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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41 호
단기 4340. 2. 21 (음력 01.04)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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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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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뉴스와 시시한 루머가 다른 점은 큰 소리로 말하는가 작은 소리로 말하는가의 차이일 뿐. / F.P.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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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三十章 (노자 - 도덕경 : 제3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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爾佐人主者, 不以兵强天下. 其事好還. 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 善有果而已, 不敢以取强. 果而勿矜, 果而勿伐, 果而勿驕, 果而不得已, 果而勿强. 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
이도좌인주자, 불이병강천하. 기사호환. 사지소처, 형극생언, 대군지후, 필유흉년. 선자과이이. 불감이취강. 과이물긍, 과이물벌, 과이물교, 과이부득이, 과이물강. 물장즉로. 시위부도. 부도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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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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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째 장
직역
도를 가지고 사람의 주인을 보좌하는 자는 무력으로 천하를 강제하게 하지 않는다. 그 일은 잘 돌아온다. 군대가 있는 곳에는 가시덤불이 생긴다. 대군이 일어난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있다. 부득이 해서 도와줄 뿐이지 무력으로 취하지 않는다. 좋은 성과가 있어도 자랑하지 않고, 좋은 성과가 있어도 뽐내지 않고, 좋은 결과가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좋은 결과가 있어도 단지 부득이 해서 그랬을 뿐이니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해서 강함을 드러내지 마라. 사물은 강하면 곧 늙으니 이것을 일컬어 도가 아니라 한다. 도가 아니면 일찍 끝난다.
해석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 군대는 생산을 하지 않는다. 매우 소모적인 집단이다. 그 군대를 먹여 살리려면 일반 백성들이 굶주린다. 노자 시대의 군대는 사병이었다. 왕의 욕심에 따라서 움직이던 사병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를 움직이는 일에 국민적인 합의가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피해는 국민들이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도로 다스리는 자는 군대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리고 군대를 일으키는 것은 부득이 해서이다. 그래서 공을 이루어도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군대가 강하다고 해서 전쟁을 자주 일으키면 그 나라가 온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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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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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도로써 임금을 보좌한다면 이는 군사력으로 천하의 패자가 되도록 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에는 반드시 응보가 따르기 마련이다. 군대가 주둔하는 곳에는 가시나무가 무성하게되고, 큰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용병술이 뛰어난 이는 목적만 달성하면 곧 그치고 감히 그것으로 강대해지려고 하지 않는다. 전쟁의 목적을 이루더라도 우쭐대지 말며, 전쟁의 목적을 이루더라도 자랑하지 말며, 전쟁의 목적을 이루더라도 교만 해 지지 말아야 한다. 무력을 쓰는 일은 만부득이한 경우에 한할 것이며 목적만 달성하면 강한 체 말고 겸허해야 한다. 만물은 강장 하면 곧 쇠퇴하게 마련이다. 지나치게 강하고 억센 것은 도에 어긋난다. 도에 어긋나는 것,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주
인주: 군주. 임금을 뜻함, 전국시대의 말기에 보편화된 용어임. 기사호환: 무력으로 남을 정복하는 일은 응보가 쉽게 돌아온다는 뜻임. 사: 군대. 설자: 이 장에서는 용병술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뜻하고 있음. 과: 이루다, 성취하다, 달성하다의 뜻임. 성실, 과단, 과감성, 결행 등으로 풀이하는 학자도 있음. 장: 지나치게 왕성한 상태. 노: 늙다, 노쇠하다, 쇠퇴하다. 조이: 오래가지 못한다, 빨리 그친다.
