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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51 호
단기 4340. 3. 12 (음력 01.2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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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근래 독자분 중에 같은 발행호를 수십~수백통으로 받으셨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메일 발행처인 인포메일에 문의를 하였습니다. 조만간 답이 오면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꾸 이런일이 벌어지면 않되는데 말이죠.
발행하기도 부담되네요. 모쪼록 빨리 답변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보람 깃드는 한주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바람의종(風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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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13회 지용신인문학상
한국 시문학사의 우뚝한 봉우리 정지용 시인을 기리고 한국문단을 이끌어갈 역량있는 시인을 발굴키 위해 제정한 14회 지용신인문학상 작품을 다음과 같이 공모합니다. 역량있는 시인들을 한국문단에 내놓은 지용신인문학상은 500만원 상금과 함께 매년 5월 지용선생의 고향인 충북 옥천에서 시상식을 갖습니다. 참신한 시인을 찾는 13회 지용신인문학상에 많은 응모를 바랍니다.
모집부문 : 시(5편이상) 마 감 : 2007년 4월 20일 접 수 처 : (우)360-716 충북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 1070 동양일보 지용신인문학상 담당자 앞 발 표 : 2007년 5월중 동양일보 지상 시 상 : 2007년 5월 지용제 행사장 상 금 : 500만원
응모요령 1) 응모원고 끝에 작자의 주소 성명(필명의 경우 본명 주기)전화번호를 밝히고 겉봉엔 지용신인문학상 응모원고 라고 쓸것. 2) 응모작품은 미발표되거나 현상응모된 바 없는 순수 창작품어어야 함. 3) 당선자에게는 개별통보함 4) 당선작에 대한 저작권은 발표일로부터 5년간 본사가 보유하고 그 이후는 작가에게 귀속됨. 5) 당선자는 기성문인으로 대우함. 6) 응모된 원고는 반환하지 않음.
심 사 : 문단 권위자로 위촉하며 당선자 발표와 함께 명단을 발표.
문 의 : 043) 211-0001
주관 : 동양일보 후원 : 옥천군·옥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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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당신 자신이 되어라. 그러면 당신보다 더 나은 적격자가 어디 있겠는가? / F.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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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四十章 (노자 - 도덕경 : 제4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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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者, 道之動, 弱者, 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반자, 도지동, 약자, 도지용.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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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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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째 장
직역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약한 것이 도의 쓰임이다. 하늘 아래 온갖 것이 있음에서 생겼는데, 있음은 없음에서 생겼다.
해석
되돌아가는 것. 그럼 어디로 되돌아간다는 것인가. 근본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출발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럼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원을 그려보자 출발점이 있고 선은 긴 여행을 통해서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한다. 다시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되돌아 가야 한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물 컵에 물을 가득 채웠으면 비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물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배움의 태도에 있어서 이러한 자세는 꼭 필요하다. 어떤 사상을 배웠다. 그래서 그 사상의 극점에 다다랐다. 학자로서의 명예와 부귀를 얻었다. 그래서 그 극점에 멈춘다면 그는 고정화되고 더 클 수가 없다. 이제 그는 죽은 것이다. 더 커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배운 것을 버려야 한다. 그것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 같이 다른 상극의 사상도 배울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도이다. 극에 이르면 다시 반대로 향하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나무가 자란다. 그래서 하나의 거목이 되었다. 그럼 다시 거름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나무들이 자신들의 삶만 영위하겠다고 한다면 결국 세상에는 한구르의 나무만 남게 된다. 그리고 그 나무는 토지의 영양분을 다 빨고나면 스스로 고사해 버린다. 나무가 자라고 다시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도 그러한 존재이다.
어린 새싹은 매우 부드럽다. 그렇기 때문에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새싹이 부드럽지 못하다면 성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겉 피부가 생장을 막기 때문이다. 이미 거죽이 딴딴하게 되었는데 그 거죽을 크게 할 수 있겠는가. 인간도 이렇다. 의식이 굳어져 있으면 다른 것을 배울 수 없다. 열려 있는 자세가 바로 약한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흡수한다.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클 수 있는 것이다. 도의 쓰임은 이러한 것이다.
