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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47 호
단기 4340. 3. 3 (음력 01.1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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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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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신춘 문단, 논쟁의 꽃이 활짝… ‘2000년대 문학’ 공방
“다시 논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평론가 이광호)
맞다. 속속 출간되는 2007년 계간지 봄호들은 ‘독설’로 가득하다. 이른바 ‘2000년대 문학’을 둘러싼 설전들이다. 집단의 문제를 고민했던 1980년대 문학과 개인의 내밀한 삶을 조명한 1990년대 문학 이후, ‘2000년대 문학’은 앞선 세대와 어떻게 다르냐는 게 초점이다.
○ 한국문학사의 금기어를 발설하다 발단은 이광호 씨 스스로 “내가 한국문학사의 가장 오래된 ‘금기’(문학이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을 수도 있다는)를 발설한 것을 안다”고 의미를 부여한 것 그대로다.
민족문학 진영 평론가들은 이미 계간 ‘창작과비평’을 통해 이 씨와 김형중 씨의 이 같은 ‘2000년대 문학 분석’을 공격했고 이 씨와 김 씨는 이번 ‘문학과사회’ 봄호 특집에서 민족문학론자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이 씨와 김 씨 기고의 요지는 “2000년대의 새로운 문학은 ‘리얼리즘-모더니즘’식의 과거의 비평적 잣대가 들어맞지 않는데, 민족문학 진영은 리얼리즘이라는 오랜 틀로 파악해 묶어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
이 씨는 “민족문학론자들의 비평의 잣대인 리얼리즘은 텍스트 분석의 방법론이 아니라 지도 이념의 권위적 담론이 돼 버렸다”면서 “민족문학 진영은 ‘6·15시대’ ‘통일시대’ 같은 거대 담론적 시대 규정을 앞세워 개별 문학 텍스트를 규율하려고 한다”고 지적한다. 김 씨도 민족문학 진영의 리얼리즘의 잣대가 모더니즘의 세례를 거쳐 갱신되었다 해도, “실제로는 갱신 이전의 완고한 리얼리즘적 범주나 나이브한 감상이 작품 분석에 적용될 뿐”이라면서 “갱신된 리얼리즘이란 영영 묘연한 일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이 씨는 이번 기고에서 자신이 2000년대 문학의 특징으로 호명한 ‘무중력’이라는 개념을, 민족문학 진영의 임규찬 한기욱 씨가 “극심하게 오독하고 있다”며 거세게 비판한다. 이 씨는 이들이 ‘무중력’ 개념을 탈정치적·탈사회적 가치로 읽은 것은 잘못이라면서, “문학텍스트가 한국 사회의 특정한 역사적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를 보여 준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새로운 정치성’을 함유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박한다.
금기를 발설한 만큼 공격과 반박이 이어지는 등 논쟁의 충격은 크다. 양쪽 모두 치밀한 이론으로 무장해 논쟁은 정치하게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 “새롭지만 소통 가능한가?”
‘2000년대 문학’에 대한 비판도 계속되고 있다. 심진경 씨는 ‘창작과비평’ 봄호에서 한유주 박형서 이기호 씨 등 2000년대산(産) 작가들의 소설을 분석하면서, “젊은 소설들이 형식적으로는 새로워 보이긴 하지만, 인간과 세계에 관한 새로운 통찰보다는 독아론적 물음이나 유희에 몰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오늘의문예비평’ 봄호에서는 박민규 황병승 씨가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권유리야 씨는 박 씨의 소설 ‘핑퐁’이 자본주의 비판 정신으로 포장됐지만 “자본주의 체제에 투항한 자의 체념과 냉소에 머무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험 시의 대표주자인 황병승 씨에 대해서도 “난독(難讀)이나 재독(再讀)의 수고에 비해 얻을 보람이 많지 않다”(엄경희 씨), “지나치게 자의식 속에 머물러 있어 아주 힘겨운 독서과정을 거쳐야 하는 자기중심적 시 쓰기의 극단” (하상일 씨)이란 비판이 나왔다.
이렇게 오랜만에 ‘시끄러운’ 설전이 벌어지면서 문단은 활기를 띠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작품’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놓고 벌이는 논쟁인 만큼 생산적”이라고 입을 모은다. 새로운 세기의 문학에 대해 평론가들이 어떤 새로운 잣대를 찾을지, 날선 비판에 작가들은 어떤 작품으로 답할지 기대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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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다수란 때로 바보들이 한쪽에 많이 몰려 있기 때문에 형성되는 것. / 클로드 맥도널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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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三十六章 (노자 - 도덕경 : 제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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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欲흡之, 必固張之. 將欲弱之, 必固强之. 將欲廢之, 必固興之. 是謂微明, 柔弱勝剛强. 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장욕흡지, 필고장지. 장욕약지, 필고강지. 장욕폐지, 필고흥지. 시위미명, 유약승강강. 어불가탈어연. 국지이기, 불가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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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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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여섯째 장
직역
장차 그것을 거둘려고 바란다면 반드시 먼저 길러 주어라. 장차 그것을 약하게 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어라. 장차 그것을 폐할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것을 흥하게 해주어라. 장차 그것을 뺏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것을 주어라. 이것을 일컬어 (미명 微明- 반대 방향으로 펴서 오므린다. 개구리가 뛰기전에 오므리는 지혜를 말한다.) 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물고기는 연못을 탈출해서는 안되니, 나라의 이로운 기물은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된다.
- 해석 부족하다.
