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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46 호
단기 4340. 3. 2 (음력 01.1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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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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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김유정 문학정신 다채롭게 기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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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1년 앞두고 기념행사 '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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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 출생. 1935년 소설 '소나기'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중외일보에 각각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폐결핵에 시달리면서 29세를 일기로 요절하기까지 불과 2년 동안의 작가 생활을 통해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길 만큼 문학적 정열이 남달리 왕성했다. 작품으로는 데뷔작 '소나기'를 비롯해 '금따는 콩밭', '봄봄', '따라지','만무당', '솟', '안해', '동백꽃' 등 수십 편의 주옥 같은 단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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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문학제 '봄봄'·본사 주최 백일장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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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문학촌(촌장 전상국) 운영위원회는 지난 23일 춘천 김유정문학촌 생가에서 회의를 열고 올해 사업계획에 대해 협의했다. 박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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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단편소설의 금자탑을 세운 김유정 선생 탄생 100주년을 1년 앞두고, 올 한해도 그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다채로운 행사가 춘천 김유정문학촌을 중심으로 연중 이어진다. 김유정문학촌(촌장 전상국)은 지난 23일 문학촌에서 운영위원회를 열고 올해 기념사업 계획을 마련했다. 올해에는 특히 제5회 김유정문학제가 내실있게 펼쳐지고, 처음으로 청소년 문학축제 '봄봄'이 새로 만들어져 청소년에게 김유정의 문학정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4월27일부터 사흘동안 열리는 김유정문학제는 올해부터 춘천시 단독주최로 개최돼, 명실상부한 춘천의 축제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문학제에서는 김유정 재조명 학술세미나와 산문백일장, 소설입체낭송대회와 함께 김유정기행열차, 문학현장답사, 김유정소설 속 캐릭터 찾기, 닭싸움, 풍물시장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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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정 선생 탄생 100주년을 1년 앞두고 올해 다양한 사업이 펼쳐진다. 사진은 본사가 주최한 '김유정 백일장'에 참가한 학생들이 김유정문학촌에서 글쓰기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 본사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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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26일 열리는 청소년문학축제 '봄봄'에서는 김유정소설 속편쓰기, 김유정 작품 속 인물에게 편지쓰기와 김유정 작품인물 캐릭터 그리기 등 청소년들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꾸며진다. 강원도민일보사가 김유정문학촌과 함께 참신하고 역량 있는 작가를 발굴해온 '김유정 소설문학상'은 올해로 13회를 맞아 김유정의 문학세계를 사랑하는 역량 있는 기성 작가들과 참신한 신예작가, 문학도들의 많은 참여를 기다린다. 10월엔 김유정소설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제15회 김유정백일장이 개최돼, 김유정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청소년들의 창작 의욕을 북돋운다. 김유정문학촌은 이밖에도 제69주기 김유정 추모제(3월), 김유정문학캠프(7월), 김유정을 비롯한 향토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순회문학강연(9~10월) 등 행사를 마련한다. 10월엔 '소설의 고향을 찾아가는 문학기행'이 문학촌과 산국농장, 경춘선 열차에서 치러지고, '김유정 소설을 테마로 하는 삶의 체험'이 이어진다. 삶의 체험에서는 전통혼례식과 민속놀이, 농요부르기대회 등 테마가 있는 기획행사가 펼쳐져 전국의 방문객들과 시민들에게 훈훈한 문학의 잔치를 선사한다. 전상국 김유정문학촌장은 "올해는 김유정선생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 뜻깊은 해"라며 "작은 행사 하나라도 시민들이 즐겁게 참여하며 그의 문학정신을 새길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수영 sooyou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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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다른 운전자들에게서 정중한 대접을 받으려면 경찰차를 모는 수밖에 없다. / H.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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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三十五章 (노자 - 도덕경 : 제3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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執大象, 天下往, 往而不害, 安平太. 樂與餌, 過客止,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집대상, 천하왕, 왕이불해, 안평태. 낙여이, 과객지, 도지출구, 담호기무미. 시지부족견, 청지부족문, 용지부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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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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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다섯째 장
직역
큰 이미지를 잡으면 천하를 움직일 수가 있다. 움직여도 해가 없으니 편안하고, 평등하고, 안락하다. 즐거운 음악과 먹이는 지나가는 사람을 멈추게 한다. 도가 입에서 나오면 담백하여 그 맛이 없다. 보아도 만족하게 볼 수 없고, 들어도 만족하게 들을 수 없으나, 그것을 사용해도 궁하지 않는다.
