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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43 호
단기 4340. 2. 26 (음력 01.0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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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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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박사가 되려고 기를 쓴다고초조해 하지 말 것. 사람들이 모조리 박사가 되면 마지막 남은 청소부는 재벌이 될 테니까. / 월터 커넌(기자 뉴스해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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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三十二章 (노자 - 도덕경 : 제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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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賓. 天地相合 以降甘露, 民莫之令而自均, 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知止可以不殆. 譬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도상무명, 박수소, 천하막능신야, 후왕약능수지, 만물장자빈. 천지상합이강감로, 민막지령이자균, 시제유명. 명역기유, 부역장지지, 지지가이불태. 비도지재천하, 유천곡지어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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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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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둘째 장
직역
도는 늘 이름이 없다. 통나무는 비록 작으나, 하늘 아래 신하로 삼을 자가 없다. 제후와 제왕이 능히 이것을 지킨다면, 만가지 것이 스스로 질서 지워질 것이다. 하늘과 땅이 서로 합하여 단 이슬을 내리듯이, 백성들에게 령(법)을 내리지 않아도 스스로 고르게 된다. 제동을 처음 거는 것이 이름이다. 이름이 이미 생겨난 연후에는 대저 그칠 줄 알아야 한다. 그침을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다. 도가 하늘 아래 있는 것은, 온갖 계곡의 시내가 강과 바다에 흘러 들어가는 것에 비유된다.
해석
도는 이름이 없다. 노자는 계속해서 위정자들에게 충고를 하고 있다. 노자는 어떤 이유 때문에 군왕들에게 충고를 하는가. -왜 그럴까?-
통나무는 작으나 누구에게도 복속하지 않는다. 왕이라고 해서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있을 뿐이다. 그것이 자연스럽다. 모든 인간은 통나무와 같은 존재이다. 개개인은 우주적 존재이다. 그 자체로 존귀하다. 그는 누구의 신하가 되지 않아도 된다.
남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때 자신은 존귀하고 다른 사람은 비천하다. 따라서 너희들은 나를 따르라. 그러나 이것은 폭력이다. 도의 행이 아니다. 자신에게 강제되기 싫은 것은 남에게 강제하지 마라. 통나무는 통나무의 삶을 살게 놔두어라. 이것이 정도이다. 왕이 강제로 사람들을 복속시키려 하면 반발이 일어난다. 백성들을 자연스럽게 놔두어라. 그러면 자체적으로 질서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렇게 하지 못했다. 그럼 지금은 이렇게 하고 있는가. 타율에 의한 규제에 대해서 노자는 거부하고 있다. 자율에 의한 규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다스림이다. 법으로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정도이다.
제도, 법이 만들어진다. 그것은 이름이 있고 난 후이다. 이름은 규격품이다. 나는 유재용이다. 이때 나는 더 많은 이름을 가진다. 동양철학과 학생이다. 경기도인이다. 이제 다른 사람과 구분을 짖는다. 나는 동양철학과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과 사람보다 뛰어나다. 내가 하는 학문은 최고이다. 이제 자신은 특별해 지려고 한다. 아니 자신은 특별한 존재라고 자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남은 자신에 비해서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구분을 두지 마라. 이름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지 마라.
도는 바다와 같다. 그것이 낮은 계곡이건-낮은 신분이건- 높은 계곡 이름난 산에서 흘러나온 약수이건 가리지 않는다. 일단 바다에 들어오면 무슨 산 무슨 약수라는 이름은 사라진다. 바다에서 자신이 무슨 산 무슨 약수임을 고집해 보아라. 그때 그 물은 바다와 단절이 된다. 우리는 바다에 떠다니는 약수이다. 자신이 누구임을 고집한다. 그것이 이름이다. 그 이름을 버릴 때 바다 가된다. 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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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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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도는 영원히 이름이 없다. 박은 비록 작지만 천하의 그 누구도 감히 신하로 부리지 못한다. 만일 임금이 도를 간직 할 수 있다면 천하 만물은 스스로 그에게 물려들 것이며, 하늘과 땅은 서로 사랑하여 단이슬을 내릴 것이며 백성들은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가지런하게 될 것이다. 원목이 갈라지고 다듬어져서 여러 가지 기물이 만들어지듯이 만물은 생성되면서부터 자신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유한 자로서의 한계성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만족할 줄 알고 그쳐야 할 시점에서는 그쳐야 하는 것이다. 만족과 그침을 알면 결코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도가 천하에 머물러 있는 것은 비유하면 시냇물과 골짜기의 물이 강과 바다로 흘러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주
도상무명: 도는 인간의 감각 작용에 포착되지 않는 초월적 존재이다. 그것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실체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에 어떤 구체적인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도라는 명칭도 편의상 임시방편적인 것에 불가하다. 그러므로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다고 기술한 것이다.
감로: 단 이슬, 현명한 천자가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대를 이루면 하늘이 감명을 받아 상서로운 징조로 단 이슬을 내린다고 함. 자균: 저절로 가지런하게 된다. 모든 일이 질서와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음. 지지소이불태: 만족하여 그칠 줄 알면 결코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과도한 욕망은 화를 불러들인다는 것이 노자 생활 철학의 일관된 생각이다. 지지가이불태로 된 판본도 있다.