농사는 자연과의 대화이다. 거름을 주고 밭을 잘 일러주어야 농작물이 잘 자란다. 농작물이 잘 자라야 거둘 것이 있는 것이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스물 아홉째 장을 다시 보기 바란다. 자연은 앞서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한다. 한없이 강해지면 결국 스스로 붕괴하기 마련이다. 부유해지면 가난해 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도에 이르는 첫출발 점이다. 그래서 처세술로는 쓸 수가 있다. 그러나 대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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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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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장차 그것을 오므리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것을 펼쳐 주어야 한다. 장차 그것을 악화시키려면 반드시 우선 그것을 강화시켜야 한다. 장차 그것을 폐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것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장차 그것을 빼앗으려면 먼저 그에게 주어야 한다. 이것을 드러나지 않은 깊은 지혜라고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억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물고기는 연못을 벗어나지 않아야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이기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주
흡: 쭈그리다, 오므리다, 수축하다. 고: 먼저, 잠시, 우선. 장: 벌리다, 펼치다. 미명: 드러나지 않은 슬기, 숨겨진 지혜. 국지이기: 부드러움으로 억센 것을 이겨내는 성인의 심오한 지혜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없어서는 안될 유익한 기구인 것이다.
해
이 장은 사람을 다루는 처세술의 방책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움츠리는 자벌레는 몸을 펴서 앞으로 나가기 위함이요, 그것을 약하게 하고자 하면 그것을 강하게 만들어야 하며 폐지하고자 하면 먼저 흥왕케 해주어야 한다. 빼앗기 위해서는 먼저 주어야 하고 앞으로 전진하기 위하여 우선 일보 후퇴할 줄 알아야 한다. 사물의 작용에는 반드시 반작용이 따르기 마련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고기를 잡고자 하면 우선 그물과 배를 마련해야 한다. 즉 우회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항상 처세에 있어서도 우회적 간접적인 방법이 도리어 목적 달성에 유효한 경우가 많다. 실을 피하고 빈틈을 찔러야 이길 수 있다는 손자의 가르침은 노자서의 이 장과 통하는 면이 있다. 그러므로 이 장은 노자 철학의 일반적 성격에 비하여 좀 색다른 데가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 장이 법가 계열의 냉혹한 인간 조종술과 매우 상통하며 특히 한비자의 주도편과 성경을 같이함을 주목하여 후세 전국 말기의 법가 계열의 학자에 의해 덧붙인 문장으로 간주하고 있다. 참고로 한비자 주도편의 문장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말한다. 군주는 자신의 의도를 노출시켜서는 안된다. 군주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면 신하는 이에 영합하여 스스로 겉을 꾸미게 되는 것이다. 군주가 자기의 뜻을 드러내면 신하는 장차 스스로 표리부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좋아하는 것도 버리고 싫어하는 것도 버리라. 그렇게 하면 신하는 소질 즉 스스로의 타고난 순수한 본바탕을 드러낼 것이다. 기교도 버리고 지혜도 버리라. 그렇게 하면 신하는 스스로 갖추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한비자 사상의 밑바탕에는 노자의 무위 사상이 스며 있고 노자의 형이상학, 생활 철학 위에 법술가적 방책을 가미한 것이 그의 정치철학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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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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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굴불사터 사면석불의 수난
일제 밑에서 한국의 종류의 문화재가 얼마나 처참하고 어이없게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거나 파괴당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조사·파악하고 있는 오늘의 국내 전문가들은 특히 굴욕의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를 "완전 무법과 묵인된 약탈의 시대"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반출 혹은 약탈한 우리의 문화재는 부지기수란 표현이 모자랄 정도라고 말한다. 황수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일합방에 앞서서 일확천금을 꿈꾸며 귀중한 보물탐색에 혈안이 되었던 일본인 상인 또는 무뢰도당의 손으로 산간벽지의 고사암 또는 암굴과 같은 봉안처에서의 불법반출과 사찰 등에 보존되어 오던 불상·사보류에 대한 약탈행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절터 등에 남아 있던 석조미술품의 대량 반출이나, 세계사상 그 유례가 다시 없는 수만 고분의 도굴행위 등은…, 작품 그 자체가 마땅히 지녀야 할, 아니 지니고 있던 학적 무형의 가치를 박탈당하고 일괄 유물과 분리되어 환금과 탈취의 표적으로만 취급되었다. 이곳에 우리 고대 문화재의 박해와 해명을 위하여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중대한 타격이 일제 초기에 있었다."( (역사학보), (반가사유석상소고), 1960년 )
