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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39 호
단기 4340. 2. 19 (음력 01.02)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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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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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눈을 보고 눈싸움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늙어간다는 증거. / 두그 라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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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二十八章 (노자 - 도덕경 : 제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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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爲天下谿, 常德不離, 復歸於孀兒.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爲天下式, 常德不?, 復歸於無極,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 樸散則爲器. 聖人用之, 則爲官長, 故大制不割.
지기웅, 수기자, 위천하계. 위천하계, 상덕불리, 복귀어영아. 지기백, 수기흑, 위천하식, 위천하식, 상덕불특, 복귀어무극, 지기영, 수기욕, 위천하곡. 위천하곡, 상덕내족, 복귀어박, 박산즉위기. 성인용지, 즉위관장, 고대제부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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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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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여덟째 장
직역
그 수컷 됨을 알고, 그 암컷 됨을 지킨다면 하늘 아래의 계곡이 된다. 하늘 아래의 계곡이 되면, 덕이 항상 떠나지 아니하니,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다. 그 밝음을 알고, 그 어둠을 지킨다면 하늘 아래의 모범이 된다. 하늘 아래 모범이 되면 덕이 항상 어긋나지 아니하니, 다시 가히(끝이) 없는 데로 돌아간다. 그 영예를 알고, 그 욕됨을 지킨다면 천하의 계곡이 된다. 천하의 계곡이 되면 덕이 항상 이에 족하니, 다시 순박함으로 돌아간다. 통나무가 흩어져서 그릇이 되는 것이니, 성인은 그것(樸)을 사용하여 본 받음의 으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큰 다스림은 나누지 않는다.
해석
비어 있음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이제부터는 상대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다.
남자는 남자다. 그리고 남자에게는 여자의 속성이 있다. 여자는 여자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남자의 속성이 있다. 라즈니쉬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태어났다. 따라서 남자의 속성과 여자의 속성을 모두 이어받는다. 즉 하나의 생명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의 합일로 가능한 것이다. 이때 태어나는 개체는 이 둘 중에 하나의 속성만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둘 다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더 구체화 성에 따라서 남성과 여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컷으로 태어났으면 그 내면에는 암컷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암컷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자신이 남자이면서 여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천하의 계곡, 바로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안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노자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남성됨을 알고 여성됨을 지킨다면 빔, 도, 근원이라 불리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한 단계 더 높여서 설명을 하면 자신이 빔이 되는 것이다.
흑백의 논리나 성격도 마찬가지이다. 순박함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본래의 속성이다. 때묻지 않은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이 어린아이가 구분하고 나누는 것을 배우면서 그릇이 되어 간다. 그 순박함을 잘라 내어서 어린아이는 이제 학생이 된다. 그리고 회사원이 된다. 사회 속의 하나의 부속품이 되어 간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은 순박함을 가장 높이 친다. 가장 높은 자리에 둔다. 큰 제도는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하늘은 비를 뿌릴 때 좋은 사람의 논이라도 더 많은 비를 뿌리지 않고, 나쁜 사람의 논이라고 비를 적게 주지 않는다. 그냥 비를 뿌릴 뿐이다. 그것이 樸이다. 이 樸을 본 받으라고 한 것이다.
자 이제 순박함으로 돌아가 보자. 그럼 어린아이가 제일 행복한가.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의자가 된 나무를 다시 숲에다 심을 수 있을까. 우리는 노자가 이야기 한대로 살고 싶을 수도 있다. - 싫어도 상관은 없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희망은 없는가. 의자가 된 나무도 빔이다. 그대는 아직 늦지 않았다. 의자가 숲속의 살아 있는 나무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어린아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빔으로 돌아갈 수 는 있다. 그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싶은가. 수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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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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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수컷의 억셈과 능동적인 힘을 발휘할 줄 알면서도 암컷의 유순함과 겸허함을 지킨다면 모든 물줄기가 모여드는 계곡과 같이 천하의 인심은 그에게로 쏠리게 될 것이다. 천하의 물줄기가 모여드는 골짜기와 같이 된다면 덕은 언제나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는 젖먹이 상태로 되돌아 기게 될 것이다. 흰빛처럼 세상에 빛나는 존재가 될 길을 알면서도 남의 눈에 드러나지 않은 자신을 지킬 수 있다면 그는 천하의 모범이 된다면 덕은 언제나 그에게서 차질을 보이지 않을 것이고 무한한 도의 경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세상의 영예를 누릴 방도를 알면서도 참고 욕된 위치를 지킬 수 있다면 모든 물이 흘러드는 골짜기처럼 세상의 인심은 그에게로 귀속하게 될 것이다. 모든 물이 흘러드는 골짜기처럼 된다면 덕은 언제나 넉넉한 것이고, 아직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도의 꾸밈없는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갓 베어 낸 통나무가 다시 쪼개지고 다듬어지면 여러 가지의 기물이 나오는 것처럼 도의 상태가 표출되면 인재가 나오게 된다. 따라서 성인은 그들을 발탁하여 관리의 우두머리가 되게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다스릴 때 큰 원칙만을 지키고 자질구레하게 세분하지는 않는다.
주
식: 본보기, 모범. 특: 어긋나다, 차질이 생기다. 무극: 무한한 도의 궁극의 상태, 한없는 도의 시원의 상태. 이 단어는 훗날 주렴 계의 태극도 설에 수록되어 송대의 형이상학의 중요한 개념이 됨. 박: 산에서 갓 베어 낸 거친 통나무, 순수한 것. 여기서는 도를 상징함. 대제: 무위자연의 도에 따라 큰 원칙만을 지켜 백성들을 꾸밈이 없이 소박함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정치를 말함.