해
도는 형상이 없으니 볼 수가 없다. 그것은 또한 소리가 없으니 들을 수가 없고 형체가 없으니 잡을 수도 없다. 그러한 도를 우리는 딱 무엇이라고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 기관의 지각을 거부하고 있는 그것은 만물의 배후에 스며 있는 형이상학적 실체이다. 그것을 없다고 말한다면 논리적인 모순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만물은 도에 의하여 생성되고 유출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각할 수 없는 세계와 감각할 수 있는 세계는 근원적으로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 도는 산에서 갓베어낸 통나무와 같이 인위적인 요소가 없는 순수하며 소박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적은 존재로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산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것을 지배하거나 예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의 임금이 도를 체득하여 무위자연의 다스림을 베풀 수 있다면 천하의 만백성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다투어 모여들 것이다. 천지, 음양은 서로 화합하고 친화하여 단이슬을 내릴 것이며 만백성은 위에서 지시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잘 다스려 질 것이다. 원목이 잘라지고 다듬어지면 우리가 일상생활에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그릇이 만들어진다. 도에 의하여 생성된 만물도 자신의 이름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유한성에 대한 지각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한계성, 유한성에 대한 깨우침은 만족과 그침을 알게 해준다. 만족과 그침을 모르는 인생은 스스로 파멸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도가 천하에 머물러 있는 것은 강과 바다의 시냇물과 계곡 물의 관계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냇물과 계곡 물은 저절로 강과 바다로 흘러드는 것이다. 무위자연의 정치에는 천하 만민이 스스로 몰려와 제도 행정을 마련하지 않아도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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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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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삼국시대 최대의 걸작 금동반가사유상
앞에서 세키노 박사의 불상 관계 강연과 당시 어떤 일본인이 입수해 갖고 있던 삼국시대의 귀중한 금동불상에 대해 언급한 아사가와는 또 이런말을 쓰고 있다.
"흠명천황 때(일본 역사의 6세기 중엽)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상과 경전이 일본으로 '도래'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백제의 옛 땅인 부여지방에서 아스카(일본 역사의 6∼7세기 문화)식의 불상을 찾아 구해 봤더니 과연 그런 것들이 출토되는 것이다."
일본인 무법자들이 백제의 불상을 찾아 헤매던 때의 짤막한 증언인데, 그렇다고 그들의 발길이 부여 쪽으로만 향했던 것은 물론 아니고, 경주의 신라 유적지와 기타 모든 지역의 절터. 혹은 살아 있는 사찰에도 거침없이 그들의 검은 손길은 뻗쳐나가고 있었다. 역시 한일합방 이전부터였다. 두 패의 일본인 악당들이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정확히 어느 지역의 어떤 절에서 약탈해 온 것인지 일체의 경위를 흐린 채 서울로 불법반출해 온 삼국시대의 최대의 걸작 불상 2구가 있었다. 현재 한국의 국보 중의 국보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2구가 그것이다. 학계가 아직 원위치를 해명하지 못하고 있는 이 두 반가상 중이 하나는 1912년 2월 21일에 이왕가박물관이 2,600원이라는 거액을 지불하고 서울에서 사들였는데, 그때 그것을 판 자는 무법의 약탈자들을 거느리고 있었거나 그들과 긴밀히 접촉하고 있던 고물상인 가지야마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정말 일확천금을 한 운수 좋았던 악당이었다. 총독부는 그의 불법적인 행위를 모른 체하였고, 결국 범인은 누구한테도 그 반가상의 반출지를 추궁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주위의 개인적인 질문에도 원위치와는 전혀 거리가 먼 듯한 다른 지역을 댐으로써 오늘날까지도 전문가들 사이에 수수께끼를 남겼다. 그것은 악당들의 고의적인 증거인멸 술책이었다. 이후 전문가들은 뚜렷한 증거나 자료가 없이 범인들이 작전상 퍼뜨린 것으로 믿어지는 풍문을 따라 불확실한 위치를 말하게 되었는데, 세키노도 "이 반가상은 경주 남쪽 오릉 부근의 폐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고 1933년에 발표한 논문 (조선 삼국시대의 조각)에 쓰고 있다. 이왕가박물관이 그것을 입수할 때에도 반출지는 경주지방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아사가와는 (조선의 미술공예에 관한 회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놀라운 불상이 이왕가박물관의 광채로 모셔지기까지에는 당시 관장이었던 스에마쓰의 고심이 많았는데, 그에게 들은 바로는 출현지로 믿어지는 경주로부터 서울로 올라왔을 때에는 표면을 두터운 호분으로 칠하고 면상을 먹으로 그렸는데 눈꼬리가 처지고 꼬불꼬불한 수염에 까만 눈동자 그리고 입술은 빨갛게 칠해져 고색은 커녕 더럽혀진 흰벽과 같은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런 것을 더운 물로 닦아내고, 금빛을 안정시키기 위해 젖은 거적으로 싸고 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볼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아사가와의 회고담에서 주목되는 것은, 앞의 반가상이 세키노가 풍문에 들었던 것처럼 이름 모를 폐사지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출현'(발견), 곧 어느 살아 있는 사암에 엄연히 전해되던 것을 몰래 약탈, 아니면 협박 혹은 매수하여 서울로 반출해 왔음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세키노의 '경주지역 출토설' 인용을 신뢰성 없는 말로 만들고 있는 것은 1915년에 이네다라는 일본인이 (조선에 있어서의 불교예술 연구)라는 글에서 이왕가박물관의 반가상에 대해 언급한 다음과 같은 증언이다.