현재 보물 제121호로 지정돼 있는 경주시 동천리 굴불사터의 자연암 '사면석불' 의 남쪽면에 해당되는 고부조는 석가여래삼존상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본존 석가여래의 머리 부분과 오른쪽의 협시보살상 전체를 정으로 쪼아 떼어간 악당이 있었다. 곧 "완전 무법과 약탈의 시대" 에 있었던 기막힌 수난의 하나였다. 반쯤 땅속에 묻혀 있던 '사면석불' 을 현재와 같이 전모를 볼 수 있게 파올린 것은 1914∼1915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정을 들고 온 무법자에 의해 석가여래의 불두와 전신상의 협시보살 부분이 감쪽같이 떼어져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후 일본인 학자나 관계전문가들은 애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모른 체함으로써 1960년 무렵까지만 해도 누구 하나 그 부분을 주목하고 의심한 전문가가 없었다. 1960년께였다. 당시 문교부 국보보존위원회 위원이었던 간송 전형필 선생과 이홍직·황수영 교수 일행이 경주의 유적을 조사하러 갔다가 굴불사터의 '사면석불' 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일행의 화제가 드디어 반세기전에 일본인 악당이 감쪽같이 떼어 간 부분에 미치게 되었다. 예리한 눈으로 먼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간송이었다. 일행은 긴장하여 그 자리에서 세밀한 검토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큰 바윗덩이의 암면 부조의 하나인 남쪽면의 오른쪽에서 본존상의 머리와 협시보살상 전체를 기술적으로 쪼아 떼어간 정 자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그 보살상의 가장자리로 이어져 있던 천의 자락이 얇고 섬세한 부분까지는 도저히 떼어갈 수 없었던 점이 주목되었다. 그리고 몇 해 후 한일회담 문화재관계 한국대표로 일본에 건너갔던 황수영 교수는 교토대학 고고학 연구실에서 1915년께에 찍은 경주 굴불사터 '사면석불' 의 사진 원판들을 보았다. 거기에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나 있었다. 불두와 보살상을 떼어 간 직후의 사진이어서 그 자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희고 생경한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드디어 모든 것은 판명되었다. 1969년에 문공부와 문화재관리국이 간행한 (문화재대관) (보물편) 중편의 '굴불사터 석불상' (사면석불) 도판해설은 그 부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사면석불의 남면상은 원래는 삼존상으로 만든 것이지만 일제 때에 오른쪽 보살상을 완전히 떼어 가고 본존상의 머리까지 떼어 간 참혹한 수난을 입었다." 반세기 전에 일본인 악당에 의해 무자비하게 떼어져 간 비운의 '사면석불' 남면의 석가상 불두와 그 옆의 보살상은 지금 일본의 어느곳에 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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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10장 고뇌와 병과 죽음
2. 근원적 고뇌는 무엇인가?
인간의 삶은 본래부터 병의 현상에 던져져 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젖먹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이상적 절대적으로 완전 무결하게 건강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의학적,물리적,심리적으로만 인간이 병에 던져져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정치적으로 인간은 쉴 사이 없이 병이라고 하는 한계 상황 속에서 신음하고 절규한다. 병은 인간 존재의 결핍이자 전체적인 삶의 부조화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누구나가 건강을 추구하려고 애쓴다. 오직 의학적인 측면에서만 볼 경우, 육체의 특수한 부분에 생긴 병을 치료하면 인간이 건강을 되찾는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다시금 병에 걸리고 마는 것이 인간이 짊어진 숙명이 아닌가? "죽음"은 너무나도 확실히 이점을 대변하여 주는 현상이다. 단지 생리학적인 차원에서만 말하자면 죽음이 그 겉모습을 최종적으로 드러내 주는 현상은 주검 다시 말해서 시체이며, 이 포기된 삶으로서의 시체 앞에서 인간은 아무런 할 말도 찾을 수 없고 오직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체는 인간의 삶이 다시금 무의미한 자연 환경으로 복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병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이 포기된 삶으로서의 시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유기적인 삶 속에서의 병만이 심연인 죽음의 의미를 환기시킴으로써 건강한 삶을 향한 전환점을 마련하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부정적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으며, 이 경우 부정적 차원을 우리는 병이라고 부르고 긍정적 차원을 건강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삶은 부정적 차원이거나 긍정적 차원의 어느 특정한 한쪽에 정지하지 않은 채 쉬임없이 양쪽을 넘나든다. 건강한 사람은 스스로의 건강한 일상성 속에서 자신감을 가지므로 스스로를 상실하고 있기가 십상이어서 모르는 사이에 병들게 된다. 병든 환자는 세계 소외, 세계 상실이라는 고독에 사로잡혀 고독의 의미를 물으며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갈증과 동경"에 사로잡힌다. 확실히 병과 건강을 직선적, 평면적으로만 구분하는 일은 일상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사고 방식에서만 가능하다. 병과 건강을 오로지 절대적인 두 가지 상황으로만 여겨서 양자를 전혀 다른 것으로 분리시켜서 구분한다면 단지 무의미하기만한 피안의 세계 이외의 다른 것을 구할 길이 없다. 이는 마치 어둠이 밝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항상 어둠 홀로 존재한다는 말과 같이 피상적인 의미 밖에 다른 어떤 것도 제시할 수 없다. 우리들이 단순하게 감각 경험을 근거로 사고한다면 이 세계에 관한 설명은 유물론으로 족하겠지만, 삶과 세계는 본질적으로 유기적인 구조를 소유한다고 생각할 경우 우리들은 동적인 전체성으로서의 삶과 세계를 대하게 된다.