해석
천하를 장악하고 싶은가. 그럼 큰 이미지를 잡아라. 이미지는 무엇인가. 분화되기 전의 모호한 그 무엇이다. 즉 구분되어 있지 않음을 뜻한다. 큰 이미지는 도의 다른 표현이다. 천하를 얻고자 한다면 도를 잡아라. 도를 얻으면 천하를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천하를 움직여도 남들에게 해가 없다. 그것은 왜 그런가. 도로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칼과 돈으로 천하를 움직이면 어딘가는 삐그덕 한다. 불만이 쌓일 수 있다. 그러나 도로 움직이면 천하인이 편안하고 태평할 것이다.
사람은 음악과 음식에 대해서는 민감하다. 자극적이고 맛이 있고, 취미에 맞는 음악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든다. 도는 어떠한가. 누가 도를 말한다. 그 도의 말은 맛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지나가는 여인의 다리에는 관심이 있지만, 도에는 관심이 없다. 더욱이 도는 감각으로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만족하게 보거나 들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귀와 눈으로도 어느 정도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만족한 것은 아니다. 도 그 자체는 아니다. 코끼리의 사진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코끼리가 아니다. 사진일 뿐이다. 하지만 그 사진을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는 있다. 노자가 말을 부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 어떤 사람이 코끼리의 사진을 봤다. 그는 코끼리의 사진만 보았다. 그래서 실제로 코끼리를 보고 싶어서 아프리카에 갔다. 거기서 그는 거대한 코끼리를 보았다. 그러자 코끼리를 총으로 쏴 죽였다. 그리고 돌아와서 이야기했다. "코끼리는 아프리카에 있지도 않아. 그곳에는 엄청나게 큰 괴물만 있어. 이 사진 속에 있던 이렇게 작은 코끼리는 없었다. 아마 그놈이 다 잡아먹었을 것이다." 웃기는가. 말 같지도 않은가. 아니면 무엇인가 생각을 하게 하는가.
도덕경은 도덕경의 한문을 외우고 자구를 외우면서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경전이 아니다. 자신의 삶과 의식이 바뀌어야 하는 경이다. 도덕경을 줄줄 외우면서 자랑을 한다. 나는 노자에 대해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는 사진 속의 코끼리를 가지고 그 부분 부분을 나누어 설명을 한다. 그러나 정작 살아 있는 코끼리를 만나면 도망을 간다. 왜 너무 크니까. 자신이 알고있는데로 초식동물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는가. 도덕경을 외우는 일은 쉬운 일이다. 오천여 자밖에 안된다. 그러나 도덕경의 내용대로 사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자기의 변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노자를 마셔라. 그래서 자신의 삶이 되게 하라. 코끼리의 사진만 보고 그 사진 속의 코끼리만 들여다보지 마라. 코끼리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아프리카에 가서 코끼리를 타 보아라.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사진도 없이 코끼리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남에게서 들은 코끼리에 대한 의미 없는 이야기만 주절거린다. 그리고 자신은 코끼리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진리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보고 듣는 것은 이차적이다. 관심이 촉발되었으면 도에 흡입이 되어라. 지식으로 알지 말고 삶으로 구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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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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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대상을 잡는 이가 있다면 천하는 그에게로 돌아갈 곳이다. 그에게로 가면 해롭지 않고 안락하고 태평하다. 감미로운 음악과 맛있는 요리로 사람을 불러모은다면 지나가던 나그네도 발길을 멈추게 된다. 도에서 나오는 말은 담백하여 별다른 맛이 없다. 그것은 보아도 보이지 볼 만한 것이 못되고, 들어도 들을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그것은 무궁무진하므로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다함이 없는 것이다.
주
대상: 도는 형상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볼 수는 없다. 다만 마음의 눈으로 그려볼 수 있다. 그래서 이미지 즉 상이라 표현한 것이다. 상은 상과 뜻이 같음. 안평태: 안락하고 편안하다는 뜻임. '태'는 '대'로 기술된 판본도 있으나 뜻은 같다. 이 경우 '대'는 '태'로 읽어야 한다. 악여이: 음악과 맛있는 요리. 기: 다하다.
