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149 호
단기 4340. 3. 9 (음력 01.2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
한 마디 |
노자 38장이 시작됐습니다. 37장까지는 상편인 도경이고 이후로는 하편인 덕경입니다. 잘 참조하세요.
환절기입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늘 독서와 함께하는 나날 이어지시기를 바랍니다.
- 風磬 드림.
|
|
|
문학소식 |
AII that Horror 시나리오 공모전
|
|
글터 → 명언 / 격언 |
단 한 번의 인생이니까 함부로 산다는 것은 말이안 되는 변명. / 빌 코플랜드
|
|
글터 → 고전/구비/신화 |
하편 : 老子 - 道德經 : 第三十八章 (노자 - 도덕경 : 제38장)
|
上德不德, 是以有德. 下德不失德, 是以無德.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上人爲之而有以爲, 上義爲之而有以爲, 上禮爲之而莫之應, 則攘臂而仍之.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是以大丈夫, 處其厚, 不居其薄. 處其實, 不居其華, 故去彼取此.
상덕부덕, 시이유덕. 하덕불실덕, 시이무덕. 상덕무위이무이위, 하덕위지이유이위, 상인위지이유이위, 상의위지이유이위, 상례위지이막지응, 칙양비이잉지. 고실도이후덕, 실덕이후인, 실인이후의, 실의이후례. 부례자, 충신지박, 이란지수, 전식자, 도지화, 이우지시. 시이대장부, 처기후, 불거기박. 처기실, 불거기화, 고거피취차.
|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
서른 여덟째 장
직역
윗덕은 덕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덕이 있다. 아랫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한다. 이런 까닭에 덕이 없다. 윗덕은 함이 없고, 무엇을 하려 함도 없다. 아랫덕은 함이 있고, 무엇을 하려 한다. 높은 어짐은 함이 있으되 무엇을 하려 함이 없다. 높은 옳음은 함이 있으면서 무엇을 하려 한다. 높은 예는 함이 있으면서 그것에 응함이 없으면, 즉 팔꿈치를 잡아 내동이 친다. 그러므로 도를 잃어버린 이후에 덕이 있고, 덕을 잃어버린 뒤에 어짐이 있고, 어짐을 잃어버린 뒤에 예법이 있다. 무릇 예법이라는 것은 가슴속의 믿음이 엷은 것이오, 어지러움의 머리이다. 미리 안다는 것은 도의 것 모습의 화려함이고, 어리석음의 시작이다. 이런 까닭에 큰 사람은 그 두터움에 처하지 그 엷음에 살지 않는다. 그 내실에 처하지, 그 화려함에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해석
덕이라는 것은 체득을 가리킨다. 몸에 완전히 숙달이 되어서 버리고자 하여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노자의 도경이 그러해야 하는 바를 설명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면 덕경은 세세한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떤 것이 체득인지 설명하고 있다.
윗덕은 자신이 덕스럽다고 여기지 않는다. 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이 덕스럽다고 생각을 한다고 해서 자신이 덕스러운 것인가. 윗덕은 덕과 분리가 되어 있지 않다. 몸으로 체득이 되어 있어서 덕 그 자체가 된다. 그러나 아랫덕은 덕과 분리가 되어 있다. 그래서 가지고 있을려고 하고 잃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덕이 무엇인가. 덕은 베품이다. 줌이다. 윗덕은 덕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내가 덕스러워야 한다. 덕을 잃으면 어쩌지. 그는 남을 의식을 한다. 덕스러워 보이려고 노력을 한다. 그것은 자신이 덕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불우 이웃돕기에 천만원을 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남들이 자신을 덕스럽다고 한다. 그래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닌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매년 돈을 낸다. 그러나 그는 불우 이웃돕기가 목적이 아니다. 자신의 이미지를 굳히기 위해서 이다. 남들에게 자신이 덕스러운 사람이라고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럼 이 사람이 진정으로 덕스러운가.
똑같이 천만원을 낸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덕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불우 이웃을 돕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는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도운 것뿐이다. 그는 자신이 덕스럽다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윗덕이다. 지금은 아랫덕이라도 행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세상이다.
무위라는 것은 함이 없다는 의미다. 풀어쓰자면 목적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비가 내린다. 그래서 농작물이 잘 자란다. 그런데 비를 뿌리는 하늘과 땅은 농작물이 잘 자라기를 바라며 비를 뿌리는가. 아니다. 목적의식이 없다. 그래서 농작물이 잘 자라고 만물이 번성해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
無以爲라는 것은 목표를 가지고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어떤 제도나 법칙을 가지고 다스리지 않는다. 스스로 자라나게 놔둔다. 그 개체의 사물의 독립성과 존엄성을 인정을 해준다. 사자는 사자의 길이 있고 영양은 영양의 길이 있다. 자연은 사자가 영양을 잡아 먹는 것에 대해 불평을 하지 않는다. 사자를 폭군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자의 길이다. 자연은 사자나 영양이나 똑같이 대한다. 그냥 스스로 살게 놔둔다. 자연은 생명체에 간섭을 하지 않는다.