병은 확실히 삶의 부정적인 측면으로서 그것은 인간이 파괴하고 뛰쳐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그림자로서의 가면이며, 이에 반하여 건강은 삶이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듯이 보이는 이상이다. 인간의 삶은 병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병의 가면과 건강의 이상 사이를 방황한다. 병과 마찬가지로 건강 역시 평면적이며 일차원적인 인간의 사고 대상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만이 건강하고자 한 시간도 못 되는 사이에 백사 한 마리와 산삼 한 뿌리를 먹어치우며 진시황처럼 영겁을 살고자 몸부림친다. 그러나 그도 결국에 가서는 시체의 그림자인 병에 갇히게 되어 주검으로 변모할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영원한 삶이란 병과 죽음을 자각하여 극복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영원한 삶이란 병과 죽음을 나의 체험으로 순화시키며 인정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죽음을 죽음답게 맞이할 때에만 영원한 삶이 성립한다는 역설이 생긴다. 건강이 무엇이며 그리고 건강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건강해지려고만 하는 인간이 있다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서의 자가 집착적인 원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는 결국 삶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밖에 보지 못하는 병에 걸리게 된다. 지금까지 나는 고뇌와 고통으로서의 병이 지니는 이중적 의미를 제시하기 위하여 간접적으로 병과 건강을 비교하여 보았다. 병은 물론이요, 건강 그리고 인간의 삶 자체도 벌써 이중적이다. 그것은 흡사 빛이 어둠과 밝음의 이중성을 띠고 있음과 마찬가지이다. 빛이 그 근원에 있어서는 운동이듯이 삶도 그 근원에 있어서는 생명으로서의 운동이다. 삶은 겉으로 보기에 잠시 멈추는 듯하다가는 다시 어디론가 흘러간다. 인간의 삶은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아름다움과 추함, 옳음과 그름, 참다움과 헛됨, 포만과 기아, 조화와 부조화가 엇갈려 동요하는 하나의 흐름이다. "삶은 왜 흐르는가? 삶의 근원적 고뇌는 무엇인가?" 이 물음은 고뇌와 고통으로서의 병을 간단히 삶의 고뇌라는 현상으로 집약시키면서 그 근원을 묻는 물음이다. 그러면 인간의 삶은 왜 고뇌에 물들어 있는가? "흐름"때문에 그러하다. "흐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흐름"은 곧 시간을 말한다. 흐름이 시간을 가리킨다는 말에는 벌써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 또한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공간이란 근본적으로 시간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언제나 지금이라는 흐름속에서의 이곳으로서 흐름을 떠나서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저 광화문"이라고 할 때 그것은 세워질 때 그리고 사람들이 볼 때와 같은 시간을 동반한 공간으로서, 시간을 독립한 "저 광화문"이란 있을 수 없다.
삶의 근원적 고뇌는 무엇인가? 그것은 흐름으로서의 시간 공간을 의미한다. 흐름으로서의 시간 공간은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제한성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유한하게 제한된 존재이다. 인간은 이곳과 지금이라는 공간 시간에 제한되어 있다. 제한되어 있으므로 건강하다가도 병에 걸려 고뇌로 신음하고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병으로부터 건강을 되찾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러기에 인간은 무의미하게 반복하여 지나치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고뇌를 의식할 때 그는 어떠한 자세를 가지는가? 인간의 의식은 시간 공간의 제한성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시간 공간이야말로 삶의 근원적인 고뇌이기 때문이다. 시간 공간이야말로 자기 반성을 도외시하는 인간의 자기 집착의 근거이다. 자기 집착으로 인하여 인간은 병과 건강을 분리시켜보며 또한 삶과 세계의 전체성 및 근원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들에 핀 한 송이 꽃이 아프다고말하지 않으며, 절대자인 하느님이 건강하다거나 병들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꽃이나 절대자는 시간, 공간의 제한성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 공간은 인간의 의식이다. 의식의 제산성은 시간 공간으로 나타난다. 제한된 의식은 스스로를 무한으로 확장시키려 한다. 이때 인간의 삶은 고뇌와 고통, 곧 병에 물든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역사 이래로 신화를 창조하여 영웅적, 역사적 행위를 묘사하고 동화와 전설을 엮어서 유한성을 초월한 세계를 동경하고 갈망하여왔다. 그것은 모두 인간이 자신의 제한된 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렇다고 인간이 과연 들에 핀 한 송이 꽃이 될 수 있을까? 시인이나 화가는 직관에 의하여 잠시 꽃과 하나가 되지만 다시금 시간,공간에 제한된 자신의 의식적인 삶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또한 인간은 시간,공간을 넘어선 절대자 하느님의 자리에 군림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인간은 이곳과 지금이라는 유한한 세계를 탈피하여 무한성의 세계에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까? 니체의 초인은 단지 이상적인 안간으로서 그것은 비현실적인 존재가 아닌가? 불교에서 말하는 불타는 어떠한가? 불타는 인간을 초월한 자가 아니라 여전히 인간으로서 고뇌와 고통을 처절하게 체험함으로써 병과 건강을 조화시키는 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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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본뜻 : 심신 수련을 하여 일정한 경지에 오른 사람을 가리키는 고조선 시대의 호칭이다. 백제의 수사, 고구려의 선인, 신라의 화랑과 비슷하다.
바뀐 뜻 : 학문과 인격을 닦은 사람이나, 학식은 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쓴다.
스스럼없다
본뜻 : '스스럽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써, '스스럽다'는 정분이 두텁지 않아서 매우 조심스럽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스스럼없다'는 말은 조심스럽지 않아도 된다, 어려워하지 않는 사이란 뜻이다.
바뀐 뜻 : 매우 가까워서 대하기 어렵다거나 부끄러운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아주 친근한 사이를 이르는 말이다.
시달리다
본뜻 : 흔히 성가시거나 괴로운 일을 당하는 것을 '시달리다'고 하는데 본디 이 말은 불교의 '시다림'에서 나온 말이다. 시다림은 인도 중부 왕사성 북쪽에 있는 숲의 이름으로, 일종의 공동묘지였는데 사람이 죽으면 이곳에 시신을 내다 버렸다. 그 때문에 이곳은 공포와 각종 질병이 창궐하는 지옥 같은 장소가 되어 버렸는데, 도를 닦는 수행 승들이 고행의 장소로 이곳을 즐겨 택하곤 했다. 수행자들은 이곳에서 시체가 썩는 악취와 각종 질병과 각종 날짐승들을 견뎌 내야 했다. 그러므로 이 '시다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곧 고행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여기에서 '시달림'이라는 말이 나왔다.