유라는 것은 무엇인가. 있음이란 인간 의식의 분화이다. 만물은 무엇엔가 있음에 의해서 태어났다. 그러나 있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있다는 의식은 어디에 의지하는가. 그것은 없다는데 의지한다. 유무의 구분은 인간의 의식이 나누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물을 구분하기 전에 사물들이 아무런 구분도 없이 스스로 있는 상태가 무이다. 나와 자연은 하나이다. 구분이 되어 있지 않다. 그때 나라는 개념도 없다. 무는 인간의 인식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형상이 있다는 것은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무는 구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무한이라고 사용하였다. 모든 사물이 서로의 차별성을 가지지 않고 구별되어 있지 않은 것이 바로 무이다. 그것이 무이다.
유라는 것은 고정된 형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무엇이 있는가. 고정된 형체가 있기 위해서는 고정되지 않는 무가 있어야 한다. 즉 텅빈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 세계가 모두 고정된 형체를 가지고 있다면 아무것도 움직일 수가 없다. 어떻게 우리는 공기를 가르며 움직일 수 있는가. 그것은 공기 사이의 비어 있음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벽을 뚫고 가지 못하는가 그것은 벽에는 비어 있음보다 고정되어 있는 성질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 고정되어 있음이 유이다. 감마선과 엑스선은 그 벽의 비어 있음을 통과할 수 있다. 이 세계는 과학적으로 텅 비어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원자 안에 전자가 돌고 있고 원자의 극소한 점에 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전자가 돌아다니는 공간은 비어 있는 곳인가. 차 있는 곳인가. 그곳은 비어 있는 곳이다. 그 비어 있음이 붕괴되면 블랙홀이 탄생한다. 하나의 별이 점으로 축소가 된다. 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별 크기의 비어 있음이다. 우리는 그렇게 비어 있음에 의지해서 만물을 만들고 생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기철학을 보자. 기의 근본은 무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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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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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근본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며, 부드럽고 약하다는 것이 도의 작용이다. 천하 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
주
반: 반은 반을 뜻하며 근본으로 돌아가다의 의미임. 약: 부드럽고 약한 것.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것이 억세고 강한 것을 제압한다고 강조하고 있음. 유: 천지, 우주의 삼라만상을 말함. 현상계이므로 인간의 감각 기관에 의한 포착이 가능함. 무: 도를 지칭한 말임, 형체도 빛깔도 소리도 없는 존재이므로 인간의 감각 기관에 의한 포착이 불가능함. 우주 만물의 배후에서 우주 만물을 길러 내는 신비한 존재임. 본체계이므로 인간의 직관에 의하여 간취됨.
해
도는 우주의 삼라만상에 골고루 스며 있고 가지 않는 곳이 없으나 언제나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도의 작용은 무리가 없고 위력적인 힘도 구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드럽고 약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폭풍우, 회오리바람,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도 무리한 것은 오래되지 못한다. 사람도 무리한 짓을 하면 자신의 몰락을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되는 것이다. 물은 부드럽고 수동적이나 강하고 억센 것을 능히 제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도의 작용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다 유에서 나온다. 이유는 무의 작용에 의하여 구체화되고 현상 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무는 곧 도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그것은 형상이 없으므로 우리의 감각 기관에 의해 지각될 수 없다. 또한 논리적 사고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도는 물자체이므로 오직 천재적 직관에 의해 간취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의 만물생성론의 순서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 도, 무, 유, 우주 만물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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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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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식민지 연구자료로 이용된 규장각 장서