해
노자는 이 장에서 무위자연의 도를 체득한 사람의 생활 태도를 암컷의 유순함, 골짜기의 겸허함, 젖먹이의 때묻지 않은 순진함, 갓 베어 낸 원목의 질박함 등으로 비유하여 기술하고 있다. 흰빛처럼 빛날 수 있으면서도 검은빛처럼 남의 눈에 발견되지 않은 자신을 고수할 수 있다면 세상의 본보기가 될 수 있고 유덕자의 위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도의 궁극적 본질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영예를 누릴 방안을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남이 알아주지 않은 낮은 위치에서 청류와 탁류를 가리지 않고 모든 물줄기를 받아들이므로 그 유덕 함을 지키는 것이다. 노자가 즐겨 쓰는 박이란 단어는 산에서 갓 베어 낸 통나무를 말하며, 그것은 아직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소박하고 순수한 자연 즉 도의 상징인 것이다. 그 통나무가 갈라지고 다듬어지면 우리가 일상 생활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멋진 그릇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 원리를 보다 구체적 일상 생활의 예와 결부시켜 설명한 말이기도 하다. 즉 때묻지 않은 원목이 그릇이 되는 것처럼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러운 도의 본바탕이 구체화, 현상화된 것이 바로 덕인 것이다. 그러한 덕을 지닌 사람을 성인은 발탁하여 여러 관원의 으뜸으로 삼기도 한다. 성인은 세상을 다스림의 도에 있어 큰 원칙만을 지킬 뿐 잘게 나누지 않는다. 즉 무위자연의 도는 쫓으면 그만이지 번거로운 제도 행정에 의지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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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극적으로 구출된 보화각의 부도와 석탑
지금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보화각) 뒤뜰에는 지난날 일제 밑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유린당했다가 간송 전형필 선생의 극적인 보호를 받은 행운의 '석조부도' 와 석탑이 세워져 있다. 먼저 부도. 원위치는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이름을 잃은 절터에서 고려 중엽 이전의 양식을 갖춘 깨끗하고 아름다운 부도를 본 일본인 악당들은 마을사람 하나를 매수하여 그것을 공공연히 빼돌렸다. 시기는 1930년대말. 곧 이 부도는 인천으로 옮겨졌고, 배에 실려 일본 본토로 팔려나가게 되는 최악의 수난에 직면해 있었다. 그것을 인천 항구에서 붙잡은 사람이 간송이었다. 민족문화재 수호와 해외유출 방지를 위해 막대한 사재를 아낌없이 그리고 가치 있게 투입하던 간송의 민족적 사명감은 당장 그 일본인 무법자와 대결하게 했다. 그는 일본인이 제시한 엄청난 액수를 즉석에서 지불했다. 부도를 실은 배가 인천에서 출항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극적으로 구출된 괴산 부도는 인천에서 보화각이 있는 숲 속에 옮겨져 소중히 복원되었다. 지금의 상태는 한국전쟁 때 쓰러졌던 것을 1964년 2월 3일에 부도의 은인인 간송의 대기일을 기념하여 한국미술사학회의 전신인 고고미술동인회가 재차 복원한 것이다. 다음은 삼층석탑. 언제 어디서 어떤 일본인 악당이 반출했던 것인지 일체의 기록을 상실한 고려시대의 유물인데. 이미 일본 본토로 팔려갔었다. 그 뒤 오사카에서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을 때 서울에서 간송이 그 정보를 입수했다. 이번에도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되사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사람을 놓아 가격에 구애받지 말고 낙찰시키도록 당부했다. 오사카 경매장에서의 응찰 경쟁자는 당시 일본의 어느 재벌이었다. 그러나 그도 결국 막판에 가서 손을 들었다. 온갖 오욕을 당하던 석탑은 간송의 민족적 결의와 대담한 돈의 지원으로 다시 고국에 돌아와 역시 보화각 뒤뜰에 조용한 안신처를 얻었다. 간송은 평소 그가 손댄 장한 일의 내막이나, 거기에 쓴 돈의 액수를 조금도 밝히려고 하지 않은 고매한 인격자였다. 따라서 앞의 괴산 부도나 일본에서 되사온 삼층석탑에 정확히 얼마나 많은 돈을 지출했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간송은 자신만의 지출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 대신 과거의 그의 너그러운 인품을 말해주는 일화는 많다. 오사카 경매장에서 만난을 무릅쓰고 한번 보지도 않은 삼층석탑을 무조건 되사오게 했던 일에 대해 간송은 뒷날 한 가까운 연구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일본 재벌과 경쟁이 붙는 바람에 생각했던 이상으로 엄청난 값으로 낙찰을 보았으나 막상 일본서 실어다놓고 보니 기대했던 거와는 딴판이라. 허나 하는 수 없었지 어쩌나."
그뿐이었다. 일제 밑에서 간송처럼 이땅의 문화유산을 철저한 사명감과 신념으로 사랑하고 행동으로 지킨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반면 악질적인 일본인들과 결탁하거나 그들의 수법을 배워 민족문화재를 도굴 혹은 불법반출하여 일본인 사회에 팔아먹는 딱한 조선인 무뢰한과 그 앞잡이들이 1930년대엔 부쩍 늘고 있었다. 1935년 8월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적발되고 있다.
"경북 문경군 신북면 관음리의 폐사지에 서 있던 석탑을 서울 신용산에 사는 임장춘이란 자가 사서 운반 중이라는바, 그러한 매매와 운반은 법령 위반임. 조사보고 요망. 판사람은 현지 관음리의 이아무개. 손아무개임. 임장춘은 석탑류 매매의 상습자인 배성관이란자와 전부터 긴밀한 사이이나 이번 사건의 책임자는 임이었고, 배는 뒤에서 자금을 융통해준 간접적인 관계에 있음."(총독부에서 경북도지사 앞으로 보낸 서류)
현재 문경읍 경찰서 갈평지서에 세워져 있는 관음리 오층석탑이 바로 그때 임장춘이 불법반출하려다 실패한 석탑이다.
