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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50 호
단기 4340. 3. 10 (음력 01.2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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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새롭게 사는 법
매일 똑같은 하루니 지겹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매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일어나는 시간이 어제 6시였다면 오늘은 6시 5초에 일어났을 수도 있고 어제 점심에 된장찌개를 먹었는데 오늘도 된장찌게다? 아마 어제의 된장찌게와는 다를 것입니다. 고춧가루의 갯수도 다를 것이고요. 어제 회사 동료직원이 오늘도 똑같이 입고 출근 했나요? 자세히 보세요. 머리모양이나 양말이라도 어제와는 바뀌어 있을 겁니다. 아닌가요?
사실 똑같은 하루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부분은 철학적인 문체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스스로 그것을 정의하고 틀에 가두기 때문에 틀에 박힌 쳇바퀴같은 하루라는 푸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지루하다 생각하면 끝이 없고 재미있다 생각해도 끝이 없습니다. 어느것을 택해야 좋은 지는 알지만 재미있게 생각하고 매일을 대한다는 생각은 어디서 찾을 까요? 또한 하루하루 새롭게 사는 방법이 있을 까요?
그것은 책입니다. 책속에 답이 있고 책이 사람 생각을 바꾸게 합니다. 그러나 진수성찬 차려놓으면 뭐하나요? 먹지를 않는데. 안그런가요? 우리는 먹어야 합니다. 널려있는 양식들을 빨리 습득하고 가져와야 합니다. 그러면 새로워집니다.
소프트웨어를 예로 들어 볼까요? 한글 워드프로세서라는 문서를 만들고 편집하는 소프트웨어가 있습니다. 초창기에 어땠습니까? 투박하고 마우스는커녕 키보드로만 조작했어야 했습니다. 단축키를 외우지 못하면 쓰기 여간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한글 2007을 보세요. 수도 없는 아이콘이 생겼고 사용자 위주로 개발되어 초보자도 쉽게 문서를 작성하도록 발전했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사용자가 원했고 회사는 이것을 반영하고 새로운 버전 개발을 위해 열심히 일했기 때분입니다. 앞으로도 더욱 편해진 워드로 발전하겠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의 이름은 하나입니다.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가진사람은 그대로 그럭저럭 살면 그럭저럭 죽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찾으려하고 보다 행복하게 사는 법을 고민하고 찾아 다니고 습득할 때 우리는 하루하루 새로워집니다. 그렇게 탐구하고 연구하고 책을 보며 바꾸고 다듬으며 사는 사람은 그럭저럭 죽지 않습니다. 저는 어떻게 죽는가 하는 문제도 스스로의 수양에 있는 것이 1차적이지만 책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좋은 방법 하나 알려드릴까요? 쓰세요. 뭐든 써보세요. 길고 짧든, 낙서든 그림이든 써보세요. 하루도 걸르지 않고 써보세요. 한달이면 사람이 변합니다.
앞으로 노자 도덕경 이외에도 고전이 꾸준히 올라가겠지만 고전을 통해 또는 다른 수필들을 통해서, 아름다운 시를 통해서 정화하고 닦아내고 창조하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합니다. 신기한 것은 이런 것들은 찾지 않으면 안보인다는 겁니다. 제가 발송하는 독서편지를 만난 사람도 찾아다녔기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만난 것입니다. 잘 찾으면 양질이요 입다물고 먹고 싸고만 있으면 악이 됩니다.
3월 들어 제가 짬이 나질 않아 여러모로 챙겨드리지 못함에 안타깝습니다만 최대한 짜내고 짜내서 여러분과 자주 뵙길 저역시 바랍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주변인들이 걱정 하지 않도록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고 늘 미소로 읽는 독서되시기를 바랍니다.
- 2007.03.10 바람의 종(風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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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제9회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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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당신 자신의 부도덕성과 싸우고 이웃과 화목하게지내라. 그리고 새해를 맞을 때마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라. / 벤저민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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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三十九章 (노자 - 도덕경 : 제3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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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其致之. 天無以淸, 將恐裂. 地無以寧, 將恐發. 神無以靈, 將恐歇. 谷無以盈, 將恐竭, 萬物無以生, 將恐滅. 侯王無以貴高, 將恐蹶, 故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 是以後王, 自謂孤寡不穀, 此非以賤爲本邪, 非乎. 故致數輿無輿, 不欲??如玉, 珞珞如石.
석지득일자, 천득일이청, 지득일이녕, 신득일이령, 곡득일이영, 만물득일이생, 후왕득일이위천하정. 기치지. 천무이청, 장공렬. 지무이녕, 장공발. 신무이령, 장공헐. 곡무이영, 장공갈, 만물무이생, 장공멸. 후왕무이귀고, 장공궐, 고귀이천위본, 고이하위기, 시이후왕, 자위고과불곡. 차비이천위본사, 비호. 고치수예무예. 불욕록록여옥, 낙락여석.
