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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40 호
단기 4340. 2. 20 (음력 01.0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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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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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뉴스와 시시한 루머가 다른 점은 큰 소리로 말하는가 작은 소리로 말하는가의 차이일 뿐. / F.P.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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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二十九章 (노자 - 도덕경 : 제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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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欲取天下而爲之, 吾見其不得已. 天下神器, 不可爲也, 爲者敗之, 執者失之. 故物, 或行或隨, 或噓或吹, 或强或羸, 或挫或?, 是以聖人去甚, 去奢, 去泰.
장욕취천하이위지, 오견기부득이. 천하신기, 불가위야, 위자패지, 집자실지. 고물, 혹행혹수, 혹허혹취, 혹강혹리, 혹좌혹휴, 시이성인거심, 거사, 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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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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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아홉째 장
직역
장차 천하를 얻으려고 욕망 하는 하는 자의 행동에서 나는 그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본다. 천하는 신령스러운 그릇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하려는 자는 패할 것이오, 잡으려는 자는 잃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은 혹은 가고 혹은 따르는 것이다. 혹은 들여 마시고, 혹은 내뱉는다. 혹은 강하고 혹은 여리다. 혹은 꺾이고 혹은 무너진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극심한 것을 버리고, 사치로움을 버리고, 과분함을 버린다.
해석
천하를 장악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천하를 소유할 수가 있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개미가 길을 가다가 평평한 탁자 위를 지나가게 되었다. 개미는 그 탁자의 넓고 평평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 탁자에 깃발을 꽂고 "이것은 내 땅이다."라고 선언했다.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웃기는가. 웃긴다면 이 책을 덮어라. 아직 그대는 이 책을 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천하를 소유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천하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천하는 그냥 천하다. 인간은 하늘 아래 기생해서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대는 살구나무에 수많은 벌레가 그 나무에서 사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그때 그 벌레를 어떻게 생각을 했는가. 우리는 그 벌레와 같은 존재이다. 인간에 대한 비하가 심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대는 왜 살구나무에 사는 벌레를 싫어하는가. 싫어하지 않는다면 다음 장으로 바로 넘어가리 바란다. 살구나무에 사는 벌레는 그냥 살뿐이다. 그 자체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벌레는 살구나무가 죽을 정도로 착취하지 않는다. 만약 살구나무가 죽으면 그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안다. 솔잎혹파리가 있다. 그것은 소나무를 죽인다. 자 소나무가 다 죽으면 솔잎혹파리는 살 수 있는가. 때가되면 자연스럽게 놔두면 솔잎혹파리를 잡아먹는 새가 그 수를 줄인다. 그러나 인간이 그 새를 죽였다. 그래서 소나무가 죽어 간다. 인간이 죽인 것은 새뿐만 아니다. 살구나무를 정복해야 될 대상으로 여기고 마구 파헤친다. 물관을 잘라 버리고 잎을 갈가먹는다. 살구나무는 점점말라간다. 이제 살구나무는 살아나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살구나무가 죽는 순간 그곳에 있던 벌레들도 죽는다. 인간이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앞서가는 듯 하면서도 다시 보면 뒤 따라 온다. 들여 마시면서 동시에 내뿜는다. 그대 호흡을 본적이 있는가. 호흡을 멈추고 있어 보아라 어떻게 되는가. 죽는다. 호흡은 들어옴과 나감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은 이런 것이다. 천하를 장악하려는 것은 숨을 잔뜩 들여 마신 뒤에 이것은 내것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멈추고 있는 것이다. 돌려주어라 그래야 다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천하를 끝까지 취하려는 자는 세상의 법칙에 따라서 끝내 천하를 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극심하고, 사치하고, 과분한 것을 취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와 더불어 호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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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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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장차 천하를 차지하고자 인위적인 노력을 한다면 그것이 실패로 끝날 것을 나는 안다. 왜냐하면 천하는 불가사의하고 오묘한 그릇과 같아서 사람의 의도적인 작위로서 다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의도적으로 다투려고 하는 자는 파괴할 것이며 인위적으로 장악하려는 자는 잃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만물은 어떤 것은 앞장서고 또 어떤 것은 남의 뒤를 추종하며, 어떤 것은 가늘게 숨을 쉬고, 어떤 것은 세게 내 뿜는다. 어떤 것은 굳세고 어떤 것은 나약하다. 어떤 것은 꺽이고 어떤 것은 떨어진다. 그런 까닭에 성인은 심한 것, 분수를 넘치는 것, 지나치게 큰 것은 버린다.
주
리: 나약한 것. 좌: 꺽이다, 절과 같음. 휴: 떨어지다, 즉 타와 같은 의미임. 사: 욕구 충족이 너무 지나치거나 바라는 것이 분수에 넘치는 것. 태: 지나치게 큰 것을 뜻함, 교만한 마음으로 풀이하는 학자도 있음.