해
임금을 보좌하는 이는 군사력으로 나라가 강국이 되도록 의도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굴복시키면 그 나라 또한 설욕하려고 하여 쟁란이 그칠 새다 없게 된다. 싸움은 싸움을 불러들이고 피는 피를 부를 뿐이다. 전쟁은 사람들을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환경으로 몰아 넣는다. 논밭은 황폐하여 흉년아 들고 기근과 전염병 등이 따르게 마련이다. 백성들은 사망자, 불구자와 이산가족의 발생으로 신음하게 되고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용병에 탁월한 이는 무력을 사용하지더라도 최소한도의 목적달성으로 그치고 승리로 교만해지지는 않는 것이다. 19세기 독일의 역사학자 트라이치게, 철학자 니이체 등은 전쟁을 지적,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선호하는 인생의 목적 같은 것으로 규정하여 찬양한 바 있다. '그들은 힘이 정의이다.' '강자만이 살 수 권리가 있다.''전쟁터에서 발휘하는 용기는 남자의 최고의 미덕이다.'고 외치며 군사적 영광을 모든 가치관의 정점에 두었다. 그러나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인하여 망하게 되며, 정복자는 자신의 성을 모래 위에 쌓을 수는 있으나 반석 위에는 쌓을 수는 없는 것이다. 무력에 의한 분쟁해결은 보다 큰 무력을 불러들일 뿐이다. 20세기의 위대한 문명비평가 토인비는 한 문화권이나 어떤 국가가 군국주의적 성향을 지니며 정복전쟁에 열중하는 것은 그것이 지닌 표면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긴 안목으로는 그 문화권 내지 국가는 이미 쇠퇴기에 들어섰음을 여러 가지 실례를 들어 경고하고 있다. 노자 역시 '무기란 상서롭지 못한 기구이다.' 라고 말하며 당대의 야심많은 제후들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공벌을 일삼으 며 무고한 백성들을 희생케하는 시대의 아픔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부르짖고 있는 평화애호정신은 2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한 번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인류의 영원한 미해결 과제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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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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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총독부의 가공할 사적파괴령 비밀문서
처음엔 석탑 자체에만 눈독을 들여 어떠한 어려운 운반조건도 무릅썼던 일본인 무법자들은 차차 탑 속에 들어 있는 사리장치 유물만 꺼내는 새로운 범행을 병행시키게 되었다. 이 새로운 목표물은 무거운 큰 덩어리의 탑재들을 많은 인원과 시간을 동원하여 불법반출하는 모험에 비하면 훨씬 손쉽게 성공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탑이 깨져 나가거나 말거나 밀어서 무너뜨리고, 혹은 사리장치가 있음직한 부분의 탑재 사이에 지렛대를 넣어 들어올린 후 유물만 꺼내는 일은 몇이서 하룻밤 사이에 간단히 해치울 수 있는데다가 잘 걸리면 작은 순금불 같은 굉장하고 진귀한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악당들의 목표물은 더욱 다양해졌다. 석탑 속의 사리장치 유물을 노리는 범행은 1920년대에 급격히 성행하기 시작했는데, 그바람에 반출당하는 화를 면했던 탑들도 성한 것이 없게 되었다. 탑의 생명으로서의 비장품인 사리장치 유물, 곧 삼국시대 이후의 금·은 혹은 금동제의 작은 불상·보탑·합 기타 사리병과 그 외함들을 약탈당하고 시신처럼 기울거나 파괴되어 균형을 잃은 탑들이 곳곳에서 일제 아래의 비운을 통곡하게 되었다. 1930년대 중엽의 일이었다. 개성 시외에 있는 고려시대의 현화사칠층석탑 속의 사리장치를 노린 악당들이 있었다. 그들은 비가 쏟아지고 무섭게 천둥이 치는 밤중을 이용하여 다이너마이트 탑신을 폭파했다. 가까운 주민들은 그 소리를 번갯불 천둥소리와 분별할 수가 없었다. 주민들은 날이 밝은 후에야 석탑의 처참한 수난을 목격할 수 있었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탑이 완전히 박살나지 않고 상처투성이나마 제자리에 서 있는 기적이었다. 범인들은 얼마 후 경찰에 잡혔으나 그들이 성공적으로 약탈했던 사리장치의 금제유물은 벌써 금은방에 가서 두드려 짓이겨진 뒤였다. 1934년 11월 경기 도지사가 총독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는,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당시 보물 제15호의 지정문화재였던 '고달사터 부도'(현재 국보 제4호)의 내부 유물에 손을 댄 자가 있었다는 내용의 다음과 같은 피해보고가 기록돼 있다.
"부도 전방 약 10m 거리에 있는 장군석을 들어다 부도의 기단 옆으로 기대놓고, 기계를 사용하여 연대(앙련이 조각된 상대석)를 한쪽에서 들어 올린 다음, 그 짬에 작은 돌들을 끼워 간격을 고정시킨 후, 내부를 뒤진 흔적이 있음. 뿐만 아니라 기단 속에 고물(금속유물)을 넣었을 장치(사리장치)가 없어진 것으로 미루어 절취당한 것으로 인정됨."