- 위의 끝단의 록록의 록자는 '옥 록'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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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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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아홉째 장
직역
옛날에 하나를 얻었다는 것은 이렇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고, 신은 하나를 얻어서 영묘하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서 차고, 온갖 것은 하나를 얻어서 나고, 제후와 제왕은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바르게 한다. 이것은 그것이(하나가) 도달한 것이다. 하늘이 하나로써 맑음이 없으면 장차 찢어질까 두렵다. 땅에 하나로써 편안함이 없으면 장차 쪼개질까 두렵다. 신이 하나로써 영묘하지 않으면 장차 가물까 두렵다. 골짜기가 하나로써 차 있지 않으면 장차 다할까 두렵다. 온갖 것이 나지 않으면 장차 멸망할까 두렵다. 제후와 제왕에 고귀함이 없다면 장차 실족할 까 두렵다. 그러므로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삼고, 높음은 낮음을 기초로 한다. 이런 까닭에 제후와 제왕은 스스로 일컬어 고독하고, 부족하고, 곡식이 부족하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천함을 뿌리고 삼는 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자주 가마를 타는 것은 가마를 안 타는 것만 못하다. (녹녹- 구슬의 모양. 적음을 비유한 말이다.)하여 옥석과 같기를 바라지 말고, 낙낙하여 보석 같기를 바라지 마라.
해석
得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자신을 비운다는 것이다. 컵에 물이 차 있으면 더 이상 물을 담을 수 없다. 그 컵을 비워야 물을 채운다. 얻음은 줌이다. 내가 얻은 만큼 남에게 주어야 한다. 그대는 호흡을 관찰해 보아라. 그럼 들어온 만큼 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컵을 비우지 않고 새 물을 채울 수 있겠는가. 얻음은 얻음과 동시에 줌이다. 두 가지는 다르지 않다. 줌이 바로 얻음이다. 자신을 비우고 하나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다. 그리고 하나가 들어오는 순간 자신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둘이 되면 하나가 아니다. 체득이 되어야 하나인 것이다.
其致之이 말은 깊이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하나가 도달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나는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과 신은 하나가 도달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하나는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자신과 같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얻는 다는 것은 이미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그때에는 두개가 존재한다. 나와 대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라는 것은 자연과 내가 합일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물방울이 바다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가. 바가지로 퍼담으면 되는가. 아니다 바다 속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 그럼 자신이 바다와 하나가 된다. 그러나 취한 다는 것은 이슬방울이 바닷물을 바가지로 담아서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하나 됨을 잃는다면, 자기를 고집 한다면 분열되고 짜개진다. 강물이 바닷가에 이르러 "나는 강물이다. 바닷물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발을 멈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산이 평야를 보고 자신이 높이 있다고 평야를 짤라 내면 어찌되는가. 하늘과 땅이 서로 자기의 영역을 챙기기 위해 분열된다면 이와 같이된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노자는 자연이 하나가 안되는 것은 근심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연의 비유를 들어 하나를 주장한 것이다.
하나의 생명체가 태어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다른 하나가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그래야 새 생명이 태어난다. 모두가 돌아가기를 거부한다면 생명체가 태어날 수가 없다. 세상은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해서 질서 지워져 있다. 다른 개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한 개의 개체가, 혹은 수십억개의 개체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모두들 자신을 고집 한다면 생명체는 태어날 수 없다. 그러나 자신도 영원히 존재할 수는 없다.
제후와 제왕은 다스리는 백성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백성들을 소유하고 마음대로 하려 해서는 안된다. 백성들과 제후 제왕이 떨어져 있으면 분열되고 점점 갈라진다. 제후와 제왕이 백성들과 하나가 되는 것은 매우 쉽다. 높은 산을 올라가기는 어렵지만 내려가기는 쉬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이 정상에 서려 하기 때문에 내려가는 것은 더욱 쉽다. 올라가기는 길에는 경쟁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어렵지만 누가 내려가고자 한다면 서로 길을 비켜 준다. 왜냐하면 한 명이 내려가면 자신이 그 만큼 올라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후와 제왕은 스스로 다른 사람의 디딤돌이 되고자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노자의 꿈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꿈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천년이 지났지만 인류는 아직도 노자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노자는 아직도 꿈만 꾸고 있을 뿐이다. 노자를 깨우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다.