[관음리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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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8장 종교에 관한 명상
3.종교의 역할
인간의 행위가 목표와 방향을 상실할 경우 사회와 역사는 방황과 혼돈에 물들기 마련이고 따라서 좌절과 몰락 및 후퇴가 삶을 지배하게 된다. 사회와 역사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해야할 일을 망각하고 매일같이 노름과 음주를 계속한다면 그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앞에서 말한 인간 행위의 목표와 방향은 내면적, 유기적, 전체적인 목표와 방향을 지시한다. 제아무리 확고 부동한 목표와 방향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외형적이요 형식적인 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그러한 목표와 방향은 인간의 삶에 하등의 가치나 의미도 부여해주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개인이나 사회가 확실한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여 놓고 전혀 실천적인 행위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목표와 방향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넓게 현대 사회라는 전체적 입장을 염두에 둘 경우 그리고 좁게는 한국의 현실적인 종교의 위치와 역할을 돌이켜볼 때 과연 우리는 어떠한 느낌과 생각을 가지게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어떤 특수한 종교의 교리나 의식에만 절대적으로 충실한 입장에 선다면 그때는 별다른 큰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 우리들은 불교나 기독교의 어떤 한 종교를 맹신함으로써 다른 것을 보살필 여지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사태를 근원적으로 파악하고 탐구하기 위해서는 설령 어떤 특수한 한 종교를 신봉한다고 할지라도 종교 일반에 관한 보편적 필연적 요소를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지니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인간과 세계의 본질 및 근원에 관한 근본적인 탐구를 기초로 해서만 어떤 특수한 하나의 종교도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바탕을 소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종교에 관하여 우리들이 일상적인 삶의 도처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현상을 가지고 몇 가지 물음을 던져 보기로 하자. 물론 여기에서 내가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종교의 종파나 집단을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일반적인 경향을 고찰하기 위한 것이다. 우선 어떤 종교 집단 및 그것을 이끌어 나가는 이들이 어떤 교리를 군거로 삼고 있는가? 말하자면 보다 더 성숙하고 반성적인 교리인가 아니면 아직도 자연적인 성격을 여전히 띤 교리인가? 다음으로 한 종교는 어떤 전통을 소유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어떤 교리에 관한 물음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서 어떤 특수한 종교에 있어서 종교 정신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의미를 결여한 우연적, 순간적인 감정과 선동을 근거 삼는 요소는 없는 것인가? 세 번째로는 한 종교는 어떠한 의식을 지니고 있는가? 인간과 세계의 근원인 절대자에 대한 속죄와 사랑 및 자비의 의식을 소유하는가 아니면 단지 현실적 구체적인 인간으로서의 한 특수한 개인을 신격화, 절대화하는 것은 아닌가? 넷째로 종교는 공적인 사회나 국가에 대하여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대부분의 사이비 종교는 주관적, 독단적인 교리를 가진다. 어떤 사이비 종교는 물질, 육체적인 만족을 최대한으로 보장한다는 교리를 내세운다. 아니면 어떤 유사 종교는 유일한 인간을 초월하여 신선이나 선녀가 될 수 있다는 교리를 주장한다. 이러한 교리는 인간성을 무시한 공허한 독단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첫 번째 물음을 던져본 것이다. 많은 유사 종교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전통을 날조하고 있다. 불교나 유교 또는 기독교의 이론들을 적당히 혼합하여 자기네 전통을 세우려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역사의 전개와 함께 의식이 점차로 성숙함으로 인하여 종교의 전통이 확립될 수 있는 것이지 적당히 여러 이론을 혼합한다고 해서 타당한 전통이 갑자기 세워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종교적 정신이 점진적인 전개에 의하여 성숙한 전통은 자연적으로 어떤 한 종교에 고유한 의식을 구성해 주기 마련이다. 어떤 유사 종교에서는 불교, 유교, 기독교의 의식을 뒤범벅 하여 가장 완전한 의식인 것처럼 허풍을 떤다. 그러한 유사 종교는 그만큼 절대자에 대한 신앙의 전통을 결여한다. 따라서 세 번째 물음이 던져질 수 있다. 다음으로 네 번째 물음을 살펴보자. 대부분의 유사종교는 공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공적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종교가 인간의 신앙심에 대하여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소수의 특수한 집단만이 공감을 가지는 유사종교는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의 범위를 이탈한다.
나는 앞에서 종교의 일반적 현상에 관하여 몇 가지 물음을 던지고 그러한 물음을 제기하게 된 근거를 간단히 해명하였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들의 종교는, 그것이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이슬람교이든 간에 일반적으로 부정적이며 일상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많이 소유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부정적, 일상적인 측면을 향하여 극단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경우 인간은 결국 미래지향적, 자기 결단적인 인격체로서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한낱 개인 및 수단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어쩌다 신문지상을 통하여 우리는 신자 몇 명이 있는 교회는 얼마만큼의 액수에 거래된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교회는 전통적이며 정상적인 교회는 아닐지라도 종교가 지나치게 세속화하는 현상을 그러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이제 우리들의 주제에 접근하기 앞서서 잠시 헤겔의 말을 인용해보기로 하자. "종교의 대상은 철학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객관성 자체에 있어서의 영원한 진리이다.. 즉 그 대상은 신이며 신 외의 아무 것도 아니요 신의 드러남이다. 철학은 세속의 지혜가 아니라 세속적이지 않은 것의 인식이다. 또한 철학은 외부적인 양과 경험적 존재 및 삶의 인식이 아니라 영원한 것, 신인 것, 신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의 인식이다. 왜냐하면 이 본성은 계시되고 발전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종교를 드러내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또한 자신을 드러내면서 종교를 드러낸다." 헤겔의 이러한 말은 얼핏 읽어서 이해가 가지 않는 이러한 개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헤겔의 이 말에서 종교와 철학이 서로 전혀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서 동일한 차원에서 고찰될 수 있다는 암시가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와 철학 양자는 단순히 일상적, 반복적인 삶의 양상이 아니라 일상성과 반복성이 자기 순화를 거쳐서 순화되고 성숙한 세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종교가 절대자에 대한 고도로 순환된 인간의 느낌과 행위를 내용으로 삼는다면 왜 그러한 종교가 종교 일반의 현상에 있어서 오늘날 바탕과 방향을 상실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현실적인 종교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종교의 일반적, 필연적, 보편적 근거를 제시하는 일이 종교 철학의 과제이다. 왜냐하면 오직 현실적인 어떤 특정한 종파의 교리나 의식만을 고집하고 나열하는 처사는 신앙다운 신앙이 아니라 단지 개인적인 신념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가 개인적인 신념에만 집착할 때 그것은 개방된 종교가 되지못하고 인간과 세계의 본질 및 근원을 은폐시키는 폐쇄적인 종교가 되기 때문이다. 