무엇보다도 일제의 발악적인 석조문화재 파괴와 무자비한 유린은 조선총독부가 1943년에 각 도경찰부장에게 지시·명령한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서 절정에 이른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던 일제가 미·영연합군의 무서운 반격을 받아 패색에 휩싸이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 땅의 항일민족사상과 투쟁의식을 유발시키고 있는 민족적인 사적비들을 모조리 파괴해서 없애려고 든 것이다. 가령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기념비인 '황산대첩비' 를 비로해서 임진왜란 때 수만 명의 왜군을 남쪽 바다에서 궤멸시킨 이 땅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전승 기록을 새긴 비석 같은 것들을 남김없이 말살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때 총독부가 작성한 파괴 대상의 격파기념비 목록을 다음과 같다.
1. 고양 행주전승비 2. 청주 조헌전장기적비 3. 공주 명람방위종덕비 4. 공주 명위관임제비 5. 공주 망일사은비 6. 아산 이순신신도비 7. 운봉 황산대첩비 8. 여수 타루비 9. 여수 이순신좌수영대첩비 10. 해남 이순신명량대첩비(현재 보물 제503호) 11. 남해 명장량상동정시비 12.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 13. 진주 김시민전성극적비 14. 통영과 남해의 이순신충렬묘비 15. 부산 정발전망유지비 16. 고성 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 17. 연안 연성대첩비 18. 경흥 전보파호비 19. 회령 고충사타 20. 진주 촉석정충단비
다음은 조선총독부가 이 땅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최후의 발악으로 이른바 반시국적인 고적은 소관 도경찰부장들이 임의로 철거(실제 내용은 파괴)시켜도 좋다고 결정했을 때의 가공할 비밀문서의 내용이다. 1943년 11월 24일 기초된 이 문서는 총독부 학무국장이 경부국장에게 넘겨준 후 각 도경찰부장에게 비밀지령으로 하달되었다.
"수제: 철거할 물건중 '황상대첩비' 는 학술상 사료로서 보존의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관할 도경찰부장의 의견대로 현시국의 국민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는 만큼 그것을 철거함은 부득이한 일로 사료됨. 따라서 다른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처치 방법을 강구할 것. 참조: '황산대첩비' 는 보존령(총독부 고적 및 유물 보존령)에 따라 지정할 만한 것은 아니나 이성계가 왜구를 격파한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서 그 존재는 당시 일본인 해외 발전의 사적의 증징이기도 하고, 그 비석의 형식은 미술상·학술상 시대의 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으로서 현지에서 보존시킴이 이상적이겠으나 그 존재가 치안상 철거해야겠다는 관할 경찰당국의 의견은 현시국에 부득이한 것으로 간주됨. 그것을 서울로 가져오기엔 수송의 곤란이 적지 않고, 그 처분을 경찰당국에 일임하는 바임."
이 비밀문서 뒤에, 앞에서 소개한 파괴 대상의 비석 목록이 첨가되었는데, 제목은 '황산대첩비' 를 예로 든 (현존 유사품 일람표)였다.이후 각도에서는 일제 경찰부장의 명령으로 이땅의 역사적 민족적 항일기념유적들이 모조리 파괴당하는 통분스런 일을 겪게 되었다. 1380년 9월에 당시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이지란 장군관 함께 지리산 근방에 침입한 왜적 아지부대를 크게 무찌른 승리의 사실이 새겨져 있던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의 '황산대첩비' 가 맨 먼저 산산조각으로 폭파되었다. 총독부의 승인을 받은 전북 경찰부장은 1577년에 건립되어 400년 가까이 민족의 한 수호비로 살아 있던 '황산대첩비' 를 완전히 말살시키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했다. 그것은 일제 말기의 무자비한 발악의 상징이었다. 대첩비가 섰던 자리엔 지금 한두 조각의 비편만이 남아 일제 치하의 잊을수 없는 굴욕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고 있고, 사적 제104호로 지정돼 있다. 1970년 무렵에 새로 만든 '황산대첩비' 가 세워졌다. 합천 해인사에 세원져 있던 임진왜란 때의 전설적인 승병장이자 고승이었던 사명대사의 '석장비' 는 경남도 경찰부장의 지시·명령에 따라 1943년 12월에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면의 건봉사에 세워져 있던 또 다른 사명대사의 기적비도 같은 때에 같은 운명으로 참혹하게 파괴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최대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왜군 섬멸 기념비들은 진작부터 차례로 파괴당하거나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어디론가 운반되고 있었다. 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있던 이충무공의 '명량대첩비' 와 여수의 '좌수영대첩비' 및 '타루비' 는 총독부가 과거의 왜구 혹은 왜군 격파기념비들을 남김없이 파괴하거나 없애도록 비밀지령을 내리기 이전인 1942년에 이미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사라졌었다. 주민들은 그것들이 총독부 명령으로 서울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일제는 드디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했고 이 땅엔 마침내 해방의 날이 왔다. 해남과 여수의 지방유지들은 즉각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그들이 일제에게 빼앗겼던 이충무공 대첩비들의 안전 여부를 알아보았다. 참으로 다행그럽게도, 그것들은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속에 깊이 생매장돼 있었으나, 파괴돼 있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들은 그후 지방유지들에 의해 원위치로 모셔져 갔다. '명량대첩비'는 현재 보물 제503호로 지정돼 있다.