하덕이 행한다 함은 목적의식을 가진다는 것이다. 수로를 통해서 논에 물을 댄다. 작물이 자란다. 그 작물은 자신이 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한다. 그것은 자신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물은 누구의 것인가. 땅은 누구의 것인가. 모두 자연에게서 빌어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잊었다. 그래서 하덕에 처해 있는 것이다. 사자를 폭군으로 규정하고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인간의 눈에서 볼 때이다. 그리고 영양을 위해서 사자를 잡아죽인다. 재미를 위해 죽이는 경우가 허다하나 그들은 명분을 내세운다. 연약한 영양을 위해서라고, 그러나 사자가 사라지면 영양이 초지를 잠식해 들어간다. 그때 사람들은 영양의 사냥에 나선다. 초지를 위해서 나선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영양을 죽인다고 한다. 왜 영양은 이제 너무 불어나서 자신들의 농작물을 망치기 때문이다.
높은 어짐은 함이 있지만 목표를 가지고 하지 않는다. 목적의식은 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이 그렇게 할 때까지 기다린다. 스스로 행할 뿐이다. 그뿐이다. 남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높은 옳음은 옳다 그르다의 판단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길을 따르라고 선전을 한다. 그러나 강제하지는 않는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길이 옳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면서 몸으로 보여준다.
높은 예법은 이제 제도가 된다. 上義까지는 제도가 아니다. 그러나 예법에 와서는 제도가 된다. 규범화된다.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제재를 가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길을 따르도록 강요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의를 잃버리고 어짐을 잃어버리고 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덕스럽지 못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규범이 필요하다고 한다.
규범은 어떻게 해서 생겼는가. 그것은 서로 믿지 못해서 생긴 것이다. 저 사람이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온 것이다. 왜 다른 사람이 나를 해치는가. 그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길을 나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자신은 그렇지 아니한가. 자신도 남에게 자신의 길을 강요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한다. 왜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를 하는가. 그것은 소유하려 하기 때문이다.이것은 내것이다. 이런 생각이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이 나무를 키우고 완성을 해도 가지지 않는다면 싸움은 잃어 나지 않는다. 그것이 상덕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법이 생긴 것이다.
미리 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정보에 지식에 밝다는 것이다. 땅 투기를 하려면 시대를 앞서가야 한다. 먼저 좋은 땅을 선점한다. 그리고 자신의 것이라고 선을 긋는다. 개미가 탁자 위에 선을 긋고 자신의 땅이라고 뻐기는 것과 같이, 그러므로 큰 사람은 내실을 중요시한다. 화려함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예는 형식이다. 그러나 덕과 어짐과 의는 형식을 살려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형식을 취하기보다는 실질을 취한다. 그러나 지금은 형식도 아쉬운 시대가 되었다.
|
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
38.
최상의 덕을 지닌 사람은 스스로는 덕이 있다고 자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덕이 있는 것이다. 수준이 낮은 덕을 지닌 사람은 덕을 잃지 않으려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덕이 없는 것이다. 최상의 덕을 지닌 사람은 자연에 맡길 뿐 작위 함이 없다. 수준이 낮은 덕을 지닌 사람은 인위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그러므로 작위 함이 있는 것이다. 최상의 의을 지닌 사람은 의로운 정치를 베풀되 이를 인위적으로 행하게 된다. 최상의 예를 지닌 사람은 인위적으로 예에 맞는 정치를 행하려고 애쓴다. 만일 사람들이 예법에 맞게 행동하지 않으면 팔을 잡고 억지로 끌어당겨 예법을 강요한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후에 인이 강조되며, 인을 잃은 후에 의가 부각되며, 의를 잃은 후에 예법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무릇 예법이 강조되는 것은 인간사회에 충신이 희미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어지럽게 되는 시발점인 것이다. 미래의 일을 미리 내다본다는 것은 지혜로움의 극치이다. 그러나 지혜로움은 어리석음의 발단이 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대장부다운 사람은 두터운 것을 선택하고 얇은 것을 포기하며, 실질적 인을 취하고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이 없는 것은 버리는 것이다. 작위적인 것은 버리고 도다운 것을 취해야 하는 것이다.
주
상덕: 최상의 덕. 하덕: 최하급의 덕. 상인: 최상의 어진 일, 최상급의 인정. 상의: 최상의 의를 최고 가치로 삼고 행하는 정치. 상례: 최상의 예법을 방책으로 하여 행하는 다스림. 잉지: 억지로 끌어당기는 것, 남에게 자신의 의사를 강요하는 것. 전식: 장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아는 것, 선식과 동일함. 화: 겉으로는 화려하고 번지르르하지만 내용상으로 실속이 없는 것. 거피취자: 겉만 번지르하면서 실속이 없는 예와 지를 버리고, 실속을 갖춘 도와 덕을 취하는 것이다.