해
성인은 도를 체득하여 어진 정치를 베푼다면 만백성이 모두 그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천하는 안락하고 태평하여 백성들은 다투어 격양가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화려한 선율의 음악이나 미각을 짜릿하게 하는 산해진미는 지나가는 길손의 발길도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 쾌락일 뿐 계속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것일수록 빨리 싫증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도에서 나오는 말은 아무런 자극적 요소가 없다. 그것은 담박하여 맹물과 같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의 눈, 코, 귀, 혀 등의 감각 기관을 자극할 수 있는 개미와 짜릿한 흥분 같은 것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도는 우주 내의 모든 것을 차별 없이 포용하며, 생명이 있는 것에 대하여는 자기 나름의 생을 구속 없이 누리게 하여 감싸주고 덮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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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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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된 유덕사터 석불좌상
일제의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는 헌병과 총칼을 앞세운 무단정치로 악명 높은 식민지 통치자였다. 그러나 그는 이 땅의 문화재 보호에 있어서는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 공포와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등 적절한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1915년의 총독부박물관 설립과 고적·유물의 수집·연구, 전문가를 동원한 연차적인 고적조사, 그밖에 개인적으로 진상받아 총독관저에 갖고 있던 삼국시대의 최대 걸작 불상의 하나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 과 기타 소장품 일부를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총독부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사실 등이 그러한 평가의 근거가 돼 있다. 그러나 이 데라우치도 만 6년 동안의 총독 재임기간 중 이 땅의 각종 문화재와 미술품을 무수히 혹은 진상받아 일본으로 빼돌린 후, 자기 고향에 '조선관' 이라는 개인 수집품 진열관까지 세웠었다는 내막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구나 그 진열관 건물 자체가 서울의 경복궁에서 계획적으로 뜯어간 것이었다는 사실은 데라우치가 얼마나 이중적인 식민지 통치자였던가를 입증해주고도 남는다. 작고한 이홍직 교수가 1964년에 써서 남긴 (재일 한국문화재 비망록)에 다음과 같은 말이 언급돼 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그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하기에 막대한 (한국의) 미술품과 전적을 수집해서 경복궁 안의 건물까지 이건하여 '조선관' 이라 칭하고 거기에 보관하고 있어서 유명하였는데, 그후 이것은 산일되어 지금 그 일부가 야마구치 현립 단기여자대학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밟혀져 있지 않다."(사학연구,18집)
1913년께의 일이었다 데라우치 총독이 경주를 순시하던 중에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로 있던 오히라라는 일본인의 집 정원에서 아주 품위 있는 신라시대의 완전한 석불 '석가여래좌상' 을 목격하고 몹시 탐을 내는 눈치를 보였다. 그리고 며칠 후의 일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데라우치 총독은 그의 관저(당시 남산 밑의 왜성대) 정원 한쪽에 경주의 오히라 집에서 본 그 탐나던 석물이 어느새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동시에 눈치 빠른 오히라의 충성스런 소행에 미소를 금치 못했으리라. 하룻밤 사이에 경주에서 서울의 총독관저로 진상된 그 석불좌상은 오직 좌대부의 하대석만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후 1939년에 그 하대석을 찾으려고 경주로 내려갔다가 결국 실패한 총독부박물관의 한 조사자가 그때 현지에서 확인한 다음과 같은 과거의 상황을 복명서에 적고 있다.
"데라우치 총독이 경주를 순시할 제 그 석불을 보되, 재삼 되돌아보며 숙시하기에 당시 소장자였던 오히라가 총독의 마음에 몹시 들었음을 눈치채고 즉시 서울 총독관저로 운반하였다고 함."
그 석불은 본시 경주 시외인 월성군 내동면 도지리에 있는 유덕사터에 남아 있던 유물이었다. 그것을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거리낌없이 저지르던 수법 그대로 불법반출해다가 자기집 마당에 버젓이 놔두고 자랑하던 오히라가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하여 서울로 올라온 '석조석가여래좌상' 은 계속 남산 밑의 왜성대에 그대로 전해지다가 1927년에 경복궁 뒤에 총독관저(지금이 청와대)가 신축되자 그리로 옮겨져 갔고, 현재도 청와대 숲속 침류각 뒤의 샘터 위에 잘 안치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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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10장 고뇌와 병과 죽음
1.고뇌하는 삶