명량대첩비의 가짜논란
http://news.empas.com/show.tsp/20060131n027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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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8장 종교에 관한 명상
5.신의 존재 증명은 가능한가
우리들은 신에 관한 우리들의 자세를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으니 그것들은 #1신앙의 측면 #2신앙의 측면 그리고 #3종교 철학의 측면이다. 신앙의 측면에서 신이 어떤 존재이며 신은 과연 존재하는 가라는 물음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신앙을 독실하게 가진 사람은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믿으며 자신의 모든 외면적인 삶과 내면적인 신앙과 일치시킨다.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의 가장 깊은 종교적 느낌으로부터 자신을 신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의 경우는 다르다. 신학은 특정한 종교를 인정하는 한계 안에서 특정한 종교의 교리를 해석하고 응호하려는 입장을 가진다. 신학은 실천적인 믿음으로서의 신앙과는 달리 이미 이론의 세계에 속한다. 따라서 신학에서는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전통적인 입장을 살펴보면 신 존재의 증명은 대체로 #1본체론적 증명 #2우주론적 증명 #3목적론적 증명 #4도덕적 증명 등으로 구분된다. 그러면 이들 각각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본체론적 증명은 존재론적 증명이라고도 부른다. "신은 전지전능하므로 완전한 자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개념으로서의 신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추론할 수 있다. 완전한 존재인 신 개념 자체로부터 신의 존재를 추론할 때 이것을 신 존재의 본체론적 증명이라고 한다. 우주론적 증명은 자연계의 운동에서 인과관계를 고찰할 때 성립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원인과 결과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상세계의 원인을 계속하여 추구하다 보면 결국에 가서는 제일 처음의 원인에 도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최초의 원인이 되는 보편자를 신의 존재로 증명할 경우 신 존재에 관한 우주론적 증명이 성립한다. 목적론적 증명은 물리, 신학적 증명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계가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 합목적성, 장엄함을 소유한 가장 조화로운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처럼 세계를 만들어 놓은 신과 아울러 신의 섭리가 분명히 있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경우 성립하는 것이 신 존재에 관한 목적론적 증명이다. 인간에게는 도덕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실천적인 행위의 차원에서는 반드시 양심이나 의무가 있어야만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적이며성스러운 신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전재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고 할 때 신 존재에 관한 도덕적 증명이 성립한다. 위에서 우리는 신 존재 증명에 관한 네 가지 이론을 살펴보았다. 나는 여기에서 이들이 타당한지 아닌지의 여부를 문제삼지는 않겠다. 단지 신앙에서는 필요하지 않을지라도 이론적인 신학에서는 신 존재 증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왜냐하면 신앙은 절대자에 대한 믿음만을 문제로 삼지만 신학에서는 절대자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확인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과 신학의 문제는 종교철학에서 종합된다. 종교철학에서는 신앙과 아울러 신학의 근거가 해명되며 양자의 근거가 어떻게 종합되는지를 밝힌다. 넓게 보면 인간의 의식은 한편으로 절대자에 대한 느낌을 가지며 또 한편으로는 절대자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이들 양자는 절대자의 계시에서 종합된다. 왜냐하면 절대자 신의 존재는 신앙에 의해서 믿어지며 또한 이성에 의해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천은 각각 분리된 영역으로 생각되지만 실은 삶의 두 측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과 신학 역시 절대자 신에 대한 인간의 행동 방식 중 두 측면이다. 인간이 인격체로서 자기 반성과 세계 반성을 동반할 때 신학과 신앙은 하나인 삶의 근원을 해명하면서 동시에 창조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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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부지깽이
본뜻 : 옛날에는 흙으로 만든 아궁이에 짚이나 나무, 솔잎 등을 넣어 불을 땠다. 이때, 불꽃이 좀더 잘 일어나도록 쏘시개 감을 헤집는 데 쓰는 막대기를 가리켜 부지깽이라 했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연탄 아궁이에서 쓰는 쇠로 만든 연탄 집게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연탄을 가정 연료로 쓰고 있는 집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오늘날에는 연탄 집게마저도 골동품이 되어 가고 있다.