제후와 제왕은 모든 것을 나게 하고 편안하게 하는 존재이어야 한다. 그것은 일자가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제후와 제왕은 고귀해져야 한다. 고귀해 지기 위해서는 천해져야 한다. 그래서 왕은 자신을 일컬어 과인-부족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후와 제왕은 자신이 왕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마라. 옥과 보석처럼 알려지기를 바라지 마라. 일자와 같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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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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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옛날에 오직 하나인 도를 얻은 것들로서, 하늘은 도를 얻어서 맑고, 땅은 도를 얻어서 안정되고, 신은 도를 얻어서 영험스럽고, 골짜기는 도를 얻어서 가득 차며, 만물은 도를 얻어서 생장하고, 임금은 도를 얻어서 세상을 바르게 다스린다. 이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오직 하나인 도이다. 하늘을 맑게 해주는 도가 없으면 땅은 장차 무너지고 말 것이다. 신을 영험스럽게 해주는 도가 없으면 신의 영험스러움은 그치게 되고 말 것이다. 골짜기를 가득 채워 주는 도가 없으면 골짜기는 장차 마를 것이다. 만물을 생성케 하는 도가 없으면 만물은 장차 절멸하고 말 것이다. 임금을 바르게 다스리도록 해주는 도가 없으면 그는 장차 몰락하고 말 것이다.그러므로 귀한 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하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밑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임금은 자신을 고니, 과니, 불곡이니 하며 낮추어 말한다. 이것은 천한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정말 그렇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최고의 영예는 찬양 받지 않는 것이다. 성인은 사물을 구슬처럼 귀하게 돌처럼 천하게도 보고자 하지 않는다.
주
하나 : 하나는 도를 가리킨 말임. 도는 천지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근원이며 그것과 필적하게나 비교될 대상이 없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절대성과 항존성을 지닌 형이상학적 실체이다. 도는 짝없이 독립해 있는 영구 불멸의 존재이기도 하다. 노자의 우주론은 도에 대한 일원론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의 세계관은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브레이크의 그것과 비교해 봄직하다. '하나는 전부요, 전부는 하나이다.'(One is all, Allis one) 영: 영험한 것, 신성스러운 것. 정: 정과 뜻이 같으며 바르게 하는 것임. 고: 옛날 군주들의 일인칭임,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 하는 말임. 외롭다는 말로 작은 나라의 임금을 뜻함. 과: 군주가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일인칭임, 덕이 부족한 사람이란 뜻임. 불곡: 군주의 일인칭임, 덜 익은 곡식처럼 인격적으로 미숙하고 부족한 점이 많다는 뜻임. 녹록: 옥돌의 아름다운 모양을 형용한 말임, 녹록으로 기술한 파본도 있음. 낙락: 돌이 굴러 흩어진 모양, 낙락으로도 표기함.
해
노자의 철학 체계는 도일원론으로 일관되어 잇다. 도는 천지 만물의 시원이며 그것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인 것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므로 언제나 변함이 없으며(항존성), 어디에나 있다(편존성). 도는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법칙이기도 하다. 태양과 지구의 운행, 동식물의 생장, 춘하추동의 교체, 신의 영험스러움은 다 도의 이법에서 나온 것이다. 만일 도의 이법이 없다면 태양과 지구가 제위치를 지키는 것도, 동식물이 나고 자라는 것도, 봄과 여름의 바뀜도, 신의 영험스러움도 존속할 수 없을 것이다. 만백성의 으뜸인 임금은 도의 이법을 다스림의 근본으로 해야 한다. 임금의 도의 이법에서 벗어나고자 하면 이밈 그의 몰락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귀한 것도 알고 보면 천한 것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높은 것은 낮은 것을 밑바탕으로 해야만 능히 그 높이를 이룰 수 있다. 진실로 높은 것, 존귀한 것은 언제나 교만을 모르고 스스로를 낮추어 아래에 처하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군주가 자신을 지칭하는 '나'라는 뜻의 말을 고니, 과인이니, 불곡이니 하는 표현으로 일컫는 것은 존귀함을 비천함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군주의 존귀한 지위도 아래에 미천한 만백성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에도 '백성이 귀하고, 사직(요즘 말로 국가 안보)이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벼운 것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노자의 도는 형이상학적 실체이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이 도의 눈에 보이지 않은 작용으로 존재하고 있다. 역경에는 역도가 있다. '천지화육의 일을 포괄하여 다스려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모든 만물 하나 하나를 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성취시키면서도 어느 하나 빠뜨리는 것이 없으며, 교체 순환하는 밤낮의 법칙에 있어서도 두루 통하여 안다'. 독자들은 역경 속에 표현된 성인의 역도와 노자서의 무위자연의 도와는 정신적으로 밑바탕 위에 있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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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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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갈 뻔한 보신각종
태평양전쟁을 도발시켰다가 미.영 연합군의 무서운 반격을 받아 마침내 자멸위기에 몰리게 된 일본 국군주의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총후의 정신협력' 이라는 발악적인 전쟁 수행의 한 수단으로 강제적인 금속류 공출령을 선포했다. 일반 가정의 놋쇠로 된 숟가락·젓가락·밥그릇으로부터 사찰과 교회의 동종, 청동 혹은 철불, 기타 모든 종류의 금속 기물을 자진해서 헌납하라는 것이었고, 나중엔 강제로 빼앗아 갔다. 강화도의 전등사에서 전래의 동종과 불기들을 강제로 공출당한 것도 그때였다. 경찰을 앞세운 협박적인 집행이었다. 완전히 공포 분위기의 악몽기였다. 같은 해, 서울에서는 종로의 보신각종이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가서 녹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악랄한 앞잡이들이 그것을 지목했던 것이다. 1944년 8월 12일, 총독부의 앞잡이 단체였던 소위 국민 총력 경성연맹 회장이 전체 조선연맹 사무총장 앞으로 다음과 같이 독촉·상신하고 있다.
