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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37 호
단기 4340. 2. 17 (음력 12.30)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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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원형의 결·무늬 그대로’ 소월·백석 시집 나왔다 |
원형에 더 가까워진 김소월, 백석 시집이 나란히 출간됐다.
‘원본 김소월시집’(김용직 주해·깊은샘)은 김소월(1902~34)이 1925년 처음 펴낸 시집 ‘진달래꽃’(매문사 판) 초간본 수록작 130여편을 원본 그대로 수록했다. 또 소월 사후 스승인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 가운데 시집 ‘진달래꽃’에 없는 12편과 두 시집 모두에서 빠진 시 ‘옷과 밥과 자유’ ‘나무리벌노래’도 함께 실었다.
주해자인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소월이 시집 ‘진달래꽃’ 초간본을 낼 때는 맞춤법통일안이 나오기 전이었는데 그후 구식철자가 맞춤법통일안에 따라 수정되면서 작품의 원형마저 훼손된 경우가 많았다”며 “김억이 편집한 ‘소월시집’과 ‘소월시초’(숭문사 판)는 시인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 작품이 변형, 훼손된 사례”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원래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첫줄)라는 시구가 나중 시집에서 ‘돗는 달을’로 바뀐 것을 들었다.
그는 또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로 시작되는 시 ‘초혼’이 그동안 김소월의 여러 애정시 가운데 하나로 분류됐으나, 이 시 속의 사랑하는 사람이 국가와 민족의 의인화된 형태라는 해석도 내놓았다.
‘정본 백석 시집’(고형진 엮음·문학동네)은 백석(1912~95) 시의 원본에서 특유의 방언과 고어는 살리고 맞춤법 규정에 위배된 표기와 오·탈자만 바로잡은 것이다. 식민지시대 활동했던 대다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백석 역시 맞춤법 규정을 충분히 수용하지 않아 표기의 혼란이 많았고 나중에 이를 바로잡는 과정에서 원형이 훼손됐다.
해방 이후 북한에 살았던 식민지시대 시인 백석을 1980년대 후반 처음 발굴, 소개했던 고형진 고려대 교수는 이번 책에서 백석 시의 감상과 분석을 까다롭게 만드는 평안도 방언과 조어를 상세히 풀이했으며 그가 남긴 아름다운 토속어와 방언을 최대한 살리는 데 주력했다. 또 백석의 유일한 시집 ‘사슴’ 원본과 그의 시가 실린 원본 잡지를 찾아내 원문을 함께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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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눈에는 눈으로 란 옛 법을 따르면 우리는 모두 장님이 되고 말 것이다. / 마틴 루터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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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二十六章 (노자 - 도덕경 : 제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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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爲輕根, 靜爲躁君. 是以聖人. 終日行, 不離輜重, 雖有榮觀, 燕處超然. 柰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 輕則失本, 躁則失君.
중위경근, 정위조군. 시이성인. 종일행, 불리치중, 수유영관, 연처초연. 내하만승지주, 이이신경천하. 경즉실본, 조즉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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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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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여섯째 장
직역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되고, 고요한 것은 조급한 것의 주인이 된다. 이러한 까닭에 성인은 종일 다녀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않는다. 비록 영화로운 모습을 보아도 편안히 처하며 초연해 있다. 어찌 일만 수레의 주인으로 하늘 아래 몸을 가벼이 하겠는가. 가벼운 즉 근본을 잃고, 조급한즉 주인 됨을 잃는다.
해석
무거운 것은 밑으로 내려가니 당연히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된다.
일을 행함에 조급히 하면 되는 일이 없다. 따라서 침착한 마음을 가지고 일에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까닭에 성인은 매사에 무겁게 고요히 일을 하는 것이다. 영화로운 모습에 마음이 들뜨면 그 근본을 잃는 것이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려한 유혹을 보아도 가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다. 일만 수레의 주인이라는 말은 천자를 가리킨다. 옛날 중국에서는 천자는 일만 수레, 여기서 수레는 고대 전차를 가리킨다. 일만대의 전차를 움직일 재력과 힘이 있었다. 전차 일만대면 움직이는 병력이 수십만이다. 그 아래 제후는 천승제후 백승제후라고 했다. 만승은 천자의 존엄을 나타낸다.