부질없다
본뜻 : 불질을 하지 않았다는 뜻을 가진 이 말에는 두 가지 어원이 있다. 하나는 대장간 어원 설로서, 옛날에는 대장간에서 쇠붙이를 만들 때, 쇠를 불에 달구었다. 물에 담갔다 하면서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불질을 하지 않은 쇠는 성질이 무르고 금세 휘어지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는 데서 이 말이 나왔다고 한다. 또 하나는 불을 피우는 기구인 풍로에 관련된 설이다. 옛날에 불을 피울 때는 풍로를 돌려 불질을 해야만 불길이 활활 일어났는데, 불질을 하지 않으면 불꽃이 일어나기는커녕 금방 사그러들었다. 그러므로, 풍로에 불질이 없다는 것은 곧 아무런 결과를 볼 수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바뀐 뜻 : 쓸데없고 공연한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불티나다
본뜻 : 불이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불티가 탁탁거리며 사방으로 튀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바뀐 뜻 : 어떤 물건이 내놓기가 무섭게 금방 팔리거나 없어지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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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내가 낳은 알를 가져다 루터는 다른 동물을 부화시켰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16세기에 알프스를 넘어 북유럽에 전파되었다. 북유럽인데 르네상스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두 문화운동은 중심내용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 이탈리아에서는 그리스 로마 고전문화가 부활하면서 찬양된 반면 북유럽에서는 초기 기독교와 성경의 원전연구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가 인문주의의 전통을 고무했다면 북유럽의 르네상스는 기독교 인문주의라는 이름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북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인물이 바로 로테르담 출생의 철학자 에라스무스(Erasmus, 1466-1536)였다. 에라스무스는 일찍이 '공동생활의 형제단'이라는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에 토대를 둔 단순하고 경건한 신앙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는 탁월한 그리스어 지식을 구사하여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판하고 라틴어로 주석을 달았다. 한편으로는 "우신예찬(Encomium Moriae, 1511)에서 예리한 관찰력과 비판력으로 교회와 성직자의 타락과 어리석음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풍자하였다. 이 책은 곧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독자들은 교회를 변화시켜 인간의 정신 발전에 어울리는 것으로 만들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장본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지식인과 대중에게 개혁의 씨앗을 심었다고 할 수 있다. 1517년 독일인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운동을 일으켰을 때 에라스무스는 박수를 보냈다. 이제야말로 자신의 이상이 실현될 때가 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로마 교황과 결별하고 낡은 교회를 타파해 나갔다. 그 기세는 그칠 줄 몰랐다. 오래된 로마 교회에 대립하는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가는 아니었다. 그는 세계시민주의를 표방했고, 관용과 정신의 자유를 전했다. 그는 교회의 타락을 비판했지만 이단과 종파의 분열 역시 반대했다. 그의 사상뿐 아니라 삶 자체가 세계시민으로서의 생애였다. 그는 유럽의 각지를 순례했으며, 루터와 당시의 지식인들, 교황, 각국의 군주, 제후들과 폭넓게 교제하고 서신을 교환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약 2,500통에 달하는 라틴어 서한은 그의 박식함과 그의 사상의 촉이 호방했음을 말해 준다. 과연 16세기 유럽 '지식인의 제왕'이라 불릴 만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개혁운동을 저지할 수 없었다. 자기가 주장한 것은 인간성의 자유와 관용의 정신으로 이루어진 교회였지, 루터가 주장하는 바와 같은 전투적인 신앙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혁을 빙자해서 파괴를 행하면 새로운 교회도 야만적인 폭력에 의해 침식당할 것이라고 그는 우려했다. 루터가 에라스무스에게 종교개혁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에라스무스는 그 제의를 거절하고, 인간의 자유를 가장 존중하자는 내용을 담은 "자유의지론(1524)"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루터는 인간은 신의 노예라고 반박했다. 이것을 '노예의지론'이라 한다. 그후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벌어졌고, 종교개혁은 루터의 지도하에 계속 진행되었다. 누가 옳았는가 하는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조용한 인품에 상식과 지혜가 넘쳐흘렀고, 언제나 균형을 잃지 않고 사색하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루터는 열정적이고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고 이상을 구현하려는 행동가였다. 사색과 행동은 어떻게 하든지 서로 손잡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가? 두 거인의 결별을 보고 우리는 절망적인 기분이 된다. 에라스무스가 던진 말도 그의 절망감을 잘 담고 있다. "내가 낳은 알을 가져다 루터는 다른 동물로 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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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유혹