"결전하, 금속 회수의 강화 철저의 건 : 결전하, 금속류 회수가 계속 강화되고 있는 차제에 일반대중은 정신 협력의 의기를 나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로가의 보신각 대종, 총독부 청사 내의 동상(초기 총독상 2점이 있었다) 등이 아직도 그대로 놓여져 있음은 당국의 진두수범상 일고를 요함. 기타 부내(서울 시내)에 있어서도 사원·교회 등 각 방면에 존재하는 금속류가 아직도 상당한 것으로 믿어지는바, 그것들을 즉각 공출·처치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됨."
보신각종의 위기일발. 그러나 이 종은 총독부가 1934년 8월에 보물로 지정하였던 어찌할 할 수 없는 문화재였다. 따라서 총독부도 그것만은 건드릴 수 없었다. 또 서울의 민족적인 민심을 크게 자극할 역효과를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보신각종은 병기창에 끌려가는 죽음을 아슬아슬하게 면한 채 조국의 해방을 맞이했고, 오늘날엔 보물 제2호로 지정돼 있다. 서울 종로 네거리의 보신각종은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처음 주조됐었다. 그러나 그것은 임진왜란 때에 왜병들에 의해 불질러져 녹아 없어졌다. 현재의 종은 세조 13년(1468)에 주조되어 돈의문(서대문) 안의 정릉사와 원각사에 걸려 있다가 임진왜란 후 종각만 재건된 현위치로 옮겨져 보신각종이 됐던 것인데, 과거의 왜병들의 후예에 의해 또다시 불 속의 죽음을 당할 뻔했으니 지금의 보신각엔 왜적에 대한 한스러움이 사무쳐 있을 것이다.
한편 강화도의 전등사종은 일제 말기에 강제 공출당한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해방 후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중국 북송 때의 귀중한 종이 하나 굴러 들어왔다. 해방이 되자마자 전등사 주지는 일제에게 빼앗겼던 종이 혹시 인천 항구의 어디쯤에 버려져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 나섰다가 부평의 조병창 자리 뒷마당에 큰 동종이 하나 버려져 있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전등사에서 가져온 종은 아니고, 그보다 더 큰 대종이었다. 여하간 임자가 나타나지 않는 종이니 이거라도 대신 운반해 가자 해서 얻은 것이 지금 전등사에 걸려 있는 높이 1.63m의 중국종으로, 1037년에 중국 백암산 숭명사에서 주조했다는 명문이 들어 있다. 1963년에 처음으로 중요한 문화재임이 조사·확인되어 보물 제393호로 지정되었다. 전등사의 중국종이 해방 직후에 부평 조병창에 버려져 있게된 경위에 대해서는 역시 일제 말기에 중국 점령지역에서 배로 반출돼 왔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을 뿐이다. 강화군의 강화면 관청리에는 일제 때부터 보물로 지정돼 온 또 하나의 큰 동종이 있는데(현재 보물 제11호, 1711년에 주조), 이 종은 또 1866년의 병인양요 때 서울 근처까지 접근해 왔던 프랑스 함대의 병사들이 저희 나라로 실어 가려고 강화읍 서문 밖 토끼다리까지 굴려 갔다가 너무 무겁고 운반하기가 힘들어 포기하고 말았다는 비화를 갖고 있다.
