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145 호
단기 4340. 2. 28 (음력 01.11)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
한 마디 |
|
|
문학소식 |
|
|
글터 → 명언 / 격언 |
다른 사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행은 자기의 부를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 벤저민 리즈레일리(영 정치가)
|
|
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三十四章 (노자 - 도덕경 : 제34장)
|
大道氾兮, 其可左右. 萬物恃之而生而不辭, 功成不名有. 衣養萬物而不爲主. 常無欲, 可名於小.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 以其終不自爲大, 故能成其大.
대도범혜, 기가좌우. 만물시지이생이불사, 공성불명유. 의양만물이불위주. 상무욕, 가명어소. 만물귀언이불위주, 가명위대. 이기종불자위대, 고능성기대.
|
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
서른 넷째 장
직역
큰 도는 범람하는 물과 같아서 좌로도 우로도 갈 수 가 있다. 온갖 것은 그것에 의지해서 생겨난대도 말하지 않는다. 공이 이루어 져도 이름이 있지 않다. 온갖 것을 입히고 기르면서도 주인의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항상 바램이 없기에 작다고 이름 할 수 있다. 온갖 것이 돌아가지만 주인의 행동을 하지 않으니 가히 크다고 이름할 수 있다. 끝내 스스로 크다 하지 않으니그러므로 능히 그 큼을 이룬다.
해석
물은 길을 따라 흐른다. 그때에 물은 좌로 가고 우로 간다. 그러나 범람하는 물은 길이 없다. 형식이 없다. 좌와 우를 구분하지 않는다. 도는 범람하는 물이다. 좌우를 구분하지 않는다.
온갖 것이 도에 의지하지만 도는 여관비를 받지 않고 재워 준다. 양육비를 청구하지 않고 키워 준다. 그리고 이렇게 되어라 저렇게 되어라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서 지켜보기만 한다. 그리고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었어도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켜볼 뿐이다.
욕심에 없기에, 드러내지 않기에 작게 보일 수 있다. 하찮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온갖 것이 돌아오는 곳이지만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다. 바다가 강물을 보고 너는 내종이니 내말에 따라서 움직여라. 너는 아직 바다의 자격이 없으니 기다려라. 바다가 강물을 막는다. 그럼 바다가 바다로 존재하는가. 바다가 큰 이유는 강물을 막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크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교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럼 우주는 비교할 것이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는 크다고 한다. 넓다고 한다. 진정으로 큰 것은 비교할 필요도 자랑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
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
34.
위대한 도는 흘러 넘치는 물처럼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어느 곳에나 퍼져 있다. 만물은 그것을 의지하여 살지만, 도는 그들을 거절하지 않는다. 공을 이룩하고도 그 명성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만물은 옷처럼 감싸고 길러 내지만 이를 주재라고 하지 않는다. 도는 언제나 욕심이 없으므로 작은 것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그러나 만물이 그에게로 귀의하건만 이를 주재하지 않으니 큰 것이라고 명칭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도는 끝내 스스로 크다고 자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능히 그 큰 것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주
범혜: 물이 흘러 넘치는 모양. 우주 만상의 어느 곳에나 골고루 스며 있는 도의 편재 성을 잘 표현한 말임. 장자에도 '도가 어디 있느냐?' 하는 동곽자의 물음에 대하여 장자는 어느 곳이든 없는 곳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막연하니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하는 그의 재촉에 대해 장자는 도는 청개구리와 개미에 있다고 하였다. 도가 하등동물에 있다는 장자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하는 동곽자에 대하여 도는 와벽(기와, 벽돌)과 뇨닉(오줌)에 있다고 말하여 그를 노엽게 하고 있다. 이것은 도의 편재 성에 대한 우문현답이다. 의양: 옷으로 몸을 감싸고 음식물로 몸을 자라게 하는 것. 의피로 된 파본도 있고 애양으로 기술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음.