"1910년에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는데 삼국시대 말기의 대표적인 미술품이며 세키노 박사도 삼탄하였고, 또 독일의 박물관 기사도 와 보고는 십만 금도 아깝지 않은 진품이라고 하였다."
이네다는 한일합방 전에 한국에 건너와 충남 계룡산에 머물면서 한국의 불교문화와 유물을 조사·연구했던 일본인이었다. 그는 한국말도 꽤 잘했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이왕가박물관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 에 언급하여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다"고 단정적으로 쓴 데는 그만한 확실한 정보와 내막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또 그것이 서울로 올라간 해가 정확히 1910년이었다는 대목도 신빙성 있는 증언이다. 그렇다면 그 반가상은 서울로 불법반출된 후, 2년 동안 몇 다리를 건넜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가지야마라는 일본인 악당이 감추어 갖고 있다가 이왕가박물관의 스에마쓰 관장과 은밀히 접촉한 끝에 2,600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받고 무사히 팔아먹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사가와가, "그것을 박물관이 입수하기까지에는 스에마쓰 관장의 고심이 많았다"고 쓴 회고담은 그때 가지야마가 값을 워낙 호되게 불렀던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3,000∼4,000원쯤 내라고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반가상은 1910년에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다" 는 이네다의 기록은 세키노의 자신 없는 '경주지역 폐사지 출토설' 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다. 만일 경주가 아니라 충남의 어느 벽촌이 정확한 반출지였다면 그 반가상은 신라가 아니라 백제불일 수도 있다는 중요한 가정이 성립된다. 일찍이 고유섭 선생도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그것이 백제의 것인지 신라의 것인지 확실치 않다" 고 회의를 표했었지만 가장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전문가는 황수영 교수였다. 황교수는 1960년의 (역사학보) 13집에 발표한 (백제 반가사유석상 소고)에서 이네다의 증언기록에 주목하면서 대략 다음과 같이 논급하고 있다.
"이네다 역시 정확한 지명이나 전세, 출토의 구별이 없이 충청도 벽촌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벽촌에 있던 이름없는 사암 같은 곳에서 발견, 반출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세키노 박사가 만약 '충청도 벽온으로부터의 출래설' 을 전문의 '경주지역 출토설' 과 함께 기록하였던들 이 유상(반가상)은 신라설에 앞서, 또는 동시에 백제의 것으로도 추정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충청·백제설' 은 전혀 표면화되지 못하고 오직 '경주·고신라설' 만이 유독 신봉되고 고수되면서 일본인 학자들 가운데 거기에 의문을 제게한 사람이 없었다."
이왕가박물관이 문제의 반가상을 입수하던 1912년에 형태와 크기가 거의 같은 또 하나의 걸작 '금동미륵보살반가상' 이 어디선가 불법반출되어 서울에서 거액의 판로를 찾다가 관헌의 주목을 받아 데라우치 총독 관저에 기증형식으로 들어갔는데, 세키노 박사의 기록을 빌리면 그때의 기증자는 후치가미란 자였다. 그의 정체도 가지야마와 같은 일당의 장물아비였거나 고물(문화재) 약탈의 배후의 조종자였던 것 같다. 총독 관저에 들어간 반가상에 대해서도 세키노 박사는 "애석하게도 출처가 명백하지 못하다. 그러나 경상도에서 발견된 것인 듯하다" 고 자신 없는 추측에 그친다. 모두가 일본인 무법자들이 유물의 불법적인 반출지나 출토지를 전혀 말하려 하지 않아꼬, 또 반출 혹은 약탈경위와 증거를 완전히 인멸시킨 때문에 생긴 학계의 안타까운 수수께끼들이다. 데라우치 총독이 일본인 무법자들로부터 기증받아 개인 소유로 총독 관저에 갖고 있던 반가상은 그가 총리대신으로 승격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던 때인 1916년 4월 18일, 총독부박물관(1915년 발족)에 기증되었다. 학계가 알고 있는 걸작 불상을 차마 도쿄로 실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1912년에, 하나는 이왕가박물관에 그리고 또 하나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됐다가 총독부박물관에 들어온 원위치 불명의 두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은 현재 모두 세계적인 명품이며, 국보 제83호와 제78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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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9장 현실과 이상의 갈등
2.의식의 갈등
현대의 사상적 상황이 나타내 주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이다.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산주의 자본주의 기계주의 앞에서 불안과 좌절을 맛보고 있다.이것은 곧 인간에게 있어서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가장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대의 사상적 상황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우리는 돌이나 나무가 또는 꽃이나 벌이 혹은 벌이나 달리 불안과 좌절에 휩싸인다고 말하지 않는다. 돌과 나무와 꽃과 벌...은 불안이나 좌절과는 상관이 없다. 그것들은 "그저 있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은 "그저 있기만"할 수가 없다. 그저 있기만 할 인간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시체에 불과하다. 인간은 그저 있기만 할 뿐만 아니라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한다. 인간은 나와 너와 우리를 느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행동하며 나와 너 그리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의식 존재이다. 인간이 불안과 좌절과 절망을 체험하는 것은 곧 그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유기적 존재인 만은 분명하지만 인간은 의식한다는 점에서 다른 생물과 질적으로 구분된다. 