아주 부지런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항상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집에 돌아와서는 예습과 복습을 빠트리지 않던 그는 전교에서 수석을 놓치는 경우가 거의 없었습니다. 옆방에서 부모님이 텔레비젼을 시청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공부외에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습니다. 그에게는 공부만이 유일한 일거리였고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조간 신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존경하는 어느 여성 작가가 쓴 콘트가 눈의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게으름에 대한 예찬의 글이었습니다. 어떻게 게으름이 그 유명한 작가로부터 찬사를 듣게 된 것일까? 그는 호기심으로 글을 읽었습니다. 기계 부속품처럼 돌아가는 이 사회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세상을 관조하며 적당한 게으름을 부려보는 것도 인생을 살찌우는 방법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난 그는 존경하는 작가의 주장처럼 적당히 게으름을 부려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인생 경험을 풍부하게 하고, 또 멋있게 사는 방법일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 후로 그는 예습과 복습을 그때그때 하지 않고 몰아서 벼락치기로 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고, 텔레비젼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성적이 점점 떨어지더니 급기야는 전교에서 바닥권을 헤매게 되었고, 결국 대학 시험에도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된 원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작가의 글에 영향을 받아 잠시 게으름을 부려보겠다는 것이 아주 습관이 되어버렸고, 이제는 게으름을 쫓아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졸업한 지 3년 만에 어느 삼류 대학에 간신히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 성적은 경고를 받을 정도였고, 자격지심 때문에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앞으로도 이런 생활이 지속된다면 자신의 미래가 암담할 뿐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게으름이라는 끔찍한 유혹을 떨쳐버리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이 파멸할 수 밖에 없음을 간파했습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이야말로 게으름이라는 악마의 달콤한 유혹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사실을 종이에 큼지막하게 써서 책상 앞에 붙여 놓았습니다. “내일 시작해도 충분해. 오늘은 이렇게 누워서 지내고 내일부터 시작해도 나는 얼마든지 일을 잘 끝낼 수 있어. 난 남들보다 머리가 좋으니까...” 이 말에 한두 번 속은 것이 아닌 그는 친구들과 설악산을 오르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미루어서는 절대로 오를 수 없는 산, 발을 떼지 않으면 결코 오를 수 없는 산이 바로 인생사라는 진리가 뼛속까지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게으름에 대한 예찬을 저주하기 시작하고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비롯한 할일을 미루지 않고 그때그때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자연 예상보다 어려운 일도 넉넉한 시간을 투자해 훌륭하게 완성할 수 있었고, 몇 달 되지 않아 다시 우수한 학생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게으름의 포로가 되었던 수년간의 공백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보다 성적이 나빴다가 나중에 그를 추월했던 친구들은 어느새 풀브라이트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만, 그는 웬만한 회사에는 입사 원서도 내지 못하는 신세에 머물렀습니다. 만일 중학교 시절에 그 글을 읽지 않았다면, 그리고 읽었어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에 그는 밤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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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소년 국왕과 대비의 수렴청정