해
이 장에서 노자는 실천윤리에 대하여 등급을 매기며 유교적 윤리관에 대하여 비판 의식을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최상급의 덕을 지닌 사람은 자기 자신이 덕을 지니고 있다는 의식이 없다. 그러므로 사실은 덕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이 정치를 맡게 되면 자연에 맡길 뿐 덕정을 베풀려고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오히려 덕정을 베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수준 이하의 덕을 지닌 사람이 행하는 정치는 덕을 잃지 않으려고 작위 한다. 작위와 집착심을 지닌 정치는 덕을 잃지 않으려고 작위 한다. 작위와 집착심을 지닌 정치는 이미 덕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정치란 작은 생선을 요리하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요리사가 작은 생선을 자주 뒤적거리면 결국 가루가 되어 먹을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되도록 규제를 풀고 간섭을 하지 말며 무위자연의 대도를 모범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최상의 어진 마음을 지닌 군주가 행하는 정치는 인정을 베풀도록 인위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업적을 선전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이다. 최고의 의를 목표로 하여 행하는 정치는 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인위적인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려는 욕망을 떨쳐 버리지는 못한다. 최고의 예법을 방안으로 힘을 행사하여 강요한다. 인간사회에서 행하여지는 실천윤리에는 등급이 있다. 상덕이 사라진 뒤에야 하덕이 생겼으며, 덕이 상실되고 인이 있게 되었으며, 인이 상실된 후 의가 있게 되었고, 의를 잃어버린 뒤에 예가 고개를 들게 되었다. 천하 만민의 마음속에 층신이 퇴색되면서 예가 강조되었고, 이것은 결국 천하가 편안치 않게 된다는 징조인 것이다. 미래의 일을 미리 내다보는 것을 선견지명이라 한다. 이와 같은 슬기로움도 긴 안목으로 보면 어리석음의 발단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참다운 대장부는 사물의 진면목을 지닌 도에 의지하며 겉만 버지르르한 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노자의 윤리적 가치관은 유가의 그것과 대척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유가의 고정관념에 파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
|
|
글터 → 국사
|
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국보 해제당한 가짜 상원사동종
1906년 11월에 서울 남산의 북쪽 기슭, 지금의 대한적십자사 건물 위쪽에 일제침략의 일익으로 종교적인 거점을 확보한 일본의 불교세력이 있었다. 이른바 동본원사(본시는 일본 교토에 있었다)의 경성 별원. 1년 전의 을사보호조약으로 이미 국권을 빼앗겼던 고종황제가 황태자(뒤의 순종)와 함께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의 강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내놓은 하사금으로 지은 법당이었다고 한다. 이 침략의 신축 사원에서는 옛날부터 일본인들이 항상 탐냈던 신비로운 음색과 아름다운 형태의 한국종 명품을 어디서라도 찾아내 가져올 흉계를 꾸몄다. 그러자 그 전부터 이미 한국의 유적지와 사찰지역을 유린하며 일확천금의 보화와 유물 약탈을 일삼고 있던 일본인 무뢰한 하나가 탐낼 만한 정보를 갖고 와서 흥정을 했다.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 쪽에 있는 작은 절터에, 순금을 3할 이상이나 함유하고 있는 종소리는 실로 신묘한 아주 오래된 대종 하나가 있다" 는 것이었다. 일본인끼리의 거리낌없는 동종 반출음모가 즉각 착수되었다. 졍보를 제공하고 즉석에서 거액의 판로를 확보한 야마구치라는 무뢰한이 용문산의 상원사로 달려갔다. 이 상원사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끝까지 나라를 지키겠다고 일어섰던 의병들을 잔학하게 추격했던 일본군대에 의해 불질러진 후로 종각 하나만을 남기고 있었다. 야마구치는 초토화된 깊은 산 속의 절터에 움막 같은 임시 법당을 꾸미고 있던 정화삼이란 중과 불법적인 범종 매매계약을 성립시켰다. 당시의 남산 본원사측 기록을 보면 그때 야마구치를 통해 종값으로 지불된 돈은 800원이었다고 하나 실제로 그런 큰돈이 상원사 중에게 수교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때 상원사를 지키고 있던 중이 적잖은 돈을 받고 범종을 판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주민들의 증언을 빌리면 그후 그 중은 일본인에게 범종을 판 돈으로 전답을 샀었다고 한다. 한심스런 중이었다. 1908년 4월 하순(7월 설도 있다). 서울의 일본절에는 드디어 대종이 도착했다. 약 1.5m의 높이에 구경이 약 1m, 그리고 무게가 400관이나 되는 육중한 대형 동종이었다. 일본인 중들은 감동하고 만족해 했다. 그들은 종값 800원에 운반비 515원을 지출하고 있었다. 반면 그 범종이 이상한 외모나 그것이 서울에서 160리 거리인 양평 용문산 상원사에서 서울로 운반되는 동안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중간상인 야마구치의 어딘가 의심쩍은 이야기에 선뜻 의심을 품은 사람은 그때도 그후에도 없었다. 1931년에 간행된 (남산 본원사소사)에도 이렇게 씌여 있을 뿐이다.
"서울 동대문 밖에서 '폭도'(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던 한국인들을 지칭한 일본인들의 표현)들에게 방해를 당해 세 번이나 운반이 중단되다가 일본 헌병의 다대한 협조로 한강 수로를 돈 후 용산에서 남산 본원사로 옮겼다."