근원적 원리가 폐쇄될 때 종교는 자신의 본질을 전개시키지 못하고 형식의 틀 안에서 질식하고 만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보는 유사종교나 또는 일부 교회에서 이러한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다. 오직 자기네 종교만이 참다운 구원을 약속하는 유일한 종교이며 다른 종교 또는 옆에 서 있는 다른 교회는 구원의 길을 이탈하였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종교의 보편성을 상실한 것이다. 보편적인 신앙만이 참다운 종교의 내용을 구성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차지하는 종교의 위치와 역할은 어떤 것인가? 현대 사회나 종교, 이들은 모두 한마디 말로 간단히 정의 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현대 사회 그리고 종교라는 개념은 우리가 임의적으로 취급할 수 있는 눈 앞에 뚜렷이 보이는 경험, 감각적 대상이 아니라 어떤 다른 존재보다도 복잡한 인간과 그의 근원을 중심으로 삼는 개념이다. 그렇긴 해도 이들 두 개념의 근원적인 차원을 고찰할 경우 우리들은 현대 사회에서 차지하는 종교의 위치와 역할을 구성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은 현실적, 내면적, 유기적, 동적인 차원에서 종교의 역할이라는 문제를 구성할 수 있다. 너와 나를 포함하는 우리들 모두는 "지금" 살고 있다. "지금 "을 우리는 현대라고 부른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장소는 현대의 산업사회이다. 현대의 산업사회를 날카롭게 바라볼 때 우리는 그 특징을 "과학적 정보"와 "기술적 수단"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심지어 우리들의 정신 활동마저도 과학적 정보와 기술적 수단에 의한 생산관계 및 생산구조에 예속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매일매일 신문과 라디오와 텔레비젼을 통하여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새 기술에 의해서 어떤 상품이 나왔는지에 대한 정보를 우리들은 끊임없이 얻고 있다. 그러나 비록 현대 산업사회에서 정신활동과 인간성이 소외된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다시금 긍정적인 삶의 전환을 시도함이 바로 인간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도가 없다면 인간의 삶과 세계는 공허한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앞에서 잠시 말한 현대인의 인간성의 상실은 오늘날 우리들이 저개발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선진국이든 간에 어디에서나 직접적으로 접하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과 연관시켜볼때 가장 가까운 우리들의 주변에서 종교는 과연 어떠한 양상을 띠고 있는가? 비록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는 할지라도 인간의 사회화만 집단적으로 이행될 경우 사회는 공동사회의 형태를 상실하고 단지 이익사회의 형태만을 취할 우려가 있다. 자유와 자율을 지닌 인간성이 무너지고 사회집단에서 인간이 단지 기계적인 기능만을 수행한다면 인간의 미래는 인간성 상실 밖에 다른 것을 가져올 수 없다. 현대 산업 사회는 고도의 이익사회이며 여기에서는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를 막론하고 종교마저도 이익사회의 중요한 요인을 이루고 있는 실정을 엿볼 수 있다. 현대 산업사회가 단지 정치, 경제, 사회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이익사회의 형태를 취할 경우 인간은 더이상 인격체이기를 포기하고 단지 사회의 수단에 불과한 개인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는 종교 또는 인간의 삶과 세계의 근원에 관한 원초적 신앙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에만 관계하게 된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종교를 #1교리 #2전통 #3의식 #4공공기관, 말하자면 사회 내지 국가와의 관계에서 고찰할 수 있다. 종교를 이러한 측면에서 고찰하여 종교의 근원적 현상 그리고 더나아가서 종교의 근본원리를 밝히는 탐구가 바로 종교 철학이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종교철학이란 인간의 주관성에 의해서 종교의 근원세계를 창조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관성이란 항상 변화하는 개인적 주관과는 질적으로 다른 보편적, 필연적인 인간의 자기반성을 의미한다. 창조적 구성이란 삶과 세계의 근원에 대한 탐구이다. 만일 현대사회가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종교의 위기를 뜻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항상 종교는 인간의 주체적인 내면에서 근원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상 종교는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가장 의미심장한 한 방식임에 틀림없다. 한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는 그의 전 삶의 의미와 가치 및 방향을 좌우하는 요인이며 사회나 국가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종교란 간단히 말하자면 내면적인 인간의식의 전개이다. 종교가 지나치게 사회화하여 은폐되느냐 아니면 인간의 자유와 걸맞게 개방되느냐 또는 종교가 정지된 상태로 남아있느냐 아니면 동적 유기적인상태로 전진하느냐에 따라서 종교의 교리, 전통, 의식을 위시하여 인간과 사회와 국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소유할 수 있다. 종교의 역할을 명백히 밝히기 위해서는 종교와 신학 및 철학의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해결할 필요가 있다. 종교라는 개념과 신학이라는 개념에 관해서 우리는 막연하고도 일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종교와 신학을 구분할 경우 종교는 앞에서 말한 대로 교리, 전통, 의식, 공적기관에 의해서 인정받은 신앙의 내용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비하여 신학은 특정한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종교를 이론적,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이라고 하면 흔히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좀더 넓게 말하면 신학은 종교 신학이 된다. 헤겔은 그의 초기 저서인 <민족 종교와 기독교에 관한 단편, 1793∼1794>에서 객관적 종교와 주관적 종교로 구분하여 본다. 그는 인간의 형식적 지식의 뒷받침이 되는, 다시 말해서 추상적 논리가 주로 작용하는 종교를 객관적 종교라고 한다. 이것은 신학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신앙에 의해서 나와 절대자가 하나가 되지못하고 절대자인 신은 탐구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이에 반하여 주관적 종교는 느낌과 행위에 직결된 것으로 세계근원의 내면에 들어가 생명력을 가지며 외부세계에 내면적 생명력을 불어넣는 종교이다. 이렇게 볼 때 신학은 객관적 종교에 그리고 신앙은 내면적인 느낌의 움직임이다. 나는 이제 종교 철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배르그송과 쉘링을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베르그송은 성숙한 그의 후기 저서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종교를 정적 종교와 동적 종교로 구분한다. 정적 종교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곧 사회제도 안에 일상적으로 시인되고 있는 종교이다, 그리고 동적 종교는 정적 종교에 생명력과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종교를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동적 종교는 종교에 있어서의 역동적, 창조적인 요인을 일컫는다. 베르그송을 다시 해석하자면 종교는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정적인 것으로 사회제도 안에서 굳어진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동적인 것으로 굳어진 요소를 타파하고 생명을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이중적 성격을 우리는 종교의 역사와 아울러 우리 주변에서 접할 수 있다. 퇴폐한 카톨릭에 대항하여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정적 종교를 동적 종교가 개선하려고 한 노력을 볼 수 있다. 우리 주변의 타락한 불교나 기독교를 부흥시키고 소생시키려는 움직임도 볼 수 있다. 앞에서 본 베르그송의 탐구 자세는 곧 인간과 세계의 본질 및 근원을 은폐로부터 개방으로 전환시키려는 삶의 유기적 구성이다. 그의 견해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종교의 역할에 하나의 긍정적인 조망을 우리들에게 안겨다 준다.