인간은 유한한 시간적 존재이다. 우리는 눈 앞에 전개되고 있는 풀 곤충 새 나무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태어났다가 죽기 마련이다. 태어나고 죽으면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영원이라는 극단을 또 한편으로는 허무라는 극단을 맞대하고 있다. 니체는 인간을 "신과 짐승 사이의 중간존재"라고 말했지만 이것을 다시 풀어서 말하면 인간은 "영원과 허무 사이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영원도 아니고 허무도 아니지만 영원과 허무 사이의 삶이므로 이미 영원과 허무에 물들어 있다. 우리들은 매일매일 반복하여 세상을 무의미하게 "지나치며"살아가고 있다. 일상 생활의 특징인 "지나침"을 우리는 일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장소는 일상성이다. 나는 반복되는 일상성을 반복하기만 할 뿐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일상성은 허무로 충만되어 있다. 우리들이 서서히 일상성을 빠져나오기 시작할 때 일상성은 고뇌와 고통으로 물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우선 감각적인 환경 속에서 갖가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대하고 있다. 매일매일의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은 "무엇"을 듣고 보고 만지고 맛보며 또한 이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며 말한다. 이 "무엇"은 감각적인 환경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은 일정한 안정된 모습을 소유하지 않는다. 예컨대 어제의 친구나 애인의 모습은 그저께의 모습과 다르며, 오늘날 그들의 모습은 어제의 모습과 다르다. 삶과 세계에 대한 나의 앎도 어제는 확실한 듯했으나 오늘은 전혀 불확실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서의 나의 믿음이 지난날에는 불변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근거없이 흔들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변하는 "무엇"을 알려고 하고 믿으려고 하며 느끼려고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학문과 종교와 예술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무엇"은 인간의 삶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피안의 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여기와 지금이라는 인간의 한계 상황을 떠날 수 없다. 우리가 인간의 삶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출생 이전이나 또는 사망 이후의 신비스러운 피안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제한되고 규정되어진 여기, 지금의 삶을 가리킨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인 고생대나 십만 년 또는 백만 전 후의 미래가 거론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이곳의 인간의 삶과 연관된 한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다. 우리들의 현실적인 삶은 지나간 날 그곳의 삶과 아울러 앞날 저곳의 삶을 함께 머금고 있다. 우리들 인간의 삶은 여기, 지금의 삶임을 면할 수 없다. 여기는 저기와 저기를 넘나들며 지금은 아까와 이따가를 오락가락한다. 여기이면서 저기와 거기를 엿보고 저기와 거기는 언제나 여기라는 장소에서 저기와 거기라는 명칭을 획득한다. 따라서 여기와 지금은 변치 않는 영원한 공간과 시간이 아니라 갈등하는 여기와 지금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의식은 바로 여기,지금의 구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갈등하는 의식이다. 지금이 아까와 이따가를 오락가락하고 여기가 거기와 저기를 넘나드는 데서부터 인간의 의식에서, 인간의 삶에서 고통과 고뇌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인간은 고뇌와 고통으로 휩싸인 존재이다. 고뇌는 시간적인 아픔이며 고통은 공간적인 아픔이다. 물론 고뇌와 고통은 주어진 시간,공간 안에서의 삶의 일상성인 아픔이지만, 고뇌는 흐름 속에서의 아픔이고 고통은 주로 특정한 육체적인 부분에서 생기는 아픔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일정한 상황에서 고뇌하며 육체의 일정한 부분에서 고통을 느낀다. 가정과 나라가 불안할 때, 애인의 마음이 변했을 때, 나의 장래가 불확실할 때 고뇌하며, 머리나 배나 팔다리에 이상이 왔을 때 고통을 느낀다. 고뇌와 고통의 본질적인 현상은 다름아닌 병에 집약된다. 인간의 삶은 고뇌와 고통이라는 일상적인 갈등과 모순 속에 던져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들 각자는 절대적인 행복과 영원한 절대자의 꿈속을 동경하여 마지않는다. 일상적인 삶의 세계 안에서 모든 사람은 고뇌를 넘어서서 환희의 차원으로 고통을 극복하여 기쁨의 세계로 그리고 병을 극복하여 건강한 상태로 전환하고 상승하려고갈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은 병의 현상을 뛰어넘어 영원히 건강한 상태에 안주할 수 있을까? 고뇌와 고통, 즉 병은 언제까지나 변치 않는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일상성으로 머무를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은 어둠없이 밝음이 그리고 밝음없이 어둠이 있겠느냐는 물음과 같은 성질의 물음이다. 이와 같은 물음을 되뇌이면서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한층 더 병과 환자라는 일상적인 현상에 관한 본질적 해명이 도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직접적 현실적인 삶에서 우리는 보다 더 삶의 현상을 가깝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무엇"을 그리고 "어떤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떤 것"은 감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일상성이다. 왜냐하면 자기 반성의 여지가 가능치 않은 감각의 세계에서 인간과 인간이 마주 대하고 있는 대상, 나아가서는 인간들이 직면하고 있는 무수한 대상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한낱 묵묵히 있기만 하고 아무런 생명력있는 의미를 가져다줄 수 없는 환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환경은 그저 있어서 그 속에서는 하등의 자기의식도 발생하지 않는다. 