해
이 장에서 노자는 도의 편재 성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도는 우주 만물의 구석구석 그 어디에나 스며 있지 않은 곳이 없다. 도의 마음이 비고, 고요하며, 언제나 욕심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작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는 우주의 삼라만상을 생성케 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공덕으로 생각하거나 자랑할 줄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를 크다고 칭송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주 만상의 구석구석 어디에나 스며 있는 도의 항존성과 편재 성에 대해 노자의 일원론적 발상은 불가의 우주론과 유사한 면이 있다. 하나가 모두 되고 모두가 하나 되며, 하나가 일체가 되고 일체가 하나 되며, 한 티끌 가운데 대우주 들어 있고, 대우주 티끌마다 낱낱이 또한 같네. (의상 조사 법성계에서) 독자는 의상 조사의 우주의 본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이 노자의 그것에 상당히 접근되어 있음을 수긍할 것이다.
|
|
|
글터 → 국사
|
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한송사터 석조보살좌상의 수난사
한일협정으로 1966년에 일본정부가 한국에 반환한 과거의 약탈 및 불법반출 문화재 가운데는 일부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5점의 불상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그중에 귀국 즉시 국보 제124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희귀한 백대리석 조각품인 보살좌상이 있다. 좌고 92.4cm, 목이 부러졌으나 깨끗이 붙였고, 이마의 백호로 끼워졌던 큰 보옥을 누군가에게 탈취당했을 때의 상처를 제외하면 거의 완전한 형태의 걸작 미술품이다. 원위치는 강원도 강릉시 성내동의 한송사터. 1880년께의 어느날 밤, 무서운 태풍으로 절간 건물들이 완전히 찌부러진 뒤로 백옥(백대리석)으로 만든 불상 둘과 비신을 잃은 귀부만이 남았더라는 전설의 절터이다. 동해안의 황량한 한송사 절터의 두 백옥불상(보살좌상) 중의 하나는 머리가 부러져 나간 데다가 오른쪽 팔도 무참히 깨져 나간 상태였으나 또 하나는 크게 파손된 데가 없는 완전한 상이었다. 완전한 보살좌상은 한송사가 폐사가 된 후, 즉시 인근의 칠성암이란 작은 암자에서 가져갔다. 그것은 사암 사이에 흔히 있는 자연스런 이전이었다. 그리고 약 30년이 지났을 때 그 완전한 백옥불상을 찾아 일본으로 빼돌리려는 일본인 무법자가 나타났다. 한일합방의 직후인 1911년 3월의 일이었다. 당시 강릉 측후소의 기사였다는 설이 있는 와다라는 일본인이 한송사터의 모래밭에 몹시 파괴된 불완전한 형태로 버려져 있던 백옥불에 완전한 짝이 있었다는 말을 듣자 한 마을사람을 잡고 만일 그 행방을 수소문해서 알려주면 후하게 사례하겠다고 은밀히 유혹했다. 돈이 유혹을 받은 마을사람은 즉시 사방으로 탐색한 끝에 마침내 그 소재지를 확인해냈다. 그 정보는 즉각 와다에게 제공되었고, 반출음모는 당장 행동으로 옮겨졌다. 그는 한송사터에서 약 30리 떨어진 언덕의 칠성암을 곧바로 찾아갔다. 그리곤 암자를 지키고 있던 중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한송사터에서 옮겨온 불상을 양도하라고 윽박질렀다. 거부했다가는 어떤 화를 입게 될지 몰라 겁을 집어먹은 중은 겨우 "불상을 천좌시키려면 반드시 격식을 갖춘 예불의식을 가져야 한다" 는 조건을 말했을 뿐이었다. 일본인 악당은 매수금으로 미리 준비했던 몇 푼의 돈을 칠성암의 허약한 중에게 집어주고는 암자 밖의 풀숲에 모셔져 있던 걸작 백옥불상을 아무런 장애 없이 탈취할 수 있었다. 그때 이미 머리는 부러져 있었다. 탈취자 와다는 그것을 본국 정부에 대한 충성과 자신의 입명출세를 계산한 이용물로 삼을 속셈이었다. 그는 장정 두 사람이면 거뜬히 들 수 있는 좌고 1m 미만의 석불을 어렵지 않게 주문진 선착장으로 운반한 후, 배에 실어 도쿄의 제실박물관(지금의 국립박물관)으로 직행시켰다. 1911년 10월의 일이었다. 그후 이 석불은 '재선와다가 기증함' 이란 카드와 함께 55년 동안이나 도쿄국립박물관에 진열돼 있었다. 이상이 1966년에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며 일본정부가 한국에 반환한 문화재들 속의 걸작 대리석 조각품으로 귀국 즉시 국보가 된 '석조보살좌상'의 수난의 내력이다. 다행히 강릉에서의 불법반출 당시의 확실한 기록과 내막이 1912년 1월에 발행된 일본의 (고고학잡지)에 소개돼 있어 일제 초기의 맹랑한 일본인 악당이었던 와다의 범행 내막을 정확히 알 수 있는데, "그때 그 불상의 반출자인 재선 모씨(와다를 지칭)로부터 발견 및 반출경위를 들었다" 는 일본인 필자는 또, "불상이 (강릉에서) 도쿄로 반출된다고 할 때에 나는 그 보물을 볼 수 있었다. 기념으로 사진도 찍었다" 고 덧붙이고 있다.