해
천하 만물에는 어느 것이나 모두 무위자연의 법칙이 스며 있다. 이 무위자연의 법칙에는 예외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도인 것이다. 사람이 자연의 도에 순응하지 않고 어떤 일을 무리하게 인위적인 작위에 의해 성취하고자 한다면 그는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천하를 차지한다는 것은 천명과 인심이 그에게로 돌아가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법가의 패도 주의는 물론이오, 유가의 덕치주의로서의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법가의 경우는 권모와 술수로서 인간 불신을 밑바탕으로 하여 권력 장악과 그것의 유지를 지상의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유가의 덕치주의의 경우도 무리한 인위적인 제도 행정이나 규제 등으로 무위자연의 다스림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도에 맞지 않는 일은 일시 성공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에도, 인심과도 부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자는 이 장에서 모름지기 위정자는 겸허한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며 무위자연의 도에 귀의할 때 비로소 백성의 으뜸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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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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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중흥산성에서 해체된 걸작 쌍사자석등
일제 밑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이 한반도 전역을 유린하며 약탈 혹은 불법반출한 석탑·석등·부도의 수효와 그 만행의 형태, 그리고 그것들의 행방을 낱낱이 조사·집계한 자료는 아직 없다. 또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석탑·석등·부도가 인천·부산·군산·목포 기타 여러항구에서 일본 본토로 실려 나갔지만 1966년의 (한일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따른 협정) 후의 반환문화재 가운데 석탑류는 하나도 포함돼 있지 않다. 모두 개인 소유로 돼 있다는 이유로 일본정부는 그것들을 제외시켰다. 일제 때 얼마나 많은 석탑류가 일본에 유출되었는가를 알려주는 몇 가지 구체적인 자료가 있는데, 그 하나는 1930년대에 오사카에서 주기적으로 경매가 벌여졌을 때의 목록들이다. 그것을 보면 한 번 경매 때 보통 50∼60점의 조선 석탑·석등·부도가 모여지고 있다. 8·15 직전까지 도쿄의 어느 백화점 아래층에는 일본인 골동상과 공모하여 이 땅의 문화재 반출과 판매에 성공한 이아우개란 반역적인 조선인 골동상이 각종 석물을 즐비하게 진열해놓고 일본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현재 국내에서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돼 있는 석조물 가운데에도 앞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수난의 내력을 가진 것들이 많다. 한 예로 국보 제103호인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은, 1930년에 전남 광양군 옥룡면 운평리 중흥산성의 폐사지에서 불법반출되어 대구에 살던 일본인 수집가 이치다의 집 정원으로 들어가게 돼 있던 것을 총독부가 용케 중간에서 접수하여 서울의 박물관으로 운반해 온 것이다. 그 정확한 내막이 1932년 5월에 총독부 고적조사과 기수였던 오가와가 작성한 현지 조사보고서에서 확인된다.
"전남·북지방에서 석탑·석등 등이 매매되어 부잣집 마당에 놓이고, 혹은 바다를 건너 나이치(일본 본토)로 반출됨이 심하고, 천여 년을 유존한 국보적 고탑을 넘어뜨리고 파괴하여 내부에 수장하고 있던 유보를 훔쳐 팔아먹는 자가 있다는 풍문을 가끔 들었었고, 그런 유물로 믿어지는 것을 수삼차 본일도 있음. 작년 가을에 대구에 사는 이치다가 어느 시골에서 석탑과 석등을 산후, 대구로 운반해도 괜찮겠느냐는 것이어서 소재지와 매매의 이유를 물으니, '전남 광양군 옥룡면에서 보통학교 후원회가 기금 자산을 만들 목적으로 중흥산성 내에 있는 삼층석탑과 석등을 매각했다. 시골 산중에 고대의 유물을 두었댔자 보호가 되지 않는다. 대구로 이전하여 마당 안에 두고 싶다' 는 희망이었음. 3월 17일. 광주에서 도지사관사 마당에 옮겨져 있는 석등을 보았음. 지금까지 3개밖에 발견되지 않은 일품임. 3월 20일 밤에 옥룡 경찰관 주재소를 찾아 중흥산성 내의 폐탑 매매의 건을 들었음. '소화 5년(1930년) 8월게 옥룡보통학교 후원회가 기본금 조성을 위해 산성 안의 석탑 및 석등의 매각처를 변정섭이라는 자에세 의뢰했음. 변은 부산에 있는 성명 미상의 매수인 2명을 동반하고 와서 물건을 보게 하였음. 그리하여 일금 750원으로 매매의 약속이 성립되었음. 학교 후원회 쪽에서는 100원 정도면 팔릴 거라고 생각했던 터라 너무나 고가인 관계로 놀래어 군 당국에 상담하니, 유물의 매매는 고적·유물 보존규칙에 의해 불가하다는 지시를 받았음. 그 뒤에 여러 가지 문제가 연속되었음.' 이상이 경찰관에게 들은 대요임. 부산의 매수인은 대구의 이치다에게 전매할 약속을 했었고, 이치다는 후지다 촉탁(총독부 소속)에게 상담이 있어 이번에 출장·조사를 하게 된 것임."