우리들이 직접 접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종교의 역할에 다시금 또 하나의 긍정적인조망을 부여하기 위하여 이제 잠시 쉘링의 종교 철학을 살펴보기로 하자. 쉘링은 그의 말년 저서의 <신화 철학>과 <계시철학>을 통하여 자신의 종교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헤겔이 그의 종교 철학에서 종교를 자연종교, 예술종교, 절대종교의 단계로 구분하여 종교의 변증법적 발전단계를 논하고 있음에 비하여 쉘링은 신화와 계시에 관하여 종교의 성숙과정을 논한다. 근본적으로 볼 때 쉘링과 헤겔은 종교의 발전과정을 변증법적 역사 과정으로 고찰하는 점에서 서로 별 차이가 없다. 또한 쉘링이 종교를 신화로부터 계시로 전개시키고 있는 점은 헤겔이 종교를 자연종교로부터 절대종교로 전환시키고 있는 점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이렇게 보면 베르그송과 쉘링 및 헤겔 모두는 인간의 원초적인 의식의 발전과정이 종교의 발전 단계에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의 언어와 사유와 행위는 정신적인 삶의 차원에서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순환구조를 형성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언어는 사유를 그리고 사유는 또한 행위를 필연적으로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말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행동한다. 이렇게 볼 때 쉘링이 종교의 성숙과정을 신화와 계시로 구분하여 보고 있는 점은 순환적인 변증법인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준다. 왜냐하면 언어와 사유 및 행위가 본질적으로 삶과 세계의 근원에 관계하는 한에 있어서 언어와 사유와 행위가 아직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 그것은 신화의 단계에 있으며 비로소 의식이 완전히 현실적으로 자기 전개를 할 경우 언어와 사유와 행위는 개방되어 인간과 세계의 근원에 관한 계시에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쉘링이 뜻하는 신화는 절대자의 불완전함이 나타남이며 그가 말하는 계시는 우연적 신비적 사건이 아니라 절대자, 곧 삶과 세계의 근원 원리 자체의 드러남이다. 그러므로 일상적인 의미에서 하늘로부터 무슨 음성을 들었다거나 등줄기에 축복의 불꽃이 내려꽃히는 것을 체험했다고 하는 등의 이야기는 "계시"와는 전혀 상관없는 개인적인 상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데카르트나 칸트가 말하는 인간 이성에 의한 신 존재의 증명은 재 고찰될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절대자 신의 존재는 유한한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는 이성적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거이다. 쉘링이나 헤겔 그리고 베르그송은 종교 철학에 논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가장 성숙하고 완성된 종교, 곧 개방된 종교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 의식의 조화, 성숙, 그리고 완전한 자기 순화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볼 경우 기독교가 또는 불교가 아니면 이슬람교가 다시 말해서 어떤 특정한 종교가 가장 이상적, 절대적인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과 편견을 면할 수 없다. 인간의 의식은 특수하게 제한된 역사적, 지리적 전통을 배경으로 지니고 있으므로 종교의 양상도 그 현실적인 모습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불교나 이슬람교보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1불교나 이슬람교의 내면적 측면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잘 모르기 때문이며 #2기독교의 전통에만 젖어있기때문일 것이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불교가 기독교보다 훨씬 더 종교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종교이든 간에 교리와 전통 및 의식과 공적인 관계에서 어느 한 측면에만 지나치게 치우칠 때 그것은 개방된 창조적 종교가 되지못하고 폐쇄된 형식적 종교의 성격을 띤다. 오늘날 우리들이 주변에서 흔히 대하는 유사종교들은 헛된 교리와 허황된 의식을 고집 하는데 그러한 것은 폐쇄된 형식적 종교를 가장 잘 대변한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과학 정보와 기술 수단"의 지배 아래에서 단순히 기구화, 집단화할 때 종교의 역할은 지극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한 예로 어떤 특정한 교회에는 옷차림 마저 화려한 사람들이 대부분 자가용을 타고 예배드리러 오므로 가난한 사람들은 감히 드나들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의 사회화와 사회의 인간화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종교도 참다운 내용과 형태를 회복하기 마련이다. 이때 종교는 교리, 전통, 의식 및 공적 관계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내면적인 깊이를 가진 종교로 등장할 수 있다. 만일 종교가 오직 체계적인 신학으로 대치된다면 종교는 생명감 넘치는 신앙을 상실하여 형식화하며 의식만으로 대변될 때 사회의 단순한 제도로 고정되기 쉽다. 특히 유교는 이조를 통하여 사회제도를 형식화한 점이 많다. 또한 종교가 전통만으로 대변될 때 반성을 결여한 습관적인 일상성에 물들기 쉽다. 교회나 절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내용은 무시하고 오직 전통만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또한 종교가 오직 공적 관계에서만 명맥을 유지할 경우 그것은 자칫하면 정치, 경제적인 도구와 수단이기를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들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수단적, 방법적 물음은 결코 종교를 내면화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긍정적으로 지양시킬 수도 없다. "인간과 세계는 왜 있는가?"라는 근원 물음은 비로소 철학과 종교를 하나로 형성하여 종교 철학을 가능케 해준다. 왜냐하면 인간과 세계의 근원, 곧 절대자에 대한 경건한 자세로서의 신앙은 바로 근원 진리에 대한 경건한 추구이자 예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때 기도는 인간과 세계의 근원인 절대자에 대한 경건한 탐구 자세이지 결코 개인적 이익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다. 흔히 "나와 내 가정의 건강과 행운을 보살펴 주십시오". "오직 우리 교회만을 부흥하게 해주십시오"와 같은 외침은 이기적인 욕망의 표현이지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없다. 내면적인 영혼이 절대자를 부를 때 기도가 이루어진다. 종교는 한 인간과 사회와 민족 그리고 국가를 지배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장 심원한 정신적 바탕을 구성하는 뿌리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순화될 때,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정신적 자세인 의식이 개방될 때 삶은 창조적이며 미래지향적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가 극단적으로 사회화하면 종교의 본질은 은폐되고 또한 삶 자체도 폐쇄되어 목적과 방향을 상실하고 만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성적 신앙의 근원 및 원리를 탐구하는 종교 철학적 관심은 인간의 삶이 부정적으로 등장하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보다 본질적이고도 긍정적인 종교의 역할을 밝혀줄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긍정적, 창조적 종교만이 인간에게 미래지향적이며 인간과 세계의 내면성 및 전체적으로 드러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긍정성, 창조상은 어떤 특정한 종교만이 홀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종교는 모두 제나름대로의 긍정성,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 의식이 항상 새롭게 자기 반성과 아울러 자기 형성을 할 때 종교는 항상 은폐성과 형식성을 떨쳐버리고 창조적인 종교로 지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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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참
본뜻 : 원래'참'이란 말은 옛날에 역말을 타고 가는 곳을 이르는 역참에서 나온 말이다. 요즘은 우편, 통신 제도와 다름없는 옛날 파발마 제도에서 역말을 갈아타기도 하고 한숨 돌리며 쉬기도 했던 곳이 역참이었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바뀐 뜻 :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로 뜻이 확대된 말 중에 하나다. '길을 가다 쉬는 곳''일을 하다 쉬는 시간' 나아가서는 '일하는 사이에 먹는 음식'이라는 뜻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주로 밤참, 저녁참, 새참 등 일하는 중간 중간에 간단히 허기를 끄기 위해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쓴다.