[한송사지석조보살좌상 - 국보 제124호]
한편 와다는 머리와 오른팔이 깨져 나간 탓으로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유린당하지 않고 한송사 옛터 모래밭에 그대로 남아 있던 불완전 백옥불까지도 강릉 측후소 마당에 실어다 놓았다. 그 상태만으로도 귀중한 고려시대의 백대리석 조각품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오랫동안 강릉시 명주군청 마당에 옮겨져 있다가 현재는 강릉향토사료관에서 보호되고 있다. 보물 제81호로 지정돼 있다.
[한송사지 석불상 - 보물 제81호]
|
|
|
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9장 현실과 이상의 갈등
4. 미래지향적 의사 소통
우리의 문화 문명이 시간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한에 있어서 우리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미래 지향적인 의사 소통에서 점차로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변증법에 의해서 세계를 설명하려 하였고 마르크스는 변증법에 의하여 세계를 개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변증법은 분명히 세계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변화시킨다. 인간은 무엇으로써 이러한 변증법을 표현하는가? 인간은 행동에 의하여 변증법을 표현한다. 행동은 이해하고 표현하며 체험함으로써 자신을 변형시켜 나간다. 개인으로서의 인간들이 의식의 자발성을 반성할 때 개인은 인격체로 전환되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인간 상호간의 미래 지향적 의사 소통에 맞설 수 있다. 미래지향적 의사 소통이란 인격체의 반성된 행동이다. 사실상 우리들은-자금,이곳에 제한시켜서 말할 경우-경제 문화 정치 종교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겪고 있다. 그 괴리가 너무도 지나치기에 우리들은 만성적으로 되어 무감각한 자신을 바라보기까지 한다. 간단히 요사이 대학가에서 많이 나도는 자율이라는 개념 하나만을 예로 들어보자. 자율이란 책임과 의무와 권리를 지닌 인격체의 자유로운 행동이다. 그러나 자율 개념을 사회와 대학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 한 개념에서도 우리들은 우리들이 처하고 있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실과 이상의 갈등을 극복할길은 전혀 없다는 말인가? 이미 이 절에서 그리고 앞부분에서 나는 갈등을 갈등속에서 극복하는 것이 참다운 의미에 있어서의 갈등의 극복이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행복이라는 단어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5.갈등의 극복은 가능한가
과연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극복하는 것은 가능한가?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넓은 의미에서의 사상적인 맥락이 겪는 불협화음만은 아니다. 더 깊이 파헤쳐 보면 그것은 삶 자체의 괴리이며 인간 의식의 괴리이다. 그것은 또한 본능과 이성과의 괴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앞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암시적으로 언급된 것처럼 인간 의식의 이중성을 인정하지 않고 어느 한쪽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택할 때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더욱더 커지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나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화가와 음악가의 예를 듦으로써 이 글을 마칠까 한다. 화가는 작은 화폭의 제한성 속에서 무한한 미술의 세계를 표현한다. 음악가 역시 제한된 시간 속에서 무한을 연주한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본질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인식할 때 인간 의식은 점차로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이 자기 반성을 할 때 비로소 의식은 부분과 전체에 대한 통찰력을 얻으며 자신을 행동으로 표현한다. 인간 의식이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대한 자기 반성을 할 때 현실과 이상의 거리는 점차로 좁혀진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의 거리는 언제나 남아 있기 마련이다.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이중성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삼삼하다
본뜻 : 이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음식 맛이 조금 싱거운 듯하면서 맛이 있다는 뜻과 잊혀지지 않아 눈에 어린다는 뜻이 있다. 음식의 맛이 삼삼하다는 표현은 주로 어머니나 어른들이 많이 쓰고 있는 반면에,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는 삼삼하다는 말은 문학작품 속에서나 찾아볼까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쓰고 있지 않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주로 위에서 설명한 본뜻보다는 사람이나 물건이 멋있게 생긴 경우에 감탄의 뜻을 나타내는 속어로 쓰인다.