걸작 '쌍사자석등' 은 부산의 악질 골동상(일본인이었을 듯함)과 대구의 간접적인 유물 약탈자였던 이치다의 손이 뻗치면서 당장 중흥산성에서 해체되어 옥룡면사무소 앞에 반출됐었다. 그러나 그들의 파격적인 매수 수법에 놀란 주민들이 뒤늦게 불법행위임을 깨닫고, 이어서 당국이 개입하자 일본인 무법자들의 음모는 결국 실패했다. 석등은 한동안 광주의 전남 도지사 관사로 옮겨졌다가 1937년 1월 5일에 서울 박물관으로 올라와 그해 11월에 경복궁 안에 복원되었다. 그 공로자는 오가와였다. 그후 아마누마라는 일본인이 이런 말을 쓰고 있다.
"오가와가 그 석등을 일차 조사하고 서울로 올라와 총독부에 복명하여 유물 등록수속을 마치고, 그해 12월에 재조사한 끝에 서울로 운반해왔다. 하마터면 골동상의 손을 거쳐 대구의 부호의 소유로 돌아가 우리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운명에 빠지게 될 것을 살려 지금 총독부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당시 대구에는 이치다 외에도 또 한사람의 악명 높은 일본인 수집가가 있었다. 남선전기 사장 오구라 다케노스케였다. 그런데 이오구라는 이치다가 걸작 석등의 불법 입수를 꾀했다가 실패한 전남 광양지방의 어느 절터의 탑 속에서 약탈된 작은 '금동팔각사리탑' 하나를 말썽없이 입수하고 있었다. 그는 또 경주 부근의 어느 석탑 속에서 훔친 작은 '금동삼층탑' 도 취득하고 있었는데 모두 희귀한 걸작이었다. 8·15해방 전후해서 일본으로 반출되어 현재 둘 다 일본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돼 있다. 오구라는 일제가 패망할 때가지 대구 시내의 자기 집에 온갖 종류의 풍부한 도굴 및 약탈문화재 컬렉션을 향유하고 있었는데 그때 정원에 놓여 있던 고려시대의 걸작 '석도부도' 둘은 8·15해방 이후 귀속재산으로 대구시가 압류하고 있다가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이관되어 현재 보물 제135호와 제258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언제 어느 절터에서 반출된 것인지는 배후의 장본인이었던 우구라가 약탈과 입수 경위에 대해 일절 함구한 채 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부도들은 과거의 총독부 때에도 이미 주목되어 1942년 6월에 모두 중요한 유물로 지정돼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경주 근처인 경북 월성군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하는 국보 제40호의 '정혜사터 십삼층석탑'(통일시라시대)은 1911년에 약탈될 뻔했었다. 수명의 반출음모자들이 밤중에 나타나 상륜부와 위로부터 세 층을 해체하여 땅에 내려놓았을 때, 마침 한 마을사람이 지나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어느놈들이냐?"고 호통을 쳐 범인들은 도망치고 석탑은 위기일발에서 화를 면했던 것이다. 그후 이 십삼층석탑은 땅에 내려진 탑재들을 되올리지 못한 채 오랫동안 십층탑 꼴로 서 있었다. 그통에 상륜부는 아주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서울 경복궁의 국립중앙박물관 석물군 속에 들어 있는 보물 제357호의 '정도사터 오충석탑' 에 대해서는 1968년에 문공부 문화재관리국이 발행한 (문화재 대관) (보물편) 상권에 '1924년에 원위치(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동)에서 현위치로 이건한 것' 으로 기록돼 있지만 1912∼1913년에 일본인 조사가 세키노가 발표한 논문 (조선의 석탑파)에는 '그전에 벌써 칠곡 절터에서 불법반출되어 오야라는 철도관리국장 관사에 들어가 있다' 고 밝혀져 있다. 그후에 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겨 왔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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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8장 종교에 관한 명상
4. 무신론과 유신론
절대자, 곧 신에 관한 인간의 자세를 크게 나누어 보면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무신론이며 또 하나는 유신론이다. "나는 무신론자이다. 이 세상은 처음부터 그대로 있는 것이고 어떤 누군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나를 믿으며 내 자신의 힘만을 믿는다"라는 주장과 유사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들 주변에서 우리는 #1유신론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2무신론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3유신론이나 무신론에 별 커다란 관심이 없이 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 번째 무리에 속하는 사람들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유신론이나 아니면 무신론 어느 입장을 선택하게 된다. 