* 처음에 위쪽으로 올라갈 때는 한 걸음이 다시 어려웠는데, 한 걸음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데 있어서는 한 갓 발을 들기만 해도 몸이 저절로 아래로 휩쓸려 내려가니, 어찌 착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 산에 오르는 것과 같고, 악한 일을 하는 것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쉬운 일이 아니겠느냐? (조식)
임금의 수명
조선왕조에는 스물 일곱 분의 임금이 있었다. 그러나 종묘에 배향된 위패는 영왕 이은을 포함하여 스물 여덟 분이다. 그분들이 모두 단명했던 것은 아니지만 평균 연령으로 보면 45세, 결코 장수했다고 볼 수는 없다. 비교적 장수를 누린 분으로는 영조(83세), 태조(74세), 고종(67세), 정종(63세), 숙종(60세) 순이고, 30세 안쪽에 승하한 분으로는 단종(17세), 예종(20세), 헌종(23세) 뿐이다. 그러나 30대에 승하한 임금이 8명, 40대를 넘기지 못한 왕비는 9명이다. 그밖에 열 살을 넘기지 못한 왕자와 공주, 옹주(후궁 소생의 왕녀)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 같은 사정이라면 장수라기보다 단명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의학에 문외한이므로 임금의 단명에 대해 의학적인 진단을 내릴 수는 없다. 다만 상식의 수준에서 말한다면 첫째 과다한 영양섭취, 둘째 운동부족, 셋째 무절제한 성생활에서 기인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물론 여기에 오늘날과 같은 현대의학이 없었다는 사실이 추가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임금의 수랏상에는 전 국토에서 생산되는 모든 산해진미가 동원된다. 저기에는 부족함이 없음도 간과되어서는 아니된다. 또 보신을 위해서는 철철이 보약이 올려지게 마련이다. 영양이 과다한 섭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운동량의 부족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고려 시대로부터 전해지던 격구와 같은 스포츠가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격구가 주자학의 이념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점차 시들해 질 수밖에 없었고, 설혹 그렇지가 않다고 하더라도 매냥 거기에 매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러 사냥을 나갔다는 기록은 있으되 그 또한 일년에 한 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일 것이었다. 개항 후 테니스가 처음 들어왔을 때, 플레이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대부가 가로되, "하인들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면 되는 일을 왜 저리 땀을 흘려야 하는고..?"라면서 혀를 차더라는 에피소드도 있질 않던가. 게다가 임금은 먼길을 걷질 않는다. 더구나 대궐 안의 전각과 전각을 옮겨 다닐 때도 연을 타고 다녔다면 운동부족의 현상은 심각하고도 남을 것이다. 예로부터 제왕은 무치라고 했다. 특히 여성관계가 그랬다. 거느린 후궁의 수는 말할 나위도 없었고, 그녀들을 선택하거나 접촉함에 있어서도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가령 임금이 궁원(지금의 비원과 같은 곳)을 산책하다가 마음에 드는 궁녀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성행위를 해도 무방하다. 따르던 내시나 상궁들은 잠시 뒤로 향해 돌아서 있으면 보지 않은 것이 되고, 임금의 성행위가 침전에서 행해진다고 하더라도 지밀 상궁은 바로 문밖에 있을 뿐 자리를 비키지 않는다. 임금이 무치라는 것은 이 같은 일련의 법도나 관행을 두고 하는 말이다. 대궐 안에는 약방이 있고 의원들이 있다. 임금의 환후를 살피는 의원을 어의라 하고, 내명부의 병을 살피는 의원을 여의라고 하는 것은 대개 상궁들이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현대의학이 아니었으므로 병의 종류가 세분되어 있지를 않았다. 물론 영험한 의약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전염병에 해당되는 병들은 대체로 '역질'이라고 표기하였고, 상처가 곪는 따위의 것은 '창질'이라고 표기하였다. 특히 천연두나 학질의 치유는 하늘의 소관이라고 믿었기에 백약도 효험을 구할 수가 없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왕자며 공주를 비롯한 수많은 왕실 사람들이 그런 병으로 생목숨을 잃어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와 같은 봉건사회에도 성병은 있었다. 성병은 유럽에서 옮겨진 망국병이지만, 대개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스며들었고, 고려나 조선에서는 중국을 다녀온 사신들에 의하여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병은 보균한 사신들에게서 상궁. 나인들에게 전해지고, 그녀들에 의해 임금에게까지 옮겨지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왕실에 창질이 흔하고, 말을 타지 못하는 임금과 왕족이 많았던 것이 그 때문이라는 설도 만만치가 않다. 약은 모두가 한방이었고 요즘과 같은 항생제가 없었기에 천하의 명의를 동원할 수 있었던 왕실이나 임금의 처지로도 병마를 쉽사리 뿌리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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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크(disk)
지금은 흔히 레코드의 뜻으로 쓰이고 있으나 본래는 원반의 뜻으로 고대 희랍의 운동기구였으며 디스코스(diskos)라 했다. 그 후 라틴어로는 디스카스(discus), 유명한 희랍의 조각작품에 '원반 던지기 선수' (diskobolos)라는 대리석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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