바뀐 뜻 : 괴로움을 당하거나 누군가가 계속해서 성가시게 구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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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식민지는 과일과 같아서 익으면 반드시 떨어진다
절대주의 국가는 어느 나라나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그 방식의 하나가 국내의 산업을 충실히 하고 무역에 의해 부를 축적한 중상주의 정책이었다. 그렇지만 절대주의체제의 재정을 지지했던 또 다른 방식은 식민지 경영이었다. 에스파니아나 포루투갈처럼 식민지 경쟁에 앞선 나라들은 본국보다도 식민지의 크기가 더 컸다. 영국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경쟁하면서 식민지를 만들었다. 모직물과 잡화 등 국내의 상품은 식민지 시장에서 판매되었다. 차, 커피, 코코아 등 식민지 생산물은 독점적으로 본국으로 운송되었다가 다시 외국으로 수출되면서 국부의 원천이 되었다. 식민지에서는 값싼 노동력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했다. 따라서 절대주의 시대에 식민지로부터 재미를 본 유럽의 열강들이 식민지 정책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절대주의가 무너진 영국조차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렸다. 대혁명 전의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 중상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특히 프랑스의 중농주의들은 합리적인 계몽주의 사상과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쳤다. 그들은 국내의 농업을 진흥시키고, 이에 기초하여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역에 의한 부는 결국 거짓된 부라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식민지가 국가차원에서 경제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리해서 힘으로 빼앗은 것은 곧 잃게 되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중농주의자였던 튀르고(Turgot, 1727-1781)는 1774년 루이 16세의 재정 장관에도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식민지는 과일과 같아서 익으면 반드시 떨어진다."는 말이 오늘날 우리의 눈에는 과연 적절한 말이다. 그 예언적인 말이 그대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1757년 인도의 프라시 전투에서 영국에 패함으로써 식민지를 잃었고, 승리한 영국도 하나 둘 식민지를 잃기 시작했다. 튀르고가 장관자리에서 쫓겨났을 때 대서양 건너 신대륙에서는 영국의 식민지들이 본국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고,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이 독립했다. 물론 그것은 튀르고의 예언대로 저절로 떨어졌다기보다는 식민지인들의 투쟁에 의한 것이다.
튀르고 [Turgot, Anne-Robert-Jacques] Baron de l'Aulne라고도 함. 1727. 5. 10 파리~1781. 3. 18 파리. 프랑스의 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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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나의 전부를 던져
나는 가끔 당신에게서 떠도는 사람의 고적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무언지 한 구석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허전한 분위기가 나를 강하게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고 있을까를 때때로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당신은 이 나라와는 아주 이질적인 유럽의 한 나라에서 성장했고, 거기에서 공부와 일을 했으며, 그 나라에 적응하여 살아왔으면서도, 자신의 몸 속에 흐르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의 피가, 그 나라 사람들과는 완전한 일치를 이룰 수 없는 어떤, 극히 작으면서도 극히 절실한 무엇으로서 당신의 가슴 속에 자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당신의 먼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이어받은, 서양인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동양인으로서의 유전인자가 당신의 몸 속에서 결코 서양의 문물이나 풍습과 융화되지 않는 갈등으로 서서히 자라 드디어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고향인 이 나라를 자주 찾게 했고, 이 나라에서 뿌리내리고 싶다는 소망으로 피어났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당신은 서양인도 동양인도 아닌, 마치 코스모폴리턴과도 같은 묘한 분위기를 갖고 계시고, 그것이 당신을 늘 쓸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확실한 소속이 없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의미도 되지만, 자유란 사실상 매우 고독한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본능적으로 어디엔가 예속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습니다. 친구에, 가족에, 일에, 사상에, 나아가서 특정한 나라에 소속되어 있으므로써 인간은 비로소 편안해지는 법입니다. 자기가 설 자리,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일과 이웃, 자기가 아니면 안되는 어떤 상황이 한 사람을 당당하게 만들고 생동감 있는 결단과 추진력을 갖게 만듭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은, 고국에 머무르고 싶은 당신의 소망과, 당신이 살아온 그 나라로 돌아가야만 편안해지는 당신의 생활습성과의 괴리 사이에서 방황하고 괴로와 하고 있습니다. 또 당신은 당신의 생활을 뒷받침하고,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엮어 주고 있는 당신의 아내-아름답고 성실하고 다정다감하지만 당신 속에 흐르고 있는 피와는 전혀 다른 피를 갖고 있는 이국 태생의 여자와, 당신과 같은 피, 같은 채취, 같은 감각을 지니고 있는 나와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어제 당신은 내게 이런 말을 했지요.