우선 무신론을 살펴본 다음에 유신론을 언급해보기로 하자. 유신론과 무신론의 구분은 종교적인 입장에 비하여 이러한 종교적 입장에 바탕이 되는 것은 관념론과 유물론이다. 이 두 견해는 세계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나뉘어진다. 관념론은 이성이나 정신을 세계의 근원이라고 본다. 예컨대 책상이나 돌을 쪼개어 보자. 우선 작은 알맹이인 분자로 분할될 것이고 다음은 원자 그리고 다음으로는 전자로 분할될 것이다. 전자를 더이상 쪼갤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분할한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힘"으로서 모든 대상들의 가장 근본적인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물질이라고 부르거나 대상들이라고 일컫는 것, 나아가서는 세계가 결국에 가서는 정신적인 힘들로 구성된 것이 된다. 이러한 입장이 바로 관념론 또는 유심론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대상의 최소 단위를 전자로 보고 전자를 물질이라고 할 경우 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은 물질이 된다. 유물론은 이러한 입장을 대변한다. 무신론은 유신론을 바탕으로 삼는다. 유물론은 형이상학적 입장이지만 이것이 종교적 자세로 전환하면 무신론이 된다. 무신론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생각되는 니체와 마르크스를 살펴보기로 하자. 니체는 기독교적인 신을 부정한다. "신은 죽었다"고 하는 그의 말에서 신은 기독교적인 신이다. 그는 인간을 초월하고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는 기독교적인 신을 부정한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서 세계근원을 찾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힘에의 의지"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들은 "힘에의 의지"가 종래의 기독교적인 신을 대치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니체 자신의 입장은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물리적, 생물학적 그리고 경험적 근거에 의하여 삶의 과정이 이행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자각한 자를 초인이라고 부르는데, 초인은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자로서 그는 다름 아닌 세계의 목적이다. 이것은 가장 깊은 고통의 파악이다. 형태를 이루는 힘은 스스로 동요한다 - 개체의 개별화는 기만해서는 안되는 것이니, 사실 개별자에게는 어떤 것이 끊임없이 흐른다. 개별자가 느끼는 것은 멀리 있는 목표를 향한 과정 속으로의 힘찬 몰입이다. 개별자의 행복 추구는 형태를 구성하는 힘들이 또 한편으로 함께 모여서 방해하지 않게끔 힘차게 하는 수단이다. 인간성이 아니라 초인이 목적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1앞에서 말한 것처럼 종래의 기독교적인 절대자 신인가 또는 #2니체의 초인은 오히려 불교적인 불타와 가깝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다. 니체의 초인은 분명히 기독교적인 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초인은 힘에의 의지를 내면에 소유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인은 불타와 한층 더 가깝다. 왜냐하면 불타 역시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타는 이 세상을 현상으로 보고 현상을 나타나게 하는 정신을 순화시켜서 무의 상태에서 깨달은 자임에 비하여 초인은 어디까지나 생물학적인 물리학적인 근거에서 "삶에의 의지" 및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니체의 초인과 불교의 불타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니체에게 있어서는 개별자인 인간이 힘에의 의지를 소유하고 자각할 때 초인이 된다. 초인은 인간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별자 인간의 차원에 속한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가 물리적인 과정의 색채를 띠며 동시에 그것이 유기적인 삶으로까지 확장되는 사실을 다음의 인용문에서 살펴볼 수 있다. 게다가 나는 한층 더 해결의 길을 걸어갔다 - 거기에서 나는 개별적인 새로운 힘의 원천을 발견하였다. 우리들은 파괴하여야만 한다 -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았다. 즉 개별적인 존재의 해결은 결코 - 보편적인 존재의 모사나 개별적인 예처럼 완성될 수 없다. 보편적인 해결에 관한 마비된 느낌과 불완전에 대립하여 나는 영겁 회기를 지지한다.