한일합방과 함께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접수한 구한국 정부재산 중의 가장 귀중한 문화재는 규장각에 비장돼 있던 방대한 분량의 고서와 지방의 사고본들이었다. 당시 규장각은 경복궁 동쪽의 건춘문 맞은편인 지금의 국군통합병원 자리에 있었다. 경복궁 안의 집옥재를 비롯한 여러 건물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옛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전적 문화재들은 외세 침입과 매국정객들의 창궐로 국력과 조정의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지던 19세기말 이후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먼지와 습기 속에 방치된 상태였다. 대한제국 정체의 여러 분야의 무력과 마비상태는 이 땅의 완전식민지화와 국토 병합을 음모하고 있던 일제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고마운 정황이었다. 한일합방에 앞서 소위 통감부가 속셈을 감추며 행정력을 발휘한 것의 하나가 먼지더미 속에 버려져 있던 규장각 장서의 정리 및 보존 대책이었기 때문이다. 1908년, 통감부는 일본인 전문가들을 불러다가 국내 학자의 협력을 받아 규장각의 네 서고에 가득히 쌓여 있던 옛 책들을 전부 밖으로 꺼내면서 먼지도 털고 일광소독도 시켰는데, 그때 처음으로 파악된 장서 내용은 뒤에 (규장각 폭서목록)이라는 책자로 간행되었다. 그 무렵 통감부는 창덕궁에 박물관과 동·식물원을 창설한 것처럼 또 이 규장각 장서를 중심으로 대한제국 제실도서관을 설치시켜 준다고 통감부 아래 임시 취조국을 두고 여러 곳의 옛 책들을 낱낱이 조사하게 했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이 관리하고 있는 과거의 규장각 장서 중에 (제실도서지장)이라는 장서인이 찍혀 있는 것들이 있는데, 곧 일제 통감부 시절의 경위를 말해주는 증거이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과거의 한국 왕실을 총독부 산하의 이왕직 관리기관 속에 봉쇄시켰고, 또 과거의 한국정부 재산과 왕실의 개인적인 재산을 분리시키면서 규장각 장서들을 총독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다 1931년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이관시켜 일본인 교수들의 식민지 연구자료로 삼게했었는데, 해방 후 자동적으로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관이 되었다. 규장각을 비롯한 각처의 장서들을 모조리 접수한 총독부는, 이왕가에게는 그전까지 건재했던 지방의 4대 사고의 하나인 전북 무주의 '적상산성 사고본' 을 인수하도록 생색을 냈다. 주객이 뒤바뀌어 나라를 빼앗긴 이왕가는 침략자로부터, 5백 년 사직이 소중히 물려주고 있던 막대한 수량의 온갖 귀중한 사책들 가운데 (이조실록) 1질이 포함된 지방 사고의 장서 한 벌을 배정받은 것이었다. 그것도 '조선총독부기증' 이란 도장까지 찍히면서였으니 모두 망국으로 인한 모멸이었다. 지금의 창덕궁 장서각은 그때 이왕가가 무주에서 올려온 '적상산성 사고본' 을 중심으로 발족한 것인데,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 또한 친일 매국배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경기의 풍성하고 어수룩한 재정 밑에서, 이왕직이 일본인 고관 퇴물들의 사복을 채워 줘 가면서 이왕가를 위하는 체 생색을 낸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창덕궁에 들여보낸 (이조실록)과 기타 사고본에 '무주 적상산성 사고본, 조선총독부 기증' 이란 도장을 찍은 자는 뒤에 가서 총독부 도서관장을 지낸 하기야마였다. 그는 장서각 발족 당시 한동안 실무 책임자로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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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1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2. 자기반성
일반적으로 반성이라고 하면 그것은 도덕적 반성을 뜻한다. 누구나 국민학교 시절 교실 앞에 서서 벌을 받으면서 반성하던 생각이 날 것이다. 또는 다음에는 거짓말을 하지말아야지 라든가 아니면 다음에는 친구에게 좀더 다정하게 대해야지 하고 반성한다. 도덕적 반성은 제한된 사회습관 안에서 특정한 가치관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적인 전체성을 바라볼 줄 안다. 내면의 세계성을 바라볼 때 이미 자아는 세계를 포함하며 또한 삶과 세계의 근원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세계 근원을 돌아보는 것"을 자기 반성이라고 한다. 인간은 자기반성에 의하여 가능성으로서의 자아를 성숙한 주체로 형성한다. 왜냐하면 자기반성은 은폐된 것을 개방된 것으로 전개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의 삶과 세계를 역사성으로 표현한다. 