[보물 제2호 서울보신각종(서울普信閣鍾)]
[보물 제11호 사인비구주성동종(思印比丘鑄成銅鍾) -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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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1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1.주체로서의 인간
우리들은 매일매일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다가 문득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바람과 돌은 그저 있다. 풀과 나무는 자손을 퍼뜨리며 자연의 흐름을 따라서 생존한다. 벌레나 짐승도 짧고 긴 인생을 바쁘게 보내며 자연을 형성한다. 물론 인간도 넓은 의미에서는 자연을 형성하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서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1변화 무상한 집단 사회를 이루고 그 속에서 #2윤리, 종교, 예술, 학문의 세계를 창조하며 따라서 #3갖가지로 자연을 대상화시키면서 완전한 삶과 세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발전" 개념에 집착한다.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의한 글들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무수히 많다. 어떤 사람은 이성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행동을 또 어떤 사람은 정치를 인간의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막스 쉘러는 서구의 역사를 통하여 등장하는 인간관의 유형을 다섯 가지 분류하고 그것들은 각각 일면성을 지니므로 종합적, 전체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본질이 탐구되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섯 가지 인간의 유형들은 각각 다음과 같다. #1신을 추구하는 존재인 종교적 인간 #2이성을 본성으로 소유한 사유인 #3실증과학을 근거하는 공작인 #4이성을 부정하고 의지를 삶의 본질로 보는 디오니소스적 인간 #5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초월을 주장하는 초인. 쉘러는 인간을 이처럼 고찰하는 것은 인간의 특정한 어느 한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 사실 인간을 유물론적이라고 보거나 유심론적으로 보는 것도 쉘러의 말과 마찬가지로 피상적인 견해이다. 인간은 소우주로서의 세계를 자기안에 머금고 있다. 비록 상식적인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그는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내면에 가능성으로서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실현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모든 마음은 불타의 마음"이라는 말이나 "이는 하나이지만 나뉘어지면 여러가지가 된다"는 말은 바로 인간이면 누구든지 "고유한 삶"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고유한 삶은 주체이다. 주체란 자기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하는 인간을 말한다. 따라서 주체의 근거는 자유의지이다. 고대의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연이 그들의 안식처이자 보금자리였으므로 자연을 외경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숭배까지 하였다. 그들은 산과 바다를 신령한 것으로 모시기도 했으며 곰이나 호랑이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받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면서 인간의 의식은 외부로부터 내면으로 방향을 돌림으로써 가능적인 자유의지를 현실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인류의 역사는 한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어린아이는 바깥 세계에만 눈길을 돌리며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으며 내면세계에 침잠한다. 그러다가 중장년에 달한 사람들은 외면과 내면의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중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종교에 의존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근대와 아울러 인간은 자신을 바라보며 전체적인 관점에서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이나 신의 종속물 내지 노예가 아니라 외부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을 대상화시키면서 스스로의 삶과 세계를 선택하고 결단하는 주체가 되었다. 만일 어떤 인간이 아직도 자신의 삶과 세계를 선택, 결단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도 주체를 현실화시키지 못한 채로 가능성으로서의 주체만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구성하는 사회역시 모든 상황이 혼란 속에 뒤얽혀 있으므로 오랜 역사의 과정을 기다리면서 주체의 현실화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능성으로든 아니면 현실성으로든 간에 인간은 주체이며 주체인 한에서 인격을 소유한다. 만일 인간 각자가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더 이상 주체일 수 없다. 그러나 제아무리 자유가 무겁고 힘든 짐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자유에 대한 갈망과 동경을 가짐으로써 자신이 주체임을 확인한다. 왜냐하면 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체이므로 악으로부터 선으로, 허위로부터 진리로 그리고 그름으로부터 옳음으로 또한 추함으로부터 아름다움으로 삶을 전환시키고자 한다. 인간은 주체이므로 환경을 상황으로 그리고 상황을 체험으로 지양시키면서 무수한 모순과 갈등 속에서 그러한 갈등과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다. 인간은 주체이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근거로 하여 미움 속에서 사랑을 갈구하며 전쟁 속에서 평화를 동경한다. 인간 주체는 평균인을 벗어나서 자기 자신의 개성을 가진다. 인간 주체는 고유한 개성에 의하여 역사의 맥락을 이어가면서 사회에 질서를 부여한다. 주체란 결국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을 창조하고 구성하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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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간하다
본뜻 : '어여간하다'의 준말이다. 흔히 쓰는 '어지간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서, 어떤 표준에 가깝거나 정도가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알맞다는 뜻이다.
바뀐 뜻 : 호락호락하지 않고 웬만한 수준엔 도달했다는 뜻이다.
오랑캐
본뜻 : 오랑캐는 본래 만주 지방에 살던 여진족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바뀐 뜻 : '여진족'만을 가리키던 고유명사였는데 후대로 오면서 예의를 모르는 미개한 종족들을 멸시하는 보통명사로 쓰였다. 조선 후기 서양인들이 몰려올 때는 특별한 그들을 가리켜 서양 오랑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오사바사하다
본뜻 : 재미나게 얘길 하거나 사근사근한 모양을 표현한 의성어다.