삿대질
본뜻 : 삿대를 저어 배를 가게 하는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뀐 뜻 : 사람들이 싸울 때 손가락으로 상대방을 향해 내지르는 품이 뱃사공이 삿대를 이리 저리 놀리는 품과 비슷하다 하여, 오늘날에는 상대방을 향해 함부로 손가락질을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샅샅이
본뜻 : '샅'이란 본래 두 다리의 사이나 두 물건의 틈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서 사람의 국부를 가리키는 '사타구니'나 마을에 들어서는 좁을 골목길이나 골짜기의 사이를 가리키는 '고샅'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샅샅이'란 부사도 여기에서 나왔는데 평소에는 보기 어려운 구석지고 은밀한 곳을 두 번 연거푸 반복함으로써 '모조리, 하나도 빼지 않고'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바뀐 뜻 : '틈이 있는 데마다', '이 구석 저 구석 빈틈없이 모조리 다'의 뜻으로 쓰인다. 바꿔 쓸 수 있는 말로는 '이잡듯이' '구석구석' 등이 있다.
|
|
|
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군주는 인민의 제1의 종
북부 독일 발트해에 인접한 추운 땅에서 일어난 프로이센은 근대 국가들 가운데 뒤늦게 출발한 나라 중의 하나였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톡릭의 대립으로 시작된 30년전쟁(1618-1648)과 그후의 혼란 상태를 시재적 배경으로 해서 프로이센은 서서히 유럽의 강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당시 후진국인 프로이센이 부상하기 위해서는 군사력과 강력한 국왕의 지도력이 필요했다. 이 일을 담당하고 나선 것이 '군인왕'이라고 불린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재위 1713-1740)였다. 즉위하자마자 군사력을 더한층 강화해야 한다고 호소한 그는 "짐은 프로이센의 장관이며 장군이다."라고 언명하며 행정개혁과 군사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프로이센에서는 전통적으로 귀족들이 군의 중추였다. 귀족들이 강력한 왕의 등장을 원할 리가 없었다. 따라서 빌헬름 1세는 국방력의 토대를 평민에게서 구하려 했다. 그는 평민으로부터 병사들을 모아 강한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귀족의 자제들은 장교로 임명했다. 국왕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이밖에도 조세와 법률제도를 개편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을 다른 절대주의 국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군국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 재위 1740-1786)은 이러한 군국주의 국가 프로이센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프로이센에 새로운 전통을 심어 주었다. 학문과 예술의 보호자로서 독특한 이미지를 부각시킨 것이다. 대왕은 젊었을 때 프랑스에서 초대된 철학자 볼테르의 가르침을 받아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교양인으로 길러졌다. 그는 1739년 "반 마키아벨리즘"을 완성해서 볼테르에게 감수를 부탁하기까지 했다. 그가 즉위한 해에 네덜란드에서 익명으로 출판된 이 책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군주는 인민의 제1의 종."이라는 말은 "국가, 즉 그것은 나다."는 루이 14세의 말과는 대조를 이룬다. 스승인 계몽 사상가 볼테르의 가르침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프리드리히는 철인왕이라는 명예로운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또한 그는 동시대 오스트리아의 요셉 2세와 함께 볼테르의 계몽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이성을 중시한 계몽군주들의 전형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 정치가 그의 사상대로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엄격한 경찰제도를 만들어 반대파를 억누르고 국민의 불만을 강압적으로 다스렸다. 다른 한편에서는 매우 독재적인 국왕이었던 것이다. 또한 마키아벨리즘의 반대자였던 그는 즉위하자마자 대외적으로 노골적인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그가 통치한 18세기 중반에서 후반까지 7년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프로이센이 이익을 위해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전통은 프리드리히 대왕도 어쩔 수가 없었던 듯하다.