스스로 주인이 되면 천자와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런 사람이 함부로 몸을 굴리겠는가. 천하가 자신의 땅인데, 자신의 존엄성을 잃고 가볍게 움직이면 자신의 영역을 잃고, 조급히 행동하면 고요한 사람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 스스로 주인 됨을 잃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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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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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밑바닥이 되고, 안정된 것은 움직여 소리내는 것의 임금이 된다. 그러므로 성인인 왕자는 하루종일 가벼운 수레를 타고 여행하더라도 무거운 짐수레를 버리고 안정된 마음으로 초연히 있으면서 구애받지 않는다. 어찌 만승천자의 몸으로 천하 백성들 위에서 자신의 몸을 가볍게 다룰 수 있겠는가? 가벼이 행동하면 밑바탕을 잃게 되고 조급히 움직이면 군주의 자리를 상실하게 된다.
주
조: 조급하게 움직이는 것, 거동이 침착하지 못하고 성급한 것,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 성인: 여기서는 탁월한 군주를 가리킴. 치중: 여행, 행군시에 식량 등의 필수품을 실은 짐수레. 영관: 화려하고 볼 만한 구경거리. 연처: 편안히 있는 것. 초연: 무관심한 태도, 구애되지 않는 모습. 만승지주: 전차 1만대를 소유하고 있는 임금 즉 천자를 지칭한 것. 수레 한 채를 1승이라 함.
해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근본이 되고 고요함은 시끄러움의 으뜸이 된다. 처세에 있어서도 경거 망동하거나 성급하게 움직이면 침착하고 신중한 사람에게 쉽게 제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몸가짐과 행동은 언제나 무겁고 신중하고 고요하게 가져야 한다. 성급하거나 가벼이 움직인다는 것은 침착하지 못한다는 것이요, 그것은 그의 마음이 무엇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임금은 여행이나 행군할 때 속도가 느린 무거운 짐수레를 중심으로 하여 가기 때문에가볍게 먼저 가고자 하지 않는다. 보급품이 충실하여야 아무런 걱정 없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비록 화려하고 볼만한 구경거리가 있다더라도 초연히 있으면서 설레거나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천자는 만백성의 으뜸이다. 그러므로 그의 몸가짐은 신중하고 행위는 백성의 모범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몸가짐을 함부로 가볍게 하면서 날뛰다가 임금의 소중한 지위마저 상실하는 어리석은 군주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노자는 이 장에서 사람의 처세 특히 백성의 대표자인 임금의 몸가짐과 행위는 반드시 신중하고 침착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또한 우리가 일을 처리할 때도 지엽적인 것, 말단적인 것에 구애되거나 현혹되지 말고 밑바탕이 되는 근본적인 것에 우선 치중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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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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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보령의 절터에서 사라진 비운의 오층석탑
일제 초기인 1910년대 중엽에 인천 부회의원(시의원)으로 고노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그도 석탑을 탐내어 충남 보령지방에서 오층석탑 하나를 지능적인 수법으로 불법반출해서 인천의 자기집 마당에 놓고 있었다. 그는 보령군 대천면 남곡리 당동의 이름 모를 폐사지에서 있던 오층석탑을 반출해 오는 방법으로서 한 사람의 조선인을 돈으로 매수하고, 그가 절터의 땅임자에게 가서 석탑을 사는 간접적인 간계를 썼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의 매수자로부터 석탑을 말썽 없이 다시 사는 형식으로 무난히 인천까지 실어 왔다. 그러나 총독부의 고적조사과가 그 사실을 알고 보령군수에게 진상을 조사하도록 지시하자 고노의 완벽했던 석탑 반출음모는 즉각 탄로가 나고 말았다. 보령군수의 현지 진상보고와 인천의 이전지 확인을 토대로 총독부 고적조사과가 작성한 조사서가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석탑을 판 사람이 그것은 예전부터 자기집의 소유물이었다고 주장하나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것이 조선의 풍속은 개인집에 탑을 세우는 일이란 없었기 때문임. 설사 집을 지은 자리가 예전의 절터여서 석탑이나 석불 같은 것이 있었다 해도 조선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음. 한데 그것을 매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근래의 생긴 폐습이며, 그들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팔아먹는다는 점을 익히 알면서도 감히 그런 짓을 하는 자들임. 이번 사건만 해도 고노가 직접 그것을 사지 않고, 표면상으로는 다른 조선인에게 일단 석탑을 팔게 한 후에 다시 자기 소유로 만들었는데, 매각인에게 그럴 권리가 없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음. 따라서 이번 사건의 석탑은 그들의 매매를 취소시켜야 하며, 인천의 고노 조사관을 보내 그럴 필요가 있다면 서울의 박물관으로 가져오는 것이 좋을 듯함."(1916년)