표현된 역사성은 문화로 나타나며 문화는 시간적 형태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소유한다. 인간은 주체라는 점에서 다른 존재들과 구분된다. 인간이 주체일 수 있는 근거는 자기반성이다. 인간은 자기 반성에 의하여 #1환경 속에서 대상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서 대상화하며 #2자아를 다시금 생각하는 자아와 생각되는 자아로 구분하고 #3더 나아가서는 자아와 대상의 공통적인 세계근원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자기반성에 의하여 예술, 종교 및 학문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표현하며 동시에 삶 속에서 세계근원을 표현하고 이해하며 체험한다. 한 마리의 새나 나비는 들에 있으면서 들의 일부를 이루지만, 인간은 이미 자신과 들을 구분하여 들을 대상화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나는 들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내가 들에 있는 것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3중의 사고가 가능하다. "들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고 인간은 말한다. 물론 다시 한 번 생각한다고 첨가할 수 있기는 하나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므로 인간은 대상과 자신을 3중적으로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자기 반성은 단지 기계적이며 형식적인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감각과 느낌과 사고의 통일적인 구조를 가지고 삶과 세계를 파악하면서 동시에 구성한다. 자기 반성이 결여된 삶은 무질서와 혼돈에 충만하여 자기반성의 의식이 활동할 때까지 길고 긴 미로를 방황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역사, 정치, 경제, 문화적인 현실은 자기 반성적인 의식의 거짓없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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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올곧다
본뜻 : 실의 가닥가닥을 이루는 올이 곧으면 천이 뒤틀림 없이 바르게 짜여진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무엇이든 반듯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바뀐 뜻 : 바른 마음을 가지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바르고 곧은 성품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레
본뜻 : 여름날 소나기 올 때 천둥치는 것을 '우레'라고 하는데, 순우리말 '울다'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울다'의 어간 '울'에 어미 '에'가 붙어서 이루어진 말로서, 고어에서도 쓰던 순수 국어다. 이 때문에 종전에 쓰던 우뢰라는 한자는 쓰지 않게 되었다.
바뀐 뜻 : 여름철에 갑작스런 소나기가 올 때 구름끼리 맞부딪치면서, 혹은 구름과 땅 위에 있는 사물이 맞부딪치면서 일어나는 방전 현상으로 하늘이 요란하게 울리는 것을 우레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는 '천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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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르네상스 시기의 사람들은 만능인이었다. 그들은 단순한 화가나 조각가가 아니었다. 그들은 물리학자요, 생화학자요, 화학자이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와 조각뿐 아니라 정확한 인체해부도를 작성하기도 했고 물리학과 토목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미켈란젤로 역시 위대한 예술가인 동시에 만능의 천재였다. 화가이자 조각가였으며 시인기기도 했다. 이에 비하여 근대 초의 철학자들은 단순한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천문학자요 수학자였다. 특히 이 당시 철학자들은 대부분 수학자였다는 사실이 눈에 뛴다. 유명한 철학자였던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파스칼 등도 모두가 천재 수학자였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아마도 철학과 수학이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멀어도 한참 먼 학문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수학은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는 보편타당성을 지닌 유일한 학문이었다. 그것이 독일에서 이루어지건 프랑스에서 이루어지건 간에, 1 더하기 2였던 것이다. 이처럼 분명한 수학, 이것만이 민족적 특성이나 개인적 차이를 넘어선 모든 지식의 전형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가 수학을 철학의 원리로 삼은 전형적인 예이다. 