'폭도'들의 방해를 이유로 동대문 밖에서 여러 날을 지체한 점, 한강을 통해 용산에 도착한 배에서 범종이 인양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범종에 대해서도 뒤에 여러 권위 있는 일본인 전문가들조차 '조선종'으로 여기기를 꺼리고 언급을 기피하거나 일본종 비슷한 괴상한 양식이라고 말한 점 등이 모두 어딘가 석연치 않았건만 깊이 조사·분석한 전문가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총독부는 그것을 '통일신라말 또는 고려초의 유물' 이라는 막연한 결론을 내려 보물로 지정하기까지 했었다. 8·15해방 후 남산 본원사가 갖고 있던 '전 상원사 범종' 은 조계사(서울 종로구 수송동)로 옮겨져 갔다. 그리고 과거 일제 때의 평가가 그대로 존중되어 국보 제367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언젠가는 진실을 끝까지 추적하는 전문가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1962년 12월 12일, 문교부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 18차 회의는, '그 종은 결코 한국 것이 아니며 오랜 작품도 아니다. 일본인 무뢰한들이 계획적으로 일본에서 급조한 것을 배로 싣고 와서 한강에서 진짜 상원사종과 감쪽같이 바꿔치기한 가짜 상원사종으로 추리된다' 는 황수영 위원의 그 동안의 입체적인 조사 결론에 따라 정식으로 국보 해제를 선언했다. 그렇다면 그때 한강에서 일본으로 직행했을 진짜 상원사종은 그후 어떻게되었을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복원된 국보36호 상원사 동종]
|
|
|
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10장 고뇌와 병과 죽음
4.삶의 전환점
시간 공간의 제한성, 다시 말해서 유한성은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간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의 근원적 고뇌이다. 비록 유한성이 무한한 의지로 본래의 형태를 취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한성의 껍질을 짊어지고 다니므로 제한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세계는 고뇌와 소통에 충만하여 방향을 상실하고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으로 모습을 나타낸다. 병이란 우선 지금, 이곳의 인간이 고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현상으로 다룰 수 있지만, 그러한 의미의 병은 삶의 부분적 측면밖에 해명해주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병은 세계 체험에서 내면적 의미의 계기가 되는 병이다. 유한성으로서의 병이 세계 체험의 계기로 전환할 때 유한성은 이미 서서히 껍질을 벗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유한성이라는 시간은, 물론 공간도 포함하여, 그 의미를 결국 시간을 시간이게끔 하는 근원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유한성의 근원을 유한성에서 찾는다면 그러한 노력은 헛수고로 그치고 만다. 유한성은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무한히 유한성 안에서 순환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한성이 자신을 의식할때 어떻게 유한성이 스스로를 지양하는지 살펴보기로하자. 우리는 음악을 시간 예술이라고 부르고 미술을 공간 예술이라고 부른다. 음악 한 가지만을 예로 들 경우 분명히 음악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제한성 안에서만 가능한 예술이다. 음을 위시하여 박자와 멜러디와 화음 모두가 시간적 흐름을 통하여 성립한다. 또한 시간적 흐름을 통하여 소리의 "울림"과 "들림"이 제한성 안에서 형성되지 않는다면 음악이라는 예술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시간은 유한성이며 제한성이다. 그렇다면 음악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이 시간의 유한성에 의해서만 성립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음악은 무한성, 곧 영원성에서 가능하다는 말인가? 인간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의식은 시간의 제한성을 제한성으로 인식함으로써 음악에 의하여 제한성을 무한성으로 지양시킨다. 무한성이나 영원성은 사실 절대자인 신의 세계에 속할 것이다. 신이 음악을 창작한다고는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울림"과 "들림"으로서의 음악은 인간 주체의 삶에만 가능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중간 존재로서 오직 인간 주체에 의해서만 유한성으로 지양될 수 있다. 음악은 시간이 제한성 속에서 인간의 질서있는 미적 행위에 의하여 창조되는 예술이다. 인간의 창조적 표현인 예술에서 우리는 암암리에 음악의 두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음악은 확실히 시간의 제약을 받는 예술이다. 그러나 창조한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음악이 시간을 연주함을 뜻한다. 음악은 시간 속에서 시간을 창조한다. 조각가는 진흙이나 석고라는 공간의 제한을 받지만 진흙과 석고로써 무한한 공간을 창조한다. 음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미술이 공간 속에서 공간을 창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은 시간속에서 시간을 창조한다. 음악은 시간에 제한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음악은 시간을 유회하며 시간을 지배한다. 왜 그러한가? 음악은 인간 주체에게 가능한 예술로서 인간은 음악을 통하여 삶의 조화 및 자유라는 세계 의미를 체험하여 행위로 옮기기 때문이다. 5분도 안 걸리는 <한오백년>의 구성진 가락은 수백 년의 시간을 창조하며 베토벤의 <전원 교향악>역시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영원을 연주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의식은 자신을 전개시키고 지양시키면서 유한을 무한으로 확장시키는 정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결코 제한성의 한 면이라든가 또는 영원성의 한면에서 인간에게 참다운 세계 체험의 의미를 가져다줄 수 없다. 오직 주관과 객관의 가능 근거를 해명하여줄 수 있는 인간 주체에서만 시간의 근원이 밝혀질 수 있다.
