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스승의 모습에서 재주와 능력을 갖추었어도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 입신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해야 하는 봉건적 신분제도의 모순에 격분하게 된다. 교산 허균의 '유재론'은 그렇게 싹트고 익어 갔다.
고금은 멀고도 오래고 천하는 넓으나, 서얼 출신이라고 하여 현자를 버리고, 어미가 개가한 자손이라 하여 재능있는 자를 등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듣질 못했다. 우리 나라만이 그런 자손에게 영영 벼슬길은 막고 있다. 작은 나라, 더구나 양편에 적을 두고서도 반역을 도모할까 봐 그들의 재능을 쓰지 않고, 그들의 경세를 이용할 줄 모른다. 이렇게 스스로 환로를 막고서도 우리 나라엔 인재가 없다고 탄식한다.
허균이 뒷날 서양갑, 심우영 등 여강칠우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후원자가 되는 것도, "홍길동전"을 지어서 적서의 제도를 폐지하고 평등사상을 고양하고자 하였던 것은 모두가 그의 스승 이달의 영향을 받으면서 확립한 '유재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허균은 누님 난설헌을 끔찍이도 따랐다. 여덟 살 어린 나이로 '광한전백옥루상량문'과 같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글을 지어 세인을 놀라게 했던 누님이 출가를 하고 나서부터, 만권 서적을 벗하면서 밤마다 독수공방으로 지새운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는 정한으로 가득한 누님의 시가 바람결에라도 실려 오는 날이면 허균은 펑펑 눈물을 쏟으면서 누님의 시에 심취하곤 하였다.
비단폭을 가위로 결결이 잘라 겨울 옷 짓노라면 손끝 시리다.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저음은 등잔불도 돋을 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
'밤에 홀로 앉아' 전문
선경(난설헌의 문학세계이기도 하지만)의 세계를 넘나들 수 있었던 그녀만이 그려 낼 수 있는 절창이 아니고 무엇인가, 특히 마지막 두 줄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젓는 것이 불꽃도 돋을 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는 절구는 오직 그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절묘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허균은 누님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착잡해 진다. 명문가에 출가하였으나 남편 복은 지지리도 없다. 밤마다 홀로 앉아 만권 서적을 벗하며 환상의 세계를 문장에 담아 본다 한들 어찌 지아비와 함께 하는 사랑만 하랴. 난설헌에게 밀어닥치는 불행은 끝이 없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딸과도 사별해야 했다. 뒷동산 언덕 위에 어린 자식들의 무덤을 만들어야 하는 어미의 심정은 고사하고 그 참담한 아픔을 시를 써서 달래는 난설헌의 회한을 무엇이라고 형용해야 되는 것일까.
지난해 사랑하던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던 아들 잃었네. 슬프고도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 보고 나란히 섰구나. 사시나무 가지에 소소히 바람 불고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반짝이는데 지전을 뿌려서 너희 혼을 부르노라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 아! 너희들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놀고 있으리 이제는 또다시 아기를 가진다 해도 어찌 무사하게 키울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곡자' 전문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바로 난설헌을 두고 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천재였소 가인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명시를 남길 만큼 다정다감했다. 그녀에게 마지막 설움을 안겨다 준 것은 스승이나 다름이 없었던 오라버니 허봉의 죽음이었다. 난설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것과도 같은 큰 좌절을 안겨다 주었다. 난설헌은 비탄에 잠겨 실성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때가 스물 여섯 살, 난설헌은 일 년 동안을 통곡으로 지새우다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한, 그렇다. 그녀는 한을 남기고 하곡 오라버니가 기다리는 세상으로 떠나간 것이다. 꽃 같은 나이 스물 일곱 살에, 1589년 3월 19일의 일이었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와 어울렸구나. 연꽃 스물 일곱 송이 붉게 떨어져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꿈에 노닐던 광상산의 노래' 전문
참으로 놀랍도록 아름답다. 또 환상적이다. 그녀가 꿈속에서 노닐었던 광상산은 물론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산이다. 그 산에 오르면 푸른 바다의 구슬 물이 손에 잡힐 듯하였고, 새 중의 새라고 하는 난새가 현란한 색채를 뿜어 내는 무릉도원이었다. 여기가 바로 난설헌이 살고자 하였던 이상 세계였으니 바로 선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특히 주목되는 구절은 '부용삼구타'라고 적은 원시의 구절이다. 물론 '부용'은 연꽃을 말하는 것이지만, '삼구타'는 구구단으로 해석하는 것이기에 '스물 일곱 송이'가 늘어졌다가 다음 구절인 '붉게 떨어져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하였다로 이어지고 있다면 그 스물 일곱이라는 수는 그녀의 짧은 생애와 같은 27이기에, 이로 미루어 난설헌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견을 우리는 선도사상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난설헌 허초희의 죽음을 천주에 삼한을 품고 갔다고들 애석히 여겼다. 