바뀐 뜻 : 잔재미가 있다거나 성격이 붙임성이 있다는 뜻으로 쓴다. 간혹 자기 주견이 없이 이리 저리 변하기 쉽다는 뜻으로도 쓴다. 그러나 '사바사바'처럼 뭔가 일을 꾸민다거나 사기꾼의 냄새를 풍기는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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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그래도 지구는 돈다
중세에는 지구가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특히 지구가 움직이면서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성경에 따르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 형상이었다. "해가 떴다 지며, 그 졌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나 "태양아,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등이 바로 그러한 구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페르니쿠스가 제창한 지동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정지해 있고 그 둘레를 지구가 돌고 있다고 기술했다. 코페르니쿠스는 기독교 세계의 비난이 무서워서 책의 출판을 몇 번이고 미루다가 결국 그가 죽던 날 인쇄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 책을 지지하는 글을 썼던 브루노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파문을 당했고 결국 화형에 처해졌다. 천체망원경을 발명하여 여러 가지 발견을 하고 난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점차 지동설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1630년에 그는 "두 세계체계에 관한 대화"(일반적으로 줄여서 "대화"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여기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신중했고 독실한 신자였던 그인지라, 그는 이미 가톨릭 당국으로부터 이 책의 출판에 대한 허가를 받아 두었다. 하지만 예수회와 도미니크 수도회를 중심으로 강력한 항의가 제기되고, 곧 종교재판소가 설치되었다. 결국 그는 종교재판소에서 이단이라는 판결을 받았고, 이 책은 금서로 지정됐다. 그러나 종교재판소는 갈릴레이가 회개의 선서를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형벌만은 면해 주었다. 결국 당시 70세의 노령이었던 갈릴레이는 무릎 끓고 자신의 이론을 부정하는 회개의 선서를 했다. 그런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가 선서를 마치고 일어섰을 때 안절부절했다고 한다. 그는 땅을 내려다보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과학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지만 후에 사람들이 꾸며 낸 이야기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갈렐레이를 위해 꾸며진 일화는 또 있다. 저 유명한 갈릴렐이의 낙하실험이다. 1599년 어느 날 갈릴레이는 수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피사의 사탑 정상에 섰다. 그의 손에는 두 개의 쇠공이 들려 있었다. 무게가 다른 두 쇠공을 사탑에서 같이 떨어뜨렸을 때 동시에 지상에 닿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 갈릴레이는 동시에 낙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쇠공을 떨어뜨리는 순간 그는 두 눈을 꼭 감았다.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두 쇠공이 동시에 낙하한 것이다. 갈릴레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것 역시 꾸며 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많다. 이처럼 후세 사람들이 갈릴레이에 대한 일화를 만들어 낸 것은 무지에 의해 박해받은 이 과학자를 동정해서 였을 것이다. 그만큼 그 시대에는 새로운 사상을 편다는 것이 어려웠다. 굳이 자신의 사상을 펴다가 화형당한 사람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코페르니쿠스가 임종 때에야 자신의 저서를 인쇄한 것이나,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을 받은 것만 보아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개인적 지식과 양심이, 때로는 시대의 무지에 묻혀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17세기의 과학혁명은 이후에 뉴턴의 물리학을 낳았고, 근대는 새로운 세계관에 접어들었다. 지금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인과론도 바로 뉴턴의 세계관이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뉴턴의 세계관이 혹시 중세 종교와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해, 어디선가 현대판 갈릴레이가 탄생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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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사랑과 정열
아벨라르.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잠 못 들고 있을 때, 내 속에 이상한 힘으로 들끓고 있는 불길과 같은 감정을 나는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며,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성장하며 가꾸고 기르는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또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 나의 내부에, 나의 믿음과 희망에 대립하여 일어나고 있는 어떤 정열-나의 사랑을 완성하고 싶고, 당신을 온전히 내가 소유하고 싶으며, 나의 불길 속에 당신을 가담시켜 함께 불타서 죽어 버리고 싶은, 뜨겁고 강렬한 무엇이 나를 지지고 보채면서 괴롭히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정열을 수반하고 오는 것이긴 하지만, 과연 사랑과 정열은 동일한 것일까. 정열이 사랑을 가열시키는 동력이기는 하지만, 그 속성에 있어서 사랑과 정열은 조금씩 다른 것이 아닐까 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문해 보곤 합니다. 내가 정열과 사랑에 대해서 냉정한 마음으로 분석해 보고 싶은 이유는, 나의 이 정열이 혹시나 우리의 사랑을 손상시키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당신을 들볶게 되는 요인이 되지 않을까를 근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열`이라는 말은 곧 프랑스의 작가이며 <적과 흑>, <연애론>등으로 유명한 스탕달을 연상시킵니다. 그는 매우 향락적이고 자유분방하여 일생 동안 여러 명의 여자와 사랑을 나눈 사람입니다. 그는 연애를 일종의 `병`이며 `광기`로 보았습니다. 그는 연애를 정열 연애, 취미 연애, 육체적 연애, 허영 연애의 네 가지로 분류했으나 그가 추구했던 연애는 `정열 연애`였습니다. “사랑이란 열병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사랑이 싹터서 상대방에게서 어떤 미점을 발견 하는 마음, 즉 결정작용에 이르는 것이 완전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는 “사랑이란 것은 사랑할 만한, 그리고 우리를 사로잡는 한 대상을 전 감각으로 느끼고 바라보면서, 즐거움을 갖는 것이다”라고 자신에 차서 연애를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태리 미라노에서 만난 여인 마띨드에게 준 편지를 보면 이미 사랑의 쓴맛 단맛을 다 알고 있는 연애의 베테랑답지 않게 순정적이고 절실한 연애에 빠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즐거움이 아닌 괴로움을, 쾌락이 아닌 진실을 마띨드를 통해서 발견한 스탕달이 글 한 줄도 읽을 수 없는 사랑의 감방에 갇혀서 극단적인 정열에 지배되어 있었음을 보면 사랑이란 자기의 의지대로 되어지지 않는, 전혀 낯선 힘으로 우리를 얽어매는 기이한 무엇인 것 같습니다. 마띨드는 폴란드계의 군인 뎀브로스끼 남작의 부인이었으나 남편과는 별거중이었고, 꿈꾸는 듯한 눈매와 섬세한 용모를 갖고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총명하고 이지적인 여인이었으므로 스탕달의 정열에 결코 휘말리지 않고 그의 두 아이들을 위해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마띨드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여인이었으므로 더욱 스탕달을 열에 들뜨게 했고 괴롭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이란 그것이 손에 마음대로 잡혀지지 않을 때 그 정열과 그리움이 배가되는 성질을 지녔으니까요. 마치 우리가 갖고 싶은 물건을 어떤 이유 때문에 갖지 못하게 되었을 때, 오히려 그 물건에 대한 애착과 집념은 점점 깊어져서, 실지로 그 물건이 갖고 있는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거기에 부여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심리일 것입니다. 다음에 스탕달의 편지를 조금 인용해 보겠습니다.