물론 특정한 고등 동물들 역시 지능을 소유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개, 돌고래, 코끼리, 유인원 등은 상당한 수준의 지능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들 중 유인원은 간단한 기구를 제작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들은 외부적인 것이나 내면적인 것이나 내면적인 것을 “대상화”시킬 수 없다. 대상을 의식화하며 대상으로부터 추리하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다. 예컨대 우리들은 한 송이 아름다운 장미꽃을 볼 때 그것을 꺾어서 방에 장식하겠다고 장미꽃을 의식화한다. 또는 장미꽃을 보면서 아름답고 청순한 여인을 연상한다. 이 예들에서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나와 남을 느끼고 생각하며 말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의식은 인간을 인간다웁게 해준다. 의식은 삶의 긍적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며 미래에 대한 설계를 약속해 준다. 의식은 삶의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해 주며 미래에 대한 설계를 약속해 준다. 그러나 의식은 부정적인 힘도 가지고 있다. 의식은 #1나를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키며 #2의식하는 나와 의식된 나를 분리시키고 #3다양한 분리와 충돌은 의식의 갈등과 모순을 초래한다. 무엇보다도 특히 긍정적인 의식과 부정적인 의식의 충돌은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인간을 좌절 절망에 빠뜨리는 갈등이다. 현대의 사상적 맥락이 겪는 갈등의 근원은 다름 아닌 의식이다. 의식은 스스로 분열한다. 그러므로 의식의 특징은 불확실성이다. 의식이 일단 확실성을 붙잡으면 그것으로 끝날 것 같지만 인간의 삶은 부단한 흐름이므로 새로운 상황에 처하면 이전의 의식의 확실성은 다시금 불확실성으로 전환하기 마련이다. 산수를 배우는 어린아이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어린 아이는 처음에 덧셈을 배운다. 어느 정도의 훈련기간이 지나면 어린아이는 웬만한 덧셈에 대해서는 확실성을 가진다. 그러나 다음 단계로 들어가 곱셈이나 나눗셈을 대할 어린아이는 다사 불확실성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의식의 역사는 결국 불확실성으로부터 확실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특히 현대에 들어 와서 심화된 의식의 갈등은 사상적 맥락의 갈등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극단적인 삶의 갈등마저 초래하고 있다. 우리들은 물질적인 일상성에 물들어 매일매일을 숨쉬며 살아가고 있다. 선진국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기판매와 이권이 오고가는 예라든가 지금, 이곳에서 다반사처럼 벌어지고 있는 토지건물 투기와 같은 예들을 들치지 않더라도 우리들의 삶의 온갖 목표가 마치 물질인 것처럼 전개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정신적인 기반에 대한 강한 갈구를 소유하며 동시에 정신적인 토대를 구축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인간의 삶이 갈등을 체험하는 것은 이와같은 의식의 이중 구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의식이 기계적이며 획일적이라면 인간은 하등의 갈등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일단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인간이 극도로 정밀한 기계라면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유토피아가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계는 어디까지나 기게일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고유한 이성이나 정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자극(s-r)의 결과에 불과하다. 즉 말초 신경의 구심적인 자극-반응의 결과로 인간은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일 인간의 두뇌와 신체에 대한 구조가 분명하게 완전히 밝혀진다면 로보트 처럼 인간을 조종 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와 신체에 대한 구조가 분명하게 완전히 밝혀진다면"이라는 문장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나는 몇 가지 물음을 다시 제기해보려고 한다. #1인간의 두뇌와 신체의 구조가 완전히 밝혀진다면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인간의 구조와 신체 구조를 생리적으로 밝힌다는 것인가, 아니면 생리적일 뿐만 아니라 예술적 종교적 철학적으로도 밝힌다는 것인가? #2인간의 두뇌와 신체를 무기물처럼 고정 불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 #3인식과 존재가 전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물음을 제기할 경우 극단적인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어떤 자세를 취할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그들은 #1예술적 종교적 철학적이라는 표현은 생리적이라는 표형으로 환원되며 #2무기물이나 유기물이나 원자와 분자들의 결합이고 #3인식과 존재는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아무리 그렇게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그들 자신이 문제에 접하여 실존적으로 불안과 좌절과 절망에 빠졌을 경우에도 그들은 그것이 단순히 기계작용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사태에 대한 설명은 하고 있되 사태를 이해하며 구성하고 있지 않다. 그들의 이론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말초 신경과 중추 신경의 상호 작용에 의해 의식 현상이 발생한다면, 결국 인간의 육체는 동시에 정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은 육체(기계적인)라든가 아니면 정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인간은 육체이자 정신이며 또한 육체와 정신은 의식을 구성하므로 인간은 의식이다. 육체와 정신은 인간의 이중성이며 바로 의식의 이중성이기도 하다. 인간의 의식은 하나의 통일적인 삶이면서도 동시에 육체와 정신이라는 이중적 구조이기도 하다. 