|
|
|
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아벨라르. 당신은 청마 유치환(1908`1967) 시인을 알고 계시지요.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그는 여류시인 이영도에게 무려 5천여통의 사랑의 편지를 띄었고, 그가 작고한 후 그 편지는 이영도의 손에 의하여 책으로 엮어져 나와, 그 아름답고 절절한 편지 구절이 다른 모든 이들에게 널리 읽혀졌습니다. 그 시절의 이영도를 가까이에서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는 나도, 그의 청초하고 수심어린 외모에 은연중 이끌렸던 적이 있습니다. 일찍이 혼자가 되어 오직 시를 쓰는 일과 딸 하나를 키우는 일에 전념하면서 어느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이영도는 그 당시의 많은 남성 문우들로부터 선망을 받고 있던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이영도가 혼자의 몸으로, 그렇게 꿋꿋하게 그의 시와 딸을 지키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청마 유치환과의 애정에 크게 힘 입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이영도로 하여금 외로움과 여러가지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받쳐 주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청마를 향한 그리움은 그의 시를 시들지 않게 해준 충분한 자양이 되었습니다. 청마의 편지는 마치 한 편의 산문시와도 같은 리리시즘(Lyricism)으로 가득차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뿌듯한 감동을 느끼게 해줍니다. 후에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책으로 묶여져, 그 수익은 이영도의 뜻에 따라 후진 양성을 위한 `시조시인상` 기금으로 희사된, 청마의 연애편지 중 한 편을 당신에게 보냅니다. 두 시인의 아름다운 사랑을 더듬으며 사랑이 가지고 있는 절절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한번 새겨 보면서 나의 사랑도 언제까지나 아름답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정향!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 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 같으면서도 만리길입니까? 끝내 만리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아벨라르. 이토록 애타게 울부짖는 청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죄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와 하던 청마, 사랑하면서도 언제나 같이 있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손에 잡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런 시도 썼지요.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 <행복> 중에서
청마는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먼 길을 달려서 단 한두 시간을 이영도를 만나기 위하여, 그의 휴일을 온통 다 써 버렸던 정열의 시인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길들은 잘 포장되어 있지 않았고, 버스는 느리기만 했습니다. 서로 다른 지방에서 직장을 가지고 있던 청마와 이영도는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주어진 시간을 오직 서로 만나는 일로 가득 채우기 위하여 먼 길을 하루 종일 버스를 타야 하는 번거로움을 조금도 괴롭게 생각하지 않았고, 도덕적인 제약과 한국적 모럴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사랑을 마음 깊은 곳에 성상처럼 모셔놓고 살았습니다. 이미 두 사람 모두 고인이 되었고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사랑은 후배를 키우는 확실한 결실로서, 해마다 몇 사람씩 이 땅을 밝히는 시인으로 태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이토록 세상을 밝게 비추는 촛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 깊고 아득한 의미에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됩니다. 아벨라르. 다시 나는 청마의 시를 빌어서 나의 그리움을 당신께 보냅니다.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유치환 <그리움> 중에서
|
|
|
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임진왜란 그리고 운명적인 한일교류
* 나의 평생에 한 마디의 말을 체득하고 있는데, 그것은 나의 허물을 말해 주는 사람은 곧 나의 스승이요, 나의 좋은 점을 말해 주는 사람은 곧 나의 해적이라는 그 말이다. (금성)
간양록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조선총독부는 "간양록"을 분서로 지정하였다. 간행되어 있는 서책을 걷우어 불태우는 일은 문화를 말살하는 가장 비열하고 저급한 일이라 진시황과 같은 전대미문의 폭군들이나 저지르는 일이지만, 간악한 조선총독부는 일본 민족의 치부를 들추어 냈다 하여 "간양록"을 불살라 버리고자 하였다. 일본의 극우파나 삐뚤어진 지식인들, 특히 보수성향의 정치인들은 지금도 제 나라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의 내용을 왜곡하는 일을 다반사로 여기며, 조선침략을 미화하려는 파렴치를 심심찮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결여된 역사 인식은 아이러닉하게도 한국인들을 크게 분노하게 하였고, 마침내 '독립기념관'을 건립하게 하는 등 결집력을 날 세우는 일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대체 "간양록"에 적힌 내용이 무엇이기에 조선총독부가 그토록 불태워 없애고자 하였을까. 그 진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저자인 강항의 행적을 더듬어 보아야 할 것이다. 