마띨드에게 정열을 지니지 않은 사나이가 늘 절도를 지키고, 신중한 체하기는 쉬운 노릇입니다. 나 역시 자기 자신에게 귀를 기울일 때에는 신중해진답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슬픈 정열에 지배되어 버려, 이제는 나를 나 자신의 행동의 주인으로 내버려 두지 않는답니다. 부인을 만난 이래로, 이 정열이 내 생애의 큰 짐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어떤 종류의 흥미도, 그 어떤 생각도, 그 열기 앞에서는 퇴색해 버리고 맙니다. 부인을 자주 만나고 싶은 슬픈 동경이 나를 짓누르고 지배하고, 질질 끌어가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안될 그럴 단계에 이른다고 하면, 살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을 이 고독하고 기나긴 밤에 몇 번이고 상상해 본답니다. 인간이 극단적인 정열에 지배되어 있으며, 어떤 특수한 정황 아래에서는 그런 짓을 능히 해낼 수 있다고 봅니다.(후략)
많은 여성 편력과 명성으로 자신에 차 있던 스탕달도 한 여인을 향한 애정 때문에 `나를 나 자신의 행동의 주인으로 내버려 두지 않는` 슬픈 정열에 지배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살인이라도 불사할 것` 같은 상상 속에 깊이 갇히게 되었습니다. 정열이란 이토록 한 사람의 정상적인 사고력과 평균적 이성을 일시에 하잘것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지극히 강한 불꽃인 것입니다. 평소에는 아주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사람도 사랑의 열정에 휘말리게 되면 스스로를 가눌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전혀 딴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가령,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는 경우에 역으로 그를 파멸시키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든가, 또는 그가 불행해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쾌감을 느낀다든가 하는 일종의 복수심이 작용하게 되지요. 이런 것이 바로 정열이 갖고 있는 무서운 한 면모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을 똑바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그 정열로 인하여 파멸할 지경에까지 휘말려 들어가 있다고 해도, 차라리 상대를 위하여 자기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행위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랑이란 그 본질에 있어서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순수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정열이 필수적으로 수반되기는 하지만, 정열이 곧 사랑이라고 혼동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 아닐가요? 정열은 사랑 뿐만이 아니고 증오에도 수반되기 때문에, 사랑과 정열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칫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증오의 정열에 휩싸여 자신과 상대를 한꺼번에 상하게 하고 파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과 정열은 아주 가깝게 있기는 하나 그 둘이 가지고 있는 성질의 내용은 조금씩 다른 듯합니다. 사랑 속에는 겸손과 헌신, 안내가 있는가 하면 정열 속에는 증오와 파멸까지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때때로 정열이 사랑의 촉진제가 되고 결실로 향하는 동력이 되기는 하지만 정열만으로 사랑의 높고 고귀한 자리에 이르기는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얘기를 동화 <인어공주>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인어공주는 자기자신이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는 사랑하는 왕자를 칼로 찔러 그 피로 자신의 발을 적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리고 그 왕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자 가눌 수 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혀 왕자를 죽이고 싶은 증오심이 타오르기도 하지만, 끝내 그는 사랑하는 왕자를 위하여 스스로를 바다 속에 던져 단지 하나의 물거품으로 사라져 버리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막을 내리는 <인어공주> 이야기야 말로, 사랑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해주는 것이라고 나는 언제나 생각합니다.