그는 해석기하학에서 많은 연구를 해 근대과학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이처럼 수학적 지식만을 확실한 진리로 생각한 그는 철학에서도 수학의 공리를 찾고자 노력했다. 곧 의심의 여지가 않을 만큼 명백한 것을 철학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았다.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있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으로 모두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한 후에도 무엇인가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확실한 진리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그가 모두 의심해 본 결과 남은 것이 바로 그 '자신'이었다. 말하자면 "이렇게 모든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도달했다. 그는 이것을 철학의 제1원리로 삼았다. 이 내용은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 나온다. 데카르트가 처음에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오히려 자연과학이나 우주론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의 우주이론에 의거하여 빛의 현상으로부터 행성의 생성, 인간에 이르는 우주의 생동적인 모습을 고찰했다. 이 저작은 1633년에 출판하여 했으나 마침 그때는 코페르니쿠스의 행성이론을 토대로 한 갈릴레이의 저서 "대화"가 지동설을 유포시킨다는 죄목으로 교황의 유죄판결을 받아 자신의 학설을 철회하게 되었던 때였다. 데카르트는 공연히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서 "방법서설"의 출판을 보류했다. 그러다 그가 죽은 지 14년이 지나서야 출판되었다. 이러한 일을 두고 호사가들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과 결부시켜 이야기하곤 했다. 데카르트가 출판을 포기했을 때, 그의 친한 친구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한다. "자네가 브루노처럼 의연하게 화형당하면 나는 자네를 위해 슬피 울고,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한 갈릴레이의 용기를 반만이라도 따라간다면 자넬 다시 보겠네." 여기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던 데카르트는 간신히, "나에게도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있네."라고 했다. 이 말이 잘못 전해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이 생겼다고도 하는데, 이는 역시 호사가들의 말장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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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열정과 광기
오늘 우연히 서양미술 전집을 뒤적이다가 강렬한 빛깔의 한 그림 앞에서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빈센트 반 고호(Vincent van Gogh, 1853~1890, 네델란드)의 `아를르에 있는 고호의 집`이었는데, 샛노란 색깔로 온통 칠해져 있는 그 집은 마치 햇빛에 전신을 드러낸 채 불타고 있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개의 그림 `밤의 카페`는 마룻바닥도, 천정에 걸려 있는 등불도 의자도 테이블도 모두 샛노랗게 타고 있어서 내 가슴에 이상한 전율 같은 것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나는 문득 사랑에 있어서의 광기도 이런 전율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한 예술가의 내부에 지글지글 끓고 있던 광기는 오늘 내 눈 앞에 나타나서 내 마음 속의 광기에 불을 지르고 모든 것을 온통 태워 버릴 것처럼 무섭게 이글거렸습니다. 그의 그림은 뜨거운 정열을 내뿜으며 순식간에 모든 물체를 녹여 버릴 것 같은 강렬한 힘으로 사물을 수많은 점으로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피스톨을 쏘아 자살을 하고 만 그의 생애를 생각해 보면서, 나무도 풀잎도 구름도 하늘도 교회마저도 꿈틀거리고 있는 그의 그림들을 들추어 보았습니다. 고호는 정말 정신분열증 환자였을까요? 그가 사랑했던 누이 케에를 만나게 해 달라고 램프 위에 손을 갖다 대고 태웠다는 일화, 그가 광부들 속에서 신앙을 전도하러 다닐 때, 비참한 노동자들 속에 완전히 뛰어들어 가진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나누어 주고 병자들과 함께 생활을 했던 일, 또 병들고 가련한 매춘부와 함께 남의 눈을 아랑곳하지 않고 동거생활을 한 일, 고갱(Paul Gauguin, 1848~1903, 프랑스)와 다투다가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낸 일 등, 그의 광기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일화를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고호를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만, 정말 그가 미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저 그림자 하나 없이 불타고 있는 선명하고도 아름다운 많은 그림들을 그릴 수가 있었을까요? 