음악과 미술의 예에서 본것과 마찬가지로 병이 시간 공간이라는 제한성에만 정착하여 있지 않고, 병의 근원적 현상인 시간 공간의 제한성이 인간 주체의 자기 반성을 거칠 경우 병은 우리들의 삶에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등장한다. 병은 이 경우 제한성이 무엇인지, 시간과 공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고뇌와 고통이 무엇인지 이 모든 것들을 세계 체험의 형태로 인간 주체에게 제공해준다. 이제 병은 더 이상 현실 세계의 정신적 육체적 아픔이 아니라 세계의 근원적 원리에 관한 암호로 등장한다. 암호는 상징이다. 상징은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관한 상징이다. 사실 일상성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삶의 모든 존재 방식은 "상징적 형성"이 아닐 수 없다. 상징적 형성이란 인간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 종교 등 모든 영역들이 그 자체로 참이 아니라 " 어떤 것"에 대한 형성임을 말한다. 상징적 형성은 따라서 암호이다. 우리들의 언어 행동을 위시하여 예술적 표현, 종교적 의식등은 모두"어떤 것"에 대한 인간의 존재 방식을 나타낸다. 인간은 상징을 형성하는 존재이다. 물리적, 의학적 의미의 병은 상징적 형성인 암호로서의 병에 의하여 세계 체험으로 전환한다. 인간 주체는 처절한 만큼 깊은 병의 심연 속에서 고독을 절규하며 개인으로 전락하여 삶을 포기하든가 아니면 유한성과 무한성의 갈등을 극복하여 병을 세계 개방성으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병이 환경으로서의 개인적 삶으로부터 세계 체험으로서의 내면적 삶으로 전환하는 곳에서만 삶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 있어서 병이 전환점이라고 할 경우 이 전환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전환점은 "어떤 것"으로 향한 전환점이다. 전환점에서의 "어떤 것"은 더 이상 주체 인간과 전혀 상관없는 환경에 불과한 개인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주체가체험하는 세계 의미이다. 인간 주체는 자유에 의하여 모순과 갈등의 선택 앞에서 결단한 자기 반성에 의하여 세계 의미를 접근하고 해명하며 구성할 수 있다. 그러면 자기 반성으로서의 병의 전환점이 성립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다름 아닌 시간성이다. 시간성은 인간의 내면 의식으로서 이 의식에 의하여 세계 의미가 해명된다. 시간성의 의식은 과거,현재,미래를 시간이게끔하는 근원이다. 인간은 언제나 고뇌와 병과 죽음에 직면하여 있다. 고뇌는 병을 그리고 병은 죽음을 내포한다. 죽음은 허무의 상징이다. 인간 주체가 병을 병으로, 고뇌는 고뇌를 그리고 죽음을 죽음으로 시인할 때 인간은 삶을 반성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인간 주체는 병과 죽음의 허무를 세계 의미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인간이 주체일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자신의 자유와 양심에 의하여 고뇌와 병과 죽음 속에서 자신의 삶을 결단함으로써 세계 의미를 창조하는 데 있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애물단지
본뜻 : 애물은 어려서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 또는 매우 애를 태우거나 속을 썩이는 물건이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지금은 물건보다는 사람에 한해서 주로 쓰고 있다.
애벌빨래
본뜻 : 애는 '아이'에서 온 말로서, 애벌빨래는 아이가 한 빨래라는 뜻이다. 아이가 한 빨래이니 구석구석에 때를 제대로 지우지 않았을 정도로 빨았을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바뀐 뜻 : 본격적으로 빨기 전에 처음에 대강 빠는 빨래를 말한다.
억수
본뜻 : 원래는 호우를 가리키는 악수에서 나온 말이다. 너무 많이 오는 비는 생활에 이로움을 주기보다는 해를 주는 경우가 많으므로 악수라 했다.
바뀐 뜻 : 하늘이 뚫어진 것처럼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를 가리키는 말이다. 수억 개의 빗줄기가 쏟아진다는 한자말이 아니다.
|
|
|
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
현대국가에서는 어디에서나 국가가 관리하는 중앙은행이 화폐를 발행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국은행이 바로 그 일을 한다. 그러나 중세시대에는 도시마다 각기 화폐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름도 다르고 크기도 달랐다. 또한 화폐가 주로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도시가 망해도 화폐가 다른 곳에서 다시 주조되면 유통될 수 있었다. 지금의 지폐와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절대주의 시대에 와서 국왕은 화폐의 주조권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국왕이 자신의 이름으로 화폐를 찍었고, 그것을 전국적으로 유통시켰다. 영국의 앨리자베스 1세는 국왕 자신이 화폐유통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왕들은 아직 충분한 재정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자주 손쉬운 방법을 썼다. 화폐를 만들면서 그 안에 포함되는 금·은의 함량을 줄이는 방법이었다. 그 함량을 반으로 하면 두 배의 화폐를 주조할 수 있었다. 국왕으로서는 아주 경제적인 재정확보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식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재정고문 토머스 그레샴(Thomas Gresam, 1519-1579)이었다. 그는 1558년 여왕이 즉위하던 해에 영국의 재정 궁핍을 덜기 위하여 안트워프에 가서 차관교섭을 하도록 명령받았다. 그는 출발에 앞서 여왕에게 서한을 보내 헨리 8세 이래로 화폐의 질을 떨어뜨리는 정책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비판했다. 국왕이 금·은의 양을 줄이면서 화폐를 만들면 모두가 이를 모방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나온 화폐가 모두 못 쓰게 되어 다시 만들어야 한다. 결국 화폐의 질은 떨어지고 경제는 큰 혼란에 빠져 버린다. 화폐에 대한 신용도도 떨어지고, 마침내는 이를 시작한 국가의 신용도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큰 문제는 품질이 나쁜 화폐를 만들어 시중에 내 놓으면 품질이 좋은 화폐는 개인의 금고로 숨고 품질이 낮은 화폐만이 지중에 유통된다는 데에 있었다. 예를 들어, 두 가지 주화가 모두 500원짜리 금화라고 할 때 그것들의 금의 함량이 차이가 난다면 사람들은 금의 함량이 높은 것은 자기 집에 소장하거나 외국으로 빼돌린다는 것이다. 여기서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나왔다. 특히 그는 영국에서 그동안 금화가 빠져나간 현상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서 금화와 같은 양화는 화폐로 사용하기보다는 귀금속으로 사용하는 것이 국가의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다. 명목화폐인 지폐가 주로 사용되고 금속화폐도 보조적인 기능만을 담당할 뿐인 오늘날 우리에게는 너무 단순한 상식이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이론이었다. 그것은 정치권력을 집중시킨 국왕이 재정을 융통하는 것이 어려웠던 16세기다운 발견이었다. 이 원칙은 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슷한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 요즘 많이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저질의 TV 프로그램이 나오면 모두가 이를 모방해 질 좋은 프로그램이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된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악하가 양화를 몰아낸다."고 말한다. 요즘처럼 가짜가 판치는 세상을 풍자하기에 좋은 말이다.