이 조사서의 주목할 만한 마지막 대목인 '불법적인 매매의 취소와 경우에 따라 인천에서의 석탑 압수' 건의가 총독부에 의해 실행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불법적인 일본인 매수자 고노는 인천의 부회의원쯤 되던 신분이어서 무슨 수를 썼던 것 같다. 비운의 오층석탑은 보령의 원위치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서울의 박물관으로도 오지 않았다. 인천항에서 재빨리 일본 본토로 빼돌렸는지, 그후에 인천에서 그 석탑을 조사했거나 확인한 전문가가 없다. 반면 해방 후, 과거에 고노가 살았던 인천 송학동의 별장에서는 많이 깨지고 형태나 연대도 신통치 않은 삼층석탑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그것도 충청도 어디선가 가져온 것이라는 막연한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령에서 반출했던 문제의 오층석탑으로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도 3층과 5층이라는 차이가 있다. 해방 후까지 남아 있던 신통찮은 삼층석탑은 현재 인천공보관 앞으로 옮겨져 있다. 앞의 총독부 조사서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첨가돼 있다. 인천의 고노가 충남 보령군 대천면의 폐사지에서 오층석탑을 반출하던 무렵에 같은 보령군의 미산면 성주리에 위치하는 성주사터의 석탑에도 반출음모자의 손길이 뻗치고 있었다는 내막이다. 그것은 인천으로 불법반출된 석탑 사건을 조사하는 중에 잡힌 또 다른 음모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음모는 진행 중에 포착, 제지되었고 성주사 탑들은 위기일발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 성주사터의 오층석탑은 보물 제19호로, 그리고 삼층석탑 둘은 보물 제20호와 제47호로 지정돼 있다.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다. 석탑 외에도 이 성주사터에는 신라 말엽의 대학자인 최치원이 비문을 쓴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가 있어 국보 제8호로 지정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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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철학에 이르는 길 - 강영계
제8장 종교에 관한 명상
1.세계의 근원
스위스의 바젤에서 유럽 니체 철학회가 열리고 있을 때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교육학교수 뵘이 연구 발표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요사이 학생들은 수업에 성의가 없으며 가치관도 부족하고 미래에 대한 설계도 없다. 그러므로 교육하는 입장에 서 있는 교수들은 보다 더 강렬한 성의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뵘의 발표가 끝난 후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그에게 했다. "물론 가르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돌맹이 한 개, 한 포기의 잎새에도 무궁무진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요사이 학생들이 왜 그러한지를 우리가 먼저 알고 배우면서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의 이 말에는 다분히 동양적인 색채가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샤비니즘이든 토테미즘이든에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서구의 분석적인 과학 문명이 판을 치는 지금 어쩌면 우리들에게는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욕구가 더 강한 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조상들은 자연을 고향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산과 강과 바다를 혹은 외경의 마음으로 혹은 친근한 마음으로 숭배하고 돌보아왔다. 인간은 누구나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세계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묻기 마련이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주변에서 산신령을 믿거나 용왕님을 믿는 모습을 드물지 않게 살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갑작스런 일을 당했거나 당황했을 때 "하느님 맙소사!"라고 소리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재난을 당했을 때 "하느님 우리 아들의 병을 꼭 낫게 해주십시요"라고 빈다. 이 경우 하느님은 #1직접적으로 하늘을 의미하기도 하며 #2간접적으로는 세계 근원을 뜻한다. 고대인들에게는 하늘이 아마도 외경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해와 달과 구름이 있으며 바람을 일으켜 사계절이 있게 해주는 하늘이야말로 모든 것을 있게끔 하고 삼라만상을 좌우하는 세계의 근원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로 인간의 의식에는 보이는 현상으로서의 하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 근원이 삶을 좌우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맙소사!" 