강항은 세조 때의 큰 문장가였던 사숙재 강희맹의 5대손으로 1567년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에서 태어났으며 자를 태초라 하고, 호를 수은이라 하였다. 일곱 살 때 맹자 안질을 하룻밤 사이에 읽어 버릴 정도의 신동이었던 강항은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좌랑을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을 때, 임진왜란의 침상을 체험하게 되었다. 때마침 고향에 내려와 있던 강항은 정유재란을 당하면서 두 사람의 형과 함께 왜장 후지도 다카도라 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땅 이요 주, 지금의 시고쿠 에히메 현의 나가하마로 끌려갔다가 곧 오즈 성으로 옮겨졌으며 그곳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된다. 비록 고관 대작은 아니었다 해도 조선 조정의 관원이었고, 또 주자학에 통달한 기개 있는 선비인지라 미개하고 보잘것없는 왜국 땅에서 포로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죽기보다 더한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한 연유로 여러 차례 탈출을 시도하게 되지만, 실패만을 거듭하다가 2년 뒤인 1598년에는 교토의 후시미에 있는 번주의 별저로 이송되어 치욕의 포로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간양록"은 저자 강항이 적지에서 보고 들은 왜국의 실상과 왜인들의 무지한 모습을 소상히 적어 주군인 선조 임금에게 올리는 상소문 형식으로 된 글이다. 비록 1597년을 전후한 왜국의 실상을 적었다고 할지라도 그 내용이 워낙 소상하고 적나라하여 오늘을 사는 일본인들에게조차 수치감을 불러일으키게 할 정도라면, 당연히 한국인들에게는 자부심을 부추기는 내용이 아니겠는가. 조선총독부는 바로 이 점을 두려워하여 "간양록"을 거두어 불태우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란 무심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어서 "간양록"의 초간본은 오히려 일본의 내각도서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아울러 그 귀중한 내용을 불태워 없애고자 하였던 조선총독부의 만행까지를 함께 적어서 전하고 있음에랴.
강항이 포로로 잡혀가 있을 때의 일본 문화란 문자 그대로 한심한 것이었다. 예컨대 도자기는 옥과 같이 귀한 것이라 지배계급인 상급무사들의 다기로 사용되었을 뿐, 일반 서민들은 밥그릇에서 물통에 이르는 모든 생활용구는 목기로 된 것을 쓰고 있었다. 또 백성이라고 불리우는 상민들은 평생을 잡곡으로만 살아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살림을 꾸려 가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문자를 터득한 사람들이 또한 많지 않아서 학문은 그 개념조차도 정립되어 있지를 않았고, 따라서 인쇄술 등도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오랜 전국시대를 겪으면서 살았던 탓에 무기를 만드는 기술만은 조선에 비길 수 없을 만큼 발달되어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였으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특히 정유재란 때에 이르러 여러 휘하의 장수들에게 주인장을 내어 도공, 인쇄공, 학자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올 것을 명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일본에서는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한다.
풍신수길의 주검
오즈에서의 포로생활을 2년 남짓 보낸 강항은 번주의 별저가 있는 교토의 후시미로 옮겨졌지만, 후시미는 시골과 달라서 식자들이 더러 있었다. 비록 포로의 신분이었지만 강항의 인품과 학덕이 알려지면서 그의 휘호를 받겠다는 사람과 글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강항은 그들의 도움으로 비교적 편안한 삶을 도모할 수가 있었고, 글씨를 판 돈이 모아지면 다시 배편을 마련하여 고국으로의 탈출을 시도해 보지만 그 결과는 언제나 실패만 거듭될 뿐이었다. 그러나 강항은 낙담하지 않은 채 다시 글씨를 팔아서 탈출자금을 마련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 강항의 문하로 입문을 청한 사람이 있었다. 그 고장 묘수원(절)의 순수좌라는 승려였다. 여기서 미리 밝혀 두지만 바로 이 순수좌라는 왜승이 후일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는 후지하라 세이카인 것이다. 승려의 신분이었던 후지하라 세이카는 강항으로부터 조선 주자학을 배우면서 그 학문의 깊이에 매료되기 시작한다. 또 후지하라의 후견인이었던 번주용야의 성주인 아카마츠 히로미치, 해운왕 요시타 등도 조선 주자학에 매료되면서 강항과 후지하라의 후견인이 되겠다고 자청한다. 후지하라는 조선 주자학에 빠져들면서 승복을 벗어 던지고 유학자로 변신하게 된다. 그는 몸소 조선 도포를 입고 서책을 대하는 것으로 조선 주자학의 진수를 온몸으로 터득하고자 하였고, 평소에도 유건을 쓰고 있을 만큼 명실상부한 조선 주자학의 신봉자로 자처하더니 마침내 강항이 친필로 써준 "사서오경"에 왜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왜훈'을 달아서 '일본 유학'을 싹트게 하였다. 또 그것은 일본땅에 심어지는 퇴계학의 싹틈이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 유학이 정립되는 알찬 결과를 거두게 된다. 백제 때 왕인으로부터 '천자문'을 전해 받아서 문자를 익힐 수가 있었던 일본이 이때에 이르러 강항의 가르침으로 주자학을 배워서 일본 유학을 싹틔웠다면 그들의 학문적 근원이 어디에서 연유되었는지를 명백히 밝혀 놓는 것이며, 더구나 "간양록"의 내용에는 왜인들의 참담한 생활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데다가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기록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일본인들의 복장을 끓게 하고도 남을 내용을 담고 있다.