|
|
|
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당신에게 가는 길
인간은 어떤 종류의 결핍을 느낄 때 비로소 꿈을 꾸고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핍은 그것을 충족시킬 무엇을 필요로 하며 그러므로 결핍은 결국 창조를 낳게 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생각한다면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은 곧 많은 내적 결핍을 갖고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은 안전하고 평화롭기를 원하나, 창조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파괴하고 앞으로 내닫기를 원하므로, 회복할 수 없는 목마름이 늘 그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나는 자기가 충족할 수 있는 길은 그 목적이나 상대에게 있기보다는 훨씬 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행복이나 불행에 상관없이 자신이 전력투구할 수 있는 어떤 일이나 상대를 발견하고 거기에 몰입해 있을 때 비로소 어떤 충족감이 그를 채워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목적은 그것이 돈이든 사람이든간에 그 끝에 가서는 다소의 실망과 허탈을 맛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생의 당연한 결말이라고 생각하므로, 이 세상에는 완전한 목적이나 상대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허탈과 실망조차도 엄격하게 관찰하면 사실은 그 목적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원한 꿈, 즉 내적 결핍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완전한 만족, 완전한 행복의 상태란 영원히 가질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작가이며 아쿠다가와 상을 받은 바 있는 이시가와 다쓰조오가 쓴 소설 <충족된 생활>을 읽으면서 나는 한 사람이 충족할 수 있는 길이란 결국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 같았습니다. 아사쿠라 준코라는 한 독신녀의 일기체로 쓰여진 이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을 통하여 인간이 추구하는 충족된 생활이란 어떤 것인가, 또 거기에 따르는 투쟁과 고뇌, 그 공허를 예리하게 파헤쳐 놓았습니다. 참되고 보람있는 생활은 어떤 것이며 사랑이란 과연 육체와 정신,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이 있는가, 또 인간의 내부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에고이즘의 강인함, 인간의 끝없는 방황 등을 한 여자의 섬세한 눈으로 바라보고 분석한 이 소설은, 특히 한 개성있는 여자의 방황과 행복의 추구를 매우 밀도있게 그려 놓았습니다. 매우 매력적이고 활기에 차 있으며 늘 꿈을 꾸고 살기는 하나 전혀 생활력이나 책임감이 없는 동화 속의 로맨티스트와 같은 첫남편과 이혼을 하고, 그의 주변에 있는 여러 남자들을 관찰하면서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고 또 조금씩 경계하며서 주인공인 준코는 하쿠죠자라는 극단의 말단 배우생활을 합니다. 그 극단의 유명한 인기배우인 다나베의 연극에 대한 필사적인 집념 속에서, 무언가 충족되지 않는 것을 메꾸기 위하여 악전고투하고 있는 극단적인 고독을 발견하고, 친구인 하루미에게서는 어린아이로만은 충족되지 않는 젊은 육체의 공허를 발견하고, 또 같은 배우인 모리시다 게이코에게서는 사랑이 없는 타산적이고 생활적인 육체의 유희 뒤에 오는 파멸을 발견합니다. 드디어 그는 희곡작가이며 많은 정사와 두 번의 결혼 경험이 있는 이시구로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고 다음과 같은 독백을 하게 됩니다.
“그와 결혼하는 것은 나의 행복을 약속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행복과는 별개의 것이다. 애정이 내게 고난을 줄지도 모른다. 고난 속의 사랑, 헌신의 괴로움 속에 사랑의 보람을 느낄 수도 있다. 나는 행복을 추구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다른 것이 있을 듯하다. 그 무엇과도 바굴 수 없는 것. 하나의 생명감, 충족감. 육체의 충족감과 같은 소모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건설적인 것, 평생을 두고 마음을 충족시켜 주는 것... 남자는 여자만으로 충족을 얻을 수 있다. 허나 여자란 남자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사랑은 남자에게 종국이며, 여자에게는 출발점이다. 나는 그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여자의 승리다. 사랑이라는 것은 안이한 문제가 아니다. 살기 위한 투쟁이다. 나는 그의 자식을 낳고 내 생애를 그 생명에 의해서 충족시킨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새로운 투쟁의 인생이 시작된다...”
이 여주인공의 깨달음은 결국 총족된 생활이란 완전한 행복이나 평화가 아니고 투쟁과 헌신에 몸 바칠 수 있는 어떤 것.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불길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무엇을 위하여 한번도 치열하게 불태워 보지 않은 목숨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숨쉬고 있을 뿐이며, 한번도 생명의 독특한 빛깔을 가져 보지 못한 채 스러지는 하잘것없는 지푸라기 같은 것이지요. 기쁨이나 슬픔에 가득차 있는 사람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 속에 그의 생명을 불태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에나 열중해 있을 때 사람은 가장 아름답고 빛나 보입니다. 예술이 위대한 것도 바로 이 집중에서부터 우러나왔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집중의 고통을 치른 사람은 불의 가마에서 구워낸 도자기처럼 독특하고 아름다운 빛깔과 생명을 갖게 되는 법입니다.