니체가 이곳에서 말하는 영겁 회기는 결코 신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힘이다. 보편적인 것은 형식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의식이 거짓되게 날조한 것이며 니체에게는 개별적, 구체적인 것만이 참다운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니체는 보편적, 추상적인 절대자를 전제로 삼는 종교를 반대하며 특히 기독교적인 신을 부정한다. 니체는 자연 현상과 인간이 개별적인 것으로 영원히 회귀하는 사실이 바로 힘에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오, 짜라투스트라여, 어떤 사람도 지니지 못했던 위대한 운명을 그대가 짊어진 것을 노래하며 새로운 노래가 그대의 영혼을 치료하라. 왜냐하면 오, 짜라투스트라여 그대의 짐승들은 그대가 누구이며 앞으로 무엇이 될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아라, 그대는 영겁 회기를 가르치는 자이니 - 이제 그것은 그대의 운명인가? 그대는 제일 처음으로 이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니, 이 위대한 운명은 어찌 그대의 가장 큰 위험과 병이 아니겠는가! 보아라, 우리들은 그대가 모든 것은 영원히 회기하며 우리들 자신도 영원히 회기하고 이미 우리들은 무수히 회기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우리와 함께 회귀한다는 것을 그대가 가르치고 있음을 안다. 그대는 다음의 사실을 가르친다. 즉 생성 변화의 위대한 해, 엄청나게 위대한 해가 있어서 우리들 자신은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에서 동일하고 또한 우리들 자신은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에 있어서 위대한 매해마다 동일하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니체는 현상을 생성, 변화하는 것으로 보며 동시에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기에 그가 보는 세계의 근원이란 인간의 내면에 그리고 어디에나 두루 퍼져있는 "힘에의 의지"이다. 이러한 힘에의 의지를 가장 잘 대변하는 자는 바로 초인이다. 니체의 초인은 결코 신이 아니다.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여 사랑하고 힘에의 의지를 자각하여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결단하는 자가 초인이기 때문에 초인은 실존적 인간이다. 실존적 인간은 천민이 지양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니체에게는 신이 차지할 장소가 있을 수 없다. 니체는 #1생물학적, 물리학적인 의미에서 우주의 근원을 힘에의 의지로 보며 #2힘에의 의지를 자각하고 소유한 자를 초인이라고 부르므로 그는 무신론을 대변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삶이다. 다음으로 마르크스의 무신론을 간단히 살펴 보기로 하자. 마르크스는 전통적인 철학자들과는 달리 "세계를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것도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사회를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가 바라보는 행복은 물질적인 욕구의 충족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이 보다 더 물질적으로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사회로 사회를 개혁시키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가 보기에는 정신적 만족이란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질적 만족이 해결된 다음에 부차적으로 뒤따라오는 것이 정신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물질적인 경제 구조를 하부 구조라고 하며 인간의 본질적인 구조라고 보고 정신적인 구조를 상부구조라 하며 인간사회의 부차적인 구조로 본다. 마르크스는 대표적인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신 역시 정신적인 견지에서 만들어진 개념으로서 물질적인 욕구에 의해서 부차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니체와 마르크스의 무신론을 살펴보았다. 무신론은 일반적으로유물론을 바탕으로 가진다. 니체와 마르크스를 비롯하여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1세계의 본질 또는 근원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며 #2물질적인 것의 근원은 물질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보고 #3정신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작용현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4사회 발전은 기계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신론과 대립되는 주장, 곧 유신론은 종교를 소유한 모든 사람들이 지지하는 입장이며 대부분의 일상인들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견해이다. 우리들이 세계의 신비스러움을 인정하고 삶과 세계의 근원을 정신적인 존재로 생각할 경우 당연히 유신론이 성립된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주의하여야 할 점은 맹목적으로 단순하게 "신은 없다"라든가 아니면 "신은 존재한다"라고 간단히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론과 실천이 조화될 때 비로소 우리들은 전체적인 삶을 체험하고 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신론이라든가 유신론의 어느 한편을 고집하기에 앞서서 인간 주체로서의 삶과 세계의 근원에 대한 반성이 요구되며 동시에 그러한 반성과 아울러 삶과 세계를 유기적, 전체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삶과 세계의 근원을 부분적으로 살피면 무신론이나 유신론 가운데서 어느 한편만을 고집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빛나는 수정을 놓고 "저것은 빛이다"라고 하거나 "아니다, 저것은 돌맹이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삶과 세계는 결국 무신론적인 현상이 유기론적인 근원을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빛과 돌맹이가 다름 아닌 빛나는 수정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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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랴부랴
본뜻 : '불이야 불이야'가 줄어서 된 말이다. 불이 났다고 소리치면서 급하게 내달리는 모습에서 나온 말로서 의성어가 의태어로 변한 말이다.
바뀐 뜻 : 아주 급히 부산하게 서두르는 모양을 가리킨다
부럼
본뜻 : 음력 정월 대보름에 먹는 밤, 잣, 호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대보름에 견과류를 까서 먹으면 일년 내내 부스럼이 나지 않는다는 속신이 있다.
바뀐 뜻 : 음력 정월 대보름날 까먹는 밤, 잣, 땅콩, 호두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칫 '보름'으로 잘못 쓰기 쉽다.
부리나케
본뜻 : '불이 나게'에서 나온 말이다. 옛날에는 불을 만들기 위해서 옴폭 패인 돌에 나뭇가지를 세게 돌려 불꽃을 일으키거나, 부싯돌 두 개를 맞부딪치는 방법을 썼다. 전자의 방법을 쓸 때는 나뭇가지를 돌리는 손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빠르게 돌려야 겨우 불꽃이 일었다. 그러므로 '불이 나게'란 '불이 날 정도로' 급하고 빠르게 몸을 놀리는 것을 뜻한다.