의식이 부단히 흐르면서 통일적인 삶보다 자신의 이중성에 치중할 때 갈등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의식의 이중성은 단지 육체와 정신의 갈등만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대상과 나의 갈등, 나와 너와 우리의 갈등... 심지어는 집단과 집단의 갈등, 의식과 의식된 것과의 갈등마저도 초래한다. 의식의 자기 갈등에 대하여 보다 더 알기 쉬운 예를 들자면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아버지와 아들은 각자가 같은 핏줄임을 알면서도 상호 질적으로 다른 개체이기를 주장한다. 차별성만이 강조되면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식은 양면성을 소유하므로 인간의 자기 갈등은 필연적인 속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자연적인 차원에서 인과율의 지배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자발성의 차원에서 자연을 구성하기도 하므로 자신의 갈등을 절대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언제나 "줄타기 광대"의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은 자신의 갈등 속에서 갈등을 극복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극복이야말로 인간 의식의 자발성에 우러나오는 극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은 또 하나의 갈등이다. 논리적 실증주의와 현상학적 실존주의, 더 나아가서는 공산주의 자본주의 기계주의 등의 상호 갈등과 인간의 내면적인 정신 세계가 이들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체험하는 갈 등등은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삶의 갈등은 절대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무의미한 진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식의 갈등은 갈등 속에서만 해결을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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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떡
본뜻 : 빈대떡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가장 널리 통용되는 설로는 최세진이 쓴 "박통사언해"에 '병저'의 중국식 발음인 '빙져'에서 빈대떡이 나왔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 다음은 옛날 녹두가 귀한 시절에 손님 대접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 내놨던 손님 접대용 음식이란 뜻의 '빈대떡'에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끝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나 곤궁한 사람들이 거리에 넘칠 때 서울의 부자들이 큼지막하고 둥글넙적한 떡을 만들어 빈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데서 유래를 찾기도 한다. 이밖에도 빈대처럼 납작하게 만들어 빈대떡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지만, 아무려면 먹는 것에 빈대의 이름을 붙였을까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말하기 좋아하는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뀐 뜻 : 녹두를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긴 뒤에, 맷돌이나 믹서로 갈아 번철이나 후라이팬에 둥글 납작하게 부쳐 만든 음식을 가리킨다. 요즘은 순수한 녹두만으로 만들지 않고 나물과 고기 등을 섞어 만들기도 한다.
사근사근하다
본뜻 : 사과나 배를 씹을 때처럼 시원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가리켜 '서근서근하'고 하는데, 거기에 사람의 성격을 비유한 말이다.
바뀐 뜻 : 성격이 부드럽고 친절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또
본뜻 : 순수 우리말로 알고 있는 사또는 각 도에 파견된 문무 관리를 이르는 말로 원래 사도라고 불렀다. 이것이 나중에 변하여 '사또'가 되었다.
바뀐 뜻 : 지방의 관리나 각 영의 우두머리 되는 관원을 아랫사람들이 높여 부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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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6. 국가, 즉 그것은 나다
나는 국가와 결혼했다
지금까지 영국 역사상 6명의 여왕이 있었다. 그 중에서 19세기 후반의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와 16세기 후반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세는 대내외적으로 영국의 전성기였다. 엘리자베스는 1533년에 아버지 헨리 8세와 궁정 시녀였던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생모였던 앤 불린과 헨리 8세와의 사랑은 당시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다. 헨리 8세는 독일에서 종교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일고 있을 때 루터를 공격해서 교황으로부터 '신앙의 옹호자'라는 명예 칭호까지 받았던 왕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에스파니아 출신 왕녀인 캐더린과 혼인한 상태였기 때문에 앤과의 밀애는 교회법에 위배되었다. 그러나 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헨리 8세는 왕비 캐더린과 이혼하고 앤과 재혼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는 교황에게 이혼을 승인해 주도록 요청했던 것이다. 교황도 웬만하면 헨리의 요청을 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캐더린이 루터파와 싸우고 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이모였기 때문에 황제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교황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헨리 8세는 앤과의 결혼을 강행했고, 로마 교황은 이를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사태가 이쯤 되자 헨리 8세는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를 기화로 교황과 관계를 끊고 독자적인 종교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1534년에 의회에서 수장령을 통과시켰다. 