나의 아벨라르. 나는 고통과 헌신의 불길을 지나 당신에게 가는 길을 발견하게 된 것을 축복이라고 믿으며 나의 방법, 나의 기준으로 충족된 어떤 것을 찾기 위하여 이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고통이 따르지 않는 즐거움은 단지 휴식에 지나지 않으며 극기의 뒤에 오는 기쁨이야 말로 참다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말한 앙드레 지드의 말에 흔쾌하게 공감하면서 가난하고 슬픈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하느님께 나는 무릎 꿇고 이 슬픔과 고통의 사랑을 위해 빌고 또 빌겠습니다. 나의 기도는 현실적인 성취를 위해서가 아니고, 순수한 영혼으로 이 사랑을 끝까지 지켜 나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이 사랑이 내 삶의 중심이 되어 풍요하고 아름다운 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기를 비는 기도입니다.
|
|
|
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임진왜란 그리고 운명적인 한일교류
사야가
임진, 정유년에 걸쳐서 무려 7년 동안이나 조선강토를 초토화했던 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인적교류를 다양하게 하였고, 그것은 또 운명적인 교류나 다를 바가 없었다. 유학자 강항이나 박평의를 비롯한 수많은 도공, 인쇄공 등이 일본땅으로 잡혀가 오늘의 일본문화를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하기도 하였지만, 그와는 반대로 일본인 사무라이가 한국에 귀화하여 그 자손을 번창하게 한 사람도 있었다. 1592년 4월 13일. 왜병 3천 여명이 현해탄을 건너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이른바 임진왜란의 시작이었다. 왜병의 선발대에 해당하는 이들을 가토기요마사의 휘하에 있는 왜병들이었다. 이들 3천여 왜병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우선봉장 사야가라는 무당이었고 나이는 스물 두 살이었다. 사야가는 일본에서 태어난 것을 큰 불행으로 여길 만큼 중국의 문물을 늘 사모하고 있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스스로 모화당이라고 자처하기도 하였다. 또 그는 남자로 태어난 것은 천만 다행이나 불행하게도 중국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오랑캐의 나라에서 태어나서 오랑캐의 차림을 면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면 이 어찌 영웅의 한이 아니랴, 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비록 왜장일지라도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막상 조선땅에 상류하고 보니 조선의 문화가 중국 못지 않게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설사 그가 그리던 중국에는 못 간다 하더라도 중국에 못지 않은 조선땅에 왔으니 일대 전기를 마련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군진에 명을 내렸다.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남의 토지를 빼앗고 남의 재물을 탐내서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은 병가에서 가장 금하는 길이다. 너희들은 다만 진세를 바르게 하고 군기를 세우며 기운을 가다듬고 마음을 단속하여 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라. 왜병의 장수로는 취할 길이 아니었으나, 사야가는 이런 조처를 취해 놓은 다음 이틀 뒤인 15일에 이르러서는 조선 백성들에게도 싸울 뜻이 없다는 것을 밝히고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효유서를 내다붙였으며, 20일에는 조선절도사에게 강화를 청하는 글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이 무렵 울산군수 이언성이 좌위장이 되어 동래성으로 달려갔다가 왜병의 세력을 보고 황급히 도망치다가 죽으니 병사들도 앞다투어 도주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딱하게 여긴 사야가는 울산 사람 서인충, 서봉호 등의 결사대와 힘을 합쳐 왜병을 공략하여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조선군 체찰사가 사야가의 귀환과 큰 공을 세웠음을 알고 이 같은 사실을 선조임금에게 아뢰자 선조는 크게 기뻐하여 사야가를 어전에 불렀다. 선조는 사야가의 무예를 친히 시험하고 그의 사람됨을 살핀 다음, 가선대부로 가자하고 사야가로 하여금 남쪽 방면의 방위를 책임지게 하였다. 사야가는 조선장수가 되어 조선땅을 방위하는 한편, 본도병영에 글을 올려 조선의 무기가 시원치 않으니 각도의 각 진영에 조총과 화약만들기를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또 각지에 있는 조선장수들과 서신을 내왕하며 작전 문제를 숙의하기도 하였다.
다음해인 1593년에는 선조 임금께서 사야가의 공을 치하하여 성과 이름을 하사하고, 다시 자헌대부로 가자 하였다. 이 때에 하사한 이름이 김충선이다. 왜장 사야가가 명실상부한 조선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충선은 이후에도 우병사 김응서 장군과 만나 작전 수립에 지대한 공을 세우게 되어 그 용맹이 날로 더해졌고, 체찰사 유성룡 정승에게도 왜병과 대처하는 방안을 강구해 주기도 하였다. 임진, 정유년의 왜란이 끝나갈 무렵인 1600년(선조 33년)에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따님인 인동 장씨와 결혼을 했다. 장장 7년에 걸친 왜란이 끝나자 김충선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중을 토로하였다.