“내가 꿈꾸어 온 여자란 독립적이고 합리적이며 행동적인 여자가 아니고, 남자의 사랑 속에서 행복한 표정을 지을 줄 알며, 남자의 뜻에 조용히 따라올 줄 아는 그런 동양적 여성이었어요. 동양의 여성은 무언가 모성적인 힘이 강하게 돋보이고, 남편에게도 거의 모성적 사랑을 쏟을 줄 아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당신은, 일반적인 한국 여자들에 비해 매우 개성이 강하고 지적이며, 사고방식조차도 아주 진취적이고 서구화되어 있는 것 같지만, 내게는 당신 속에 있는 동양 여성의 아름다움, 말하자면 순정적이고 복종할 줄 알며 상대의 마음의 변화에 예민하게 신경을 써주는 자상하고 다뜻한 모성적인 애정의 원천이 아주 깊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여요. 아마 그런 점이 나를 사로잡고 있는 중요한 부분인지도 몰라요. 나는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여성에게서, 내 마음의 아주 섬세한 변화에도 마음을 써 주고 나를 보호해 주고 위로해 주고 싶어하는 여자를 한번도 발견하지 못해 왔어요. 그것이 늘 내게는 어떤 상실감을 주어 왔거든요. 나는 나의 어머니와 같은 여자를 아내로 갖고 싶었어요. 그런데 당신에게는 나의 어머니와 닮은 점이 너무나 많아요. 나는 이제 비로소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아요. 나의 상실감이 비로소 채워지는 것 같은-.“
아벨라르. 당신의 긴 고백을 들으면서, 나는 남자가 원하고 있는 여자란 어떤 여자인가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라고 한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독일)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자신만만하고 당돌하며 유능하고 적극적인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예속될 줄 알고 섬세한 마음씨와 헌신의 정신을 가진 여자, 사랑과 감사로 충만된 여자를 남자들은 원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그것은 남자들의 독선과 지배욕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발할 수도 있는 성질의 요구 조건이지만, 또 그런 반박이 `우먼리브(Woman lberation)` 물결의 원천을 이루기도 했지만, 나는 당신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비록 독신으로서 일에 열중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는 여자이긴 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근원적인 차이점을 인정하는 쪽입니다. 남성과 여성은 같은 별 아래 태어난 두 개의 얼굴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어느 쪽이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으며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 주고 존중하며 살아가야 하는 공존의 운명이며, 남성은 남성 특유의 강인함과 꿈으로, 여성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충분한 사랑으로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비록 사회에서 남자들과 어깨를 겨루고 일을 하고는 있지만,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남성이 여성이 될 수 없으며, 여성이 남성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능력에 있어서 남녀의 우열의 차이를 인정할 수는 없지만, 일단 일을 떠나서 개인적인 자리로 돌아왔을 때, 여성은 여성다워야 하며 남성은 남성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다시 나에게 “당신은 전 생애를 바치고 싶은 운명의 남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일`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강한 힘에 이끌려 그것에 전념하는 기쁨, 하고자 하는 일을 달성하고야 마는 일종의 성취욕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어쩌면 자신의 본질 속에 있는 여성적 열망을 굳이 외면하고, 그것과 대립되는 `일`에 대한 열망만을 불 태우며 불완전한 삶을 살아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만나는 순간,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내 속에 얼마나 강한 사랑에 대한 열망이 내재해 있었는지를 나는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늘 나를 허전하고 방황하게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나는 비로소 확실히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한 남자를 사랑하는 가장 부드럽고 온전한 여자가 되고 싶습니다.
아벨라르. 나는 나의 여성 전부를 당신에게 던져, 내 생애를 온전하고 균형 잡힌 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한 사람의 삶의 비중이란, 어쩌면 위대한 업적이나 공로에 의해서 가늠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한 사람의 인생 속에서 얼마나 크고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가늠될 성질의 것인지도 모르지요. 나는 당신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고 또 당신의 생애에 깊이 작용하면서 성장해 가는 내 삶을 가장 높은 보람으로 알고 거기에 맞추어 내 삶을 다시 설계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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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임진왜란 그리고 운명적인 한일교류
심수관
일본국을 대표할만한 역사소설가인 시바 료타로가 쓴 "고향을 어찌 잊으리까"라는 소설을 읽고, 나는 상당한 흥분과 부끄러움을 함께 느꼈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엄청난 얘깃거리가 있었던가 하는 것이 흥분의 요인이었고, 이런 얘기를 왜 일본인 작가가 써야 했으며, 대체 우리 나라의 작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읽고 다시 읽는 동안 시바라는 작가가 아무리 일본인이기에 상당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땅 구주로 달려가서 현장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이와타 레이몬이라는 일본 작가가 쓴 또 하나의 소설 "이조도공의 말예"를 읽을 수가 있었다. 이 소설도 앞서 소개한 시바의 소설과 같은 시대, 같은 인물을 다루고 있었다. 이 소설도 잘못을 저지르고 있기는 마찬가지, 내게는 어서 현장으로 떠날 것을 채근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사쓰마야키의 고장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오래 전인 1977년 5월 19일의 일이었다. 일본국 구주의 가고시마. 임진, 정유년의 양란에 걸쳐 10만여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조선인 포로가 끌려와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4백 년 세월을 살고 있다면 우리와는 그때 일본인들에게 잡혀 온 10만여 명의 조선인 포로 가운데 약 5만여 명이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등에 인신매매로 팔려 갔다는 기록이고 보면, 구주에 남아 있었던 조선인 포로의 수가 대충 5만여 명일 것이고,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4백 여년 동안 핏줄을 이어오면서 자손을 번창하게 했다면 지금의 구주인 들은 거의 대부분이 조금은 조선인의 피를 받고 있음이 아니겠는가. 이 사실을 가고시마 대학의 교육학부 요츠모토 교수에게 물었더니 그는 서슴없이 대답해 주었다. "거의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라고 하는 편이 옳겠지요." 너무나도 명쾌한 대답이어서 듣고 있는 내가 민망해 할 정도였다. 가고시마는 일본 사람들이 동양의 나폴리라고 자랑할 만큼 아름다운 항구도시였다. 긴고오만의 한가운데 떠 있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사쿠라지마는 그대로 활화산이라 이날도 분연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가고시마 시내에서 서쪽으로 달리면 일본국 특유의 산과 농촌 풍경을 볼 수가 있다. 약 50분 가량 달려가노라면 이슈인을 지나 히가시이치키라는 곳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다시 5분 정도의 거리에 유노모토라는 유황 온천장이 있다. 여장은 거기다 풀었다. 유황 냄새 물씬 풍기는 일본식 여관 하루모토소에. 심수관 씨 댁에 전화를 걸고 방문할 뜻을 전했다. 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다음, 그렇게 가고 싶었던(아니, 가야 했던) 미야마로 달렸다. 택시로 10분 정도의 거리였다. 지금은 미야마라고 부르지만, 이 지역의 옛 이름이 그 유명한 나에시로가와, 4백여 년 전 조선인 도공들이 포로로 잡혀 와서 자리를 잡았던 유서 깊은 고장이다. 우선 산세가 한국과 흡사했다. 물론 나중의 일이지만 심수관 씨는 '어떻습니까, 남원과 같지요. 우리 선조들은 남원과 지세가 유사한 여기에 짐을 풀었습니다'라고 했을 만큼 낯설지 않은 고장이었다.