환경을 대표하는 것은 반복하는 일상성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환경은 기능적인 세계이다. 보다 많이, 보다 빨리, 보다 배부르게 작용만 하면 그것으로 족한 차원이 기능 및 작용의 세계이다. 우리들은 현대를 어느 때보다도 일상성에 극단적으로 물들어 있는 시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현대는 기능의 사회, 작용의 세계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능의 차원에서는 질이 아니라 양이 중요한 것으로 등장한다. 기능의 세계에서는 참다움과 허위, 좋음과 나쁨, 옮음과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이 2차적인 것으로 된다. 그러나 인간은 기능으로 향하는 의식과 아울러 기능과는 반대로 인격체인 주체로 향하는 의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이며 자기 결단을 할 수 있는 실존적 존재일 수 있다,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어떤 것"이 단지 환경으로만 그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이 일상성이라는 개념을 짊어지고 고뇌와 고통의 균열로 전환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수단적인 기능 이외에 반성하는 의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시간적 아픔 그리고 공간적 아픔이 의식화 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고뇌 및 고통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환경 및 일상성은 이미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감각적 대상으로서의 무기적인 의미와 스스로를 부정하여 전체성의 세계로부상하기 시작하는 고뇌와 고통이라는 개방적 측면에서의 유기적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고뇌와 고통은 벌써 균열하기 시작하는 삶을 보여준다. 삶의 일상성이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 고뇌와 고통의 진통이 시작된다. 병은 병든 인간, 곧 환자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환자와 병은 따로따로 분리되어서 고찰될 수 없다. 좁은 의미에서의 환자란 정신적 내지 육체적 질병에 걸린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의 환자란 지금까지 자기에게 친숙했던 세계 관계 및 삶의 방향을 상실한 자를 말한다. 환자의 특징은 세계 상실과 세계 소외에 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암 환자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환자이기 이전의 건강한 이 사람에게는 항상 친밀하게 느껴지는 가족과 친지와 벗들과 안정된 직장이 있었다. 이 사람이 암에 걸린 후 상황은 어떻게 변하는가? 지금까지 전혀 거리감 없이 친했던 가족 친지 직장 등의 대상들은 모두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위치하게 되고 그는 그러한 세계로부터 이탈되고 만다. 환자는 제일 먼저 환경으로서의 일상성 중에서 가장 일상적인 허무 앞에 서서 허무를 체험한다. 이제 환자에게는 지금까지의 삶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곧 허무로 체험된다. 다음으로 환자는 여기,지금에서 거기와 저기 그리고 아까와 이따가를 흔들거리며 오락가락하는 그림자 앞에서 점차로 불안해진다. 지금까지의 세계에 대한 자신의 관계 태도 해답 등 모든 것은 끊임없이 동요하게 되고 따라서 그는 현기증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길 수밖에 없다. 신체의 어느 특정한 부분이 공간적으로 아프든 아니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흐름으로서의 사건 앞에서 정신적으로 아프든간에 고뇌와 고통은 이전에는 환자가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병이라는 무겁고도 어두운 그림자로 다가와 그를 짓누른다. 병은 죽음이라는 입을 벌리고 허무와 절망의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환자의 내면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우리는 환희 앞에서는 환호하지만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한 발짝씩 다가오는 병 앞에서는 창백한 모습으로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없다. 병은 환자에게 너무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병의 어두운 그림자 앞에서 환자는 아무런 선택도 결단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자유, 다시말해서 모순과 갈등 속에서 과감히 스스로의 삶의 방향과 의미를 결단할 수 있는 내면적 자유가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만 보인다. 병의 현상을 철학적인 차원에서 고찰하는 것은 의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인 차이가 있다. 의학 심리학 사회학에서는 병을 부분적인 현상으로 취급하지만 철학의 차원에서는 삶과 세계라는 전체적인 연관성에서 병을 탐구한다. 그러므로 병을 인간의 삶 및 세계라는 전체적 차원과 연관시켜서 고찰할 경우에만 병의 참다운 본질적 모습이 드러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생명을 내포하고 있는 씨앗이 늘 씨앗이라는 고정 불변하는 환경으로만 정지하여 있지 않음과 마찬가지이다. 씨앗은 싹을 내고 싹은 가지와 잎과 꽃으로 스스로를 펼쳐 나가서 드디어는 다시금 새로운 씨앗을 맺게 된다. 다시금 자신으로 돌아온 씨앗은 전체를 체험한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병에 물들어 있는 삶이다. 공간은 무한히 연장되고 시간은 예견할 수 없이 변화하여 인간의 삶에는 고뇌와 고통이 쌓이기 마련이다.