도쿠가와 등은 발상하기를 꺼려 하여 이놈의 죽은 사실을 꼭 덮어 두기로 하였습니다. 죽은 놈은 배때기를 갈라 그 안에다 소금을 빽빽이 처넣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같이 꾸미기 위해서 평소에 입던 관복을 그대로 입혀 나무통 속에다 담아 두었습니다.
죽은 시체의 배를 가르고 거기에다 소금을 빽빽이 처넣었다는 구절을 강조하는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살이 있을 때 조선으로 향하는 병사들에게 죽인 조선 병사들의 코와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 오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강항은 그 명령을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람마다 귀는 둘이요 코는 하나야! 목을 베는 대신에 조선놈의 코를 베는 것이 옳다. 병사 한 놈이면 코 한 되씩이야! 모조리 소금에 저려서 보내도록 하라.
조선 병사들의 코를 베어서 소금에 절여 보내라고 하였으니, 죽은 그의 뱃속에 소금을 처넣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강항은 믿었을 것이었다. 지금도 일본국 교토의 번화한 거리에는 조선병사들의 귀를 묻었다는 미미스카(귀무덤)가 그 모습을 자랑하고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이 대목을 쓰고 있을 때 경도의 귀무덤이 한국으로 옮겨질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장사를 치른 다음 그의 위패가 있는 곳에 황금전을 짓고, 그 밑에 '대명일본에 일세를 떨친 호걸, 태평길을 열었으니 바다는 넓고 산은 높다'라고 글을 써 붙였다. 강항은 구경삼아 그곳에 갔다가 그 문구를 뭉개고 다음과 같이 써놓고 돌아왔다.
반생 동안 한 일이 흙 한 줌인데 십층금전은 울룩불룩 누굴 속이자는 것이더냐. 총알이 또한 남의 손에 쥐어지는 날 푸른 언덕 뒤엎고 내닫는 것쯤이야.
우연히 후지하라가 그 앞을 지나가다가 그와 같은 글귀를 발견하고 황급히 뜯어내고는 강항에게 달려와 목청을 높였다. 글귀를 보아서는 분명히 당신이 지은 것인데, 왜 조심성이 그리도 없느냐고 항변을 겸한 충고를 거듭했다고 강항은 적었다. 이 또한 일본인의 수치심을 자극한 내용이 아니고 무엇인가. 일본땅에서 포로생활에 시달리던 강항은 잡혀간 지 4년 만인 1600년에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가 살아서 고향땅을 밟을 수가 있었던 것은 후지하라 세이카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막부의 수장에게 몸소 탄원하여 허락을 받아 낸 때문이었다.
|
|
|
글터 → 이글저글 |
로마는 세 번 세계를 통일했다
로마는 처음에 무력으로 다음에는 기독교로 그리고 세 번째는 로마법에 의하여 세계를 통일했다고 한다. 로마인은 문화적으로 볼 때 희랍인의 아류라고 하나 실용적인 면에 탁월한 재주를 보여 도로, 수도 등의 대 토목 공사를 남겼고 또 로마법을 만들었다. 이 로마법은 유럽제국이 법을 제정할 때 그 본이 되었으며 현대의 법률은 모두 영향을 받고 있다. 물론 우리 나라의 현행법도 예외는 아니다. 이 말은 독일의 법학자 '예링' (1818-1892)이 그의 저서 '로마법의 정신' 첫 머리에 쓴 데서 유명해졌다.
|
|
|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