라든가 "하느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할 때의 하느님은 눈에 보이는 저 높은 하늘보다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근원을 뜻할 것이다. 고대의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현상을 신비롭게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자연현상의 근원 내지 원인이 무엇인지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희랍이나 인도, 중국 등지에서는 삼라만상을 이루는 요소들을 물, 불, 흙, 공기 등이라고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물이 자연 세계를 만드는 근원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이든 죽은 것이든 모두 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디에나 흔한 것이 물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공기 과연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공기가희박해지면 불이 되고 반대로 공기가 농축되면 수증기, 물, 흙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후에는 물, 불, 흙, 공기의 네 요소가 만물을 만드는 원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구체적인 감각적 앎으로부터 추상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하였다. 서양에서는 우주 만물을 잊게 해주는 근원을 정신이라고 보는 견해가 생겼으며 중국에서는 태극이나 도를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눈에 보이는 원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을 추구하려는 합리적인 생각을 동반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현상들을 서로서로 의존하며 존재하는 존재자로 보게 되고 존재자들을 있게 해 주는 원인을 존재 자체 또는 존재로 보게 되었다. 서로서로 의존하는 것들이 존재자 임에 비하여 모든 존재자들의 원인인 존재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므로 실체라고도 일컬어진다. 세계 근원으로서의 정신이나 이성 또는 태극이나 도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쿠자누스가 말하는 미인의 비유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어떤 장소에 아리따운 미녀가 있고 그녀의 주변에 수없이 많은 젊은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미녀는 어떤 남자에게도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남성들은 누구든지 혹시나 그 미녀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른지 또는 어떻게 하면 그녀의 사랑을 독점할지를 곰곰이 생각하며 들뜬 가슴으로 동요하게 될 것이다. 미인의 젊은 남성들을 전혀 움직이게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남성들은 모두가 크게 동요한다. 이 예를 보면 독립적인 실체와 실체에 의해서만 현상 세계에 있을 수 있는 존재자들의 의미 및 관계를 알 수 있다. 존재와 존재자의 문제를 탐구하는 분야를 넓게는 형이상학이라고 하며 좁게는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구체적으로 현상 세계에 있는 존재자들의 근원인존재를 추상적 사고에 의해서 탐구하고자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계근원을 절대자로 신앙하는 경향을 본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이 경우 세계근원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으로 전환한다. 존재론적인 존재 자체는 종교론적인 신과 동일한 것으로 그것은 바로 세계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들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의 대상이다. 존재론적인 존재는 추상적 사고의 대상이며 종교적 신은 신앙의 대상이다. 다음절에서 우리는 종교의 일반적인 특성을 살피면서 특히 종교 문제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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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멍텅구리
본뜻 : '멍텅구리'는 바닷물고기 이름이다. 이 고기는 못생기고 동작이 느려서 아무리 위급한 때라도 그 위험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고 한다.
바뀐 뜻 : 판단력이 없어서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꿔 쓸 수 있는 말로는 '멍청이'가 있다. 모양은 없이 바보처럼 분량만 많이 들어가는 병을 가리키기도 한다.
메밀국수(모밀국수)
본뜻 : 찹쌀보다 차진 맛이 덜한 쌀을 멥쌀이라고 하듯이, 찰기가 있는 일반 밀과는 달리 차지지 않고 금방 풀어지는 밀을 메밀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별식으로 즐겨 먹는 메밀 국수를 모밀국수라고도 하는데 모밀은 '메밀'의 함경도 사투리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되는 이 곡식을 강원도나 함경도 지방에서 주로 먹었기 때문에 함경도 지방의 사투리인 '모밀'을 쓰게 된 것 같다.