바뀐 뜻 : '급하게, 서두르듯 빠르게'의 뜻을 가진 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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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나 여기에 서 있다
1517년 로마 교황에 대해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루터는 자기 길을 계속 걸었다. 교황청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점차 개혁에 대한 자기 생각을 확고히 했다. 처음부터 교회에서 완전 분리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교회 대표들과의 논쟁을 거치면서 화해의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졌다. 그때 사태를 급진전시켰던 계기가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가 라이프치히에서의 토론이었다. 1519년 교회측과의 토론에서 루터는 그들의 유도심문에 넘어가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게 되었다. 루터와 그 지지자들은 여기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추궁당했다. 두번째는 1512년 루터의 처리를 둘러싸고 독일의 보름스에서 열렸던 독일제국(신성로마제국) 의회 자리였다. 이미 루터를 지지했던 제후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의회는 의견이 분분했다. 4월에 루터는 의회에 소환되었다. 황제 카를 5세와 교황의 특사를 비롯한 대다수의 논적들 앞에 끌려나온 루터는 잘못된 생각을 철회하고 사죄하라고 강요당했다. 그러나 루터는 거절했다. 의회에 모인 대표들도 의견이 갈렸다. 황제 앞에 서서 눈을 똑바로 뜬 루터는 말했다.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달리 택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해 주소서. 아멘." 이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로써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면 힘이 없어서 엎드려 기도할 것이 아니라, 자신도 또한 일어서서 싸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보름스 의회는 루터의 추방을 결의했다. 루터의 신변은 위험스러웠다. 빠른 걸음으로 의회를 빠져나온 루터 일행은 작센 제후 프리드리히의 병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숨기고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루터는 작센 제후의 보호 아래 발트부르크성에 숨어서 성경의 독일어 번역에 몰두했다. 개혁을 바라는 많은 독일인들에게 힘을 주기 위함이었다. 다음해인 1522년에 완성된 "신약성서" 독일어판은 방언 차이가 큰 독일어에 하나의 표준이 됨으로써 근대 독일어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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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밀크 커피 한 잔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국문학사의 한 면을 장식하는 양주동 박사. 그는 원래 국문학자가 아니었습니다.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어느날, 일본 학자가 신라의 향가 연구서를 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 사람이 아닌 일본 사람이 향가를 연구했다니... 한국 학자들은 그 동안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그는 자존심이 있는 대로 상해 국문학계의 원로들을 찾아다니며 관련 서적을 구해 골방에 처박혔습니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가는 시간조차 아껴가며 밤이 어떻게 오고 낮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런 지 몇 달 만에 그는 일본 학자의 오류가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놀라운 논문을 발펴했습니다. 일본의 일간지는 그 일로 ‘마침내 조선인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사설까지 실었다고 합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그 분을 초청하여 말씀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친 연구로 폐렴에 걸려 의사들에게서 소생할 가능성이 없다는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이 방 안에 화로를 들여다 놓고 그 위에 물을 끓여 김이 콧구멍으로 들어가게 하는, 소위 ‘스팀 요법’을 활용해 주어 나았다고 주장했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명저를 남긴 마르셀 프루스트, 그는 죽기 전 20여 년간을 세상과의 관계를 단절한 채 병상에 누워서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병상에서 상반신만 절반쯤 일으켜 집필하곤 했습니다. 죽기 5년 전부터는 하루에 밀크 커피 한 잔밖에 마시지 않았으며, 죽음을 두어 달 앞두고는 그것마저 끊고 한잠도 자지 않고 집필에만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는 임종하던 날, 그 동안 접근조차 못하게 했던 비서에게 곁에 있어줄 것을 부탁하고는, 교정을 끝낸 후 고개를 떨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얼마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치열하게 살려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매독약 살바르산을 발명한 독일의 과학자 에를리히는 당대의 최고 학자들에게 조롱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영감을 끝까지 밀고 나가 결실을 본 사람입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에는 폐결핵 환자가 많았습니다. 그는 한 의학 세미나에 참석하여 사람에게서 채취한 침 속에 든 결핵균에 색깔을 입히면 더욱 쉽게 결핵균 감염 여부를 알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본 경험이 있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해 그만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즉시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결핵균을 발견하는 연구에 몰두했지만, 전혀 진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망하고 있던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균이 든 유리판을 그 동안 사용치 않았던 난로 위에 내려놓고 거실로 나와 친구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손님 대접을 한답시고 난로에 불을 피우고 말았습니다. 