영국교회를 로마 교회에서 독립시키고 영국 옹이 영국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한 것이다. 이로써 영국 국교회가 성립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어머니 앤은 후에 헨리의 눈에 벗어나 처형당하는 불행한 운명을 맞았다. 국가적으로도 종교적 정치적 갈등은 계속되었다. 왕위를 두고 각 정파가 서로 다투었으며, 왕이 바뀌면 반대파가 숙청되는 사태가 반복되었다. 엘리자베스가 1558년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왕이 될 때까지 그런 상황은 계속되었다. 어머니의 비극적인 운명 탓인지 그녀는 일생 독신으로 지냈다. "나는 국가와 결혼했다."는 것이 그녀의 대답이었다. 물론 그녀를 둘러싼 연애설은 끊임없이 궁정의 화젯거리였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귀족들이 얼마나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가는 월터 롤리의 에피소드가 잘 말해 준다. 그는 어느 날 여왕과 함께 가다가 진흙길이 나오자 자기의 새옷을 깔아 여왕이 잘 지나가게 했다는 것이다. 에스파니아 국왕이 공개적으로 그녀에게 구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죽을 때까지 독신을 고수했다. 처녀 여왕은 영국 국민에게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별의 여왕' 또는 '요정의 나라에서 온 여왕'이라고도 불렸다. 매우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왕관을 머리에 쓰고 호화롭게 차려입은 여왕이 퍼레이드를 하면 런던 시민들은 열광했다. 엘리자베스는 문예정책에 크게 힘을 써서 영국 문화를 꽃피웠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해 에드먼드 스펜서, 벤 존스 그리고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이 이때에 활동했다. 셰익스피어는 여왕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몇 편의 희곡을 쓰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는 엘리자베스 시대가 영국이 대서양의 패자로 부상한 시기였다. 1588년에 영국 해군이 에스파니아의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승승장구하던 에스파니아의 필립 2세의 야망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이로써 유럽에서 에스파니아의 시대가 가고 영국의 시대가 서서히 떠올랐다. 당시 영국인들은 신의 가호가 여왕에게 있다고 믿었다. 탐험가인 오다로리가 북아메리카에 개척한 식민지에 이름을 붙일 때 엘리자베스를 기념하기 위하여 '버지니아'라고 명명했다. 16세기 후반은 영국에 있어서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희망에 찬 시기였다. 그녀가 독신을 유지한 것은 현명한 방책이었다. 당시는 유럽의 군주들 사이에 정략 결혼이 유행하던 시대였다. 만일 엘리자베스가 력혼했다면 왕위계승을 둘러싼 암투가 계속되었을 것이고, 영국은 대륙의 정치적 사건에 휘말렸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진가는 시간이 말해 주었다. 엘리자베스가 죽고 나서 튜더왕조가 끝나고 새로운 스튜어트 시대가 개막되었는데, 다음 왕이 된 자는 먼 친척 뻘 되는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1세였다.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 치세에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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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당신이란 의미
세상의 많은 사물,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특히 내가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이나 사물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순한 사물이나 사람이 아니고 어떤 `의미`가 됩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이름을 갖고 있지만 그 이름은 세상에 자기를 나타내는 기호에 지나지 않을 뿐 특별한 뜻을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나의 연인`이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보편적인 이름이 아니고 나의 운명 속에 자리잡은 하나의 특별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아벨라르. 당신은 나의 눈 속에, 마음 속에, 운명 속에 이미 분명한 하나의 존재로서 꽃 피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고,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견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나의 사고, 나의 능력, 나의 시각, 나의 가치 기준 그리고 나의 생명, 그 자체에조차 깊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은 당신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색깔, 다른 향기, 다른 목적으로 바뀌어졌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 의하여 깊이 영향받고, 그 생활의 설계를 바꾸고, 어떤 것을 꿈꾸게 된다는 것은 바로 그가 세상에 태어난 몫을 충분히 하게 되었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치루어야만 되는 어떤 것 - 비속함을 초월하고 숭고하게 되는 것, 위대한 것에 대한 헌신, 뜨거운 심장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이런 것을 치루기 위하여 당신은 내게로 보내어진 사람입니다. 말로써가 아니고 가슴과 행위로, 안락과 휴식으로써만이 아니라 고뇌와 투쟁으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지키는 일은, 그것을 통하여 내 영혼이 높은 곳으로 상승하는 작용을 하게 해줍니다. 세상의 공리로부터, 타산으로부터, 이기심으로부터 나를 떼어내어 맑고 높은 어느 곳으로 나를 이끌어 주는 당신의 의미는, 마치 부싯돌끼리 강렬하게 부딪쳐 캄캄한 어둠을 한 순간 밝히고 그 불씨를 딴 곳으로까지 옮기는 일만큼이나 빛나는 무엇입니다. 