그는 다만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정열과 결벽증으로 극단적인 삶을 살다가 간 특이한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어떤 일에 임하면, 그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극도로 단순한 정열에 휘말려 버리는 강한 집념이 그를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사람으로 보이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보통사람의 눈에는 보통이 아닌 사람들이 미친 사람으로 보이는 법이므로, 자기와 맞지 않는 세상의 기준과 질서에 밀려난 고호는 결국 자기자신을 결산하는 일에서 자살이라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나는 고호의 정열과 광기를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속에 타고 있던 정열을, 그 광기를 어느 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식과 비상식, 정상과 비정상과의 괴리는 특수한 예술가들이 흔히 겪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사랑이라고 하는 초월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과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과의 사이에 있는 시각의 차이, 사랑을 높은 곳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사람과 단순히 소유와 쾌락의 차원에 머물고자 하는 사람과의 차이와 같이, 절대로 서로 융화할 수 없는 심한 이질감을 갖고 있습니다. 한 예술가가 창작의 모티브를 찾아 거기에 열중할 때는, 한 사람이 사랑의 열기에 닿아 거의 광기에 가까운 정열을 느끼는 것과 똑같은 상태의 도취감과 긴장을 느끼게 됩니다. 나는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태양의 신 제우스가, 사랑하는 여인을 사로잡기 위하여, 그의 아내 헤라의 질투를 피해 가면서 스스로 동물이나 바람 또는 비 같은 것으로 변신하여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그것을 알고 난 헤라가 질투의 화신이 되어 제우스의 연인들을 벌주고 파멸시킨 것이나 모두 다 이 사랑의 광기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제우스는 반드시 헤라로부터 노여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사랑의 욕망을 단념할 수가 없었고, 또한 헤라도 그의 질투가 결코 제우스의 사랑을 제어하지 못하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번번히 그의 연적들에게 질투의 화살을 겨누었습니다. 특히 제우스가 탑 속에 유폐되어 있는 왕녀 다나에를 사랑한 나머지 황금의 소나기로 변하여 쏟아져서 탑의 균열 속으로 흘러들어가 다나에와 정을 통했다는 얘기는 화가들의 많은 동판화와 유화의 소재가 되었을 만큼 격렬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황금의 소나기`는 그 어휘 자체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찬란하며 광적인 빛을 띠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황금의 소나기 같은 사랑, 고호의 불타고 움직이는 열정에 휘말리고 있는 자신의 내부를 두려움에 차서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평소에 내가 늘 동경하고 사랑했던 물빛 평화와 안온한 정서는 고호의 그림 앞에서 마구 흔들리고, 핵처럼 분열되어 나를 산산히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아벨라르. 나를 이 황금의 열풍으로부터 해방되게 해주십시오. 나는 결코 분열되거나 폭발하지 않고 오직 지순한 향기로써 내 사랑을 보호하고 싶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높은 곳으로 나와 나의 사랑을 끌어올려 다소곳이 지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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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성공한 문학인도, 실패한 정치인도
정치인 정철
조선 시대의 모든 학문은 문학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문자를 체계적으로 습득하기 위해 처음 대하게 되는 '천자문'의 구성이 4자시 250수로 되어 있었으므로 시를 통해 우주를 알고, 시를 통해 자연과 역사를 알게 하였으며, 또 인성을 바른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도덕적인 가치도 시를 통해 터득하게 하였다.
지우필개 덕능막망
내게 잘못이 있음을 알았거든 반드시 고쳐야 하고, 내가 능히 할 수 있을 일을 얻었거든 잊지 말아야 한다. 위태롭고 욕스러운 일이 잦으면 곧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 것이니, 숲이 있고 물이 있는 곳에서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옳을 지어다.