깜짝 놀란 에를리히는 몹시 화를 내면서 연구실로 뛰어들어가 유리판을 들고 현미경으로 달려갔습니다. 연구를 망쳤으리라는 그의 짐작은 잘못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결과가 부인의 실수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매독약을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살바르산이라는 이름의 매독약은 무려 606번의 실험을 거쳤다고 해서 ‘606’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는 이 발명으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안면기형 교정수술의 세계적인 권위자 백세민 박사.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에는 물론 피눈물 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1967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주립대학 병원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영어도 못하고 의학 지식도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수면을 하루에 2시간 미만으로 때우는 상상하기 힘든 노력 끝에 성공적으로 인턴 과정을 마쳤습니다. 그는 유명한 마운트 사이나이 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끝낸 후, 세인트후이스 대학병원으로 가서 팔레타 교슈에세 미세수술법을 배웠습니다. 나중에는 프랑스의 성형외과 의사인 테지에 박사로부터 안면기형 수술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5년 동안 무려 3백여 구의 시신을 해부하는 노력으로 마침내 안면기형 수술로는 세계 최정상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부터 큰 인물은 한늘이 내리지만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큰 인물이 된 적은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큰 인물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노력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비젼만 내세우는 사람은 망치기 십상입니다. 비전을 가지되 그만한 노력이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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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조광조와 정치 개혁의 드라마
주역과 악역
조광조를 비롯한 그를 따르는 신진사류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의 반발을 보였다. 대간들은 사임으로 항거하였고, 조광조 등은 무엄하게도 새벽이 되도록 어전에서 물러나지 않은 채 중종의 윤허를 강요하였다. 마침내 기득권 세력들은 익명서(익명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투서)를 만들어서 돌렸다.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들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임금을 협박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는데 정녕 보고만 있겠느냐는 등 격렬한 내용이었다. 이를 계기로 개혁 세력과 수구세력간의 갈등과 대립의 양상은 원한의 골이 파여질 만큼 깊어지기만 하였다. 중종 임금은 결사적으로 달려드는 개혁 세력의 집요한 강청을 끝내 물리치지 못했다. 중종 13년 9월, 마침내 소격서를 혁파하라는 왕명이 내려진다. 조광조를 정점으로 한 개혁 세력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들이 주장하여 되지 않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급기야 이 해 겨울에 이르러 조광조는 대사헌의 지위에 오른다. 대사헌은 언로와 간관의 요체인 사헌부의 우두머리다. 이를 다시 요즘 말로 바꾸면 37세의 검찰총장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당시의 대사헌에게 주어진 막강한 책무는 지금의 검찰총장과 비길 바가 아님을 유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광조에게 주어진 대사헌의 자리는 용에게 여의주를 물려준 것이나 다를 바라 없었다. 이 엄청난 변화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구 세력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누려 온 기득권이 일시에 박탈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딸을 후궁의 자리에 밀어 올린 남양군 홍경주를 중심으로 밀계를 도모하게 된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아니 살아 남기 위한 방편이었다. 여기에 심정, 남곤 등 권부의 실세들이 가담을 했다. 이들의 밀계란 물론 조광조 등의 개혁 세력을 일거에 제거하는 일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한판 승부가 아닐 수 없었다. 중종의 치세는 어느 사이엔가 대간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왕명이 상소의 내용을 따르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젠 조광조의 발의가 없다고 하더라도 대간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야, 이것이 아니었어!" 조광조는 탄식하였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왕도정치가 변질되어 가고 있음을 뼈아프게 느끼면서 새로운 방도를 강구해야 되겠다고 다짐했을 때, 개혁 세력임을 표방하는 신진사류들은 참으로 엄청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정국공신들의 훈작을 삭제하라!" 정국공신이란 연산군을 밀어내고 중종을 옹립한 반정공신을 말한다. 이들의 훈작을 삭제한다는 것은 수구 세력의 기득권을 박탈하는 것이며, 원훈들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 엄청난 선언은 조광조가 처음 발설한 것이 아니었지만, 기득권을 잃게 된 수구 세력 쪽에서 본다면 조광조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일 수밖에 없었다. 신진 세력들의 주장은 이러하였다.