바뀐 뜻 : 이 말은 뜻이 바뀐 것이 아니라 '메밀' '모밀' 두 단어가 혼동되어 쓰이기에 여기 실었다. '메밀'이 표준말이므로 '메밀국수'로 쓰고 말해야 한다
무꾸리
본뜻 : 무당이나 판수에게 앞일의 길흉을 알아보는 일을 무꾸리라 한다. 굿을 할 때 각각의 마당을 부정거리, 칠성 제석거리, 대감거리, 성주거리, 장군거리 등으로 부르는데, 무꾸리는 '묻는+거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바뀐 뜻 : 점치는 일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무당이나 판수처럼 신을 모시는 사람에게 길흉을 알아보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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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5. 나 여기에 서 있다
군주는 여우와 사자같이
군주에게 중요한 것은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의 사랑은 받는 것이다. 예로부터 어진 왕은 백성으로부터 아버지처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16세기 초반의 피렌체인 마키아벨리(Machiavelli, 1469-1527)는 군주에게 정반대의 교훈을 말한다. 사자와 같이 큰 소리를 내면서 발톱과 송곳니로 상대방을 압도하라. 여우와 같이 간교한 지혜를 갖고, 어떻게 계략의 올가미를 씌울까 노려보라. 원래 인간이 모두 선하다면 법률만으로도 통치할 수 있다. 그러나 악한 인간이 많고 나라 밖에서는 호시탐탐 이리가 노리고 있다. 군주는 이와 같은 상황에서 사자와 여우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대정치가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는가? 이 문제는 그가 살았던 시대, 그리고 그의 생애와 관련지어 설명되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혼란스러운 정치적 분열을 경험했다. 피렌체, 베네치아, 교황령, 나폴리, 밀라노 등이 저마다 독립국가로서 이탈리아의 패권을 노렸고, 또 피렌체에서는 권력을 장악하려는 암투가 벌어졌다. 정치와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추악함을 그는 일찍이 간파한 것이다. 자신이 피렌체 정부에서 외교와 군사 분야의 공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1512년 정변으로 공직에서 쫓겨나 실의에 빠졌고, 산장에 처박혀 은거하면서 저술에 몰두했다. 이때 그 유명한 "군주론(Il Principe, 1513)"이 나왔다. 그는 훌륭한 통치자의 자질과 통치기술을 논하였으며 이를 논함에 있어 종래의 종교나 도덕의 규범을 무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정치학을 종교나 도덕과는 관계없는 하나의 독자적인 분야로 독립시키고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 즉 마키아벨리즘의 창시자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권모술수와 기만, 모략, 암살, 투옥 등의 악덕을 찬양한 것을 아니었다. 지배자에게 요청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탁월한 통치능력과 재능이며, 이러한 덕을 소유한 지배자에게는 필요하다면 권모술수와 악덕조차도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을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가에 바쳤다. 피렌체의 군주였던 메디치가는 르네상스 문화를 고무시키고 장려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올 즈음에는 이미 메디치가가 세력을 잃은 상태였다. 마키아벨리는 이 메디치가에서 유능한 군주가 나와 이탈리아를 통일하기를 기대했다. 그런 기대를 배경으로 이 책을 썼다. '여우와 사자같이'란 "군주론"의 한 구절이다. 인간과 정치의 속성을 간파한 마키아벨리의 통찰력이 엿보이는 말이다. 그후 마키아벨리즘은 권모술수주의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던진 게 사실이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국가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안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는 식으로 극단적인 해석을 하고, 그로써 자신의 권력욕을 정당화한 인물들도 많이 나왔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그렇게만 받아들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16세기 이탈리아의 정치적 분열과 외세의 간섭을 통탄한 정치사상가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이지 개인의 권력욕을 정당화시켜 주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영국, 프랑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과 같은 주변 강대국들이 이탈리아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나온 말이었다. 마키아벨리가 그렇게도 걱정했던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도 계속 정치적 분열과 혼란을 겪다가 19세기 중엽 이후에야 통일국가가 되었다. 그때까지 이탈리아는 주변 강대국의 지배와 간섭에 시달렸으니 마키아벨리의 강력한 군주론은 이탈리아의 장래에 대한 우울한 전망을 내포한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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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마음을 열면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 안의정
브루클린 브리지