8년간 나의 일은 거의 끝났다. 그러나 고국은 멀고 친척도 떠난 지라,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내가 고국을 사절한 것은 한의 이릉과 같아 돌아갈 수 없어서도 아니요, 조선에 붙어 사는 것이 흉노에 잡힌 소무처럼 갇혀서도 아니다. 나라를 떠난 것은 섭섭한 일이지만은 오랑캐를 벗어난 것은 나의 원하는 바라, 남산의 남이나 북산의 북, 어디에 간들 마땅하지 않으리오.
참으로 절절하게 표현된 김충선의 심중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이로부터 김충선은 그를 따르던 무리를 거느리고 우록동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 지금의 대구 근교에 있는 우록동이다. 우록동에서 조용히 기거하면서 슬하에 5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이후에도 이괄의 난을 평정코자 출병한 일이 있었으며, 병자호란 때도 몸소 출전하여 대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1642년에 세상을 떠나니 조정에서도 슬퍼하였고, 향리와 이웃에서도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왜장 사야가. 김충선은 자신이 몸소 쓴 문집에 성은 사가요, 이름이 야가라고 분명히 적어 놓고 있지만, 일본을 대표하는 역사소설가요, 일본 국민으로부터 국사라고까지 불리우는 시바 료타로는 김충선의 문집인 "모화당문집"을 확인하고서도 사야가의 존재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일본인의 성씨에는 사씨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시바 료타로와 아주 절친한 조선도공 14대 심수관은 사야가는 본명이 아닐 수도 있겠기에 여기에 소개해 두고자 한다.
일본어에 '사요오까'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 뜻으로는 '그렇던가?' '그렇군'이라고 감탄하는 것과 같은 뉘앙스가 된다. 조선땅의 문물에 소상하지 않았던 사야가는 이것저것 묻는 것이 많았고,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조선사람에게 맞장구를 치면서 '사요오까'라고 감탄을 연발한 것을 음독으로 적으면 '사야가'로 되질 않겠는가. 그러므로 조선인들은 사야가를 그의 별호로 불렀을 것이며, 따라서 조선으로 귀화한 사야가를 새 이름으로 정했을 게 분명하다면서 너털웃음을 토했지만, 나에게는 음미해 볼만한 탁견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거나, 이 대목을 쓰고 있을 때 시바 료타로가 향년 72세로 오사카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떴다는 부음이 들려왔다. 나는 그와 더불어 한, 일간의 역사교류에 관해 진술하고도 허심탄회한 의견교환을 한 일이 있었고 또 그가 역사소설만으로 일본인 독자(국민)들의 역사 인식을 새롭게 가다듬고 있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부음은 나에게도 큰 아쉬움과 허전함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임진, 정유년에 걸친 왜란은 한, 일 양국간에 몸서리치는 전율과 한을 심었지만, 그 인적인 교류를 소홀히 할 수가 없다. 특히 일본 쪽에는 그들의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심수관 씨의 예와 같이 뿌리를 찾기 위해 선인의 유적지를 찾는 경우가 날로 흔해지고 있다. 비록 교류가 전쟁을 매개로 한 비극적인 교류라고 할지라도 4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하늘에 이르러서는 실로 운명적인 교류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그 운명적인 교류 중에서도 아주 불가사의한 예가 있기에 여기에 적어서 역사의 묘미를 곱씹어 보기로 한다. 왜장으로 참전하였다가 조선인으로 귀화한 김충선은 우록 김씨라는 관향으로 한 가문을 형성하고 그 시조가 되었는데, 그로부터 4백 년 세월이 흐른 다음 한국 정부의 장관을 배출하게 된다. 법무부장관과 내무부장관을 지낸 김치열 씨가 바로 김충선의 후예이다. 한편, 정유재란 때 일본땅 가고시마로 끌려갔던 조선인 도공 박평의는 '명자대도'의 예우를 받으면서 도오고라는 성을 쓰게 되었는데, 그의 후예에서도 일본국의 대신이 배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일본국 외무대신이었던 도오고 시게노리가 바로 그 사람이며, 그의 아명은 박무덕이었다. 선대의 운명적인 교류는 비극적인 것이지만, 4백여 년 뒤에 그들의 13대 손이라는 공통점으로 귀화한 나라의 장관으로 발탁되는 사실을 지켜보면서 정말로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
|
|
글터 → 이글저글 |
마녀 재판
중세 유럽은 신앙의 시대인 동시에 미신의 시대이기도 했다. 일체의 사상은 교회의 엄중한 통제를 받았지만 무지한 민중들은 곧잘 점장이나 요술쟁이에게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특히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였으니만치 약초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나 미래를 점치는 사람은 존경하기도 하고 두려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의 성경에 가르침을 인간의 정신면에 국한시키지 않고 자연계와 인간 세계의 온갖 진리를 포함하는 것이라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을 어기는 자는 악마에게 흘린 자라하여 모조리 처형했다. 그 결과 오랜 세월에 걸쳐 수백만의 사람이 처형되었으며, 그 재판을 마녀재판이라고 했다. 마녀재판이라 해도 대상은 여자에 국한되지 않으며 교회의 교리를 어긴 자는 남녀 불문하고 마녀라 불리었다. 프랑스의 애국소녀 '잔 다크'가 처형된 것도 마녀라는 이유에서였다. 마녀재판에는 잔인한 고문이 따르기 마련이었고, 고문에 못이겨 자백을 하면 곧장 화형대에 끌어올려 불살라 죽였다. 오늘날 공산세계의 소위 인민재판은 현대판 마녀재판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