병인년(1506) 반정 당시 아무 공도 세우지 않은 무리들이 박원종, 성희안, 유자광 등에 아부하여 공신의 서열의 오른 사람이 허다하다. 1등신은 없어도 무방하다. 공신이 없는 공신들을 가려서 백성들에게 알림으로써 조정이 의롭다는 것을 보일 것이니. 보다 구체적으로는 삭제 대상이 무려 80여 명이나 되었다. 14년전, 성공한 쿠데타에 의해 책봉된 공신들의 작호를 삭제한다는 것은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홍경주, 심정, 남곤 등은 두 사람의 후궁이랑 결탁하여 중종의 심기를 뒤흔들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의 후궁이란 홍경주의 딸인 희빈 홍씨와 박원종의 양녀인 경빈 박씨를 말한다. 이들에 의해 꾸며졌다는 음모가 야사에 전해지는 소위 '주초위왕'의 사건이다. 대궐의 나뭇잎에 '주초위왕'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졌는데, 주자와 초자를 합자하면 조자가 되는 것이니, 조광조가 곧 임금이 될 것이라는 풍설을 퍼뜨렸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홍경주의 주청이 주효했던 것이었다. 조광조 등이 작당하여 후진들을 끌어들여 궤격을 일삼고, 소가 장을 능가하며, 천으로 귀를 방하니 국세는 어지러워지고 조정은 날로 말이 아니니 그 죄를 엄히 다스려서 마땅하다. 중종 임금은 젊은 대간들의 주청과 강요에 기력이 쇠진할 만큼 지쳐 있었다. 그런 때에 홍경주의 간청이 있었으므로 며칠을 고심한 끝에 홍경주에게 조광조의 일당을 단죄하겠다는 밀지를 내렸는데, 특이하게도 이날의 밀지는 언문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 중에 중종의 고심한 대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저들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요즈음에는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하고, 자도 자리가 편하지 못하여 파리하게 뼈가 드러났다. 내가 이름은 임금이나 실상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옛날에 유용근이 거만한 눈초리로 나를 보았으니, 이는 그가 나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은 먼저 저들을 없앤 뒤에 나에게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중종의 고심이 아무리 컸기로 어찌 이 같은 밀지를 신하에 내릴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밀지가 개혁의 주도세력이었던 신진사류의 씨를 말리는 '기묘하화'의 신호탄이었다.
조광조와 그를 따르고 받들던 신진사류들이 일거에 체포되어 하옥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애초에 조광조를 발탁하였던 안당은 그들에게 죄가 없음을 지성으로 탄원하였고, 성균관의 유생들은 자신들이 대신 죄를 받겠다고 자청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으나 역사의 흐름을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는 수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명리를 위해 개혁에 반대하는 도를 넘어서서 개혁 세력의 단죄에 나선 것이었다. 잡혀 온 개혁의 주체들은 모질고 참혹한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자신들에게 사심이 없었음을 당당히 주장하였고, 조광조 또한 자신의 심회를 떳떳이 밝혔다.
신의 나이는 서른 여덟입니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것이란 임금의 마음 하나뿐입니다. 망령되게도 국가의 병통이 이욕의 근원에 있다고 생각한 까닭으로, 국맥을 무궁토록 새롭게 하려고 하였을 뿐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영의정 정광필과 안당의 그들의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애썼으나 끝내 무위로 돌아갔고, 병조판서 이장곤은 옥사에 술을 보내어 그 들의 마지막 밤을 위로하였다. 개혁의 주체들은 그가 보낸 술을 마시면서 자신들의 비장한 심회를 시를 지어서 달래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날에 중종 임금의 어명이 내려진다.
조광조, 김정, 김구 등에게 장 1백을 가하고, 조광조는 능주, 김정은 금산, 김식은 선산, 김구는 개령, 윤자임은 온양, 기준은 아산, 박세희는 상주, 박훈은 성주로 각각 유배하라.
이에 항거하는 성균관 유생 1천명은 거리로 달려나와 엄중 항의하는 소동을 피우기도 하였으나, 끝내 중종 임금의 어의를 되돌려 놓지는 못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0일, 조광조는 유배지 능주에서 중종이 내린 사약을 받게 되지만, 금오랑이 압지를 만들어 사약을 가지고 와서 임금의 전지라고 말하자 그는 분연히 상소를 올리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용히 말했다.
국가에서 대신을 대접하기를 이와 같이 초라하게 함은 옳지 못하오. 그 폐단은 장차 간사한 무리로 하여금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멋대로 죽이게 할 것이오.
사약을 내리는 절차가 허술하면 장차 어명을 사칭하여 미워하는 사람을 사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뼈아픈 지적을 마치고 조광조는 의관을 정재하였다. 그리고 주군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38세의 극적인 삶을 마감하였다. 조광조는 사약을 마시기 직전에 중종 임금을 그리는 시 한 수를 지어서 남겼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랫세상을 굽어보니 붉은 충정을 밝게 비추어 주리"
후세의 사람들은 정암 조광조의 개혁의지가 급진 과격하였기에 실패를 자초했다고 평하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개혁하고자 한 사안들은 중대하고도 시급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암 조광조의 개혁의지는 숭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첫째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 세력들의 반발과 저항이 필사적이었고, 둘째 중종 임금의 성품이 우유 부단하여 초지를 관철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가지 장애 요인은 오늘의 현실과도 직결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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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꽃, 공중의 생
'예수 그리스도'의 유명한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 즉 마태복음 6장 26절에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 들의 꽃이 어떻게 자라나는가 살펴 보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요컨대 사람은 먹는 것, 입는 것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진리를 쫓아 영원한 삶에 눈뜨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인데 공기만 마시고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이고 보면 현실적으로는 꿈만 같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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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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