인간의 삶은 언제나 밖에 드러난 상황에 스스로를 맡기고 있다. 따라서 환자는 병이 깊어갈수록 매일의 생활에서 자신에게 익숙해 있던 상황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다. 드디어 환자는 세계 소외를 맛보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친숙했던 세계가 전혀 낯선 것으로 허무와 죽음의 입을 벌리고 다가온다. 그러나 병이 극단적으로 깊어져서 삶 속에서 절규로 등장할 때 환자는 이제야 비로소 병의 의미를 그리고 세계의 의미를 묻기 시작한다. 병이 극단적으로 깊어지면 병은 환자의 가장 내면에 감추어진 자기 반성을 촉발시킨다. 환자는 지금까지 일상성 속에서 망각했던 자기 반성의 힘을 환기시키고 서서히 병과 삶의 의미를 반성하기 시작한다. 그는 "어떤 것"으로서의 병이 도대체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병이란 전체성으로서의 세계안에서 과연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병이란 또한 오로지 끊이지 않고 허무와 죽음을 향하여 치달리는 삶의 부정적인 측면인가? 그러나 병은 인간의 삶에서 이중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절대적인 허무나 절대적인 삶이 무의미하듯이 절대적인 병이나 절대적인 건강 역시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존재 방식은 삶의 전체적인 "관계" 안에서 비로소 의미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은 언제나 건강을 전제로 하며 또한 건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병의 이중성에 눈길을 돌리는 일은 앞에서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여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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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샌님
본뜻 : 샌님은 생원님이 줄어서 된 말이다. 생원은 원래 과거의 소과에 합격한 사람을 부르는 말이었는데, 후대로 오면서 나이 많은 사람을 대접하는 존칭으로 쓰이곤 했다. 생원은 대개 공부도 많이 하고 행실도 점잖기 때문에 그 같이 점잖은 사람을 가리켜 '생원님'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바뀐 뜻:오늘날에 와서는 숫기가 없고 조용하며 사교성이 없는 성격의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서낭당
본뜻 : 서낭은 마을의 터를 지켜 주는 신인 서낭당이 붙어 있는 나무를 가리키는 말이다. 서낭신은 원래 성황에서 온 말로서 한 나라의 도성을 지져 주는 신이었으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토속 신으로 변하여 마을의 수호신이 되었다. 이 같은 유래 때문에 아직도 마을 어귀에 서낭신을 모셔 놓은 곳을 서낭당, 성황당, 성황단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바뀐 뜻 : 우리 조상들은 서낭신을 마을과 토지를 지져 주는 신으로 믿고 섬겨 왔는데, 마을어귀 큰 고목나무나 바위에 새끼줄을 매어 놓거나 울긋불긋한 천을 찢어 달아 놓고 그 옆작은 집에 서낭신을 모셔 놓은 당집을 서낭당이라 했다. 때로는 당집 없이 큰 고목나무에 울긋불긋한 천이나 새기가 매어 있는 것만도 서낭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람들이 서낭당 앞을 지날 때는 서낭신에게 행운을 빌며 돌을 하나씩 쌓아 놓기도 하고, 잡귀가 달라붙지 말라는 뜻에서 침을 뱉고 가기도 한다.
서울
본뜻 : 서울은 본래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서라벌, 서벌, 서나벌 등으로 부른 데에서 비롯한 말이다. 서울의 '서'는 수리, 솔, 솟의 음과 통하는 말로서, 높다, 신령스럽다는 뜻이며, '울'은 벌, 부리가 변음된 것으로, 벌판, 큰 마을, 큰 도시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바뀐 뜻:서울은 한 나라의 수도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의 수도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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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군림하나 통치하지 않는다
영국은 17세기 중반에 일어난 청교도 혁명기를 제외하고 줄곧 왕정을 유지했다. 외국 군대에 의해 점령당한 적이 없어서 국왕은 평온하게 정치를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국왕이 제위 계승권이 있는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으면 외국에 있는 먼 친척이 영국 왕으로 '초빙'되는 경우가 흔했다. 예를 들어 12세기의 헨리 2세는 프랑스에서 왔다. 17세기 초반에는 당시 독립국이었던 스코틀랜드왕국의 제임스 6세를 모셔다가 제임스 1세로써 영국 왕을 삼았다. 18세기의 조지 1세는 독일에서 왔다. 조지 1세는 독일 하노버가의 군주였다. 할머니가 영국 국왕의 딸이라는 인연 때문에 특별히 영국 옹으로 선택된 것이다. 물론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독일인이었고, 그 자신도 또한 독일에서 자랐기 때문에 1714년 아내와 함께 영국에 건너와 왕위에 올랐지만 영어로 말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왕으로써 정사를 잘 돌보기가 어려웠다. 언어 장벽 이외에도 영국에서는 왕권이 17세기에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을 거치면서 약화되었다. 국왕은 반드시 의회의 통제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국왕의 권한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조지 1세는 직접 정치를 하기보다는 재정장관 월폴에게 모든 것을 맡겨 버렸다. 월풀은 수상으로 불렸고, 의회와 상의하면서 국정을 운영했다. 이런 통치방식은 후에 영어를 말하는 국왕이 있을 때에도 계속되었다. 국왕은 단지 왕으로서의 지위만 취하고 통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는 관행이 굳어진 것이다. 영국은 지금도 이 원칙을 따르고 있고, 다른 유럽 국가들도 시기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원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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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나의 닻을 내리고