벽창호
본뜻 : 평안북도 벽동, 창성 지방에서 나는 크고 억센 소인 벽창우에서 온 말이다
바뀐 뜻 : 벽창우처럼 고집이 세고 성질이 무뚝뚝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볼멘소리
본뜻 : 볼이 메어질 정도로 부어서 하는 소리를 가리킨다
바뀐 뜻 : 화가 나서 퉁명스럽게 하는 말투나 불평하는 말투를 나타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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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오직 믿음으로!
1517년 늦은 가을, 비텐베르크대학 교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95개조로 된 질문장을 교회에 보냈다. 이 사건은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리는 불꽃 점화식이 되었다. 루터는 당시 독일 곳곳에서 행해지던 면죄부의 배포와 판매에 의문을 제기했다. 로마 교황에 따르면 교회에 기부를 하는 사람은 선행을 베푼 것이 되어서 현세에서 범한 죄도 용서받는다는 것이었다. 면죄부는 바로 그 증명서였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을 근거로 구원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도달한 결론은 인간의 구원이나 선행의 여부가 면죄부의 구매 여부에 의해 좌우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었다. "오직 믿음으로!" 라틴어로 하면 "솔라 피데(Sola fide)", 이것이 구원의 유일한 방식이었다. 루터는 구원의 문제 이외에도 신앙생활 전반에 대해서 교회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 교회는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고, 교회의 규칙대로 생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루터는 달랐다. 먼저 성경을 읽고, 그 정신을 깨달아서 신앙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니 루터와 교회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루터가 처음부터 교회의 분열을 꾀하지는 않았다. 그는 글자 그대로 개혁을 원했다. 잘못된 관행을 성경의 정신에 일치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를 징계하고 주장을 철회하도록 압력을 가하자 루터는 그가 믿는 진리를 수호하고자 했다. 어느 시대에나 그렇듯이 개혁은 혼자의 힘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개혁자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실효가 있기 때문이다. 루터에게도 이미 동조자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개혁 요구는 지지세력들을 결집시키면서 개혁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개혁운동은 기존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교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추종자들은 신앙만을 중시하고 성경을 깊이 연구했다. 교황제도와 마리아를 위시해서 성인숭배를 거부했으며, 특별한 성직자도 인정하지 않았다. 교회 건물도 외부 장식만 화려하게 하는 대신에 신도들의 예배 장소로써 검소하게 꾸몄다. 루터에 의해 이렇게 시작된 개혁의 물결은 독일 북부로 확대되면서 국토의 반 정도를 그 세력권으로 했고, 마침내는 덴마크와 스웨덴까지 확산되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은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의 말이었다. 바울은 신약성경 로마서 1장 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하고 있고, 에베소서 2장 8절에서는 "너희는 그 은혜 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는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이 루터의 독창적인 말은 아니다. 다만 당시 교회가 성경의 원칙에서 벗어난 교리를 주장했을 때 그 말을 다시 환기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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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외롭지 않은 남매
명희와 철희는 고아가 된 지 4년이 되었습니다. 명희가 고등학교 2학년, 철희가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조그만 직장에 다니던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시골의 친척집에 가다가 교통 사고를 당해 모두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남매는 외롭지 않았습니다. 세들어 사는 주인집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딸처럼, 아들처럼 따뜻하게 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집의 문간방에 살게 된 지는 8년이 되었습니다. 의사였다가 은퇴한 주인 아저씨가, 집은 넓은데 식구가 별로 없어 쓸쓸하다면서 사람이 오면 문이나 열어달라며 문간방을 싸게 전세로 내주었습니다. 문간방이라고 하지만 큰 방 하나에 자그만한 방 한 개가 딸려 있고, 부엌과 수세식 화장실이 따로 있기 때문에 별채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 집에는 손님들이 참으로 많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벨 소리가 나면 철희네 식구들이 달려나가 문을 열어주곤 했습니다. 명희와 철희가 공부를 할 때는 주로 어머니가 나가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방문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가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들어 둘 다 벨 소리를 듣지 못할 때는 주인 아저씨 혹은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주었지만, 그 분들은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잔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는 통장에 겨우 2백만원이 들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전세금을 빼어 달동네로 들어가 남는 돈으로 학교를 마치려고 했습니다. 남매는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그 계획을 말하고는 전세금을 빼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 아저씨는 당장은 돈이 없어서 빼줄 수 없고, 철희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빼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남매는 주인 아저씨가 몹시 미웠습니다. 돈 많기로 동네에 소문이 난 노부부가 욕심쟁이처럼 보였습니다. 남매는 새벽2시에 일어나 신문 배달을 했습니다. 그 돈으로 등록금을 내며 간신히 학교에 다녔습니다. 큰아버지, 작은아버지가 한 번도 와보지 않아 섭섭했지만, 남매는 용기를 내어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고생이 끝날 것이라고 서로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명희와 철희는 학교 성적이 항상 1등이었지만, 신문 배달을 하면서 조금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반에서 5등 밑으로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누나인 명희가 감기 몸살로 코피를 흘리고 열이 40도를 오르내릴 때면 철희는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명희는 신문을 배달하러 나갔습니다. 남매는 날마다 보급소에서 신문을 받아 서로 반대 방향으로 아침 공기를 가르며 뛰었습니다. 신문 배달을 끝내면 쉴 틈도 없이 바로 학교로 갔습니다. 명희는 그렇게 해서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졸업식장에 놀랍게도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꽃다발을 들고 와주었습니다. 