두 가지 경구는 모두 "천자문"에 적혀 있는 구절이지만, 삶의 지혜를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는 더없이 귀중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네 살짜리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에게 이 같은 구절을 수백 번씩 외게 하여 몸에 익히게 하는 인성교육의 방법도 본받을 만하지만, 그것을 문학적인 형식을 통해 이해시키고자 한 지혜로움에는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명심보감", "통감", "소학", "논어" 등에 기술된 아름답고도 가치있는 내용을 되풀이 읽게 함으로써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혹은 그것을 지행해야 하는 이치까지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 학문과 인격의 완성을 동시에 도모하다가, 결국 "시경"에 이르러 문학의 이치로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살피게 하는 안목을 갖게 하는 교육과정을 오늘 우리들의 찌들고 맹목적인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지침으로 삼는 것이 진실로 옛 것을 오늘에 되살리는 온고이지신의 아름다운 정신이 아니겠는가. 조선 시대를 살았던 뛰어난 경세가나 명성을 남긴 정치가는 모두가 문학을 바탕으로 인격을 도야하고 교양을 넓혔으며, 또 자신의 의지도 그런 방법으로 토로하였다. 그러나 문학의 본질론이라는 면에서 살핀다면 예술로서의 문학이라기보다 학문으로서의 문학이거나, 생활로서의 문학이라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의 사대부로 문학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가 있었던 사람들은 정승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따라서 훌륭한 정치가로서의 명성을 남기지는 못 했다. 다시 말해서 성공한 문학인이기에 정치가로서는 실패한 경우가 되는 셈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 교산 허균일 것이다. 송강 정철은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조 가사문학의 쌍벽이자 우리 문학사를 여는 큰 별이라는 점에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송강 정철을 천재적인 시인으로 평가하고 그가 남긴 주옥 같은 가사문학을 상찬하는 데만 주력해 온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나로서도 송강 정철을 그렇게만 보아왔고, 더구나 정철 최초의 가사인 관동별곡에 내 고향 강릉 경포대와 강문포구의 절경을 노래하고 있어 남다른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우개지륜이 경포로 내려가고 십리빙환을 다리고 고쳐 다려 장송을 혼 속에 싫도록 펴지시니 물결도 잔잔하여 모래를 헤이로다 고주해람하여 정자 위에 올라가니 강문교 너머 옆에 대양이 거기로다.
어찌 놀랍지 않으랴. 4백여 년 전에 쓰여진 위의 정경은 지금의 실경과도 별로 다를 게 없다. 나는 지금도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에 즐겨 오르고 강문교도 자주 건너는 편이다. 그때마다 "관동별곡" 의 이 대목을 흥얼흥얼 외면서 송강가사의 진수 속으로 빠져들곤 한다.
송강 정철을 가사문학의 거벽만으로 보아왔던 내가 그의 전생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하소설 "조선왕조 500년"을 쓰면서 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재된 그에 관한 기록과 또다른 여러 전적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문학사적인 면에서의 송강 정철만으로는 그의 파란 많았던 전생애를 정확하게 살펴 볼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송강 정철은 조선 시대의 선비가 그러했듯 문인이기 전에 관직에 등용된 공직자였고 가장 어려웠던 시대에 살았던 정치인이었다. 그의 가사문학에는 통한으로 점철된 정치인 정철의 번뇌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그의 가사문학은 천재적인 시재로서의 문학성을 집대성한 것일 뿐, 인간 정철의 진면목은 파악하기는 태부족일 뿐이다. 선조는 정철을 이렇게 말했다.
정철은 그 마음이 정직하고 그 행동은 올바르며 그의 혀는 곧 직언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미움을 줄 뿐이며, 직에 임하여서는 불고가사, 몸이 쇠척하도록 온 힘을 다했고, 충성과 절의는 초목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이름을 다 아는 바이니 참으로 이른바 군계일학이며 전상의 맹호라, 만약 그를 벌한다면 이는 마치 주운을 베는 것이나 같다. 임금이 신하를 평하는 글로는 대단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철은 침이 마르게 자신을 극찬한 바로 그 선조의 명으로 파직을 되풀이하였고, 끝내는 귀양살이까지 하게 된다. 동서로 갈라진 정쟁이 극심했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이다. 송강 정철은 이른바 서인의 거벽이었고, 그는 꺾일지언정 휘어질 줄 몰랐던 탓으로 타협은 고사하고 차선도 몰랐다. 그가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때였다. 명종의 사촌 형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탐내어 그의 아버지와 함께 처족을 모함하여 마침내 처남을 죽이고 처가의 재산을 탈취한 사건이 있었다. 정철이 이 사건을 맡게 되자 명종은 그에게 관대히 처분하도록 밀지를 내렸다. 정철은 왕명을 거부하고 경양군을 중형(사형)에 처했다. 법도와 정의를 으뜸으로 여기는 공직자의 표상이자 용기있는 행동이 아닐 수가 없다. 그후 정철은 명종의 미움을 사게 되어 벼슬길이 막히는 등의 불이익을 당했으나 그럴수록 정철의 강직한 성품은 일세를 풍미하게 되었다. 송강 정철의 강직함이 이와 같았으므로 당대의 거유 퇴계 이황도 그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옛 간관의 풍도가 있다.