자유의 여신상이 민주주의의 상징이라면, 그리고 뉴욕 맨해튼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경제력의 과시라 한다면,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잇는 `브루클린 브리지`는 절대 좌절하지 않는 미국 정신의 결정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다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에 건설된 이래 지금까지 여전히 수많은 교통량을 소화해 내고 있습니다. 훨씬 세련되고 튼튼한 다리들을 제치고 브루클린 브리지가 미국인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그 다리에 미국혼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1841년, 쇠줄을 연결하여 다리를 건설하는 방법이 처음 선보인 후, 존 로블링이라는 사람은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쇠줄 다리로 연결 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당시에는 바람과 계절의 기후 변화를 견디면서 동시에 전장 1천5백95피트나 되는 다리의 중력을 위에서 잡아당겨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모해 보이는 그의 계획을 만류하고 나섰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 거의 다 그러하듯, 인류에 크게 헌신한 사람들이 거의 다 그러하듯, 로블링은 자신감에 넘쳐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웃음이 귀에 들어올 틈이 없을 만치 그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1869년, 시공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에게 큰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연락선이 그가 서 있던 말뚝 재목더미를 치는 커다란 사고가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발목이 부러지고 여러 개의 발가락이 절단되는 큰 부상을 입은 그는 결국 파상풍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꿈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워싱턴이라는, 아버지의 고집을 꼭 닮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럽에서 잠수함을 이용하여 물 속에다 기초를 다지는 방법을 습득했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브루클린 브리지 건설의 배턴을 이어받은 그는 수석 엔지니어가 되어 교각 건설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워싱턴 역시 아버지와 다름없이 미친 사람처럼 일에 달라붙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로블링 집안이 말도 안 되는 다리 건설로 망할 것이라며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우려가 그대로 들어맞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다리의 완성을 시샘하는 악한 세력이 그를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1872년, 압축 공기실에서 무려 12시간이나 일한 그가 정신을 잃은 채 밖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그의 건강은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의사는 살고 싶으면 일에서 손을 떼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미 그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전에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에게 몰아닥친 무서운 시련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러한 역경이야말로 브루클린 브리지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다리가 될 거란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역사에 오랫동안 명작으로 남는 문학,예술,건축,음악 작품 등은 반드시 역경을 수반한다고 믿고, 거기에서 오히려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몸이 자유롭지 못한 그가 다리 건설을 감독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브루클린에 있는 자신의 집에 앉아, 창문을 통해 망원경으로 일의 진척상황을 살피면서 공사를 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을 할 수 없어서 암호를 개발하여 관계자들과 의사 소통을 했습니다. 공사는 무척이나 더뎠지만, 오히려 일이 꼼꼼하게 진행되는 이점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공사 감독을 무려 11년간이나 계속했습니다. 마침내 아버지의 환상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세상은 온통 축하 분위기에 싸여 폭죽까지 터뜨렸지만, 그는 미소짓지 않았습니다. 2대에 걸쳐 온몸과 혼을 던져 완성한 다리를 집에서 바라보며, 소리내지 않고 울음을 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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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조광조와 정치 개혁의 드라마
범죄와 재난
역사를 일러 범죄와 재난의 기록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고, 역사를 심판이자 법정이라고 정의한 사람도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타고르의 공언의 탁견이 아닐 수가 없다. 인간의 역사는 학대받은 자의 승리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당대의 학대받은 실패가 죽어서 그 용맹을 떨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경우 정암 조광조가 그 같은 역사의 비정함과 준엄함을 기막히게 잘 입증하고 있다. 조광조는 개혁을 주도하였다가 목숨을 잃은 실패자의 한 사람이지만, 아이러닉하게도 그는 개혁주도 세력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또 개혁의지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개혁하고자 했던 내용은 대단히 중하고 시급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조광조의 개혁의지를 그토록 참담하게 짓밟아 버렸는가. 말할 것도 없이 기득권을 지키려고 몸부림쳤던 수구세력들이었다. 그들은 조광조의 목숨을 앗아내고서야 웃을 수가 있었다. 부패로만 살찌울 수가 있었던 기득권을 지켜갈 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혁은 어떠한 경우에도 기득권 세력의 명리와 실익을 응징하고서만이 성공을 거둘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른바 기득권층으로 분류되는 특정집단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장구한 세월 동안의 구조적인 비리와 부조리가 절대권력의 비호를 받으면 마치 암세포처럼 전신으로 번져가는 것이다. 이 기득권층의 병통이 깊어지면 도덕과 양식이 무너지는 양상이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된다. 조광조가 살았던 시대도 그러했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도 또한 그러하다. 