명희는 너무 감격하여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평소에 마른 반찬이나 김치를 갖다주기는 했지만, 전세금을 빼주지 않아 섭섭한 감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찾아온 것은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명희에게 직장에 다니면서 방송통신대학에라도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겠다면 학비를 대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돈만 알 것 같은 주인 아저씨가 그런 말을 하다니... 그러나 명희는 동생 철희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대신 빨리 결혼하여 자립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명희는 아버지가 다녔던 회사의 경리사원으로 들어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던 대로 스무 살에 결혼을 했습니다. 거래업체 사원의 프로포즈를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나이가 무려 서른 살이라고 했지만, 명희는 그 남자를 좋아했습니다. 주인 아저씨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명희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 주었습니다. 알리지 않아 친척들은 참석하지 않았지만, 대신 주인집 노부부와 출가한 그 집 딸들이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와주었습니다. 명희사 딴살림을 차리자 철희는 더욱 외로워졌습니다. 그러나 외로움을 공부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자그마한 방으로 이사를 가고 싶었지만, 주인 아저씨는 여전히 전세금을 빼달라는 말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음식을 줄 때는 고맙기도 했지만, 철희는 대개는 섭섭한 마음으로 그 집에서 살며 공부를 했습니다. 마침내 철희도 고등학교를 마쳤습니다. 그는 주인 아저씨를 찾아가, 창원에 있는 어느 공장의 선반공으로 가게되었으니 이번에는 정말로 전세금을 돌려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그제서야 빙그레 웃으면서 장하다고 칭찬하고는, 돈은 당장이라도 돌려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저씨의 돌변한 태도에 철희는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명희를 찾아가 창원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철희는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 앞에 무릎을 끓고 눈을 떨구었습니다. 그리고는 형님(주인집 아들)이 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창원에 가지 않고 이 집에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 집 딸들은 오래 전에 다 시집을 갔고, 막내인 아들은 군의관으로 복무중인데 앞으로 1년 반만 있으면 제대한다고 했습니다. 철희는 어젯밤에 매형으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철희와 명희는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주인집 어른들이 너희를 생각해서 돈을 주지 않은 거야. 달라고 했을 때 냉큼 돈을 내주었으면 그 돈이 지금 남아 있을 것 같아? 그 돈 없어도 그 좋은 집에서 굶지 않고 학교를 졸업했잖아. 그리고 자립심과 생활력도 키웠고. 그게 얼만데... 그 어른들의 깊은 속도 모르고...” 명희와 철희는 그 노부부를 친부모처럼 생각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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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
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조광조와 정치 개혁의 드라마
조선 시대의 언로
조광조는 도학정치 사상의 구현을 위해서는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그 실례가 갖바치(피장)와의 교유였다. 갖바치는 가죽을 만진다는 뜻으로 '양수척' 혹은 '화척'이라고 불리는 백정의 부류를 뜻한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조선 시대의 지배계급인 사대부의 신분으로 갖바치와 교유하면서 도학정치 사상의 구현을 꿈꾸었다는 사실로도 조광조의 큰 인물됨을 알 수가 있다. 역사를 읽으면서 가정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터이지만, 만일 조광조가 그렇게 일찍 비극적인 종말을 맞지만 않았어도 그와 교유하였던 갖바치가 조정의 요직에 등용되었을 것이라는 설까지 있고 보면 조광조의 개혁의지가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 알 수가 있다. 조광조의 개혁의지가 중종 임금에게 전달되는 기회는 뜻밖으로 빨리 왔다. 그가 사간원 정언(정6품)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경연관을 겸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은 학문을 연마하고 경륜을 높이기 위해 경연을 열어야 하는데 경연은 열리는 시간에 따라 조강, 주강, 석강, 야대로 구분된다. 세종이나 성종과 같은 성군들은 경연에 나가서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침식보다 더 소중히 하였다. 경연관으로 발탁되어 조강이나 야대에 참석하게 되면 임금과의 직접대화가 가능하였기에 신하로서는 큰 영광이 아닐 수가 없고 또 임금의 신임도 얻을 수 가 있었으므로 경연관이 되는 것은 출세길을 보장받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에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조선왕조는 전제군주 시대로 구분되지만 언론의 자유가 거의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었다. 그것은 지금과 같이 신문이나 방송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연에서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밖에서는 상소문을 올릴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언관 혹은 간관으로 구성된 부처까지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헌부의 소임은 백관을 감찰하여 기강의 해이를 고발하고, 풍속의 문란을 감시하며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며, 부정과 비리를 근원적으로 발본하려는 사정기관으로 임금의 잘못도 직관할 수가 있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을 양사라고 하는 것은 기관명의 '첫'자를 딴 것이지만, 실상은 그 소임이 비슷하고 중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항용 이르기를 '양사의 관원들이 벌떼같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이는 임금의 잘못까지도 질타할 수 있는 직책이었기에 조정의 고위관직들에게 큰 잘못이 있다는 뜻이며 동시에 거기에 저질러진 어떠한 비리도 여지없이 처단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며, 또 그것은 언로의 완전한 소통을 보장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혁에 뜻을 두었던 조광조가 언관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현실의 일로 다가온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조광조는 언관으로서의 첫 임무를 직속상관인 대사간 이행과 대사헌 권민수의 파직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조광조의 언론관은 이러하였다.
언로가 통하고 막히는 것은 종사의 흥망과 가장 깊은 관계 위에 있다. 통하면 다스려지고 편안하며, 막히면 어지러워지고 망한다. 임금이 몸소 언로를 넓히기에 힘써서 위로는 공경대부, 백집사로부터 아래로는 누항, 시정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말하게 될 것이다 . 그러나 언책이 없으면 스스로 말을 극진하게 할 수가 없으므로 종래에 가서는 언로가 막혀 임금은 백성의 일에 어둡게 된다.