정철은 대쪽같은 선비의 기상으로 이미 젊은 날에도 끊임없는 핍박과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청함으로써 마침내 파직되어 부처되기에 이른다. 이때의 사단을 여기에 소상히 적을 겨를이 없으나, 이 또한 임금(선조)의 내심을 헤아리지 않은 채 명분과 공론을 내세웠던 당당한 모습이었다. 조선조와 같은 봉건군주시대에 고위관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임금의 뜻을 거역하면서까지 공론을 주장하는 것은 자신에게 밀어닥칠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설혹 그 주장이 옳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였기에 더욱 그렇다. 송강 정철은 명종, 선조의 2대에 걸쳐 어의에 거슬리는 공리공론을 내세웠으면서도 58세를 일기로, 더구나 관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세상을 마감할 수가 있었던 것은 기적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그가 비록 수많은 사람들에게 죄주기를 주장하였으나 옳고 그른 일을 분명하게 가렸기 때문일 것이며, 그에게 내려진 시호가 문청이라는 사실로도 이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송강 정철에게 밀어닥치는 곡절은 그가 죽음 다음에도 삭탈관직과 복직을 거듭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이를 강직히 지나쳤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사계 김장생이 우암 송시열에게 물었다.
"송강 정철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가?" 송시열의 대답은 이러했다. "내 부형께서 일찍이 정철은 청직하나, 속이 비좁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에 김장생이 다시 부연하였다. "옳은 말이오. 정철은 자신이 청백하고 아무런 혐의가 없음만 믿는 안하무인으로, 이것이 끝에 가서 일세의 원수같이 미움을 받는 사람이 되었지."
송강 정철을 평가하는 이 같은 견해를 깊이 있게 살펴본다면 자신의 결백함만을 표준으로 삼아 불의를 척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끝까지 밀고 나갔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학문이 높아지면 도량도 넓어지는데, 정철도 역시 학문이 낮은 탓이다."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어찌 되었거나 송강 정철은 법도와 명분을 소중히 한 불출세의 선비였다. 사가들은 그를 말할 때, 천성이 소통하고 준결하다고 적었으며, 부모를 섬김에는 지효 하였고, 형제간의 우애는 화목을 으뜸으로 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또 정철은 어떤 글이라도 세 번 읽으면 능히 암송하였고, 근사록, 주자의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특히 시문을 잘했으며 글씨에 능했다고 적었다. 송강 정철. 그가 남긴 주옥 같은 가사문학을 읽으면서 문학사적인 의미에서는 성공한 문학인이지만, 실패를 거듭한 정치인 정철이라는 면에서는 문학사의 뒷장에 가려질 수밖에 없다. 다만 그의 전생애에 걸쳐 일관되게 유지되었던 '꺾일지언정 휘어지지 않았던 선비의 표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큰 교훈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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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기원전 490년 페르샤군은 '알타페르네스'와 '다티스'를 지휘관으로하여 희랍을 침공, '에게'해를 건너 아테네 시 북방 412Km인 마라톤평야에 상륙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구원을 청했으나 거절 당하여 10배가 넘는 페르샤의 대군과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밀티아테스'의 교묘한 지휘로 아테네군은 대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 마라톤 전쟁의 승리를 아테네 시민에게 알리고자, 한 용사가 40Km의 거리를 단숨에 달린 끝에 승리를 알림과 함께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마라톤 경주'의 시작이라 하며 현재 올림픽에서 거행되는 마라톤의 거리도 아테네-마라톤간의 거리와 같은 40Km(정확히 42.195Km)이다. 다만 그때의 용감한 병사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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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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