문민정부의 대통령이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여 기득권을 지키려 는 수구세력과의 투쟁에서 완승하고서만이 그 성사를 장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앞에서 누누이 지적한 바와 같다. 역사 앞에서는 참으로 송구한 노릇이지만, 우리는 군사문화 혹은 군사독재로 일컬어지는 그 불행했던 시대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냉정히 뒤돌아보아야 한다.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정치나 정치인 주변만을 질타하고 정비한다 해서 성공하는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경제도 문화도, 심지어 사회의 모든 현상이 거기에 동조하였기에 총체적인 부정과 부패현상이 일반화 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대명사나 다름이 없는 대학의 일부 교수들은 유신이나 5.16 의 당위성을 찬양하는 글을 쓰고 그것이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 등재된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고, 신문과 방송은 군부독재가 연출하는 갖가지 이벤트 등을 앞장서서 찬양, 옹호해 주었으며, 때로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정계(유정회 의원으로, 또다른 지원을 받으면서)에 진출한 사실도 부정할 수가 없겠고, 지금도 웬만한 개인의 부정은 이름이 아닌 그들만이 아는 이니셜(Y씨, K의원 등)로 적어서 독자들을 우롱하고 있지를 않는가. 또 재벌들은 공장을 짓기에 앞서서 호화로운 영빈관부터 먼저 지어야 했으며, 거기에 언제 올지도 모르는 대통령의 방을 거창하게 꾸며 놓고는 어떻게 든 '각하'를 모시기에 혈안이 되었던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나는 '역사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역사는 시민의식을 거느리고 흘러왔고 또 흘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는 기득권 세력의 서식처인 정치 주변의 도덕적인 붕괴를 철저하게 진단하고 개선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거침없이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이지만, 비리로 만연된 우리의 주변을 검증하면서 자정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조국이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나 주권을 회복한 지도 어언 반세기가 흘렀다. 그 동안 공화국 정부의 부침만도 여섯 차례나 경험했지만, 정권의 정통성 시비가 끊일 날이 없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죄되어서 마땅한 친일 주구들이 권력의 핵심으로 다시 군림하면서 그들이 곧 기득권 세력으로 둔갑하였기에 자신들이 저지른 사고와 그러한 현실은 일제의 행각, 일제의 상식을 고스란히 이어지게 하였다. 일제의 잔재라는 어휘가 광복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라면 절대권력의 비호가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그러한 맥락으로 이승만 정부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 치하의 연장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며, 4월 학생혁명에 이은 장면 정권의 출현과 몰락도 역사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필연일 수밖에 없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세력들의 준동이 발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16 군사 쿠데타의 주역들이 부정과 부패의 척결을 혁명의 명분으로 내세웠다면 그때 이미 기득권 세력이 집단화, 조직화되어 구조적인 비리가 만연되어 있었음을 입증하고 남자만, 그로부터 유신체제로 이어지는 군사문화는 비전문가들의 오만과 독선으로 모든 공직자들의 창의력을 박탈하였고, 중화학공업의 육성이라는 미명하에 대형 부조리와 부패를 만연하게 하면서 그것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게 함으로써 부정과 비리를 척결하겠다고 소리 높이 외치던 쿠데타의 주역들이 어느 사이인가 기득권을 수호해야 하는 세력으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12,12로 정권을 장악했던 소위 신군부의 수괴들은 표면적으로는 부정과 부패의 척결을 내세웠던 5.16의 주역들과 그들과 손을 잡았던 기득권 세력들을 부패의 집단으로 몰아붙이면서도 앞다투어 그들보다 더한 부패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가, 마침내 그들 스스로 법정에 서야 하는 수모를 자청하였다. 역사가 빚어내는 반복의 드라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느 한 곳도 성한 데가 없다는 오늘의 암울한 세태는 바로 그러한 권력의 주변에서 권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뿌리내렸고, 그것을 토양으로 거대한 비리의 숲을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구조적인 비리와 병폐의 치유가 논의되는 시점에서 조광조의 개혁의지와 비극적인 종말을 연관지어서 생각해 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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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에게 진주
신약성경 마태복음 7장 6절에 보면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들에게 던지지 말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되돌아서 너희를 물어 뜯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즉 진가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고귀한 것을 주어도 무의미하다는 뜻. 돼지는 구약시대부터 부정한 동물이라 하여 식용으로 하는 것 조차 금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 (잠언11장 장22절) 혹은 '돼지는 몸을 씻고 나서 다시 진창에 뒹군다' (베드로 후 2장 22절)하는 등 돼지에 대한 모멸감이 강하고 최하급의 동물로 다루고 있다. 우리 나라의 속담 '개에게 편자'도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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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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