아벨라르. 이렇게 진실한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도 맑고 아름다우며 높은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하여 나는 나의 욕망, 나의 괴로움, 나의 슬픔을 가라앉히고 절제하는 훈련을 뼈아픈 고통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토록 커다란 고통을 지불하면서 얻는 사랑이야 말로 당신을, 또한 나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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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성공한 문학인도, 실패한 정치인도
* 성공과 실패는 다만 한때에 행하여지는 것이나, 시비의 분별은 곧 만세에 정해지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국가에서 사관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은, 한때의 득실을 기록하여 그것으로 만세의 시비를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망할 수는 있어도 사기는 없앨 수는 없습니다. (이항복)
신동 김시습
신동이라는 말에는 얼마간 환상적인 분위기가 담겨져 있다. 특히 조선조 시대의 경우가 그렇다. 요즈음은 영어의 단어를 많이 왼다던가, 수학적인 재능 등으로 '신동'임을 말하지만 조선조의 경우는 얼마나 어려서, 어떤 내용의 한시를 지었느냐에 따라서 그 신동임을 확인하고 평가하였다. 설혹 다섯 자, 네 줄로 매듭지어지는 오언절구의 짧은 한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운자를 써야 하고 또 기승전결의 규칙을 지켜야 하는 등 작법상의 제약과 어려움이 있었기에 대단한 천재성이 요구된다. 우리들의 심저에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새겨진 매월당 김시습의 경우가 이른바 조선 시대 '신동'의 개념을 명료하게 보여 주고 있다. 조금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김시습은 태어난 지 여덟 달에 능히 글을 알았다고 하였고, 말은 늦게 깨치고 더듬거렸으나 총기는 일찍 깨여서 글을 입으로 읽지는 못해도 뜻은 다 알았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놀랍게도 세 살에 시를 지어서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다는 대목이 이르면 탄성이 절로 나오게 된다.
도홍유녹삼월막: 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니 삼월이 저무는구나.
주관청침송엽노로: 구슬을 푸른 바늘로 꿰였으니 솔잎의 이슬이로다.
무뇌성하처동: 비도 안 오는데 천둥 소리는 어디서 울리나, 황운편편사방분: 누른 구름 점점이 사방으로 흩어지네.
이 세 편의 시가 신동 김시습이 세 살 때 지은 것인데, 마지막 두 줄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광경을 보고 읊은 것이라니 그 착상과 비유가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다섯 살에 '대학'을 깨치고 글을 짓는데 막힘이 없다는 소문이 자자 하자, 세종조의 명신 허조가 몸소 김시습의 집을 찾아와 시험을 해보게 되었다.
"내가 늙었으니 늙을 노 자를 넣어 시를 지어 보아라."
노목개화필불노: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허조는 탄복을 아끼지 않았다.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세종대왕은 지신사(승지의 별칭) 박이창으로 하여금 어린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불러 다시 시험해 보게 하였다.
동자지학백학무청공지말: 동자의 공부가 백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듯하도다.
어린 김시습의 화답은 막힘이 없었다.
성주지덕황용번비해지중: 성군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뒤집으며 노는 듯하도다.
박이창은 말할 나위도 없었고 지켜보던 좌중 또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이창은 벽에 걸린 산수도를 가리키며 신동 김시습에게 물었다.
"저 그림을 두고도 시를 지을 수 있겠느냐?" "예."
그것은 강가에 작은 정자가 있고, 그 밑에 빈 배가 매어져 있는 그림이었다. 김시습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소리내 읊었다.
소정주택하인재: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
이쯤되면 신동의 영특함이 넘어섰다고 아니 할 수가 없다. 김시습은 시적인 재능으로 그 신동 됨과 천재성을 입증하였지만, 산문의 경우라면 선조조의 천재 여류시인 난설헌 허초희의 예를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난설헌은 여덟 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라는 아주 환상적인 글을 지어 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광한전백옥루'가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전각이기에 난설헌의 천재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
대저 보옥으로 만든 차일은 창공에 걸려 너울거리고, 구름 같은 휘장은 색상의 한계를 떠나 그저 황홀하기만 하며, 은다락은 햇빛에 번쩍거리고 노을 같은 주두는 헤매는 속세의 티끌 세계를 벗어났도다(후략-원문 생략)
이 아름답고 환상적인 명문(더구나 한자로 된)을 어찌 여덟 살 난 여아가 쓴 것이라고 하겠는가. 이 같은 천재성으로 그녀는 후일 동양삼국(조선, 중국, 일본)에서 으뜸가는 여류시인으로 추앙받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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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나
이태리어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는 말. 성모의 성화, 성상도 '마돈나'라고 한다. 성모상은 보통 어린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잘 그려지는데 '라파엘로' (1483-1520)의 성모화는 특히 유명하다. 그밖에 귀부인, 애인의 뜻도 있으며 이상화의 유명한 시 '마돈나 나의 침실로'의 '마돈나'는 그 후자의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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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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