아벨라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만남이 있지만 당신과의 만남처럼 강한 힘으로 나를 뒤흔들어 놓는 만남, 기쁨과 고통의 극단까지 오가게 하는 만남이 또 있을까요? 아, 당신에게 가서 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요. 당신에 내게로 와서 이렇게도 큰 기쁨, 이렇게도 큰 희망, 그리고 이렇게도 큰 그리움과 슬픔이 되는 것처럼, 나도 당신에게로 가서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요.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무엇이라고 나의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로 가서 가장 큰 기쁨과 위로, 최후에 나의 생명을 그것과 바꿀 가장 큰 사랑이 되고 싶습니다. 나의 아벨라르. 이 기쁨과 설레임은 나의 꿈 속에조차 따라와 긴 밤의 어둠을 물리칩니다. 아침에 일어나 뜰에 내려서면 상쾌하게 발목을 적시는 풀잎 위의 이슬들처럼 나의 육신과 영혼을 맑게 적셔 줍니다. 이슬들이 이토록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을, 새벽 바람이 이토록 맑은 향기를 품고 있는 것을, 세계가 이토록 내게 잘 어울리는 한벌의 옷처럼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을, 예전에 나는 미처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향해 열린 창을 통하여 세계를 내다보고,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세계를 알고, 당신의 눈과 마음을 통하여 세계를 인식하는 이 사랑의 신비한 감옥 안에서 아벨라르, 나의 삶은 마치 잘 익은 빵처럼 부풀고 감미로워, 나는 당신을 위하여 알뜰하고 깨끗한 식탁을 마련하고 기다리는 신부가 됩니다. 아벨라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이름, 특별한 향기로 나를 불러 주십시오. 나의 식탁으로 와서 정성들여 마련한 이 양식을 같이 나누고 붉게 익은 포도주를 따루어 다시 시작하는 나의 삶을 위하여 조용히 잔을 들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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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소년 국왕과 대비의 수렴청정
수렴청정
임금이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거나, 반정으로 인해 폐위가 되면 가까운 종친 중에서 왕재를 골라 보위를 이어가게 한다. 전자의 경우 예종의 뒤를 이었던 성종이 그러하고, 헌종의 뒤를 이은 철종이 그러했으며, 철종의 뒤를 이은 고종의 경우가 또한 그러하였다. 후자의 경우는 연산군의 뒤를 이은 중종의 경우가 그러하였고,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의 경우가 또한 그러하였다. 그러나 후사가 있어도 보령이 어린 세자가 보위를 이어가게 되면 대왕대비나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수렴청정이란 어린 임금의 등뒤에 발을 치고, 발 뒤에 대왕대비나 대비가 앉아서 정무를 대행하는 경우를 말한다. 수렴청정은 중국에서도 시행하고 있었으므로 고려왕조나 조선왕조에서는 정치적인 관행이요, 미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는 수렴청정이나 섭정의 기회를 무산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일대 혼란을 겪은 뼈아픈 체험을 한 바가 있다. 문종이 승하하고 열두 살 난 세자가 보위를 이었을 때였다. 그때 왕실에는 대비(세종비)도 중전도 없었으므로 수렴청정은 불가능했지만, 섭정을 세워서 어린 임금을 보살필 수가 있었을 것인데도 대행대왕(승하한 임금의 장례전 호칭)의 고명이 없었다 하여 정승들의 보좌만으로 친정을 도모하다가 수양대군에 의해 주도된 계유정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란을 겪으면서 왕통의 흐름까지 뒤바뀌는 불행을 자초한 것이었다. 세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예종이 일 년 남짓만에 다시 승하하고, 열세 살 어린 보령으로 성종이 보위를 이어가게 되자 대소신료들은 지난날 수렴청정이나 섭정을 두지 않았던 탓에 겪어야 했던 불행한 전철을 다시 밟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대소신료들은 소년 성종의 할머니인 세조비 정희왕후에게 수렴청정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정희왕후는 조선왕조 최초의 수렴청정에 임하게 되었지만, 세조의 총신이자 그녀가 신임하는 훈구대신들인 신숙주, 한명회, 등에 원상의 지위에 있었으므로 그녀의 수렴청정은 그야말로 형식뿐이었고 실제의 정무는 신숙주, 한명회 등에 의해 처결되었다. 정희왕후는 형식뿐인 수렴청정을 오래 고집하질 않았다. 신숙주, 한명회와 같이 믿을 만한 훈구대신들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학덕을 겸비한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가 있었기에 마음놓고 철렴(수렴청정을 걷우는 것)을 선언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조선왕조에서 두 번째로 시행된 수렴청정은 인종 1년 7월1일, 보위를 이은지 겨우 여덟 달째로 들어선 인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문정왕후(중종의 세 번째 계비)소생인 경원대군이 열두 살 어린 나이로 보위를 이어가게 되니 이분이 바로 명종이고 따라서 그의 모후이자 대왕대비인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불가피해진 것이었다. 수렴청정의 전례가 있다고는 하나 세조, 예종, 성종으로 이어지던 3대와 중종 인종 명종으로 이어지는 3대는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세조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은 세조의 총신들이자 자신의 후광을 입고 있는 신숙주, 한명회 등이 원훈들이 막강한 위세로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고, 정희왕후에게는 한점의 사욕도 없었으므로 외척의 발호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중종의 왕권은 반정공신들에 의해 옹립된 것이었기에 세조와 같은 힘의 정치를 구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파벌이 난무하여 조광조와 같은 양식이 있는 인재들이 수없이 참변을 당해야 했고, 게다가 문정왕후에게는 사욕이 있었으며 탐욕의 덩어리와 같은 오라비와 아우가 가세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외척의 발호가 싹트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지를 않았겠는가.