요즘의 일로 바꾸어 설명하면 검찰청의 하급관리가 검찰총장과 감사원장의 파면을 대통령의 면전에서 주장한 셈이다. 어찌 지금의 공직자들이 꿈엔들 상상할 수가 있겠는가. 직속상관의 파직을 요구하는, 그것도 언관의 우두머리격인 대사헌과 대사간의 파직을 직간하는 조광조의 뜻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조선 시대의 언로가 완벽하게 트여 있었음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훈구대신들의 오만과 독선에 시달리고 있던 젊은 지식인들은 조광조의 용기를 상찬하면서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훈구세력들은 조광조를 경원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개혁 세력으로 등장한 신진사류들 못지 않게 조광조에게 매료된 사람은 중종 임금이었다. 그는 조광조의 도학정치 사상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고, 자신의 치세에 그것을 실현하리라고 다짐하였다. "정암은 과인의 스승이로세." 중종 임금은 조광조의 강론을 들을 때마다 성군의 길이 열리고 있음을 완연하게 느낄 수가 있었기에 그와의 만남을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고, 조광조는 중종 임금의 신임을 한몸에 받으면서 '성왕지도'를 깨우치도록 충언을 거듭하였다. 그것은 요순의 시대를 재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리학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 그러므로 조광조는 '군자소인지론'을 열강하였다. 큰 간신은 충신 같고, 큰 탐관은 청백리 같다. 이 또한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뜻이지만 사람들을 가려쓰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에 감동한 중종 임금은 조광조를 한 달 사이에 네 번이나 승에 이르게 하였으니 파격의 승차가 아닐 수 없었다. 조광조가 자신의 개혁의지를 구체화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조광조가 도학정치 사상의 구현을 시도하여 성공한 첫 번째 쾌거는 정몽주의 위폐를 문묘(성균관)에 배향하는 일이었다. 성리학을 학통의 근본으로 삼기 위해서는 조선 성리학의 시조격인 정몽주의 위상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의 창업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던 포은 정몽주의 학덕과 상을 높이는 일에 성공한 조광조는 일약 신진사류들의 영웅으로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으로 성공한 것이 과거제도의 개혁이었다. 요즘 입시부정으로 천지가 떠들썩한 우리의 현실과도 어지간히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조선 시대의 과거제도가 비리의 온상이었기에 조광조의 복안은 설득력이 있었다. 한 국가의 경영을 떠맡을 인재의 선발방법으로 반나절 동안의 시문만으로 평가하여 정하는 것으로는 참된 인재를 선별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고, 또 과거가 비리의 온상이므로 이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니 각 고을의 수령방백들로 하여금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를 천거하게 하여 그들에게 시험을 보게 함으로써 이론과 실행을 겸비한 참된 인재를 가려 뽑을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제도는 이미 한나라 때에 시행한 바 있는 '현량방정과'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미 조광조의 개혁의지에 매료되어 있던 중종 임금이 이를 마다할 까닭이 있을까. 그렇게 해서 시행된 것이 '현량과'라는 과거제도였다. 이 획기적인 제도에 의해 새로운 인재가 등용되는 것은 당연하다. 현량과를 시행하는 것을 계기로 조광조는 다시 홍문관 부재학으로 승차하게 된다. 결국 조광조는 조지서의 사지로 관직에 나선지 3년이 채 못되어 당상관인 3품직에 서용된 것이었다. 이 승차가 얼마나 파격적인 당시의 사관들의 견해가 "중종실록"에 적혀 있을 정도다.
조광조는 소시부터 검칙청수하여 크게 이름을 날렸다. 처음에는 조행으로 성균관에서 천거되어 사지가 되었고, 얼마 안 가서 과거에 2등으로 뽑혀서 여러 번 청요한 벼슬을 지내다가 이때에 이르러 부제학의 직을 제수받게 된 것이다. 출사한지 30개월이 채 못되었으므로 사람들은 고금에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를 따르는 자가 날로 늘어났고, 주상도 그를 의중하였다. 그 사람됨이 청고하고 인물의 옳고 그름을 가려 개연히 세상을 바로잡고 풍속을 정하게 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으니, 공경 이하가 모두 외경하고 혹은 피하기를 원수처럼 하는 자도 있었다.
마지막 대목에 유념해야 한다. 조광조를 피하기를 원수처럼 하는 자가 있었다면 그들이 누구이겠는가. 자신들의 기득권이 박탈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수구 세력들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개혁은 적을 만들게 되고, 그 적을 다스리고서만이 성과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조광조는 이상적인 임금의 조건도 제시하였다.
임금의 덕은 공경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안에서 실천이 있은 뒤에라야 아랫사람들이 보고 감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일을 제도하고 만물에 응하기를 마치 거울과 같이 비고 저울처럼 공평할 것이며, 임금의 용색도 단정하고 엄하면 환관이나 궁첩이 스스로 가까이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종 임금에게 있어서 조광조의 존재는 크나큰 의지처나 다를 바가 없었다. 이때 중종 임금 춘추 30세, 타의에 의해 임금의 자리에 올라서 자신을 옹립한 기득권 세력의 눈치만 살피다가 조광조에 의해 왕도정치에 눈뜨게 되었으니 자신의 치세를 요순의 시대와 같은 선정의 시대로 만들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또 그것은 조광조의 도학정치 사상이 꽃피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조선왕조가 창업된 지 1백26년, 역대 어느 왕조에서 36세의 젊은 관원이 이 같은 영향력을 행사한 일이 있었던가. 그러므로 조광조의 존재는 신진사류들에게는 영웅이었고, 기득권 세력에게는 원수일 수밖에 없었다. 조광조는 중종 임금의 신임을 등에 업고 보다 본격적인 개혁작업에 착수한다. 이때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김식, 김준. 김정. 유인숙. 이청. 윤인필 . 박세훈 등은 한결같이 유림을 대표하는 젊은 사류들로 모두 요직에 올라 있었다. 이들은 소격서의 혁파를 주장하고 나섰다. 소격서는 중국의 도학사상에서 유래된 도교의 일월성신을 구상화한 성제단을 세우고 거기에 제사를 지내는 업무를 관장하는 곳이다. 겉으로 보아서는 미신타파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비빈(왕비나 후궁)들의 낭비를 근절하는 개혁의 일환이었다. 비빈들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행운을 비는 풍조는 백성들에게까지 전파되어 요행을 바라는 사행심을 부추기는 지경이었지만, 중종 임금은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다. 성군이라고 불리는 세종이나 성종도 소격서를 혁파하지 않았다는 것이 반대하는 명분이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비빈들과 종친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들의 압력을 받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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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drama)
고대 희랍에서는 주신 '바카스'의 제례 때 행사의 하나로 희극 또는 비극을 경연했었다. 그로 말미암아 트래지디(비극), 코메디(희극) 등 갖가지 연극 용어가 전해지고 있으며 드라마 역시 그 중의 하나로 '연출되는 것'이란 뜻이다. 지금은 연극 전반을 가리키지만, 본래는 종교적 사회적 리크리에이션으로 부족의 기분을 일신하고 새로운 활력을 부여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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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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