이 미야마로 들어서는 초입에 '사쓰마야키의 발상지'라는 선전탑이 서 있어서 방문객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였다. '사쓰마야키'란 일본이 세계에 내놓고 자랑하는 도자기의 이름인데, 바로 이 사쓰마야키가 조선인 포로의 손에 의해서 구어졌다는 사실, 그 사실의 뿌리를 캐러 오는 나에게 '사쓰마야키의 발상지'라는 선전탑이 주는 인상은 하나의 충격이며 흥분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여기서 나직한 언덕을 하나 넘으면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이 포근하고 따뜻한 마을의 인상이 한국사람인 나에게 조금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국적인 풍취가 느껴진다면 직경이 10센티 이상인 왕대가 즐비하게 서 있다는 것, 따뜻한 지방의 관상수가 많이 눈에 띈다는 정도였다. 심수관 씨 댁의 낡은 목조 대문이 첫눈에 들어왔다. 이 건물에도 필시 한국 사람이 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눈에 익은 대문이었다. 옛날 일본 사람들의 집은 담장이 없고 대문이 없었다. 담장을 치고 대문을 세울 수 있다면 그것은 사무라이의 집안이나 허용되었던 일이다. 이것도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심수관 씨 댁의 이 대문은 가고시마에서도 세 번째로 큰 대문이었다고 하니 조선인 도공들이 누렸던 한때의 영화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심수관. 그는 어느 모로 뜯어 보나 그 골격부터가 한국 사람이다. 하긴 그렇다. 심수관 씨의 피에는 단 한 방울도 일본 사람의 피가 흐르지 않고 있으니, 그의 국적이 비록 일본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외모가 한국 사람임은 당연하질 않겠는가. 지금부터 4백여 년 전, 심당길이 일본땅에 포로로 잡혀 온 이래, 13대 심수관에 이르기까지 일본인 여성과 결혼을 한 조상은 단 한 사람도 없고, 오직 14대인 지금의 심수관 씨만이 일본인 여성을 아내로 맞았을 뿐이다. 여기서 먼저 밝혀 두고 갈 일은 심수관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다. 처음에 일본땅으로 잡혀온 초대는 심당길이었고, 2대가 심당수, 3대가 심도길, 4대가 심도원, 5대가 다시 심당길, 6대가 심당관, 7대가 심당수, 이런 식으로 11대 심수장까지가 서로 다른 이름을 쓰다가, 12대에 이르러 심수관이라는 습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14대인 지금의 심수관 씨의 본명은 오사코 게이키치였지만, 어버지(13대)가 세상을 뜨자 그 유업을 이어받게 됨으로써 심수관의 이름을 습명하게 되었다. "당신의 선조들이 낯선 땅에 끌려와서 사쓰마야키라는 명품을 남길 때까지의 노고를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담고자 실례를 무릅쓰고 방문하였습니다."라고 찾아온 목적을 밝히자, 그는 반가워하지 않았다. 몇 분의 순간을 흘려 보낸 다음에야 그는 일본의 여러 매스컴에 시달리고 있노라고 실토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제삿날도 아닌데,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절을 해달라는 주문도 너무 자주 받으니까 지겹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일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쓰고자 하는 드라마에는 유명한 탤런트가 등장하여 심수관 씨의 역을 맡아 할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집을 오픈세트로 빌려 주고 당신은 가능한 협조만 해주면 될 것이라고 했을 뿐, 그는 안색을 바꾸면서 반가워 하였고 아낌없는 지원을 할 것이라는 확약을 해주었다. 이로부터 난 본격적인 취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는 가보로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흔쾌히 제공해 주었다. 인상적인 기록으로는 포로로 잡혀 온 처지면서 자손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교본이 만들어진 것이었고, 당시의 물산동향을 기록한 문서도 있었으며, 필사본으로 된 고전소설 "숙향전"이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고 있었다. 시바 료타로가 그의 소설에서 크게 잘못 설명하고 있는 "오날이소서"라는 시조에 관해서도 언급을 해야겠다. 이 시조가 잡혀 온 조선인 도공들에 의해 즐겨 불려졌던 탓에 마치 거기서 지어진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실상은 시조집 "청구영언"에 수록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원시가 약간 변형된 것이었다.
오날이 오날이소셔 매일에 오날이소셔 뎔그디도 새디도 마르시고 새라난 매양쟝식에 오날이소셔.