아벨라르. 흔히 사랑을 환상이라고들 말합니다. 사람마다 그 마음 속에는 완전한 인간, 완전한 사랑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 그곳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이 현실 속의 어떤 순간에 신기루처럼 나타나 영혼을 사로잡고, 일종의 도취 상태를 빚는 것이 사랑이라고들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이상적 남성 혹은 여성상을 마음 속에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환상의 얼굴을 그 사람에게 씌워 놓고 그를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현실 속에 있는 상대의 실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꿈꾸어 온 사랑의 환영을 사랑하는 것이 보편적인 사랑의 시작이라고들 하지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해 가는 동안,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의 단점이 발견되고, 자기가 생각해 온 이상적 인간형에서는 거리가 먼 결함 투성이인 현실 속의 인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어떤 이는 실망과 환멸로 그 사랑의 막을 내리고, 다시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르는 이상의 사람을 찾아 방황을 하게 됩니다. 아벨라르. 언젠가 당신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이제 방황이 끝났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름답고 슬픈 영화 속에서, 혹은 비극적인 소설 속에서, 또 감미로운 음악 속에서, 수없이 스치고 간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처럼 찾아 헤매던 나의 사랑이 당신을 통하여 비로소 현신해 왔고, 나는 이제 나의 닻을 내리고 당신 곁에 정박하려 합니다. 환영이 아닌 실재하는 사랑으로서의 당신을 나는 가슴 가득히 껴안고, 이 사랑을 키우고 가꾸어 갈 것입니다. 당신의 단점이나 결함마저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맹목을 축복해 주십시오. 타인의 눈에는 단점으로 보이는 것까지도 내게는 소중하고 유일한 것으로 보이는 이 사랑을 축복해 주십시오. 당신에게 결함이 있다면 나의 노력으로 그것을 보완하며, 또 나의 결함을 당신으로부터 보완 받으며 나는 이 삶이 끝날 때까지 나의 사랑을 지킬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을 가꾸고 키워 나가고자 하는 이 귀한 의지를 환상을 찾아 헤매는 도로에다 어찌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은 유일하며 가장 밝고 높은 촛대로서 내 속에 계십니다. 우리의 고려가요 중에는 그의 님을 가장 높고 귀한 존재로 비유한 노래가 있습니다.
이월 보로매 아으 노피 현 등불 다호라 만인 비취실 즈이샷다. (2월 보름에 아, 높이 켠 등불 같아라 만인을 비추실 얼굴이어라)
삼월 나며 개한 아으 만춘 들 욋고지여 느미 브롤 즈을 디녀 나샷다 (3월 지나면서 핀 아, 늦은 봄달 오얏꽃이여 남들이 부러워할 모습을 지니고 나셨도다)
고려의 여인은 그의 님을 이토록 높이 칭송하며 기리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님은 어느 때고 등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봅니다. 자기의 님이 혼자만 우르러 보는 사람이 아니고 `만인을 비추실 얼굴`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 혼자에게만 아름답게 보이는 얼굴이 아니고, `만인이 부러워할 모습`임을 흐뭇해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남에게 칭송을 들을 때 마치 자신이 칭찬을 받는 것만큼 으쓱하고 자랑스러운 기분, 언제나 남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얼마나 상대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심정입니까. 만인을 비출 등불과 같은 모습으로, 만인이 부러워할 의젓한 모습으로 그의 연인을 가슴 속에 새기고 있는 자는 복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벨라르. 사랑하는 방법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심정은 어느 시대고 같은 감정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시나 노래 등 많은 작품과 일화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머언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노래하지 않았던 시대가 없었고, 사랑의 사건이 없었던 시대가 없었으며, 오늘날처럼 삭막한 시대에서조차도 사랑은 아름답고 지고한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음을 볼 때, 인간이 그 생존을 지속하는 한 결코 사랑은 소멸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를 니지고 있는 듯합니다.