첫째는 중국과 같이 큰 나라가 아닌 조선과 같이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한하고, 둘째는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고, 셋째는 인품과 시재를 겸비한 두목지와 같은 지아비를 만나지 못했고, 자녀가 없어 모성애를 알지 못하고 간 것을 한했다는 것이다. 난설헌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시집과 시편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유언을 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교산 허균이 진사시에 합격한 해(1589년), 난설헌은 정한으로 점철된 비극적인 생애에 종지부를 찍으며 요절하였다. 허균은 누님의 시편들을 수습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모든 문장과 시편을 함께 불태워 없애라는 누님의 유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선도사상으로 다듬어진 누님의 시세계라는 사실을 허균은 알고 있었기에 누님의 시가 있다는 곳이면 천릿길도 마다할 수가 없었다. 허균은 자신에게 보내졌던 누님의 시편들과 난설헌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을 통해 한편 한편 모아가기 시작하였고, 더러는 구전되는 것을 받아 적어서 재현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모아진 시편이 모두 2백 10편, 허균은 그 시편들을 쓰다듬으며 누님의 환생만큼이나 기뻐하였다. 이미 세상을 떠난 난설헌 허초희의 시편들이 이렇게 모아졌던 탓으로 후일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난설헌의 시는 아우 교산에 의해 고쳐진 것'이라고 매도되기도 하였다. 허균은 누님의 시편들을 책으로 엮어서 서애 유성룡에게 보이면서 서문을 청했다. 유성룡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략) 이상하구나. 이건 여자의 글이 아니다. 어떻게 돼서 허씨의 집안에만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나는 시학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 다만 보는 바에 따라 평한다면 말을 세우고 뜻을 창조하는 솜씨가 허공의 꽃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았다(후략).
허균은 누님 난설헌의 시집을 목판본으로 간행하여 자칫 사장될 수도 있었던 천재 여류시인의 시편들을 세간에 알렸고, 시를 사랑하는 사대부들은 그녀의 시를 읽으면서 절절하게 전달되는 정한의 미학과 선도사상의 깊이에 탄성을 토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의 여류문학이 기방이나 그 주변에서만 생성된 것이 아니라, 사대부가의 내당에도 실재하고 있었음이 비로소 입증된 셈이었다. 허균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난설헌의 시를 조선보다 땅덩이가 더 크고 넓으며, 수준 높은 문학이 실재하는 중국에 알림으로써 누님의 시적인 천재성을 이백이나 두보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었다. 난설헌 허초희의 시집이 간행된 때로부터 9년 뒤인 1598년에 이르러서야 허균은 중국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한 주지번에게 "난설헌집"을 보여 줄 수가 있었다. 주지번의 감동과 경탄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허균은 누님 난설헌의 시세계를 중국에 소개하고 싶다는 뜻을 솔직하게 토로하면서 협력을 요청하였다. 주지번은 허균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마침내 "난설헌집"은 중국에서 간행되어 조선 여류시의 진수를 뽐낼 수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난설헌집"은 다시 일본에서까지 발간되어 널리 읽히게 됨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동양 삼국에서 으뜸가는 여류시인으로 칭송받게 하였다. 모두가 누님 난설헌을 아끼고 따르면서 그녀의 선도사상을 흠모하였던 교산 허균의 눈물 겨운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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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manna)
이집트를 출발한 이스라엘인은 2개월 25일만에 새로운 땅에 이르렀다. 가지고 온 양식도 떨어지고 배고픔을 느낀 백성들이 '모세'에게 불평을 말하자 '여호아'는 '모세'에게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라"라고 일렀다. 과연 그날 저녁 수 많는 메추라기가 내려와서 야영지를 덮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이슬이 자욱히 내렸는데, 이슬이 사라지고 나니 서리같이 희고 동그란 것이 가득히 흩어져 있었다. '모세'는 백성에게 "이는 여호아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니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두어라"하고 일렀다.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 '만나'라고 했다. 그 맛은 꿀 과자 같았으며 해가 뜨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서 그것을 모았다. 또 하루가 지나면 부패해 버리는 성질이 있어 그날 필요한 몫, 즉 한 사람이 1호멜(4리터)을 가지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인은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을 날마다 만나에 의하여 목숨을 이어갔다. (출애굽기 16장 13절 이하, 민수가 16장 6-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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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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