심수관 씨는 비로소 선조들의 즐겨 불렀다는 "오날이소서"라는 시조의 참뜻과 출전을 알게 되었다면서 기뻐해 주었다. 책상 앞에서 할 수 있는 취재를 대충 마친 나는 그를 따라서 마당으로 나갔다.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으로 꾸며진 후원의 담장 밑 풀숲에 이르렀을 때, 나는 왈칵 눈물을 쏟아야 했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었으며 또 감동을 동반한 슬픔이기도 하였다. 풀숲에는 두 개의 돌비석이 서 있었는데(높이 40센티미터 정도) 비석에는 놀랍게도 '반녀니'라는 한글 비명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녀니'라면 분명히 여자의 이름이 아니던가. 마치 '언녀니'와 같은. 그러니까 필시 성도 몰랐음직한 천한 조선 여인의 이름이 분명한데, 그런 이름을 가진 여인이 죽었다 하여 비석을 세우고 그 비면에 이름을 새겼다는 사실, 그런 일이 정녕 본국(그들이 본다면)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던가. 낯선 이국땅에서 끌려와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죽었으면, 보잘것없는 아낙의 죽음을 이렇듯 애통하게 기릴 수가 있을까. 심수관 씨는 내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가 무어냐고 물었다. 나는 조선조 사회의 유교적 개념을 설명하고 적어도 한국땅에서는 상민 여성의 이름자가 한글로 새겨진 비석은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기에. 만리타국에 끌려와서 형언 할 수 없는 고초를 겪다가 세상을 뜬 '반녀니'를 위해 비석을 세워 주었던 남성들의 마음씨를 떠올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는 적이 놀라면서 잘 보존하고 간수해야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그 비석이 세워진 연대를 물었다. 그는 구체적인 예증은 없으나, 어른들로부터 2백년 이상된 것이라고 들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내가 그에게 역사드라마 "타국"을 쓰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의 표정은 숙연해졌고 마치 선조의 유훈을 전하듯 진지하게 말했다.
슬픔이나 괴로움이 응결되어 있는 사람만이 무엇인가를 이루어 놓습니다. 사쓰마야키는 일본인일 수 없으면서 일본인이어야 했던 조선 도공들의 응결된 괴로움과 슬픔의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풍속이 다른 이국땅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지혜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자신들을 위해서 반발도 참을 줄 알아야 했고, 아첨이 되지 않는 선에서 슬며시 손을 놓아 자신들의 긍지를 자위할 줄도 알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지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묵묵히 일해 가면서 생존의 집념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복잡 미묘한 감정이 사쓰마야키를 구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과의 대항 의식만은 가급적 삼가 주었으면 합니다.
놀라운 설명이 아닐 수가 없었다. 지금도 국경일이나 명절이 되면 일장기를 내거는 일, 세금을 잘 바치는 일만은 미야마에 사는 사람들이 일본땅에서 손꼽힌다고 하면서 그것은 4백 년을 전해져 내려오는 일종의 지혜며 철학이라고 했다.
옥산 신사를 찾았다. 미야마의 동서편 쪽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옥산신사의 본이름은 '옥산궁'이었다. 참으로 놀랍고 대견한 것은 일본땅에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 도공들이 옥산궁을 창건하여 거기에 단군의 위패를 모시고 해마다 8월 한가윗날에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4백여 년 전) 단군의 위패(혹은 영혼)를 모시고 망향제를 지내자는 발의를 할 수 있었다면, 잡혀 온 사람 중에 상당한 지식인이 있었다는 뜻도 되지만, 만리이역에 잡혀 온 조선인 포로들이 자신들의 앞치레도 하기 어려운 마당일 것인데도 조상을 섬기고 크게는 나라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나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1867년, 게이오 3년에 쓰여진 "옥산궁유래기"에 '옥산궁은 개조 단군의 묘'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봐서도 당시의 조선인 포로들의 뜻이 참으로 당당했음을 알 수가 있다. 지금도 쓰여지고 는 옥산신사의 제기를 보면 장고가 있는데 길이가 짧아졌을 뿐 모양은 우리 것과 같은 것이었으며, 시루떡을 찌는 작은 시루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과 같은 참으로 신기할 지경이며, 제주가 추는 춤의 형태도 우리 나라의 무당들이 추는 춤과 검무를 합친 것과 흡사하였다. 옥산신사는 미야마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조선인 도공들이 '옥산궁'으로 달려와서 그 염원을 단군신에게 빌고, 남지나해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며. 한가위 달밝은 밤에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오날이소서'를 불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내 가슴도 미어지게 아팠다. 드라마 "타국"이 방송될 때 서울대학의 이두현교수가 "옥산궁묘제"와 같은 귀중한 자료를 우송해 주었다. 이러한 후의는 당시의 나에게 큰 격려였으며 용기와 분발을 일깨워 주었다고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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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인조인간을 가리키는 말, 한 때 우리 나라 텔레비젼에서도 방영되었던 미국의 TV영화 '우주가족'에 보면 정교한 로봇이 등장하여 충실한 하인 구실을 하고 있다. 본래는 체코의 극작가 '차벡' (1890-1938)이 희곡 'R·U·R' (Rosssum's Universal Rovots, '로섬이 만든 만능 로봇'의 뜻, 1923)에 나오는 인조 인간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남의 뜻을 좇아 움직이는 주체성 없는 인간을 가리켜 '로봇'라고도 한다. 국가나 대기구가 일부 인간의 이익에 이용될 경우 곧 잘 그 표면에는 로봇적 인물이 자리를 장식한다. '로봇 시장' 로봇 장관' 등 모두 다 그런 무리의 인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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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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