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며, 사랑한다는 것은 사는 것을 배우는 일`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에 나는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아벨라르. 사랑을 통하여 진실하게 사는 법, 충만하게 사는 법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나를 비춰 주고 인도하며 깨닫게 함으로써 `2월 보름에 높이 켠 등불 같이`, 어둠 속에서도 내가 당신을 우러르며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높이 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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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임진왜란 그리고 운명적인 한일교류
강항 헌창비
지금의 일본땅 시소쿠, 이요의 작은 교토라고 불리우는 에히메현 오즈 시에 가면 강항과의 인연을 소홀히 하지 않는 이 고장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씨와 만날 수가 있다. 4백여 년 전 강항이 포로로 머물렀던 오즈 성의 언덕에서 도보로 내려오면 오즈 시 문화회관에 이르는데 그 광장 왼편에 강항을 기리는 현창비가 서 있다. 화강석으로 된 비면에는 '홍유 강항 현창비'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고 그 하단에는 검은 오석판에 강항의 연보가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또 현창비 왼편에 두 개의 비문석을 따로 세웠는데 놀랍게도 똑 같은 크기의 비면에 일문과 한글로 비문을 새겼다. 일문의 제목은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유학자 강항의 비'라고 적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왕조 시대의 뛰어난 강항은 풍신수길이 조선에 재출병하였을 때 후지도 다카도라 군에 잡히어 두형(준, 환) 및 가족들과 함께 이여 대주에 연행되었습니다. 십 개월에 걸친 대주성에서의 강항 선생의 생활은 학자로서 우대 받고 금산 출석사의 중들과의 교유 한시의 창수로 나날을 보내는 자유로운 신분이었습니다. 경도 후시미의 후지도 저택으로 압송되면서부터 에도 유학의 개조가 되는 후지하라 세이카, 용야성주 아카마쓰 히로미치, 해운왕 요시타 소앙 등과의 자유로운 교제 속에서 세이카는 사서오경 왜훈을 완성하였습니다. 강항 선생과 두 형 등 십여 명이 사서오경의 대자본을 필사하고 거기에다 세이카는 왜훈을 붙여서 간행하였습니다. 근세 일본 사상사의 전환기에 강항 선생과 후지하라 세이카의 우정은 일본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였으며 세이카가 유학자로서 자립할 수가 있었음은 강항 선생에게 힘입은 바라고 생각됩니다. 강항 선생이 일본 유학사상에 미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1990년 3월 연파 김용석 필사'
이 현창비가 세워지게 된 데는 일본의 오즈 시 시민들과 한국의 영광 군민들이 힘을 합쳐 건립기금을 모금한 탓도 있지만, 강항의 인품에 매료된 무라카미 쓰네오라는 한 일본인의 헌신적인 노력과 봉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라카미 씨는 오즈 시의 호적과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는데, 실로 우연히 오즈 시를 찾은 외국인 1호가 조선 유학자 강항이라는 사실에 착안하고, 그에 대한 사료를 조사하던 중에 "간양록"을 읽게 되었다. 그는 "간양록"에 적힌 강항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강항의 고향인 한국의 영광까지 다녀오는 등 그의 학문과 인품에 매료될 만큼 한일양국의 문화교류에 열정을 쏟게 된다. 결국 무라카미 씨는 자신의 직장인 오즈 시의 호적과를 물러나와 "간양록"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는 강항의 발길이 머물렀던 모든 곳을 완전하게 답사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고, 강항이 오즈에서 탈출하던 행로까지 찾아내면서 해당지역에 표석을 세우는 등 지나간 역사를 오늘에 되새기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는 또 '수은 강항 선생 행적지 순례단'을 조직하여 한. 일 양국의 방문객들에게 몸소 안내역을 자청하기도 하였으며, "유학자 강항 선생"이라는 저서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강항의 출생지인 한국의 영광과 포로생활에 시달렸던 일본국 에히메 현의 오즈시에 강항 선생을 기리는 현창비가 건립되고, 그 제막식에 두 도시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교대로 참석하는 등의 아름다운 광경이 연출된 것은 한. 일 양국 문화교류의 원류를 밝히려는 무라카미 쓰네오 씨가 뿌린 씨앗에 싹이 트고 꽃이 피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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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사업이 일조일석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때 곧잘 쓰이는 유명한 말은 스페인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지은 '돈키호테'에 나온다. 로마는 티베리스 강변의 조그만 도시국가에서 출발하여 이태리 반도를 정복, 마침내 지중해 주변을 모두 지배하기에 이르러 지중해를 '우리들의 바다'라 부를 정도의 대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오랜 역사와 수 많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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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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