문정 왕후
외척이 성하면 나라가 망한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오늘의 정치현상에 있어서도 대통령의 친인척의 비리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특히 그 처족의 부정이 불러들이는 부도덕의 양상은 치부에만 몰두한 그들 일신의 영달보다 더 큰 패가망신을 자초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정권의 몰락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경험한 바가 있다. 태종 이방원은 외척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하여 구조적인 부조리의 발생 원인을 제거한다는 신념으로 네 명의 처남에게 사약을 내리게 하였고, 임금의 장인인 국구에게까지 자진을 명하는 것으로 외척의 정치참여를 철저하게 차단하였다. 그 결과 세종 시대와 같이 청백리 가득한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엄연한 사실은 오늘을 사는 우리가 역사 앞에서 옷깃을 여며야 하는 당위성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사가의 친형제들인 윤원로와 윤원형 형제를 정치의 중심부로 등장하게 하는 불행의 요인을 안고 있었다. '외척이 성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태종 이방원의 통치이념을 뒤흔들면서 조선조 최초로 외척이 발호하는 악례를 남기게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좌찬성 윤임은 의정부와 양사의 언관들을 총동원하여 먼저 윤원로를 탄핵하기 시작한다. 우선 그 하나만이라도 제거 할 수 있다면, 외척의 발호가 시작되기 전에 윤원형까지도 무력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수렴청정이라는 막강한 위세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문정왕후는 의정부와 육조 그리고 간관들의 벌떼 같은 강청을 물리치지 못했다. 더 밀릴 곳이 없었던 문정왕후는 사가의 오라비 윤원로에게 중도부처라는 중형을 내리고 패배의 눈물을 쏟아야만 했다. 중도부처란 거주지를 지정하여 일정한 곳에서만 기거하게 하는 일종의 유배형이다. 윤원로가 전라도 해남에 안치되자 조정에는 대윤과 소윤이라는 파벌이 생겨나면서 끊임없는 갈등을 되풀이하게 된다. 말할 것도 없이 대윤이란 윤임을 중심으로 한 조정일각의 기득권세력을 말하는 것이고, 소윤이란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신진세력을 말한다. 이른바 정파 갈등이 정치표면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문정왕후를 등에 업은 외척의 실세 윤원형은 비록 참의의 신분이면서도 호조판서 임백령, 병조판서 이기, 예조판서 허자, 지중추 정순봉 등과 결탁하여 윤임을 중심으로 한 영의정 윤인경, 좌의정 유관, 이조판서 유인숙 등 이른바 사림의 청류들을 일거에 제거할 궁리를 한다. 그들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어린 임금과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조정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행사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명종 즉위년인 을사년을 피바람으로 얼룩지게 하였다 하여 '을사사화'라고 이름 붙여진 참변은 이른바 사림의 청류들을 무고, 모함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은 정쟁의 시작이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등에 업은 윤원형 일파가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이 이린 임금을 폐위하고 윤임의 생질인 계림군이거나, 봉성군을 왕위에 추대하려 했다는 실로 어이없는 무고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그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후일의 사가들은 '을사사화'를 평하여 청류의 씨를 말리는 참극이라고 적었지만, 윤원형은 이 사화를 계기로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외척의 실세로 군림하게 된다. 속은 세를 따른다는 속언이 있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거론하면서 '정쟁'이라고 써야 할 자리에 '사색당파'라는 잘못된 표현을 즐겨 쓰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식민지 사관의 잔재가 상존하고 있다는 실증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정쟁의 시초랄 수 있는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바로 윤원형의 집 객사에서 시작되었다면 얼마나 아이러닉한 일인가.
권력의 실세의 집은 예나 지금이나 식객들로 들끓게 마련이다. 기식을 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적극파가 있는가 하면 더러는 눈치를 살피면서 조석으로 드나드는 문안파도 있을 것이다. 왕실의 인척이기도 한 젊은 날의 심의겸이 공무로 영의정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곳에 김효원의 침구가 있음을 알게 되자, "문명이 있는 자도 권문에 아첨하는가!"라면서 그를 멸시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세월이 흘러서 선조 때에 이르러 김계휘가 심의겸에게 김효원을 이조전랑으로 천거하자, 의겸은 그가 '윤원형의 문객이었다'하여 불응하였다. 그후 심의겸의 아우 충겸을 전랑으로 추천하는 사람이 있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척족에게는 전랑을 맡길 수 없다' 하여 극력으로 반대하였다. 이를 기회로 두 사람은 평생을 불목하게 되었는데,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김효원의 집이 지금의 동대문 시장 근처인 건천동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이 지금의 정동에 있었다 하여 김효원을 따르는 사람들을 '동인'이라 불렀고, 심의겸을 섬기던 사람들을 '서인'이라고 부른 데서 조선조의 정쟁이 시작되었다는 설이고 보면 그 당파 싸움의 시발이라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던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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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마르세예즈(La Mrseillaise)
프랑스의 국가, 그 뜻은 '마르세이유의 노래'인데 그것이 프랑스 국가가 된데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있다. 1792년 4월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제국이 프랑스 왕실을 옹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유럽의회는 '루이' 16세에 강요하여 오스트리아에 선전을 포고했다. 그 무렵 프랑스 북부 스트라스부르에 주둔하고 있던 공병 대위 '루제 드 릴'이 의용군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해 작사, 작곡한 것이 바로 이 노래로 처음에는 '라이군의 군가'라 했다. '라이군의 군가'는 급속히 각 부대에 번져갔는데 8월 10일 '루이' 16세가 퇴위하던 날 빠리로 올라온 마르세이유의 의용군이 이 노래를 소리높이 외치며 샹 제리제 거리를 활보하자 빠리 시내에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빠리 시민은 이 노래를 '마리세이유의 군가'라 불렀으며 그 후 일반 국민 사이에도 널리 보급되어 국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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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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